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
2020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
오늘은 ‘하느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께서 지상 생애를 마치신 다음 하늘로 불려 올라가셨다는 신앙 교의에 따라 성모님의 승천을 기리는 의무 축일이다. 성모님의 승천은 성경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초대 교회 때부터 내려오는 전승에 따른 것이다. 1950년 비오 12세 교황은 성모 승천의 신비를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다. 성모 승천은 그리스도 안에서 산 모든 사람이 누리게 될 구원의 영광을 미리 보여 주는 ‘위로와 희망의 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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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
(루가 1,39-56)
"Blessed are you among women,
and blessed is the fruit of your womb.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미사 강론
성모승천대축일 거룩한 미사[2013년 8월 15일 주일(성모 승천 대축일)]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n/homilies/2013.index.html#homilies
https://www.vaticannews.va/en.html
[독서와 복음 말씀] 제1독서 : 요한 묵시록 11,19ㄱ; 12,1-6ㄱㄷ.10ㄱㄴㄷ
화답송 : 시편 45(44),10.11.12.16(◎ 10ㄷㄹ)
제2독서 : 코린토 1서 15,20-27ㄱ
복음 : 루카 복음 1,3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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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텔 간돌포 2013년 8월 15일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의 끝 부분에서 우리에게 지극히 거룩하신 마리아님에 대한 매우 아름다운 묵상을 남겨 주었습니다. “마침내, 원죄의 온갖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시어 티 없이 깨끗하신 동정녀께서는 지상 생활의 여정을 마치시고 육신과 영혼이 하늘의 영광으로 올림을 받으시고, 주님께 천지의 모후로 들어 높여지시어”(59). 그리고 그 끝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어머니께서는 어느 모로든 하늘에서 영혼과 육신으로 이미 영광을 받으시어 내세에 완성될 교회의 표상이 되시고 그 시작이 되시는 것처럼, 이 지상에서 주님의 날이 올 때까지“(68). 우리 어머니의 이 가장 아름다운 표상의 빛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방금 들은 성경 말씀의 메시지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가지 단어에 초점을 맞출 수 있습니다. 싸움, 부활, 희망.
요한 묵시록의 구절은 여인과 용의 싸움의 환시를 보여 줍니다. 교회를 나타내는 여인의 모습은 한편으로는 영광스럽고 승리에 차 있으며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아직 해산의 진통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그와 같습니다. 즉 하늘 나라에서 교회가 어떤 면에서 이미 그의 주님 영광과 관련이 있다면 역사 안에서 교회는 계속해서 하느님과 악의 존재 지속되는 적과의 갈등들이 가져다 주는 시련과 도전들을 겪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맞서야 하는 - 우리들 모두,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 우리가 직면해야 하는 - 싸움 안에서 마리아님은 그들을 홀로 두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어머니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어머니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걸으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마리아님은 이원적 조건을 공유하십니다. 그분 성모님께서는 물론 이미 완전히 천상 영광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분께서 우리와 멀리 계시거나 떨어져 계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리아님은 우리와 동행하시고 우리와 함께 싸우시고 악의 권세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지탱해 주십니다. 마리아님과 함께 하는 기도, 특히 묵주 기도 – 그러나 이것을 잘 들으십시오. 묵주기도. 여러분은 매일 묵주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나는 여러분들이 하고 있으리라고 확신하지 않습니다(사람들이 “네!”하고 소리치다)… 정말입니까? 자, 마리아님과 함께 하는 기도, 특히 묵주기도는 이 “고통”의 차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싸움의 기도이고 악마와 그 동료들에 대항하는 싸움 속에서 지탱해 주는 기도입니다. 묵주기도는 또한 싸움에서 우리를 지지해 줍니다.
