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6월 22일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20. 6. 21. 08:01

2020 6 22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마태오 7,1-5)

 

For as you judge, 
so will you be judged,
and the measure with which you measure 
will be measured out to you.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한재호신부-

 

신학생 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말이 있습니다. ‘형제는 나의 거울이다.’ 하루를 살면서 거울을 몇 번이나 볼까요? 아침에 일어나서 한 번, 외출하기 전에 한 번, 중요한 사람을 만나러 갈 때 한 번 등 시도 때도 없이 보는 것이 거울입니다. 만일 이 세상에 거울이 없다면 어떨까요? 자기가 더러운지 그렇지 않은지, 깔끔하게 옷을 잘 입었는지 아무 맵시 없게 옷을 입었는지 가늠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자기 외모에 대해서 누군가가 세심하게 알려 주거나 관리해 주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내 옆에 있는 형제는 또 하나의 거울입니다. 형제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 형제 안에 담겨 있는 ‘나의 모습’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듯이, 형제의 단점과 잘못된 점을 볼 때마다 그 형제의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과 처지를 헤아리며 ‘나’에게도 그러한 면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실제로 신학생 때 공동생활을 하면서 ‘형제는 나의 거울이다.’라는 말이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모이다 보니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이 있고,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행동을 하는 형제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거울로 삼으려고 노력하다 보니 ‘나는 너와 달라.’라는 생각보다 ‘나와 너는 크게 다르지 않아.’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들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거울이 없으면 외모를 가꾸기가 어렵듯이 형제와 더불어 살지 않으면 자신의 내면을 가꿀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마음에 들든 그렇지 않든 우리와 함께하는 형제들은 하느님께서 우리가 내적으로 정화되고 성장하도록 보내 주신 고귀한 선물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우리 아이는 책을 읽지 않아요. 책을 읽어야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 텐데, 책을 읽으라고 하면 놀 궁리만 한다니까요.”

아이가 잘 성장하기 바라는 부모의 안타까운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때 저는 “그러면 형제님은 책을 얼마나 읽으세요?”라고 묻습니다. 그러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 “제가 바빠서요. 하지만 저도 아이 때는 많이 읽었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부모는 읽지 않으면서 자녀에게 책을 읽지 않는다고 말하면, 강요나 강압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을 것입니다. 부모가 책을 읽는 모습을 먼저 보여 주고, 때로는 같이 읽고 이에 대해 대화를 나눠간다면 어떨까요? 부모의 모범이 먼저 보일 때, 자녀들도 따릅니다. 단순히 자녀를 위한다면서 강요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고 계셨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지를 잘 아셨습니다.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냥 말씀만 하면서 우리에게 강요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당신이 먼저 가장 큰 사랑으로 십자가를 짊어지셨습니다. 

이 사랑 말고는 다른 판단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사랑이라는 가장 커다란 기준이 없을 때, 손쉽게 남을 판단하고 심판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서 분명히 말씀하시지요.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자신의 눈을 가리고 있는 들보를 빼내어야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내 줄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이 하지도 않으면서 하는 섣부른 판단이 자신의 심판을 가져오게 됩니다. 

실제로 자신은 하지 않으면서 남에게만 행하지 않음을 꾸짖는 사람을 종종 봅니다. 자신이 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도 많은 이유가 있기 때문이고, 남이 하지 않는 것은 성품이 못되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가장 중요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먼저 실천할 수밖에 없습니다. 남의 실천하지 않음을 이야기하기 전에, 자신의 실천이 더 중요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말만 하는 사람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위선자’라고 하셨습니다.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향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은 실천하지 않으면서 남에게만 강요하고 있었지요.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하느님의 아드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습니다. 

다른 이를 향한 판단에 앞서서 우리는 먼저 사랑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랑이 어떤 모습인지도 떠올려야 합니다. 말만 하는 사랑인지, 아니면 실천하는 사랑인지…….

행복은 입맞춤과 같다.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누군가에게 행복을 주어만 한다(디어도어 루빈).

 


졸음을 쫓는 가장 좋은 방법.


컴퓨터 앞에 앉아서 작업하고 있는데 졸음이 쏟아집니다. 어떻게 하면 이 졸음을 쫓아낼 수 있을까요? 

