2020년 8월 28일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2020년 8월 28일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354년 북아프리카 누미디아의 타가스테(오늘의 알제리의 수크아라스)에서 모니카 성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을 즐기는 가운데 마니교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 모니카 성녀의 끊임없는 기도와 이탈리아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오 주교의 영향으로 회개하고 입교하였다. 391년에 사제가 된 그는 5년 뒤 히포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아우구스티노 주교는 이단을 물리치며 교회를 수호하는 데 일생을 바치는 가운데 참회의 자서전 「고백록」 등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430년에 선종한 그는 중세 초기부터 ‘교회 학자’로 존경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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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련한 처녀들은 등잔은 가지고 있었으나
기름은 준비하지 않았다.
한편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잔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마태오 25,1-13)
The foolish ones, when taking their lamps,
brought no oil with them,
but the wise brought flasks of oil with their lamp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기석신부-
슬기로움과 어리석음의 대비는 예수님의 여러 비유에 나타나는 전형적 형식입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이 그렇고(마태 7,24-27 참조), 자신을 위해서만 재화를 모으던 부자가 어리석은 사람의 예였으며(루카 12,16-21 참조), 영리하여 칭찬받는 약은 집사는 반대로 슬기로운 사람의 예였습니다(루카 16,1-8 참조).
오늘의 복음인 ‘열 처녀의 비유’도 슬기로움과 어리석음의 대비가 담겨 있습니다. 처녀 열 명이 신랑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리석은 처녀 다섯 명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준비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슬기로운 처녀 다섯 명은 등과 함께 기름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랑이 오는 시간이 지체되면서 처녀들은 졸다가 그만 잠이 들었습니다. 한밤중에 신랑이 온다는 외침이 들립니다.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지만 미리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어리석은 처녀들은 뒤늦게 기름을 사러 가고, 이미 신랑은 도착하고 맙니다. 결국 준비하고 있던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처녀들은 문이 닫혀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비유 속 인물들이 더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신랑은 세상의 심판자로 오시는 예수님이시고, 신랑의 도착이 지체되는 것은 ‘그 날과 그 시간’을 알 수 없는 종말의 지연입니다. 열 처녀는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교회 공동체를 뜻하고, 기름은 마땅히 해야 할 선행이며, 어리석은 처녀들에 대한 거부는 심판을 뜻합니다.
따라서 슬기로움과 어리석음의 대비를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교회 공동체 구성원인 우리에게 깨어 준비할 것을 경고하시고, 일상의 수고로움에 대한 위로와 혼인 잔치에 들어갈 구원의 약속을 주십니다. 마땅히 깨어 준비하는 수고로움은 우리의 슬기로움에 있습니다. 곧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들은 대로 실행하는 것이 믿는 이의 슬기로움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느 청년에게 고용 불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회사에서 요즘 어렵다고 정리해고를 한다고 하는데, 자신이 그 대상이 되지 않을까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청년에게 “열심히 살았으면 정리대상에서 제외되겠지. 너무 걱정하지 마라.”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걱정이 한가득입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이런 질문을 청년에게 했습니다.
“네가 만약 직원을 정리해야 하는 자리에 있다면 어떤 직원을 정리하고, 누구는 남겨둘까?”
경쟁력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저 열심히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경쟁력이 있는 사람의 공통점은 자신이 하는 일을 좋아하며, 그래서 열정이 넘치는 사람입니다. 열정이 없는 순간 경쟁력이 떨어져서 정리대상이 될 수밖에 없지요.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싶다고 말합니다. 하느님 곁을 떠나지 않고 꼭 붙어서 살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느님과 함께 하는 것을 좋아해야 하며, 이로써 열정이 넘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많은 성인 성녀의 모습에서 우리는 쉽게 이 열정을 볼 수 있었기에, 하느님과 함께 하는 유일한 방법임을 깨닫습니다.
주님께서는 열 처녀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슬기로운 처녀는 기름을 잘 준비하고 있었고, 어리석은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지요. 그러자 신랑이 갑작스럽게 찾아왔을 때 누가 혼인 잔치에 들어가겠냐는 것입니다.
기름을 준비하는 모습이 이 세상 안에서 우리가 갖추어야 하는 열정입니다. 열정이 있기에 신랑이신 주님과 함께할 그날을 위해 열심히 준비할 수가 있었고, 그 결과 혼인 잔치에 영광스럽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랑이 오려면 아직도 멀었어.’라는 안일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모습 안에서는 어떤 열정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쉽고 편안한 것만을 추구하는 이 세상의 모습인 것이지요. 이 열정 없음으로 인해 그들은 주인으로부터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라는 말과 함께 외면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습니까? 항상 뒤로만 미루고 있다면, 이 세상 것에 대한 욕심과 이기심만을 추구하고 있다면, 남보다는 나만을 먼저 생각하고 있다면 열정은 자연스럽게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나는 낙심하지 않는다. 모든 잘못된 시도는 전진을 위한 또다른 발걸음이니까(토마스 에디슨).
