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8월 9일 연중 제19주일

Margaret K 2020. 8. 8. 07:16

2020년 8월 9 연중 제19주일

 

그러다가 거센 바람을 보자

그만 무서운 생각이 들어 물에 빠져 들게 되었다.

그는 “주님, 살려 주십시오!”하고 비명을 질렀다..
(마태오 14,22-33)

 

 But when he saw how strong the wind was 
he became frightened;
and, beginning to sink, he cried out, 
"Lord, save m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기석신부-

 

오늘 독서와 복음은 삶의 불안 속에서 스스로 거두지 못하는 두려움을 극복하게 하시는 주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제1독서의 엘리야 이야기는 복음의 베드로 이야기와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통과 죽음이 도사리고 있지만 당신을 만날 수 있는 호렙산으로의 여행에 엘리야를 초대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역풍을 만나 풍랑에 시달리는 베드로를 당신께 걸어오도록 초대하시는 예수님과 비슷합니다.

그런 가운데 하느님께서는 돌풍, 지진, 불길 속에 계시지 않았고 오히려 잔잔한 미풍 속 작은 속삭임을 통하여 당신의 존재를 엘리야에게 드러내십니다.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풍랑 속에 시달리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잠잠해지지 않았습니까?

여기에서 우리가 관심을 더 가져야 하는 것은 바로 베드로의 말과 행동입니다. 베드로의 믿음은 한순간 순수하여 오직 주님만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오너라.”라는 말씀으로 초대하셨고 베드로는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걷게 됩니다. 그러나 그의 순수한 믿음은 불안과 의심으로 쉽게 무너지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인간 스스로가 가지는 다부진 용기가 아닙니다. 그보다도 우리 자신의 눈길이 결코 흐트러짐 없이 오직 주님만을 향하며 믿음의 길을 갈 때, 주님의 힘이 우리를 붙들어 준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의심하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문자 그대로 ‘자기 자신 안에서 둘로 떨어져 나간 상태’, ‘마음이 둘로 갈라져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의 자신감이 허물어진 상태가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는 마음이 둘로 갈려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흐트러짐 없이 바라보는 온전한 믿음만이, 불안과 의심이 생길 때마다 우리를 삼키려 입을 벌리는 바닥 모를 심연을 뛰어넘게 할 것입니다.

주님의 길로 인도하는 믿음

-키엣 대주교-

 

빵과 물고기의 기적을 베푸신 후 제자들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갔지만 예수님께서는 밤새 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기적을 베푸신 후 군중들은 예수님을 위해 무엇이라도 할 것처럼 흥분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받아들이기만 하신다면 이제 편안한 삶을 누리실 수도 있건만 예수님은 멀리 다른 길을 가셨습니다.

언제나 우리의 생각과 다른 선택을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항상 더 넓고 편리한 길을 택하는데 주님께서는 언제나 고통의 좁은 길을 택하십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쉽고 편리한 것, 더 편한 것, 더 빨리 성공할 수 있는 길을 찾지만 주님께서는 언제나 좁고 험한 길, 겸손의 길만을 선택하셨습니다.

광고는 ‘고객님을 가장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라고 유혹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면 고통의 길로 가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 학교를 졸업하면 사회에서 인정받고 좋은 회사에 취직하여 많은 봉급을 받는 성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라고 대학은 홍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놀랄만한 성공이나 세상을 발칵 뒤집는 기적으로 인간을 구원하려 하신 것이 아니라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 희생의 길로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왕의 자리는 당신이 가고자 하는 겸양의 길, 고난의 길, 좁은 길과는 전혀 다른 길이기에 군중을 떠나셨습니다. 또한 당신의 제자들이 스승의 권위만을 존경하는 제자가 되는 것을 우려하셨기에 제자들에게 먼저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권능때문이 아니라 주님께 충실한 삶을 살려면 오직 주님의 길만을 따라야 합니다. 그 외 다른 어떤 길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길을 따르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과거를 기억하며 현재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강력한 제국 이집트의 노예로 고통과 불행 속에 사는 유다인들을 해방시켜 주셨지만 그들은 과거의 어려움을 잊고 자만하고 이기적인 사람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자만과 이기심으로 가득찬 마음에는 은혜에 대한 감사도 믿음이 자리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처럼 스승님의 기적을 보았음에도 눈앞의 위협에 믿음은 너무나 쉽게 사라져버렸습니다.

주님을 믿고 주님의 길을 따르며 지금 이 순간을 성실하게 살아가야합니다. 사회의 일원으로서 본분을 다하고, 주님의 자녀로서 복음 속의 주님을 기억하고 주님에 대한 참 믿음과 숭배로 주님의 모든 길을 따라 걸으며 그분을 사랑하고, 마음을 다하여 주 하느님을 섬기는 것, 그리고 주님의 계명과 규정들을 지켜야 합니다.

주님의 자녀로서 주님의 겸양의 길, 좁고 험한 길, 십자가 고행의 길을 떠나야 합니다. 비록 그 길을 가는 동안 뜻하지 않은 많은 고난을 맞이하겠지만, 그 길은 주님의 길이기에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고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믿음만이 험난한 주님의 길을 완주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실것입니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선택의 기로에 있을 때 예수님처럼 좁은 길을 선택할 수 있습니까?

2. 믿음의 길은 어렵습니다. 그런데 왜 그 믿을 찾고자 합니까?