제2독서는 우리에게 부활을 이야기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쓰고 있는데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진실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고 역설합니다. 우리의 모든 믿음은 관념이 아닌 사건인 이 기본적인 진리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님의 승천하신 몸과 영혼의 신비조차도 온전히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 새겨져 있습니다. 어머니의 인성은 죽음에서 생명[삶]에 이르기까지 아드님 자신의 행로 안에서 아드님에게 “이끌립니다”. 최종적으로 완전히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님에게서 그분이 받으신 모든 인성을 가지고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녀, 어머니께서는 당신 삶을 통해 충실하게 그분을 따르셨는데, 어머니께서는 당신의 마음으로 그분을 따랐고 그분과 함께 하늘나라, 천국, 아버지의 집이라고 우리가 부르는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마리아님은 또한 십자가의 순교를 경험하셨습니다. 당신 마음의 순교, 당신 영혼의 순교. 그분께서는 당신 영혼의 깊숙한 곳까지 당신 아드님의 수난을 사셨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온전히 그분과 일치하셨고 그리고 그렇게 마라아님께 부활의 선물이 주어졌습니다. 그리스도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맏물이시고 마리아님은 구속 구원 받은 이들의 첫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들”의 첫 째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그분께서 우리의 대리인, 우리의 자매, 우리의 큰 누이라고 말할 수 있고, 그분께서 하느님 나라에 구속 구원 받은 이들의 첫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복음 말씀은 우리에게 세 번째 단어를 제시합니다. 즉, 희망. 희망은 갈등-생명과 죽음, 선과 악 사이의 싸움-을 겪으면서 그리스도의 부활과 사랑의 승리를 믿는 사람들의 덕목입니다. 우리는 마리아님의 노래, 마니피캇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희망의 노래입니다, 그것은 역사를 통해 걸어가는 하느님 백성의 노래입니다. 그것은 많은 성인들의 노래, 남자들과 여자들, 어떤 명성 있는 그리고 우리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하느님께는 알려져 있는 아주 많은 다른 이들- 즉 엄마들, 아빠들, 교리 교사들, 선교사들, 사제들, 수녀님들, 젊은 이들, 심지어 어린이들과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노래입니다. 이 사람들이 그들의 마음 안에 작은 이들의 희망과 겸손한 이들의 희망을 품으면서 삶의 싸움에 맞서 왔습니다. 마리아님은 기도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 오늘, 교회도 세상 모든 곳에서 이 노래를 부릅니다. 이 노래는 특히 그리스도의 몸이 수난 받아 고통을 겪고 있는 곳에서 강력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자가가 있는 곳은 언제 어디서나 희망이 있습니다. 희망이 없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것이 내가 이렇게 말하고 싶은 이유입니다. 희망을 빼앗기도록 당신 자신을 놓아 두지 마십시오. 우리가 희망을 빼앗기지 않기를, 왜냐하면 이 힘은 우리의 눈을 하느님 나라에 고정시키고 앞으로 우리 자신을 나아가게 하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은총이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리아님은 언제나 그곳에, 저 공동체, 우리의 형제 자매들 가까이에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그들과 동행하시고 그들과 함께 고통을 받으시고 그리고 그들과 함께 희망의 마니피캇을 노래하십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의 온 마음으로 우리도 우리 자신을 이 인내와 승리의 노래, 싸움과 기쁨의 노래에 일치시킵시다. 이 노래는 승리하는 교회와 순례하는 교회를, 지상과 천상을 일치시키고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여정이 향하여져 있는 영원과 우리의 삶을 합쳐 줍니다. 아멘.
(최종 번역 날짜와 시간 2020. 8. 15. 00:39)
-박기석신부-
“가톨릭 교회가 마리아에 대하여 믿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마리아에 대하여 가르치는 것은 또한 그리스도 신앙을 밝혀 준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487항은 그리스도교 신앙 고백 가운데 성모 마리아에 대하여 이렇게 언급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성모 승천에 대해서도 966항에서 다음과 같이 분명히 합니다. “마침내, 원죄의 온갖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시어 티 없이 깨끗하신 동정녀께서는 지상 생활의 여정을 마치시고, 육신과 영혼이 하늘의 영광으로 올림을 받으시고, 주님께 천지의 모후로 들어 높여지시어, 군주들의 주님이시며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자이신 당신 아드님과 더욱 완전히 동화되셨다. 거룩한 동정녀의 승천은 당신 아들의 부활에 특별히 참여한 것이며,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을 앞당겨 실현한 것이다.”
그렇습니다. 마리아의 승천은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로마 8,30)라는 말씀이 마리아에게서 실현되었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마리아의 승천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순종, 헌신적인 태도,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겪으신 몸과 마음의 수고와 시련의 삶이 무위로 돌아가지 않고 온전히 하느님 안에 받아들여져 완성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 복음은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을 전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어머니께 드리는 엘리사벳의 인사에 대한 응답으로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을 찬양하십니다. 따라서 성모님의 겸손함이 드러나는 이 노래가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비천한 여종을 굽어살피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를 기억하도록 성모님께서는 맏물이신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오게 하셨고, 또한 재림하시도록 ‘가난한 이들’의 희망을 노래하셨기 때문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농장을 운영하던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의 노력으로 농장은 점점 커졌고, 이제 더는 혼자 운영하기 힘든 상태가 되었지요. 그래서 관리인을 공개 모집했지만, 워낙 일이 많은 농장 일이기에 관리인을 해보겠다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얼마 뒤에 드디어 한 명의 지원자가 나타났습니다. 농장 주인이 그에게 자신의 장점이 무엇인지를 묻자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태풍이 몰아치든, 눈보라가 몰아치든 아주 편안하게 잠을 잘 잡니다.”
이게 무슨 장점인가 싶었지만, 다른 지원자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이 사람을 채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 이 사람은 아주 성실했고, 이 모습에 농장 주인은 만족스러웠습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이 농장에 커다란 폭풍이 덮쳤습니다. 폭우와 거센 바람에 놀란 농장 주인은 서둘러 농장에 가서 관리인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관리인은 너무 편안하게 자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너무 화가 나서 흔들어 깨웠지만, 관리인은 잠에 취해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할 수 없이 농장 주인 혼자서 걱정되는 축사와 밭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깜짝 놀랐습니다. 축사 지붕은 단단하게 묶여 있었고, 밭 주변은 배수로를 넓게 파서 태풍으로부터 피해를 보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면접 당시에 태풍, 눈보라에도 편안하게 잠을 잘 잔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만큼 철저하게 준비하는 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걱정과 불안으로 힘들어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바로 철저한 준비가 아닐까요? 준비 없이 걱정과 불안으로 지금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오늘 우리는 지상 생애를 마치신 다음 하늘로 불려 올라가신 성모님의 승천을 기념합니다. 성모님께서 이런 영광을 얻으실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단순히 하느님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이것도 이유가 되기는 하겠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어떤 상황에서도 무조건 하느님과 함께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잉태 소식을 들었을 때도, 예수님을 낳았을 때도, 에집트로 피난 갔을 때도, 성전에서 예수님을 잃어버렸을 때도, 사랑하는 아들의 수난과 죽음을 목격할 때도……. 그의 기준은 늘 하느님의 뜻이었습니다.
