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15일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2020년 7월 15일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마태오 11,25-27)
"I give praise to you, Father, Lord of heaven and earth,
for although you have hidden these things
from the wise and the learned
you have revealed them to the childlik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허규신부-
이런 말을 듣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 “모르는 것이 약이다.” 때로는 아는 것이 유익할 수 있고, 때로는 모르는 것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그 대상이나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자면 모르는 것보다는 아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감사의 기도입니다.
‘지혜’는 선한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지혜는 하느님의 신비를 알게 하고,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길을 걷게 하는 선물입니다. 지혜를 얻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고 그것이 삶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이들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슬기’ 역시 선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들은 ‘스스로 깨달았다고 자부하는’ 이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들 스스로 지혜롭고 모든 것을 깨달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철부지들’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스스로 자랑하거나 교만하지 않고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이들에게 당신의 뜻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하느님의 선하신 뜻은 그것에 목말라하고 그것을 찾고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이루어집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언젠가 어느 청년의 결혼식 주례를 맡은 적이 있습니다. 결혼식이 끝나고 아는 지인들이 제게 다가와서 말을 건넵니다.
“신부님, 오늘 주례사가 너무 감동적이었습니다.”
강론이나 강의에 대해 평소 부정적인 평가를 잘 받지 않는 저입니다. 긍정적인 평가를 많이 받았기 때문에, 주례사가 좋았다고 하는 말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면서 문득 ‘신랑 신부도 마음에 들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랑 신부에게 다가가 다시금 축하한다는 인사를 전하는데, 이번에도 신랑 신부가 거의 동시에 “신부님, 오늘 결혼식 주례사 너무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좋았다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지만, 어떤 내용이 좋았는지가 궁금해서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신랑이 잠깐 망설이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글쎄요……. 음……. 짧고 명쾌했습니다.”
주례사의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더 좋았던 이유는 짧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내용 때문에 좋아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저의 큰 착각이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착각에 빠집니다. 내 생각과 다른 이의 생각을 같게 여길 때도 있고, 내 생각과 판단에 세상의 모든 지혜가 담긴 것처럼 여겨서 나만 맞는 것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나와 다르면 죄인 취급하는 것 역시 우리의 잘못된 착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런 오류를 담고 있는 지금 우리의 모습은 인류의 역사 안에서 계속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반대했다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도 이 착각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습니다. 진짜 지혜가 아니라 단지 지혜처럼 보이는 것뿐인데도,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주님의 뜻을 따르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감사의 기도를 바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25)
스스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철부지 같은 제자들에게 하느님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겸손 안에서만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겸손의 덕을 갖추고 있을까요? 그래서 주님께서 바치시는 감사 기도의 주인공이 되고 있을까요?
주님께서도 당신 자신을 스스로 낮추심으로 인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이 모범을 따라, 우리도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겸손 안에서만 하느님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집니다.
인생은 거울과 같으니 비친 것을 밖으로 들여다 보는 것보다 먼저 자신의 내면을 살펴야 한다(윌리 페이머스 아모스).
빼야할 바람.
