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6월 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2020 6월 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마태오 16,13-19)
"But who do you say that I am?"
"You are the Christ, the Son of the living Go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한재호신부-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가장 위로를 받으셔야 하는 순간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간 사람입니다. 스승님께서 베풀어 주신 그 사랑을 배신한 것이니 그는 큰 죄인이었습니다. 바오로는 무고한 그리스도인들을 붙잡아 감옥에 넘겼고 스테파노를 죽이는 일에 찬동한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하느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박해하였으니, 바오로 역시 죄인 중에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약 성경의 저자들은 이 위대한 두 성인이 한때 큰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드러냅니다. 초대 교회에서 매우 비중 있는 이 두 사람의 치부를 드러내면 오히려 선교에 걸림돌이 될 법한데도 말입니다. 이들이 한때 하느님의 원수였고, 나약하였으며, 분별력이 부족하면서 때로는 폭력적이었다는 사실을 가감 없이 우리에게 전해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신약 성경의 저자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바오로가 위대한 이유는 그들의 생애에 아무런 결점이 없었기 때문이 아님을 말입니다. 예수님의 자비가 자신들이 지었던 죄보다도 더 크다는 것을 믿고 회개하였다는 사실, 그리고 이후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사랑의 삶을 살려고 애썼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이들을 성인으로 공경합니다. 사람에게 거룩함은 죄를 전혀 짓지 않는 ‘완전무결한 순수 상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죄, 털면 언제든지 나오는 먼지 같은 그 죄를 솔직하게 주님과 다른 이에게 고백하고 회개하는 자세에서 거룩함은 시작됩니다. 베드로와 바오로의 치부를 드러내는 신약 성경의 당당함은 바로 이런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던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현악기 연주자들은 주로 왼손으로 현을 누르고 오른손을 활을 켜서 소리를 냅니다. 이들은 피나는 연습을 반복하는데, 이로 인해 손가락에 해당하는 두뇌 피질의 두께가 보통 사람보다 훨씬 두꺼워지고 넓어집니다.
또 다른 예도 있습니다. 런던의 택시 기사들은 런던 골목길이 너무 복잡해서 특별한 학습과 기억능력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단기기억을 단단하게 하는 해마의 기능이 뛰어나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런던 택시 기사들은 일반인보다 훨씬 더 큰 해마를 가지게 됩니다.
연습을 통해 뇌의 구조가 바뀌는 것입니다. “나는 안 돼”라는 말은 결국, “나는 노력하기 싫어!”와 같은 말이 아닐까요? 노력을 통해 뇌의 구조가 바뀌고 나의 능력이 발휘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꿀 수 없다’라는 생각을 너무 쉽게 합니다. 그 부분에 관심을 두고 힘을 기울인다면 틀림없이 바꿀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만드셨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맙니다.
자신을 불신하는 것이 곧 하느님을 불신하는 것이며, 자신을 믿는 것은 내 안에서 움직이시는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오늘은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입니다. 신앙 고백의 모범이 된 베드로와 신앙의 내용을 밝히 깨우쳐 준 바오로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이 둘은 교회의 기초를 놓아 준 사도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처음부터 완벽했을까요? 하늘나라의 열쇠를 받고 교회의 반석이 된 베드로이지만, 그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나약한 사람이었습니다. 때로는 스승 예수님의 말씀보다 자기 뜻을 내세우는데 목소리를 높였던 섣부른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바오로도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는데 앞장섰던 사람이었으니까요.
이렇게 부족함이 많은 베드로와 바오로였지만, 교회의 기초를 놓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자신의 큰 죄에 좌절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자신은 주님을 제대로 따를 수 없다면서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배반하고 박해했던 모습에서 모든 것을 포기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을 다듬습니다. 그 결과 주님의 뜻에 맞춰서 살아가는 참 제자가 될 수 있었으며, 주님께서 맡겨주신 교회를 성장시키는 커다란 힘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따르면서 많은 좌절과 포기의 마음의 생기게 됩니다. 하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포기해서도 또 좌절의 굴레에서 헤어나오지 못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뜻에 따르려는 끊임없는 노력만이 하느님의 창조 목적에 맞게 살아가는 유일한 길이 됩니다.
오직 신만이 창조한다. 우리는 단지 모방할 뿐(미켈란젤로).
웃어요.
우리는 원래 잘 웃도록 태어났습니다. 어린아이들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지요. 어린아이는 참 잘 웃습니다.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도 깔깔대며 신이 납니다. 그런데 이렇게 잘 웃던 어린아이가 웃음을 잃어갑니다. 하기 싫은 것을 하게 되면서 생기는 현상입니다. 여기서 자신감을 잃게 되고 걱정도 많아집니다. 실제로 자기 하고 싶은 것을 맘껏 하는 아이는 하루 평균 400~500번 정도 웃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자기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어른은 몇 번이나 웃을까요? 많아야 15~20번 정도라고 합니다.
웃지 않는 사람이 원래부터 그랬을까요? 본래는 많이 웃었던 우리입니다. 그만큼 어렵고 힘든 일이 있었고, 좋아하지 않는 일을 했고 또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래 잘 웃던 나를 찾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기 좋은 것만 하면 되겠지만, 그렇게만 살 수 없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의미를 찾아 사는 삶을 산다면 그 가능성을 찾을 수가 있게 됩니다.
오늘 하루 얼마나 웃었습니까? 그 웃음의 횟수를 늘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 창조 본연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외롭든지, 불편하든지!