얼마 전에 실제로 겪은 상황이었습니다. 쏟아지는 졸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작업을 지금 반드시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고요. 그래서 커피 한 잔을 타왔습니다. 커피 카페인의 힘을 빌려 보려는 것이었지요. 

다시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커피를 든 채로 저도 모르게 잠들었나 봅니다. 글쎄 커피를 키보드에 쏟아 버렸습니다. 깜짝 놀라서 키보드를 탈탈 털며 커피를 닦아냈습니다. 바로 이 순간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글쎄 잠이 싹 달아난 것입니다. 

잠에서 깨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커피를 키보드에 쏟는 것이라는 점을 발견(?)한 날이었습니다. 물론 그 뒤에 키보드 자판이 잘 눌러지지 않아서 교체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 방법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종종 방법이 없다며 포기하곤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 또 다른 아픔이 동반될 때도 있지만, 분명히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순간에서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죽음에서도 부활이라는 희망을 보여 주신 주님이십니다. 따라서 포기하는 것은 주님의 뜻이 절대로 아닙니다.                   

 

자기 얼굴에 묻은 것을 거울에서 떼려고 하지는 않는가?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 말씀의 주제는 이웃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며 어떻게 이웃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론은 사실 이런 개요, 돼지의 수준의 사람에겐 성체를 줘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마태 7,6 참조).


      그런데 사람이 남을 심판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요? 어렵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그럴 처지가 아님을 알고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면 됩니다. 그런데 가장 어려운 것은 자신이 남을 판단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각자의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지금의 저의 모습은 사실 제가 주일학교 교사를 할 때나 신학생 때 사제를 비판했던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그때는 사제가 아니었기에 사제를 비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환경에 처하게 되니 내가 심판했던 사제의 모습으로 사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저는 본당 사제들이 성당에서 권위적인 모습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모습의 사제는 되지 말아야겠다고 굳게 결심하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순간순간 찍은 저의 사진 속에는 교만한 사제가 한 명 있었습니다. 제가 비판했던 사제의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진에서는 저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깊이 숙이고 90도로 인사하는데, 저는 한 주머니에 손을 넣고 악수를 받아주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 사진을 보지 못했다면 제가 그렇게 행동하고 있는지 저도 몰랐을 것입니다.


      저는 사제들이 너무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 모습이 싫었습니다. 클러지 셔츠만 입겠다고 다짐했고 스마트폰도 사용하지 않고 자동차도 사지 않겠다고 결심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제가 비판했던 사제들보다 더 부자로 살고 있습니다. 옷은 많아서 입지 않는 것이 더 많고, 스마트폰은 최신식이며, 차는 이천cc 중형차입니다. 그리고 그때 그렇게 비판했던 사제의 모습을 하고 있음을 까맣게 잊고, 또 내가 하고 있지 않은 것들을 하는 사제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서로를 심판하던 모습과 같습니다. 남을 심판하는 일은 결국 자신 안의 죄를 감추기 위함입니다. 지금은 죄를 짓지 않고 있을 수는 있지만 그 죄의 씨앗들이 들어있기 때문에 남을 심판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지 않은 것으로 이웃을 심판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 안에 아름다움이 있으니 꽃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고, 더러움을 아니까 더러운 게 보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남을 심판하는 이유는 백 퍼센트 내 죄를 합리화하기 위함입니다. 남을 교만하다 심판하면 반드시 그 사람도 교만하고 남을 이기적이라 심판하면 그 사람도 반드시 그렇습니다. 지금은 안 그래도 언젠가 그 교만과 이기심의 씨앗이 열매를 맺을 날이 올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생명나무를 먹을 자격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심판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생명나무인 성체를 영할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가 결정됩니다.

 

      인간이 예수님이 되지 않는 이상 심판은 저절로 됩니다. 그러면 그것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합니다. 타산지석은 ‘다른 산의 나쁜 돌이라도 자신의 구슬을 가는데 유용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웃은 나의 거울입니다. 내가 이웃에게서 보는 단점은 반드시 내 안에 있는 죄입니다. 그러니 남에게 화가 난다면 그것으로 자신을 바꾸려 해야 합니다.


