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8월 7일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Margaret K 2020. 8. 6. 06:08

2020년 8월 7일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마태오 16,24-28)

 

 "Whoever wishes to come after me

must deny himself,
take up his cross, and follow m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기석신부-

 

 ‘나훔’ 예언자의 이름의 의미는 ‘위로받은 이’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의 역할은 이름의 뜻과 달리 ‘위로를 주는 이’였습니다.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아시리아가 맹위를 떨치던 어두운 시대에, 강자의 희생자가 되어 고통을 겪던 유다 백성에게 주님의 위로와 희망을 전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볼 수 있듯 아시리아의 패망, 유다를 향한 위로, 그리고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의 멸망에 대한 묘사는 하느님을 찬미하라고 권고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의로운 이들에게는 구원을 베푸시지만, 불경한 이들에게는 벌을 내리시는 “보복하시는 분”(나훔 1,2)이심을 강조하면서, 인류의 미래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손안에 절대적으로 달려 있다는 것을 밝힙니다.

그렇습니다. 화답송에 나오는 모세의 노래처럼 하느님께서는 희생당하는 당신 백성을 대신하여 “적대자들에게 복수하고, 원수들에게 되갚으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복음 환호송에 나오는 예수님의 행복 선언에서 볼 수 있듯 ‘의로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박해를 받는 사람들에게 하늘 나라를 주시는’(마태 5,10 참조) 위로의 하느님이시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 됨의 길을 제시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당신에 대한 배척, 수난 그리고 죽음을 앞두시고 적대자들에 대한 보복은 하느님께 맡기시고, 기꺼이 십자가의 길을 가시려는 예수님께서는,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는 이의 본보기가 되십니다.

따라서 불경한 자들에게는 보복을, 의로운 이들에게는 위로를 주시는 하느님의 모습은, 궁극적으로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를 통하여 온전히 드러납니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예수님을 따라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주님의 도구가 되어야 할 선택이 우리에게 주어진 셈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우리는 야심 찬 목표를 자주 세웁니다. 특히 새해가 되면 거창한 목표들이 줄을 잇지 않습니까? 물론 작심삼일로 싱겁게 끝나는 때도 있고, 그 이상을 채워서 하나의 습관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목표를 채우지 못하고 그냥 포기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렇다고 목표를 세우지 않는 것이 지혜로운 것일까요? 실패를 더 많이 경험하면서도 우리는 계속해서 목표를 세웁니다.

이렇게 실패를 반복하면서 계획을 세우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내일도 모레도 내 삶이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일, 모레라는 미래의 삶이 없다면 그 어떤 사람도 계획을 세우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계획과 의지를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강력한 요소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죽음은 모든 계획을 수포로 만들면서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고 무력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이 죽음 앞에서 작아질 수밖에 없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부활을 통해 이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을 따라야 하는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나의 나약함과 무력함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힘이 필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은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 목숨을 잃는 것, 세상을 잃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에 대해 훈계를 하신 다음, 제자들 가운데 더러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의 영광에 싸여 오는 것을 보게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베드로의 반박 이후 곧바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장차 고난을 겪으시리라는 말씀을 듣고는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반박하지요. 곧바로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은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라는 것이었습니다.

수난과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온전히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원칙만을 내세우면서 하느님의 뜻에 맞춰 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반대자, 사탄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온전히 하느님께 맡기는 삶을 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고난과 죽음까지도 하느님께 맡길 수 있는 삶,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삶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온전히 주님께 맡기는 삶이며, 주님과 함께 하늘나라의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삶은 살아가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늘 느낀다(마야 안젤루).



유혹이 너무 많은 세상에 사는 우리


탈무드에 나오는 한 가지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느 날 상점에서 외투 한 벌을 샀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다시 입어보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 주머니 안에 값비싼 보석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순간, 이 사람의 마음이 복잡해졌습니다.

‘내가 산 옷에 들어 있는 보석이니 가져도 되지.’라는 마음과 ‘내 물건이 아니니 빨리 주인을 찾아 주어야 한다.’는 마음이 서로 치열하게 싸우게 되었습니다.