3. 주님의 길을 따를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나다, 안심하여라

-임상만신부-

 

한동안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갑자기 신앙생활을 접은 신자들에게 “왜 갑자기 냉담하게 되었냐?”고 물으면 “예수님 믿어도 되는 일이 별로 없고, 너무 힘든 일들이 많이 생겨서…”라는 푸념 섞인 대답을 듣는 경우가 있다. 예수님을 믿어도 원하는 일이 즉각 이루어지지도 않고 힘든 일들이 생기다 보니 예수님이 정말 계시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인생을 살다 보면 사업을 하거나 가정생활을 꾸려가는데 예상하지 못한 고통과 시련이 닥쳐오는 때가 많이 있다. 더욱이 우리가 주님의 말씀대로 살고, 주님께서 시키는 대로 행하고 특히 성당에서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는 경우에는 더 그렇다. 그럴 때마다 자신들에게 왜 이런 고통이 닥쳐오는 지 이유를 모르겠다며 아우성을 치다가 예수님을 떠나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이 탄 배에 가시기 전에 수천 명이나 되는 사람을 대상으로 저녁 늦게까지 하느님 나라에 대해 설교를 하셨다. 그리고 설교가 끝나자 허기로 인해 힘들어하는 군중을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배불리 먹이신 다음 예수님께서는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라고 이르셨다.(14.22) 당신의 사명은 군중이 바라는 ‘배부름의 행복한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 선포’라는 것을 분명히 하신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 후에 제자들에게 먼저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이르신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미 밤이 늦었기에 배 타기가 내키지 않았지만, 방금 전 놀라운 기적을 베푸신 예수님께서 재촉하시니 그분을 믿고 배에 올랐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큰 풍랑을 만나 죽을 만큼 큰 고생을 한 것이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 고통을 당하리라는 것을 이미 다 아시면서도 그들을 매우 힘든 상황에 내버려두셨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듣고 배워서 아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들 삶 깊숙이 예수님을 만나고 직접 체험해서 깨달아야 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예수님을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예수님을 배워서 믿고 따르게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3인칭 믿음’은 자신의 체험에서 비롯된 믿음이 아니기에 오래가지 못하고 온 힘을 다하여 그 믿음을 증거할 힘을 가지지 못한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증거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시련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허락하시되, 그들이 어떻게 헤쳐나가는지 멀리서 즐기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께서도 그 고난의 상황에 함께 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신다.

오늘 우리가 만난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들판에서도 그리고 풍랑이 이는 호수 한복판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시다. 제자들을 어두운 밤에 떠나보내시고 그들이 풍랑으로 시련을 당함에도 당신 홀로 기도만 하고 계시는 분이 아니라 물 위를 걸어서라도 직접 찾아오시어 “나다. 안심하여라” 말씀하시며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이시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말은 오직 이것뿐이다.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의 곁에 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준다. 내가 도와준다. 정의의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준다.”(이사 41,10)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임숙희-

 

예수님은 빵의 기적 후 호수에 제자들과 함께 계십니다. 어두운 밤, 거센 바람이 부는 호수에 배 한 척이 떠오릅니다. 바람에 흔들리면서 제자들을 목적지에 데려가는 배는 역사의 사건에 흔들리는 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 본문의 배경에는 ‘배’로 상징되는 교회가 겪는 역경과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더 큰 믿음의 필요성이 깔려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시선을 끄는 것은 ‘곧’이라는 표현(마태 14,22; 27; 31)과 함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보여 주시는 행동과 말씀, 제자들의 믿음입니다.

■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라
예수님은 빵의 기적 후에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십니다. 마태오는 이 구절에서만 ‘재촉하다’라는 그리스어 동사를 사용하는데 직역하면 ‘강요하다’를 뜻합니다. 제자들 홀로 배 안으로 들어가라고 강요한 것은 제자들에게 믿음을 요구한 것입니다.

흔들리는 파도 한 가운데에서 지내야 하는 긴 시간에 제자들은 자신의 소명의 순간, 예수님에 대한 기억, 특히 죽음의 위협, 어둠, 역경, 당혹, 곤혹, 동요 속에 ‘스승이 우리를 버리셨을까?’하는 의심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그들을 시련 안에 놓이게 하신 분도 예수님이고 그들을 돕는 분도 예수님입니다.

제자들만 배 안에 있을 때 예수님은 홀로 산에서 기도하십니다. 제자들에게도 예수님에게도 하느님 앞에서 식별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처럼(마르 26,36-46) 물러나시어 혼자 기도하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예언자로 찬양하고(요한 6,14-15) 그분을 정치 지도자로 만들고 싶어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수난과 죽음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시는 메시아이심을 망각하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쫓아다니면서 자신의 소명을 망각할 위험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의로, 제자들은 강요로 과감하게 군중을 떠나 홀로 하느님 앞에 서는 시간을 갖습니다.

제1독서 엘리야의 체험에 비춰 이 본문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영광의 순간에 ‘사도직에 좌절한 사도’로서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는 하느님 앞에 서서 다시 힘을 회복하고 다시 자신의 길을 갈 것입니다.

■ 용기를 내어라, 나다
호수에 거센 바람이 불어닥치고 제자들이 곤경을 겪고 있을 때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십니다. 그 시간(새벽 3~6시경)은 아직 어둡지만 기다리면 날이 밝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시간입니다. 성경에서 ‘동틀 녘’으로 표현하기도 하는 이 시간은 자주 하느님 구원의 기적이 일어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이 시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항상 보여 주던 방식이 아니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등장하십니다. 그분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서 창조물에 대해 권위를 가진 분으로서 하느님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을 하십니다. “당신 혼자 하늘을 펼치시고 바다의 등을 밟으시는 분”(욥 9,8), “너는 바다의 원천까지 가보고 심연의 밑바닥을 걸어 보았느냐?”(욥 38,16)

제자들은 그분이 바다 위를 걷는 것을 보시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말합니다. “유령이다!” 그리고 두려워 소리를 질러댑니다.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루카 24,37)
 

‘물 위를 걷는 예수’.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요한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줄곧 “나다”라고 소개합니다. 이 장면은 이스라엘이 홍해를 통과한 이야기, 요르단강을 건너는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나다”는 하느님이 불타는 가시덤불에서 모세에게 알려주신 이름(탈출 3,14)입니다.