      나의 얼굴에 묻은 것은 털어내려면 다른 사람들을 보아야 합니다. 그들에게서 보이는 단점들이 내 얼굴에 묻은 것들입니다. 그런데도 계속 다른 사람들의 단점만을 바꾸려 한다면, 이는 마치 자신의 얼굴에 묻은 것을 떼어내려고 계속 거울만 긁는 사람과 같습니다.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이웃이 아니라 나 자신입니다. 거울을 보며 자신의 얼굴에 손을 대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들보’라고 번역된 단어는 건축에 쓰이는 큰 나무를 말합니다. 그리고 ‘티’라고 번역된 단어는 그것들을 잘게 쪼개면 나오는 작은 나뭇가지들입니다. 다시 말해 이웃들의 눈에서 보이는 작은 나뭇가지들을 다 모으면 내 눈의 들보가 된다는 뜻입니다. 내가 이웃에게 보이는 모든 것들의 총합은 결국 내 눈에 있는 들보입니다. 남에게서 보이는 단점들을 다 모으면 나의 자아의 크기를 알 수 있습니다.


      들보는 나 자신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완전히 죽기 전까지 이웃을 심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죽기 전 호흡이 열 번 정도 남았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런데 그 호흡으로 남을 심판하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완전히 죽기 전까지는 이웃에게 단점이 보일 것입니다. 그때 거울을 긁지 말고 그 손을 나의 얼굴로 향해야 합니다.

 

-조재형신부-

 

작년 7월입니다. 함께 안식년을 지내던 동창신부와 함께 이태리 돌로미테 산악 트레킹을 했습니다. 베네치아에서 다른 일행들과 합류하였습니다. 10일 동안 함께 걸었습니다. 숙소는 산장이었습니다. 아침은 간단하게 산장에서 먹고 걸었습니다. 점심은 길 위에서 주로 라면 밥을 먹었습니다. 저녁은 산장에서 샤워를 하고, 일행들과 여유 있게 먹었습니다. 산행 중에 두 부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선두에 서서 목적지를 향해 걷는 사람입니다. 늘 앞장서서 갔었고, 먼저 가니 쉬는 시간도 여유가 있었습니다. 길을 보고, 꽃을 보고, 하늘을 보고, 일행과 대화를 하면서 가는 사람입니다. 천천히 걷다보니 쉬는 시간도 여유가 없었습니다. 이분들에게 산장은 경유지이지 목적지가 아니었습니다. 이분들에게는 산행이 곧 목적지였습니다. 산장이 목적지인 사람은 빨리 걸어야 했고, 그러니 길은 경유지였습니다. 자세히 보지도 못했고, 여유도 없었습니다. 시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결국은 모두 산장에 도착하였습니다. 산행의 책임자는 여유 있게 걸어도 산장에 도착할 수 있도록 시간을 배정하였습니다.

 

저는 신학생 때 산악반이었습니다. 먼저 가서 텐트를 쳐야했고, 저녁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그러기에 산행은 여유가 없었고, 길은 그저 경유지였습니다. 돌로미테 산행에서도 저는 주로 앞장서서 갔습니다. 먼저 쉼터에 도착했고, 먼저 산장에 도착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여유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조금 늦더라도 들꽃의 향기도 느끼고, 흘러가는 구름도 보고, 늦게 오는 분의 손을 잡아 줄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일행 중에는 지친 사람의 짐을 대신 지고 가는 분이 있었습니다. 아픈 사람을 위해서는 산 아래까지 내려가서 약을 사오기도 했습니다. 저도 신발의 밑창이 떨어져서 새롭게 등산화를 사야했는데 그 형제님은 기꺼이 저와 함께 산 아래로 내려가 주었습니다. 산장에 자리가 부족해서 다른 산장으로 자리를 옮겨야 할 때도 형제님은 기꺼이 자원하였습니다. 그 형제님에게 산장은 목적지가 아니었습니다. 길이 목적지였고, 일행들과의 만남이 목적지였습니다. 걷다보면 산장은 나오기 마련입니다. 여유를 가지고, 이웃과 더불어 지내다보면 산장은 나오기 마련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산장을 향해서 앞만 보고 걷는 건 아닌지요?