이런 마음의 갈등을 안고서 현자를 찾아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현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산 것은 외투이지, 보석이 아니지 않습니까?”

자신이 산 것은 외투일 뿐 보석이 아닌데도, 자기 손에 들어온 보석에 대한 유혹을 이기기란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의 마음이 이렇지 않은가요? 그래서 세상 것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집중을 통해서 세상 안이 주님의 뜻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 나라가 완성됩니다.

 

마음을 비운다는 말은 마음을 넓힌다는 말이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 영성 생활의 핵심입니다.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지금까지의 나의 주인이었던 자아를 죽여야만 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자신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살게 하시기 위해 자기 자신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표현이 좀 극단적인 것 같아서, ‘더 온화한 표현은 없을까?’를 묵상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세상에서는 “마음을 비운다.”는 말을 많이 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음을 비운다는 말이나 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다는 말이나 궁극적으로는 같은 의미입니다.

      마음을 비워 자아를 죽이다시피 해야 하는 이유는 그 자아가 우리를 ‘모기’, 혹은 요즘 유행하는 ‘좀비’와 같은 존재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자아는 자신을 살리려는 마음을 자아내기에 자신이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일을 서슴지 않습니다.

      이런 종교적 세계관을 잘 나타낸 영화가 ‘웜 바디스’(2012)입니다. 좀비 영화이지만 인간을 세 종류로 표현하였습니다. 좀비이지만 아직 심장이 따듯해질 가능성이 남아있는 존재들, 그러나 심장이 따듯해질 가능성을 잃고 영원히 피만 찾아 돌아다니는 ‘보니’가 있습니다.

 

      지금의 우리나라 교육은 좀비로 태어난 아이들을 보니로 만드는 것 같습니다. 경쟁이라는 것 자체가 남을 이겨야만 살게 만드는 체계로 그 사람의 인생을 모기의 삶, 좀비의 삶으로 빠져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경쟁교육을 통해 생겨난 대표적 인물이 히틀러입니다. 그래서 독일은 그런 교육을 버렸지만 우리나라는 여전히 수많은 사교육비를 들여가며 아이들을 좀비에서 보니로 만들어갑니다.

 

      아무튼, 이런 세계에 인간들이 연구하기 위해 들어오고, ‘알’(R)이라고 하는 한 좀비가 그녀 남자친구의 뇌를 먹고는 그녀를 사랑하게 됩니다. 뇌를 먹으면 그 사람의 기억까지도 먹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녀를 보니와 다를 바 없는 인간들로부터 살려내기 위해 생명을 포기합니다. 그랬더니 죽었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하며 인간이 된다는 내용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자아의 욕구를 통제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살기 위해서 타자의 생명을 먹어야만 합니다. 생존은 타자의 생명으로만 유지될 수 있습니다. 이 본성을 통제할 수 없는 상태로 태어나는 것이 원죄입니다. 그런데 이 자아의 욕구는 죽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이다시피 할 수는 있습니다. 바로 더 높은 수준의 누군가를 받아들임으로써입니다. 좀비였던 ‘알’이 한 인간을 사랑하여 그녀를 살게 하려고 자신의 목숨을 바치게 됨으로써 더 높은 존재로 새로 태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김상운씨의 『마음을 비우면 얻어지는 것들』에는 이러한 사례가 나옵니다. 한 여인이 심한 두통으로 직장까지 그만두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의사들의 처방은 진통제와 수면제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복용량은 갈수록 증가했고 그렇게 삶을 더 피폐해져 갔습니다. 그분이 이것을 치유한 것은 약물이 아니었습니다. 친구의 소개로 찾아가 만난 한 의사는 약물 대신 명상을 시켰습니다.