몇 년 전, 페루의 ‘이카’라는 곳을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곳인데, 이 지역을 찾은 이유는 지상 그림이라는 평가를 받는 ‘나스카’라는 유적을 보기 위한 것이었고, 또 하나는 여기에서 유명한 샌드 지프, 샌드 보드 체험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경비행기를 타고 하늘에서 바라보는 나스카는 정말로 신기했습니다. 그러나 더 재미있고 신났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샌드 지프’ 체험을 통해서였습니다. 사막을 질주하는 지프, 아무리 경사진 곳도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하면서 스릴 넘치는 체험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사실 이 지프를 타기 전에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글쎄 저희가 탈 지프 자동차 바퀴의 바람이 다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탈 지프 차량이 불량이라고 이야기하자, 다른 차를 보여주면서 모든 사막의 지프는 바람을 뺀다고 말씀해주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래에 파묻혀서 나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신나게 올라갔다 내려갔다 자유자재로 사막에 운전할 수 있는 비결은 바퀴의 바람을 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서 바람을 빼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특히 어렵고 힘든 순간에는 더욱더 바람을 빼야 합니다. 세상 것에 대한 욕심과 이기적인 마음 등등…. 빼야 할 바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똥파리는 꽃밭의 한 무더기 똥을 보며 꽃밭을 안다고 말한다
-전삼용신부-
가끔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떤 분들은 “나도 그 사람 알아요!”라고 합니다. 그런데 또 많은 경우에 그 사람의 좋은 점보다는 자신이 아는 단점을 쏟아냅니다. 그 사람의 단점만 말하며 그 사람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것도 아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완전히 모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꽃밭에 어떤 짐승의 똥이 있습니다. 그러나 꽃들이 너무 아름다워 그 똥은 잘 보이지도 않습니다. 여기를 지나가던 한 똥파리가 좋은 똥을 발견하고는 동료들에게 가서 말합니다.
“나 그 꽃밭 잘 알아. 좋은 똥을 발견했어!”
꽃밭에 있는 작은 똥 무더기가 그 꽃밭을 대표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 안에 있는 단점들을 몇 가지 안다고 해서 그 사람 전체를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번엔 꿀벌이 날아가다가 그 꽃밭을 봅니다. 그리고 동료들에게 가서 말합니다.
“나 그 꽃밭 잘 알아. 좋은 꿀을 발견했어!”
물론 그 꽃밭 안에 있는 작은 똥 무더기는 알지 못합니다.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곳의 본질이 ‘꽃밭’이기에 똥파리보다는 꿀벌이 그 꽃밭을 잘 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연꽃은 더러운 습지에 아름다운 꽃을 피웁니다. 우리는 그 습지를 보지 않고 그 꽃의 아름다움에 빠집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가서 연꽃을 보았다고 말하지 시궁창을 보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둠을 보는 존재가 아니라 빛을 발견하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보시지 않고 우리 선한 면을 보시며 키워주십니다. 우리는 똥파리가 아니라 꿀벌입니다. 그러나 죄가 우리를 똥파리로 만듭니다.
아담은 하느님을 보면서도 하와를 왜 만들어줘서 죄를 짓게 만드느냐고 한탄합니다. 완전한 선이시고 아름다움이시고 진리 자체이신 분에게서 더러운 것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느님을 안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어떻게 빛 가운데서 어둠을 찾아내고 하느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자신을 가장 많이 사랑하시는 부모를 잘 아는 때는 언제일까요? 아이일 때일까요, 아니면 사춘기 반항의 시절일까요?
제니스 캐플런의 ‘감사하면 달라지는 것들’에 이런 예가 나옵니다.
한 어머니는 15살 아들을 비싼 컴퓨터 교육 프로그램에 보내며 고마운 마음을 보여주는 의미에서 일주일에 몇 번 정도 전화를 걸어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엄마, 뭘 고마워해야 하는데? 애들을 캠프에 보내는 것은 부모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 아니야?”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또 한 어머니는 딸을 학교에 차로 태워다주며 그 딸에게 “고마워해야 한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딸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애잖아. 운전을 못 하니까 당연히 엄마가 데려다줘야지!”
사춘기 아이들은 무엇을 보지 못하는 것일까요? 바로 엄마의 ‘사랑’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너무 커져 버리면 눈이 멀어 사람 안에서 사랑을 찾아낼 수 없게 되고 그러면 안다고 믿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가게 됩니다.