-전삼용신부-
이번 코로나 사태 이후, 앞으로는 ‘비대면 사회’가 될 것이라는 전망을 많이 내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비대면으로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이 본성상 사회적 동물임을 간과한 채 쏟아내는 예측입니다. 지금 코로나가 장기화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제 사람들이 집에서 버티는 것이 한계에 다다랐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사람과 대면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한 자매님이 상담을 원해 들어주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상처받아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만 있다 보니 우울증에 걸리게 된 것입니다. 우울증 증세 안에는 세상에 나 혼자라는 외로움도 들어있습니다. 사람은 관계를 맺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혼자 있어도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더 심해지면 귀신도 볼 수 있고 환청도 들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데 사람과의 관계를 단절해버리면 저절로 마귀와도 관계를 맺게 됩니다.
제가 보좌 신부로 어떤 본당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그날은 비가 억수같이 왔습니다. 오전 10시 미사를 마치고 신자분들과 인사를 하고 성당 로비에는 저 혼자만 있었습니다. 사제관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한 자매님이 비를 홀딱 맞고 머리를 귀신처럼 늘어뜨리고 성당으로 들어왔습니다. 제 앞으로 오더니 뜬금없이 상담하자고 하였습니다. 자신 안에 마귀가 있는데 그 마귀가 지금 성당에 들어가면 보좌 신부 혼자 있을 것인데 상담을 하고 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서울 사는 사람이고 신자도 아니고 그냥 지나는 길이였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집무실로 들어가 문을 열어놓고 상담을 하였습니다. 그냥 상태만 보아도 노처녀에 경쟁심이 클 것으로 보였습니다. 예쁘기는 했지만 무서운 사감 선생님처럼 생겼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분은 보험설계사로 나름 잘 나가고 있었습니다. 남에게 지는 것을 싫어하였고, 특별히 남자들에게 지는 것을 싫어하였습니다. 다른 것은 부족함이 없는데 ‘외로움’ 때문에 마귀를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종교는 없지만, 그 존재가 마귀인 것은 안다고 하였습니다. 그 마귀와 심지어 잠자리까지 함께한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갑자기 서울 어디 사는지가 궁금하여, “아까, 잠실에 사신다고 하셨나요?”라고 물으니, 남자의 거친 목소리로 바뀌며 눈을 매섭게 뜨고 소리치듯 말했습니다.
“제가 언제 잠실이라고 했어요, 목동이라고 했지.”
자신이 한 말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해 화가 난 것입니다. 저는 좀 무서웠지만 위축되면 안 되기에, “아니, 그럼 자매님은 한 번 들으면 다 기억해요?”라고 따졌습니다. 그랬더니 “아뇨.”라고 하며 인정하였습니다.
저는 이럴 때마다 말해줍니다. 마귀는 자신이 끌어들이는 것이라고. 외로워서 스스로 마귀와 친구가 되는 것이라고. 우리 선택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외롭든가, 불편하든가.”
분명 사람을 만나는 일은 불편합니다. 혼자 있으면 편합니다. 세상은 경쟁의 시대이고 그렇게 사람을 경쟁자로 보게 만듭니다. 그렇게 혼자가 되고 몸은 편합니다. 그러나 마귀와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마귀와 친구가 되는데 어떻게 외롭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이 보이기 시작하면 엄청 불편합니다. 혼자 있을 때도 혼자가 아니게 됩니다. 그분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그 불편의 정도가 달라집니다. 오늘은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 대축일입니다. 그분들은 매 순간 하느님과 함께 머무는 삶을 살았습니다. 베드로만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알아보았고, 바오로만이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며 항상 주님께서 자신과 함께 계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불편한 일입니까? 그러나 그 불편을 감수하지 않으면 영원히 외롭게 살아야 합니다.
어린이들을 받아들이던 수도회가 있었습니다. 스승은 그 작은 수사님들 중 한 아이만 특별히 사랑하였습니다. 이에 다른 아이들의 불만이 컸습니다. 그래서 스승은 각자에게 참새 한 마리씩 주며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죽여 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야 수도원에 머물게 해 주겠다고 합니다. 다들 으슥한 곳을 찾아 참새를 죽여왔습니다. 그 작은 아이만 못 죽이고 참새를 살려서 가져왔습니다. 왜 죽이지 못 했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무리 아무도 없는 으슥한 곳을 찾아도 주님께서 보고 계셔서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모든 수사는 왜 원장이 그 아이만 사랑하는지를 그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전쟁터에서 참호에 수류탄이 떨어지면 군인들은 분명 어떠한 행동을 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집어던지던지, 피하든지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아이라면 수류탄이 떨어져도 그러한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진 이도 이와 같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행동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그렇게 사신 분들이 성인들이시고, 오늘 특별히 공경하는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입니다. 외롭든지 불편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주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하며 온종일 불편한 삶을 산다면 외로움에 빠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작년 연말에 한 모임에서 시각 장애인 학생과 부모를 만났습니다. 사제복을 입은 제게 인사하였고, 인연이 되어서 몇 번 식사를 하였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학생은 하버드 대학과 프린스턴 대학에 합격하였고, 대통령이 주는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학생과 부모에게 축하 인사를 드리면서 학생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였습니다. 오늘은 학생과의 대화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시각장애는 분명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편할 뿐이지 불행은 아니었습니다. 불편함을 지혜롭게 극복하여,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는 학생의 앞날에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기를 기도하였습니다.
먼저 주일학교에 다니면서 기억나는 것을 물어보았습니다. 학생은 3가지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주일미사에 독서를 하였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즐거웠다고 합니다. 신부님의 손을 잡고 독서대까지 가는 걸음 수를 알았다고 합니다. 과테말라로 봉사활동간 것이 좋았다고 합니다. 학생들을 가르치고, 가져간 물건을 전해 주었다고 합니다. 매주 하느님의 말씀을 점자로 만들어 주던 선생님이 잃었던 신앙을 되찾았다고 합니다. 학생은 볼 수 없었지만 말씀을 전하였고, 볼 수 없었지만 어려운 이웃을 도왔고, 볼 수 없었지만 한 사람의 영혼을 하느님께 인도하였습니다.