이 신비로운 이름에는 하느님이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는 원인이자 모든 것의 창조자이시며, 하느님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이 발생하게 하는 원인이자 항상 우리와 함께 있는 분이시라는 세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이 의심을 품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다”라는 말로 당신 정체성을 알려 준 이유는 그분에 대한 믿음을 갖고 용기를 내 두려움을 극복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다
제자들만이 아니라 베드로도 믿음을 시험 받습니다. 제자들을 대표하는 베드로도 주님 현존에 대해 확인을 받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표징을 청합니다. “오너라”라는 말씀을 듣고 모험을 감행하지만 거센 바람을 보고 두려움에 빠집니다. 베드로를 구한 것은 온 마음을 다해 바치는 한 마디 기도였습니다.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마태 14,30) 이어 예수님이 베드로를 “믿음이 약한 자”라고 부르는데 ‘믿음이 작은 자’라는 뜻입니다. 마태오는 앞에서 ‘작은 믿음’을 일상의 필요에 관한 걱정, 두려움과 연결합니다. 여기서 ‘작은 믿음’은 베드로의 ‘의심’ 또는 흔들림에 적용합니다.

베드로의 믿음도 다른 제자들과 우리처럼 겨자씨 같은 작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런 작은 믿음 안에서 베드로는 자신이 살기 위해, 배 안에 있는 다른 제자들도 살리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진정한 기도를 바칩니다.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이 기도의 외침 덕분에 그는 바로 도움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베드로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신앙과 의심 사이의 인간적인 드라마를 이 기도로 해결함으로써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은 이미 완성된 사람이 아니라 ‘되어가는 사람, 성장하는 사람’임을 보여주는 모델입니다. 베드로는 나중에 목숨을 바쳐 양들을 사랑하고 지킬 것입니다. 베드로전서에서 그는 이렇게 신자들에게 권고합니다. “고통 중에 주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십시오.”

■ 성찰
인생의 기적은 자신의 어둠, 세상과 시대의 어둠 한 가운데에서 도피하지 않고 그 안에 오랫동안 머물 수 있는 힘, 싸울 수 있는 힘, 인내입니다. 인내는 기도 안에서 성령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이 시대에 참된 기적은 우리를 둘러싼 거센 바람이 잔잔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둠 속에서, 흔들리는 배 안에서도 새벽을 기다리며 그 안에 머물 수 있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새벽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 아멘.

 

부드럽고 조용한 하느님의 목소리

-신희준신부-

 

엘리야 예언자 하면 어떤 이미지부터 떠오르시나요?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가서 카르멜산에 가보신 분들은 불 칼을 들고 혈혈단신으로 450명의 바알 사제를 물리친 예언자의 모습이 제일 먼저 떠오르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제1독서인 열왕기 말씀에는 하느님을 만난 엘 리야 예언자의 체험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산에 홀로 있으면서 강풍, 지진, 산불 등을 맞이한 엘리 야의 모습에서 온갖 고난과 위험 속에서도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증언한 엘리야의 삶이 저절로 떠오릅니다. 특히 절 대 권력자 아합과 이제벨 두 사람을 상대하면서 목숨이 아 찔한 만큼의 격정적인 사건들이 무수히 많았을 겁니다. 그 런데 놀랍게도 그런 격정적인 사건들을 통해서 엘리야는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였다고 오늘 이야기는 전해줍니다. 그보다는 고요히 홀로 있는 시간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하 느님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묵상하면서 저는 항상 고요한 가운데에 머 물러야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다는 정도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홀로 호수에 빠져 좌절과 낙담,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간절하게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고 있는 베드로의 처지를 보고 있자니,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빵과 고기로 연 명하며 요르단강 동쪽의 크릿 시내에서 숨어 지내던 엘리 야의 비참한 모습이 저도 모르게 연상되었습니다. 그리고 혹은 가난 때문에, 혹은 탄압 때문에, 혹은 사회의 냉대와 무관심 때문에,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을 많은 이들의 모습 도 같이 떠올랐습니다. 문득 서정윤 시인의 시구가 떠오릅니다. “흔들리는 인간은 / 흔들리는 나무보다도 약하다.” (홀로 서기 2中) 공포와 절망에 놓여 있는 사람처럼 흔들리면서 나약한 존재는 없을 겁니다. 그런데 이 나약한 존재인 우리에게 하 느님은 말씀을 건네십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주십니다. 그 손을 붙잡을 때, 예수님은 우리 마음속에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그 순간 모든 절망과 공포와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그들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마태 14,32) 시인은 이어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 절망이 다정하게 느껴질 즈음 / 그대는 내 속에 별이 되었다. / 멀리 지켜보며 / 혼자 즐거운 나는 / 사랑의 신에 게 고마움을 전한다.” 완전히 버림받았다고 느낄 때마다 명심해야겠습니다. 우리는 결코 홀로 있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주 시고,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하느님은 이 시간에도 우리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바로 성체의 모습으로 하느님은 우리 ‘배’에 오르십니다. 교형자매 여러분, 새삼스럽지만 오늘 미사가 있고 성체 성사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기뻐하 도록 합시다. 하느님께서도 같이 기뻐하실 겁니다. 아멘

 

우리가 믿고 살아야 하는 것

오상직신부-

 