이것만큼 이 세상을 잘 사는 길이 있을까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가장 크고 철저한 준비였습니다.
우리 역시 바라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철저하게 해야 합니다. 성모님의 모범을 본받아 철저히 하느님과 함께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인생에서 최고의 행복은 우리가 사랑받고 있음을 확신하는 것이다(빅터 위고).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
모래알 하나를 보고도
너를 생각했지
풀잎 하나를 보고도
너를 생각했지
너를 생각하게 하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 없어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
정채봉 시인의 시입니다. 이 시를 읽으면서 큰 공감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저 역시 사랑하는 어머니를 주님 곁으로 떠나보내고 나서 무엇을 보든 어머니가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묵상 글을 쓰면서도, 묵주기도를 하면서도, 전화기를 봐도, 또 예전에 어머니와 함께했던 장소를 가도 어머니가 생각났습니다.
사랑하는 관계는 이렇게 내 일생을 만듭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생전에는 제대로 표현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후회입니다. 그러나 기도 안에서 만난다는 희망을 품게 됩니다. 그리고 언젠가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나리라는 기대 속에서…. 그 사랑을 간직합니다.
내가 어디로 향하는지 아는 방법
-전삼용신부-
오늘은 성모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신 날을 기념합니다. 예수님이야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다시 아버지께 승천하시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모 마리아는 우리와 같은 한 인간이십니다. 그런데도 당신 아드님처럼 하늘로 승천하셨다는 사실은, 우리 또한 성모님처럼 하늘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줍니다.
그런데 성모님께서 그 순간에만 하늘로 오르셨던 것일까요? 성모님은 살아계셨을 때부터 하늘로 향하고 계셨습니다. 이 세상에서부터 하늘로 향하지 않으면 마지막에도 하늘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하늘이라는 말은 땅이라는 말이 떠오르게 합니다. 우리는 모두 지금 하늘로 향하든, 땅으로 향하든 그 길을 열심히 걷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죽음과 함께 그 방향의 끝까지 도달하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하늘로 걷고 있는지, 땅으로 걷고 있는지 반드시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알려면 내가 어떠한 추진력을 사용하는지 알면 됩니다. 모든 발사체는 뒤로 뿜는 추진력이 있습니다. 내게서 뿜어나오는 추진력이 나의 속도와 방향을 알 수 있게 합니다. 만약 나를 통해 물이 끊임없이 흘러나가고 있다면 나는 분명히 물의 원천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노를 저으며 물줄기를 거슬러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올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이 홍주연 작가의 『더 해빙』입니다. 홍주연 작가는 사업 실패로 돈에 대한 트라우마가 심했던 아버지 밑에서 컸습니다. 아버지는 자린고비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굴비였습니다. 아버지가 췌장암에 걸렸다고 하여 홍주연 작가가 마지막에 굴비라도 실컷 드시고 가시라고 10마리 보내드렸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것도 아껴 드시다 5마리를 남기고 돌아가셨습니다. 병원도 굳이 6인실을 선택하여 죽을 때까지 돈을 아끼셨습니다. 그러나 홍주연 작가는 ‘그렇게 돈을 아끼면서도 왜 아버지는 평생 가난하셨을까?’를 궁금해하였습니다. 물론 자신도 돈을 쓰는 것에서 항상 불안하고 부족함을 느꼈습니다.
그러다가 어렸을 때부터 비범하였고, 지금은 전 세계 재벌들의 컨설팅을 해 주고 있는 이서윤 선생을 만납니다. 그녀는 수십만 명의 부자들을 연구하여 ‘해빙’(Having)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낸 인물입니다. 그녀는 홍주연 작가에게 돈을 많이 벌고 싶다면 기쁘게 쓰라고 말해줍니다. 돈을 낭비하라는 말이 아니라, 돈을 쓰면서 기쁜 마음이 들 때만 쓰라는 것입니다. 꼭 필요했던 것, 혹은 누군가를 도와줄 때는 돈을 쓸 때 마음이 기쁩니다. 그렇게 무언가를 기쁘게 내어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그 원천으로 향하게 됩니다. 원천으로 향할수록 더 많이 받게 됩니다. 원천은 그것이 솟아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돈도 물처럼 흐름이 있는데 기쁘게 흐르는 그 흐름에 자신을 맡길 때 부족함이 없어진다고 합니다.
이렇듯 무언가를 기쁘게 내어줄 때, 그것이 무엇이든 그 기쁘게 내어주는 것의 원천으로 향하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내가 용서를 기쁘게 하고 있다면 자비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향하고 있는 것이고, 내가 말씀을 전하고 있다면 진리이신 주님께 향하고 있는 것이고, 내가 사랑하고 있다면 사랑 자체이신 주님께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내가 누군가를 쉽게 미워하거나 질투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미움의 원천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빨리 회개하지 않으면 되돌아올 수 없는 만큼 가버리고 맙니다.
