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8월 20일 연중 제20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20. 8. 19. 05:46

2020 8 20 연중 제20주간 목요일

 

  예복도 입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소?’ 

(마태오 22,1-14)

 

‘My friend, how is it
that you came in here 
without a wedding garmen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기석신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혼인은 한 사람이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는 일생 동안의 통과 의례 가운데 한 단계입니다. 예수님의 첫 기적도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였습니다(요한 2,1-12 참조). 예수님께서는 혼인의 중요성도 두 번씩이나 언급하시는데,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된다는 확실한 계명(마태 5,31-32 참조)과 함께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 19,6)라는 선언을 통하여 강조하셨습니다. 하늘 나라에 대한 비유를 드실 때도 혼인은 좋은 예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인 ‘혼인 잔치의 비유’가 그렇고, ‘열 처녀의 비유’(마태 25,1-13 참조)도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한 어리석은 처녀들에 대하여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인 ‘혼인 잔치의 비유’를 묵상합니다. 임금이 혼인 잔치를 열고 종들을 보내어 초대받은 사람들을 불러오게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참석을 거부하고 심지어 임금의 종들을 때리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분노한 임금은 군대를 보내 복수를 하고, 종들에게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 모두 잔치에 데려오게 합니다. 마침내 혼인 잔치는 손님들로 가득 찹니다. 그런데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보고는 하인들에게 그의 손과 발을 묶어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리게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혼인 잔치는 가장 풍성한 잔치였습니다. 신랑과 신부는 화려하게 치장을 하였고 손님들도 합당한 예복을 갖추어야만 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랑 신부에 대한 모욕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거리에서 불려 온 사람들은 종들을 무작정 따라나선 것이 아니라, 모든 준비를 마치고 초대받기만을 기다리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늘 나라의 입성을 혼인 잔치의 초대로 비유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늘 준비하고 있어야만 하는 믿음의 자세를 강조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마땅히 갖추어 입고 준비해야 할 우리의 예복을 오늘 독서의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하여 알려 주십니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최근 몇 년간 교육부에서 조사한 학생들의 희망 직업 순위를 살펴보면 공무원이 꼭 들어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를 물으면 안정적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아서라고 말합니다. 공무원이 되겠다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꿈꾸지 않는 편안하고 쉬운 길을 선택하려는 마음은 잘못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성지의 공사 때문에 공무원을 자주 만났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만난 공무원은 이제까지 봤던 공무원과 다른 모습을 본 것입니다. 많은 공무원이 안 되는 이유만을 찾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만난 공무원은 되는 방법을 먼저 찾으려는 것입니다. 그 결과 훨씬 더 좋은 쪽으로 나아갈 수 있었고, 성지의 공사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어떤 모습이 더 발전적으로 나아갈지는 분명합니다. 안정성만을 추구하면서 안 되는 이유만을 먼저 찾는다면 당연히 새로운 시도 자체를 할 수가 없게 됩니다. 모든 젊은이가 이런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우리의 장래는 결코 밝다고 할 수 없습니다. 비록 그 과정에서 실패도 있을 수 있겠지만, 이 역시 더 나은 세상을 위한 하나의 중요한 발판이 될 것입니다.

할 수 없는 이유를 찾는 삶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이유를 찾는 젊은 마음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는 주님을 따르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 할 수 있는 이유를 찾아야지, 할 수 없는 이유만을 찾다 보면 이 세상의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을 따를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혼인 잔치의 비유를 이렇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초대받은 사람은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라는 종의 메시지를 듣고도 가지 않습니다. 밭으로 일하러 가고, 장사하러 가지요. 세상일에 몰두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혼인 잔치에 가기를 거부합니다. 더 큰 문제는, 그들을 부르는 이의 선물을 거절할 뿐만 아니라 그 선물을 받아들이는 이들을 박해하기까지 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따를 수 없는 이유만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주님의 사랑이 가득한 혼인 잔치의 큰 기쁨을 누릴 수가 없게 됩니다. 지금의 삶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변화될 수도 없게 됩니다. 오히려 주님의 분노를 가져오게 되어서 구원의 길에서 멀어지게 된다는 것이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혼인 잔치의 비유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주어집니다. 사랑하라는 부르심, 서로 함께하라는 부르심, 참 기쁨과 평화를 이루라는 부르심…. 그 모든 부르심에 곧바로 응답하고 있습니까?

진정한 기도는 모든 희망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어둠 속에서 태어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인생.


봄부터 여름까지 성지 안에서는 많은 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추운 겨울에는 어떨까요? 봄부터 여름까지 아름다운 꽃들을 피워냈던 꽃나무들이 겨울이 되면 앙상한 가지만 남기고 어떻게 보면 아주 초라한 모습을 보입니다.