 오늘 복음 말미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 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어 제저녁 큰 사건(오병이어의 기적)이 있고 나서부터 지금 새벽까지 제자들은 역풍을 만나 안간힘은 쓰 며 배를 몰고 있는데 물 위를 걸어오시는 스승을 목 격합니다. 베드로는 청하여 스승과 함께 물 위를 걷 습니다. 그러다 무서워 빠진 베드로는 스승에 의해 구해지고, 그가 배에 오르자 불던 바람마저 멈춘 것 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스승님을 ‘하느님 의 아드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 고백은 제 자들이 스승의 진면목을 알았기 때문이 아니라, 지 치고 놀라서 엉겁결에 터져 나온 두려움 섞인 탄성 같습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는 ‘오병이어’라고 알려진 대단한 사건에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큰 사건이 있은 후 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재촉하여 반대편으로 떠나 보내고 혼자 군중을 돌려보내십니다. 제자들을 재 촉하여 군중들과 떼어내어 떠나보내신 것은 그들이 이 대단한 빵 사건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 니다. 더군다나 군중들 사이에서 읽히는 이상한 기 운을 알아차리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잽싸게 다독 이고 감동을 주어 질서정연하게 돌려보내신 것입니 다. 제자들은 스승의 사명, 선포를 이해하지 못했습 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이나 오늘처럼 물 위 를 걷거나 걷게 하는 기적을 행하는 분, 마귀를 몰 아내고 병든 이를 치유해 주는 의사, 혹은 죽은 이 까지 일으키시는 신통방통한 능력의 소유자라고 생 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일들을 보며 스승 이 선포하고 있는 하느님 나라를 알아가기보다 돈 이 되는 능력이라고 생각되는 스승의 그 기술을 배 우고 싶어 합니다. 그러니 스승이 선포하고 살아내 고 있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는 생각할 겨를이 없 습니다. 그분의 사명은 세상에서 이루어가는 하느 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며, 내가 살고 그들을 살 게 하는 것입니다. 빵 사건을 통해서도 그들은 이해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 을 보며 겁에 질려 “유령이다!”라며 스승을 한낱 물 위를 걷는 유령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예수님이 베드 로에게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라 고 하신 것은 믿음이 약하고 의심하여 물에 빠졌으 니 믿으면 물 위를 걸을 수 있으리라는 말씀이 아닙 니다. ‘내가 가르치고 보여주었고 같이 살고 있는 하 느님 나라가 진정으로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믿지 않 느냐? 내가 한 일들, 특히 너희들이 가진 그 몇 안 되는 빵과 물고기로 오 천 명이 공동 식사를 한 일 을 보아서라도 믿어야 하지 않느냐?’는 안타까움에 터져 나온 한마디 외침입니다. 우리가 믿고 살아야 하는 것은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이 아니라, 그분이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입니 다. 이 나라를 살기 위해 우리는 기도하며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고 힘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또 하느님 의 뜻을 실천하는 형제자매들과 함께 때로 위험과 두려움에 빠진 이들을 구하며 인내하며 살아야겠습 니다. 나의 기도와 인내는 제자들이 사도가 되어 목 숨 걸고 하느님 나라를 살며 전했듯 형제자매들에 게 힘이 되어줄 것입니다

관상기도 함께하기

-정원일신부-

 

오늘 독서와 복음의 주제는 기도이다. 그런데 하루에 몇 시간 기도하면 예수님 말씀처럼 살 수 있을까? 예수님은 우리가 몇 시간 기도하기를 원하실까? 보통 수도원에서는 하루에 4시간 기도하는 것 같다. 나는 사제가 되면서 평균 3시간씩은 기도 했었다. 이렇게 하면 기도가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도 나는 알코올 중독, 일 중독 등을 겪으면서 혼돈에 빠졌다. 여기에 마음의 병까지 심해져 우울증, 분노 조절 장애증 등이 겹쳐 사 제생활이 기쁘지 않았다. 매일 5시간씩 기도를 2년 하고부터는 이런 병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 이제는 죽을 때까지 매 일 9시간 기도하기로 서원하였다. 잠은 못 자고 밥은 못 먹어도 내가 약속한 기도 시간은 꼭 지 킨다. 매일 9시간 기도하면 어떻게 될까? 돈도 필요 없다. 친구도 필요 없다. 돈이 있어도 돈 쓸 시간 이 없고, 친구가 필요할 정도로 외로움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나 혼자만 기도하는 것이 너무나 아까웠다. 그래서 유튜브에 “관상기도 함께하기” 채널을 만들 었다. 페이스북에도 친구를 많이 신청했다. 매일 새벽 3시 30분부터 9시 50분까지, 오후에는 7 시부터 11시 30분까지, 하루에 10시간 이상을 실시간으로 유튜브와 페이스북에 방송하고 있다. 기도의 중요성을 알려 주기 위해서이다. 백세시대에는 기도가 답이다. 외로운 사람, 가난한 사람, 아픈 사람 모두 기도가 답이다. 살아있다는 것, 시간과 마음을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다는 것, 이만큼 더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일이 세상에 또 있을 까? “관상기도 함께하기” 채널로 오세요. 틀어만 놓으시고 듣고만 계셔 도 됩니다. 제가 대신 기도해 드리기 때문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세계 최초로 디지털카메라를 발명한 회사가 어디인지 아십니까? 현재 유명한 디지털카메라 회사를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최초로 이를 발명한 회사는 카메라 필름으로 유명한 ‘코닥’입니다. 1회용 카메라를 처음 발표한 회사도 ‘코닥’으로, 카메라의 대중화에 최전선에 있었습니다. 여기에 디지털카메라까지 처음 발명했고, 미 우주항공국 나사에 납품해서 우주에서도 사진을 찍도록 할 정도로 기술력이 뛰어났습니다. 그러나 2012년 1월 19일, 끝내 파산보호 신청을 했습니다.

필름 그 자체를 상징하는 전설적인 회사가 파산했던 이유는 끝까지 필름만을 고수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디지털카메라라는 신기술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기술이 필름 시장을 잠식할까 봐 기술을 서랍 깊숙이 처박아 둔 것이었습니다.

시대의 흐름을 외면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입니다. 우리 각자도 다르지 않습니다.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면 자연스럽게 도태되고 따라갈 수 없어 뒤처진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과거나 현재나 그리고 미래에서도 살아 움직이는 말씀입니다. 한순간에만 적용되는 말씀이 아닌, 계속해서 그 시대에 맞게 활동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거의 틀에 매어만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는 주님께서 물 위를 걷는 기적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기적은 참으로 인간이시며 동시에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분이 물 위에서도 땅 위처럼 걸으실 수 있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파도에 시달리고 있는 제자들을 구하러 서둘러 가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제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함이 아니었을까요? 새롭게 다가오는 어려움을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말씀만 하실 뿐이었습니다.

담대한 베드로조차 육신의 나약함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물에 빠집니다. 그러나 그는 소리를 치며 주님께서 구해주시기를 청하지요. 이 외침이 바로 ‘회개의 신음’ 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어렵고 힘들 때, 우리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안 될 때는 주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할 만큼 해봤다면서 포기하고 좌절 속에 빠지는 것은 주님께서 원하는 모습이 아님을 잊지 마십시오.