가장 중요한 사랑
애플의 창업자이며 ‘아이폰’ 하면 생각나는 사람. 맞습니다. ‘스티브 잡스’입니다. 그는 췌장암으로 이 세상을 안타깝게 떠나고 말았지요. 그런데 죽음을 앞두고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엄청난 돈을 벌었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평생 먹고 사는데 부족하지 않을 만큼이면 충분했다. 나머지 인생은 다른 가치 있는 일을 하면서 살았어야 했다. 특히 부부 사랑과 이웃 사랑에 힘써라.”
스티브 잡스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가서야 자신이 온 힘을 기울여 애썼던 모든 것이 별 것 아니었음을 깨닫는다고 하지요. 부부 사랑과 이웃 사랑을 우리는 언제든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늘 뒤로 미룹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이 먼저였습니다. 그래야 마지막 순간에 후회하지 않게 됩니다.
사랑의 계명을 강조하시고, 사랑으로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으셨던 주님의 모범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범을 따라가는 삶이야말로 후회하지 않는 삶이고 가장 멋진 삶이 될 것입니다.
감정은 내가 사는 지구다
-전삼용신부-
인류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는 지구입니다. 지구에서 생명의 양식과 에너지를 얻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욕심이 통제되지 않으면 인간이 지구에 가장 위험한 존재가 됩니다. 그러면 지구도 자신이 살려고 코로나바이러스와 같은 것들을 만들어냅니다. 인간이 지구를 통제하지 못하면 지구가 인간을 통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지구와 같은 존재가 있습니다. 마음입니다. 혹은 마음에서 나오는 기분, 즉 감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기분이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마치 지구처럼 감정이 인간을 통제하게 됩니다. 분노 조절 장애와 같은 것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사냥꾼들이 곰을 잡는 방법 중에 이런 것이 있다고 합니다. 곰이 잘 다니는 길목에 커다란 돌덩이를 매달아 놓습니다. 그러면 그곳을 지나던 곰이 돌덩이에 머리를 부딪치게 됩니다. 머리를 부딪친 곰은 자기가 가는 길을 막은 돌에 화가 나서 그 돌덩이를 이마로 들이받습니다. 그러면 돌덩이는 저만큼 밀려갔다가 다시 곰을 향하여 밀려와 곰을 들이받습니다. 그러다 더 많이 화가 난 곰이 더 세게 돌덩이를 들이받습니다. 곰의 반복되는 무차별한 공격은 점점 그 도가 더 심해집니다.
결국, 곰은 그 어리석은 힘겨루기로 머리가 터지고 녹초가 되어 힘을 다 소모해버립니다. 그때 지켜보던 사냥꾼들이 와서 곰을 끌고 가면 그만이라고 합니다.
정말 그럴까 싶을 정도로 미련한 것 같습니다. 그러고보면 인간은 안 그런가요? 한 가지 생각에 집착하여 모든 에너지를 다 소진해버리는 일은 없나요? 자기를 모함하거나 돈을 떼먹은 사람을 굳이 떠올리며 스스로 감정의 에너지를 다 써버리지는 않습니까?
예전에 중국 북부 산시성 산젠 마을에서 한 남자가 자신을 버린 부인에 대한 복수로 결혼식장에서 폭탄을 터뜨려 36명이 사망하고 30여 명이 부상을 당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전직 석탄 광산 폭발물 전문가인 이 남자는 마차에 50kg짜리 폭탄을 싣고 마을 대로에서 열리는 결혼식장에 도착해 폭탄을 터뜨렸으며 자신도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범인은 지난해부터 부인이 자신을 버리고 아들을 데려간 후 질투심과 분노에 가득 차 ‘최악의 사고’를 낼 것이라고 친구들에게 말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감정을 정리할 시간이 1년이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 감정의 노예가 되어버렸고, 결국 수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주었습니다. 정작 사건의 원인이 되었던 범인의 부인과 세 자녀(아들과 두 딸)는 결혼식장에 없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분 나쁜 것을 외적인 요인으로 돌립니다. 그러나 지구가 망가지는 것이 태양 때문일까요? 인간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지구를 통제할 수 있습니다.
기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각자가 통제할 수 있습니다. 기분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행복의 기술입니다. 지구가 인간에게 생존할 수 있는 에너지를 주듯, 감정도 우리에게 그런 에너지를 줍니다. 감정이 무너지면 삶의 에너지도 잃게 되어 살고 싶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기분을 어떻게 좋게 유지할 수 있을까요? 기분은 지구와 같습니다. 지구를 보존하는 방법과 같은 것입니다. 괴롭히지 말고 내버려 두면 됩니다. 쉬게 해 주면 자연은 자연적으로 회복됩니다. 주님은 이를 위해 낮엔 일하고 밤엔 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하루, 칠 년에 일 년은 쉬도록 하셨습니다. 농사를 짓더라도 칠 년에 일 년은 휴면기로 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은 스스로 회복합니다.
