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7월 19일 연중 제16주일(농민 주일)

Margaret K 2020. 7. 18. 06:03

2020 7 19일 연중 제16주일(농민 주일) 

 

‘주인님, 밭에 뿌리신 것은 좋은 씨가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마태오 13,24-43)

 

'Master, did you not sow good seed in your field? 
Where have the weeds come fro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허규신부-

 

‘밀과 가라지.’ 성경을 잘 읽지 않는 사람들도 한 번쯤은 들어 보았을 내용입니다. 마태오 복음만이 전하는 이 비유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이 비유의 의미는 예수님의 설명으로 명확해집니다. 밭은 세상이며,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좋은 씨는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반면에 원수는 가라지를 뿌리고, 가라지는 악한 자의 자녀들입니다. 

종들이 묻습니다. “가라지들을 거두어 낼까요?” 그러나 주인은 수확 때가 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합니다. 수확은 종말을 나타내는 비유인데, 특히 종말에 있을 심판을 나타냅니다. 주인은 그때까지 밀과 가라지가 같이 자라도록 둡니다. 

오늘 복음은 밀이나 가라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비유는 주인의 자비, 곧 하느님의 자비를 강조하는 이야기입니다. 아직 종말은 오지 않았고 지금 우리는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시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수확 때까지 기다리는 주인은 자비로운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금 우리의 행실에 따라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시라 심판을 미루시는,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제1독서인 지혜서는 말합니다. “의인은 인자해야 함을 당신 백성에게 가르치시고, 지은 죄에 대하여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희망을 당신의 자녀들에게 안겨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지금 우리에게 가능성의 시간을 주십니다. ‘아직’ 죄를 뉘우치고 회개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종말 때까지 변화할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 시간은 나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주어집니다

사랑과 관용, 인내의 주님

-키엣주교-

 

주님의 사랑은 참으로 거대한 사랑입니다. 언제나 새로운 길을 알려주시고 당신께서 먼저 그 길을 가셨습니다.

시나이 산에서의 계약은 주님 사랑의 증거입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와서 주님의 모든 말씀과 법규를 알려주었을 때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맹세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실행하고 따르겠습니다.”

맹세에도 불구하고 나약한 우리들은 언제나 주님을 배신하지만 주님께서는 언제나 믿고 기다려주십니다. 주님의 믿음에 보답하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는 관용과 용서, 인내로 우리 인간의 변화를 기다리십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복음의 “밀과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주인은 가라지를 뽑지 말고 수확때를 기다리자고 하였습니다.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모진 사람은 나쁜 것을 제거하기 위해 좋은 것까지 모두 없애버립니다. 그러나 자비로운 주님께서는 나쁜 것을 바로 제거하지 않고 수확기가 될때까지 끈기있게 기다리십니다. 그제서야 잡초와 벼를 구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수확의 계절이 아직 안 되었다는 것은 변화할 수 있는 시간이 남아 있다는 희망을 뜻합니다. 관용과 용서의 주님은 죄인을 즉시 벌하지 않으십니다. 비록 나쁜 사람일지라도 회개하고 주님의 품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버리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죄인들을 즉시 심판하시는 분이었다면 막달레나 마리아와 사도들, 아우구스티노 성인과 이방인의 사도인 바오로 성인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기다리지 않고 벌을 내리시는 분이라면 가장 먼저 벌을 받을 사람은 바로 나일 것입니다. 나 역시 나약함으로 많은 죄를 저지른 사람이고 내 마음 속에도 벼와 함께 가라지가 자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변화해야 합니다. 변화는 회개로부터 시작됩니다. 진실한 사랑이신 주님과 함께 살기 위해 참회가 필요합니다. 종교는 겉치례가 아닙니다. 외형적으로만 종교를 믿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과의 계약을 부적처럼 지니기만 하고 마음은 점점 더 멀어져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진정한 삶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이 세상과 교회, 선한 마음의 좋은 밭에서 주님께서 뿌려주신 말씀과 은혜를 잘 가꾸며 살아가야 합니다. 좋은 행동, 좋은 생각만을 했던 사람들도 시간이 지나면 위선과 허영으로 독선적인 사람이 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이 주신 좋은 밭에 악마가 스며들어 가라지를 뿌렸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선하신 하느님을 알고 사랑할 수 있기 위해 선이 존재합니다. 악을 피하고 선에 가까이 가야 함을 깨달을 수 있도록 악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선을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주님, 저희가 받은 주님의 은총을 헤아리고 주님께서 주신 좋은 밭과 좋은 씨를 잘 돌보며 좋은 열매를 거둘 수 있는 지혜와 믿음을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나쁜사람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2.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3. 비록 많은 잘못을 저지른 나이지만 주님께서는 용서와 관용으로 나의 회개를 기다려 주고 계십니다. 그러나 나는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을 위해 인내와 용서로 기다리고 있습니까?

 

그냥 내버려 두어라

-임상만신부-

 

얼마 전 성모상 화단을 새로 정리하며 꽃잔디와 화초를 예쁘게 심었다. 한 달 남짓 지나자 심지도 않은 잡초들이 화초보다 훨씬 많고 싱싱하게 자라고 있기에 날을 잡아 잡초 제거를 한 적이 있다. 특히 요즘처럼 비가 자주 오는 여름에는 잡초를 잠시만 내버려두어도 화단을 뒤덮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잡초는 눈에 보이는 대로 뽑아내는 게 부지런한 일꾼의 올바른 태도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우려하는 주인의 염려도 이해 못 할 것은 없지만, 그래도 농사를 잘 지으려면 어린 곡식이 일부 손상되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잡초를 제거해야 한다. 이렇게 농사의 효율성만 본다면 잡초를 놔두는 주인이 틀렸고 죄다 뽑아내는 일꾼들이 옳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밀과 가라지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 밀은 자라서 사람의 양식으로 이용되지만 가라지는 단지 사람들의 양식이 되지 못하는 것 뿐이기에 가라지가 악한 것이라기보다는 다만 곡식으로서는 쓸모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 잡초가 하나같이 인간에게 쓸모가 있는지 없는지는 고정 불변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어제까지 쓸모없다고 버렸던 잡초의 효능이 밝혀져서 약초로서 귀한 대접을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마태 21,42)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선과 악으로 나누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다름의 차원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때때로 우리가 악으로 규정하여 이를 근절하려던 시도 자체가 사실상 더 큰 악이 되었던 일이 많다. 악한 인종 청소를 위한 홀로코스트의 가스실이 그랬고, 어떤 시대이건 있었던 마녀사냥이 그랬다. 가깝게는 삼청교육대 같은 ‘인간 개조 교육’의 경우 등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가라지는 악으로 규정하여 제거의 대상으로만 보거나, 가라지를 개량해서 밀로 만들고자 해서는 안 된다. 밀과가라지는 서로 다른 나름의 존재성을 가지고 함께 공존해야 하는것이기에, 예수님께서“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13,30)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사실 선과 악의 구별은 오직 하느님께만 유보되어 있고 그분께서 추수 때에 결정하실 일이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보여지는 부분만이 아니라 그의 내면을 보심으로써 악인으로 단죄받은 세관장 자캐오에게서 관대함을 끄집어내셨고, 막달라 마리아의 부정한 삶 속에서도 신앙의 큰 사랑을 드러내셨음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라는 예수님의 관점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회복할 때 비로소 우리 사회는 평화를 얻을 수 있다. 바오로 사도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로마 7,13)라는 말씀처럼, 우리 속에도 선뿐만 아니라 악도 있다는 것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며 사는 것 이외에 내세울 것은 별로 없을 것이다. 사실 예수님께서도 당신 자신을 선하다고 하지 않으셨는데(루카 18,19) 하물며 우리가 어떤 선의 잣대로 대상을 악으로 규정하여 단죄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마태 5,45)