제1독서의 “주님 앞에 서라.”는 말씀에 머무르게 됩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믿음의 우리가 될 때, 세상의 변화를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삶을 계속해서 누릴 수 있습니다.

성공한 삶의 기준은 일도, 돈도 아니다. 당신이 느낀 즐거움의 크기이다(에스더 힉스).



조금만 더 멀리 바라봅시다.


마트에 가면 ‘1+1’이라는 안내가 붙어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괜히 관심이 갑니다. 예전에 안식년을 보낼 때도, 마트에 가면 늘 ‘1+1’ 상품을 구매했습니다. 하나 가격으로 또 하나를 얻을 수 있으니 얼마나 이득입니까? 그러나 지나고 나면 이득이 전혀 없음을 깨닫습니다. 이런 이유를 말할 수 있지요.

1) 물건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2) 1+1 모두 사용할 정도로 쓰지 않습니다.

3)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결국, 약간 비싸더라도 조금씩 사는 것이 훨씬 더 이득입니다. 그런데도 세상의 유혹에 계속 넘어가는 우리입니다. 싼 게 비지떡….

세상의 유혹은 순간의 만족과 이득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멀리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노력하라 가르치면 자녀 인생 망친다

-전삼용신부-

 

“제가 평생 열심히 노력해서 살아왔는데, 결과는 비참합니다.” 이런 한탄을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노력은 좋은 것일까요? 분명 대부분 좋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노력해서 되나요? 노력했더니 원하는 것을 얻었나요? 노력했더니 원하는 관계가 맺어졌나요? 노력했더니 인생에서 성공했나요? 오히려 노력하는데도 안 되는 것이 많지 않았습니까? 자녀에게 노력하는데 자녀는 그 마음을 알아줍니까? 배우자는 나의 노력을 알아주나요? 직장에서 노력하는데도 오히려 인정은 다른 사람이 받지 않습니까?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말은 세상이 우리를 속이기 위해 만들어 놓은 일종의 덫이고 함정입니다. 노력해서는 절대 성공한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덫에서 빠져나오려면 왜 지금 우리가 하는 노력이 헛된 것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우선 우리가 왜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는지, 그 목적이 무엇인지부터 확실히 해야 합니다. 우리는 왜 공부하고 왜 일하고 왜 자녀를 키우나요? 사실 우리는 ‘두려움’과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을 갖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운 것입니다. 저 사람이 나를 버리고 떠날까봐 두려워 노력하고, 직장에서 인정받지 못할까 노력하며, 자녀들에게 자신들을 왜 그렇게 키웠느냐는 원망을 받을까 봐 노력합니다.

 

      이렇게 두렵지 않으려는 근저에는 ‘행복’이란 생각이 깔려있습니다. 우리는 두렵지 않아야 행복할 것이라 믿습니다. 두려움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그런데 그 행복이라고 믿는 것을 노력해서 갖게 되었다면 두렵지 않나요? 이젠 그것을 잃게 될까 봐 두려워합니다. 저 사람과 결혼하지 못할까 봐 두려워했는데, 이젠 그 사람이 바람피울까 봐 두려워합니다.

 

      일단 인간은 노력만으로는 그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두려움은 욕구에서 나오는데, 그 욕구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욕구라는 컵에 담긴 물과 같습니다. 우리는 그 물을 마시기 위해 욕구까지 들어 올리게 됩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싶은 욕구가 생겼을 때 그것을 먹지 못하게 될까 두려워하는 마음도 동시에 생겼습니다. 사실 욕구가 사라지면 두려움도 사라집니다. 두려움을 없애려면 욕구부터 없애야 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추구하는 욕구의 최종목적지는 무엇일까요? 인간의 모든 욕구는 생존을 넘어서서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귀결됩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습니다. 내가 쓸모없는 존재로 여겨지는 것이 가장 두렵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렇게 여겨주지 않으니 스스로의 노력으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돈을 많이 벌어, 좋은 배우자와 결혼하여, 좋은 직장에 취직하여 인정받으려 합니다.

 

      결국, 사람은 사랑받기 위해 사는 것입니다. 워런 버핏은 인생의 성공이 무엇이냐 물을 때, “나를 사랑해주었으면 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해주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돈을 가장 많이 번 사람도 결국은 사랑받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랑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 자체가 자신은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심리상담사, ‘고코로야 진노스케’의 『너무 노력하지 말아요』란 책이 있습니다. 고코로야가 심리상담사로 처음 일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우선 강연을 통해 사람을 모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지금 참가 신청을 하면 최신 사은품을 준다고 하고, “이 강연에 참여하면 내일부터 당신을 다른 사람!” 이런 문구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열심히 홍보해도 강연장은 텅텅 빌 때가 많았습니다.

 

      고코로야는 계속 자신의 문제점을 찾아내어 바꿔보려 했습니다.

 

‘홍보를 잘 못 했나?’, ‘수강료를 좀 더 싸게 했으면 잘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바뀌는 것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습니다.

‘아! 내가 내 강의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구나!’

      자기 스스로 자신의 강연이 ‘더 싸고 좋은 혜택이 있어야지만 관심을 가질만하다.’라는 전제로 강연의 가치가 낮다고 스스로 평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파는 사람이 가치 없다고 여기는 것을 사는 사람이 어떻게 가치 있다고 여길 수 있겠습니까?

 

      이후 그는 ‘내 강연은 수강료가 비싸도, 사은품이 없어도 들을만한 가치가 있는 강연이다.’라고 전제를 바꾸고, 원래는 도쿄까지 올라가서 하던 강연을 사은품도 없애고 자신의 고향인 교토에서 그냥 열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강연장에 사람이 꽉 찼다고 합니다. 노력은 인정받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인정을 받았다고 믿으면 그 노력은 멈추게 됩니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 근원적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두 가지 다른 태도가 나옵니다. 한 부류는 두려움의 바다와 맞서 끊임없이 노를 젓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나아가지는 않습니다. 인정받으려고 평생 자기의 힘으로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고는 이런 반응을 보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 댔다.”

