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 12일 연중 제10주간 금요일
2020년 6월 12일 연중 제10주간 금요일
오른 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눈을 빼어 던져 버려라.
몸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
(마태오 5,27-32)
If your right eye causes you to sin,
tear it out and throw it away.
It is better for you to lose one of your members
than to have your whole body thrown into Gehenna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한재호신부-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를 위축시키는 듯합니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 이성을 보며 성적인 매력을 느끼는 것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오늘날은 이런 생각이 극단적으로 치우쳐서 문제이기는 하지만, 이성에게 끌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그렇게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말씀은 애당초 이런 인간의 기본적인 성욕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서는 지킬 수 없는 것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핵심은 “음욕을 품고”라는 표현입니다. 또한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음욕이 아니라 ‘사랑’을 품고 이성을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음욕을 품고 바라보는 것은 그 사람의 외적인 매력에만 시선을 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품고 바라보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에 담겨 있는 고민, 어려움, 슬픔, 아픔, 어둠에도 시선을 두는 것입니다. 음욕을 품고 바라보는 것은 그 사람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사랑을 품고 바라보는 것은 그 사람이 더욱 그 사람답게 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음욕을 품고 바라보는 것은 그 사람의 일부만을 받아들이는 태도이지만, 사랑을 품고 바라보는 것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음욕을 품고 누군가를 바라본다면 그 사람을 온전히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품고 바라보면 그를 향한 음욕이 그의 삶을 무너지게 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기도에 관한 가르침 가운데 ‘관상 기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떠한 생각에도 치우치지 않고 그저 하느님만을 직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웃들을 관상합시다. 사랑의 눈길로 그 사람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바라봅시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신부가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너무 바쁘고 피곤하다는 생각으로 가득했었습니다. 강론 준비, 고해성사와 미사, 면담, 여기에 오후에는 가정방문까지 바쁜 일정을 치러야 했습니다. ‘신부가 이렇게 바쁜 거구나.’라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병원에 병자성사를 주러 갔습니다. 병실에 힘들게 누워 있는 분에게 병자성사를 드리고 나오는데, 문득 ‘나도 병원에 입원했으면 좋겠다. 그냥 누워서 책 읽고 글도 쓰면서 푹 쉴 수 있을 텐데….’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몇 년 뒤, 저는 실제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허리가 아파서 입원했지요. 화장실 가기도 힘들 정도로 허리의 통증이 대단했습니다. 그냥 누워만 있어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입원해서는 저는 무엇을 했을까요? 몇 년 전에 생각했던 대로 종일 누워서 기쁜 마음으로 책을 읽고 글을 썼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그냥 누워서 '자다 깨다'를 반복할 뿐이었습니다. 동창 신부가 책을 가져다주었지만, 일주일 동안 입원해 있으면서 100페이지도 읽지 못했습니다. 두통까지 밀려왔기 때문입니다.
입원한 환자들이 무엇을 하는지 관찰해보십시오. 자신에게 도움이 될 생산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통을 몸으로 이겨내기에도 벅차기 때문입니다.
다른 삶이 행복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어쩌면 특별한 일 없는 아주 평범한 지금의 삶이 가장 행복하고 또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시간은 아닐까요? 그러므로 아주 평범한 일상을 소중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이 된다.’라는 말도 있듯이, 아주 작은 죄의 씨앗도 뿌리 뽑아야 더욱더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간음해서는 안 되다’라는 말씀을 설명해 주십니다. 단순히 남녀 간의 부정한 관계만을 지적하지 않으십니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것 역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 된다고 하십니다. 또한, 불륜을 저지른 경우를 제외하고 자기 아내를 버리는 것과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자 역시 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죄의 시작이 될 수 있는 아주 작은 것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요? ‘이 정도면 괜찮겠지’라는 안일한 마음, ‘남들도 다 그렇게 하는데’라는 남에게 책임을 지우는 마음, ‘아무도 모를 거야’라는 숨기는 마음 등이 주님에게서 멀어지게 합니다.
우리 삶의 평범한 일상 안에서부터 자기 자신을 바로 세울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작은 것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결코 주님의 뜻을 제대로 실천할 수 없으며,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에서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사건 때문이 아니라,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에픽테투스).
책을 읽으세요.
어느 청년과의 대화 내용입니다.
“신부님처럼 글을 쓰고 싶지만, 제게는 그런 재주가 없어요.”
“책을 읽으세요.”
“삶이 무의미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책을 읽으세요.”
“꿈이 없어요.”
“책을 읽으세요.”
책을 읽으면서 새로운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내 생각의 지평을 넓혀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내 생각을 글로 적게 되고, 나의 꿈도 만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를 깨닫게 됩니다.
책 읽을 시간이 없다고 말씀을 많이 하십니다. 그러나 한 페이지만이라도 읽겠다는 다짐으로 실천하다 보면, 한 페이지가 열 페이지, 백 페이지, 그리고 한 권을 금세 읽게 됩니다.
