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5일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2020년 8월 5일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주님, 그렇기는 합니다마는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그제야 예수께서는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마태오 15,21-28)
"Please, Lord, for even the dogs eat the scraps
that fall from the table of their masters."
Then Jesus said to her in reply,
"O woman, great is your faith!
Let it be done for you as you wish."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기석신부-
오늘 독서와 화답송 그리고 복음은 모두 도움을 청하는 우리의 기도를 하느님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을 약속합니다.
먼저 예레미야 예언자가 전하는 주님의 신탁은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 가졌던 체험을 다시 하게 되리라 상상하면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떠오르게 합니다. 광야에서 누린 바 있던 하느님의 자애로 둘러싸인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을 확인하면서 제 안식처를 찾아 나섭니다.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너에게 한결같이 자애를 베풀었다.”
화답송도 독서에 이어지는 주님의 신탁으로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선포합니다. “목자가 양 떼를 돌보듯 주님은 우리를 지켜 주시리라.” 그런 다음 마태오 복음에서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지켜 주시는 착한 목자 예수님의 자애를 확인합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가나안 여인은 이민족이라는 출신의 약점을 넘어서 진정한 치유자이신 예수님께 간절히 청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의 처사에도 끈질긴 구애는 마귀 들린 그녀의 딸을 주님의 영원한 사랑으로 온전히 회복시킵니다. 하느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출신이나 병듦의 약점이나 약함이 아니라, 굳건한 믿음이라는 장점과 강함에서 드러난 것입니다.
오늘 독서와 화답송 그리고 복음을 묵상하며, 언제나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는 우리의 기도를 바오로 사도의 고백으로 대신하고 싶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2코린 12,9).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신부님! 어떻게 혼자 살 수 있어요?”
많은 분이 제게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신부 되었을 때부터 들었으니 정말로 이 말을 오랫동안 또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이 50이 넘어가니 이 말씀을 잘 하지 않으십니다. 이 정도 나이가 되면 혼자 사는 것이 익숙할 것으로 생각하나 봅니다.
아무튼, 이런 질문을 받으면 우선 “혼자 살 수 없어요.”라고 답합니다. 법적으로는 혼자 사는 독신으로 보이지만,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미사 때 만나는 사람도 있고, 순례 오신 분들과 만남, 그밖에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나고 있으며 또 그들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사람은 혼자서 절대 살 수 없습니다. 시간적, 공간적으로 혼자 지내는 것 같지만, 이 역시도 혼자 사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든 연결되어 살고 있습니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것, 그리고 삶의 편리함을 가져다주는 물건은 제가 샀을 뿐 직접 만든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만들지 않았지만, 누군가의 도움으로 지금 편리한 혜택을 받는 것입니다.
사람을 뜻하는 사람인(人)의 한자를 보면, 서로 의지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은 서로 의지하고 기대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기본 모습을 포기하며 사는 것이 아닐까요? 미워하고 원망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서로 의지하지도 또 기대지도 않는 비인간의 길을 사는 우리가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예레 31,3)라며 다가오시는데, 우리는 그 사랑을 철저하게 외면하는 것이 아닐까요?
가나안 여인이 마귀 들린 자기 딸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때 제자들은 이 여인이 소리를 지른다고 아우성칩니다.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도 제자들과 같은 생각인 것처럼, 강아지에 비유하면서 모욕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이때 가나안 여인의 모습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철저히 주님께 의지하고 기대려는 모습을 버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삶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를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시간에 자신이 원하는 대로 딸이 나았습니다.
배척하고 부정하는 삶은 결코 믿음의 삶도 또 사람의 삶도 아닙니다. 주님께 의지하고 사람과 서로 기대며 살아가는 삶이야 말고 참믿음의 삶이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의 삶입니다.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조건이 된다(에리히 프롬).
고목을 어떻게 할 것인가?
2,000년이 넘은 고목 한 그루가 있습니다.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인지 이제 이쪽저쪽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삭아버린 가지도 있고, 더 성장하지 않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쪽 가지에는 새로운 움이 트고 있습니다.