      그들에게 두려움은 오직 노력으로만 극복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노력하지 않고 두려움을 극복한 사람을 보는 것은 유령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두려움을 이미 극복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극도로 두려워합니다. 현실이 아니라 유령처럼 바라봅니다. 저런 방식으로는 절대 자신들이 느끼는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할 수 없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여전히 자신의 힘으로 자기 존재가치를 증명하려 노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당신께로 초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베드로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합니다. 믿음으로 두려움을 극복하려 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의 바다를 예수님처럼 걸어보는 것입니다. 모든 두려움이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려 하는 것이라면, 이미 우리가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하느님의 자녀임을 믿는 것으로 그 바다를 넘어보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칩니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그리고 물 위를 걷습니다. 물론 그 믿음이 완전하지 못하여 다시금 두려움에 빠지기도 하지만 베드로가 느끼는 두려움은 이미 배 위에서만 머무는 제자들이 느끼는 두려움과는 질적으로 다른 두려움입니다. 배 위에서 스스로의 노력으로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사람들은 끝나지 않는 두려움으로 살겠지만, 베드로는 언젠가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물 위를 자유롭게 걷게 됩니다.

 

      고아로 남의 집 식모살이만 하시며 자라신 저희 어머니가 자살을 생각하실 때 물 위를 걸어오시던 예수님은 나병 환자 있는 곳으로 방향을 바꾸시며 “저런 사람도 사는데 너는 왜 못 사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삶이 힘든 것은 열심히 노력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인정 받기 위해 너무 열심히 노력해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노력하지 말고 믿으라고 하십니다. 노력하지 않아도 당신께서 목숨을 내어줄 수 있는 소중한 존재임을 믿어야만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그리고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모든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졌을 때 이런 신앙고백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조재형신부-

 

책임(責任)을 뜻하는 영어는 'Responsibility'와 ‘Accountability'가 있습니다하나는 윤리적이고종교적인 의미입니다강재구 소령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훈련도중 수류탄이 떨어졌습니다절체절명의 시간이었습니다강재구 소령은 부하들을 위하여 몸을 던졌습니다육군은 전 장병이 모금을 해서 강재구 소령을 기리는 동상을 만들었습니다동상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자유의 전선 월남 출정을 위한 맹호부대의 수류탄 던지기 연습 중 한 부하의 실수로 많은 부하들의 생명이 위태롭게 된 순간 터지는 폭탄을 막아 안고 자기 몸을 희생하다.”

 

베드로 사도의 ’Quo vadis Domine(주님 어디로 가시나이까?)'입니다박해가 심해지면서 베드로 사도는 로마를 빠져나와 도망치고 있었습니다그때 주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다가오십니다베드로 사도는 주님께 묻습니다. ‘주님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대답합니다. ‘네가 도망쳐 나온 로마로 가는 길이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다시금 로마로 돌아가 순교하였다고 합니다윤리적이고 종교적인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두려움과 어둠에 직면한 인류에게 진리의 등불을 높이 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Responsibility'를 다하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사회적이고법적인 의미입니다행위가 있었고행위의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독일은 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였습니다독일은 인류와 역사 앞에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서 겸허하게 용서를 구하였습니다그런가하면 일본은 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였지만 아직도 용서를 구하지 않고 있습니다오히려 전쟁의 전범이 안치된 곳에서 참배를 하고 있습니다이는 인류와 국제사회 앞에서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입니다회사의 경영이 악화되는 경우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기업인이 있습니다자신의 재산을 기꺼이 내어 놓는 기업인이 있습니다그런가하면 경영이 악화되었음에도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려는 기업인도 있습니다부하 직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기업인도 있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2000년 3월 12일 대희년을 맞이하면서 교회가 인류 앞에 잘못한 것에 대해서 겸허하게 용서를 청하였습니다교회의 권위로 과학적인 진리를 가리려했던 적이 있었습니다교회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 무고한 사람을 재판에 넘긴 적이 있었습니다교회의 질서를 지킨다는 이유로 무고한 사람을 이단으로 단죄했던 적이 있습니다사회적이고 법적인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도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인류의 역사와 문명은 ‘Accountability'를 통하여 발전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베드로 사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오시고 있을 때입니다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청하였습니다. ‘주님 저도 물위를 걷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물 위를 걸어오도록 말씀하셨습니다베드로 사도는 물위를 걷다가 그만 두려움에 빠졌습니다두려움에 빠진 베드로 사도는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의 손을 잡아 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약한 자야왜 의심하였느냐?’ 베드로 사도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 역시 두려움의 바다상심의 바다근심의 바다욕망의 바다시기의 바다분노의 바다에 있습니다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그만 바다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사회적이고 법적인 책임을 외면하고 그만 바다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엘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음성을 큰 바람 속에서 듣지 못하였습니다지진 속에서 듣지 못하였습니다불길 속에서 듣지 못하였습니다하느님의 음성은 내적인 침묵 속에서 들려왔습니다우리가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가질 때 주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주십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사실 육으로는 내 혈족인 동포들을 위해서라면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내어 놓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가장 소중한 주님과 떨어져도 좋을 것 같다고 말을 합니다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하였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더 행복합니다.’

 

교회가신앙인들이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 하면주기보다 받으려 하면 세상이라는 바다에 빠지기 쉽습니다우리가 욕망의 바다에욕심의 바다에 빠지려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 주기 위해서는 먼저 희생하고먼저 나누어야 합니다김수환 추기경님이태석 신부님마더데레사 수녀님은 세상의 등대가 되었습니다그분들은 희생의 빛으로사랑이 빛으로희망의 빛으로 손을 내밀었고 많은 이들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폭풍 속에서도 끝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양승국신부- 

 

“배는 이미 뭍에서 여러 스타디온 떨어져 있었는데, 마침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다.”(마태오 복음 14장 24절)

  

칠흑같이 어두운 밤, 갈릴래아 호수 한 가운데서 높은 파도에 쉼없이 흔들리고 있는 작은 배 한척! 어쩌면 바로 오늘 우리 교회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교회 깊숙히 들어가면 갈수록 교회 공동체가 안고 있는 미성숙과 부족함, 적나라한 실상과 민낯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서 교회 공동체를 향한 비난의 화살들을 인정사정없이 날립니다. 속수무책으로 화살들을 맞고 있노라면 깊은 슬픔과 회의감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교회 공동체가 안정되고 평화로워야지, 저렇게 쉼없이 흔들려도 되는 것인가?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이 다들 잘 익은 밀알처럼 튼실해야지, 쭉정이나 가라지처럼 저렇게 칙칙하고 울적해도 되는 것인가?’