이렇게 겨울의 모습만을 보고서 볼품없다고 뽑아버리고 잘라버리는 사람이 있을까요? 곧 꽃이 피어나는 아름다움을 알고 있기에 지금은 보기 싫은 모습이어도 상관없이 기다리고 지켜줍니다.

그 무엇도 항상 꽃을 피우면서 화려함을 간직하고 있지 않습니다. 시들고 앙상한 가지만 남기는 초라함도 가지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어떨까요? 인간도 항상 아름다운 삶만 계속될 수 없습니다. 때로는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아 있는 것과 같은 고통과 시련의 시간 역시 우리의 삶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실망하고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꽃과 같은 인생도 있지만, 초라하고 볼품없는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은 꼬인 인생도 나의 삶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래 가려거든 조연상을 노려라!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 말씀은 ‘혼인 잔치의 비유’입니다. 혼인 잔치는 행복한 하늘 나라 잔치입니다. 어떻게 행복한 나라에서 영원히 머무를 수 있는지에 대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우선은 그 잔치 초대에 응해야 하고, 그다음은 잔치 손님으로 쫓겨나는 일을 피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국민배우를 꼽으라고 하면 많은 분이 ‘안성기’씨를 꼽을 것입니다. 안성기씨는 영화가 가장 큰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스캔들 없이 꾸준한 연기 생활을 60년 이상 이어왔습니다. 2017년 데뷔 60주년 간담회 때, 배우로서의 꿈에 대한 질문을 받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오래 가는 거죠.”

      60년을 이어와도 꿈이 ‘오래 가는 것’이라는 말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줍니다. 영화가 행복이기에 그 행복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 한국 국민 배우로서의 길을 꾸준히 걸어올 수 있었던 이유를 묻자, 그는 그 이유를 ‘욕심’에서 찾았습니다. 욕심을 내려놓을 수 있었기 때문에 배우로서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연기 외에 욕심이 없어야 마음 편히 연기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가 ‘동반자이자 큰 행복’인 만큼 그것에만 집중하기 위해 욕심을 버리는 작업을 반복해왔습니다.

      “이것 자체가 큰 욕심일지는 모르겠지만 배우는 욕심이 없어야 한다고 봐요. 일 자체에 대한 욕심은 많아야겠지만 일 외적으로 욕심이 많으면 안 되죠. 그럼 내가 편할 수가 없어요. (대인관계, 인기, 명예 등 신경 써야 할 것들의 폭을) 넓혀 놓으면 연기할 때 집중이 안 돼요. 그러니 배우에게 좋은 일이 아니죠.” 

[출처: ‘58년 연기 비결? 욕심 없어야 한다’, 김미리 기자, 마이 데일리, 15-03-25]

 

      오늘 복음에 따르면 혼인 잔치에 초대받기 위해 버려야 하는 것은 ‘욕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욕심이 많은 이들은 혼인 잔치 초대에 응하지 않습니다. 초대에 응답한 이들은 세상 행복에 대한 욕심을 어느 정도는 끊은 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혼인 잔치에 참석했어도 쫓겨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혼인 의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세례를 받았어도 끝까지 가지 못하는 이들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어떠한 욕심을 버리지 못했을까요? 주연에 대한 욕심입니다. 연기자로 따지자면 끝까지 주연만 하려는 사람일 것입니다. 안성기씨가 오랜 주연을 해오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조연을 했습니다. 자존심이 상할 만도 하지만 그는 ‘아, 이것이 앞으로 내가 가야 할 길이다!’라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유재석씨가 오래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인공이 아니라 항상 어느 자리에서나 조연을 선택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신이 튀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사람들을 튀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튀어나온 못은 망치를 맞게 되어 있다는 말도 있습니다. 주인공이 되려는 것도 욕심입니다.

 

      할리우드 연기자들이 가장 피하는 배역은 ‘예수’입니다. 예수 역할을 하면 그 이미지가 너무 강해 더는 다른 역할을 맡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래 가려면 영광을 받는 역할을 최대한 피해야 합니다.

 

      요즘 코로나가 다시 극성입니다. 그리고 주범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전광훈 목사’입니다. 그는 2018년 교계 연합기관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대표회장에 당선됐습니다. 올해 1월 회장 연임에 성공했으나 직무가 정지된 상태라고 합니다. 누가 봐도 그는 오래 가지 못합니다. ‘주연’이 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가 한 말들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누구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냐. 전광훈 목사 중심으로 돌아가게 돼 있어. 기분 나빠도 할 수 없다.”

 

“앞으로 점점 더합니다. 앞으로 10년 동안의 대한민국은 전광훈, 대한민국은 전광훈 목사 중심으로 돌아가게 돼 있다니까요.”