이 고목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문제가 있다고 잘라 버리시겠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새로운 움이 트는 모습을 보면서, 또 오랜 시간을 산 나무이기에 어떻게든 더 잘 보살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가톨릭이라는 고목을 바라봅니다. 문제가 없을까요? 분명히 많습니다. 그러나 뽑아 불태워 없앨 것이 아닙니다. 사실 희망이 더 많이 보입니다. 열심히 사는 성직자, 수도자들이 많습니다. 또 열심히 사는 평신도들이 이 교회를 튼튼히 지키고 있습니다.
불미스러운 일도 종종 생기지만 새로운 도약을 하게 되는 계기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긍정적인 사람인데 잘 안 풀리는 이유
-전삼용신부-
‘긍정의 힘’이라는 식의 책이나 강연을 한 번쯤은 읽어보거나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정말 삶을 긍정하는 사람들은 하늘 일마다 잘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정적인 사람은 항상 그 사람이 자신에 대해 예언하는 대로 좋지 못한 삶을 삽니다.
예를 들어 한국전 당시 중공군에게 포로가 된 미국 병사들과 터키 병사들의 차이입니다. 중공군은 포로가 탈출을 감행하는 것을 막기 위해 끊임없이 그들의 사기를 꺾는 교육을 했습니다. 탈출은 불가능하니 결국 순응하라는 것입니다. 이 교육에 넘어간 미국 병사들은 대부분 수용소에서 죽고 본국으로 돌아간 사람들도 무기력하게 살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 올 때부터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교육을 받고 중공군의 교육에 저항하여 끊임없이 긍정 마인드를 키운 터키 군사들은 거의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정말 긍정 마인드가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도 긍정적인데 왜 삶은 이 모양이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 잘 될 거야!’를 끊임없이 되뇌지만 잘 안 됩니다. 그 이유는 진짜 긍정적인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긍정에 무언가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제임스 본드 스톡데일’이라는 사람은 미 해군 장교로서 베트남 전쟁 당시 8년간의 포로 생활을 끝내고도 건강하게 돌아와 미국 부통령 후보에까지 오른 인물입니다. 당시 베트남 하노이 수용소는 그야말로 지옥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런 극도의 고통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참으로 긍정적인 사람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톡데일은 그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놓습니다. 수용소에서 죽어간 이들이 누구였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올해 크리스마스에는 집으로 갈 수 있을 거야.’라고 믿었던 사람들은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다시 절망에 빠져 희망을 잃어갔습니다. 그리고 몇 년이 안 되어 결국 다 죽어갔습니다.
도대체 왜 어떤 이들은 긍정 마인드가 좋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죽는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우선 긍정 마인드가 좋다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다 잘 될 것이라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잘 안 될 때를 대비해야 합니다. 그러는 데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방 여인은 심하게 마귀에 든 딸아이를 살려달라고 예수님께 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들은 체도 안 하십니다. 심지어 자녀에게 줄 빵을 개에게 줄 수 없다고 모질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인은 자녀가 먹고 남은 부스러기라도 달라고 청합니다. 어째서 이 여인은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믿음’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 것을 넘어섭니다. 그 존재가 ‘좋으신 분’임을 믿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존재를 알았지만 그분을 좋은 분으로 여기지 못한 천사는 사탄이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도 그분이 자비로운 분임을 믿지 못했기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좋은 분임을 믿을 때에야 지금의 고난이나 청한 것이 허락되지 않았을 때도 멈추지 않을 수 있습니다.
믿음은 모든 상황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내가 청한 것이 들어지지 않았을 때, 그것도 의미가 있다고 여기게 합니다. 그래서 버텨낼 수 있고 포기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모진 분으로 여기면 둬 번 청하다 맙니다.