 

이스라엘 백성은 강대국의 침략을 받았고, 정든 고향을 떠나 유배를 가야 했습니다. 무능한 왕을 욕하기도 했습니다.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성전이 없으니 예배를 드릴 수 없다고 한탄하였습니다. 시대를 탓하였고, 궁핍한 생활이 고단했습니다. 성전, 나라라는 목적지가 없으니 삶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앙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걸어가는 길은 좌절이고, 절망이고, 슬픔이고, 원망이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유배의 길은 성찰의 시간이었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하게 지키지 못했음을 반성했습니다. 이방인의 신을 섬겼음을 후회했습니다. 비록 시련의 길이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히 지킨다면 그 길에서도 하느님을 만날 수 있고, 그곳에서도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비록 몸은 유배의 길에서 고단하고, 불편하지만 마음은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원인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목적지가 정해져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은 과정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뉴욕에 있어도, 서울에 있어도 인생은 그 자체로 아름답습니다. 코로나19 이전의 삶이나, 코로나 19 이후의 삶이나 인생은 아름답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목적지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목적지는 나의 내면에 있다고 하십니다. 목적지는 원망하고, 비판하고, 좌절해서는 결코 다다를 수 없다고 하십니다. 겸손하게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는 사람은 이미 목적지에 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지적할 때는 손가락 하나를 앞으로 내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손가락은 나 자신을 향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기들을 이집트 임금 파라오의 손에서 빼내시어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주 저희 하느님께 죄를 짓고, 다른 신들을 경외하였기 때문이다. 하느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낸다.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회개와 성찰은 나 자신부터 먼저 시작되어야 합니다!

 -양승국신부-

 

형제들과 함께 이웃 본당 판공성사를 도와주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출발하기 전에 제가 형제들에게 그랬습니다. “오늘만큼은 날이 날인만큼 사제로서 패션에 신경들 좀 써주세요!”

 

그랬더니 형제들이 즉시 이구동성으로 반격을 하시더군요. “아니, 그런 말씀 하실만한 분이 그런 말씀하셔야지요. 신부님, 구두 좀 보세요! 하얗게 소금끼가 남아있는데, 또 구두 신고 바다 다녀 오셨군요. 그리고 바지 뒷쪽에도 흙이 잔뜩 묻어있는데요.” ㅋㅋㅋ 

 

저는 아무말 없이 조용히 차에 탈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일을 생각하니 오늘 복음 말씀이 어찌 그리 뼈저리게 다가오는지 모르겠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마태오 복음 7장 3~5절) 

 

참 인간이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가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며, 반성하고 진단하는 일입니다. 자신의 과오와 부족함에 대해 스스로 질책할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비판할 자격도 권리도 없습니다. 

 

이웃을 저울질 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의 현실과 상황을 세밀히 살펴보아야 마땅합니다. 회개와 성찰은 나 자신부터 먼저 시작되어야 합니다. 특히 날카로운 비판 전문가들은 이웃을 비판하기에 앞서 비판의 잣대를 자신에게 먼저 적용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웃의 결핍을 바라보고 필요한 조언을 건넬 때에는 다른 무엇에 앞서 사랑의 마음으로 해야 할것입니다. 또한 이웃에게 어떤 것을 요구하는 사람은 최소한 자기 자신에게도 동일한 것을 요구해야 마땅합니다. 사랑의 정신으로 이웃을 바라보는 사람은 적당한 순간과 장소를 가려 조언해 줄수 있을 것입니다. 가장 좋은 순간은 단둘이 있을 때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더불어 우리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우리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 합리화시키고, 정당화시키려고 기를 씁니다. 이런 사람을 두고 우리는 위선자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말과 행동이 달라도 너무 다른 위선자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도 치명적인 병을 지니고 있기에, 자기 한 목숨 살리기도 힘든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 진리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진리에 대해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참된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가장 먼저 갖추어야 할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내 결점에 대해서 먼저 인식하는 것입니다. 내 결점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했다면, 가르치기에 앞서 먼저 내 결점을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 

 

자질이 없는 지도자, 능력이 없는 지도자, 무엇보다도 교만한 지도자, 이기적인 지도자가 남을 가르치려든다면, 그것처럼 위험한 일이 다시 또 없습니다. 가르치는 사람이나, 가르침 받는 사람이나 둘 다 망하는 길입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 누구나 세상 앞에서 지도자입니다. 끊임없는 자기반성과 쇄신, 쉼 없는 자기개발과 자기 연마는 지도자인 우리에게 필수적인 노력입니다.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마태 7,5)