 

그래서 더, 알렐루야

-장재봉신부-

 

답답한 요즘입니다. 코로나에게 짓눌린 세상의 아픔은 끝이 아득하여 막막하기만 합니다. 예레미야 예언자가 읊었던 마음 쓰린 눈물의 애가가 모두 우리의 사연인 듯 마음에 고여 듭니다.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만 같아 겁납니다. “당신께서 듣지 않으시는데”라며 하바쿡 예언자처럼 항의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습니다. 이 깊고 질긴 시련을 허락하시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여쭙고 또 여쭙게 됩니다. 그럼에도 저는 지금 이런 얘기마저 입에 발린 위로에 그칠지 모른다는 조바심을 떨치지 못합니다. 어떤 격려도 힘을 드리기엔 미흡할 것만 같아, 조심스럽기만 합니다, 

그런데 오늘 들려주시는 주님의 말씀이 너무너무너무 위로가 되는군요. 그 무엇도 보탤 것 없이 말씀 그대로, 덜어내지도 손대지도 말고 온전히 전해드리고 싶어서 소리 내어 읽고 읽고 또 읽었습니다. 이야말로 아픈 세상을 향해서 들려주시는 주님의 고백이니 말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의 고통을 몰라라하지 않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며 끊임없이 치유의 손길로 세상을 어루만지고 계시다는 증거이니 말입니다.

때문에 힘 빠진 세상을 위해서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신다는 주님의 고백에 우리 모두가 힘을 얻을 수 있기를 청합니다. 우리 모두가 세상을 위해서 간구하시는 성령님의 심정을 헤아려 주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시련을 이겨내기 원합니다.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열매가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인내와 호의와 선의와 성실과 온유와 절제임을 기억하여 결단코 기가 꺾이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놓여 있는 역경을 하느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헌신과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너끈히 이겨내는 지혜를 얻기를 소원합니다. 지금이야말로 교회에서 배우고 익히고 체험했던 성령의 선물을 세상을 위해서 제대로 활용해야 할 기회이니까요. 

성령은 우리를 위해서 쏟아 주시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가라지 같은 우리를 튼실한 알곡으로 변화시켜주는 하느님의 능력입니다. 마침내 당신의 복음을 살아내도록 이끌어주는 주님의 손길입니다. 덕분에 우리는 이 땅의 갖은 어려움 속에서도 하늘의 기쁨을 살 수 있습니다. 아니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꼭 그렇게 살아야합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주신 선물을 간직한 그리스도인이기에 그렇습니다. 세상의 절박한 소식이 난무하는 중에도 마음이 짓눌리지 않고 그래서 더욱, 사랑과 인내를 살아내야 하는 믿음인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사랑과 인내와 희망이 성령께서 선물해주신 은사라는 점을 새로이 새겨 살 것을 권고 드립니다. 더하여 성령께서 선물해주신 인내는 오직 사랑에서 시작되어 사랑으로 귀결되는 사랑의 결실임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그저 단순하게 오래 오래 참아내는 것, 그저 이를 악물고 견뎌내는 것은 사랑이 아님을 깊이 새기기 원합니다. 사랑이 없다면 제아무리 끈질긴 인내도 희망도 다 부질없는 허세일 뿐입니다. 사랑으로 견디어내는 삶은 거룩한 어느 장소, 특별한 어느 시간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일상에서 하느님을 기억하는 향기로운 기도입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계시며 도움주시는 하느님께 의탁함으로 완전한 찬미의 삶으로 돋움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하느님과 관계를 맺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인내하고 견디는 일마저도 사랑에서 비롯되어 사랑으로 이어져야 옳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모든 군중에게 직접 속뜻을 풀이해주신 경우는 오늘 복음말씀이 유일합니다. 그만큼 소중한 까닭이라 짚어져서 마음을 여미게 되는데요. 물론 이 말씀은 누구에게나 친근한 이야기일 터입니다. 덕분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계실 것입니다. 
 

도멘시오 페티의 ‘가라지의 비유’.(1622년)

문제는 너도 나도 자신은 알곡인 줄로 착각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점이겠지요. 사실은 속은 텅 비어있는 쭉정이 임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를 알곡이라 여기며 자신의 삶을 과대평가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겁니다. 

그런 분들의 특징은 세상은 원래 다 그렇고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라는 말을 예사로 하는 것에서 드러나는데요. 남들도 다 그렇게 살아가지 않느냐고 변명하는 일에도 익숙하지요. 한편 무슨 수로 주님의 말씀을 모조리 지키면서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 수가 있느냐며 말씀을 변형시키는 일마저 서슴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이러한 허세를 지녔다면 이야말로 사탄이 들려주는 사탄의 복음에 오염된 증거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는 자만, 나아가 이만큼 기도했으니 이제는 하느님이 감동하시어 응답해주실 차례라고 여기는 오만이야말로 조잡하고 너절한 ‘인간의 복음’에 불과하니까요. 

