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 11일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2020년 6월 11일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바르나바 성인은 키프로스 섬의 레위 지파 출신으로, ‘바르나바’는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본이름은 요셉이며(사도 4,36 참조) 마르코 성인의 사촌(콜로 4,10 참조)이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사도 11,24)으로 칭송받던 바르나바 사도는 자신의 재산을 팔아 교회 공동체에 바치고 다른 사도들과 함께 열성적으로 선교하여 많은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였다. 전승에 따르면, 성인은 60년 무렵 키프로스의 살라미스에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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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에 들어갈 때에는 ‘평화를 빕니다!’ 하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릴 만하면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집에 내릴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그 평화는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마태오 10,7-13)
As you enter a house, wish it peace.
If the house is worthy, let your peace come upon it;
if not, let your peace return to you.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한재호신부-
바르나바는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바오로를 대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 그가 정녕 위로의 아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을 붙잡아 감옥에 가둘 생각으로 다마스쿠스로 향하던 바오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사흘 동안 눈이 멀게 됩니다. 그러다가 다마스쿠스에서 하나니아스를 만나 눈을 뜨고 회심하여, 그리스도를 박해하던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혀 쫓기는 신세가 되었고,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는 여전히 불신과 오해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교회 공동체 안에 머물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을 찾아가 교회의 지도자들을 만났지만 정식으로 선교사가 되지 못한 채 고향 타르수스로 돌아가야만 하였습니다.
그렇게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뒤에서야 바오로는 비로소 선교 활동을 하게 되었는데, 그 계기를 마련해 준 이가 바로 바르나바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모든 신자가 바오로를 두려워할 때 바르나바만이 그를 받아들여 사도들에게 인도해 줍니다.
또한 바르나바는 안티오키아에 파견되었을 때 그곳과 가까운 타르수스에 가서 바오로를 만납니다. 그리하여 철저한 외로움 속에 있던 바오로를 이끌고 안티오키아뿐 아니라 소아시아 일대를 함께 다니며 선교 활동을 합니다. 이렇듯 바르나바는 바오로에게 큰 위로와 격려를 건넨 은인과도 같은 사람입니다.
바르나바는 어떻게 ‘위로의 아들’로서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성경에는 이에 관하여 명시적으로 밝힌 본문이 없습니다만,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아마도 바르나바는 자신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얻게 된 것을 두고두고 감사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이 있었기에 아무런 대가 없이 바오로에게 다가가 그를 믿어 주고 인도하였을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조슈아 벨은 손꼽히는 클래식 연주가로 그의 콘서트는 언제나 매진이고, 거의 시간당 6만 달러 이상을 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연주하는 바이올린은 1713년에 만들어진 50억 원이 넘는 스트라디바리우스입니다.
2007년, 그에게 워싱턴포스트지가 한 가지 실험 제안을 했습니다. 그가 자신의 바이올린을 들고 야구모자를 쓴 채 지하철역에서 공연한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45분 동안 연주했는데 7명의 사람만 하던 일을 멈추고 딱 1분 동안만 연주를 들을 뿐이었습니다. 그의 앞을 지나쳤던 1,070명에게 벨의 연주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조슈아 벨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어떠했을까요? 1분이 아닌 45분을 꽉 채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것이고, 앵콜도 요청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슈아 벨이라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에 그 모두는 무관심했습니다.
소중한 것을 자주 놓치는 우리입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또 부정적인 마음으로 중요한 것을 별것 아닌 것으로, 심지어 내게 해로운 것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바로 주님에 대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내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다면 지금처럼 살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든 그분의 말을 들으려 할 것이고, 어떻게든 그분의 뜻을 따르려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파견된 사도들은 바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주님 말씀을 따라서 하늘 나라를 선포하는 일에만 충실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지키기 힘든 말도 따를 수 있었고, 주님 말씀처럼 세상 사람들에게 평화를 빌어주면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들의 이 모습을 보면서 우리 역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세상의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이 아니라, 오로지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 가장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거룩한 하늘 나라에 들어갈 때,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평생을 구두쇠 소리 들으면서 모은 돈을 하늘 나라에 갈 때 모두 가져갈 수 있을까요? 그곳에서 모은 돈을 펑펑 쓰면서 살게 될까요? 아무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지상의 모든 보물은 오히려 그 나라에 들어가는 데 오히려 해가 될 때가 많습니다. 주님께서 가장 강조하신 사랑을 실천하는 데 걸림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주님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주님을 하나의 짐 덩어리로 간주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영원히 살 것처럼 꿈꾸고, 내일 떠날 것처럼 사랑하라.