감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휴식을 시켜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휴식을 시켜주어야 하는지 모르는 게 문제입니다. 감정의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이 ‘생각’입니다. 생각은 지구의 인간들과 같습니다. 생각할 때는 감정의 에너지가 소진됩니다. 그렇다면 주기적으로 생각을 멈추어주면 좋습니다. 생각을 멈추면 기도가 시작됩니다. 그러면 감정이 회복됩니다. 성령께서 들어오셔서 사랑과 기쁨의 감정을 일으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미련한 처녀들은 기분이 나빠지고 나서야 이것을 회복하려 하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지구가 다 망가진 후에야 부랴부랴 회복시키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습니다. 규칙적인 기도를 하며 감정이 나빠지지 않게 주의해야 합니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파리 기후협약을 탈퇴하였습니다. 금성이 지구와 가장 비슷하지만, 인간이 살 수 없는 이유는 표면 온도가 450도나 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이산화탄소가 더 많은 온실효과 때문입니다. 지구도 최근 몇 년간 이산화탄소 수치가 지나치게 상승하였습니다. 인간이 지구를 쉬게 하지 못하게 한 이유 때문입니다.
망가진 다음에 고치려고 하면 소용없습니다. 감정도 망가지기 전에 규칙적으로 쉬게 해 주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현명한 처녀와 같습니다.
‘규칙적인 기도’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기분을 잘 조절할 줄 아는 사람들이 어쩌면 지구를 살릴 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는 규칙적인 쉼의 시간을 꼭 가져야 합니다.
-조재형신부-
액션 영화배우 스티븐 시걸의 영화 ‘패트리어트(1998년)’가 있습니다. 바이러스와 치료제를 탈취한 나쁜 사람들이 마을을 바이러스에 감염시켰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가져온 치료제가 바이러스에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마도 바이러스에 변이가 생겼나 봅니다. 의사였던 스티븐 시걸은 나쁜 사람들과 싸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바이러스의 치료제를 찾습니다. 나쁜 사람들과 싸우기 위해 시걸은 딸을 원주민에게 잠시 보호를 청하였습니다. 원주민 마을의 노인은 들에 핀 꽃을 이용해서 바이러스를 이겨내고 있었습니다. 꽃의 성분이 바이러스를 이겨내는 작용을 하고 있었습니다. 흔하게 볼 수 있는 들의 꽃이 사람들을 바이러스로부터 구한다는 내용이 인상적이었던 영화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에로 인도하는 것은 엄청난 지혜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구원에로 인도하는 것은 놀라운 표징도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를 구원에로 인도하는 것은 우리가 모두 알고 있지만 받아들이지 못하는 ‘십자가’라고 이야기합니다. 한국 교회에는 많은 순교자가 있고, 성인과 복자품에 오른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재능, 출신, 능력, 성별이 다 다릅니다. 그러나 그분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간 것입니다.
다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입국절차를 밟아야 합니다. 개인별로 입국절차를 밟아야 합니다. 이민국 직원은 다른 사람이 도와주는 것을 엄격히 제한합니다.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입국절차는 본인 스스로 해야 합니다. 나의 여권과 나의 서류는 다른 사람에게 양도할 수도 없고, 빌려줄 수도 없습니다. 오직 나의 입국을 위해서만 필요한 것입니다. 친한 친구일지라도, 심지어 가족일지라도 어떻게 도와 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여권은 유효기간이 6개월이 남았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비자가 필요한 나라에 가기 위해서는 미리 비자를 받아야 합니다. 안타깝지만 유효기간이 만료된 여권을 가져온 분이 있었습니다. 결국 그분은 처음으로 가는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일정상 이스라엘에서 기다릴 수도 없었고, 나중에 함께 하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순례 중에 항상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여권은 분실하면 안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나라에 들어가는 슬기로운 처녀와 하느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어리석은 처녀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등잔의 기름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지고가야 할 십자가라고 생각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었던 십자가입니다.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음이었던 십자가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피하고 싶은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는 나를 구원에로, 영원한 생명에로 인도하는 등불입니다. 예언자들이 지고 갔던 십자가입니다. 순교자들이 지고 갔던 십자가입니다.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서 지고 가셨던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오늘은 자신의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갔던 아우구스티노 성인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회고록인 ‘고백록’을 통해서 교회에 큰 보물을 남겨 주었습니다. 오늘은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십자가의 또 다른 이름은 ‘겸손’입니다.
“완덕으로 이끄는 모든 길 가운데 첫째 길은 겸손입니다. 둘째 길도 겸손입니다. 셋째 길도 겸손입니다. 그대가 몇 번을 묻더라도 나의 대답은 같을 것입니다. 다른 길이 없어서가 아니라 모든 선한 행위에 겸손이 앞장서고, 함께 하고, 뒤를 따르지 않으면 교만이 모든 것을 우리 손에서 빼앗아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느님이신 겸손하신 예수님을 모실만큼 겸손하지 않았고, 그분 약함의 가르침도 아직 알지 못하였습니다.”
아! 나는 얼마나 한심한 인간입니까? 내가 밖을 내다보는 순간 하느님은 내 안에 계셨습니다!
-양승국신부-
그리 길지도 않지만, 짧지도 않은 지난 나날들을 돌아보니, 인생에는 적어도 몇번의 대전환점, 다시 말해서 터닝 포인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삶을 180도 바꿀 수 있는 기회, 인생을 대 반전시킬 수 있는 기회 말입니다. 그런데 그 기회가 왔는데도 온 줄도 모르고, 그 소중한 대 전환의 기회를 놓치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숱하게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노력이 한 가지 있습니다. 가끔씩 자신의 삶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일입니다. 틈나는 대로 진지하게 자신의 인생을 객관적으로 성찰해보는 일입니다. 한번씩 인생의 물구나무서기를 하면서, 자신의 내면을 탈탈 털어버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대반전의 시기는 인생의 가장 밑바닥을 쳤을 때가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사방이 높은 벽으로 둘러쌓여 있어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 보일때가, 곧 인생의 터닝 포인트일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대 성인이자 학자요,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교부이신 아우구스티노 주교님이 바로 그랬습니다.