주님께서는 오늘도 속빈 이삭이 되어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팔랑거리고 있는 우리 모습에 애간장이 타십니다. 멀대 같이 키만 웃자라서 건들건들 으스대는 우리의 꼴에 진저리를 치십니다. 때문에 오늘도 지금 이 순간에도 아버지 하느님께 꿇어 엎드려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시며 피땀을 흘리고 계십니다. 

쓸모없는 가라지 같은 나를 알곡으로 변화시키기 원하시는 주님의 호소를 흘려듣지 마십시오. 하느님 자비에는 유예 기간이 있다는 사실에 깨어나 삶을 정리 정돈하도록 합시다. 

오늘 우리의 자잘한 시간들은 그날 “해처럼 빛날” 존재가 될지 “불구덩이에 던져”지는 신세가 될지를 결정하는 자료가 됩니다. 지금 우리가 지나치는 모든 찰나와 순간은 그만큼 소중하고 귀합니다. 그분의 은혜를 기억하고 그분의 사랑을 잊지 않으므로 어제보다 한 뼘 더 주님께로 가까워지면 좋겠습니다. 나보다 더 내 삶을 사랑하시는 주님께 온 것을 봉헌함으로 하느님의 용사가 되면 더 좋겠습니다. 길고 길어서 더 힘들고 훨씬 막막한 시간마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좋고 유익한 것’임을 기억하여 ‘아멘’으로 화답해드린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힘들고 어려워서 더욱, 갑갑하고 막막해서 더 더욱, ‘알렐루야’로 하느님께 찬미 드리며 난관을 극복해나가는 용덕이 선물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낯선 풍경 속에 피어나는 동지애

-정다운-

 

미사를 드릴 때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다 함께 ‘대 영광송’을 부를 때입니다. 대영광송은 아시다시피 주일이나 대축일 미사의 본기도 바로 앞에 노래나 낭송의 형식으로 함께 바치는 찬미가인 데요. 사제와 성가대를 비롯한 교우들이 주고받는 파트가 있어서, 미사에 참여한 모든 이들이 마치 노래로 대화를 하 는 것 같기도 합니다. 나를 만드시고, 구원하시고, 이끄셨 던 하느님의 영광과 승리를 노래하고, 여러 가지 기도가 모 여 하나의 찬미를 이루기 때문에 전례 중 가장 활기찬 성가 가 대영광송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늘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 그래서인지 이 거룩하고도 영광된 대영광송의 첫 소절 을 선창하시는 신부님들의 모습도 각양각색입니다. 중후한 음색으로 좌중을 압도하는 스타일, 음 이탈이 날까 봐 조심 스럽게 시작하는 스타일, 공기 반 소리 반의 안정감 있는 스타일 등 다양합니다. 신부님의 선창을 받아 그 뒤를 잇는 2층 성가대의 아름다운 하모니도 본당별로 개성이 다 달라 이걸 찾아 듣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대영광송을 부를 때 남모르게 ‘화음 쌓 기’를 시도하는 것이 미사의 즐거움 중 하나입니다. 아무도 모르는 ‘1층의 고독한 성가단원’이지만 3도 화음을 높게도 쌓아봤다가 낮게도 쌓아봤다가 다양한 실험을 해봅니다. 어떤 날은 만족스러운 화음을 내기도 하고 어떤 날은 혼자 만 튀는 불협화음을 내고는 스스로 깜짝 놀라기도 합니다. 이 와중에 한 가지 순기능을 꼽는다면(순전히 저만의 착각일 수도 있습니다만) 앞뒤 좌우 ‘평화의 인사 zone’에 계시는 신자분들 께서 신기한 화음 자매 1명의 효과로 한껏 더 큰 목소리로 성가를 함께 부르신다는 겁니다. 마치 ‘너는 혼자가 아니 다. 우리 함께 힘차게 성가를 불러보자꾸나’라고 결의를 다 지는 동지들처럼 말이죠. 하지만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당연히 여겨지던 일상이 무너지고, 성당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두 달 만에 재개된 미사에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성가를 부르는 시간 이 사라져버렸습니다. 2미터의 거리 두기와 마스크 착용이 점점 익숙해지면서 낯설었던 주일의 성당 풍경이 점점 익 숙해지고 있는 요즘,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봅니다. 성가가 낭송으로 대체된 미사는 예전보다는 단출해졌지만 엄숙해 졌고, 신자들의 수는 눈에 띄게 줄었지만, 신부님이나 수녀 님들, 그리고 본당 교우분들은 정말 반갑게 맞아주십니다. 마스크에 가려 얼굴도 잘 안 보이지만 따뜻한 눈인사 속에 서로의 진심이 느껴집니다. 신기한 화음 자매와 함께 힘차 게 성가를 불러주었던 저의 앞뒤 좌우 자리 ‘평화의 인사 zone’ 교우들에게서 느끼던 동지애를 바뀐 성당 풍경 속에 서도 찾아봅니다. 어떤 노래 가사처럼 우리네 삶도 3도 화음처럼 차곡차 곡 쌓여가는 이야기의 연속! 지금의 시기를 ‘결핍’으로 인한 아쉬움으로 탓하기보다 새로운 시선으로 배워가는 자세로 생각한다면 한결 여유로워지지 않을까요?

 

순교 농민

-권오준신부-

 