나이가 들고 어른이 되어 자신도 부모가 되면 그제야 겸손해져서 부모의 마음을 볼 줄 알게 됩니다. 가수 김진호 씨의 ‘가족사진’처럼 부모가 자신들을 위해 거름이 되어주었음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부모님을 제대로 알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부모가 했던 것과 같은 수준의 사랑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 안에 있는 것만 보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누군가를 제대로 알게 될 때 나오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됩니다. 바로 ‘감사’입니다. 아담이 하느님을 제대로 알지 못할 때 불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온전히 아시는 분이시기에 항상 감사하십니다. 그것이 어린이의 마음입니다. 사춘기 때는 그 감사를 잊기 쉽지만, 어린이는 부모에게 감사합니다. 감사할 때 아는 것입니다. 사랑을 본 것입니다. 우리는 똥파리가 아니라 꿀벌입니다. 사랑을 보고 감사해야 그 사람을 아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아버지의 사랑은 아버지께서 주시는 선물로 알 수 있습니다. 그 선물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어린이와 같은 사람은 이 사랑의 선물 안에서 사랑을 발견하고 그 주시는 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사랑을 볼 눈을 잃습니다. 그러면 아무리 보아도 잘못 보게 됩니다. 그 증거로 감사가 사라집니다. 아버지의 철부지이신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에 집중합시다. 아는 만큼 감사해합니다. 모든 사람 안에 어느 정도씩은 사랑이 있으므로 반드시 감사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발견해 감사해할 수 있을 때 그 사람을 안다고 해야겠습니다.

-조재형신부-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익숙하지 않은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날씨가 더워지면서 자주 보게 되는 일기예보의 단위입니다. 한국은 섭씨를 사용하는데 미국은 화씨를 사용합니다. 70도에서 80도면 좋다고 하는데 들어도 체감이 잘 안됩니다. 90도에서 100도면 엄청 더운 거라고 합니다. 온도는 섭씨보다 훨씬 높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화씨에 익숙해지면 미국생활도 익숙해질 거라고 합니다. 운전하면서 속도를 나타내는 단위입니다. 한국에서는 킬로에 익숙했는데 마일을 사용하니 속도를 체감하기 어렵습니다. 70마일에서 80 마일이면 꽤 빠른 속도라고 합니다. 고속도로에서도 70마일이 넘는 경우는 과속이라고 합니다. 속도는 킬로보다 낮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일에 익숙해지면 운전도 편해질 거라고 합니다. 무게를 나타내는 단위입니다. 한국에서는 킬로를 사용했는데 파운드를 사용합니다. 몸무게를 거의 재지 않기에 파운드를 이용할 일은 별로 없지만 마트에서 고기를 살 때는 필요합니다. 미국에 왔으면 미국의 관습을 따라야 합니다.
북미주 사제회의를 ‘줌(Zoom)'으로 하였습니다. 화상회의는 기업에서 하는 걸로 알았는데 줌으로 회의를 하였습니다. 서부는 오후 2시였고, 제가 있는 동부는 오후 5시였습니다. 익숙하지 않았지만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코로나19로 만날 수 없었는데 인터넷으로 서로 얼굴을 보면서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이동 시간도 줄일 수 있었고, 장소를 빌리지 않아도 되었고, 화면으로 얼굴을 보면서 하니 집중이 잘 되었습니다. 코로나19를 지혜롭게 헤쳐 나가는 신부님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매일 교우분들에게 전화를 하시는 신부님도 있었습니다. 레지오 회합을 줌으로 하고, 강복을 주신다는 신부님도 있었습니다. 미사가 재개 되는 본당도 있었습니다. 본당 재정을 걱정하는 교우분들이 자발적으로 헌금을 보낸다는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방송미사에 익숙해지면서 공동체가 함께 드리는 미사가 낯설어지지 않을까 걱정도 하였습니다. 2000년 공동체 미사를 함께 하였으니, 공동체 미사가 재개되면 곧 익숙해지리라 생각합니다. 익숙함은 분명 삶에 도움을 줍니다. 그러나 경건함과 엄숙함도 삶에는 필요합니다. 역사는 익숙함으로 발전하기 보다는 새로움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첫 부임지로 갔을 때가 생각납니다. 벌써 29년 전입니다. 모든 것이 서툴렀지만 열정과 패기만큼은 있었습니다. 성당의 제단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첫 본당에서의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떨리는 마음이었고, 설레는 마음이었습니다. ‘신부님!’이라고 부르면 다른 사람을 부르는 줄 알았습니다. 지금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매번 새로운 임지로 가면서 일의 방법은 더 알게 되었지만 첫 본당에서 가졌던 열정과 패기는 조금씩 줄어들었습니다. 연륜과 경험은 어느덧 익숙함이 되어버려 변화와 새로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고 일어서는 새싹처럼,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하느님의 선하신 뜻이 저를 통해서도 드러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허위와 욕심, 교만과 미움으로는 결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고, 신뢰를 얻을 수 없다고 이야기 하십니다.