계속 생각하십시오.
자신이 지금 하는 일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다음 두 가지 질문을 해봐야 합니다.
첫째, 이 일을 왜 하는가?
자신에게 늘 내놓는 뻔한 답 말고,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 계속 생각해야 합니다.
둘째, 계속 이대로 산다면 어디로 갈 것 같은가?
단순히 미래에 대한 엉성한 개념 말고, 땅에 발을 딛고 서서 지금 사는 대로 살면 당신은 어디에 이를지 생각해보십시오.
이렇게 파고들어야만 자기 방해의 덫에서 풀려날 수가 있습니다. 사실 내 삶을 방해하는 것은 늘 소소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소소한 것들이 결혼생활을 파탄 내고, 가족을 찢어놓고, 각종 중독에 빠지게 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을 말하면서 정반대의 행동 패턴을 따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계속 생각하면서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야 합니다.
나는 좋은 것만을 주는데 나쁜 것이 돌아온다고 느낄 때는?
-전삼용신부-
오늘은 바르나바 사도 축일입니다. 바르나바는 ‘위로의 아들’이란 뜻을 지닙니다. 아마도 이름대로 이웃을 위로하고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사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돌아온 것은 박해와 순교였습니다. ‘주는 것을 받는다.’라는 것은 하나의 흔들림 없는 세상의 법칙입니다. 내가 주는 대로 받는 것입니다. 내가 위로하면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내가 사랑을 베풀면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좋은 것을 주라고 파견받지만 박해와 모욕과 죽음을 받습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이웃에게 좋은 것만을 주는데 내가 주지 않은 안 좋은 것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잘해 줘봐야 보람도 없다며 잘해주기를 멈춰야 할까요? 그러나 주는 것은 반드시 다시 받게 된다는 법칙을 믿어야만 합니다.
파도바의 안토니오는 많은 기적도 행했지만, 또한 위대한 설교가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바닷가 마을은 안토니오 성인의 말을 좀처럼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성인의 설교를 들으려 모여들지 않았지만, 오히려 바다의 물고기들이 몰려와 그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안토니오 성인의 설교는 사람들에게 무시당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동물들을 통해 그의 설교를 듣게 하심으로써 그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위로하기 위해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하느님께서 위로로 다시 갚아주지 않으실 리가 없습니다. 만약 100명이 들을법한 설교인데 1명만 듣는다면 99는 주님께서 갚아주십니다.
성 프란츠시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행복론은 더 특이합니다. 사람에게 위로를 받느니보다는 주님께 받는 것을 선택합니다. 그는 제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가장 큰 행복이 무엇인지 아느냐? 내가 수많은 사람을 회개시키면 그것이 참 행복일까? 아니다. 더 큰 행복이 있다. 내가 어느 집에 문을 두드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먹을 것을 청할 때 심한 모욕을 당할 것이다. 이것이 행복이다. 그러면 나는 지치지 않고 다시 문을 두드려 주님의 이름으로 도움을 청할 것이다. 그 사람은 욕을 하며 오물을 뿌리고 나를 두들겨 팰 것이다. 이것이 행복이다.”
성인들은 주는 대로 받는다는 이 법칙을 아셨습니다. 당신들이 이 세상에서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면 주님께서 그 대신 더 큰 열매로 갚아주신다는 것을. 그러니 우리는 남을 위로하고, 복음을 전하고, 사랑하는 데 지쳐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항상 우리가 하는 모든 것에 합당하게 채워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목숨을 바쳐 복음을 전했는데 사람들을 나의 목에 칼을 댔다면 하느님은 영원한 생명으로 채워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라는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내가 주는 사랑에 대해 이웃이 어떠한 반응을 하던 내가 주는 것은 반드시 돌려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의 사랑을 받으면 받아서 좋고, 거부당해도 나는 사랑의 보상을 받게 됩니다. 사랑이 거부되는 데서 오는 고통이 크다면 그만큼 더 큰 위안으로 주님께서 갚아주시는 것입니다.