변화를 원한다면 책부터 읽어야 합니다. 분명히 어느 순간에 커다란 변화가 내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욕구가 커지면 삶의 의욕이 줄어든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율법이나 예언서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신 말씀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요즘 가톨릭 콘텐츠 등에서 성욕과 같은 인간의 욕망을 너무 누를 필요가 없고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하는 것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심지어 성욕도 하나의 좋은 에너지이기 때문에 그 에너지를 좋은 방향으로 사용하면 오히려 많은 성과를 내게 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만약 성욕이 좋은 에너지이면 좋은 일을 많이 하기 위해 성욕을 계속 증가시켜야 할까요? 이런 모든 것들은 잘못된 세속적 학문에서 비롯된 생각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성적인 욕구 자체가 이미 죄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율법인데 왜 세속적인 기준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바꿔가며 성욕을 좋은 것처럼 포장할까요? 이는 자신들 안에 있는 성욕을 합당한 것으로 여기기 위해 그런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이탈리아에서 유학하던 중 방학 때마다 한 본당에 실습을 나간 적이 있습니다. 그 본당은 5백 년의 역사를 가진 그 동네 성당이었습니다. 신자는 5천 명 정도가 되지만 주일미사는 3백여 명 나오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성당에 오래되어 보수할 것이 많았지만 본당 신부는 돈이 없다며 한탄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동네에는 수도회 성당도 하나가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신자 대부분이 본당에 오지 않고 그 수도회 성당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본당의 천정은 갈라지고 있었지만, 수도회 성당의 천장은 금칠이 되어있었습니다. 먼진 성가대와 전례가 가난한 본당의 전례와 비교되었습니다.
이탈리아는 명실상부 가톨릭국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주일미사 참례자는 10%도 안 됩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동네마다 본당과 수도회 성당들이 마치 경쟁을 하듯 산재하기 때문입니다. 본당 주임 신부는 성당에 나오지 않으면 신자들이 수도회 성당에 가겠거니 생각합니다. 그러나 수도회 성당에서는 신자들의 교적이 없어서 그들을 관리해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양들이 목자 없이 붕 떠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나라처럼 판공표를 나누어주어 신앙생활을 관리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성욕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요? 성욕은 우리 안에서 좋은 역할을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삶의 에너지를 빼앗는 적입니다. 한 목자가 신자들의 책임을 맡는 것이 좋습니다. 수도자는 수도하는 목적으로 사는 것이 정상이지 본당의 에너지를 빼앗아가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마치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신자들을 책임지지 않습니다. 본당에서 수녀님들이 사제가 잘못한다고 신자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든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수녀님은 과연 잘하는 것일까요? 겉으로 보기에는 신자들을 위하는 것 같지만 교회의 에너지를 분산시켜 결국, 본당공동체는 와해하고 맙니다.
성욕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서 마치 좋은 역할을 하는 것처럼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꼭 필요한데 사용되어야 할 에너지를 갉아먹어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성욕이 강한 부부가 좋은 부부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성모님과 요셉 성인처럼 동정으로 산 부부들은 안 좋은 부부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동정 부부로 산 이들이 더 서로를 위하며 살 수도 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부모님이 집에 안 계신다는 것을 알고 야한 비디오를 보려고 일부러 아프다고 하고 조퇴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공부에 의욕을 불태울 때여야 합니다. 성욕은 이렇듯 꼭 필요한 좋은 에너지를 빼앗습니다. 성욕이 강한 사춘기 아이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삶에 어떠한 건전한 의욕도 없습니다. 삶의 의욕은 육체의 욕망이 줄어들 때 생깁니다. 성욕이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선물은 그 성욕을 사라지게 만드는 성령입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우리 욕구들을 불살라 에너지가 오직 사랑에만 쓰일 수 있게 하십니다. 삶이 활력이 넘치게 하려면 성령으로 육체의 욕구를 줄여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눈이 성욕을 증가시키는 데 사용되었다면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인간의 생각으로 절대 변형시켜서는 안 됩니다.