작년엔 이런 말도 했다고 합니다.

“나는 하나님 보좌(寶座)를 딱 잡고 살아. 하나님 꼼짝마.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 내가 이렇게 하나님하고 친하단 말이야. 친해.”

      혼인 잔치에 참석하려면 세상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세례를 받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간과 재물을 봉헌해야 합니다. 이 정도도 희생할 수 없다면 교회에 머물 수 없습니다. 교회에 머무는 것은 마치 혼인 잔치에 머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혼인 잔치 손님이 주인공이 되려고 한다면 어떨까요? 혼인 잔치 손님은 자신을 초대한 이와 신랑 신부가 영광을 받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자신이 마치 주인공인 것처럼 행동하면 그곳에서 쫓겨난 수밖에 없습니다. 인정받고 칭찬받는 것을 두려워하십시오. 오직 하느님과 이웃들이 영광을 받을 수 있도록 조연을 맡아야 합니다. 그래야 오래오래 행복하고 싶은 곳에서 원하는 만큼 행복할 수 있습니다. 주연상이 아닌 항상 조연상을 노리십시오.

 

-조재형신부-

 

터키의 이스탐불에는 아름답지만 슬픈 역사를 간직한 세계 문화유산이 있습니다소피아 성당입니다교회를 국교로 받아들였던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지금의 이스탐불을 콘스탄티노플로 정하였고로마의 새로운 수도로 만들었습니다로마의 황제는 콘스탄티노플에 교회를 지어서 봉헌하였는데 그 이름이 소피아 성당입니다아름다운 성당은 이슬람이 그 지역을 지배하면서 이슬람의 사원인 모스크로 사용되었습니다. 1934년 터키의 대통령은 소피아 성당을 박물관으로 사용하도록 결정하였습니다.

 

교회와 모스크로 사용되었지만 상대방의 종교를 배척하지 않고서로의 역사를 존중하는 의미로 내린 결정이었습니다유네스코는 예술적인 의미의 가치와 상대방의 종교를 포용하는 의미에서의 가치를 존중하였고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습니다저도 성지순례를 갔을 때박물관으로 사용되는 소피아 성당을 방문하였습니다그런데 최근에 터키 정부는 박물관인 소피아 성당을 다시금 이슬람의 사원으로 사용하겠다고 발표하였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께서도 터키 정부의 결정을 막을 수는 없지만 안타까운 일이라고 유감을 표명하였습니다.

 

한국은 새롭게 성전을 신축하는 곳이 많습니다사제성소도 많고세례자도 있기 때문입니다저의 동창 신부님들도 대부분 교우들과 함께 새 성전을 마련하였습니다상가 건물에서 지내면서 미사를 봉헌하기도 했고주택에서 미사를 봉헌하기도 했습니다다른 본당으로 모금을 가기도 했고물건을 팔기도 했습니다눈물과 땀이 모여 새로운 성전을 신축하고 축성할 때는 모두가 기뻐하였습니다그동안의 수고와 땀을 모두 잊을 수 있었습니다저는 교우들에게 눈에 보이는 성전을 신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의 성전을 신축하는 것도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

 

말씀이 살아있다면말씀을 이웃에게 전할 수 있다면말씀이 내 삶의 중심이 된다면 눈에 보이는 성전이 사라진다고 해도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박해가 있는 것도 아니고다른 종교에 의해서 성당을 빼앗기지도 않지만 유럽과 미국의 많은 교구는 성당을 축소하거나매각하기도 합니다사제의 수가 부족하고신자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기 때문입니다옆에 있는 교구도 240개의 본당을 120개로 줄였고앞으로는 80개로 줄인다고 합니다안타깝지만 현실입니다.

 

오늘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에게 정결한 물을 뿌려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너희의 모든 부정과 모든 우상에게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희망을 이야기합니다비록 지금은 바빌로니아의 침략으로 유배를 와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신다고 선포합니다에제키엘 예언자는 22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과 유배지에서 함께 지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그리워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바빌로니아의 새로운 문화와 종교를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에제키엘 예언자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이야기하며 낯선 땅에서도 하느님께 예배드릴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심판을 이야기하였습니다소피아 성당이 이슬람의 사원으로 사용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성당의 숫자가 줄어들고매각하는 것도 받아들여야하는 현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선택하는 것은 현실의 삶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이기도 합니다우리가 주님과 함께 간다는 것은 이웃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기도 합니다우리가 주님을 섬긴다는 것은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입니다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주님을 믿는 다는 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화기쁨자유를 얻는 것이고 그것은 우리를 현실의 삶에서 이미 천상에서의 삶을 시작하게 하는 것입니다주님께서 부활하셨듯이 우리들 역시 영원한 삶에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을 선택하였습니다신앙을 통해서 주님의 제자가 되는 훈련을 하였습니다공동체 모임을 통해서 함께 기도하고주님의 자녀로서 충실하게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우리는 참 좋은 선택을 하였고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시는 잔치에 초대 되었습니다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봉사가 주님의 잔치에 함께 할 수 있는 예복이 될 것입니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성모님께서 여러분의 손을 잡고 계실 때는 실패할 수 없습니다!