그러면 어떻게 믿음을 증가시킬 수 있을까요? 가장 좋은 방법이 감사일기를 쓰는 것입니다. 감사일기의 대명사가 오프라 윈프리입니다. 사생아로 태어나 할머니 손에서 자랐고, 삼촌의 성폭행으로 14살의 나이에 미혼모가 되었습니다. 마약과 알코올에 빠져 청소년기를 보내다 감옥생활까지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중 한 명이 되고 엄청난 부와 명예를 얻었습니다. 그렇게 삶이 변한 이유를 오프라 윈프리는 감사일기 덕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감사하면 주님을 좋은 분으로 믿게 됩니다. 이 믿음이 있어야 긍정이 망상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김춘수의 ‘꽃’에서 보듯, ‘의미’는 타인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삶에 벌어지는 모든 것들에 의미가 있으려면 그것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분을 만나야 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 없이 혼자 힘으로 모든 것을 긍정하려 하면 지쳐 쓰러집니다. 오늘 복음의 여인처럼 주님께 대한 긍정이 먼저 있다면 아무리 힘든 난관도 다 헤쳐나갑니다. 세상에서 긍정 마인드로 성공했다는 사람들은 이미 어느 수준의 믿음에 도달한 사람들입니다. 그 믿음의 대상이 어떤 신이건 간에 그 사람은 그 신을 좋은 분으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긍정의 힘이 모든 난관과 실패를 극복하게 하여 결국 성공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키웁시다. 그리고 감사의 표현을 합시다. 그리고 모든 것에 긍정합시다. 그러면 나의 긍정이 기필코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고추를 키우면서 느낀 것입니다. 처음에 나온 잎을 따 주었습니다. 아깝다고 생각했지만 고추는 줄기를 더 튼튼하게 세웠습니다. 그리고 꽃이 피면서 고추가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나온 잎을 따주지 않았다면 고추는 줄기를 튼튼하게 하지 못했을 겁니다. 꽃이 필지라도 먹음직한 고추는 열리지 않았을 겁니다. 고추가 줄기를 곧게 세우기 위해서는 처음에 나온 잎을 따주어야 했습니다. 크게 자란 나무를 보면 중간 중간 가지가 잘려나간 걸 봅니다. 나무는 그렇게 아픔을 간직하면서 큰 나무가 됩니다. 감나무도, 대추나무도 바람이 불면 설익은 감과 대추를 떨어뜨리는 걸 봅니다. 그래야 가을이면 알찬 열매가 맺어진다고 합니다. 우리의 삶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근심이라는 잎, 걱정이라는 잎, 시기와 질투라는 잎을 따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희망의 줄기가 곧게 서고, 사랑의 꽃이 피며, 믿음의 열매가 열리는 겁니다.
코로나19의 위세가 좀처럼 누그러지지 않고 있습니다. 처음 나온 고추의 잎을 따주듯이, 나무의 가지를 잘라내듯이, 설익은 감과 대추를 떨어뜨리듯이 우리에게 아직도 원하는 것이 많은 것 같습니다. 치료제와 백신이 나올 때가지는 마스크 착용과 거리두기를 유지해야 할 것입니다. 가급적이면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가지 않고, 가족들이 함께 하는 시간을 보내야 하겠습니다. 책을 가까이하고, 영상으로 미사를 보면 좋겠습니다. 코로나19는 우리에게 익숙했던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을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세상의 삶에서 영적인 삶에로 우리를 이끄는 것 같습니다. 소유의 삶에서 존재의 삶으로 우리를 이끄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하지 않았던 것들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집 앞에 작은 텃밭을 가꾸기도 합니다. 명상을 하거나 글을 쓰기도 합니다. 톱니바퀴처럼 돌아가야만 채워지는 줄 알았는데 모래시계처럼 가만있어도 채워지는 것이 있습니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40년을 보내야 했습니다. 굶주림도 있었고, 목마름도 있었습니다. 의심도 있었고, 갈등도 있었습니다. 참고 견딘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는 나무는 모두 타는 목마름으로 여름을 견뎠습니다. 여름의 뜨거움이 없었다면 나무는 뿌리를 내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리 골절 수술을 한 사람은 한동안 목발에 의지해야 합니다. 뼈가 붙어야하기 때문입니다. 다리의 힘을 되찾아야만 비로소 목발을 놓을 수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고 했습니다. 비에 젖지 않고 피는 꽃도 없다고 했습니다. 오늘 예레미야 예언자도 고난과 시련을 겪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칼을 피해 살아남은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입었다. 네가 다시 사마리아 산마다 포도밭을 만들리니 포도를 심은 이들이 그 열매를 따 먹으리라. 그때에는 처녀가 춤추며 기뻐하고, 젊은이도 노인도 함께 즐기리라. 나는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고 위로하리라. 그들의 근심을 거두고 즐거움을 주리라.”