-조재형신부-
사이먼과 가펑클의 노래 중에 ‘Sound of silence’가 있습니다. 선율이 부드럽고, 가사는 철학적입니다. 오늘은 그 가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어둠이여 안녕, 내 오랜 친구 너와 다시 얘기하러 왔어. 환상이 부드럽게 꿈틀대고, 자는 동안 그것의 씨가 남겨졌으니까. 그 환상은 내 머리에 심어졌고 아직 남아있지 ‘침묵의 소리’에서. 잠들지 못하는 꿈에서 난 혼자 걸었어. 좁은 자갈길을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춥고 축축한 기운에 옷깃을 세웠어. 내 눈이 찔렸을 때 밤을 흩뜨린 네온사인 빛에 ‘침묵의 소리’를 어루만졌어. 헐벗은 빛 속에서 난 봤어 만 명의 사람들, 아마 더 많았을지도. 사람들이 말없이 대화하고 사람들은 귀담아 듣지 않고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없는 노래를 쓰고 그리고 아무도 감히 '침묵의 소리'를 방해하지 못해. ‘바보들’ 나는 말했어. 너희는 알지 못해 침묵은 암처럼 자라고 있어. 내 말을 들어봐 가르쳐줄지 몰라. 내 팔을 잡아 내가 닿게 해줄지 몰라. 하지만 나의 말은 조용히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침묵의 우물 속에서 메아리 쳤어.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고 기도를 했어 그들이 만든 네온의 신에게, 표징은 가르침을 번쩍였어. 만들어낸 말 속에서 표징은 말했어. 예언의 말은 지하도 벽 위에 쓰여 있노라. 집안의 홀에도 그리고 '침묵의 소리'에서 속삭였노라." 시간이 되시면 음악을 들어보면 좋겠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엘리야는 하느님을 체험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크고 강한 바람 속에 계시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불길 속에 계시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지진 가운데 계시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침묵 속에 계셨다고 합니다. 엘리야가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 독서를 묵상하면서 예전에 있었던 일이 떠오릅니다. 성모 성월에 구역장과 반장을 위한 교육이 있었습니다. 일찍 도착해서 봉사자들을 만났습니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서 어디에 있을까 생각하던 중에 성당 앞 불가마 사우나가 보였습니다. 사우나에 들어가서 조금 있는데 방송으로 제 이름을 불렀습니다. 무척 놀랐고, 당황했습니다. 제가 사우나에 있는 걸 알 사람도 없고, 그렇다고 방송으로 부를 이유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밖으로 나가니 봉사자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먼저 강의를 하기로 한 신부님이 접촉사고가 나서 조금 늦어진다고 연락했다고 합니다. 봉사자는 제가 먼저 왔기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저를 찾았다고 합니다. 저는 성모상 앞에도 없었고, 성당에도 없었고, 사제관에도 없었다고 합니다. 혹시 해서 사우나에 들려서 저를 찾았다고 합니다. 제가 잘못한 것은 아니지만, 저는 자매님이 기대한 곳에 없었다는 것이 조금 미안했던 기억입니다. 그 뒤로는 조금 일직 도착하면 성당에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카인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네 동생 아벨은 어디 있느냐?’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의 몸이 있는 곳에 여러분의 마음도 있습니다.’ 교황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더러워지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사제들은 거리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가톨릭 성가 199번은 ‘예수마음’입니다.
“예수 마음 겸손하신 자여 내 마음을 내 마음을 열절케하사 네 성심과 네 성심과 같게 하소서. 예수 마음 겸손하신 자여 내 마음을 내 마음을 잡아 당기사 내 성심에 네 성심에 결합하소서. 예수 마음 겸손하신 자여 내 마음을 내 마음을 차지하시어 네 성심에 네 성심에 보존하소서. 예수 마음 겸손하신 자여 내 마음을 내 마음을 변화케하사 네 성심과 네 성심과 바꿔 주소서.”
우리들이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 된다면, 우리들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과 결합된다면, 우리들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호된다면, 우리들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꿔진다면 우리들 역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겸손함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또 다른 엘리야 예언자를 더 많이 필요로 합니다!
-양승국신부-
이름만 들어도 경외심과 존경심이 저절로 우러나오는 예언자가 있으니 엘리야 예언자입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BC 9세기경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하던 대예언자였습니다. 엘리야라는 이름이 지닌 의미는 ‘나의 하느님은 주님이시다.’입니다.