구약에 하늘로 승천한 사람이 두 명 나옵니다. 에녹과 엘리야입니다. 에녹이 하늘로 승천한 이유는 ‘하느님과 함께 걸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걷는다는 말은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는 뜻입니다. 누군가의 존재가 나와 함께 있다면 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의 뜻이 계속 나를 괴롭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과 함께 있다면 하느님의 뜻이 나를 괴롭힐 것이고, 그 뜻을 받아들여 실행한다면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성모 마리아는 하늘에서 온 가브리엘 천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성모 마리아는 신약의 에녹이셨던 것입니다. 하늘의 뜻이자 하느님의 아드님을 세상에 내어주셨으니 그 추진력으로 말씀의 고향으로 향하신 것입니다.
그다음에 엘리야가 있습니다. 엘리야는 하늘로 오르며 자신의 제자 엘리사에게 자신의 망토를 떨어뜨렸습니다. 엘리사가 그 망토로 강을 치니 강이 두 갈래로 갈라졌습니다. 이는 마치 홍해를 가를 때 모세가 들었던 지팡이와 같은 힘을 지닌 것입니다. 바로 ‘성령’이고 ‘은총’을 상징합니다. 누군가에게 은총을 주고 있다면 그 사람은 은총의 원천으로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눈치채십니다. 포도주는 은총입니다. 교회에 은총이 부족한 것을 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총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 갑니다. 그리고 그 은총을 내려주시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이렇게 성모님은 교회에 은총을 중개하시기 위해 그리스도께 가셨습니다.
하늘로 오르는 방법은 지금부터라도 하늘에게서 오는 것을 기쁘게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말씀과 은총의 중개자가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모 마리아는 한 인간으로서 우리가 쫓겨났던 에덴동산에 어떻게 다시 오르는지 보여주신 최초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조재형신부-
‘끌림과 떨림’은 비슷한 면도 있고, 다른 면이 있습니다. 처음 본 사람인데도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사람처럼 끌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격이나 취미가 비슷하면 더 끌리기도 합니다. 음식도 그렇습니다. 맛이 있는 음식도 있지만 입맛에 끌리는 음식도 있습니다. 술도 비싼 술이 좋지만 입맛에 끌리는 술이 있습니다. 저는 해산물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예수님께 마음이 끌린 사람이 있습니다.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소리쳤던 소경, 깨끗해지기를 바랐던 나병환자, 부하의 병을 고쳐달라고 찾아왔던 백인대장, 딸의 병을 위해 찾아왔던 여인,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했던 자캐오, 예수님께 시중들던 마르타, 예수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듣던 마리아가 있습니다. 세상의 욕망과 권력에 끌리기보다는 우리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끌리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청혼하는 연인은 마음이 떨릴 것입니다. 서품식에서 바닥에 엎드려 성인호칭기도를 듣는 서품자의 마음도 떨릴 것입니다. 둥지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하늘을 나는 새도 떨릴 것 같습니다. 드디어 새집을 마련해서 입주하는 아내의 마음도 떨릴 것입니다. 처음 무대에서 노래하는 가수의 마음도 떨릴 것입니다. 저도 첫미사를 봉헌할 때 무척 떨렸습니다. 무서워서 떨리는 것이 아니라 가슴이 벅차서 떨리는 것입니다. 하혈이 멈추었던 여인의 마음도 떨렸을 것 같습니다. 들것을 들고 걸을 수 있었던 중풍병자도 떨렸을 것 같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났던 막달라 마리아도 떨렸을 것 같습니다. 다락방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제자들도 떨렸을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께 말씀을 들었던 제자들도 떨렸다고 합니다. 익숙함으로 소중함을 잊어버리기보다는 처음 성체를 모셨던 그 설렘과 순수함으로 신앙을 간직하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성모승천 대축일입니다. 초대교회는 성모님께서 죽음을 거치지 않고 하느님께로 가셨다고 믿었습니다. 교리적으로는 성모님께서는 원죄 없이 잉태되셨기 때문에 원죄의 결과인 죽음을 맞이할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신학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인간이면서 하느님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성모님은 이제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다고 이야기합니다. 성모님께 대한 이 모든 찬사와 공경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요? 우리는 그것을 천사 가브리엘과 성모님의 대화에서 알 수 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성모님께 아이를 가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이끄심이며 하느님의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성령의 이끄심을 받아들이면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면서 성모님께 대한 찬사와 공경은 시작된 것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들 모두 언젠가 하느님의 품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의 표징입니다. 누군가 이야기 했습니다. 영원한 것은 끝도 없는 시간의 연장이 아니라, 영원한 것은 채워짐이라고 했습니다. 희망이 채워지고, 사랑이 채워지고, 믿음이 채워지는 것이 바로 영원함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끝도 없는 시간의 연장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 속에서 우리 모두는 사랑으로 채워 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우리 신앙인이 가야할 미래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일생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충실한 응답이었습니다. 성모님은 자신의 삶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으셨습니다. 우리도 성모 마리아처럼 자신보다는 이웃과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는다면 이 세상에 더 많은 평화가 이룩될 것입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많은 문제와 어려움들이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의 도우심으로 지혜롭게 극복되기를 기도드립니다.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창조주를 아기로서 품에 안았던 분이 하느님의 집에 사랑으로 가득 차서 머무는 것을 옳은 일입니다!