하버드 대학을 포기하고 프린스턴 대학을 선택한 이유를 물어보았습니다. 보통의 학생들은 성공을 위해서, 명예를 위해서, 권력을 위해서 학교를 선택하곤 합니다. 세상은 그런 선택으로 발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학생의 선택 기준은 신앙이었습니다. 프린스턴 대학에는 가톨릭 학생 활동이 활발하기 때문에 선택했다고 합니다. 낙태를 반대하는 운동도 활발하기 때문에 선택했다고 합니다. 대학에서는 정치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합니다. 소외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일을 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본인이 시각장애인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그 불편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불편함을 원망하지 않고, 그러기에 불편한 사람을 위해서 일하고 싶다는 그 마음이 아름다웠습니다.
감사드리고 싶은 사람에 대해서 물어보았습니다.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하다고 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신앙인으로 키워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다고 하였습니다. 매일 저녁 가족들이 기도하는 시간을 가진다고 하였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감사기도를 드렸고, 청원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학생도 감사와 청원기도를 드리면서 하루를 마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외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오셔서 함께 여행을 갔을 때도 매일 묵주기도를 바치고, 저녁기도를 하였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그런 신앙이 큰 힘이 되었다고 합니다. 중요한 일이 있으면 사촌언니와 함께 9일기도를 바친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모습이 아름다웠습니다.
오늘은 베드로와 바오로 성인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두 성인은 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두 성인은 모두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 성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을 반대하였다가 ‘사탄아 물러가라.’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물위를 걷다가 두려움 때문에 물에 빠졌습니다. ‘왜 이리 믿음이 약하냐.’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배반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박해하였습니다. 스테파노 부제가 순교할 때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잡기 위해서 다마스쿠스로 떠났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바오로 성인을 두려워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는 나약하였고, 결점이 있었지만 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나약함까지도 구원 사업의 도구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처음부터 완벽한 성인은 없습니다. 부족함에도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심에 감사드리며,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는 사람이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신앙 고백의 모범이 되고 바오로는 신앙의 내용을 밝히 깨우쳐 주었으며 베드로는 이스라엘의 남은 후손들로 첫 교회를 세우고 바오로는 이민족들의 스승이 되었나이다. 두 사도는 이렇듯 서로 다른 방법으로 모든 민족들을 그리스도의 한 가족으로 모아 함께 그리스도인들의 존경을 받으며 같은 승리의 월계관으로 결합되었나이다.”

우리의 결핍은 은총이요 축복이요 하느님께 나아가는 발판입니다!
-양승국신부-
언젠가 애매하게 자리잡고 있는 묵직한 바위를 적당한 다른 자리로 옮겨보려고 홀로 갖은 애를 다 써봤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머리를 쓴다고 이런 저런 다른 방법도 동원해봤지만 무용지물이었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히 혼자 들 수 있을텐데 생각했는데, 요지부동인 바위덩이를 바라보며 속으로 ‘십년만 젊었더라면!’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습니다. 세월의 무상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안간힘을 다 쓰고 있는 저를 지나가던 한 형제가 발견하고 다가왔습니다.
외관상 별 도움 안되 보이는 ‘멸치과’ 형제라 큰 기대를 하지 않았었는데, 웬걸, 그 형제가 힘을 보태니,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요지부동이던 바위덩이가 너무나 쉽게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가톨릭 교회의 두 기둥 베드로 바오로 사도의 축일을 크게 경축합니다. 기둥이 하나 뿐이었다면 무척이나 외롭고 쓸쓸했을 것입니다. 벅차고 힘겨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 기둥이 둘이었으니 두분 다 한결 마음이 든든했을 것입니다. 초세기 교회 건설을 위한 역할을 해나가는 데 있어, 상대방으로 인해 수고나 고통도 훨씬 경감되었을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 두 사도는 초세기 교회 기반을 닦는데 각자의 역할 분담을 확실히 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직적 목격한 사도요 수제자였습니다. 또한 그는 신앙 고백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오 복음 16장 16절) 뿐만 아니라 그는 이스라엘의 남은 백성들을 중심으로 첫교회를 건설했습니다.
반면 바오로 사도는 살아생전 예수님을 목격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탁월한 지혜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리를 공고히 했습니다. 또한 그는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이방인들을 그리스도교로 인도했습니다.
오늘날 위대한 사도로 길이길이 칭송받고 있는 두 사도였지만, 그들 역시 결핍 투성이의 힘겨운 시절이 있었습니다. 고되고 힘겨운 오랜 신앙 여정 끝에 마침내 자신의 결핍을 솔직히 인정하게 된 두 사도에게 하느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그들의 삶에 본격적으로 개입하시게 됩니다.
결국 우리의 한계, 나약함, 결핍으로 인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고, 그 순간 우리는 참 인간이자 참 하느님이신 예수님께 한 걸음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그토록 우리가 원망하는 우리의 결핍이야말로 우리를 하느님께로 나아가게 하는 은총의 도구였습니다. 내 결핍, 내 가족의 결핍, 내 이웃의 결핍 앞에서 우리가 지녀야 할 시각은 한 가지입니다.
결핍은 축복입니다. 결핍은 은총입니다. 결핍은 새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전제조건입니다. 우리들 삶의 길목을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결핍을 체험하게 될 때 마다, 뿐만 아니라 내 결핍을 확인하게 될 때 마다 우리는 외쳐야 합니다.