전례력으로 순교자 성월도 아닌 때에 순교를 떠올리게 하는 농민 주일이다. 종교가 자유롭게 허락되 지 않던 시절에 배교를 강요당하고 믿음을 버리라 할 때, 죽음을 택하여 오히려 하느님 나라에 영 광스럽게 들어갈 기회를 얻었다며 기뻐하신 분들이 바로 이 땅의 신앙의 선조들이다. 사지가 찢겨나가거나, 망나니에게 목이 잘리는 능지처참, 군문효수를 당하던 분들이 기쁜 마음으로 죽음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쉽게 이해하기는 힘든 일이지만, 나는 그런 순교자들을 지금도 내 주변에서 자주 만나며 살고 있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박해 상황과 다름없는 생계의 위기와 극한 어려움을 안고 도 자기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 바로 땅을 일구며 사는 농부들이다. 지금은 종교적인 이유로 박해를 받을 일도, 그래서 순교할 일은 더더욱 없다. 그러나 꼭 종교적인 신 념이 아니라도 땅이 아파하는 모습을 직접 만지고 느끼며 그 땅과 함께 살아가는 이 땅의 농부들이야말 로 순교자라 할 수 있는데, 그들이 처한 상황이 실제 박해의 상황과 크게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국가로부터 도외시 당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때깔 좋고 균일한 크기의 시스템적인 생산물만을 좋은 것으로 곡해하는 이 시대 대다수 소비자의 생각 자체가 한 땀 한 땀 바느질하듯이 땅을 일구며 사는 농 부들에게는 박해의 상황과 다를 바가 없다. 이해해 주는 사람 없고, 눈앞에 떨어지는 결실도 그다지 대 단하지 않은 것을 꾸준히 끌고 가는 사람들, 자신들이 지켜온 땅과 신념을 하루에도 수백 번 포기할 생 각이 들게끔 하는 이 사회가 박해의 상황과 뭐가 다를 것인가. 땅이 척박해서라기보다 농사지을 환경이 척박한 박해시대의 순교자들이다. 그런데, 내가 만나는 농부들에게서 느끼는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순교를 하느 님의 영광으로 받아들였듯이 우리 농민들 또한 그것을 사명으로 받아들이며, 무엇보다 만나는 그들의 얼굴에는 그늘이 없다는 것이다. 어마어마하게 빛나는 영광은 아닐지라도, 기쁘게 살아가는 그들의 얼 굴에 가득한 밝은 빛이야말로 이 시대의 순교자들이 갖는 영광을 충분히 보여주고도 남으며, 늘 눈에 보이는 생산적인 결과만을 쫓아 사는 우리에게 많은 메시지를 던져준다. 혹 그럴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누군가 일부러 순교를 경험하고 싶다면 이미 박해를 넘어 순교의 삶을 사는 농민들의 삶에 동참해봄이 가장 좋을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아주 소수이기는 하지만, ‘우리 농’ 의 물품을 아낌없이 애용하는 소비자와 활동가들은 이미 거기에 뛰어들었다고 생각한다. 어떤 삶이 든 힘들지 않은 것은 없겠지만, 이 시대의 박해 속에서, 신념을 포기하게 만드는 유혹 속에서, 자신의 신념을 굳건히 지키며 매일 승리하는 농민들에게 찬사를 보내며 그들과 함께하려는 소비자와 활동가들 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하느님! 이 시대의 순교자들이 드리는 영광을 마음껏 받으소서!

 

좋은 씨를 뿌리는 아들

-김호균신부-

 

 저는 ‘도시락’이라는 말보다 ‘벤또’라는 말이 익숙 한 세대입니다. 아마 저보다 더 윗세대 분들에게는 그 말속에 담겨 있는 의미는 더욱 남다를 것입니다. 학교에 ‘싸 가지고 갈 밥이 있다.’라는 것은 어른 세 대에서는 사치인 분도 있었습니다. 점심시간만 되면 자존심 때문에 교실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와 수돗가 물을 들이켜고는 ‘꼬르륵’ 소리에 얼굴 붉어지던 때 가 ‘벤또’의 뚜껑 안에 들어있는 어르신들의 이야기 입니다. 선생님들로부터 ‘벤또’라는 말을 ‘도시락’이라는 말 로 교정 받을 즈음 싸 가지고 갈 것은 ‘들고 갈 것인 가, 말 것인가?’를 갈등하는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딱 그즈음에 살았던 저의 기억이 도시락 보자기 바 깥으로 펼쳐집니다. 집에서야 어떻게 먹든 친구들 에게 보이기 싫었던 보리밥 비율이 그 갈등의 원인 이었습니다. 한 줌의 쌀과 아홉 줌의 보리쌀이 섞인 밥은 그렇게 먹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현실이었습니 다. 쌀은 돈으로 바뀌어야 되고, 그 돈은 학비와 생 활비로 넘어가는 부모님들의 살림이었습니다. 저에 게는 친구들에게 도시락으로 드러날 가난에 대한 부끄러움이 더 컸습니다. 가족들의 눈을 피해 쌀밥 을 두세 숟가락 욱여넣었던 기억 또한 고스란히 남 아있습니다. 우리도 모르게 어느 때부터 ‘더 맛있는 것, 더 좋 은 것, 더 많은 것’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정치적 상 황과 무관하게 먹고 살 만해졌습니다. 그것을 당연 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되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된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겪었음에 도 불구하고 배고픔은 마치 조선시대 이야기처럼 언 제 그랬냐는 듯이 아련하기만 합니다. 더군다나 배 고픔을 겪어 보지 못한 세대에게는 그 고통의 의미 는 더욱 받아들이기 힘들 것입니다. 올해 들어 재미있는 뉴스들이 있었습니다. 사막의 나라 아랍에미리트에 한국 농촌진흥청에서 벼농사 기술을 제공해주고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 뉴스 의 깊은 의미는 ‘농업기술의 선진성’을 홍보하는 것 이 아닙니다. 어떤 국가는 몇 배의 돈을 주고 비행 기에 싣고 있던 마스크를 가로채갔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몇 배의 돈을 지불해야 되고, 위기 상황에서는 윤리고 동맹 이고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먹고 사는 문제는 누가 해결해 주지 않습니다. 사 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내 배가 고픈데 내가 먹을 것을 남에게 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 배가 불러야 남에게 주고, 내가 먹고 남아야 양보합니다. 지금 우 리는 인구가 폭증하고 환경이 격변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 말은 오늘은 배부르지만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농민 주일입니다. “농촌 생활의 문화가 공업이나 서비스 부문의 소득 으로 살아가는 도시인의 생활수준에 결코 뒤떨어지 지 않도록 배려하여야 한다.”(「어머니요 스승」, 125항)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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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바위나 절벽을 만나면 멋진 폭포가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폭포를 보면서 밝은 표정을 짓습니다. 그런데 이 물이 냄새나는 하수구를 만나면 어떨까요? 사람들은 인상을 쓰면서 이 물을 피하려 할 것입니다. 이렇게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어느 병에 물을 담으면 물병이라 말하고, 이 병에 꽃이 담기면 꽃병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병에 쓰레기가 담기면 어떻게 말할까요? 쓰레기통이 됩니다.

‘어디에 있느냐?’ 그리고 ‘무엇을 담느냐?’가 매우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따라 자기 존재를 온전하게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자신은 어디에 있나요? 그리고 우리 마음에 무엇을 담고 있습니까? 그래서 자신의 존재를 온전하게 드러내고 있을까요?