-양승국신부-
성모승천대축일입니다. 하느님의 총애를 입으신 성모님께서 하늘로 불러올림을 받으셨음, 즉 구원되셨음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1950년 11월 1일 비오 12세 교황님께서는 회칙 ‘지극히 자애로우신 하느님’을 통해서 성모 승천을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습니다.“원죄에 물들지 않고 평생 동정이셨던 하느님의 모친 마리아는 현세의 생활을 마치신 후 육신과 함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 영광을 입으셨다.”
성모 승천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희망을 주는 사건입니다. 승천하신 성모님께서는 오늘 지상 순례 여정을 걷고 있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내 사랑하는 자녀들이여! 용기를 내십시오. 여러분에게도 가능한 일이 승천이고 구원이여, 천상 영광에의 참여입니다.”
성모 승천은 하느님께 대한 성모님의 신앙과 순종, 헌신적인 태도가 무위로 돌아가지 않고 구원과 승천이라는 풍성할 결실을 맺었음에 대한 확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모님처럼 하느님께 자신을 개방하면서, 그분의 구원 의지 실현을 위해 헌신한다면 성모님처럼 구원과 승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성모 승천은 지상 순례 여정 중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희망의 징표로 제시됩니다. 아울러 성모님이 도달한 목표는 성모님 당신 개인만의 목표가 아니라 믿는 모든 이들의 목표, 교회의 목표요, 오늘 우리들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마리아 안에서 교회는 궁극적이고 지속적으로 자신의 목표에 도달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교회는 후에도 이 목표에서 빗나갈 수 없다. 마리아의 현양은 세상 종말에서 교회 현양을 위한 보증이다.”
교회 전승에 따르면, 성모님께서는 성령강림 직후 에페소로 가셨습니다. 골고타 언덕 위에서 아들 예수님께서 남기신 유언에 따라 요한 사도과 함께 지내셨습니다.
평소 성모님의 성향을 고려할 때 절대 편안히 계실 분이 아니었습니다. 요한 사도를 비롯한 여러 사도들의 어머니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다 하셨을 것입니다. 사도들을 뒷바라지하면서, 틈만 나면 기도하면서, 언젠가 상봉하게 될 당신 아들 예수님을 매일 그리워하며, 경건한 삶을 살아가셨습니다.
성모님의 죽음과 승천에 관한 전설은 다양합니다. 한 전설에 따르면 성모님의 임종이 가까워지자 선교를 위해 사방에 흩어져있던 사도들이 모여와 마지막 인사를 올렸답니다. 이윽고 성모님께서 임종하시자 사도들은 기도와 찬미가로 그녀의 덕을 기렸고, 정성껏 장례를 치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멀리 선교 나가 계셨던 토마스 사도는 빨리 달려온다고 최선을 다했지만, 도착해보니 장례를 치른지 이미 사흘 뒤였습니다. 너무나 안타까웠던 토마스 사도는 성모님 얼굴이라도 뵐려고 무덤을 열었는, 그분의 시신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수의는 잘 개어져 있었고, 아주 향기로운 냄새가 무덤 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답니다.
현장을 목격한 사도들은 이렇게 외쳤답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당신 어머님을 부활시키셔서 그 정결한 육신을 모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성모승천은 교회와 전 인류가 그토록 바라던 최종적인 희망이 실현됨을 보여주는 축제일입니다. 성모승천은 인류 구원의 역사가 완성되었을 때 모든 사람들이 누리게 될 영광을 미리 보여주는 위로와 희망의 표지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성모승천 교리를 굳게 믿는 우리들은 오늘 자신의 처지가 아무리 실망스럽더라도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좌절이 클수록, 고통이 커질수록, 우리가 나아갈 길이자, 역할모델이신 성모님을 바라봐야할 것입니다.
성모 승천과 관련된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의 찬미가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창조주를 아기로서 품에 안았던 분이 하느님의 집에 사랑으로 가득 차서 머무는 것을 옳은 일입니다. 성부께서 간택하신 신부가 하늘의 신방에서 사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당신의 아들이 십자가에 매달린 것을 가까이서 보며, 아들을 낳으실 때도 느껴보지 못했던 칼날 같은 슬픔을 느낀 이가 자기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앉아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승리가 죽음을 삼켜버린 대사건, 예수님의 부활 승천의 복사판입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비록 나약한 인간이지만 썩는 몸에 썩지 않는 것을 입은 위대한 사건입니다.
성모님의 승천, 성모님께서 직천당(直天堂)하시고 성인 중의 성인이 되신 것은 우리에게 큰 희망을 준 대사건입니다. 우리가 비록 썩을 몸을 지닌 인간이지만, 우리도 언젠가 성모님처럼 불멸의 갑옷으로 갈아입을 수 있음을 보여준 은혜로운 대사건입니다.
우리도 승천에 참여하기 위하여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요한 14,3).”
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하느님 나라로(아버지의 집으로)
모시고 가신 일이고, 신앙인들에게 하신 당신의 약속을
틀림없이 지키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일입니다.