 -양승국신부-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아빠스 성인은 12세기를 살았던 사람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당시 그의 역할이 얼마나 대단했으면 “12세기를 자신의 두 어깨에 짊어졌다.”라는 말까지 돌 정도였습니다.

  

베르나르도의 지혜와 경륜은 하늘을 찔렀는데 당대 교황님들을 비롯해 많은 왕들이 그에게 조언과 상담을 청했습니다. 단 한번이라도 그를 만나 본 사람들은 ‘사람의 모습을 한 천사’라며 우러러 보았습니다. 

 

동시에 베르나르도는 가톨릭 신앙의 옹호자, 수도생활 쇄신의 선구자, 교회 분열을 저지하는 든든한 보루, 탁월한 성서학자, 위대한 명 설교자, 그러면서도 겸손한 수도자로서의 삶을 동시에 살아갔습니다. 그는 ‘가톨릭교회의 마지막 교부’ 또는 ‘꿀과 같은 혀를 가진 박사’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1090년 프랑스 귀족 가문의 촉망받는 자녀로 태어난 베르나르도는 다정다감하고 신앙심 깊은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22살의 나이에 시토회에 입회해서 수도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출중한 인품과 지도력, 그리고 놀라운 언변과 감수성의 소유자였습니다. 입회하기 전 그는 여러 형제들과 친구들을 영적으로 잘 지도하고 설득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30명이나 되는 동료들을 하나로 모았고 의기투합한 그들은 당시 개혁파 수도원으로 ‘뜨고 있던’ 시토회에 동반 입회를 하게 됩니다. 

 

초기 양성 기간을 마친 베르나르도는 장상의 지시에 따라 동료 수도자 12명과 함께 그 유명한 클레르보 계곡으로 내려갑니다. 척박한 황무지였던 클레르보에 작고 소박한 수도원을 건립한 베르나르도는 오랜 기간 동안 철저한 고행과 단식, 집필과 일에 전념합니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았고, 숨을 쉬었으며, 또 그 결실을 형제들과 나누었습니다. 점차 클레르보는 수도생활 개혁의 원천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메마른 골짜기였던 클레르보는 점차 빛과 생명의 계곡, 기쁨과 구원의 골짜기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베르나르도의 성덕에 감화를 받고 클레르보로 몰려왔습니다. 

 

베르나르도는 가톨릭교회 쇄신에 대한 강한 열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병약한 몸을 이끌고 교회의 개혁을 위해 목숨을 바쳐 헌신했습니다. 교황청의 폐단과 고위성직자들의 세속화를 신랄하게 경고했습니다. 교회당국으로 부터 공인받은 순회 설교자로서 수많은 지역을 다니며 사람들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했습니다. 

 

매일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난 베르나르도는 스스로에게 그 유명한 질문 한 가지를 던졌습니다. “베르나르도야? 너 여기 무엇 하러 왔느냐?”

  

베르나르도는 깊은 성모 신심으로 유명했습니다. 매닝 추기경은 성모님을 향한 베르나르도의 사랑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가톨릭교회 초기 천년에 걸쳐 베르나르도처럼 성모님을 열렬히 사랑하고 존경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베르나르도 영성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님에 대한 열렬한 사랑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는 성모님에 대해서 이렇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인류를 향한 하느님 사랑의 가장 큰 표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강생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의 표시는 성모님의 출현입니다. 성모님은 인류 구원의 위대한 계획안에서 하느님의 어머니이십니다.”

 

베르나르도는 틈만 나면 외쳤습니다. “성모님을 통하여 예수님께로!” 이렇게 그는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 은총의 길이기도 하지만 성모님께로 나아가는 길 역시 은총으로 가는 길임을 역설했습니다.

  

“성모님의 겸손을 바라보십시오. 성모님은 거룩함을 조금도 잃지 않으셨으며 그분에게는 겸손이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처럼 겸손이 보증될 때에만 큰 은총이 얻어질 수 있습니다. 성모님처럼 스스로 자신을 낮출 때 은총이 다가옴을 기억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성모님처럼 겸손한 이들에게 은총을 베푸십니다.”