젊은 시절 그는 껌 좀 씹는 청년이었습니다. 다양한 분야에 출중한 재능이 있다보니 하느님 두려운 줄 모르고 살았습니다. 오로지 세속적인 성공, 명예와 육체적인 쾌락만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거기까지만 해도 괜찮았습니다. 더 심각한 일이 청년 아우구스티노에게 발생했습니다. 마니교에 깊이 빠져들게 된 것입니다. 마니교는 페르시아 영지주의 종교 가운데 하나이며,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고대 및 중세에 널리 팽창되던 종교였습니다.
창시자 마니는 자신이 아담에서 시작하여 오랫동안 붓다, 조로아스터, 예수로 이어져 내려온 예언자들의 마지막 계승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마니교 가르침의 핵심은 진리에 대한 영적인 지식(靈知 gnosis)을 통해 구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타락해서 악의 물질과 섞여 있지만, 영혼 또는 지혜가 해방시킨다는 것입니다. 의로운 사람의 영혼은 죽어서 천국으로 돌아가지만, 육적인 것을 고집하는 사람은 육체가 연속되는 환생의 저주를 받게 된다고 강조합니다.
마니교는 3세기에서 7세기 동안 융성하는데, 그 절정기에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퍼진 종교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역시 자신의 고백록을 통해 9년 동안 마니교에 심취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허우적거리던 청년 아우구스티노에게 강렬한 빛 한줄기와 함께 인생의 대 전환점이 찾아오게 됩니다. 386년 가을이었습니다. 밀라노에 머물고 있던 아우구스티노에게 고향 친구 폰시아노가 찾아옵니다.
폰시아노는 최근 북아프리카 리비아의 깊은 사막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한 수도자들, 특히 안토니오의 성스럽고 빛나는 영적생활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아우구스티노는 얼마나 감격했던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이렇게 외쳤답니다.
“아! 우리는 얼마나 한심한 인간입니까? 제대로 못 배운 사람들도 온 힘을 다해 천국을 차지하려고 저리 애를 쓰고 있는데, 공부 꽤나 했다는 우리는 육욕의 노예가 되어 있다니! 이 무슨 꼴입니까?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로다! 부끄러운 일!”
마침내 방황하던 청년 아우구스티노에게도 은혜로운 깨달음의 순간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새로운 삶에 대한 열정이 활활 불타올랐습니다. 갑작스런 내면의 변화을 주체하지 못해 빠른 걸음으로 정원을 산책하며 기도하던 아우구스티노의 귓전에 한 애띤 어린이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들어서 읽어보라! 들어서 읽어보라!”
즉시 발길을 돌려 침실로 돌아온 아우구스티노는 책상 위해 놓여 있는 성경을 들어 펼쳤습니다. 아우구스티노의 눈에 최초로 들어온 성경 구절은 다음의 말씀이었습니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욕망을 채우려고 육신을 돌보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로마서 13장 13~13절)
그 순간 아우구스티노는 큰 망치로 뒷통수를 크게 한대 얻어맞은 느낌이었습니다. 그 성경 구절은 이 세상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아우구스티노 자신을 위한 맞춤형 선물이었던 것입니다.
죄의 아들 아우구스티노가 회개하던 순간 천국에서는 예수님과 성모님을 물론, 수많은 성인성녀들과 천사들이 큰 목소리로 환호성을 올렸을 것입니다.
우리도 가끔씩 성경책을 들어 펼쳐볼 일입니다. 그 안에는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이끌어줄 생명수같은 말씀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는 우리 인생의 대전환을 이루게 해줄 은혜로운 말씀으로 흘러넘치기 때문입니다.
누가 보나 보지 않나 한결같아야 한다
-반영억신부-
맥시칸의 결혼식과 인도 사람의 결혼식, 그리고 미국인들의 결혼식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서로 문화가 다르지만 복을 빌어주고 헤어지지 않기를 기원하며 자녀의 풍요를 누리기를 바라는 기원은 비슷하게 느껴졌습니다. 말은 잘 통하지 않지만 신랑신부를 끈으로 묶는 행위라든지 반지를 교환하고 부모가 자녀에게 쌀을 뿌리는 행위를 통해서 복을 기원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계약의 선언 후 성모님께 꽃을 봉헌하는 모습을 통해 신앙인의 모습을 새롭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유다인의 결혼 풍습은 약혼을 먼저 합니다. 그리고 약혼으로 법적인 혼인이 성립되지만 약 1년간은 신부가 친정에 머물러 있고 부부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 신랑이 친구들과 함께 신부 집으로 갑니다. 신부 집에서는 신부 친구들이 등불을 밝혀 들고 신랑을 마중합니다. 그리고 신랑 일행이 도착하면 함께 들어가 밤새도록 잔치를 벌입니다. 왠 등불이냐고요? 사막지역은 낮에는 너무 더우니까 밤을 이용하는 거죠. 그렇다면 오늘 비유에 등장하는 처녀들은 신부의 친구들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섯은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였고 다섯은 그러지 못하였습니다. 신랑이 일찍 왔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텐데 늦어져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실 등잔에 기름이 없으면 있으나 마나입니다. 따라서 등잔불을 밝히려면 언제나 기름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데 등 안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기름이 얼마나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어리석은 처녀의 잘못입니다. 우리도 나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을 때 어리석은 처녀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 내 마음, 내 삶의 태도가 어떠한지 살펴야 합니다. 물론 기준은 언제나 예수님이십니다.