오늘 문득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또 무엇인지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음악적 재능이나 뛰어난 추진력을 원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재산이나, 업적을 원하시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의심 없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나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끝까지 믿어 주셨고,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가나안의 여인처럼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갖는다면 예수님께서는 기뻐하실 것입니다. 자신의 것을 기쁜 마음으로 이웃들과 나누기로 했던 자캐오처럼 우리들이 소유하기 보다는 나눌 수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욱 우리를 사랑하실 것입니다. 무더운 여름입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주님께서 행복해 하실 일들을 해야 하겠습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뿌리가 깊어야 잎이 무성하다
-반영억신부-
우리 옛 속담에 “사람의 마음은 하루에도 열두 번” 또는 “마음이 흔들비쭉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을 가다듬으라는 말입니다. 선한 마음을 일관되게 지킨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어려운 때일수록 다잡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감정을 드러내고 말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좋을 때야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이 생겼을 때 그 본마음을 알게 됩니다.
‘가나안 여자 한 사람이 자기 딸을 살려달라.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마태15,21)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애원하였는데 제자들이 예수님께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마태15,22).하고 말씀드렸습니다. 정말 그들의 태도가 마땅찮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너무 모르는 것 같습니다. 자식을 살리고자 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얼마나 알고 그랬을까? 이방인여인은 포기하지 않고 겸손하게 끝까지 간청하였고, 마침내 응답을 얻어냈습니다.“믿음과 겸손은 따로 떼어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기 위해서는 겸손한 마음을 지녀야 하고 겸손함이 배어있는 믿음만이 올바른 신앙의 길로 나아가게 합니다”(함께야).
예수님을 위하는 방법을 잘 찾아야 하겠습니다. 어려움이 생긴 여인을 보살펴 주시도록 안내할 수 있는 마음을 잘 지킨다면 주님께서는 그것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여러분 가운데에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부르십시오. 원로들은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십시오. 그러면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냅니다”(야고 5,15-16).
주님께서는“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저를 도와주십시오”(마태15,22.25)하고 애원하는 여인의 간절한 바람과 원의에 대한 믿음을 보셨습니다. 우리도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되고, 믿음으로써 하느님의 모든 것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뿌리를 내려야 하겠습니다. 뿌리가 깊어야 잎이 무성하듯 믿음의 뿌리가 깊은 만큼 풍성한 은총을 체험케 될 것입니다.
“믿음이 깊은 영혼은 교활하고 힘센 원수인 악마를 두려워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 베드로는 악마에 대항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믿음으로 마음을 견고히 하고, 악마를 대적하라’고 하셨습니다. 결코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히브11,6).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는 누구나 다 세상을 이겨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5,4). 간사한 마음을 다스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어떤 가나안 여자의 간청을 받아들여서 그 여자의 딸을 고쳐 주신
이야기를 해설하거나 강론할 때, 그 여자의 ‘믿음’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은데, 그 경우에 그 여자가 처음부터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잘못 해설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 여자의 간청이 아니라 예수님의 반응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이야기인데, 여자의 믿음이 단계적으로 발전하는 것을 보여 주는 이야기,
또는 예수님께서 여자의 믿음을 단계적으로 끌어올리신 이야기입니다.
그 여자는 처음부터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인도를 받아서 올바른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던 여자가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여자의 ‘겸손’을 강조하는 해설도 많은데, 여자가 원래 겸손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지만, 이야기 속에서는 여자의 ‘겸손’은 ‘간절함’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마태 15,21-23)”
예수님께서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는 것은 ‘거절’을 뜻합니다.
물론 그냥 거절은 아니고, 여자를 ‘믿음의 길’로 인도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로서,
거절처럼 보이는 반응을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의 간청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신 것은,
여자가 믿음도 없이 마치 우상에게 비는 것처럼 청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티로와 시돈 지방’이라는 말과 ‘가나안 부인’이라는 말은
그 여자가 우상을 숭배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때로는 ‘침묵’이 예수님의 응답의 한 방식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의 기도에 아무 응답 없이 예수님께서 침묵을 지키시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그때 우리는 자신의 기도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먼저 반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이 없었다면 어떻게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이라고 부를 수 있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을 때, 그 소문을 전해 준 사람으로부터
예수님을 그렇게 불러야 한다고 배웠을 것입니다.