독일의 한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1부터 100까지 차례대로 합한 값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아이들은 ‘1+2+3+4+…+99+100’ 이렇게 하나하나 더해나갔습니다. 그런데 한 학생이 손을 들더니 다 더했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놀라며 값을 물었습니다.
“5050입니다.”
10살 때 이 문제를 푼 소년의 이름은 19세기 최고의 수학자가 될 칼 프리드리히 가우스였습니다. 가우스는 무조건 1부터 100까지 더하려 하지 않고 하나의 ‘법칙’을 발견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러한 법칙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1+100=101, 2+99=101, … , 99+2=101, 100+1=101”
1부터 100까지 가장 작은 것과 가장 큰 것을 더하면 항상 101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101이 50개가 생기니 101×50=5050이 나옵니다.
우리가 내어주는 것에도 이러한 법칙이 숨어있습니다. 결코, 내가 하는 수고는 합당한 보상을 받지 않고 끝나지 않습니다. 1밖에 받지 못했다면 사람들이 주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황금으로 도금된 100을 보상으로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께 만들어놓으신 법칙입니다. 사랑합시다. 그러면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 결코, 내가 하는 사랑보다 덜 받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그 사랑이 거부당한다면 더욱 기뻐하십시오. 하느님께서 그에 합당한 사랑을 주시기 위해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웃에게 좋은 것을 주는데 결과만 보고 결코 지쳐서는 안 됩니다.
-조재형신부-
중학교 때입니다. 이름이 기억나는 친구가 많지 않지만 유독 기억나는 친구가 있습니다. 이름이 ‘박정희’였습니다. 당시 대통령과 같은 이름이었습니다. 선생님들도, 친구들도 박정희라는 친구의 이름을 부를 때는 웃곤 했습니다. 4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친구의 얼굴과 이름이 기억납니다. 매사가 반듯했던 그 친구는 주어진 자리에서 잘 지내고 있을 겁니다. 저는 세례명이 ‘가브리엘’입니다. 가브리엘은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천사입니다. 부르기도 좋고, 의미도 좋습니다. 제게 세례명을 정해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립니다. 미국에서 신문을 만들고 있으니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저의 세례명이 지니는 뜻과 비슷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 또한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지난해 말 중국에서 처음 코로나19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언론은 ‘우한폐렴’이라고 불렀습니다. 중국 우한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질병 앞에 지역 이름을 붙이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지역에 대한 좋지 않은 선입견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WHO는 공식 명칭을 ‘코로나19’로 정했습니다. 바이러스의 형태가 코로나(왕관)처럼 생겼고, 19번째 변이였기 때문에 코로나19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코로나라는 이름 때문에 피해를 본 기업이 있습니다. 멕시코의 대표 주류인 ‘코로나 맥주’입니다. 저는 멕시코에 갔을 때 마셨고, 라임을 곁들여 마시면 상큼한 맥주입니다. 코로나19가 팬데믹(대유행)이 되면서 멕시코는 더 이상 코로나 맥주를 생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코로나 맥주를 판매하는 기업에게는 가슴 아픈 일입니다.
오늘은 바르나바 사도 축일입니다. 바르나바 사도는 바오로 사도와 함께 초대교회의 주춧돌이 되었습니다. 특히 이방인을 위한 선교를 많이 하였습니다. 이분들의 땀과 노력이 열매를 맺어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생겨났고, 유대인의 회당이 아닌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란 무엇일까요? 교회는 고속도로의 휴게소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운전하다가 고속도로의 휴게소에서 잠시 쉬기도 합니다. 간식을 먹기도 하고, 차에 기름을 넣기도 합니다. 요즘 우리나라의 고속도로 휴게소는 시설이 무척 좋아졌습니다. 우선 깨끗하고, 음식도 맛이 있고, 다양한 편의시설을 갖추었습니다. 아무리 고속도로의 휴게소가 좋아도 그곳에서 자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시금 목적지를 향해서 떠나게 됩니다. 인생이라는 고속도로에 많은 휴게소가 있습니다. 사찰, 회당, 사원, 교회들이 있습니다. 각 종교는 저마다 삶의 진리를 이야기하고, 인생의 가치를 이야기하고, 영원한 삶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사도는 아니지만, 사도직을 수행함으로써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신 말씀은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신앙인들은 교회를 통해서 삶의 위로를 받고, 새로운 길을 향해서 나가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오늘 하루, 나의 세례명의 뜻은 무엇인지, 세례명의 성인은 어떤 삶을 사셨는지 묵상하는 건 어떨까요
위대한 바오로 사도 뒤에는 탁월한 조력자 바르나바 사도가 있었습니다!