죄를 피해야 하며, 우리 마음 안에는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을 담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 존재 가치가 올라가면서 이 세상 안에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가라지의 비유 말씀을 해주십니다.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좋은 것이 영혼에 뿌려진 이들은 하느님 나라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악마는 이런 상태를 원하지 않습니다. 좋은 것 안에 머무르고, 좋은 것만을 담을 수 있도록 가만히 두지 않지요. 그래서 태만으로 말미암아 무기력증에 빠진 듯 불신앙에 정복당하는 이들 가운데에 가라지를 뿌립니다. 좋은 것에 머무르지 못하도록 그래서 하늘나라에서 멀어지도록 계속해서 방해합니다. 그렇다면 이 방해 공작에 그냥 넘어가야 할까요?

집주인은 종들에게 지금은 가라지를 거두어 내지 말고 그대로 두라고 이릅니다. 가라지를 거두어 내는 일은 마지막 날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느님도 이렇게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의 힘으로 악마를 이겨내고, 당신을 마음 안에 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할 수 있어야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하느님께서는 심판 날까지 기다리신다는 점을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사실 우리는 판단하는데 참으로 재빠릅니다. 남에 대해 확실하지도 않으면서 얼마나 쉽게 판단하고 단죄합니까? 그러나 하느님의 이 모습은 재빠른 판단보다는 참고 기다릴 수 있는 인내가 필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확실치 않은 것은 심판 날에 하느님께서 판단하시도록 두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자신의 마음에 담고 있는지를 또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 안에 머물고 있는지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내 인생에서 내가 제일 먼저 배웠어야 하는 것은 ‘나’의 올바른 사용법이었지만, 지금까지 그걸 가르쳐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걸 모르니 인생은 예측불허, 좌충우돌의 연속이었다(김연수).



나와 연애하듯 살기


어느 책을 보니, ‘나와 연애하듯 살기’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이 글을 읽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누군가와 연애할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을 알아내고 그것을 함께 하지 않습니까? 또 상대방에게 부정적인 말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다름 아닌 나라고 생각해보십시오. 즉, 나와 연애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내가 좋아하는 것을 기쁘게 하고 있는가를 물어 볼 수 있습니다. 둘째,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나 자신에게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와 최고의 연애를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연애할 때, ‘행복하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어렵고 힘든 순간에도 연애할 때를 떠올리면서 ‘행복했다.’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나에 대한 행복의 기억을 만들어야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나와의 연애는 어떠하십니까? 이 연애가 시원찮으면 그만큼 힘든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고통을 성장통으로 만들 수 있다면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의 밀과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는 하늘 나라에 관한 설명입니다. 하늘 나라에 관한 비유는 또한 심판의 비유이기도 합니다. 내가 가라지인지 밀인지 빨리 구분해서 가라지 같으면 밀로 돌아오라는 경고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밀인지 가라지인지 구별할 수 있을까요?

      제2차대전 때, 헤럴드 레셀이라고 하는 청년이 공수부대원으로 전투에 참여했다가 폭탄에 맞아서 두 팔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불구가 된 그는 참으로 낙심하고 좌절하면서 하느님 앞에 기도합니다.

“하느님, 나는 쓸모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쓸모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원망의 기도를 하는 그의 귀에 분명히 들려주셨습니다.

“그래도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많지 않으냐?”

      레셀이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자기에게는 아직 생명이 있고, 두 눈이 있고, 두 귀가 있고, 두 발이 있습니다. 정말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아직도 많습니다. 생각을 바꾼 그는 의사에게 부탁해서 의수를 만들었습니다. 또 열심히 타이프치는 것을 연습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지내온 생활을 잘 정리하여 책으로 엮었습니다. 이것이 일약 베스트셀러가 되고, 영화화되었습니다. 더욱이 그 영화에서는 자기가 직접 조연으로 출연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영화가 ‘우리 생애 최고의 해’(The Best Years of Our Lives)이고 그는 1946년도 아카데미상 최우수 조연상을 받았습니다.

 

      어느 기자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신체적 조건으로 인하여 절망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결연히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나의 육체적인 장애는 도리어 가장 큰 축복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잃어버린 것을 계산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 얻은 것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며 그것을 사용할 때에 하느님께서는 잃은 것의 열매를 크게 보상해주십니다. 더 많은 가능성이 그 앞에 열리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밀과 가라지인지 구별할 수 있느냐면 나에게 닥치는 모든 고통에 대한 나의 자세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러셀은 가라지가 아닌 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성경 본문을 조금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는 이해가 조금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구조를 보면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이해할 수 있도록 중간에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가 끼어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 – 겨자씨의 비유 – 누룩의 비유 – 밀과 가라지의 비유 설명’의 순서로 구조가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샌드위치 구조에서는 그 중간에 끼인 것이 바깥에 감싼 것을 설명해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시 말해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의 보충설명인 것입니다.

      겨자씨는 처음엔 작고 볼품없지만, 밭에 심어지면 큰 나무가 되어 새들이 깃들어 쉬게 합니다. 이는 ‘포용력’을 상징합니다. 아담은 죄를 짓고 포용력을 잃어 하와를 배척합니다. 카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면 하느님은 가라지까지 끝까지 당신 밭에 두십니다. 예수님도 유다를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늘 나라는 이 포용력을 배운 이들의 것입니다. 나무가 새를 가리지 않듯, 하늘 나라 백성은 좋고 나쁜 사람을 가리지 않고 양식을 내어줍니다. 에제키엘서를 알았던 유다인들은 그 말씀의 뜻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손수 높은 향백나무의 꼭대기 순을 따서 심으리라. 가장 높은 가지들에서 연한 것을 하나 꺾어 내가 손수 높고 우뚝한 산 위에 심으리라. 이스라엘의 드높은 산 위에 그것을 심어 놓으면 햇가지가 나고 열매를 맺으며 훌륭한 향백나무가 되리라. 온갖 새들이 그 아래 깃들이고 온갖 날짐승이 그 가지 그늘에 깃들이리라.”(에제 17,22-23)

 

      누룩의 비유는 무엇일까요? 누룩은 밀가루 서 말에 들어가 그 밀가루를 온통 부풀어 오르게 합니다. 누군가를 포용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삼구’(三仇)입니다. 뱀은 사람 안에서 세속-육신-마귀를 크게 만들어 돈 때문에, 욕망 때문에, 교만 때문에 이웃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합니다. 밀이 밭에서 영양분을 먹으며 포용력을 키우기 위해 하는 일은 바로 삼구를 죽여 복음삼덕을 자라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으시고 광야에 나아가 하신 일이 그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모두를 당신 품에 안으셨습니다. 그러니 누룩은 우리 삼구를 죽이는 성령을 상징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밀은 자신에게 닥쳐오는 모든 고난을 자신을 죽이는 도구로 삼습니다. 그래서 겸손해지고 더욱 큰 포용력을 가지게 됩니다. 모든 고통을 사랑의 성장을 위한 성장통으로 삼는 것입니다.