“저 결핍이야말로 은총입니다. 저 결핍은 우리를 성화에로 인도합니다. 저 결핍을 통해서 우리는 구원됩니다. 저 결핍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내게 오십니다.”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이영근신부-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이 두 분은 예수님께서 교회를 성장시키고 강화시킬 특별한 직무를 맡으신 으뜸 사도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온 세기를 통하여 교회의 ‘주춧돌’이 되었고, 바오로는 ‘이방인의 사도’로서 백성들의 스승에 되어 ‘땅 끝에 이르도록’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주님께서 당신의 천사를 보내시어 감옥에 갇혀있는 베드로를 빼내주시고 보호해주셨습니다.
<제2독서>에서는 주님께서 바오로 사도의 곁에 계시며 그를 굳세게 해 주셨고, 그를 모든 민족들이 복음을 듣게 하시려고 사자의 굴에서 구출해주셨습니다.
<복음>에서는 베드로의 고백을 통해서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베드로에게 부여되는 권한을 통해서는 교회의 신비를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먼저,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이렇습니다.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베드로의 이 신앙고백으로 그리스도의 신비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예언자들이 보증해 왔던 메시아로서의 그리스도인 것만이 아니라, 성부와 절대적이고 유일한 관계를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신비입니다. 그런데 이 신비는 베드로가 스스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밝혀주고 알려주신 계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것을 베드로에게 알려주셨다.”(마태 16,17)
바로 이 신앙의 반석 위에 교회가 세워집니다. 곧 교회는 바로 하느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여 세워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 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
이는 반석 위에 그리스도께서 직접 세우신 이 교회가 이 세상 끝 날까지 지탱해 나갈 것임을 말해줍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
여기에 또 하나의 놀라운 신비가 있으니, 그것은 베드로에게 부여된 권한을 통해 드러난 교회의 신비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 특별한 권한이 그에게 부여되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가 행한 것을 “하늘에서” 그대로 인정해 준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곧 “매고 푸는” 권한을 하늘에서 보증하고 인정해 준다는 이 어마어마한 사실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 안에서 사람이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하늘이 활동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그 능력으로 온 세기의 모든 형제들에게 믿음을 굳게 해 주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가 용서를 하면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하늘의 능력이 우리 안에서 벌어지고 우리 안에서 하늘이 열리는 일이 벌어집니다. 곧 내 안에 하느님 나라가 열리는 일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서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하늘에 두지 않으셨습니다. 땅에 있는 저희에게 주시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게 하셨습니다. 형제를 받아들임이 당신을 받아들임이라 하시고, 제 형제를 당신 나라를 여는 열쇠로 주셨습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
주님!
당신께서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하늘에 두지 않으셨습니다.
땅에 있는 저희에게 주시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게 하셨습니다.
형제를 받아들임이 당신을 받아들임이라 하시고, 제 형제를 당신 나라를 여는 열쇠로 주셨습니다.
하오니, 묶인 것, 막힌 것을 풀게 하소서!
오늘, 이 땅에서 당신의 나라를 열게 하소서. 아멘.

아픈 과거때문에 더 큰 사람
-반영억신부-
축일을 맞이한 모든 분들께 주님의 은총을 기원합니다. 베드로 , 바오로성인의 삶을 본받고 복음전파의 열정에 목말라하시길 기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지금까지 구약의 모든 사람들이 갈망하던 하느님의 아들, 곧 그리스도, 구세주(그리스어), 메시아(히브리어; 기름부음 받은 사람)라는 고백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 구약의 예언자 엘리야, 혹은 다른 예언자와 같은 인물이라고 고백했는데 그들과는 다른 분,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구원자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담고 있는 신앙고백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정체를 아느냐고 묻는 질문이 아니라 ‘너에게 나는 어떤 존재이냐?’를 묻는 것이기도 하고, 그에 따른 ‘나는 당신의 무엇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합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바로 ‘나도 당신의 길을 가겠습니다.’ 라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은 반드시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서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는 사도 베드로의 고백을 이어받아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처럼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안다는 것은 곧 내 정체성을 아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무엇입니다.’라고 확실히 고백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마더데레사 수녀님은 자신을 ‘주님 손에 쥐인 작은 몽당연필’로 표현하였고,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환시를 통해 “너는 누구냐?” 는 한 소년의 질문을 받게 되는데 “예수의 데레사”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꼬마에게 묻습니다. “너는 구구냐?” 그에 대한 소년의 대답은 “데레사의 예수다.”였습니다. 우리의 고백은 어떤 고백일까요? 그리고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화답해 주실까요? 베드로 첫째편지 4장12절이하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그것이 여러분을 시험하려는 것이니 무슨 큰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니 오히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나타나실 때에 기뻐서 뛰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때문에 모욕을 당하면 행복합니다. 영광의 성령, 곧 하느님의 성령이 여러분에게 머물러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기억하는 베드로, 바오로 두 분은 달라도 너무 다른 분이었습니다. 출신부터가 베드로는 배움이 부족한 어부였고, 바오로는 로마 시민권을 지닌 바리사이파 출신이고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유다인들을 위해, 바오로는 이방인들을 상대로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서로 다른 두 역할이 합하여져 모든 민족을 위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두 분은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하나가 되어 함께 협력하며 교회의 기초를 닦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의 성향을 충분히 존중하시며 당신 구원사업을 완성하십니다.