여자의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다는 것은 실제로 마귀가 들렸다는 뜻일 수도
있고, 어떤 중병을 앓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라는 제자들의
말은, “시끄러우니까 저 여자를 쫓아버립시다.” 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침묵을 단순하게 거절로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마태 15,24-25).”
여기서 예수님 말씀은 두 번째 거절인데, “내가 주는 구원은, 구원받기를 바라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 받을 수 있다.”로 해석됩니다.
(‘이스라엘 집안’이라는 말이 있지만, 이 말은 유대교로 개종하라는 뜻도 아니고,
이스라엘로 귀화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은, 우선 먼저 ‘당신의 양’이 되라는 권고인데, 이 권고는 사실상
당신을 믿으라는 권고이고, 우상 숭배를 버리라는 권고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기를 거부하면서,
우상을 섬기는 사람은 그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아마도 여자는 예수님 말씀의 뜻을 알아들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라는 여자의 말에는
“예수님을 믿겠습니다.” 라는 뜻도 들어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우상 숭배를 버리겠다고 다짐하는
결정적인 단계에 도달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마태 15,26-27).”
여기서 예수님 말씀은 세 번째 거절인데, “하느님의 자녀들이 받는 은총을 받기를
바란다면 먼저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라.” 라는 뜻입니다.
(우상 숭배를 완전히 버리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라는 권고입니다.)
‘강아지들’은 우상 숭배자들을 뜻하는 ‘개들’이라는 말을
덜 심한 표현으로 바꾼 것입니다.
산상 설교에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마태 7,6).”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에게 충분한 교육과 준비 기간 없이
어떤 은총을 베풀어 준다면, 그들은 그 은총을 우상에게 소원을 빌어서
우연히 얻는 복과 구분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하느님을 우상과 동일시하는 신성모독죄가 됩니다.
여기서 여자의 말은, 자신이 강아지라는 것을 인정하는 말이고,
그래서 앞으로는 자녀로서 살겠다고 다짐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제가 강아지로 살았음을 인정합니다. 앞으로는 자녀로서 살 테니까 우선 은총의
부스러기라도 주십시오. 하느님은 저처럼 아무것도 모르고서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던 사람도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저는 믿습니다.”v 여자는 예수님께서 인도하신 대로 잘 따라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간절함’이 계기가 되었지만, 어떻든 ‘믿음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마태 15,28).”
여기서 예수님의 칭찬은,
당신이 인도하는 대로 여자가 잘 따라온 것에 대한 칭찬입니다.
그 여자가 원래부터 큰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예수님과 나눈 대화를 통해서 갑자기 큰 믿음을 갖게 된 것도 아닙니다.
여자는 이제 막 ‘믿음의 길’로 들어섰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칭찬은 ‘앞으로’ 흔들림 없이 신앙생활을 잘하라는
격려 말씀이 되기도 합니다.
(여자의 딸이 나은 것은, 이 이야기에서는 부수적인 이야기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베풀어 주신 진짜 은총은
우상을 숭배했던 여자를 하느님의 자녀로 변화시켜 주신 일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15,21-28: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예수님께서는 유다를 떠나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다.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을 떠나 다른 민족들에게 가셨다. 그래서 소외된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다. 거기에서 한 여인이,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22절)라고 외친다.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을 떠나셨는데, 이 여인은 이방 민족들의 우상숭배와 하느님을 거스르는 삶의 방식을 버리고 예수님께 나왔다.
유대인들이 거부한 분을 이 여인은 믿음을 통해 고백한다. 이 여인은 이방 민족들의 어머니다. 이 여인은 신앙을 통해 예수님을 알았다. 이 여인은 이방 민족들인 딸을 위해 주님께 애원한다. 딸이 우상숭배와 죄로 길을 잃고 호되게 마귀가 들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못 들은 척하신다. 그것은 그 여자로 하여금 더욱 절실하게 소망하도록 만들고 그 겸손함을 칭찬하시기 위해서였다.