엘리야 예언자의 성격은 활활 타오르는 불과도 같았습니다. 그는 불처럼 일어섰고, 그의 말은 횃불처럼 타올랐습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하늘을 닫아버리고 세 번씩이나 불을 내려 보냈습니다.(집회서 48장 1~3절)
엘리야 예언자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서 설설 기던 절대 권력자 임금 앞에서도, 난다긴다 하던 고관대작들 앞에서도 조금도 주눅들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전하라는 말씀을 조금의 가감도 없이 전했고, 철퇴같은 불호령을 서슴치않았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계약을 재건했습니다. 또한 그는 “율법에 대한 불타는 열성 덕분에 하늘로 들려 올라갔습니다.”(1 마카베오 2장 58절) “그는 불 소용돌이 속에서 불 마차에 태워 들어 올려졌습니다.”(집회서 48장 9절)
엘리야 예언자는 예전에 모세가 하느님의 뒷모습을 보았던 바로 그 장소에서 하느님을 목격하는 영예를 얻었습니다. 그는 모세와 같은 역할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룩하게 인도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오늘 첫번째 독서를 통해 우리는 엘리야 예언자가 얼마나 하느님께 충실한 사람이었는지를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는 주 만군의 하느님을 위하여 열정을 다해 일해 왔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당신의 계약을 저버리고 당신의 제단을 헐었을 뿐 아니라, 당신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 죽였습니다. 이제 저 혼자 남았는데, 저들은 제 목숨마저 없애려고 저를 찾고 있습니다.”(1 열왕기 19장 14절)
북왕국의 아합 임금은 페니키아 공주이자 시돈 임금의 딸 이제벨과 정략 결혼을 하고 이제벨의 종교인 가나안의 종교를 장려했습니다. 이제벨은 상아궁에서 하느님을 모독하는 계획들만을 궁리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제벨은 바알 신전에서 바알 예언자들 수백명을 먹여 살리고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현세적 번영과 풍요를 보증하는 가나안 신들과 정의와 검소한 생활을 요구하는 하느님 사이에서 가나안 신들 쪽에 훨씬 큰 매력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마치 천둥처럼, 벼락처럼 등장한 인물이 있었으니, 시골 출신의 기인(奇人), 길르앗의 엘리야 예언자였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 하느님을 저버리고 가나안의 바알을 섬기는 모습을 목격하자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분노와 격정을 느꼈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카르멜 산에서 하느님의 신비로운 도움에 힘입어 우상 숭배에 푹 빠져 살아가는 그들을 물리쳤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존엄성과 권리가 침해받을 때 마다 불꽃처럼 일어섰습니다. 날카로운 비난을 퍼부으며 강력히 도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엘리야 예언자는 언제나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 편에 서서 사회 정의를 위해 싸웠습니다. 그는 비옥한 땅을 강탈하기 위해 나봇을 살해한 아합 임금을 통렬히 비난했습니다.
엘리야 예언자의 역할을 더욱 완벽하게 재현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공생활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부여받은 사명을 엘리야의 사명과 연관시킵니다. 나인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기적은 사렙타에서 일어난 엘리야의 기적을 상기시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하느님을 욕되게 하는 사람들에게 보복의 불을 하늘로부터 내렸지만,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으로 불타게 하는 성령의 새로운 불을 가져오셨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또 다른 엘리야 예언자를 더 많이 필요로 합니다. 불꽃같이 자신의 삶을 활활 타오르게 하는 멋진 예언자, 거짓과 불의 앞에 참지 못하고 거룩한 분노를 터트리는 예언자, 아무리 강력한 힘을 지닌 사람 앞이라 할지라도 부패한 권력 앞에서는 할말 제대로 하는 예언자를 더 많이 필요로 합니다.

네 오른 손이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마태 5,29)
-이영근신부-
오늘은 여섯 개의 대당명제 중 둘째와 셋째 “새로운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곧 간음과 이혼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음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음욕을 품기만 하고 행동으로 실행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음욕을 품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 눈이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이혼이 불륜을 불러오는 뿌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간음과 불륜의 뿌리를 잘라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 야고보는 <서간>에서 말합니다.
“욕망은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다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야고 1,15)
그러기에, 응징 받아야 할 대상은 육신의 지체 자체가 아니라, 의지와 의지를 부추기는 자발적인 욕구입니다. 그러니 죄의 뿌리를 뽑는 데는 옛 율법의 계명만으로는 막을 수가 없고, 죄를 짓게 하는 내면의 지체를 잘라내는 일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또 네 오른 손이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마태 5,29)
이를 문자적으로 알아들으면, 아주 무서운 말씀입니다. 자칫하다가 우리 몸이 하나도 성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실, 이는 자신의 지체를 잘라버리라는 말씀이 아니라, 죄를 뿌리에서부터 잘라내라는 강력한 말씀입니다. 죄를 불러오는 마음의 눈과 손을 잘라버리라는 말씀입니다. 곧 내면의 눈을 뽑아내고, 손을 잘라내는 일입니다. 눈은 죄를 불러오는 통로요, 손을 죄를 행하는 도구의 표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다.”(마태 6,22)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
그러니, 바오로 사도가 말한 대로, “자신의 몸을 단련하어 복종”(1코린 9,27)시켜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나쁜 욕망들을 죽이는 것’(콜로 3,5)입니다. 그 길은 나쁜 욕망들을 “그리스도의 바위로 치는 것”(1코린 10,4)입니다. 곧 눈을 돌리는 것입니다. 바라보는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나쁜 욕망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빛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빛으로 밝아질 것입니다. 이를 우리는 회개라고 합니다. 마음의 전향입니다.
그렇습니다. 나쁜 생각을 바라보면서 나쁜 생각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 아니라, 빛을 바라볼 때 어둠은 물러가게 됩니다. 어둠이 빛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빛이 빛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어둠을 들여다보면서 어둠속에서 빛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 어둠을 비추어주고 있는 빛을 바라보면서 빛으로 나아가는 투쟁의 길입니다. 그러니 영적 투쟁은 어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빛을 바라보면서 빛의 조명으로 일치의 길을 갑니다. 이를 위 디오니시우스는 조명과 정화와 일치의 영성원리로 말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를 바라보며, 그분으로부터 부터 영적 음료를 마시며, ‘의로움의 길’을 갑니다. 그렇습니다. 빛이신 주님의 인도와 자비로 이 길을 갑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은 것이 낫다.”(마태 5,29)
주님!