바오로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역경을 헤치며 누구보다도 열성적이고 용감하게 복음을 전한 복음의 사도였으며 스승 가말리엘 밑에서 제대로 된 신앙수업을 받은 엘리트였습니다. 많은 서간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그 핵심을 정확하게 꿰고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그리스도교 진리를 체계화하신 분입니다. 사도 바오로 덕에 이방인에게까지 주님의 복음이 널리 전파되었을 뿐 아니라 흔들림 없는 신앙 체계를 갖출 수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기억하는 베드로와 바오로는 주님을 등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모두 떨어져 나갈 지라도 저는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마르14,29).하고 말한 그 밤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는 물음을 통해 과거의 상처를 씻어 주시는 주님의 물음에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21,17).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베드로의 이 말에 예수님께서는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21,17). 하셨습니다. 세 번 의 배반을 세 번의 사랑으로 감싸주셨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바오로는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박해했고 첫 순교자 스테파노가 돌에 맞아 죽는 현장에 함께했었습니다. 열렬한 유다교 신봉자였던 그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씨를 말리기 위해서 다마스커스로 가던 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바오로는 주님을 새롭게 발견하고 주님을 증거하며 마지막 삶을 봉헌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말합니다. “나는 이미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로 바쳐지고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2티모4,6-8).
베드로, 바오로! 그들은 인간은 연약하지만 주님의 은총이 함께할 때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는 아픈 과거 때문에 더 큰 사람이 되었습니다.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하느님 안에서 노력했고 어려움 중에서도 희망을 찾은 하느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실망하거나 좌절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오히려 연약함 때문에 주님의 손길이 필요하고 그 안에서 주님을 체험케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베드로와 바오로의 열정을 가진 신앙인이 많아지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한 영원한 생명을 향한 길에서 흔들림 없기를 기도하며 도대체 나에게 주님은 어떤 존재인가? 묻고, “당신은 저의 모두입니다.”, “저는 당신의 종입니다.” 하고 고백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무슨 일에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늘 그러했듯이 지금도 큰 용기를 가지고 살든지 죽든지 나의 생활을 통틀어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도 나에게는 이득이 됩니다....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을 특권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해서 고난까지 당하는 특권, 곧 그리스도를 섬기는 특권을 받았습니다”(필리2,20-21.29).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2코린2,14).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5-19)”
여기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라는 질문의 뜻은,
“너희는 나를 ‘무엇으로’(어떤 존재로) 생각하고 있느냐?”입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라는 베드로 사도의
대답은, “저희는,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며, 하느님께서 보내신
구세주라고 믿고 있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표현만 보면 베드로 사도의 말에는 믿는다는 말이 없지만,
뜻을 생각하면, 그의 말에는 믿는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베드로 사도의 말은 ‘신앙고백’입니다.)
“너는 행복하다!” 라는 말씀은, “너는 복되다.”,
즉 “너는 하느님의 복을 충만히 받았다.” 라는 뜻입니다.
“살과 피가 아니라” 라는 말씀은, “인간적인 지식이 아니라” 라는 뜻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신앙고백은 인간적인 지식에서 나온 고백이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너를 선택하셔서 너에게 계시를 내려 주셨기 때문이다.”
라는 뜻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특별히 선택된 사람이라는 점에서도 ‘복된 사람’이고,
계시를 받았다는 점에서도 ‘복된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떤 사람을 선택하셔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려 주신 일은,
베드로 사도가 처음은 아니고, 세례자 요한에게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33-34).”
세례자 요한이 언제 어떻게 계시를 받았는지는 몰라도,
그 일은 그에게 임무를 맡기신 하느님께서 그의 임무 수행을 도와주신 일입니다.
(하느님은 사람에게 임무를 맡기고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라,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언제 어떻게 계시를 받았는지는 모릅니다.
(어떤 특별한 체험을 했는지,
아니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령의 인도를 받았는지...)
하느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특별히 선택하신 것은,
또 예수님께서 그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 것은,
그가 그럴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계시를 내려 주신 것은, 예수님께서 그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 일을 도와주신 일로, 또는 그가 교회의 반석으로서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도록 그를 도와주신 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지도자로서 전체 교회를 다스린 일은,
교회라는 건물을 잘 지탱하는 반석과 같은 일을 한 것입니다.)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에서 ‘그것’은 교회입니다.
이 말씀은 교회를 지켜 주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저승의 세력’이라는 말을 ‘죽음의 세력’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악의 세력’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죽음의 세력’으로 해석한다면, 예수님 말씀은 교회의 멸망을 막아주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이 되고, ‘악의 세력’으로 해석한다면,
예수님 말씀은 교회를 사탄의 공격에서 지켜주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이 됩니다.
어떻게 해석하든지 간에 우리 교회는 예수님(성령)께서 지켜주시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그 보호는 자동적이고 무조건적인 보호가 아닙니다.
교회 자신도(우리도)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성령의 보호는 보호받을 자격을 갖춘 사람들만 받게 됩니다.
(만일에 타락하고 부패한다면, 그것은 주시는 보호를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늘나라의 열쇠’는 교회를 다스리는 권한과 임무입니다.
교회는 하늘나라로 가는 통로이고 문입니다.
따라서 교회를 다스리는 지도자의 권한과 임무는
열쇠로 그 문을 열거나 닫는 일과 같습니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라는 말씀은,
표현만 보면, “땅이 결정하는 대로 하늘이 따라 하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으로 볼 수도 있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하늘이 땅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땅이 하늘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권한을 아주 넘겨받은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대리인일 뿐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뜻에 합당하게만 권한을 사용해야 하고, 임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네가 무엇이든지 맬 때에는 하느님께서 매기를 바라시는
대로 매야 하고, 네가 무엇이든지 풀 때에는 하느님께서 풀기를 바라시는 대로
풀어야 한다.”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행하면, 결과적으로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는” 것처럼 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매기를 바라시는지 풀기를 바라시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잘 모를 때가 많기 때문에 교회 지도자는 남들보다 더욱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열쇠’ 라는 말에서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루카 11,52).”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교회 지도자들에게) ‘열쇠’를 주신 것은,
‘한 사람이라도 더’(모든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라는 뜻입니다.