어리석은 저는 하루일정을 마감하며 자동차의 주유상태를 확인합니다. 혹 급한 일이 있어도 일정한 거리를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간혹 확인을 소홀히 한 날이면 하필 그날에 일이 생기고 시간에 쫓기게 됩니다. 하루쯤이야! 하고 방심하는 그날이 심판의 날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25,13).
기름을 채운다는 것은 준비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깊은 관계형성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말씀을 새겨듣고 실천에 옮긴다는 말씀입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과의 깊은 우정을 쌓는 것은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나라의 천상잔치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늘 깨어 준비해야 합니다. 방심은 금물입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혼인 풍습은 다르지만 그 안에 예식이 의미하는 알맹이가 있듯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행동하는 믿음의 알맹이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예기치 않은 시간에 갑자기 오시더라도 더 큰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할 일 없이 보낸 오늘 나의 하루가 어제 죽은 그 사람이 그렇게 살고 싶어 한 바로 그 내일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순간을 소홀히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천국에 가면 놀랄 3가지가 있는데 1). 와야 될 사람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오지 않은 것이고 2). 못 올 것 같다고 생각한 사람이 와 있는 것이며 3). 내가 거기 와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면 남아있는 사람에게 미안한 것도 있는데 1). 이렇게 좋은 곳에 혼자 와 있어서 가족에게 미안하고, 2). 나를 떠나보내고 슬퍼하는 가족들에게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서 미안하고 3). 내 힘으로 온 것이 아니라 주님의 보혈, 성인들의 통공과 가족, 이웃들의 희생과 기도로 온 것이기에 미안하답니다. 천상의 행복을 누리는 것은 내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자비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열 처녀의 비유
-송영진신부-
신앙생활의 목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또는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하는 것입니다.
모든 신앙인의 목표가 같으니 신앙생활도 모두 같아야 하는데,
실제 현실을 보면 사람마다 제각각 다르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열 처녀의 비유’는 신앙인의 준비 자세에 관한 교훈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열 처녀’ 모두 신앙인이고,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 잔치에 참석할 준비를
잘하고 있는 신앙인이고, 어리석은 처녀들은 제대로 준비하지 않으면서도
“나는 준비가 잘 되어 있다.”는 자만심에 빠져서 방심하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신앙인입니다.
‘열 처녀의 비유’는 신앙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또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할 수는 없고, 신앙인답게 살면서,
제대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야 그 잔치에 참석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또 ‘열 처녀의 비유’에는, 신앙생활은(회개는) 남이 대신 해 줄 수 없고
자기 스스로 해야 한다는 가르침도 들어 있고, 마지막 목적지까지 가지 않으면
처음부터 출발하지 않은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는 가르침도 들어 있습니다.
“그래도 무엇인가를 했다면 아무것도 안 한 사람들보다는 낫지 않은가?
무엇이든지 한 일만큼은 인정받아야 하지 않은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하느님 나라는 중간 지대가 없는 나라입니다.
‘안’이 아니면 ‘밖’입니다.
‘열 처녀의 비유’에는, 그 나라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문 앞까지 갔다고 해도 아무 의미가 없다는 가르침도 들어 있습니다.
생명을 얻어 누리지 못하면 죽음입니다.
구원받지 못하면 멸망입니다.
“하늘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마태 25,1-4).”
어리석은 처녀들도 등불을 켜고 있었기 때문에(8절), 그들이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말은, 기름이 떨어졌을 때를 대비한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이 정도만 하면 충분하다.”(“나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 라고
자기 마음대로 자신의 신앙생활을 판단하고 자만심에 빠져 있는 것을 뜻합니다.
<진짜 성인은 자기 입으로 “나는 성인이다.” 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합니다.)
진짜 성인은 항상 자신의 부족한 점을 반성하면서,
자신을 향상시키려고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만일에 “나는 성인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성인이 아닙니다.
‘회개’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히 회개했다.” 라는 말은 자기 스스로 할 수 없습니다.
그 말은 오직 하느님과 예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사랑 실천’도 마찬가지인데, 아무리 해도 부족한 것이 사랑 실천입니다.
“나는 할 만큼 했다.” 라고 스스로 판단하면서 사랑 실천을 중단한다면,
그 교만과 자만심 때문에 전에 했던 사랑 실천의 가치를 모두 잃어버리게 됩니다.
사랑 실천은 어떤 이유로도 중단하면 안 되는 일입니다.>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5,5-13).”