겉으로 가려진 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제 마음속을 들여다봅니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듯”(마태 6,22), 마음의 눈이 맑게 하소서!
마음속 떠도는 그릇된 생각들을 잘라버리고, 마음속 깊게 새겨진 사랑의 법을 보게 하소서!
제 마음 항상 당신을 향하게 하시고, 제 행실이 당신의 빛을 받아 밝게 빛나게 하소서! 아멘.

끝까지 사랑하라
-반영억신부-
여자는 결혼할 때까지만 미래에 대해 걱정하고, 남자는 전혀 걱정 없이 살다가 결혼하고 나서 걱정이 생긴다.’는 우스갯소리를 합니다. 자기가 베푼 만큼 상대가 해주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이 생깁니다. 상대를 통해서 덕을 보기 위해서 결혼을 하는 것이 아닐진대 살다보면 그렇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결국 사랑한다고 혼인을 하고서도 서로 성격이 맞지 않는다며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사랑으로 엮어진 혼인계약을 일생 동안 지키는 것이 쉽지 않은 시대입니다. 부부가 일심동체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동상이몽이 더 많게 느껴집니다. 희생이 없는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마음의 관심을 서로 다른 곳에 두면서 화목하고 행복하기란 불가능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혼하지 말라’고 강력히 말씀하십니다. 더욱이 마음으로 간음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잘못에서 벗어나기를 강조하시며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네 오른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버려라”하고 단호한 결단을 촉구하셨습니다. 더 사랑해야 할 것은 덜 사랑하고, 덜 사랑해도 될 것을 더 사랑한다면 사랑의 질서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결혼한 사람이 배우자에게 마음을 두어야지 다른 사람에게서 매력을 느끼고 기대한다면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마음속이 지옥이면 멀쩡하게 잘 살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마음이 중요합니다. 죄는 단호하게 거절해야 합니다.
이혼은 갑자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고 또 참다가 더 이상 안 되겠다고 결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빌미를 줄 수 있는 마음단속을 미리 잘해야 합니다. 원인제공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동상이몽’이라는 말은 두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두 마음을 품는 것이 이혼의 전조입니다. 한결같은 사랑의 마음이 지켜지길 희망합니다.
이혼을 금지하는 것은 결국 가정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가정을 지켜 자녀의 출산과 교육을 통해 후손을 이어가야 합니다. 사실 후손의 번성은 하느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이들이 이기적인 마음으로 쉽게 이혼을 생각함으로써 자신은 물론 가정이 불행해지고 자녀 또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제발, 이혼하자는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헤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서로의 신뢰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신뢰가 깊어지기 위해서는 마음을 주고받는 대화를 자주 해야 합니다. ‘구지 말을 해야 알아듣느냐?’하는 분도 있지만‘사랑한다, 고맙다, 미안하다, 힘내라, 수고했다’는 등 상대방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말을 자주 해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읽힙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고와 땀 없이 좋은 열매를 얻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화목한 가정을 이룬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화목한 가정을 원하는 만큼 서로의 노력과 희생이 필요합니다.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사람이 만남을 통해 부족함을 채워주고 좋은 점을 키워가며 닮아가고 만들어 가는 것이지 모두가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은 기대 때문에 실망하고 좌절하며 불행을 자초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혼은 서두르지 말 것이며 충분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또한 부모도 삶의 경륜 안에서 얻어진 가르침을 자녀에게 잘 전해주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일생을 함께 살아가야 할 배우자를 선택하면서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성격이나, 경제적인 능력도 중요하지만 하느님 안에서 사는 사람인가? 허물과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채워줄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가를 봤으면 합니다. 준비가 소홀하면 그만큼 힘겨워합니다. 그러므로 준비된 희생을 감당하는 사랑으로 행복한 가정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서로에게 덕을 보려고 하지 말고 서로에게 복이 되어주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극기하여라.
-송영진신부-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마태 5,27-28).”
이 말씀은, ‘잘못된 생각’도 죄라는 가르침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행위에 대해서만 죄인가, 아닌가를 따지고,
‘생각으로 짓는 죄’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무시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예수님께서는 ‘생각으로 짓는 죄’도 분명히 죄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숨은 일도 보시는 분”입니다(마태 6,4).
숨은 일도 보신다는 말은, 사람의 마음과 생각도 보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마음이 깨끗한’(마태 5,8)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만일에 눈에 보이는 행실은 깨끗하지만, 보이지 않는 마음은 깨끗하지 않다면,
그것은 ‘위선’입니다.