그런데 우선 먼저 ‘승천’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승천은 지상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일로 표현되지만,
그 하늘이 우리가 늘 보고 있는 그 하늘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승천은 ‘하느님께서 계시는 곳’으로 가는 일입니다.
그곳을 인간들이 생각하는 공간 개념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하느님의 오른쪽으로 가신 일, 즉 원래의 당신의 위치로
되돌아가신 일이고, 하느님이신 당신의 본 모습으로 되돌아가신 일이고,
인간의 한계를 초월해서 언제나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서
존재 방식을 변화시키신 일입니다.
그래서 ‘승천하신 예수님’은 ‘우리를 떠나신 예수님’이 아니라,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입니다.
성모님의 승천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승천하신 성모님은 우리를 떠나신 분이 아니라,
언제나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어머니로서 자녀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하시고,
자녀들을 보살피고 계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회개해서 구원을 받는 것,
즉 우리도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모 승천을 경축하는 것은 단순히 경축하고 기념하는 것으로
그치는 일이 아니라, 우리도 성모님처럼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기 위해서
노력하겠다고 다짐하는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죽은 이들의 문제를 여러분도 알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죽은 이들을
그분과 함께 데려가실 것입니다(1테살 4,13-14).”
‘죽음’은 끝이 아니라 인생의 한 과정이고,
새 생명으로 가는 관문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누구든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 ‘죽음’이라는 문을 통과한 다음에
예수님, 성모님과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명령의 외침과 대천사의 목소리와 하느님의 나팔 소리가 울리면, 주님께서 친히
하늘에서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고, 그다음으로, 그때까지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이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1테살 4,16-17).”
일부 사이비 종파에서 ‘들려 올라가’ 라는 말 때문에 ‘휴거’ 라는 이상한 말을
만들어서 세상을 시끄럽게 한 일이 있는데,
우리 교회는 휴거가 아니라 승천을 믿고 있습니다.
실제로, 또는 구체적으로 재림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자격 없는 사람들’은 주님을 맞이하지 못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주님을 맞이하고, 주님과 함께 살기를 바란다면, 합당한 자격이 있어야 하고,
그 자격은 ‘지금, 여기에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함으로써 얻을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1테살 5,6).”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진노의 심판을 받도록 정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차지하도록 정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살아 있든지 죽어 있든지 당신과 함께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1테살 5,9-10).”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구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아무나 그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생명을 누리려면, 항상 깨어 있으면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참여해야 합니다(마태 16,24).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생활인데,
성모님은 가장 먼저 예수님 뒤를 따라가신 분이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 입장에서는 “성모님 뒤를 따라가는 일”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성모님은 “자신을 버리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 일에서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되시는 분입니다.
성모님께서 누리시는 영광을 찬양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만,
만일에 그것으로 그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찬양만 하지 말고, 우리도 그 영광 속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 안에 영원히 머무르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9-10).”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을(계명을) 지키는 것이 곧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고,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당신의 계명’을 지켜야만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무를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성모님의 승천에 참여할 수 없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고,
예수님과 함께 살 수 없다는 경고 말씀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특별히 강조하셨습니다(요한 15,12).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예수님 입장에서 하신 말씀이고,
우리 입장에서 생각하면 ‘내가 먼저’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면 이웃 사랑 실천만 잘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
그것은 아니고, 신앙인으로서 해야 할 일들을 다 잘해야 하고,
그리고 ‘사랑 실천’으로 그 일들을 완성해야 합니다(로마 13,10).
만일에 다른 일들은 다 잘하면서도 사랑이 없다면 그 일들은 아무런 가치가 없고,
다른 일들은 하나도 안 하면서(믿음도 없고, 기도도 안 하고...)
사랑 실천만 잘한다면, 그 실천은 위선입니다.
-조욱현신부-
8월 15일은 광복절이며 성모승천 대축일이다. 성모승천에 대한 것이 성서에 나타난 근거는 없지만, 초대교회에서부터 이에 대한 신앙을 간직해 왔고 1950년 11월 1일 교황 비오 12세가 ‘대자대비하신 하느님’(Muniticentissimus Deus)이라는 칙서를 통해 믿을 교리로 선포하셨다. 교회는 2000년간을 마리아의 승천을 기념했으나 정식으로 신앙 교리로 선포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교회는 오늘 하느님의 모친,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의 가장 큰 축일을 지내고 있다.
복음: 루카 1,39-56: 마리아의 노래
주님의 천사가 성령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전갈을 마리아에게 전한지 얼마 안 되어서였다. 그리고 불가능한 상황에서 아이를 낳게 하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을, 즉 남자가 없는 처녀가, 그리고 아기를 낳을 수 없던 엘리사벳, 노인 즈카르야의 아내가 아기를 가졌다는 것과 마리아도 아기를 가졌다는 것을 보증해 주었다.
마리아는 천사에게 즉 하느님께 충실히 그 뜻을 받아들이고 있다. “말씀하신 대로”, 즉 하느님의 말씀대로(38절). 하느님의 말씀을 잉태하고 즉시 집을 떠나 엘리사벳을 방문하고, 도와주기 위해 서두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엘리사벳에게 인사한다.”(aspázomài).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한 마리아는 이제 성령으로 가득 차 있다(35절). 그리고 엘리사벳이 당신 친척의 “인사”(aspamós)(36절)를 들었을 때, 먼저 당신의 태중의 아기가 성령으로 가득 차 기뻐하였다. 마리아의 방문과 인사는 엘리사벳에게 또한 성령의 충만함을 주었다(41절).