만일에 열쇠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 임무 수행을 하지 않거나 잘못 수행한다면,
그래서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는커녕 그 길을 막아버린다면,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을 꾸짖으신 것처럼
교회 지도자들을 엄하게 꾸짖으실 것입니다.

-조욱현신부-
베드로 사도는 갈릴래아 호수에 가까운 벳사이다 출신으로 시몬이란 사람이었다. 그는 동생인 안드레아와 함께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예수께서는 그에게 케파(반석, 베드로)라는 새 이름을 주시고 그를 사도단의 으뜸으로 세우셨다. 그는 오늘 복음에 나오듯이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사도이다. 그는 네로 황제의 박해 때인 서기 65년 경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하였고 그의 무덤 위에 성 베드로 대성당이 세워졌다.
바오로 사도는 열두 사도보다 늦게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교회를 박해하며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게 되었고 사도가 되었다. 그는 이방인들을 위한 전도 여행을 다니며 교회를 세웠다. 많은 편지들이 성경으로 되었다. 바오로 사도 역시 네로 황제 박해 때에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복음: 마태 16,13-19: “당신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5절) 제자들이 예수님에 관한 여러 가지 생각을 말씀드리자, 이렇게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지신다. 이 질문은 제자들이 당신에 대해 더욱 심오한 이해로 인도하시려는 부르심이라고 할 수 있다. 군중들의 수준과는 달라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제 그동안 줄곧 그분과 함께 지내며 당신이 행하시는 기적을 보았으며 스승님과 함께 많은 기적을 행했던 제자들의 생각은 어떠한지를 물으신다.
이 질문은 바로 당신을 따라다니던 모든 제자에게 던지신 질문이다.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16절) 그분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즉 하느님이시며,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 그분이 하느님이시며 그리스도라는 것은 제자들이 올바로 알아들어야 할 내용이다. 그분에게 “열두” 제자들은 아직 부족한 사람들일 뿐이다. 마르코 복음에 보면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8,33)고 무섭게 책하시는 말씀이 나올 정도이다. 이 제자들이 어찌 주님께 믿을 수 있는 제자들이었겠는가?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바로 우리를 위한 것이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바로 열두 사도들의 신앙고백이며, 교회의 신앙고백이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이 고백을 통하여 교회의 기초인 반석(게파)이 되었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루카 복음에 나오듯이(9,23)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라야 한다. 십자가 없는 영광의 주님만 따르려고 하는 것 자체가 유혹이며, 하느님의 일과는 거리가 멀다. 십자가를 통한 죽음을 통하여서만이 부활의 신비를 우리는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길은 제자들에게는 아직도 가야 할 먼 길이다.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칭찬하시면서 복이 있다고 하셨다. 베드로의 첫 번째 이름은 시몬이었다. 시몬이란 말은 말씀에 온순하다는, 잘 따른다는 뜻이다. 하여간에 주님은 이 이름 대신에 ‘케파’라는, 반석, 믿음에 있어 확고한 이름을 주셨다. 그리고 그 반석 위에, 반석과 같은 신앙 위에 주님은 “당신 교회”를 세우셨다. 본래 바위는 주님을 뜻한다. 그리스도께서 바로 바위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라는 바위 위에 서 있는 사도들의 신앙은 결코 정복당하지도 흔들리지도 않을 것이다.
“또 나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19절) 사도가 땅에서 맨 이는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푼 이는 하늘에서도 풀리도록, 하늘나라의 열쇠가 그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이제야 주님께서는 십자가에로의 행진을 계속하실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 자신에게 어떤 분이신가? 내가 믿는 그리스도는 어떤 분으로 내가 생각하며 따르고 있는가? 혹시 나는 주님을 “기계적인 주님”, 혹은 “기계적인 하느님”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내가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보고 나를 따르라고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은 베드로와 바울로의 축일이다. 우리 교회의 양대 산맥인 이 두 분의 축일을 지내면서 그분들이 복음 때문에, 주님 때문에 죽기까지 충실했던 신앙을 우리도 이 시대에 살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의 삶을 진정 증거의 삶이 되어야 한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 15)
-한상우신부-
무엇을 굳게
믿어야 할지를
잘 보여줍니다.
버리고 따르는
믿음입니다.
딛고 간
자리마다
복음의 꽃이
활짝
피어났습니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는
각기 다른 삶으로
서로를 너무나 잘
비추어 줍니다.
두 사도는
자신의 나약함을
잊지 않았습니다.
뉘우치는
회개의 삶이
희망이 되었습니다.
따르는 삶의
조각조각마다
믿음이 있었습니다.
거짓없는
자신의 삶으로
당당히 예수
그리스도를
알려주었습니다.
힘겨운 시간을
건너가며
간절히 기도했던
두 사도의
뜨거운 마음을
기쁘게 만나길
기도드립니다.
복음선포로
고유한 역사를
은총으로
풀어내는 기쁜
대축일 되십시오.
저마다의 약함도
기쁘게 받아들였던
두 사도의 생생한
신앙의 여정을
잊지맙시다.
복음의 일상화를
살아간 두 사도의
가슴에 새겨진
전부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김기현신부-
오늘 독서에 보면 ‘나는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로 바쳐지고 있습니다.’ 라는 말씀이 있는데요. 그 느낌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되어가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 되어가는 과정이 아마도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하는 것과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앞의 내용은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소명을 의지적으로 실천하는 일일 것 같습니다. 사도 바오로에게는 아마도 그 일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고, 그는 그 일을 완수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저에게도 주님께서 ‘시골에서 잘 살아보라.’는 소명을 주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골에서 살았고, 조금 변방에서도 지냈었는데요. 사명이 보이는 순간에는 바오로처럼 성실히 그 일을 수행하고 달리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살다보면 바오로 사도가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하고 말하는 것과 같이 조금은 수동적인 시기, 주님께 의지하고, 그분과 동행하는 것에 더 마음을 써야 하는 시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에게는 요즘이 그러한 시기가 아닐까.. 합니다.