이 이야기에서 처녀들이 모두 졸다가 잠이 든 것은
신랑이 늦게 왔다는 것을 나타내는 상황 설명일 뿐이고 특별한 뜻은 없습니다.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기름을 나누어 달라고 청하는 것은,
심판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기들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이 그 청을 거절하는 것은, 도와주기에는 너무 늦은 때라는 것을
나타내고, 또 회개와 신앙생활은 자기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신랑이 도착했을 때 어리석은 처녀들이 그 자리에 없었던 것은 기름을 사러 갔기
때문이고, 그러니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지 않은가?” 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기름을 사러 가는 일은 신랑이 오기 전에 해야 하는 일입니다.
즉 회개는 심판이 시작되기 전에 해야 하는 일입니다.
“문은 닫혔다.” 라는 말은 더 이상 기회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 이야기가 강조하는 것은 “신랑이 왔을 때 그 자리에 있는가, 없는가?
신랑을 맞이했는가, 아닌가?”입니다.
평소에 준비를 잘하고 있었던 사람들은 신랑을 맞이하게 되고,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들은 신랑을 맞이하지 못하고 탈락하게 됩니다.
<개인의 인생의 종말을 생각하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회개는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해야 할 일이고,
또 이 세상에서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저 세상으로 건너가면 회개할 기회는 없고 보속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인생의 마지막 날이 언제인지 모르기 때문에 ‘지금’(평소에) 해야 합니다.>
문이 닫힌 뒤에 어리석은 처녀들이 문을 열어 달라고 애원하고,
신랑은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라고 말하는 상황은
루카복음 13장 25절-27절의 상황과 비슷합니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라는 말은,
“우리는 서로 아무 관계도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교만과 자만심에 빠져서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과의 관계를 스스로 끊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신앙생활과 회개는 미루지 말고 평소에 해야 한다.” 라는 뜻입니다.
‘지금’이라는 시간은,
신앙생활과 회개를 하라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시간입니다.
나중으로 미루는 것은 우리에게 주신 ‘은총의 시간’을 버리는 일입니다.
(그 ‘나중’이라는 시간은 주님의 권한에 속한 시간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25,1-13: 열 처녀가 등불을 가지고
예수께서는 하늘나라를 혼인 잔치에 비유하신다. 여기서 슬기로운 처녀들과 어리석은 처녀들은 믿는 이들과 믿지 않는 이들을 의미한다. 이 비유는 우리 모두에게 관계되는 이야기이다. 이들은 우리로서 보편신앙을 가지고 있고 교회 안에서 선행을 하는 이들이다. 여기서도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2절)
슬기로운 처녀들은 시간이 얼마 남았는지 헤아리고서 신랑의 오심에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신랑이 언제 오더라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는 이들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처녀들은 방종하고 부주의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잊어버리고, 현재의 것들에만 마음을 쏟으며 노력하지 않았다. 그러니 신랑이 언제 올지는 별 관심이 없다.
모두가 등을 가지고 있었는데, 등을 가지고 있던 처녀 중에서도 어떤 처녀들은 슬기롭고 어떤 처녀들은 어리석었다고 한다. 무엇으로 그렇게 구분할까? 그 차이는 기름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였다. 이 기름의 의미는 아주 큰 것이다. 그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사랑이다. 왜냐? 사도 바오로께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제 여러분에게 더욱 뛰어난 길을 보여주겠습니다.”(1코린 12,31)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1코린13,1) 이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모든 것 위에 있는 뛰어난 길”이며 기름이라고 할 수 있다. 기름은 모든 액체 위에 뜬다. 기름에 물을 부으면 기름이 뜬다. 또 기름 위에 물을 부어도 기름은 위로 뜬다. 이 기름은 “더욱 뛰어난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랑이 있지 않으면서 신랑이신 주님을 맞이할 수 없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순간에 대해 준비만 하고 앞날은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리석었고, 슬기로운 처녀들은 앞날에 대비하여 사랑의 행실을 쌓아 기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슬기로웠다.
그런데 신랑이 늦어진다.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5절) 그 신랑은 “한밤중”에 온다. 가장 예기치 못한 시간을 말한다. “신랑이 온다!”(6절) 처녀들은 저마다 등불을 챙긴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다오.”(8절)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9절) 하였다. 하느님 앞에서는 선을, 사랑을 얻을 수도 빌릴 수도 없는 것이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10절) 그 뒤에 어리석은 처녀들이 왔다. 그들은 기름을 사서 왔을까? 기름을 파는 사람들을 만났을까? 아니다. 단지 문이 닫혀있는 것만을 본다. 문을 두드리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12절) 그러니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깨어있는 삶을 항상 노력하며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마태 25, 6)
-한상우신부-
사랑한만큼
보이게되는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방황과 방탕을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하느님 안에서
한 사람의
꾸밈없는
이야기를
만납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하느님께
개방합니다.
회심은
하느님에 대한
뜨거운 신뢰에서
시작됩니다.
새로운 탄생은
회심으로
더욱 빛납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모든
여정은 이와같이
아름답고
소중합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사는 방법은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십니다.
현실의 삶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족함과
상처와 갈망까지
끌어안으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아름다운 사람
성 아우구스티노를
만납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아름다운 사람이
많아지길
기도드립니다.
가야할 길이
사랑과 회개의
길임을 믿습니다.
삶에 답할 수 있는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분명
은총입니다.
우리를 살게하는
아름다운
은총입니다.