이렇듯 마리아는 첫 번째로 성령을 받은 분이셨으며, 엘리사벳은 두 번째 성령을 받으신 분이시다. 이분들은 바로 성령을 전달해 주는 분들이다. 이 두 여인은 함께 태어날 아기들에게 있어 주님의 공동체, 구원의 공동체, 위대한 왕의 거룩한 나라의(참조: 시편 47,3; 마태 5,35), 성령으로 준비된 성전의 처음의 중심인물이 된다.
마리아 승천 축일의 의미
오늘 축일은 마리아의 신앙과 삶의 승리와 영광을 드러내 주는 동시에 구원역사의 완성에 희망을 준다. 성모승천은 예수님 부활의 은혜를 입은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언젠가 성실한 신앙인 모두에게 주어질 부활의 영광을 마리아를 통하여 미리 앞당겨 이루신 사건이다. 즉 성모승천은 예수님 부활의 재확인이며 미래에 이루어질 우리의 부활의 보증이다.
여기서 예수님과 마리아의 관계는 스스로 당신을 비우시고 낮추신 하느님께 당신의 육체를 내어드림으로써 하느님의 아들이 완전한 인간이 되게 하셨기에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다. 이 완전한 인간인 그리스도는 세상의 구원이시다. 우리도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을 생활하면 우리도 그 말씀을 세상에 다시 낳아주는 마리아가 된다. 마리아를 닮는 삶으로 우리가 모두 같은 영광에 참여할 것이다.
마리아는 믿음의 여인
이렇게 마리아를 보면 모든 것이 믿음에서 출발하여 완성에 이르는 모습이다. 즉 천사의 알림에서 십자가 사건 그리고 성령강림까지 믿음으로 가득한 분이시다. 아브라함보다 더 자신을 하느님께 내맡긴 믿음으로 아드님의 구원사업에 협력하신 분이시며, 하와의 불순종의 매듭을 당신의 순종으로 풀어주시고 세상에 구원을 얻을 수 있게 한 새로운 하와이시다.
마리아는 우리에게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르쳐 준다.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그분의 역사를 인정하며, 감사와 찬미를 드릴 수 있게 해준다. 마리아는 단순히 예수님을 낳으신 그 혈연관계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던 신앙의 여인이었기 때문에 복된 분이시다. 그러나 그분의 생애에 언제나 칭송과 영광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분은 어머니로서 또한 많은 고통을 받으신 분이시다. 그러나 항상 하느님께 대한 변치 않는 믿음이 모든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우리 신앙인의 모델인 성모님께서 인간으로서 당신이 하늘의 영광에 첫 번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이 우리 모든 믿는 이들에게 마리아와 같은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준다.
우리의 생활이 마리아의 삶을 따를 때,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으며,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낳아줄 수 있다. 마리아로서 살도록 노력하자. 그것이 우리 신앙인들이 가야 할 길이다.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습니다.(루카 1, 52)
-한상우신부-
어머니의
이름을 다시
불러봅니다.
어머니의
사랑에서 진실로
아름다운
사람의 삶을
만납니다.
하늘을 닮은
사랑입니다.
하늘과 땅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을 낳으셨고
예수님과 함께
끝까지 낮아지신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에서
산다는 것이
견디며 또
견디는 기도임을
배웁니다.
아픔이 아픔을
일으켜세우고
비천함이 비천함을
달래어줍니다.
간절한 사랑이
하늘과 땅을
이어줍니다.
애달픈 사랑이
애타는 십자가의
절절한 봉헌이
됩니다.
올바른
사랑만이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가게 합니다.
참된 사랑은
모든 벽을 허물고
하늘로 오릅니다.
하늘을 품은
사람에겐
모든 것이
기적입니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
그 길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그길이
삶의 승천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모든
여정 모든 삶이
하늘로 오르십니다.
지극한 사랑이
지극한 승천의
기쁨이며
승리임을 믿습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성모님을 기립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마리아께서 천사의 방문을 받고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신 후 사촌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들은 인사말입니다. 엘리사벳이 성령의 감도를 받아 외친 이 말씀은 성모님은 물론 교회가 받은 커다란 선물입니다.
인간이 느끼는 행복의 조건은 매우 다양합니다. 어떤 이는 재물에서, 어떤 이는 명예에서, 어떤 이는 쾌락에서, 어떤 이는 관계에서, 또 어떤 이는 지적 성취와 깨달음에서 행복을 느낍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성모님께서 그러셨듯 믿음 때문에 행복한 존재일 것이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성모님은 인간 사고력의 한계 안에서는 믿을 수 없는 주님의 뜻을 믿음으로써 구원에 협력한 믿음의 여인이십니다. 그분의 생애는 믿음으로 견고하고 아름답게 짜여진 지성소의 휘장과 같을 겁니다. 그 휘장을 통해 성자께서 보호를 받으셨고, 그 휘장이 열림으로 구원자께서 세상에 드러나셨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마리아를 떠올리게 하는 여인이 등장합니다. 그녀는 "모든 민족을 다스릴 분"(묵시 12,5)을 낳은 뒤 악을 상징하는 용에게 쫓깁니다.