이 여인의 말을 잘 살펴보면, 그 여인은 이방민족이었지만, 유다교로 개종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 여인은 율법을 통해 주님을 알고 있었고, 주님을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이라고 부른다. 이 여인은 자기 자신을 위해 예수님께 청한 것이 아니라, 더러운 영들의 손아귀에 잡힌 이방민족들인 딸을 위해 도움을 청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신다. 그러자 제자들이 동정심이 생겨 예수님께 간청한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24절) 하고 답하신다. 예수님은 먼저 당신이 세상에 오심, 기적 그리고 당신 부활의 권능을 먼저 유대인들에게 드러내시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얻으시려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여인이 “저를 도와주십시오.”(25절)라고 청했을 때, 예수님은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26절)고 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 여인의 믿음은 대단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자녀”로 이방인들을 “강아지들”로 표현하셨지만, 여인은 곧바로 유대인을 “주인”이라고 한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27절)라고 말한다. 이 여인은 이렇게 자녀가 되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28절). 그리고 딸은 바로 그 시간에 나았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겸손을 지닌 백인대장에게도 호의를 베풀어 주셨다. 그의 유명한 말이 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 8,8). 백인대장은 예수님을 집으로 모시지 않고 자기 마음에 모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마태 8,10)라고 하셨다. 이 여인의 겸손과 믿음을 우리도 청하여야 한다.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태 15, 27)
-한상우신부-
작은 부스러기의
간절한 마음을
헤아려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부스러기에서
다시 시작하는
우리의 삶입니다.
기적은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조차
감사로이 받아먹는
은총입니다.
사랑하면
부스러기조차
소중합니다.
모든 사랑은
부스러기처럼
간절한 것입니다.
가장 힘들 때
주님을 찾습니다.
참된 기도는
절박하기에
낮아집니다.
부스러기의
기도는
주님께 집중하기에
진실합니다.
사랑은
너를 위해
내가 낮아지는
소중함에
있습니다.
간절하기에
장애물도 단숨에
뛰어 넘습니다.
믿음은
부스러기같이
부서지는 것입니다.
자아가 부서져야
믿음이 됩니다.
부서지는
부스러기의
힘을 믿습니다.
모든 순간순간이
부서지는
부스러기의 믿음을
필요로 합니다.
부서지는 것이
주님을 만나는
은총의 때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는 하느님의 기쁨이 담겨 있습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 15,28)
예수님께서 이방 여인의 믿음에 감탄하시며 외치십니다. 기대 이상의 믿음 앞에서 그분은 기쁨을 감추실 수 없으셨습니다.
이 가나안 부인은 마귀 들린 딸의 치유를 위해 예수님께 매달렸습니다. 악에 의해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된 딸을 구하기 위해 어머니가 못할 일이란 없지요. 그녀는 비록 이방인이고 게다가 여성이지만 믿음으로 무장한 강인한 어머니였으니까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마태 15,26)
그녀는 강아지 소리를 들으면서도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믿고 바라는 바를 얻기 위해 어줍잖은 자존심따위는 애시당초 버렸고, 또 믿음이 주는 자존감으로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의 빵"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이 생명을 유지하도록 내려 주시는 빵을 가리킵니다. 광야의 만나이기도 하고 주님의 말씀과 율법을 가리킬 수도 있겠지요. 이는 하느님 자녀들이 누리는 특권이기 이전에 그 관계를 유지하는 탯줄입니다. 이 빵을 통해 하느님과 백성의 관계가 이어지지요.
"주인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마태 15,27)
강아지가 주는 비하적 어감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오늘은 "부스러기"에 머무릅니다. 빵은 곡물의 가루가 물, 기름, 누룩과 섞이는 과정에 물리적 힘과 온도가 가해져 점성이 생기면서 생성된 음식이지요. 빵은 원래 부스러기들로 이루어졌습니다. 빵을 쪼개는 과정 안에 입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떨어지는 부스러기도 영양소나 가치로 보면 손색이 없는 원래 빵의 일부분이라는 뜻입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태 15,27)
이 이방 여인의 답변이 얼마나 깊은 통찰을 담고 있는지요! 그녀는 하느님이 당신 백성만이 아니라 모든 만물을 먹이시는 창조주이심을 고백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셨던 옛 계약은 그것으로 그치고 말 과거 사건이 아니라, 온 세상 모든 인류를 구하시기 위한 구원 역사의 시작이라는 걸 그녀는 감지하고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다시 하느님의 사랑을 회복하고 피어나는 이스라엘의 기쁨을 보여 줍니다. 환호하고 환성 올리는 이스라엘의 모습 안에는 그들을 지켜 보시는 하느님의 기쁨 또한 서려 있습니다.