아름다운 사람
아우구스티노
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사랑할 줄 아는
은총의
사람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을 일러 주십니다.
"저마다 등을 들고"(마태 25,1)
신랑을 맞으러 나간 처녀들이 "저마다" 등을 들고 있습니다. 등은 각자가 지닌 자기만의 것입니다. 등에 불을 켜는 일도 각자에게 달려 있지요.
"신랑이 늦어지자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마태 25,5)
다섯을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는 전제가 있긴 하지만,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는 것으로 보아 기본적으로 다들 동일한 인간적 조건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육체적 한계와 나약함에서 누구도 자유롭지 않다는 뜻이지요.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마태 25,7)
이윽고 신랑이 오자 처녀들은 일어나 신랑을 맞이할 준비를 합니다. 제일 먼저 챙겨야 할 것이 바로 각자 자기의 등입니다. 복음 사가는 "등"을 언급하면서 "저마다"라고 반복하지요. 이 "등"의 불이 꺼지지 않게 하는 노력은 함께 공유하거나 차용할 수 없는, 각자의 고유한 무엇입니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마태 15,10)
기름이 떨어져 등이 꺼져가던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 신랑이 오고, 혼인 잔치의 문은 닫힙니다. 여기서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나눔이나 희사의 정신이 없다고 비난하는 건 말씀의 줄기를 놓치는 실수일 겁니다. "등"을 밝히는 기름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공유나 차용이 불가능한 저마다의 무엇이니까요.
오늘 복음 대목에서 구원의 공동체성과 개별성을 묵상해 봅니다. 우리가 교회 공동체에서 세례를 받고 계명을 지키며 하느님 자녀로서 살아가도록 초대받은 것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저마다 기본적으로 지녀야 하는 "등"을 선물로 받은 것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는 비유 속 처녀들처럼 슬기롭건 어리석건 저마다 "등"을 지니고 천상 혼인 잔치에 들어가기 위해 신랑이신 주님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기름"은 신랑이신 주님과 신부인 "나"의 만남과 결합을 상징하는 "불"을 지피고 꺼지지 않게 유지하는 소중한 자원입니다. 그런데 내 등불은 온전히 내 기름, 내가 마련한 기름으로만 타올라야 하지요. 아무리 급해도 얻거나 빌릴 수 없습니다. 온 생애를 통과하며 차곡차곡 쌓아 간직해 온, 오로지 나만이 그분께 드릴 수 있는 선물입니다.
"우리 문간에는 온갖 맛깔스런 과일들이 있는데 햇것도 있고 묵은 것도 있어요. 이 모두 내가 당신을 위하여 간직해온 것이랍니다."(아가 7,14)
아가의 저자는 연인을 위해 그동안 간직해 온 것들을 펼쳐보이는 신부의 수줍고도 벅찬 사랑을 노래합니다. 오늘 복음 속 "기름"처럼 고유하고 독점적인 사랑의 징표와도 같을 겁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가 사랑하고 따르는 그리스도의 어리석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들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1코린 1,23)
당시 사람들에게는 십자가 형틀에 달려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사형수를 믿고 따르는 자체가 이해할 수 없는 스캔들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이들이 보여 주는 이웃 사랑이나 나눔, 희생, 순교 등의 모습은 세상 논리와 결도 다르고 방향도 다른 "어리석음"에 불과했지요.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1코린 1,24-25)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돈과 물질과 편리함과 쾌락이 우상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내세에 펼쳐질 영원한 생명에 희망을 두고 살아간다는 것은 세속 사람들 눈에는 걸림돌이고 어리석음입니다. 돈과 인맥과 스펙을 모으느라 영혼의 등불 따위는 안중에도 없을 테니까요.
오늘 비유 속 슬기로운 처녀들은 저마다의 삶에서 사랑의 기름을 차곡차곡 모아온 이들이 아닐까 합니다. 그들은 세상이 뭐라 하든 기도와 자선과 단식으로, 희생과 나눔과 사랑으로 자기 등에 불을 밝히며 살아온 이들일 겁니다. 신랑을 기다리다 비록 육신의 나약함으로 졸기도 하고 잠에 빠지기도 했지만, 그분을 위해 일생을 걸쳐 마련한 소중한 선물을 꼬옥 간직하고 설레며 기다리는 사랑에 빠진 신부지요.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하느님의 어리석음과 하느님의 약함에 매료되어 여기까지 온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것과는 다른 기름을 저마다 준비해 등불을 켜들고 신랑을 마중하는 우리에게 이 기다림은 설레고 행복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어리석음을 따르기에 진정 슬기롭고, 하느님의 약함을 받아안기에 세상 무엇보다 강한 사랑을 소유합니다.
복음은 닫힌 문 밖의 실랑이로 끝을 맺지만 우리는 문 안쪽에서 벌어지는 혼인 잔치에 관심이 있지요. 마침내 주님과 함께 들어선 혼인 잔치상에서 나의 사랑의 등불은 밝게 빛날 것입니다. 그 빛이 그분과 나의 얼굴을 더욱 아름답고 찬연히 비추며 우리의 사랑은 영원히 타오를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와 함께 이 사랑에 잠겨 행복한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나의 사랑은 펑퍼진 사랑?