 

위기감이 증폭되면 목소리는 더 커집니다. ‘이제 교회는 끝났어! 교회는 밑천을 다 드러냈어! 이제 배에 물이 가득 차서 거의 침몰 직전이라니까!’

  

그러나 우리 교회 공동체는 크게 흔들리고 요동치면서도 침몰하지 않고 2천년 세월 동안 계속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아마 계속해서 불안불안하겠지만 결코 침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 이유? 배 심층부 한 가운데는 심한 파도에도 중심을 잡아주는 안전 장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좌우로 크게 흔들릴 때 침몰될까 다들 두려워하지만 복원력의 근원인 안전장치로 인해서 다시금 배는 중심을 잡습니다.

  

배 상층부 갑판 위로 올라가보면 흔들릴때 마다 꼭 붙들라고 안전장치인 난간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배가 기우뚱할때면 만사제쳐놓고 난간을 꼭 붙드는 것이 상책입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라는 배 안에도 흔들릴때 마다 꼭 붙들 수 있는 영원한 안전 장치가 있습니다. 든든한 선장이기도 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께서 교회 공동체 안에 항상 현존하시는 관계로 흔들리는 가운데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가 크게 요동칠 때에도 너무 불안해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 가장 밑바닥에서 중심을 잡고 계시는 복원력의 기초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해야겠습니다. 그래도 불안하다면 여기저기 설치되어 있는 안전장치를 꼭 붙들어야겠습니다.

  

교회란 나를 포함해서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들로 구성된 공동체이자 주님 품안에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 전까지 근본적으로 휘청거리며 흔들리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주님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느껴지면,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교회 공동체에 편입되고 나서 실망과 허탈을 느끼면 그것은 자연스런 모습입니다. 

 

교회란 오늘 복음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폭풍을 헤쳐 나가는 조각배와도 같습니다. 그래서 흔들릴 때 마다 서로의 손을 꼭 잡는 일, 그것처럼 중요한 일은 다시 또 없습니다. 

 

인간은 왜 두려워합니까? 사랑하는 대상을 잃어버릴까봐 늘 두려워합니다. 사랑하는 대상이 떠나 버릴까봐 늘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럴 필요가 없겠습니다. 때로 주님께서 안 계신 것처럼 느껴질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느낌은 순전히 우리 인간 측의 착시현상입니다. 

 

우리의 주님은 폭풍 속에서도 끝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 아비 내 어미가 나를 버릴지라도 주님만은 절대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자비로 나타나시는 하느님

-조욱현신부-

 

오늘 전례의 주제는 하느님께서 혹은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것은 바로 구원하시기 위해서라는 사랑과 자비의 행위라는 것이다.

 

1독서: 1열왕 19,9a.11-13a: 엘리야에게 나타나신 주님

야훼께서는 모세 때와 같이 바위를 부수는’ 크고 강한 바람지진불길 가운데 나타나시지 않고 다정한 친구처럼은밀히 속삭이시며 살랑거리는 바람처럼 말씀하시며 나타나신다거의 알아들을 수 없고 빨리 지나가는 그분을 알아 뵙기 위해서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엘리야는 그분을 알아 뵙고 존경의 표시로 겉옷 자락으로 얼굴을 가린다.”(13).

 

하느님께서는 위대한 사건뿐만 아니라거의 무의미하게 보이는 작은 사건 속에서도 현존하심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런 작은 일들을 통하여 충실성을 요구하신다그것은 우리의 모든 삶고통과 걱정에서까지도 충실성과 사랑을 요구하신다하느님께서 중대한 기회에만 등장하시는 분이라면 그분은 결코 우리의 친구가 될 수 없으며오히려 방관자가 되기 쉽다.

 

복음마태 14,22-33: 풍랑에 시달리는 배

오늘 복음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인간들에게 친구로 다가오시는 분이지만또한 우주 지배자의 권능도 가지신 분이시다또한마태오는 예수님의 물 위를 걸으시는 기적을 통하여 예수님을 야훼의 능력으로 자기 백성과 함께 홍해를 무사히 건너는 모세의 모습에 비교하고 있다예수께서는 빵을 많게 한 기적 후에 즉시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먼저 가라고 명하셨다.

 

예수께서는 밤새 기도하시려 혼자 산에 오르시고(23제자들은 폭풍우 속에서 살려고 애써 노를 젓고 있다그 폭풍우는 오직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야 멈추게 된다(32). 즉 인간의 행위는 하느님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언제나 흔들리고 불안한 것이다베드로는 예수님을 알아 뵙고 자기도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해 달라고 하지만 베드로는 물 위를 걷다가 거센 바람을 보고 무서운 생각이 들자 물에 빠지게 되고 예수께서 그를 구해주시며 믿음이 약함을 책하시고 함께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친다이때 제자들은 주님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고백한다(28-33절 참조).

 

여기에 교회론적 관점이 있다베드로는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열정에 차서 그분을 닮아보려고 자신도 그렇게 해달라고 청한다. “주님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28). 그러나 처음보다는 신앙이 강하지는 못했다. ‘그러시다면이라는 가정을 붙이고 있다또한믿음이 있었다고 해도 거센 바람을 보자 그 믿음은 곧 사라져 버렸다베드로는 불과 몇 초 안 되는 사이에 최고의 신앙심과 의심으로 인한 극도의 두려움을 체험한다이것은 분명히 그리스도 제자의 모습은 아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왜 의심하였느냐?”(31).