      영화 ‘양철북’(1979)에는 이미 3살 때 누구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하는 오스카라는 아이가 나옵니다. 그는 이웃을 심판하기 위한 양철북을 들면서 성장하기를 거부합니다. 이때가 가라지일 때입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엄마도 죽고 아빠도 죽고 삼촌도 자신 때문에 죽습니다. 그리고는 양철북을 집어 던집니다. 자신도 죄인임을 알았기에 이제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이때부터 자신 안에 누군가를 쉬게 할 수 있는 밀로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밀과 가라지는 성장에 달려있습니다. 포용력의 성장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이웃에게 더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거부한다면 가라지입니다. 끝까지 고집부린 그 사람의 미래는 참담할 것입니다.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한번은 훌륭한 조각 예술품을 만들기 위해 커다란 대리석 덩어리를 망치와 정으로 쪼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다가와서 “그 좋은 대리석을 이처럼 많이 깨어버리면 낭비가 아닙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미켈란젤로는 “이 대리석이 깨어져 나갈 때야 비로소 조각은 살아나게 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픔 없이 성장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이 성장통입니다.

 

      칼 융은 “모든 정신질환은 정당한 고통을 회피한 대가다.”라고 말했습니다. 정당한 고통이란 포용력을 증가시키기 위해 세속과 육신과 교만에 대한 욕구가 깎여져야 하는 고통입니다. 성장통을 즐겨 받을 줄 알아야 가라지가 아닌 밀이 됩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예수님께 유일하게 ‘고통과 멸시’를 청했습니다. 겸손해지기 위해서입니다. 밀은 모든 고통을 성장통으로 만듭니다. 그렇게 멈추는 일 없이 성장합니다. 밀과 가라지는 고통에 대해 내가 선택한 태도에 의해 결정됩니다.

 

-조재형신부-

 

트럼프 대통령의 연설을 들었습니다주된 내용은 미국의 영광미국 우선미국의 승리였습니다일자리를 찾아오고기업을 돌아오게 하고미국의 자부심을 되찾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피부색에 관계없이 모든 미국인은 위대한 국기 앞에 애국심으로 모이자고 하였습니다트럼프 대통령의 연설은 그의 재임기간 동안 정책으로 실현되었습니다중국과는 엄청난 관세를 부과하면서 무역 전쟁을 시작하였습니다한국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방위비 분담금을 요구하였습니다아직 협상중이지만 한국에는 큰 부담이 되고 있습니다독일에서는 미군을 철수한다고 합니다독일과 사전에 논의 하지 않고 철수 한다고 하니독일도 난감한 입장이라고 합니다멕시코에는 장벽을 세운다고 합니다비용을 멕시코 정부에 요청한다고 하니멕시코에서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합니다미국의 영광미국의 승리미국의 자부심도 좋지만 주변국과 더불어 살아가야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습니다최강의 경제력과 군사력으로 미국 우선을 이끌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습니다.

 

2020년의 절반은 코로나19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코로나19는 미국의 영광미국 우선미국의 승리미국의 자부심만으로는 막아낼 수 없었습니다미국이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있습니다유발 하라리는 코로나19 이후의 세상을 두 가지로 예측하고 있습니다하나는 정부의 통제와 감시가 강화되는 사회입니다모든 국가는 자국의 안전과 이익을 위해서 담을 쌓는 사회입니다여행은 줄어들고무역은 통제되고지구촌의 경제는 위축되는 사회입니다모두가 각자도생(各自圖生)을 추구하지만 또다시 찾아오는 감염병을 막기는 어려울 거라고 합니다바이러스는 문을 닫기 전에 이미 들어오기 때문입니다다른 하나는 협력과 연대로 치료약을 개발하고백신을 만드는 것입니다서로의 문을 열면서 검사하고격리하고치료하는 것입니다서로를 신뢰하면서 여행도하고무역도 함께하는 것입니다바이러스는 문을 굳이 닫지 않아도 격리와 치료를 통해서 사라질 것입니다상부상조(相扶相助)하기에 또다시 찾아오는 감염병을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합니다대한민국은 코로나19를 극복하는 모델이 되었다고 합니다.

 