-이영근신부-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건너시는 말씀은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남을 심판하지 말라(마태 7,1)는 말씀이요, 또 하나는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마태 7,5)는 말씀이요, 그리고 세 번째 말씀은 더 강력하게 들려오는 말씀이나, 활자화 되어 있지 않는 말씀입니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루가 6,37) 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가 심판하는 데는 그것을 그렇게 심판하게 하는 기준이 되는 준거 틀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복음의 정신이 아니라, 곧 자비가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선입관이나 편견 등 고정관념이라면, 그것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티끌이 있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게 만드는 우리 눈의 들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마태 7,5)

 

그런데 우리 눈의 들보를 어떻게 빼낼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 눈에 빛을 밝혀드는 일입니다. 곧 우리 안에 심어진 사랑의 빛을 밝히는 것입니다. 어둠을 몰아내는 것은 그 어떤 인간적인 테라피나 테크닉으로부터 오기보다 본질적으로 빛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를 용서하는 그분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실현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내가 빛이 되어 상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빛이 나를 비추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빛으로 상대를 보는 것입니다. 곧 호의로 상대를 보는 것입니다. 그를 위하는 마음, 그가 잘 되기를 바라는 사랑의 마음(예수님 마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결국, 심판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단지 심판하지 않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선을 지향하여 행동하는 것에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말합니다.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야고 2,12-13)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심판하는 자들에게 경고하십니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마태 7,2)

 

 

이는 우리가 남에게 하는 것이 곧 자신에게 하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타인을 심판하는 것은 바로 자신을 심판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심판은 결국 자기 얼굴에 침 뱉기라는 말씀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병행구절인 <루가복음>에서는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루가 6,37)

 

바로 이 용서야말로 심판을 벗어나는 길인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게 하소서!

제 눈에서 보지 못하게 하는 들보를 빼내 주소서!

보지 못하고 있는 제 자신을 보게 하시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보게 하소서!

저를 보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마태 7,5)

 

 

주님!

눈을 뜨고도 자신을 보지 못하는 저는 눈먼 이입니다.

보지 못하면서, 보는 척 하지 말게 하소서!

보지 못하면서, 타인을 인도하지는 더더욱 말게 하소서!

제 눈에서 들보를 빼내주소서.

보는 것을 안다고 여기는 것이 제게는 들보이니.

제가 모른다는 것을 보게 하소서! 아멘.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7,1-5: 남을 심판하지 마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1-2) 남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 대해서 완전하게 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많은 경우에 보면 다른 사람을 잘 알기 때문에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선입견이나 보고 느끼는 대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에 결과적으로 잘못된 판단 때문에 인간관계 안에 장벽이 쌓이게 되고 사람까지 잃는 경우가 많다.

 

사도 바오로는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1코린 4,5)라고 했다. 우리는 그 행위가 어떤 의도에서 이루어지는지 모르기 때문에 성급히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심판이라는 것은 오직 하느님께만 있는 고유권한이다. 우리가 그 판단을 하려고 한다면 하느님의 권능을 침해하는 것이다.

 

형제의 눈에 있는 티, 네 눈에 있는 들보”(3-5)의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이런 행동을 하는 이들을 못마땅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위선자야”(5).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내야 한다는 판단은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인간을 깔보는 마음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가면을 쓰고 실제로는 가까운 이들을 흠잡고 비난하는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다. 이야말로 들보를 가진 모습이다.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5) 다른 사람의 작을 잘못까지 볼만큼 자기 자신에 관해서도 그렇게 보고 있는가? 먼저 자기 눈에서 들보를 빼내라고 하신다. 다른 이들과 관련된 문제는 그 다음에 바로 잡아도 된다. 인간은 자기 일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안다. 또 작은 잘못 보다는 큰 잘못을 더 쉽게 알아본다. 우리는 그 관심을 먼저 우리 자신에게 보여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보고 꾸짖거나 판단을 할 때는, 우선 그와 같은 잘못을 나 자신은 한 번도 저지른 적이 없는지, 또 나는 그런 잘못을 이겨냈는지 먼저 생각하여야 한다. 또한 그런 잘못이 없더라도 우리는 인간이므로 그런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가 그런 잘못을 저지른 적이 있고 지금은 완전히 끊었다면 자비의 마음으로 바로 잡고 훈계하도록 하자.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 하느냐?(마태 7, 3)

-한상우신부-

수 많은 판단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우리들 관계입니다.