      “눈을 감으시고 머리 안에 곧 터져버릴 것만 같은 고통 덩어리가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나의 머리는 그것으로 가득 차서 그것 때문에 머리가 아픈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나의 머리가 1m로 커졌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다음은 10m, 다음은 이 도시만큼, 우리나라, 더 나아가 지구와 온 우주 크기만큼 커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 명상을 매일 조금씩 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 달 뒤 두통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참으로 멋진 아이디어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신 이유는 우리를 품기 위해서였습니다. 팔을 벌려 위와 아래, 오른쪽과 왼쪽, 다시 말해 모든 시간과 공간 안의 인간들을 품으십니다. 원하면 누구나 그분의 사랑 안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자아를 죽임은 곧 타인을 받아들임과 일치합니다.

 

      저희 영성관 앞에도 작은 야산이 있습니다. 그 속엔 많은 뱀이 살고 있습니다. 심지어 영성관 안으로 들어와서 사람들을 놀라게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살아가면서 거의 뱀을 신경 쓰지 않습니다. 뱀과 그만큼 떨어져 살기 때문입니다. 만약 다른 동네에 사는 사람이라면 이곳에 사는 뱀은 더더욱 신경 쓸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마음이 넓어지면 자아가 신경 쓰이지 않습니다. 어디에 있는지도 잊어버립니다. 그러는 사이 그 뱀과 나 사이에는 수많은 사람이 삽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도 하시고 또한 이웃을 사랑하라고도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같은 말입니다.

 

      한 자매님이 아직 아기인 딸과 어떤 강좌를 듣기 위해 갔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딸이 너무 우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딸을 업고 화장실로 갔습니다. 딸의 울음소리가 너무 듣기 싫어 두 손으로 귀를 막았습니다. 그런데 혈관에 흐르는 맥박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러자 마음이 차분해지고 편안해졌습니다. 자기 안에서 밖으로 조금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으니 그렇게 불편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뻐 보였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안아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렇게 자지러지게 울던 아이가 울음을 멈추었습니다. 이 엄마는 자신도 모르게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자신의 마음을 넓혀 아이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그리스도께서 우리 주인으로 살게 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나를 넓혀 마치 노아가 좋은 동물, 나쁜 동물 가릴 것 없이 자신의 방주에 태우는 것처럼 내 안에서 더 많은 사람이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많은 사람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모습으로 예수님께서도 들어오십니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결국 더 많은 사람을 받아들이기 위해 마음을 넓힌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것이 십자가 신비의 가장 중요한 면일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후배 신부님의 은경축을 축하하기 위해서 모처럼 교구 사제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9시간 30분을 차로 달려오신 신부님도 있었습니다저도 5시간 운전해서 갔습니다축하미사를 조촐하게 함께하였고신학교 교가를 불렀습니다비록 몸은 멀리 타국에 있지만 우리는 같은 못자리(신학교)에서 함께 지냈음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한국에서는 거리가 멀다고 가지 않았을 텐데여기서는 거리가 멀어도 기꺼이 달려갔습니다함께 저녁을 먹고이야기를 나누니 신학교 기숙사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신학생 때는 몰랐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저마다 자신만의 사제상을 만들어가는 것 같았습니다군에 입대하면 주특기가 주어집니다운전헌병정보행정의무포병공병보병과 같은 주특기입니다같이 입대했지만 저마다의 소질과 부대의 필요에 의해서 주특기가 정해집니다신부님들도 시간이 지나면서본인의 필요에 의해서 자신만의 주특기를 만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음악에 관심이 있는 신부님은 음향기기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걷기에 관심이 있는 신부님은 매일 3만보를 걸었습니다인터넷을 통해서 함께 걷는 친구들과 정보를 교환하고 있었습니다레고에 관심이 있는 신부님은 신기한 것을 많이 만들었습니다회전목마도에펠탑도쥐라기 공원도 만들었습니다하나하나 레고를 맞추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을 텐데 그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악기를 다루는 신부님도 있습니다그림을 그리는 신부님도 있습니다시간을 내서 학교에 다니는 신부님도 있습니다텃밭을 가꾸는 신부님도 있습니다저도 하나 있었습니다매일 새벽에 일어나는 겁니다. 95년부터니까 어느덧 25년이 지났습니다이번 모임에도 새벽에 일어났고같이 일어난 신부님과 함께 산책을 했습니다.