제 얼굴에 점이 있습니다그냥 보면 잘 보이지 않습니다안경테에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방송에 나오는 얼굴도 아니고생활하는데 불편이 없기에 친구처럼 지내고 있습니다우리의 몸은 세포로 이루어져있습니다우리가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우리의 몸에는 함께 사는 이웃들이 세포만큼이 많다고 합니다어떤 것은 우리의 건강에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어떤 것은 피해를 주기도 합니다어떤 것은 도움도피해도 주지 않는다고 합니다나의 몸에 들어온 이웃들을 쫓아내기보다는 적당한 운동과 긍정적인 생각으로 내 몸의 면역력을 키워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약물을 이용해서 무리하게 쫓아내려하면 부작용이 생기기도 하고몸의 면역력이 약해질 수도 있다고 합니다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습니다지구는 태양에서 나오는 빛을 받아서 아름답고 푸른 별이 되었습니다태양이 지구로부터 받는 것은 없지만 지구는 태양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고 있습니다우주는 이렇게 쫓아내거나거부하지 않으면서 서로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어쩌면 우리 인간도 지구라는 커다란 몸에 잠시 머물고 있는 건지 모릅니다지구는 강한 면역력으로 인간이 주는 피해를 온전히 감수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몇 가지 말씀을 해 주십니다하느님 나라는 지금 여기에서 시작된다고 하십니다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그러기에 하느님 나라는 가능성의 나라입니다최고의 능력을 가진 사람들만이 가는 나라는 아닙니다지금 부족한 사람도지금 잘못한 사람도 함께 할 수 있는 나라라고 말을 합니다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가능성을 두 가지 비유를 통해서 말씀해 주십니다하나는 누룩의 비유입니다누룩은 아주 작은 양이지만 빵을 커다랗게 만들어 줍니다하느님 나라는 그 시작은 비록 작을지라도 끝은 아주 풍요로울 것이라 말씀하십니다다른 하나는 겨자씨의 비유입니다작은 겨자씨는 자라면 새들이 깃들고사람들이 쉴 수 있는 큰 나무가 된다고 하십니다하느님 나라도 그럴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모든 생명은 아주 작은 씨앗에서 출발합니다커다란 코끼리도 그 시작은 눈에 보이지 않는 크기의 정자와 난자의 만남입니다우리 모두는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사는 것입니다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도움이 함께하면 가능성은 현실이 되고꿈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암에 걸렸지만 완쾌된 사람들은 대부분 한결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봅니다. ‘결코 암과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암을 없애려고 하지 않았다암을 미워하고 저주하기 보다는 오히려 내안에 들어온 손님으로 맞이하였다나의 삶이 암이 들어 올 수 있도록 원인을 제공한 면도 있기에 친구처럼 지내려고 하였다.’ 이런 마음가짐이 암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고 이야기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고통을 주고죽음에 이르게 하는 암과 친구가 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입니다그러나 암과 투쟁하고 싸우면 싸울수록 더 힘든 상황에 이르는 것도 보게 됩니다적과의 동침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걱정도 되고힘들게 만들어 놓은 공동체가 깨어질 수도 있습니다그러기에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성령께서는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성령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넘어진 동료를 일으켜 세우고 함께 갈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버림받은 이들잘못한 이들을 품어줄 수 있는 관대함이 있다면 우리는 이미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주님당신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신 하느님분노에는 더디시나 자애와 진실은 넘치시나이다저를 돌아보시어 자비를 베푸소서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조욱현신부-

복음마태13,24-43: 하느님 나라의 비유밀과 가라지겨자씨누룩

오늘 복음에는 가라지와 겨자씨 그리고 누룩의 비유로 나타나고 있다여기서는 가라지의 비유만 보기로 하자어떤 사람이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렸다그런데 원수가 악한 뜻으로 거기에 가라지를 뿌린다그런데 가라지는 꽃이 필 때야 그 모습이 드러난다그것을 보고 종들이 주인에게 알리며,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28)라고 한다그러나 주인은 추수 때까지 버려두었다가 가라지와 밀을 가리도록 하고 있다(29-30).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하여 악은 바로 잡을 수 있고 회복될 수 있고 극복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선으로 바꾸어질 수 있다고 가르치시는 것이다예수께서 메시아이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그러나 메시아 시대는 요한복음이 말하듯이 심판의 시대가 아니라 구원의 시대이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그러기에 확실히 모든 사람에게는 구원의 가능성이 부여되어 있다이런 의미에서 가라지가 밀과 같이 함께 성장하고 있는 것은 악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오히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의 표지라는 것이다.

 

이 비유는 낙관주의로 가득 차 있다우선 악은 죄의 의미보다 그것이 극복되기 위해 하느님의 현존이 필요하다는 것이다구세주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존재임을 드러내신다그리고 그 악은 실제로 마지막 추수 때’(30극복될 것이다(41-42절 참조). 그런데 우리는 많은 경우에 그 승리를 즉시 보고 싶은 마음에 그 가라지에 대해 참지 못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이러한 자세는 열심한 자세라기보다는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태도이다그것을 뽑아버리면잘라버리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선과 악은 마음이라는 같은’ 장소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우리가 잠시 졸고 있는 사이에 사탄이 우리 마음속에 억센 거라지를 뿌릴 수 있다이 가라지를 제거하는 노력과 수고는 우리의 자세에 달려 있다하느님 나라의 시작을 의미하는(교회 참조교회도 가라지에 의해 침해되어 황폐화할 수 있다.

 

이제 오늘 복음은 비유의 후반부에서 선과 악의 현실적인 공존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심판으로 강조점이 옮겨지고 있다(38-42). 그리고 마지막 구절인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43)도 종말론적 관점을 말한다.

 

이렇게 강조점이 심판에 두게 된 것은 공동체가 처음에 가졌던 열심을 다 잊어버리고교회 공동체 안에도 선악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알아보지 못하고또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이제는 교회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 구원의 기준이 되지는 못하며반드시 행위가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그래서 언젠가는 선과 악이 공평하게 드러나게 됨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제 사랑의 법에 불충실하면 모두가 단죄를 받을 것이며사랑의 법에 충실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입게 될 것이다하느님 앞에는 어떤 특권도 없다신앙에는 특권이 없다는 의미이다우리는 모두 심판이 닥치기 전에 스스로 반성하고 회개하여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비유이다.

 

1독서지혜 12,13.16-19: 죄를 지어도 주님은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

1독서에서도 하느님은 모든 것을 당신의 권능으로 하실 수 있지만사람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해 참으시는 자비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한다(18-19).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권능을 우리들의 회개를 위해 사용하시기 때문에 악을 너그러이 참아주시는 하느님을 또다시 대하게 된다이러한 당신의 행동을 그분의 백성‘(19)인 우리에게 모범으로 주신다회개한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바꾼 가라지에서 풍성한 결실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2독서로마 8,26-27: 성령의 하느님께 간구해 주심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시는”(26성령의 기도는 우리가 관대한 마음을 갖게 해주며세상의 악이 존재하는 의미를 깨닫게 해준다그 악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랑의 능력과 세상이 희망으로 차 있다는 것을 입증해 보이라는 표징이다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결국은 역사의 마지막 장에 가서는 보다 나은 세상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우리 자신의 약점과 잘못에도 불구하고 나의 것을 잘 보지 못하면서또 나 자신의 마음에 공존하고 있는 선악도 보지 못하면서 쉽게 다른 사람에게서 드러나는 약점을 판단하고 있다하느님 앞에 완전한 사람은 없다또 나도 그런 약점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임을 느끼고나 자신을 다시 한번 돌아보는 삶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 줄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하겠다.

 

 

 

우리의 신앙 안에서 볼 때가라지는 회개하여 언제든지 좋은 열매를 맺는 좋은 밀이 될 수 있는 존재들임을 생각하며나 자신을 위해 또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열심히 기도해 주어야 한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우리는 진정한 하느님의 강함이 무엇인지 배웁니다.