  

“성모님의 보호 아래서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그분께서 여러분의 손을 잡고 계실 때는 실패할 수 없습니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잔치에 대한 말씀입니다잔치는 유대인들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특히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잔치는 구원과 기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이상하게도 이 천상의 잔치에 초대받고도 응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오히려 그 심부름꾼들마저 때리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사실 오늘 <복음>에는 크게 두 부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초대에 응답한 이들과 응답하지 않는 이들입니다,

그리고 응답하지 않은 이들에는 또 다시 두부류가 있으니자신들의 생업을 핑계 삼아 응답하지 않은 이들과 심부름꾼들을 붙잡아 때리거나 죽이기까지 하는 박해자들입니다.

 이들 모두는 먼저 하느님께 초대를 초대받았으나 응답하지 않은 유대인들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특별하신 섭리로 선택받았으나세속적인 탐욕과 진리에 대한 곡해로 하느님의 초대를 거부하고 박해하였습니다.

임금은 말합니다.

 

“혼인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이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 오너라.”(마태 22,8-9)

 

 

이는 하느님의 초대에는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아무런 차별이 없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구원의 초대는 인간적인 기준으로서의 선악과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오직 하느님의 은혜와 그에 대한 응답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하늘나라는 하느님의 선물이요 자비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설령 초대에 응답했다 하더라도그에 합당한 예복을 갖춰 입지 않으면 잔치에서 쫓겨난다는 사실입니다당시의 유대인들은 잔치를 베풀 때 대문에다 예복을 미리 준비해두었고손님들이 예복을 입고 잔치에 들어가는 것은 주인에 대한 예의를 표시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그래서 예복을 입지 않고 잔치에 들어가는 것은 주인을 모독하는 태도로 간주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응답한 이들 중에도 두 부류가 있습니다.

 곧 예복을 입은 이와 입지 않은 이입니다.

그렇다면, 초대받은 자가 입고 들어가야 하는 예복은 무엇일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그렇습니다아버지 뜻의 실천이 곧 예복입니다.

 그러니, ‘오늘 당장’ 우리는 아버지의 뜻의 실행이라는 예복을 입어야 할 일입니다.

 왜냐하면이 초대는 먼 훗날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지금 당장의 벌어지는 초대인 까닭입니다.

 하늘나라의 잔치 역시 먼 훗날의 벌어지는 잔치가 아니라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의와 진리와 사랑의 잔치인 까닭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이 잔치에 초대하십니다우리는 낡은 인간을 벗어버리고 새 인간의 예복을 갈아입고 이 은혜로운 잔치에 참여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 22,14).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어서 혼인잔치에 오시오.”(마태 22,4)

 

주님!

당신의 초대에 합당한 자 되게 하소서.

타인의 아픔과 상처를 양팔 벌려 보듬게 하소서!

시대의 질곡과 고통을 기꺼이 온 몸에 걸치게 하소서!

진리 안에서 행동으로 사랑하는 빛나는 예복을 차려 입게 하소서!

 

먼 훗날이 아니라, 바로 오늘 지금 당장 예복을 차려 입게 하소서! 아멘

 

혼인예복은 마음의 옷

-송영진신부-

 

어떤 임금이 자기 아들을 장가보내기 위해서 혼인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오랫동안 관심과 사랑으로 배려했던 이들을 초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이된 일입니까? 믿었던 이들이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오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오리라 생각했던 사람들이기에 풍성하게 준비를 했는데 즐길 사람이 없었습니다. 미쳐 그들의 속을 보지 못한 탓이기도 합니다. 급기야 거리에 나가 지나가는 모든 사람을 초청하여 잔칫방을 채우라고 하였습니다.

받은 은혜보다도 자기 잇속을 차리느라고 어떤 사람은 밭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갔습니다. 나 하나쯤이야! 그들은 당장 내가 먹고 사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고 내가 아니어도 축하객이 많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날의 잔치는 매우 성대하였고 귀한 선물도 마련되었습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초대 받은 사람은 핑계 아닌 핑계를 댐으로써 선물을 받을 기회를 놓치고 전혀 생각하지 않은 사람들이 선물을 차지하였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초대 받은 사람은 많았지만 정작 선택된 사람은 적었고 이 모습은 오늘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구원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지만 결코 아무나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응답하는 사람만이 들어갑니다. 묵시록 3장20절에는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하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문을 열어드리는 역할은 나의 몫입니다. 그리고 응답을 한다는 것은 그만한 준비가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잔칫집에 가려면 그에 걸 맞는 예복을 입어야 하듯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그만한 삶이 뒤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회개하여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가운데 예복을 준비해야 합니다.

“배부르면 산해진미가 귀찮고 배고프면 보리죽이 꿀맛이다.” 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헛배가 부르면 정말 먹어야 할 것을 먹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헛배가 불러 다른 것에 관심을 갖지 못하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해 미사참례, 성지순례, 피정이나 세미나, 교육,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는 것이 매우 어렵지만 그래도 기도시간을 챙겨야 합니다. 영적인 풍요로움을 찾지 않는다면 갈수록 영혼이 메말라 신앙이 죽게 됩니다.