-김찬선신부-
열 처녀의 비유와 관련하여 저의 오랜 궁금증은 이렇습니다.
이 비유에서 처녀는 어떤 존재인가? 신랑의 신부? 아니면 신부의 친구?
그리고 슬기로운 처녀, 어리석은 처녀 둘만 있어도 될 텐데 왜 열 처녀일까?
그렇지 않습니까?
신랑의 신부될 사람은 한 사람이면 되는데 왜 열 처녀가 있습니까?
옛날 왕들이 왕비를 간택할 때 전국에 간택령을 내리고
그중에서 제일 괜찮은 여자를 왕비로 간택했던 것처럼
열 처녀중에서 한 처녀를 고르겠다는 뜻일까요?
그런데 제 생각에 신부가 됐건 신부 친구가 됐건 열 처녀에게 기회를 준
것은 옛날의 임금처럼 모든 여자 중에서 나에게 맞는 여자를 고르겠다는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기회를 주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열 처녀란 집합적인 신부를 말함이고,
여기서부터 우리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교회론을 이끌어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 교회는 오래 전부터 교회가 바로 Sponsa Christi,
곧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했지요.
한 사람만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전체가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다는 얘기입니다.ㅍ
이는 주님께서 하늘나라에 올라가실 때
당신 혼자만 올라가지 않으시고, 또
한두 사람만 데리고 올라가지 않으시고
모두 데리고 올라가시겠다는 보편적 구원의 뜻이지요.
그렇다면 이에 상응하여 우리가 지녀야 할 태도는 무엇이겠습니까?
나만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 나만 신랑과 함께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거나,
그래서 나만 신랑을 맞이할 준비, 곧 등과 기름을 준비해서는 안 되겠지요.
우리는 이 비유에서 또 봐야할 것이 있습니다.
어제는 하늘나라를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봤습니다.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종들을 잘 돌보는 충실한 집사의 얘기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비유는 주인과 종의 관계가 아니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과 우리의 관계가 얼마나 인격적이고 사랑의 관계인지....
그러므로 이런 사랑의 초대가 얼마나 고맙고 영광스러운지 안다면
우리는 종으로서의 충성스러움을 넘어 신부로서 사랑을 지녀야 합니다.
신랑이 너무 보고 싶어 신랑이 빨리 오기를 고대하고,
오면 맞이할 합당한 준비로서의 사랑 말입니다.
적절한지 모르지만 이 비유와 관련하여 제가 자주 드는 비유인데,
남편이 직장에서 일하고 돌아오는데 일이 늦어져 늦게 돌아올 때
아내가 잠을 자느라 맞이하지도 않거나 잠자고 있다가 부스스 깨
머리는 헝크러진 채 운동복 차림으로 맞이하는 것이 계속 된다면
남편은 만정이 떨어져 집에 들어오지 않고
예쁘게 치장하고 기다리고 있다가 맞이하는 다른 여자에게 갈 것입니다.
저를 볼 때 옛날과 비교하여 주님께 대한 지금 저의 사랑은 펑퍼졌습니다.
오랜 사랑의 관계에서 오는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핑계댈 수도 있겠지만
주님의 사랑을 믿고 나도 주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기에 펑퍼진 것입니다.
옛날에는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는 초조함 때문에 만나려고 기를 썼는데
지금은 주님을 이미 만나 주님 안에 머물고 있다는 안심 때문인지
평안함은 느끼지만 긴장이나 설레임이 전처럼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분명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맞는데 이런 저의 사랑은
등과 함께 기름을 준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기름이 떨어진 등이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 저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미련한 처녀들은 등잔은 가지고 있었으나 기름은 준비하지 않았다. 한편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잔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마태오 25,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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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을 준비하는 모습이 이 세상 안에서 우리가 갖추어야 하는 열정입니다. 열정이 있기에 신랑이신 주님과 함께할 그날을 위해 열심히 준비할 수가 있었고, 그 결과 혼인 잔치에 영광스럽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랑이 오려면 아직도 멀었어.’라는 안일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모습 안에서는 어떤 열정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쉽고 편안한 것만을 추구하는 이 세상의 모습인 것이지요. 이 열정 없음으로 인해 그들은 주인으로부터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라는 말과 함께 외면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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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모든 것 위에 있는 뛰어난 길”이며 기름이라고 할 수 있다. 기름은 모든 액체 위에 뜬다. 기름에 물을 부으면 기름이 뜬다. 또 기름 위에 물을 부어도 기름은 위로 뜬다. 이 기름은 “더욱 뛰어난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랑이 있지 않으면서 신랑이신 주님을 맞이할 수 없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순간에 대해 준비만 하고 앞날은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리석었고, 슬기로운 처녀들은 앞날에 대비하여 사랑의 행실을 쌓아 기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슬기로웠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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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사가는 "등"을 언급하면서 "저마다"라고 반복하지요. 이 "등"의 불이 꺼지지 않게 하는 노력은 함께 공유하거나 차용할 수 없는, 각자의 고유한 무엇입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나눔이나 희사의 정신이 없다고 비난하는 건 말씀의 줄기를 놓치는 실수일 겁니다. "등"을 밝히는 기름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공유나 차용이 불가능한 저마다의 무엇이니까요.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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