또 숨은 일도 보신다는 말은,
보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때에도 하느님께서는 보고 계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람들 모르게 은밀하게 한 일들도
하느님께서는 다 보고 계시고, 다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회개를 할 때,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행위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자신의 마음과 생각에 대해서도 회개를 해야 합니다.
또 고해성사를 볼 때에도 말과 행동으로 지은 죄뿐만 아니라
‘생각으로 지은 죄’도 고백해야 합니다.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또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마태 5,29-30).”
이 말씀은, 실제로 눈을 빼어 던져 버리고 손을 잘라 던져 버리라는 뜻이 아니라,
죄짓게 만드는 어떤 유혹이 다가오면 눈을 빼어 던지는 것과 같은 심정으로,
또는 손을 잘라 던지는 것과 같은 심정으로
그 유혹을 단호하게 물리치라는 가르침입니다.
좋은 예가 예수님과 베드로 사도 사이에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1-23)”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려는 것을 막았습니다.
물론 베드로 사도가 어떤 사심이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주님이 수난을 당하시려는 것이 너무 걱정되어서 그런 것이지만,
그래도 그것은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 것입니다.
즉 베드로 사도는 인류를 구원하는 ‘하느님의 일’을 가로막은
걸림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라고
단호하고 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당신의 오른팔을 잘라버리는 것과 같은 심정으로 하신 말씀이고,
걸림돌을 바로 치워버리기 위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밖에서’ 오는 유혹이 아닌, ‘마음속에서’ 생기는 유혹과 갈등은
어떻게 해야 하나? ‘마음’을 어떻게 잘라버릴 수 있는가?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 9,29).” 라는 예수님 말씀이 답입니다.
원래 이 말씀은 마귀를 쫓아내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이지만,
유혹을 물리치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밖에서 오는 유혹이든지 마음속에서 생기는 유혹이든지 간에
모든 유혹에는 마귀의 힘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직접 유혹을 할 때도 있고, 간접적으로 유혹을 할 때도 있습니다.
‘기도’는 마귀를 물리치는 방법이기도 하고 유혹을 극복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 예수님의 말씀은, 기도가 ‘유일한’ 방법이라는 뜻인데,
유일한 방법일 뿐만 아니라 강력한 방법입니다.
만일에 유혹을 물리치려고 신체 일부를 잘라내면서도 기도는 하지 않는다면?
어쩌면 그런 어리석은 행동도 마귀가 바라는 대로 하는 행동일 수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도 마귀가 바라는 것입니다.>
마음속에서 생기는 유혹과 갈등에 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실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 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로마 7,18-20).”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 7,22-25).”
자신의 의지만으로 마음을 다스리려고 하면 성공하지 못하고,
더욱 비참해질 뿐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는 말을
한 것은, 마음속의 갈등과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기도드리는 것뿐임을 나타냅니다.
신체의 일부를 잘라 버리는 것과 같은 심정으로 단호하고 철저하게 극기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생활입니다.
사랑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바치는 것은,
사랑을 방해하는 걸림돌은 모두 제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신체의 일부를 잘라 버리라는 예수님 말씀은
당신을 따르는 방법에 관한 말씀과 뜻이 같은 말씀이 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걸림돌을 모두 제거하는 것은 바로 자신을 버리는 것이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5,27-32: 악의 유혹을 끊어버려라
분노는 살인의 어미이듯이, 욕정은 불륜의 어미이다. 형제에게 이유 없이 성내는 사람은 실제로 그를 죽이지는 않았을지라도 마음은 그를 죽이고 있다. 뜻을 중요하게 보시는 하느님 보시기에 그것은 살인이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28절) 가음을 저질렀다고 하신다. 행위보다 의지를 보시는 하느님 앞에서는 간음이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이유 없이 이웃에게 성내는 일을 죄로 여기지 않는다. 또한, 여자를 음욕을 품고 바라보는 것도 그것을 행동으로만 옮기지 않으면 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자신의 의지를 존중하는 사람은 그것을 큰 죄로 여긴다. 그것은 사람의 행동 뿐 아니라 마음도 보시는 하느님 앞에서 큰 죄이기 때문이다. 그 욕구를 잘라버려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짓게 하는 지체가 있으면 뽑아 버리고 잘라버리라고 하신다(29-30절). 이 말씀은 옳지 못한 사랑이나 우정이 잘못을 저지르게 되면 그것을 잘라 버리라는 말씀이다. 눈 하나나 발과 같은 지체가 옳지 못한 사랑 때문에 지옥과 협력하는 관계로 이끄는 길이 된다면, 차라리 그 지체가 없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마음도 잘라 버릴 수 있다면, 마음이라는 지체도 잘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체를 잃더라도 몸을 구하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우리의 지체 일부를 없애버리라는 말씀이 아니라, 온갖 악의 근원이나, 죄를 짓도록 하는 그 원인을 뿌리째 뽑아 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것들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단절시켜, 영원한 불행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하는 것을 모두 거부하는 삶이 중요하다. 그래서 범죄케 하는 것들을 과감히 끊어버릴 수 있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혼장을 써주는 일에 대해서는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므로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은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마태 19,8)라고 말씀하시며 이혼장을 폐지하시고 당신이 처음에 세우신 법을 되살리신다. 당신이 세우신 혼인법은 풀 수 없는 법으로 순결한 혼인 관계를 지키라고 하신다.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 19,6).