이 핑계, 저 핑계로 주님의 초대를 거절하고 심지어 죄를 범하는 경우 있습니다. 천국을 소망하면서도 안락의자에 앉기만을 원한다면 그는 결국 뽑힌 사람은 되지 못합니다. 그야말로 주님의 뜻을 행하는 예복도 없이 천상을 갈망한다면 허황된 꿈에 불과할 것입니다. 교부들은 혼인예복을 사랑, 선행, 의로움의 실천으로 해석했습니다. 혼인예복은 마음의 옷이며 마음을 어떻게 가꾸었느냐에 따라 아름다움이 더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22,14). “네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신뢰하고 너의 예지에는 의지하지마라. 어떠한 길을 걷든 그분을 알아 모셔라. 그분께서 네 앞길을 곧게 해 주시리라”(잠언3,5-6). 혹 준비가 미흡하다면 지금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회개와 행동하는 믿음의 예복으로 단장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혼인 잔치의 비유 
-송영진신부-

 

‘복음 선포’는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하라는 ‘초대’입니다.
1) 잔치의 주인공은 바로 ‘나’입니다. (우리는 손님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위해서 잔치를 베풀어 주시고,
그 잔치에 참석하라고 ‘나’를 부르십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초대에 응답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2)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당신이 잔칫상에 차려 놓으신 음식을 우리가 먹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간단하고 쉬운 일입니다.
음식 값을 지불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뭔가 특별하고 대단한 일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3) 초대에 응답하지 않은 사람들이 받게 될 심판과 처벌은,
하느님께서 그것을 내리시기 전에 이미 그들 자신들이 스스로 선택한 것입니다.
‘잔칫방’ 안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것은
‘밖에’ 남아 있는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안’에는 구원과 생명이 있지만, ‘밖’에는 죽음과 멸망이 있을 뿐입니다.
4) ‘혼인 잔치의 비유’에 들어 있는 ‘혼인 예복의 비유’는,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서 치러야 할 어떤 대가에 관한 가르침이 아니라,
초대에 응답할 때의 자세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혼인 예복을 입는 것은 응답에 속한 일, 즉 응답의 일부입니다.
(예복을 안 입은 채로 참석한 것은 사실상 초대에 응답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은 잔치에 참석하려는 마음 없이 그냥 잔치를 구경만 하려고 한 것입니다.
따라서 예복을 안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아서,
또는 그냥 밖에서 구경만 하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밖에’ 남아 있게 된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 하고 말하여라.’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마태 22,2-5).”

여기서 ‘초대받은 이들’은 유대인들로 해석할 수도 있고,
복음을 들어도 응답하지 않는 오늘날의 사람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응답하지 않은 이유는 임금의 잔치보다 자신들의 밭일과 장사 등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루카 14,18-19).
이것은 하느님 나라, 영혼의 구원,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현세의 삶’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임금 아들의 혼인 잔치’ 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잔치의 주인공인 신랑은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신부는? - ‘부르심’에 응답하는 신앙인들입니다(요한 3,29).
하느님의 부르심은 손님들을 부르는 일이 아니라,
잔치의 주인공들을 부르는 일입니다.
따라서 초대에 응답하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잔치에,
또 자기 자신을 위한 잔치에 참석하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임금은 진노하였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
그러고 나서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마태 22,6-10).”

사람들이 종들을 때리고 죽인 일은,
유대인들이 하느님의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인 역사를 가리킵니다.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이는 것은 하느님께 정면으로 반역하는 죄입니다.
길거리에서 다른 사람들을 새로 초대하는 것은, 복음이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는 것을 뜻하기도 하고, 하느님의 잔치는 초대에 응답하는 사람만이
차지하게 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내가 응답하지 않으면 나의 자리는 없어집니다.)
여기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라는 말은,
복음은 원래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기쁜 소식이고,
‘모든 사람’에게 선포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결코 ‘아무나’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전부 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유대인들이 응답하지 않아서 이방인들을 초대한 것처럼,
또는 처음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응답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들을
초대한 것처럼 표현되어 있는데, 실제 하느님의 구원 역사는
그렇게 된 일이 아니고, 순서가 그렇게 되었을 뿐입니다.
유대인들의 응답 여부와 상관없이,
복음을 온 세상 모든 민족에게 선포하는 것이 하느님의 계획입니다(루카 24,47).>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 22,11-14).”