 

문득 생각했습니다사제들에게 가장 적합한 주특기는 무엇일까첫째는 잘 들어주는 것이면 좋겠습니다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전하는 것이 사제의 본문이기 때문입니다교우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기쁨은 함께 기뻐하고슬픔은 함께 슬퍼하고아픔은 함께 아파하는 것이 사제의 본분이기 때문입니다둘째는 겸손이면 좋겠습니다하느님의 아드님이 사람이 되신 것이 겸손입니다예수님께서는 언제나 겸손을 말씀하셨습니다섬김을 받으실 자격이 있으시지만 섬기러 왔다고 하셨습니다잘 듣고겸손한 사제는 화려하지 않아도특별하지 않아도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가 될 것입니다잘 듣고겸손한 신자 역시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가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원하는 일만 할 수 없습니다때로 원하지 않았던 일을 하기도 하고자신의 십자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십자가를 져야 할 때도 있습니다우리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갈 때우리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을 받을 수 있고그것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기도 합니다그래서 오늘 주님께서 이렇게 이야기 하십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얻어도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십자가는 우리 구원의 열쇠입니다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우리도 충실하게 지고 가야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주특기를 말씀하셨습니다그것은 십자가입니다. 

 

주님의 제자라면 마땅히 그분의 운명을 우리의 운명으로 삼아야 합니다!

 -양승국신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오 복음 16장 24절)

  

오늘 복음 말씀에서 보시는 바처럼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추종하고자 한다면, 우리 삶에서 하나는 빼야(-)하고 하나는 더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삶에서‘자신’을 빼고, ‘십자가’를 더해야 합니다. 결국 내 인생에서 나를 덜어내고 십자가를 끌어안는 것이 적극적인 예수님 추종의 비결입니다.

  

나를 덜어낸다는 것은? 나를 내려놓는다는 것이겠지요. 내가 주인공이어야 하고, 내가 중심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는 것일 것입니다. 

 

나를 덜어낸다는 것은? 내가 지금 집착하고 있는 대상, 그것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돈이든, 명예이든, 훌훌 털어버리는 것일 것입니다. 

 

나를 덜어낸다는 것은? 살아가면서 우리가 가끔씩 집어드는 그릇된 선택, 우리를 죄와 악습, 허망함과 부질없음에로 이끄는 결정을 과감히 던져버리는 것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끌어안는다는 것은? 철저하게도 나와 맞지 않는 그를 끌어안는 것이겠습니다. 때로 생각만 해도 족쇄처럼 부담스런 공동체를 끌어안는 것이겠습니다.

  

십자가를 끌어안는다는 것은 결코 내게 호의적이지 않은 이 현실, 결코 내가 원치 않았던,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쩔수 없이 겪게 되는 인생의 산전수전, 우여곡절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수용하는 것이겠습니다.

  

십자가를 끌어안는다는 것은 절대 원치 않았던 병고나 노화, 언젠가 필연적으로 맞이하게될 죽음까지도 기꺼이 끌어안는 것이겠습니다. 

 

고통과 십자가에로의 초대는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나 열두 사도에게만 해당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를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나를 내세우고, 나를 일으켜 세우며 내가 중심이 되는 종교가 아니라 주님을 중심에 두는 종교입니다. 그분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은총과 축복으로 우리 인간 각자도 충만하고 거룩하게 되는 종교입니다. 따라서 내 계획을 앞세우기보다 주님의 계획을 앞세워야겠습니다. 

 

제자란 말 마디 그대로 따르는 사람, 추종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된 사람으로서 무엇을 추종해야겠습니까? 주님의 제자라면 마땅히 그분의 운명을 우리의 운명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분의 사고방식, 그분의 행동 양식을 고스란히 우리의 것으로 선택해야겠습니다. 

 

적당히 포기하고 적당히 선택하면 참 애매합니다. 물에 물 탄듯 술에 술 탄듯,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결코 주님께도 속하고 사탄에게도 속할 수 없습니다. 어중간하게 서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확고한 의지를 바탕으로 한 정확한 선택을 요구하십니다.