이는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창세 3,15)고 뱀에게 이르신 주님의 선고를 떠올리게 합니다. 요한 묵시록에서는 아이를 삼켜버리려는 악한 힘인 용과 여인의 대치가 숨막히도록 급박하게 펼쳐집니다.
"여인은 광야로 달아났습니다. 거기에는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처소가 있었습니다."(묵시 12,6)
여인은 이집트의 추격을 피해 갈대바다를 건너 광야로 달아난 이스라엘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주님의 백성인 우리까지도 그녀 안에 있는 셈이지요.
말씀이신 주님을 잉태하고 출산하고 양육하며 살아가려 애쓰는 우리를 악은 가만히 두지 않으려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방해하고 공격하는 세상의 온갖 악에서 우리를 피신시켜 활짝 열어젖힌 당신의 "처소"로 받아들이십니다. 그 처소는 우리에게 가장 안전하고 평화롭고 거룩한 주님의 '심장'이고 '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이들을 이야기합니다.
"각각 차례가 있습니다. 맏물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다음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분께 속한 이들입니다."(1코린 15,23)
사도는 모든 원수들이 그리스의 발 아래 굴복될 때, "그분께 속한 이들"이 주님과 함께 영광 안에 들어갈 것이라고 합니다.
성모님은 그 모든 때를 초월하여 마지막으로 파멸되어야 할 원수인 죽음의 부패를 겪지 않으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가장 철저히 속하셨던 마리아에게 특별한 은총을 베푸신 것이지요.
주님께 속한 우리 역시 그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비록 실패와 상실로 삶의 밑바닥까지 곤두박질쳤더라도 우리의 본래 자리,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열어두신 "처소"는 모든 원수를 이기신 주님의 '곁', 승천하신 성모님의 품이라는 희망입니다.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루카 1,52)
이토록 상상할 수 없이 놀라운 하느님의 자비를 오늘 마리아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분은 들어 올리시는 분, 들어 높이시는 분입니다. 인간 실존과 죄악과 나약함으로 끝간 데 모르고 추락하는 우리를 친히 당신 곁으로 들어 올려 제 자리를 찾아주시는 분이시지요.
사랑하는 벗님! 오늘 우리의 어머니신 마리아와 함께 이 희망을 노래합시다. 코로나19와 수해, 혐오와 분열, 가난과 소외 와중에도 지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주님 곁에 마련된 우리 자리를 바라봅시다. 그리고 천상으로 성모님을 모셔들이는 천사들과 성인들의 기쁨을 관상합시다. 마리아를 맞이하시는 성삼위 하느님의 사랑에 머무릅시다. 우리의 심장에서 희망의 빛이 꺼지지 않도록 멈추지 말고 기도합시다.
인격적인 승천의 행복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77429
-김기환 OFM-
몽소 승천을 사는 사람들 ♧♣
T.평화를 빕니다.
오늘은 성모 승천 대축일 입니다. 보통 성모님 승천을 몽소 승천이라고 합니다. 몽소 승천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승천과는 다르게 스스로가 아닌 하느님에 의해서 하늘로 들어높여져 하늘로 오르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셨기 때문에 누구에로부터 들어높여지신것이 아니라 스스로 하늘로 오르셨지만 성모님의 승천은 스스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의해서 하늘로 들어높여졌기 때문에 몽소 승천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몽소 승천은 성모님에게만 국한된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하느님을 믿고 바라고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모님과 같은 몽소승천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에 의해서 하늘로 들어높여진 삶은 반듯이 몸째 하늘이라고 하는 곳으로 올라가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라고 말씀하신것과 같이 하느님에 의해서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하느님에 의해서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신 것처럼 하느님에 의해서 들어 높여진 삶은 몸째 하늘로 올라가는 승천의 의미를 넘어서 넓은 의미로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로 볼때 우리는 이미 몽소 승천의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는 순간 죄와 세상의 욕망의 삶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뜻안에서 기쁨을 찾는 사람들이니 우리는 영적으로 하느님에 의해 몽소승천의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일상 생활 안에서 몸으로는 비록 이 지상에서 살고 있을 지라도 기도와 미사와 끊임없는 묵상을 통해 하느님과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이니 영적으로는 몽소승천의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만족할수 있는 쾌락을 쫒고 만족하기보다는 성령안에서 누리는 기쁨을 찾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영적으로 하느님에 의해서 들어 높여져 하늘나라의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들어 높여진다는 뜻을 몸째 하늘로 올라가는 것의 의미를 넘어서서 우리의 마음이 하느님께로 향하고 그분의 뜻을 살아가려고 할때, 마음으로 영적으로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믿으며 살아간다는 것이 우리는 성령에 의해서 우리는 이 지상에서 하늘나라로 들어 높여진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승천 대축일은 단지 성모님께서 하느님에 의해서 몸째 하늘로 들어 높여진 삶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교회의 대축일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우리가 친히 몽소승천의 의미와 영성을 이 삶안에서 살아가야 함을 기억하는 대축일인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성모님의 몽소 승천을 기억하며 교회가 기념하는 대축일을 넘어서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