제1독서는 하느님의 전지전능을 여러 표현으로 풀어서 들려 줍니다.

"당신께서는 힘의 주인이시므로 너그럽게 심판하시고 저희를 아주 관대하게 통솔하십니다"(지혜 12,18).

모든 힘은 하느님에게서 나옵니다. 하느님께서 힘의 주인이고 원천이시지요. 인간 세상에서는 힘을 가진 자가 자기 부귀영화를 위해 그 힘을 약자에게 함부로 휘두르기 일쑤지만, 하느님은 당신의 힘을 더 사랑하고 낮추고 약해지는데 쓰십니다.

이것이 부족한 죄인인 우리가 하느님께 번번이 자비를 청하고 용서받을 수 있는 이유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힘을 사랑과 용서에 쓰는 분이시니까요.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에게도 "의인은 인자해야 한다"(지혜 12,19)고 요구하십니다. 인자하고 너그럽고 자상한 것은 약한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힘을 닮은 것입니다. 더 많이 포용하고 낮추고 용서할수록 사랑에 더 강한 사람입니다.

"성령께서는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로마 8,26).

그래서 우리는 나약함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감출 필요는 더더욱 없지요. 주님께서 이미 다 아시고 그에 맞는 도움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약함은 자신을 낮추어 다가오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길일지 모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늘 나라를 세 개의 비유로 가르치십니다. "가라지와 뒤섞여 자라는 밀", "겨자씨", "누룩"입니다. 저마다 특징이 조금씩 다르지만 미소함에서 성숙으로, 미완성에서 완성으로, 부족함에서 완전함으로 나아가는 표상을 공통으로 품고 있지요.

하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실재입니다. 우리는 이미 시작은 되었으나 아직은 충만함에 도달하지 않은 하늘 나라를 지나고 있는 순례자들이지요. 이 세상에는, 그리고 우리 안에는 주님께서 사랑과 기대를 듬뿍 담아 뿌리신 밀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지만, 악한 자가 몰래 뿌려놓은 음습하고 불결한 가라지도 더불어 집요하게 뿌리를 엮고 줄기를 밀어올리는 중입니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13,30).

우리 마음 같아서는 가라지를 죄다 싹 뽑아 일망타진하고 싶은데 주님이 만류하십니다. 그분은 행여 성급하고 서툰 손놀림에 밀 한 가닥이라도 다칠까 염려하시는 겁니다. 그분께 무성히 자라는 가라지 정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밀이 중요하실 뿐이지요. 가라지를 없애지 못해 안달하며 자꾸 신경을 빼앗기는 건 오히려 자기의 뻔한 약함과 죄악을 못 견디는 교만한 우리입니다.

"약해도 괜찮아,
부족해도 괜찮아,
죄인이어도 괜찮아"

온갖 강함의 주인이시며 전능하신 하느님의 마음에서 이 속삭임을 엿듣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완벽하길 바라지 않으십니다. 완전한 분은 그분 한 분으로 족하니까요. 또 주님은 우리에게 강함을 요구하시지도 않습니다. 온갖 강함의 주인이신 주님이 우리 때문에 선택하신 건은 오히려 약함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지금은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시간입니다. 내 안에서, 공동체 안에서, 세상에서 밀과 가라지의 공존을 참아주고 인내하며 동행하는 너그러움, 관대함, 인자함, 즉 강한 사랑이 필요한 때입니다. 그러니 언젠가 하늘 나라의 완성에 다다라 그분께서 손수 하실 때까지 이 나약함과 부족함, 불결함을 견디어 나가야겠지요.

그렇지만 벗님 자신에게서, 세상에서 너무 가라지만 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섞인 상태여도 지금 주님의 눈에 우리는 충분히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니까요. 미완의 과정 안에서 사랑을 발휘하며 살아가는 강하고도 약한 벗님을 축복하고 응원합니다.

 

용서할 의무는 주셨어도 단죄할 권한은 주니 않으신 주님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71851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7월 23일 연중 제16주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주인님, 밭에 뿌리신 것은 좋은 씨가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마태오 13,2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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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본문을 조금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는 이해가 조금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구조를 보면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이해할 수 있도록 중간에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가 끼어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 – 겨자씨의 비유 – 누룩의 비유 – 밀과 가라지의 비유 설명’의 순서로 구조가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샌드위치 구조에서는 그 중간에 끼인 것이 바깥에 감싼 것을 설명해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시 말해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의 보충설명인 것입니다.

      겨자씨는 처음엔 작고 볼품없지만, 밭에 심어지면 큰 나무가 되어 새들이 깃들어 쉬게 합니다. 이는 ‘포용력’을 상징합니다. 아담은 죄를 짓고 포용력을 잃어 하와를 배척합니다. 카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면 하느님은 가라지까지 끝까지 당신 밭에 두십니다. 예수님도 유다를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늘 나라는 이 포용력을 배운 이들의 것입니다. 나무가 새를 가리지 않듯, 하늘 나라 백성은 좋고 나쁜 사람을 가리지 않고 양식을 내어줍니다. 에제키엘서를 알았던 유다인들은 그 말씀의 뜻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밀과 가라지는 성장에 달려있습니다. 포용력의 성장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이웃에게 더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거부한다면 가라지입니다. 끝까지 고집부린 그 사람의 미래는 참담할 것입니다.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한번은 훌륭한 조각 예술품을 만들기 위해 커다란 대리석 덩어리를 망치와 정으로 쪼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다가와서 “그 좋은 대리석을 이처럼 많이 깨어버리면 낭비가 아닙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미켈란젤로는 “이 대리석이 깨어져 나갈 때야 비로소 조각은 살아나게 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픔 없이 성장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이 성장통입니다.

 

      칼 융은 “모든 정신질환은 정당한 고통을 회피한 대가다.”라고 말했습니다. 정당한 고통이란 포용력을 증가시키기 위해 세속과 육신과 교만에 대한 욕구가 깎여져야 하는 고통입니다. 성장통을 즐겨 받을 줄 알아야 가라지가 아닌 밀이 됩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예수님께 유일하게 ‘고통과 멸시’를 청했습니다. 겸손해지기 위해서입니다. 밀은 모든 고통을 성장통으로 만듭니다. 그렇게 멈추는 일 없이 성장합니다. 밀과 가라지는 고통에 대해 내가 선택한 태도에 의해 결정됩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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