 

주님의 위대하심과 자비하심, 영원하심과 불멸하심에 영원히 참여하기 위해 잠시 지나가는 덧없는 대상들과 거듭 결별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송영진신부-

 

신앙생활은 “모든 것을 다 버려서 모든 것을 얻는 생활”입니다.
모든 것을 다 버린다는 말은,
하느님 나라에 가지고 들어갈 수 없는 것은 전부 다 버린다는 뜻입니다.
(스스로 버리지 않아도, 죽으면 모두 잃게 될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욕심 부리고 집착하면서 움켜쥐고 있다가 마치 빼앗기는 것처럼
잃는 사람은 그 탐욕과 집착 때문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스스로 기꺼이 버린 사람은
홀가분하게 그 나라로 들어갈 것입니다.
어차피 마지막에는 누구나 빈손이 된다는 점은 같은데,
그 빈손의 의미와 가치는 완전히 다르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을 얻는다는 말은,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린다는 뜻입니다.
그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것은 모든 것을 얻는 것과 같습니다.
(실제로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 나라의 시민이 되면 부족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영원한 행복과 평화를 누릴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누구든지’ 라는 말은 아무도 제외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내 뒤를 따라오려면”은 “내가 주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입니다.
우리는 세속의 부귀영화를 원해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현세에서의 무병장수를 원해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에서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원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뒤를 따라갑니다.
그리고 그 구원과 생명은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메시아 가운데 한 분이 아니라 유일한 메시아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세상의 수많은 종교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종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일은, “예수님의 뒤만 따르는 일”입니다.
“자신을 버리고”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일을 방해하는 것들을 모두 버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물질적인 것일 수도 있고, 정신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사고방식과 판단과 사상 등도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일을 방해한다면 모두 버려야 합니다.
글자 그대로 완전히 새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라는 말씀은, 원래는 죽음도 각오하라는 뜻인데,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과정에서 겪는 고난들과 시련들을
기꺼이 참고 견디라는 뜻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이시니,
그분의 뒤를 따라가는 길에서 십자가를 만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기준으로만 보면,
신앙생활은 결코 쉽고 편한 생활이 아닙니다.
재미도 없고, 어렵기만 하고, 힘든 생활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기준으로 보면,
믿음, 희망, 사랑이 가득한 생활이고,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은 기쁨으로 하는 생활이고, 행복하니까 하는 생활입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6,25).”

이 말씀의 뜻은, “현세의 삶에 대한 집착과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 내가 주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만 추구하면서
현세의 삶에 대한 집착과 욕심을 버리는 사람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예수님께 물었던 어떤 부자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많은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지 못해서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마태 19,22).
그는 재물을 모두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슬펐던 것일까?
아니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이 너무 어렵다고 생각해서 슬펐던 것일까?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자기가 버린 것들을
‘쓰레기’ 라고 표현했습니다(필리 3,8).
‘슬퍼하며’ 떠나간 그 부자의 경우에,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방해하는
‘많은 재물’도 쓰레기이고, 그 재물에 대한 애착심도 쓰레기입니다.
(쓰레기를 소중하게 여기면서 움켜쥐고 있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로 가지고 들어갈 수 없는 것들은,
그 나라의 기준으로는 전부 다 쓰레기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다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마태 16,26)”

온 세상을 얻어도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면, 온 세상을 얻었다는 것은
결국 아무런 가치가 없는 쓰레기만 얻은 것과 같습니다.
요즘에는 쓰레기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창세기의 표현으로 바꾸면 ‘먼지’입니다(창세 3,19).
세속에서 출세하고 성공하고, 세속의 권력, 명예, 재물을 엄청나게 모아서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해도,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면, 그것은 ‘먼지’만 잔뜩
모아서 먼지 속에서 살다가 먼지처럼 사라지는 허망한 인생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마태 16,27).”