“길거리에서 갑자기 불려 들어갔는데 혼인 예복을 안 입었다고 꾸짖는 것은
너무 하지 않나?” 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예복을 안 입은 사람은
하나뿐이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예복을 입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종들이 거리에서 사람들을 데려온 일은(10절),
강제로 붙잡아서 끌고 온 일이 아니라, 잔치에 참석하라고 초대한 일이고,
길거리에서 초대를 받았더라도 초대는 초대입니다.
(그 초대에 응답한 사람들은
집에 가서 예복으로 갈아입고 잔치에 참석했을 것입니다.)
혼인 예복을 입는 것도 응답에 포함되는 일입니다.
“그래도 예복을 안 입었다고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리는 것’은 너무 하지 않나?” 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이것은 구원의
반대쪽에 있는 ‘멸망’의 비참함과 무서움을 묘사하는 표현일 뿐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라는 말씀은,
구원받는 사람들의 수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부르심이 곧 구원은 아니다. 응답하는 사람들만이 구원받는다.” 라는 뜻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마태 22,1-14: 혼인 잔치의 비유

주님의 잔칫상은 그 자리에 참석하고자 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이 잔치에는 선한 사람악한 사람 모두 참석한다하느님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혼인 잔치에 비길 수 있다그분은 당신의 종들을 보내어 당신의 친구들을 잔치에 초대했다처음에는 예언자들을 보내셨으나 오려 하지 않았다나중에는 사도들을 보냈다.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사람은 밭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가 버렸다밭으로 간다는 것은 세상일에 몰두하는 것이고장사하러 가는 것은 세상에서의 활동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다그들은 이렇게 다른 것에 몰두해 있으므로 임금이 차린 혼인 잔치에 가기를 거부한다그들은 초대만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초대를 전하는 이들을 박해하기까지 하고더러는 죽이기까지 하였다.

 

임금은 진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들을 불살라 버렸다.”(7그들은 지옥의 영원한 불 속에서 고통을 받는다는 것이다그들이 오지 않았다고 잔치가 아무도 없이 치러질 수는 없다그래서 임금은 종들에게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8-9)

 

종들은 거리로 나가서 악한 사람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고잔치는 손님들로 가득 찼다이 잔치의 모습은 악인들과 선인들이 모여 있는 현세의 교회를 의미한다이 잔치에 참석한 삶들을 둘러보려고 임금이 왔다임금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발견한다여기서 혼인 예복은 사랑이다믿기는 하지만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 사람이다이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실 때 그분이 지니셨던 것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 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13-14손과 발을 묶는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바깥 어둠은 거룩한 영광과 완전히 떨어지는 것을 말한다이 옷은 의로움의 옷이며 준비를 하지 못하면 많은 사람 가운데 추궁당하고 손발이 묶여 바깥으로 던져진다.

 

또한하느님의 부르심이란 혼인 잔치와 같은 기쁨 넘치는 만남의 초대인 것임을 우리는 생활 속에서 기억해야 할 것이다하느님의 초대에 응한다는 것은 현실의 고통과 어려움을 영원을 내다보며 기쁨으로 바꿀 줄 아는 믿음의 자세를 보이는 것을 뜻할 것이다우리 마음 안에서 이미 언제나 긍정적으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이때 우리는 하느님의 초대를 거절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마태 22, 8)-한상우신부-

혼인 잔치는
있는데
혼인 잔치에 오는
하객이 없습니다.

하느님 초대조차
거절하는 교만한
우리들입니다.

사는게
바쁘다는 이유
하나로 모두
하나같이
핑계를 댑니다.

핑계를 버리지
않고서는
초대에
귀 기울일 수 없고
기쁜소식에
응답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
사랑으로
빚어진 우리들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초대조차
반기지 않는
우리들
모습입니다.

끝내 초대를
거절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를 위한
잔치집 자리에
우리가 마땅하지
않습니다.

받은 은총이
감사하는 삶이
마땅한 혼인예복의
자세입니다.

거짓과 허상의
혼인예복이 아닌
믿음과 감사의
혼인예복입니다.

욕심으로 가득찬
변명을 멈추고
믿음으로 돌아갈
때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 백성이고 신부인 우리의 자격을 돌아보게 해 주십니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마태 22,8)

성경의 언어에서 혼인은 하느님과 우리 인간의 관계를 표현하는 중요한 단어입니다. 임금님 아들의 혼인 잔치 비유는 한편으로는 이 지상에서 하느님 백성으로 초대받음을 의미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내세에서 어린양의 천상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영광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마태 22,9)

혼인 잔치가 준비되었지만 처음 초대받았던 이들이 참석을 거부합니다. 제 일들이 먼저였고, 그만큼 잔치는 안중에도 없었고, 또 임금과 종들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복음사가는 그 이유에 대해 별로 지면을 할애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에게 거부 당하고 버림 받은 하느님의 모습이 비쳐지지요. 구약성경에서 예언자들이 내내 부르짖는 외침이 바로 이처럼 상처입은 하느님의 목소리였습니다.