그리고 오늘 복음에 한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 있다. 예수께서는 이혼을 금하시면서 또한 “불륜을 저지른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는 자는 누구나 그 여자가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다.”(32절) 라고 하신다. 여기서 “불륜을 저지른 경우”라고 하는 것은 부부간의 신뢰를 저버렸다는 의미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서에서 음행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이신 하느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행위를 말한다. 다른 신을 섬기거나,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을 하는 것을 금하게 되었고, 그럴 때 관면을 주어 혼인을 유효하게 만드는 것이다. 관면을 받지 않고 결혼을 하게 되면 그것도 간음하는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마태 5, 28)
-한상우신부-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사람의 길은
갈리움 없는
마음의 길입니다.
하나뿐인 마음을
먼저 하느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맞바꿀 수 없는
마음의 순결입니다.
서로의 마음을
지켜주어야 할
소중한 관계입니다.
사랑의 관계는
이와같이
가질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
나누고 존중하는
마음의 관계입니다.
버려지는 마음이
아니라 나날이
성장해가는
마음입니다.
우리 삶의
안과 밖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마음에 있는 것이
밖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우리자신마저
속이는 마음을
믿음으로 바로잡는
것입니다.
건강한 마음을
구하는 예수 성심
성월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마음에서 시작되는
마음의 관계입니다.
마음이 시작되는
곳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두 개의 주제로 다가옵니다.
먼저 인간 사이의 사랑 에너지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음욕을 품고 ...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 간음한 것이다"(마태 5,28).
성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공동체를 이루어 사랑으로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며 자손을 낳아 하느님 창조를 이어가는 매우 소중한 에너지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간음해서는 안 된다"는 율법 규정을 외적으로만 지키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하십니다. 적극적으로 타인의 성적 결정권을 침해하지 않았다고 해서 모두 주님 앞에서 결백한 건 아니라고요.
인간은 그토록 소중하고 아름다운 성 에너지를 사랑으로 승화할 수도 있고 음욕으로 악용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이 둘의 차이를 보여주십니다.
"크고 강한 바람, 지진, 불"(1열왕 19,11-12).
호렙 산 동굴 속으로 몸을 피한 엘리야에게 주님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런데 산을 할퀴고 바위를 부수는 바람이나 땅을 뒤흔드는 지진, 모든 걸 삼켜버리는 불이 한바탕 호렙 산을 뒤흔들어도 엘리야는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주님은 격정 속에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기적 쾌락과 순간의 만족을 탐하는 격정에 존중과 책임이 결여되면 거칠고 파괴적이 됩니다. 그 힘은 싹을 꺽고 꿈을 짓밟고 생명을 해칠 뿐 타인에게 성장도 위로도 되지 못합니다.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1열왕 19,12).
주님은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로 다가오십니다. 사랑입니다. 내 것을 주장하지 않고 상대를 억압하거나 조종하지 않는, 나지막한 위로의 속삭임입니다. 어쩔 땐 현존조차 가늠할 수 없이 고요히 위무하고 사라지는 여리고 다정하고 순수한 손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눈과 우리의 마음이 타인에게 이렇게 향하기를 바라십니다. 격정과 음욕을 걷어내고 하느님의 눈과 하느님의 마음의 시선으로 이웃을 바라볼 때 우리 부족한 사랑도 그분 사랑에 포개어집니다.
두 번째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입니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는 자는 누구나 그 여자가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다"(마태 5,32).
예수님은 모세가 허용한 이혼장이 사회적 약자인 여성과 그 자녀들을 얼마나 심각한 궁지로 몰아넣는지 아시기에 이혼 사유를 불륜으로 제한하십니다. 그만큼 불륜은 사회적 윤리적 질서를 해치는 악이니 그렇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불륜은 하느님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배반을 칭하는 언어지요.
"이스라엘 자손들은 당신의 계약을 저버리고 당신의 제단을 헐었을 뿐 아니라 당신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 죽였습니다"(1열왕 19,14).