‘행실대로’ 갚는다는 말씀은,
심판 때에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느냐?”를 보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데,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그 주장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었어도 행실이 하느님과 예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았다면
구원받지 못합니다(마태 7,21).
(하느님과 예수님의 뜻을 실행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제대로 믿은 것이 아닙니다.
믿는다고 자기 혼자서 주장하는 것일 뿐입니다.)
지금의 행실은 나중의 심판에 그대로 연결됩니다.
따라서 어떤 심판을 받게 될 것인지는
지금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남 탓을 할 수도 없고, 주님께 항의할 수도 없고,
환경이나 여건 때문에 그랬다고 핑계를 댈 수도 없습니다. 뿌린 대로 거두는 법입니다(2코린 9,6).

 

 

-조욱현신부-

 

복음마태 16,24-28: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꾸겠느냐?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24). 이 말씀은 우리 신앙인 모두의 원칙이고 강령이다이는 복음서 여러 곳에서 강조하신 말씀이다(참조마태 10,37-39; 마르 8,34-37; 루가 9,23-27; 14,25-27; 17,33; 요한 12,25).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강요가 아니다억지로 시키는 것도 아니다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25). 목숨을 얻는 것과 목숨을 잃는 것은 무한한 차이가 있다즉 구원과 멸망의 차이이다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이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26)고 말씀하신다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악한 삶을 살면 파멸을 맞게 되며 그것은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이다이것이 목숨을 잃는 것이며 멸망하는 것이다.

 

나의 가르침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으로 인하여 현세의 삶을 경멸하여 진리를 위해 죽음과 맞서기까지 하는 사람은 그 신심으로 인하여 죽음 안에서 자기 생명을 잃을지도 모른다그러나 나 때문에 자기 생명을 잃는 이런 사람은 오히려 생명을 구하고 지키게 될 것이다.”라고 한다.(오리게네스마태오 복음 주해 12,26). 즉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말이다.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26이 말씀은 사람에게는 죽음을 면하게 해 줄즉 생명 대신 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뜻하는 말씀이다이렇게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아무 것도 내줄 것이 없는 우리를 위해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1베드 1,19) “값을 치르고”(1코린 6,20)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대신 내어주신 그분을 우리는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27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오신다고 하는 것은 아버지의 영광과 아드님의 영광이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이 영광은 하느님의 영광이며하나의 영광이다이 영광이 같으므로 본질도 하나라는 말이다아드님이 하느님의 영광에 싸여 있듯이 우리도 그 영광에 참여하게 해 주실 것이다그 영광에 참여하기 전에 그분은 심판관으로서 심판과 엄격한 판결에 대해 말씀하셨다.

 

여기에 서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28우리 신앙인은 이제 선택이 남아있다십자가를 선택하는 것이다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 따르기를 원하지 않는 나 자신을 끊고버리고죽이는 삶을 통하여 주님께 나아가며주님의 영광에 함께 참여하리라는 것이다예수님께서는 몸소 죽음을 맛보셨고신앙인들에게도 이미 죽음의 맛을 보여주셨다말씀에 행동이 따른 것이다.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태 16, 26)

-한상우신부-

목숨으로
시작되는
생명의
십자가입니다.

목숨속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사랑하기위한
십자가이며
다시 태어나야 할
목숨입니다.

소유할 수 없는
목숨이며
대신 지고
갈 수 없는 우리의
십자가입니다.

목숨과
십자가를
아우를 수
있는 그것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사랑입니다.

사랑 없이
십자가를
끝까지
지고 갈 순
없습니다.

사람이 되어
가게 하는
십자가이며
목숨입니다.

목숨에 던져진
대답은
십자가입니다.

목숨을
깨닫게하는
십자가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목숨임을 알기에
하느님을 향합니다.

목숨은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께
복종하게 되며

하느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만나게하는
목숨이며
십자가입니다.

목숨을 살리는
십자가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을 따름과 그 보상에 대해 들려주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주님을 따르는데 있어 "자신"과 "십자가"는 양립 불가능한 가치입니다. 자아는 자기 자신을 먼저 생각하고 제 이익을 추구하기 마련입니다. 더 편하고 더 올라가고 더 가지는 쪽에 매력을 느끼지요. 당장의 찬사와 욕구 충족과 쾌락을 좇으며 누가 있는지도 모르는 윗자리, 윗자리처럼 보이는 허상을 향해 나아갑니다.