올 초에 비자 갱신하러 왔다가 다시 돌아가지 못하고 한국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시간이라 어떻게 지내야 할지 고민을 하다가 시간이 많으니 피정을 하려고 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피정을 하는 곳이 없었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피정 센터에 와서 지내게 되니 조금은 신기한 느낌이 있었습니다.
여기서는 책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담당하는 것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마음이 참 편안합니다. 기도할 시간도 많고 논길을 걸으며 자연을 바라보는 시간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마음 안에 나를 끌고 가는 여러 가지 잡다한 생각들이 힘을 잃는 것 같습니다. 마음이 좀 더 편안하고 고요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시간을 보내는 가운데 오늘 책에서 읽은 구절에 마음이 살짝 움직였습니다. ‘시월의 청둥오리처럼 저를 꾸미지도 않을 것이며, ... 작은 수저로 당신의 귀에 신학을 퍼 넣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저 당신 옆에 앉아서 당신에게 제 비밀을 말할 것입니다. 사제인 제가 어린이처럼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을!’
그 내용 가운데 특별히 ‘당신 옆에 앉아서...’ 하는데 눈물이 나려고 하더라고요. 나이가 많지도 않은데 눈물이 많아졌는지, 아니면 그분 옆에 앉아 있고 싶은 열망이 살짝 건드려졌는지, 그분 옆에 가까이 있는 느낌이 좋아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그 글귀와 시간에 한참 머물러 있었습니다.
사제관 밖에는 시원한 바람이 불고 있었고, 나뭇잎은 흔들리고 날씨는 좋았습니다. 따뜻하고 포근한 날씨에 사제관에 앉아 책을 읽으며 주님을 생각하고 그분이 가까이 계심을 느끼는 그 순간이 참 소중하고 행복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오늘 하루, 나는 어떤 시기를 지나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달려야 할 시기인지, 주님과 함께 동행 하며 천천히 걸어야 하는 시기인지... 주님과 함께 동행 하고 의지하는 시기라면, 달리고 수행하는 일에 마음을 쓰기보다, 충분히 주님 안에서 깊어질 수 있도록 마음을 써 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신부님이 식사를 많이 드시고 나서
빨간색 차를 드시면서 이런 말을 하셨다.
“밥을 이렇게 많이 먹고
살 빠지는 차를 마시면 무슨 소용이 있지...”

-오상선신부-
성 교회의 두 기둥인 베드로, 바오로 사도를 기리는 오늘, 미사의 말씀은 이 세상에 하느님의 뜻이 어떻게 이루어져 가는지를 보여 줍니다.
먼저 제1독서는 베드로 사도의 투옥과 구출 일화를 전합니다.
"그의 손에서 쇠사슬이 떨어져 나갔다. 문이 앞에서 저절로 열렸다"(사도 12,7.10).
감옥에 갇혀 있던 베드로가 천사의 도움으로 감옥을 벗어납니다. 그를 꼼짝 못 하게 만들던 것들이 힘 없이 제거되는 걸 베드로는 그저 환시겠거니 하고 생각합니다. 여기까지는 하느님께서 직접 나서서 움직이십니다.
"밖으로 나가 어떤 거리를 따라 내려갔는데 천사가 갑자기 그에게서 사라져 버렸다"(사도 12,10).
천사를 따라 감옥에서 나온 베드로가 갑자기 홀로 남습니다. 그제야 그는 이 기적 같은 상황을 이해하지요. 이제는 베드로가 스승의 가르침과 하느님의 뜻을 등대 삼아 사도들과 신도들을 이끌고 세상을 헤쳐 나가야 할 때입니다.
목숨을 바쳐 스승의 뒤를 따른다고 하지만, 지금은 사도들이 합심하여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선포하며 하느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죽음으로 주님께 영광을 드릴 때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방인의 사도로써 달려온 자신의 삶을 정리하듯 고백합니다. 그 삶에는 두 축이 존재하지요.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2티모 4,7).
먼저 바오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모든 힘을 다 쏟아 부었다고 고백합니다. 생전에 예수님을 뵌 일도 없고 그분 가르침을 직접 듣지도 못했으며 심지어 새로운 길을 위협하고 박해하던 그였지만, 회심의 체험 후에는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투신했기에 스스로를 이렇게 평가할 수 있는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 ... 주님께서는 ...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2티모 4,17-18).
이어 바오로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가 주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여태까지 그의 곁에 현존하시며 그를 굳세게 해 주셨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또 앞으로도 구원해 주실 것임을 믿습니다.
복음은 베드로가 주님의 신원을 고백하는 유명한 장면입니다.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마태 16,17).
예수님께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시라는 놀라운 대답을 한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외치십니다. 베드로가 행복한 이유는 그가 완벽하거나 걸출하거나 특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직접 개입하시는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경솔하고 때론 겁도 많고 비겁하기까지 한 베드로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려 그의 지성과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그렇다면 베드로 편에서는 어떻게 하느님의 일에 협력을 할까요?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마태 16,19).
이 세상에서 하느님은 당신 혼자 일하시지 않습니다. 부족하고 죄인인 우리를 당신 업적에 반드시 끼워넣어 주시지요. 하느님 덕분에 스스로도 미처 다 깨닫지 못한 놀라운 고백을 하고 하늘 나라의 열쇠까지 받고 교회의 반석이 된 베드로에게도 협력의 길이 주어집니다.