-양승국신부-
큰 족적을 남긴 걸출한 인물은 홀로 탄생하는 것이 절대 아니더군요. 무대의 뒤에서 묵묵히 도와준 조력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저희 살레시오회 창립자 돈보스코 뒤에는 지혜로 충만했던 요셉 카파소 신부님이 계셨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사랑받고 존경받는 여성으로 유명한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 뒤에는 회개한 아버지 버논 윈프리가 있었습니다. 헬렌 켈러 뒤에는 설리반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와 함께 초대 교회를 이끌었던 위대한 선교사 바오로 사도 뒤에도 위대한 조력자가 한명 계셨으니,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바르나바 사도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단에 포함되지 않았으면서도 사도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부여받았습니다. 이는 그가 바오로 사도를 도와 초세기 교회 건설에 엄청난 기여를 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중심축으로 건설되는 것처럼 보이던 초세기 교회가 탄력을 받고 예루살렘 밖으로 퍼져나가게 되는데 있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 바르나바 사도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의롭고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 바르나바 사도를 적임자로 선택하셨습니다.
바르나바 사도가 행한 일 가운데, 참으로 의미심장한 일, 탁월한 일 한 가지가 있었는데, 흙속의 진주를 찾아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오로 사도를 찾아간 것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비범하고도 탁월한 능력을 눈여겨 본것입니다.
바르나바 사도의 원래 이름은 요셉이었습니다. 바르나바는 애칭이자 별명입니다. 바르나바란 이름이 지닌 의미는 ‘위로’ ‘격려’ ‘용기를 복돋는 전문가’입니다.
바르나바 사도는 키프로스 태생으로 레위계 사제였습니다. 대한민국으로 치면 서울 강남격인 예루살렘 시내에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던 금수저 출신에 수려한 외모까지 겸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름에 걸맞게 바르나바 사도는 바오로 사도를 크게 위로하고 격려했습니다. 바르나바 사도는 그리스도교로 개종은 했었지만, 아직도 낯설기만한 그리스도교 공동체 신자들과의 관계 안에서 무척이나 위축되어 있고 의기소침해있던 바오로 사도를 찾아갑니다. 따뜻하게 위로하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용기를 북돋아주며 앞으로 나아가도록 자극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자신들을 박해하던데 앞장서던 바오로 사도가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이 회개를 하고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찾아왔을 때, 무척이나 당혹스럽고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쉽게 그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저러다가 또 언제 마음이 바뀌어서 우리를 위협할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 입장에서 쉽게 마음의 문을 열지 않은 그리스도교 신자들 앞에서 꽤나 괴로웠을 것입니다.
이런 난감한 상황 속에서 성령과 지혜로 가득했던 바르나바 사도가 두팔을 걷어붙였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예루살렘에 왔을 때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했지만, 바르나바 사도는 그를 따뜻히 환대합니다. 다른 사도들에게 그를 소개해줍니다. 바르나바 사도의 배려와 협력에 힘입어 바오로 사도는 용기백배해서 그 위대한 선교 여정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선교 여행 초기에 ‘바르나바와 바오로’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여행에서 돌아올 때는 ‘바오로와 바르나바’로 표현합니다. 바르나바 사도는 때로 바오로 사도의 스승처럼 그를 지도했습니다. 때로 친구처럼 그를 동반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제자처럼 처신하며 그를 섬겼습니다.
바르나바 사도는 그리스도 교회를 이방인들에게 개방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 앞에서 바오로 사도의 편에 섰습니다. 적극적으로 그를 지지했습니다. 결국 예루살렘 회의는 이방인들에게 교회 문호를 활짝 여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이영근신부-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분부하십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마태 10,7)
놀라운 일입니다. 제자들은 유례없는 위대한 직무를 받았습니다. 전혀 새롭고 놀라운 직무와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감히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직무입니다. 그것은 모세와 예언자들이 받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기껏해야 지상에서의 일시적 약속에 대한 것들을 선포했을 뿐이었지만, 제자들에게는 바로 “하늘나라”를 선포하라는 직무가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더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이 그 직무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그 어떤 망설임이나 주저함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특별한 능력이 있던 이들도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사실, 모세와 예언자들은 지상의 약속에 대한 직무를 받았을 때마저 망설이고 꺼려했는데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위험이나 박해가 없었던 것도 아닌 데 말입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오히려 지극한 열정으로 그 직무를 다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고 있는 바르나바 사도도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해서 그들은 그렇게 할 수가 있었을까?