게다가 종들까지 붙잡히고 얻어맞고 죽음을 당했다니 행복해야 할 혼인 잔치가 피로 얼룩지고 말았습니다. 임금은 진노하여 그들을 처단하고 종들에게 새로이 하객들을 불러모으도록 지시합니다. 혼인 잔치에 축하객이 없다는 건 임금의 수치가 될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나 만나는 대로"

처음에 심혈을 기울여 고심하며 초대 명단을 뽑았을 임금이 이번에는 마음을 비우고 대문을 활짝 열어젖힙니다. 혼인 잔치가 누구라도 올 수 있게 모두에게 열린 장으로 변합니다.

처음 초대를 받았지만 참여를 거부한 이들 덕분에 다른 많은 이들이 혼인 잔치에 참여할 기회를 얻습니다. 마치 구약의 하느님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아들이신 참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길 거부하고, 모든 이민족들에게 구원의 지평이 무한히 확대된 인류의 구세사와 맥을 같이합니다.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마태 22,12)

그런데 한없이 허용적일 것 같았던 임금이 제동을 겁니다. 아들의 혼인 잔치에 "아무나" 들어올 수는 있어도, 혼인 예복만은 반드시 갖춰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복을 입지 않은 이는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가혹한 징벌을 받지요. 이런 임금님 태도의 반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혼인 예복"
혼인은 신랑 신부, 두 개인 뿐만 아니라 가족과 가문과 지역을 하나로 아우르고 일치시키는 중요한 행사입니다. 혼인 잔치에 참석할 때 입는 예복은 신랑 신부는 물론 가족과 가문과 지역에 대한 예의와 존중을 표현하기에 가난한 이건 부유한 이건 나름 정성껏 마련해 놓았지요.

제1독서에서는 배반과 불륜으로 하느님에게서 멀어진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님께서 관계의 회복을 선언하십니다.

"너희가 그들 사이에서 더럽힌 내 큰 이름의 거룩함을 드러내겠다."(에제 36,23)

이미 하느님과, 신부인 당신 백성과의 혼인은 신부의 불륜으로 오염되고 말았습니다. 하느님 편에서 우상숭배로 부정해진 신부를 얼마든지 내치셔도 좋을, 그런 상황을 신부 스스로 자초한 것이지요.

그런데 더럽혀진 당신 이름의 거룩함을 회복하는 주님의 해법은 인간의 방식과 사뭇 다릅니다. 그분은 더럽혀진 것을 송두리째 도려내거나 잘라내 버리는, 그야말로 이스라엘과 완전히 갈라서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으시지요.

"너희에게 정결한 물을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 새 마음을 주고 새 영을 넣어 주겠다. ...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에제 36,25-26)

하느님은 당신 아닌 다른 애인에게 눈을 돌리게 만든 굳은 마음, 돌 같은 마음을 치우고 살처럼 부드럽고 새로운 마음으로 갈아 넣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네가 지금 어떤 상태여도 다시 나의 신부다움을 되찾아 주어, 우리의 사랑을 깨뜨리지 않겠다. 네가 아무리 불결하고 부정해도 너를 떠나지 않겠다.'는 하느님의 마음이 읽힙니다.

사실 주님 앞에서 우리는 그리 교만할 일도 우쭐할 일도 없습니다. 우리가 그저 "아무나"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혼인 잔치에 참여하려면 '아무나'일지언정 혼인 예복은 필수로 갖추어야 합니다. 주님의 신부로 불리움 받아 주님과의 사랑과 일치의 혼인 상태에 머무르려면 꼭 갖추어야 할 무엇이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의 독서는 그 자격이 "정결"과 "새 마음과 새 영", "살로 된 마음"이라고 일러 줍니다. 이는 주님의 은총과 우리의 결단이 이루는 협주에서 비롯되지요.

사랑하는 벗님! 주님은 이미 불결해진 우리를 정화해 가장 아름다운 신부의 모습을 되찾아 주시려고 결심하셨습니다. 이제는 우리 쪽에서 그분께로 나아가기 위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동안 알고도 모르고도 눈 돌렸던 애인들, 주님보다 더 애착하고 기대했던 재물이며 사람이며 자기 영광 등의 우상을 치우고, 정성껏 혼인 예복을 갖춰 입는 일이 남아 있습니다.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복음환호송)

오늘 우리가 들은 말씀으로 결단하고 주님께 돌아설 수 있다면, 이 순간이 바로 구원의 때가 됩니다. 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추고 다시 일어서서 신랑이신 분께 고이 나아가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8월 23일 연중 제20주간 목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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