판단은 소중한
마음과 마음을
만나지 못하게
합니다.

모두가 우리가
찾는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성찰과 
판단 사이에서
판단을 멈추는 것이
새로 태어나는
탄생의 삶입니다.

하늘 아래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다 부족하고
아픈 사람들입니다.

먼저 주님께
나의 들보를
내어 보이는 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이와같이
마음의 시력을
회복하듯
잃어버린 마음을 
되찾는 것이
믿음입니다.

먼저 제대로
보아야 할 사람은
언제나 바로 
우리자신입니다.

거짓과 착각
위선과 교만의
들보를 빼내어
심판이 아닌
마음의 성찰이길
기도드립니다.

나를 볼 수 있는
사람이 형제를
제대로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일러줍니다.

복음은 계속되는 예수님의 산상 설교 대목입니다. 설교의 대상은 "갈릴래아, 데카폴리스, 예루살렘, 유다 그리고 요르단 건너편에서 온 많은 군중"(마태 4,25)이지요.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마태 7,1).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마태 7,5)

누군가를 심판하거나 그의 허물을 지적하고 교정해 주려면 나름의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자의적 기준일 수도 있고 공동체적 기준일 수도 있지요. 그런데 자의적 기준은 상당히 위험합니다. 타인을 자기 취향이나 사고방식, 선호도에 따라 함부로 심판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어떤 이들은 법이나 판례, 관습 등 공동체적 기준에 기대어 자기 판단의 근거를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역시 상대를 진정으로 염려하는 마음에서가 아니면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자칫 공적 기준을 제 편의에 맞게 재단하고 편집해서 이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제1독서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몰락이라는 아픈 역사를 다룹니다.

"이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기들을 이집트 임금 파라오 손에서 빼내시어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주 저희 하느님께 죄를 짓고 다른 신들을 경외하였기 때문이다"(2열왕 17,7).

성경 저자는 이 비극적 멸망의 원인을 성찰하며 신학적으로 재해석합니다. 즉 하느님 백성의 몰락은 하느님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그분께 충실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등을 돌리고 업신여긴 탓으로 벌어진 일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파란 많은 자기네 역사를 끌어가면서 무엇보다 하느님과의 계약을 지키는 일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그래서 종교 지도층은 율법과 계명, 성전을 수호하는 일에 골몰하지요.

문제는 그러한 충성과 열정이 율법의 정신보다 형식에 더 집착하는 율법주의로 고착되어 버린 데서 발생합니다. 율법이 하느님을 더 열렬히 사랑하고 사람을 널리 사랑하는 동력으로 발휘되기보다, 하느님께는 적당히 예를 다하면서 사람을 구분하고 단죄하고 심판하는 도구가 되어버립니다. 율법 안에 깃든 하느님 사랑으로 충만해지기도 전에, 그 세세한 기준과 씨름하느라 예민하고 각박해질 뿐이었지요.

"심판하지 마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예수님은 오랜 세월 자기도 모르게 몸과 정신에 새겨진 잣대, 율법주의를 먼저 들어내라고, 그러다 보면 타인을 함부로 심판할 일은 없을 거라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율법은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사랑 때문에 지켜야 하는 하느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낸다"(복음 환호송).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뜻과 그분 말씀을 사랑이라는 잣대로 받아들이길 바라십니다. 사랑으로 품고 사랑으로 발휘되지 않는 말씀은 우리 생각과 속셈을 꿰뚫어 보시는 그분께 모욕이 됩니다.

사랑이 없으면 심판도 단죄도 지적도 교정도 멈추는 게 맞습니다. 내 안에 사랑이 차올라 그가 나인듯 보일 때까지, 그가 예수님인 듯 보일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낫습니다. 심판하지 않는 이 앞에서는 주님도 심판을 주저하십니다. 그에게는 이미 심판꺼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오직 하나인 심판이 사랑의 심판이듯 우리의 심판도 그러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이웃과 세상을 바라보는 벗님의 눈이 사랑이면 참 좋겠습니다. 그러려고 애쓰는 벗님을 칭찬하고 응원합니다.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63246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6년 6월 20일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