그것은 그들에게 그러할 권능이 함께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곧 하늘나라가 주어졌고, 하늘나라를 선포할 힘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거저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받아서 가진 것을 주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꼭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가진 것”, 그것은 그들이 만들거나 획득해서 가지게 된 것이 아니라, 받아서 가지게 된 것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자애로, 거저 주어진 선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은 주시는 분이 있기에 받아들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먼저’, 주신 그분을 만나야만 합니다. ‘먼저’, 그분의 사랑을 만나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그 사랑으로 우리도 ‘거저 줄’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아무 거나 주어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거저 받은 것, 바로 그것을 거저 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받은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주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결코 우리가 만든 그 어떤 것을 주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만약 실제로 받지도 않은 것을 선포하고 증거 한다면, 그것은 거짓 선포요 거짓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선포해야 할 나라는 우리 자신의 나라가 아니라, “하늘나라”인 것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마태 10,7)
주님!
어디를 가더라도 저의 길동무가 되고, 저의 길이 되어 주소서!
누구를 만나더라도 저의 파트너가 되고, 저의 언어가 되어 주소서!
무엇을 하더라도 저의 동료가 되고, 저의 일이 되어 주소서!
언제나 당신의 나라를 선포하며, 당신과 함께 있게 하소서! 아멘.
신앙생활 ♣
-송영진신부-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마태 10,7-13).”
이 말씀은, 복음을 선포하러 떠나는 사도들에게 말씀하신 ‘활동 지침’인데,
관점을 바꾸어서 ‘복음을 전해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이 말씀은, 신앙생활의 지침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에 선포하신 복음은(기쁜 소식은)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입니다(마태 4,17).
예수님의 부활, 승천, 그리고 성령강림 후에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과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는다.”는 소식으로 바뀌었지만(루카 24,46-47; 사도 2,38),
본질적으로 같은 복음입니다.
여기서 생각해야 할 점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인 것은,
구원을 받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이지
세속의 부귀영화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세속에서 잘 살게 되는 것을 복음으로 선포한 적이 없습니다.
(이쪽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하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신앙생활의 목적으로 삼으면 안 됩니다.
그런 것만을 바라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목적지를 잊어버리고 중간 경유지에서 멈추어 서는 어리석은 나그네와 같습니다.
신앙인의 목적지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사도들이 병자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고 마귀들을 쫓아낸 일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전해 준 일이기도 하고,
하느님 나라의 기쁨과 행복을 체험하게 해 준 일입니다.
그래서 그 일 자체가 복음 선포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수단으로 병자들을 고쳐 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 선포는 ‘말’로 할 수도 있고, ‘치유의 은총’으로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병에 걸렸을 때,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할 일이고,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병이 치유되었을 때, 그것으로 만족하고 멈추면 안 됩니다.
바라는 대로 병이 낫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그때 실망해서 믿음이 흔들리면 안 됩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은총은 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어떤 대가를 요구하면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복음 선포 활동은 자기가 무상으로 받은 은총을
다시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주는 활동입니다.
‘나의 것’을 나누어 주는 활동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하느님의 것’을 전달해 주는 활동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주시는 은총을 받아 누리는 생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바치는 것은
은총의 대가를 지불하는 일이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일입니다.
봉헌 예물은 언제나 감사 예물입니다.
또 이 말씀에는, 헌금을 많이 바치면 그것에 비례해서 복을 많이
받을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라는 가르침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바치기 전에 이미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풍성한 은총을 내려 주셨고, 계속 내려 주십니다.
신앙생활을 마치 하느님과 거래하듯이 하면 안 됩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빈손으로 가라.”는 지시는,
“복음을 전하러 갈 때에는 복음만 가지고 가라.”는 가르침이기도 하고,
“세속의 물질에 의지하지 말고 하느님만 믿고 의지하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만일에 “활동비 한 푼 없이 어떻게 선교활동을 하나?” 라고 걱정하면서 간다면,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 주기는커녕
‘걱정스러운 소식’만 전해 주게 될 것입니다.