십자가는 그 반대입니다. 더 내려가고 더 비우고 더 낮아지길 바랍니다. 저 아래 맨끝에 계신 주님 곁으로 가려고, 그분을 닮으려고 애쓰지요. 그러니 모욕과 업신여김과 무시를 감수하며 자신보다 타인을, 인류와 세상을 위해 기도하고 염려합니다.

자신을 굳게 고수한 채로 십자가를 지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인생살이에서 마냥 십자가를 피할 수도 없으니 자기가 십자가를 지는 게 아니라 십자가가 자신을 지는 형국으로 질질 끌려가기도 하고, 예수님께 자기 십자가까지 덤으로 얹어버리기도 하고, 아니면 주변의 애먼 이들에게 제 십자가를 넘겨 고통을 가중시키기도 하지요.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마태 16,27)

결국 모든 사람은 십자가를 진 만큼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건 타인의 십자가건 제 안위와 이익과 생명보다 더 귀하게 받아 안은 그것 덕분에 하느님과 영원히 누릴 생명, 즉 진짜 목숨을 얻을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진 기쁜 소식과, "피의 성읍" 니네베에게 내린 가혹한 선고가 울려퍼집니다.

"니네베가 망하였다! 누가 그를 가엾이 여기겠느냐?"(나홈 3,7)

니네베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아시리아의 수도입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과 원수지간이지요. 주님께서는 당신께 불충한 이스라엘을 아시리아를 통해 벌주시지만, 제 분에 겨워 살육과 약탈과 노략질을 일삼은 니네베를 결국 벌하십니다. 그들이 자신을 쓰신 주님의 뜻을 넘어 제 탐욕을 채우는데 급급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화답송)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의 생사여탈을 주관하는 분이십니다. 누구도 이 권한을 주인에게서 빼앗을 수 없지요. 그저 인간은 흥망성쇠와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의 파도 위에서, 그분의 공정과 정의, 진실과 자비에 의탁해, 주어진 십자가를 성심껏 지고 균형 잡으며 나아갈 뿐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자기애로 똘똘 뭉친 자아에서 자신을 떼어내는 일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게다가 너끈히 질 수 있다면 십자가가 아니니, 마냥 쉬운 길이 아님은 분명하지요. 하지만 가볼만한 길입니다. 주님이 가신 길이고 우리와 함께 걸으실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길의 끝에는 그분과 누리는 영원한 생명, 진짜 목숨이 보장되어 있으니 힘내어 나아갈 가치가 충분하지요.

사랑하는 벗님! 각자 제 십자가로 힘겨워하면서도 묵묵히 인내롭게 걷고 있는 여러분 모두를 응원하고 축복합니다. 
"하늘 나라가 여러분의 것"(복음 환호송 참조)이라고 주님께서 약속하셨으니 기뻐하십시오.

 

주님 때문에 살면서 주님 위해 살지 않는  

-김찬선신부-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사즉생 생즉사死卽生 生卽死라는 말이 모 정치인으로 인해 유행했었습니다.
군부 독재가 한창일 때 거기에 대항하기 위해 당시 야당 총재가
목숨을 걸고 싸우며 내 건 말인데 오늘 주님이 말씀하신 것도 같은 뜻일까요?

그런 뜻이 없다고 할 수 없지만
주님의 말씀은 정치인의 그 말을 포함하고 뛰어넘는 말씀이지요.

제 생각에 정치인의 말은 죽기살기로 싸워야 승리한다는 말로서
자기가 권력을 잡고 위세 부리며 살기 위한 좌우명일 뿐이고,
그분이 그리스도교 신자이기에 설사 복음적인 의미가 있다 해도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한 알의 밀알이 되겠다는 의미 정도일 것입니다.

물론 민주주의를 위해 한 목숨 바치겠다는 것이면 이 또한 대단히 훌륭한
죽음이고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오늘 주님 말씀은 당신 때문에 목숨을 잃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오늘 주님 말씀을 자칫 <나 때문에>를 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저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으로.