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을 가질 때 우리는 숨겨진 하느님의 뜻을, 참된 가치를 만날 수 있다고 이야기 하십니다. 한두 번은 속일 수 있고, 세상의 잣대로는 이익을 얻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손으로는 하늘을 가릴 수 없듯이, 거짓과 가식으로는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사랑과 진실, 정의와 평화가 어우러질 때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짧지만, 참으로 깊고 아름답습니다. <앞 장면>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드리는 감사, 찬양의 기도요, <뒷 장면>은 당신 자신에 대한 계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를 부르시면서 기도를 시작하십니다. 곧 아버지께서 우주의 주권자이심을 인정하는 동시에, 모든 피조물의 소유권을 가지신 분임을 고백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드리십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25)
이 고백은 하느님의 뜻은 지혜나 슬기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드러내주셔야만 알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드러내주신다고 해서 모두가 알게 되는 것만도 아닙니다. 그것을 받아들일 때라야 알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어린이와 어른의 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는 “나는 모른다.”라는 태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묻습니다. 그리고 ‘모른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가면서 “나는 안다.”라는 태도를 지녀가게 됩니다. 그래서 ‘아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는 우주의 주권자이기에 당신께서 원하시는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당신의 뜻을 드러내시기도 하고 감추시기도 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감추시고”와 “드러내시고” 라는 표현을 통해서, 영적 진리는 하느님의 주권적인 배려에 의해서만 알 수 있음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바로 이러한 아버지의 주권적인 배려에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드린 “감사”(Έξομολο-γουμαί)의 원어의 뜻은 찬양을 나타내는 감격스런 고백을 뜻합니다. 곧 아버지의 뜻에 대한 완전한 인식과 동의를 말합니다. 곧 ‘슬기롭다는 자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에게는 드러내시는’ 아버지의 뜻과 섭리에 대한, 완전히 동의와 전폭적인 지지를 말합니다.
그래서 그 감사의 이유를 이렇게 고백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6)
오늘 우리도 이렇게 고백해야 할 일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 활동하시고 일하셨음을 믿음과 흠숭으로 고백하는 일입니다. 당신의 일하심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지지하는 일입니다. 비록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자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아버지를 확신하고 지지하는 일입니다.
아니, 오히려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것입니다. ‘모든 것에 감사드리는 것이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 입니다.’(1코린 5,18)라고 말씀하신 사도 바오로처럼 말입니다. ‘하늘나라의 장막에 머무는 길은 우리 안에 일하시는 주님을 찬미하라’(수도규칙 머리말 30)고 제시하신 성 베네딕도의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마태 11,25)
주님!
지혜롭다는 자에게서 감추시니, 믿음 안에 저를 가두소서!
철부지에게서 드러내시니, 신비 안에 저를 가두소서!
아버지의 뜻 안에 저를 가두시어, 신뢰하고 의탁하게 하게 하소서.
감사할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하느님의 철부지가 되어야
-반영억신부-
예수님의 가르침이 당시에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는 배척을 당하였습니다. 소위 잘나고 똑똑한 내로라하는 사람에게는 쉽게 받아들여 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최고였기 때문에 주님의 가르침이 들어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철부지들에게는 받아들여졌습니다. 그야말로 촌놈들, 상것들, 별 볼일 없는 못난이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에게는 단순함이 있었고 부족하다고 인정하는 겸손이 있었기에 내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사실 그것이 세상의 희망입니다. 일찍이 노자는 “알면서도 모르는 게 으뜸이요, 모르면서 아는 게 병통”이라고 하였습니다.