이 "매고 푸는" 권한에 대해서는 여러 접근이 가능하겠지만 무엇보다 용서의 권한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교회의 목자들에게 주어진 죄 사함의 권한이 여기서 유래하는 것이지요. 이를 보다 확장해서 생각해 본다면, 보편 사제직을 살아가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업적에 협력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의 헌신과 희생으로 교회의 기틀이 잡힙니다. 하느님께서 쉬지 않고 일하셨고 사도들 편에서도 최선의 노력으로 협력했지요.
보잘것없는 우리의 삶에도 이 두 축이 존재합니다 하느님께서 부르시고 지혜를 주시고 굳세게 하시며 구원하십니다. 우리는 응답하고 고백하고 선포하고 증언하며 믿음을 지키고 싸우고 주어진 길을 달립니다. 이로써 우리는 지금도 세상을 나날이 새롭게 창조해 가시는 주님의 일에 참여하는 중입니다.
이 참여와 협력이 우리를 성장시키고 거룩하게 하고 하느님을 닮아가게 합니다. 신화(神化 Deificatio)의 여정이라 할 수 있지요. 그렇다면 이 여정은 언제까지 이어질까요? 그 답은 입당송에서 들려 줍니다. "주님의 잔을 마시고 하느님의 벗"이 될 때까지!
사랑하는 벗님! 성 베드로, 성 바오로와 함께, 교회와 함께 주님을 따르며 하느님의 벗이 되어가는 여정에서, 그분과 우리가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이에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져 갑니다. 그 길에 참여하게 해 주셔서 참 감사하고, 함께 그 길을 걸어가는 동무가 있어 참 행복합니다.
사도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저희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우리 벗님들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나대는 자나 빼는 자가 되지 않도록
-김찬선신부-
이번 가톨릭 신문의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축일 특집의 제목은
<‘극과 극’ 두 사도 통해 교회의 본질 드러내다>입니다.
이 말은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가 상극이라는 말이고,
그 정도는 아니어도 두 분이 대조를 이룬다는 뜻일 겁니다.
상극이라면 서로 화합할 수 없는 관계를 말함이고,
최악의 경우, 서로 원수가 될 수도 있는 관계지요.
그런데 서로 다른 두 사도를 교회는 같은 날 축일로 지냅니다.
서로 다른 두 사도가 교회를 파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두 기둥이 되어 교회를 세웠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다른 두 사도, 가톨릭 신문의 표현대로 상극인 두 사도가
자기 교회를 세우려고 했으면 교회는 분열이 되고 무너졌을 겁니다.
그러나 두 사도 모두 자기 교회가 아니라 주님 교회를 세우려 했기에
다른 역할의 두 기둥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주님께서 쓰시면 서로 다른 것도 다 주님 교회에 쓸모가 있고,
각기 다른 것들이 다 주님 교회를 이루는 데 요긴한 것이 되지만
주님의 교회를 짓는데 주님의 쓰임을 받는 자가 되려고 하지 않고
자기가 교회를 세우겠다고 한다면 주님 교회가 아니라 자기 교회일 뿐이고
그래서 비록 세워졌을지라도 결국 그 교회는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도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내 교회>, <내가 세울 것이다>고 하시지요.
베드로는 반석이긴 하지만 돌일 뿐이고,
그러니까 철저히 주님께서 당신 교회를 세우시는 데 쓰인 것일 뿐입니다.
아무리 반석이어도 주님께서 베드로라는 돌을 안 쓰시면 그만이기에
주님 교회에 내 지분이 있다고 주장할 일도 아닙니다.
오히려 나를 반석 삼아 주신 주님께 감사할 일입니다.
베드로도 이러하니 우리도 주님의 집에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주인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얘기하곤 하는데
우리 집을 하숙집처럼 여기거나 남의 집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는 뜻에서는
이 말이 맞지만 이 주인의식이 지나쳐서 내 집처럼 여겨서는 안 되겠지요.
프란치스코가 한 때 큰 잘못에 빠진 적이 있지요.
주님의 집을 고치라는 소명을 받은 그였고 그래서 그 소명에 동참하는
형제들이 늘어나 수도회가 되었는데, 이 수도회가 자신이 소명을 받은
그 수도회의 정체성을 잃고 기존의 수도회와 마찬가지가 되어갔습니다.
그래서 총장 자리에서 물러나고 더 유능한 형제에게 물려주었는데
이때 그는 크나큰 절망감에 빠졌었고, 자신이 세운 수도회가 잘못 갈까 봐
노심초사하고 있었는데 하느님께서 기도 중에 나타나 말씀하시지요.
이 수도회가 누구의 것이고, 누가 세웠냐는 것이지요.
이때 프란치스코는 마지막 포기를 하고 완전한 가난을 선택하면서
완전히 자유롭게 되었고 남은 생애를 복음은 선포하는 데 전념합니다.
그러므로 주님 집을 짓는 데 쓰일 돌들이 되어야 할 우리 가운데,
주님의 집을 짓지 않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내가 주님 집을 짓겠다거나 내가 주님의 집을 짓는 데 적임자라고
나대는 사람이 그 하나이고, 나는 주님의 집을 짓는 데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빼는 사람이 다른 하나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주님의 집은 짓지 않고 나봇의 포도밭을 빼앗은 아합처럼
공동체 안에서 자기 집, 자기 영역을 크게 차지하겠다는 자와
욕심 부리지 않지만 달팽이처럼 내 집에 집콕, 방콕하겠다는 자입니다.
우리 모두 베드로와 바오로처럼 주님 집을 짓는 데
쓰임을 받는 자가 되어야 함을 묵상하는 오늘 축일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 6월 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