"일어나 시온으로 올라가, 주 하느님께 나아가자."(예레 31,6)
자기들이 저지른 죄악으로 주님께 버림 받았던 이스라엘이 다시 주님의 산으로 부름을 받을 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에 그들은 이렇게 외치며 나아가겠지요. 기대과 설렘 가득한 이 환성이 예수님의 희생 제사를 거쳐 온 세상 모든 민족들에게로 번져나가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시고, 예수님의 몸인 생명의 빵은 그분을 바라는 모든 이에게 끝없이 쪼개어져 나뉘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혼인 잔치에 참여할 수 있다면 식탁에 앉은 자녀여도 좋고 식탁 아래의 강아지여도 좋을 것 같습니다. 또 주님을, 주님 사랑을, 주님 말씀을 먹고 마실 수만 있다면 온전한 빵이어도 좋고, 부스러기여도 좋을 듯합니다. 우리가 그 이방 여인처럼 믿음에서 우러난 자존감을 간직한다면 공연히 말 마디와 어감에 발이 묶여 주님 사랑의 본류를 놓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 이 말씀 안에 녹아들어가 주님의 기쁨과 여러분의 기쁨이 만나는 관상에 잠겨보면 좋겠습니다. 기뻐하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그분과 함께 기뻐하십시오. 그 안에서 모든 바람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아멘.
두꺼운 귀와 믿음의 눈
-김찬선신부-
언젠가 얘기한 적이 있는 거 같은데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방 여인이 믿음의 최고수라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베드로나 마르타도 믿음의 고수이고 우리 믿음의 모범이지만
이들의 믿음이 예수님의 신성과 능력에 대한 믿음 면에서 최고수라면
오늘 이방 여인의 믿음은 예수님의 선성과 사랑에 대한 믿음 면에서
최고수이고 무엇보다도 최악의 상황에서도 끝까지 믿는 자의 본보기입니다.
물론 여기서 얘기하는 최악의 상황이란 믿기에는 최악의 상황이라는 뜻이고,
선하시고 사랑이신 주님을 믿기에는 최악의 상황이라는 뜻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주님께서는 이방 여인에게 최고의 모욕을 안겨줍니다.
너와 네 딸은 한 톨의 은총도 베풀 가치가 없는 강아지라고 하시는데
이런 분을 어떻게 선과 사랑의 주님이시라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에게는 선과 사랑의 주님이실지 몰라도
자기들에게만은 그런 분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방 여인은 말을 믿지 않고 주님을 믿었습니다.
귀가 얇은 사람은 남의 말을 잘 믿습니다.
남의 말을 잘 믿는다는 것은 좋은 뜻인데
그러나 귀가 얇다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지요.
왜냐면 그것은 좋은 뜻에서 잘 믿는 것이 아니라
허튼소리나 거짓말이나 악의에 찬 말들을
줏대없이 받아들여 자신이 흔들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 한 마디에 나의 존재가 흔들리는 것이며
그의 말을 쉽게 믿음으로 자기 믿음이 흔들리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자기 믿음이라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 믿음이 있어야 남의 말을 쉽게 믿지 않고
남의 말에 쉽사리 흔들리지 않을 뿐 아니라
이 자기 믿음이 있어야 자신감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믿음이란 남의 말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며,
두꺼운 귀를 가지고 옳게 의심함으로써 옳게 믿게 하고,
내 귀에 들려오는 많은 말들 중에서
걸러낼 것과 받아들일 것을 잘 분별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여인은 주님의 말을 믿지 않고 주님을 믿었습니다.
주님께서 말은 그렇게 하시지만 그런 분이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부드럽고 따듯한 말을 건네는 사람과 비교하여
냉정한 사람을 겉은 찬데 마음이 따듯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정말 모진 사람이어서 모진 말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정말 나를 사랑하기에 모진 말을 하는 사람도 있는데
오늘 이방 여인과 같은 사람은 이것을 잘 식별하지요.
나를 더 사랑하기에 내게 모질게 대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모진 말을 해도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나를 믿으시기에
모진 말을 하시는 주님의 믿음을 알아보는 믿음의 눈이 있었던 겁니다.
아무튼 이방 여인의 두꺼운 귀와 믿음의 눈이 부러운 오늘 우리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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