때 묻지 않은 철부지들은 새로운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철부지들의 특징은 의탁입니다. 철이 없고 세상 물정을 모르기 때문에 반드시 보호자가 필요한 존재들입니다”(함께야). 그들은 그야말로 잔머리를 굴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머리로 계산하지 않고 마음을 열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단순한 사람을 미덥게 여기십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보호가 절실한 이들이고 우리는 하느님의 철부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는 것이 결코 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물을 꿰뚫는 통찰력을 가리키며 친숙해 지는 것, 그리고 감정을 이해하며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결국 알기 때문에 달라지는 것을 포함합니다. 또한 남녀가 결혼을 통해 가장 깊이 만나는 것을‘안다’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안다고 하는 것은 당신의 사랑으로 충만히 채워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다는 것은 곧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눈이 맑아져서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고 하셨고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마태11,27). 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과 하느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알려주셨습니다. 이제 그 아버지에 관해서 아들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고 그분이 알려준 아버지를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분을 알리기 위해서 그분을 알아야 하는데 그 첫 자세가 “어린이와 같이”(마르10,15)단순한 마음으로 온전히 의탁하며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단순하면 할수록 하느님의 뜻을 더욱 잘 깨닫게 될 것입니다. 정희성씨의 ‘교감’이라는 시입니다. “전깃줄 위에 새들이 앉아있다. 어린아이가 그를 보고서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더니 ‘내려와 위험해여’”. 그런 순수함이 사라진 시대이라서 더욱더 어린이의 마음이 간절해지나 봅니다. 순진무구함으로 하느님을 알고 전할 수 있는 은혜가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송영진신부-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마태 11,27).”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예수님께 넘겨주셨다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모든 권한’을 예수님께 넘겨주셨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8).”
이 권한은, 일차적으로 사람들을 구원할 권한과 구원하지 않을 권한입니다.
따라서 구원받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라는 말을 ‘모든 사람’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뜻은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과 완전히 일치되어 있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는, 예수님의 권한 행사는
하느님의 권한 행사이기도 하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권한을 예수님께 넘겨주신 다음에
예수님과 떨어져서 따로 계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을 예수님과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또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나타내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느님만이 예수님을 아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진정한 신원은 ‘하느님의 신비 영역’에 속한 것이라는 뜻이고,
이 말은 곧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예수님을 온전히 알기를 바란다면,
우선 먼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어야 합니다.
“아들 외에는, ......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완전히 일치되어 있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다르지 않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일하십니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요한 5,19).”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요한 8,29).”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히브 1,3).”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는 형상이신 분”입니다.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은 하느님께 도달하는 유일한 길이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만이 구원받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고,
또 그것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책을 다 읽고 공부해도, 그래서 뛰어난 학자가 되어도,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믿음 없는 지식은 구원받는 일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성경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는데, 성경을 전부 다 외워서
자유자재로 인용할 수 있다고 해도, 예수님을 안 믿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한평생 명상을 하고, 수행을 해서 어떤 높은 경지에 도달한다고 해도
예수님을 안 믿으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5-26).”
여기서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자기 자신이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자처하는 자들, 즉 세속적으로 성공하고 출세한 자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또는 자신의 지식과 능력에 대해서 잘난 체 하는
오만한 자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철부지들’은 가진 것 없고 힘없는 사람들, 사회적으로 보잘것없는 사람들,
그러나 겸손하게 하느님을 믿고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루카복음 16장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를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자처하는 자’로, 라자로를 ‘철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부자가 사는 모습을 보면, 그는 분명 세속적으로 성공한 사람입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루카 16,19).”
그는 자신의 출세와 성공에 만족하면서, 자신의 성공한 인생을 즐겼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잘난 체 했을 것이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비웃었을 것입니다.
그는 아쉬운 것 없이 살고 있었으니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청하는 기도는
하지 않았을 텐데, 그러면 자기가 누리고 있는 것에 대해서 감사기도는 드렸을까?