엘리야가 하느님께 고발하는 이스라엘의 행태가 곧 불륜입니다. 신랑이신 하느님에게서 마음이 떠나 하느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이민족의 우상을 기웃거리며 돈과 쾌락과 자기 안위에 열광하는 격정이지요. 하느님을 향하던 사랑이 방향을 잃으면 애욕과 욕정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이 그런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당신 자애를 거두지 않으신다는 것을 압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두고 불륜을 저지를지언정, 하느님은 불륜을 모르는 성실한 신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상대가 불륜을 저지르지 않았으면 사랑을 거두지 말라고 이르시지만, 사실 하느님은 불륜의 경우에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이시지요. 그 증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랑하는 벗님! 예수님의 단호하고 강한 어조의 말씀 안에서 사랑을 배웁시다. 우리 안의 무질서하고 정화되지 않은 격정에서 무엇을 빼어 던져버려야, 무엇을 잘라 던져 버려야 지고지순하고 충실한 하느님 사랑을 닮을 수 있는지 돌아봅시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게 되기까지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계속될 것입니다. 사랑 안에서 사랑을 배우는 하루 되시길 축원합니다.

하느님 체험
-김찬선신부-
오늘 열왕기의 얘기는 예언자 엘리야가 하느님을 체험하는 얘기입니다.
예언자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어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니
하느님 체험 없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고,
그러니만큼 예언자에게 있어서 하느님 체험은 너무도 중요한 것이지요.
제가 저를 봐도 제가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가 되지 못함은,
예를 들어 독재 정권에 대항하여 용감히 하느님 말씀을 전하지 못하거나
그렇게 거창하지 않고 공동체 안에서 작은 예언의 소리 곧,
그래서는 안 된다는 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은 제가 용감하지 않고
두려움이 많아서가 아니라 지금 내가 하느님 체험 부재중이기 때문이지요.
다시 말해서 인간적인 약함에서 그 원인을 찾을 것이 아니라
하느님 체험 부재라는 신앙적인 차원에서 찾아야 하겠지요.
사실 인간적으로 용기 있는 사람은 인간적으로 바른 소리를 할 수는
있겠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잘 드러나는 것이 엘리야 얘기입니다.
엘리야는 구약에서 모세와 함께 가장 위대한 예언자이고 그래서
타볼산의 주님 변모 때 주님께서는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얘기 나누셨지요.
이렇게 위대한 엘리야, 갈멜산에서 거짓 예언자 450명과 대결하여 물리쳤던
그 대단한 엘리야지만 이제벨이 그를 죽이려고 들자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은 팽개치고 호렙산으로 도망쳐 동굴에 숨지요.
이런 그에게 하느님께서는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고 하십니다.
다시 하느님을 만나는 체험이 그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안간힘을 쓰며 동굴에서 나와 주님 앞에 섰지만
하느님은 즉시 엘리야를 만나주시지 않습니다.
갈멜산에서 그런 모습을 우리는 이미 본 바 있습니다.
"그들은 더 큰 소리로 부르며, 자기들의 관습에 따라 피가 흐를 때까지
칼과 창으로 자기들 몸을 찔러 댔다. 한낮이 지나
곡식 제물을 바칠 때가 되기까지 그들은 예언 황홀경에 빠졌다."
바알의 거짓 예언자들은 하느님이 나타나시라고 몸에 상처를 내면서
예언 황홀경에 빠지지만 하느님은 나타나지 않으셨지요.
이들은 자해를 하면서 하느님이 나타나시기를 강요한 것이고,
이런 거칠고 요란스러운 강요에 하느님께서는 응하지 않으신 겁니다.
엘리야에게도 하느님은 비슷합니다.
바위를 부술 정도의 바람과 지진과 불이 엘리야 앞을 지나가지만
그것들 안에 하느님은 계시지 않고 그것들이 다 지나가고 난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오는데 그것이 주님의 목소리입니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강풍과 지진과 불은 세상을 뒤흔들고 우리 인간에게는 두려운 것들이지만
그 크고 두려운 것들이 하느님이 아님은 물론 그것들 안에 계시지도 않고,
그 크고 두려운 것들을 다 겪고 난 사람에게 주님은 나타나십니다.
밤새도록 풍랑과 싸운 제자들에게 새벽녘에야 나타나시듯 말입니다.
이런 것들은 흔히 말하듯 우리의 혼도 빼놓고 정신도 빼놓는 것들이지요.
손주들이 모처럼 와서 좋긴 한데 혼이 쏙 빠졌다고 할 때 우리가 비슷한
체험을 하듯 이것들이 우리의 혼을 빼놓고 그래서 우리의 정신이라고
하는 것도 나가고 없을 때 하느님은 그런 때 조용히 등장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시끄러울 때는 우리 정신이 멍한 상태의 '정신없음'이라면
나를 뒤흔드는 모든 것들이 지나가고 난 뒤에 '정신없음'은
오히려 명징한 상태의 '정신없음'이며 실은 진정한 '자기없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욕망도 집착도 두려움도 불안도 걱정도 다 사라져 자기가 없어진
명징한 상태일 때 하느님은 나타니시고 엘리야에게 다시 사명을 주십니다.
"길을 돌려 다마스쿠스 광야로 가거라. 거기에 들어가거든 하자엘을 기름
부어 아람의 임금으로 세우고, 예후를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워라.
그리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네 뒤를 이을 예언자로 세워라."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