 

우리는 풍랑에 흔들리는 배의 모습에서도베드로의 모습에서도 교회에 하나의 본보기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강한 반대를 무릅써야 하는 역사 속에 살고 있다그래서 때로는 주님이 계시지 않은 것같이 느껴진다그분께 대한 용기 있는 믿음이 요구되지만 믿음이 별로 강하지 못하다위기에 부딪히게 되면 즉시 공포에 사로잡히고 만다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구원하시기 위해 현존하신다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고 그분께 의탁하여야 한다.”(G. Barbaglio, in I Vangeli, Assisi 1975, p. 344).

 

용기 있는 믿음과 의탁하는 태도를 가지라.”는 말은 우리 교회에 해당한다오늘의 교회는 종교적 윤리적 인간적 문제들을 정면으로 맞대고 있다이러한 문제의 심각성 때문에제자들처럼 폭풍우에 휩쓸려 갈 듯한 두려움을 가질 수 있다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신다. “용기를 내어라나다두려워하지 마라.”(27).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항상 역사 속에서 계속되고 있다우리는 또한 항상 그분의 사랑과 자비와 권능이 필요하다필요한 것은 우리의 용기 있는 믿음이다이것이 충족될 수 있다면 하느님의 사랑과 권능은 절대 약화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베드로 사도처럼 확고한 신앙을 갖지 못하고 넘어지고 쓰러질 수 있는 나약한 존재들이며그리고 풍랑에 시달리는 배와 같이 교회도 세상의 조류를 거슬러 가며 격랑에 심하게 흔들릴 수 있다그러나 항상 주님께서 함께 계시며 구원해 주심을 믿고 기도해야 한다마태오 복음 사가도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계시를 담고 있는 이 가르침을 교회론적으로 바꿈으로써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분께 대한 용기 있는 믿음과 의탁하는 태도를 보이도록 한 것이다우리에게 다가오시며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당신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는 삶의 도우심을 청하여야겠다.

 

두려움에서 나와 하느님 앞에 서기 위해     

-김찬선신부-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오늘 주제는 두려움에서 나와 하느님 앞에 섬입니다.

일본의 많은 청년이 오래전부터 은둔형 외톨이 생활을 하고,
우리의 젊은이들도 그 정도는 아니어도 많이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집 밖 세상으로 나오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방 밖 가족들에게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갇혀 지내고 홀로 지내는데
누가 가둬서 갇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숨어서 갇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숨습니까? 그것은 오늘 엘리야가 이제벨이 두려워 도망쳐 와
동굴에 숨듯이 사람들이 두렵고 심지어 가족까지 두려워 숨는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야와 제자들이 두려워한 것은 죽음을 마주하는 두려움인 데
비해 은둔형 외톨이들의 두려움은 그저 자기를 간섭하고 성가시게 하는
모든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니 객관적으로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지만
어쨌거나 두려움은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것이니 함부로 얘기할 수는 없지요.

그런데 두려움이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것이기에 해결책도 거기에 있습니다.
벌레처럼 하나도 무섭지 않은 것도 두려워하는 것처럼 마음먹기에 따라
생사를 쥐고 있는 권력자나 태풍조차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않고 까짓것 할 있는 담대함을 얘기할 때마다 떠올리는 것이
바로 다윗과 사울의 얘기인데 사울은 어른이고 한 나라의 임금인데도
골리앗에 겁먹고 지레 지고 들어갔지만, 다윗은 어린이인데도 골리앗을
전혀 두려워 않고, 무기도 갑옷도 없이 오직 하느님과 함께 싸우러 나갔지요.

하느님으로 마음 든든했고, 하느님 때문에 아무 두려움이 없었던 겁니다.
'마음 든든', 그렇습니다. 이 '마음 든든'이 아무 두려움을 없게 하는 것이고,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두려움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하느님과 함께 있으면 마음이 든든하여 두려움이 없고,
그래서 엘리야는 거짓 예언자 450명과 담대히 싸워서 이길 수 있었고,
베드로는 물 위를 걸어오라는 말씀에 주님처럼 물 위를 걸어갈 수 있었는데
순간 하느님을 놓치자 이제벨이 두렵고 풍랑이 두려워져 두려움에 빠지고,
동시에 이제벨과 풍랑을 보자 두려움에 빠져 주님을 못 보게 된 것입니다.

순간 발을 헛디뎌 넘어지거나 천길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것을 실족이라고
하는데 우리 눈도 순간 헛군데에 돌리는 바람에 실안하여 하느님을 봇 보고,
그래서 풍랑에 빠지고, 두려움에 빠질 수 있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울수록 하느님 응시를 해야 하는데
이 응시가 두려울 때의 하느님 관상입니다.

응시란 목표물을 놓치지 않고 보는 것이요,
그러기 위해서 마음을 다잡고 정신집중하여 보는 것인데
우리는 순간 방심하여 다잡았던 마음이 풀어져
하느님은 놓치고 두려움에 빠지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흔히 방심은 금물이라고 하는데
방심이 실수를 하게 하는 정도라면
실안이나 실족게 하는 방심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그런데 방심치 않고 마음과 정신을 다잡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믿음인데 믿음을 잃지 않고, 믿음을 지니는 것이 중요합니다.
위험과 두려움에 처할 때 하느님께 믿음 두는 것이 두려움에 빠지지 않고
하느님을 응시케 하는 데 있어서 방심치 않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공중 그네타기라는 서커스를 아십니까?
이 서커스를 할 때 남자는 잡아주고 여자가 그네를 타는데
공중에서 재주를 부리다 남자의 손을 잡을 때 남자를 믿지 못하여
여자가 남자의 손을 잡으려 해서는 손을 놓쳐 큰 사고가 나기에
여자는 남자가 잡아줄 것이라고 믿고 맡기는 것이 중요하답니다.

우리 인생의 위기를 만나 두려움에 떨 때도 내가 어떻게 하려고 하지 않고
주님께서 나를 잡아주실 거라고 굳게 믿어야 함을 배우는 오늘 복음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8월 13일 연중 제19주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