어쩌면 감사기도는 드렸을지도 모르는데,
그 기도는 ‘진심으로’ 바치는 기도가 아니라 ‘잘난 체’였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 부자는 자기 집 대문 앞에 누워 있는 라자로에게
‘먹고 남은 음식 부스러기’를 가끔씩 던져 주었던 것 같습니다(루카 16,21).
그렇게 하면서 그는 자기가 ‘이웃 사랑 실천’을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는 자기에게는 회개할 죄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고,
그래서 회개할 생각은 아예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에서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잘난 체 하는 자들을 구원하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 자들이 회개하지도 않고,
구원받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 것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라는 말씀은,
인간의 세상에서는 소외되어 있는 사람들이
하느님 앞에서는 소외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 감사드린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 부자 같은 사람들도 회개하고, 재산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하고,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올바르게 살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라자로 같은 사람들도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면서
부자들에 대한 복수심에 가득 차 있고,
물질적인 탐욕에 사로잡혀 있다면,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11,25-27: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25절) 이 말씀은 당신에 관한 신비를 지혜롭다는 이스라엘에게는 감추시고, 아직 철부지인 다른 민족들에게는 드러내신 아버지의 뜻에 대한 찬미이다. 우리도 세례를 받아 신앙인이 되었지만, 그분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우리도 외면을 당할 것이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란 말은 창조계 전체의 주님으로 하늘은 하늘에 있는 모든 것, 땅은 땅 위에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고” 계시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들을 다 하시고도 아버지께서 그 일을 하신 것으로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신다. 그럼으로써 아버지와 아들의 뜻이 하나임을 보여주시며, 우리에게 좋은 것을 베풀어주신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드리신다.
주님의 말씀에서 “철부지들”은 나이가 어려 철부지가 아니라, 죄와 사악함에서 거리가 먼 철부지라는 것이다.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신 이유가 왜 하느님의 선하신 뜻인지는 설명하지 않으신다. 다만 감사를 드리신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하느님의 뜻을 따져 물어서는 안 된다. 단지 그분의 뜻을 따리 실행하고 그분께 충성을 다하는 일만이 우리의 할 일이라는 것이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27절)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통해 아버지께 다가간 사람들과 전에는 반항했으나 이제는 하느님을 알게 된 모든 사람들을 맡기셨다는 뜻이다.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27절)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를 아는 점에 있어서 같은 본질이다.
같은 본질이 아니면 아들은 아버지를 알 수 없다. 그러기에 아들을 아는 사람은 아들 안에서 아버지를 알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넘겨주셨고, 이제 이 모든 것이 아들을 통해서만 드러나게 되어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아들을 알고 아들이 아버지를 아는 신비를 통하여 아버지에게 있는 모든 것이 아들에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도 주님을 알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다.
이 말씀으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잘 아시며, 아버지를 잘 아는 유일한 분인 만큼 아버지와 같은 본질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아버지의 모상이신 아들을 보는 사람은 바로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 삼위일체 안에서만이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아버지만이 당신 본질의 열매인 당신의 아들을 아신다. 오직 아들만이 자신을 낳으신 아버지를 알아본다. 그리고 거룩하신 성령만이 하느님의 깊은 비밀들, 곧 아버지와 아들의 생각을 아신다.
하느님을 아는 우리는 그러기에 그분의 뜻을 알고 실천하여 참으로 그분을 사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이 삶으로 하느님 안에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 26)
-한상우신부-
오히려의
철부지와
참으로의
십자가 사이에
우리가 있습니다.
비 그친 하늘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나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은
서로의 아름다움을
인정하는 거기에
있습니다.
오히려
철부지를 통해
드러나는 사랑의
기쁨이며 사랑의
아름다움입니다.
아름다움은
낮아지는
기쁨입니다.
낮아질수록
더 깊어지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철부지들은
단순합니다.
어려운 것이 아닌
쉬운 것에서
기쁘게
출발합니다.