이렇게 되면 과거에 제가 자주 우를 범했던 것처럼
앞의 잃는 나의 목숨은 무엇이고, 뒤의 목숨은 무엇일까 생각게 되겠지요.
한때 저는 앞의 '잃어야 할 목숨'은 소아小我이고 뒤의 '얻게 될 목숨'은
진아眞我라고 불교식으로 이해를 하기도 했지요.

당연히 여기에 하느님은 빠져 있는 것이고,
하느님 없이도 내가 죽으면 내가 살 수 있다는 얘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 말씀은 분명하게 주님 때문에 죽을 때
주님께서 살려주신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이때 잃는 목숨은 현세의 목숨이고 얻는 목숨은 영원한 생명이 되며,
현세에서 나의 목숨을 바치면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거지요.

그렇긴 하지만 주님은 마지막에 한 번 죽는 것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매일의 죽음, 매일의 순교에 대해서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목숨을 잃는 것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지만
더 넓은 의미의 자기를 버림과 십자가를 짐에 대해서도 말씀하신 겁니다.

그렇지요.
최고의 자기 잃음은 자기 목숨까지 바치는 것이지만
그것은 일생에 한 번이기에 그렇게 자기 목숨을 바치기 전에도,
우리는 매일 자기를 잃어야 하고 사랑을 위해서 잃어야 합니다.
하느님 사랑 때문에 자기를 잃고 이웃 때문에도 잃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는 이번에 처음으로 저의 사랑에 대해 반성케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웃 사랑 때문에 저를 잃는 것은 종종 있지만
하느님 사랑 때문에 저를 잃는 것은 드물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내리사랑 문제입니다.
저는 이웃에게는 저를 희생하는 사랑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하느님께는 사랑을 드리기보다는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 얘기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저희 형제들이 연말연시에 피정을 하고,
피정을 마칠 때 감사 미사와 새해맞이 미사를 봉헌하는데 저희 형제들이
하나같이 자식을 위한 지향을 넣으면서 부모를 위해서는 넣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섭섭했는데 사랑이라는 것이 내리사랑이어서 그런 거라고
이해를 했고, 지금 생각해보니 저도 크게 다르지 않아 하느님 때문에 뭐를
하거나 못한 적이 없고, 이웃을 위해서는 저를 희생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래도 고상한 핑계입니다.
많은 경우는 제 눈에 안 보이는 하느님에게는 입 싹 딱고 눈에 보이는 이웃,
특히 고통받는 이웃에게는 체면 때문이든 사랑 때문이든 희생하는 저입니다.

하여 주님 때문에 살면서 주님을 위해 살지 않는 저를 반성하는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6년 8월 5일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태오 16,2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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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비운다는 말이나 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다는 말이나 궁극적으로는 같은 의미입니다.

      마음을 비워 자아를 죽이다시피 해야 하는 이유는 그 자아가 우리를 ‘모기’, 혹은 요즘 유행하는 ‘좀비’와 같은 존재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자아는 자신을 살리려는 마음을 자아내기에 자신이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일을 서슴지 않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자아의 욕구를 통제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살기 위해서 타자의 생명을 먹어야만 합니다. 생존은 타자의 생명으로만 유지될 수 있습니다. 이 본성을 통제할 수 없는 상태로 태어나는 것이 원죄입니다. 그런데 이 자아의 욕구는 죽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이다시피 할 수는 있습니다. 바로 더 높은 수준의 누군가를 받아들임으로써입니다. 좀비였던 ‘알’이 한 인간을 사랑하여 그녀를 살게 하려고 자신의 목숨을 바치게 됨으로써 더 높은 존재로 새로 태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그리스도께서 우리 주인으로 살게 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나를 넓혀 마치 노아가 좋은 동물, 나쁜 동물 가릴 것 없이 자신의 방주에 태우는 것처럼 내 안에서 더 많은 사람이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많은 사람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모습으로 예수님께서도 들어오십니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결국 더 많은 사람을 받아들이기 위해 마음을 넓힌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것이 십자가 신비의 가장 중요한 면일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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