약하고 작으며
모자라고
부족한 데서
하느님의 뜻은
더욱 풍요롭습니다.
넘치는 것이 아닌
모자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버지의 선하신
참된 뜻입니다.
어리석은
십자가에서
오히려
선하신 뜻이
드러납니다.
철부지들처럼
기꺼이 아래로
내려올 수 있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철부지들의
눈으로 바라보면
모든 것은
기쁨이며
사랑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 존재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물으십니다.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마태 11,27).
아버지는 아들을 아시고, 아들도 아버지를 아십니다. 또 아들이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이도 아버지를 압니다. 우리는 자기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 덕분에 하느님을 알아갑니다.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앎이 철저히 예수님께 달려있다는 뜻이지요.
세상은 소위 발전과 성장이라는 명목으로 변화되어 왔습니다. 많은 이들이 오로지 과학, 기술, 의학 등 인간의 지력과 능력으로 여기까지 도달했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이로써 "앎"의 영역은 철저히 신의 영역과 분리되어 기술의 차원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하느님 안에서 "앎"은 곧 사랑이니, 사랑이 제외된 "앎"은 자칫 폭력도 무기도 될 수 있지요. 자본주의의 도구가 된 "앎"이 되려 인간을 소외시키고 무기력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25).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며 아버지께 외치십니다. "철부지"에 불과한 제자들을 통해 이루신 일들이 놀랍고 신비로울 뿐입니다. 이렇듯 자기 힘으로 지식의 탑을 쌓았다고 믿으며, 스스로 만족하고 도취하는 이들에게 아버지의 지혜는 모습을 감추십니다. 반면 세상이 인정하는 학벌도 가문도 타이틀도 직업도 지니지 못한 단순 소박한 이들에게는 당신을 마음껏 드러내시며 그들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6).
아버지는 스스로 하느님 앞에 부족하고 모자란 철부지라 느끼는 이들을 통해 당신의 "앎"을, 곧 사랑을 퍼뜨리십니다. 그에게는 애초에 내세울만한 제 것이 없기에 이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온 것을 알지요. 그래서 스스로도 놀라고 신비스러워합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 커갈수록 그의 겸손도 깊어갑니다.
제1독서에서는 아시리아에 대한 주님의 매서운 심판이 울려퍼집니다.
"내 진노의 막대인 아시리아!"(이사 10,5)
당신을 배반한 이스라엘을 벌하시려 주님은 아시리아를 "막대기"처럼 도구로 쓰십니다. 하지만 아시리아는 기고만장해져서 주님께서 바라시는 징벌적 수준을 넘어 아예 하느님 백성을 "멸망"시키고 "파멸"하려 들지요. 아시리아는 잠시 분노하셔도 결코 "당신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당신 소유를 저버리지 않으"(화답송)시는 주님의 본심을 헤아리지 못했기에 선을 넘은 것입니다. 이것이 아시리아의 첫째 과오입니다.
"나는 내 손의 힘으로 이것을 이루었다. 나는 현명한 사람이기에 내 지혜로 이루었다"(이사 10,13).
그들은 승리와 약탈을 자기 손의 힘으로 이루었다고 오만히 떠들어댑니다. 아시리아의 둘째 과오지요.
"내 손의 힘과 내 지혜".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문화가 달라도 인간의 바벨탑 근성은 본능적 욕망인가 봅니다. 하지만 이런 교만을 주님은 그냥 넘기시지 않으시지요. 이는 역사가 증명해 줄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드러나는 현상만으로 판단하자면 제 힘과 제 지혜로 재물과 권력을 움켜쥐고 있는 이들이 성공한 것처럼 보입니다. 어쩌면 철부지는 영원히 약자이고 가난하고 변두리만 맴도는 가련한 인생 같지요.
하지만 구원은 양편 모두에게 주어집니다. 세상 꾀와 힘으로 성공한 듯 보이는 이들도 자신이 하느님의 도구임을 겸허히 인정하고 자기에게 많은 것을 허락하신 이유를 찾아 그분 뜻을 이루려 협력할 때 구원 상태를 누립니다. 또 비록 세속적으로는 힘겹게 허덕이며 살더라도 자신의 지혜와 힘이 오로지 주님 것임을 믿고 의탁하는 가난한 이 역시 구원의 상태를 누립니다.
사랑하는 벗님! 하느님은 우리 생명의 주인이시고 목적이십니다. 아무리 자유 의지를 발휘하며 산다고 해도 우리는 하느님 섭리 안을 걷는 중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생각과 의지를 존중하신다고 해서 그분께 있는 우리 삶의 주도권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에게로 가는, 그분께 속한 존재니까요. 이것이 하느님을 아는 지혜입니다.
오늘 기념하는 성 보나벤투라 주교학자는 겸손하게 하느님의 지혜를 탐구한 프란치스칸이었습니다. 우리 삶을 통틀어 주님께서 철부지인 내게 쏟아 주신 사랑의 업적을 기억하고, 아울러 나를 도구로 쓰시느라 내게 안겨 주신 과분한 성취와 보람의 순간들도 함께 떠올려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리하여 보잘것없는 우리를 통해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져가는 신비를 관상하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벗님에게도 "보나 벤투라"(Bona ventura!), 즉 "좋은 일이 있으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스스로 문을 닫는 자
-김찬선신부-
지혜로운 자인 소크라테스가 'Know yourself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하였다고 우리는 어려서부터 배웠지요.
그러나 이 말의 뜻이 무엇인지는 배운 바가 없고
다만 그의 명언이라는 것만 알고 있으면서
종종 그 뜻이 무엇일까 제 나름대로 해석을 하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특히 오늘 주님 말씀과 연결시키면서
'얼마나 모르는 것이 많은 자신인지를 알라'는 말로 이해했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은 존재들인데
오늘 주님께서 꼬집으시듯이 그것을 모르고
자신이 지혜롭다고, 슬기롭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지혜롭다는 자가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혜롭다는 자'는 실제로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지혜롭다는 자가 아니라 진정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에게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음을 알기에 무엇보다도
자신에 대해서 겸손할 것이고, 늘 배우려는 자세를 견지할 것입니다.
이미 많이 알고 있고 충분히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성장판이 닫히듯이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문이 닫혀 있지만
자신은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다고 겸손하게 생각하며
계속 배우려는 사람에게는 미지의 세계가 열려 있지요.
이것을 오늘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이 말씀에서 지혜롭다는 자에게 하느님께서 감추시는 '이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신비이고 미지의 세계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신비와 미지의 세계를 하느님께서 감추신다는 것이
하느님 친히 신비와 미지의 세계로 통하는 문을 잠그신다는 뜻일까요?
하느님께서 지혜롭다는 자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에게는
드러내 보이신다고 하니 말마디만 놓고 보면 하느님 친히
문을 닫으시는 것이 분명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것이 아닐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가 아는 것만으로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신비와 미지의 세계에 대해서는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기에
더 이상 알려거나 배우려고 하지 않기에 스스로 문을 닫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롭다는 자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에게 드러내 보이신다는
말씀은 우는 아기에게 젖 준다는 말이 있듯이 더 이상 알기를 원치
않거나 더 나아가 알기를 거부하는 자에게는 하느님도 어쩔 수 없으시고
자신을 철부지처럼 모른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알려는 겸손한 사람에게는
하느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드러내 보이신다는 뜻일 것입니다.
오늘 성 보나벤투라 축일을 지내는데 성인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성인은 지식을 교만으로 소유하려고 하지 않고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더 깊이 그리고 더 많이 깨닫기를 원한 분이셨고,
그래서 하느님께서도 당신의 은총을 더 많이 내려주실 수 있으셨습니다.
하느님도 하실 수 있는 것이 있고 하실 수 없는 것이 있는데
지혜를 원치 않고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은총을 주실 수 없고,
원하는 사람에게 그 됫박만큼 주실 수 있으심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