< 이 말씀은, 산상 설교에 있는
“걱정하지 마라.” 라는 가르침에 연결됩니다(마태 6,25-34).
신앙생활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아무 걱정 없이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일꾼에게 당연히 먹을 것을 주신다.” 라는 뜻입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않고 빈손으로 가는 일꾼만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나중에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내가 너희를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없이 보냈을 때, 너희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느냐?” 라고 물으셨는데,
그때 사도들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루카 22,35).
(우리는 날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일용할 양식’을 청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실제로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만일에 믿음도 없이 기도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라는 말씀은,
숙식을 제공할 사람을 찾으라는 뜻이 아니라, “누군가가 너희에게 숙식을
제공하거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라.” 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일꾼을 먹이시는 방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직접 도와주실 때도 있고, 천사를 보내실 때도 있고,
마음 착한 사람을 통해서 도와주실 때도 있습니다.
사람에게서 오는 도움이 곧 하느님의 은총일 때가 많습니다.)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라는 말씀은,
“더 좋은 대접을 받으려고 옮겨 다니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성실하게 일했는가를 보실 뿐이고,
성실하게 일했다면 실패의 책임은 묻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선교활동뿐만 아니라 신앙생활 전반에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어떤 업적을 쌓았는가를 보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가를 보시는 분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루하루 거룩하고 충실하게 사는 것 자체가 중요한 생활입니다.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조욱현신부-
성 바르나바는 비록 12 사도의 명단에는 들지 않았지만, 사도행전에서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훌륭한 사람”(11,24)으로 사도로 인정하였다. 유다교에서 개종한 본명이 요셉이었던(사도 4,26 참조) 그는 자기 재산을 모두 사도들에게 봉헌함으로써 ‘위로의 아들’이라는 의미의 바르나바라는 이름을 얻었다. 바오로 사도가 개종한 후 초대 공동체 지도자들에게 바오로를 소개하였고, 그 공동체에 들어오게 하였다. 그리고 바오로의 선교여행에도 함께 하였고, 예루살렘 회의에도 참석하는 등 많은 활약상을 보였다. 바르나바 사도는 키프로스 교회의 창설자로 알려져 있으며, 61년경에 키프로스 섬의 살라미스에서 돌에 맞아 순교하신 분이다.
복음: 마태 10,7-13: 너희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7절) 하느님의 뜻과는 반대로 가려고 하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곧 복음선포이다. 하느님 나라의 선포로 세상은 이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아름다운 세상으로 변할 것이다. 사도들은 이 말씀에 순명하여 예언자들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임무를 꺼리지 않고, 장차 자신들이 겪을 위험과 싸움을 알고 있었지만, 주님의 명령을 따랐다. 그들은 하늘나라의 선포자가 되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8절) 주님께서 가지고 계셨던 모든 권능이 사도들에게 주어졌다. 사도들은 스승의 명령에 따라 살게 되니 그리스도의 완전한 모상과 닮은 자들이 되었다. 세속적이었던 그들이 하늘 중심적인 사람들이 되어,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고, 진리를 통해 하느님의 모습과 닮음을 이룰 수 있다고 선포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병든 이를 고치고, 죽은 이를 되살리고, 나병 환자를 깨끗이 하고, 악마를 쫓아내는 권능을 주셨다. 그러나 보상을 바라고 영적인 선물을 베푼다면 그 선물을 더럽히는 것이므로, 복음의 은총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탐욕을 단죄하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여행 보따리는 세속 물건에 관한 관심을, 여벌 옷은 이단이나 율법 같은 옷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옷 입으라는 말씀이며, 신발이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처럼(탈출 3,5 참조) 가시나무와 덤불로 덮인 거룩한 땅 위에서는 맨발로 확고히 서서 그리스도께 받은 것 말고는 어떤 신발도 지니지 말아야 한다. 지팡이는 권위의 상징이다. 하느님의 힘이 아닌 외적인 힘을 도구로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지팡이는 아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 대해 초대 교회의 ‘열두 사도의 가르침’에 보면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에 대해서 복음의 원칙을 따라 이렇게 하시오. 어느 사도든 여러분에게 오면 주님처럼 영접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하루만 머물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다음 날도 머물 것입니다. 그러나 사흘을 머무른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그리고 사도가 떠날 때는 (다음 장소에서) 숙박할 때까지 (필요한) 빵밖에는 아무것도 받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에 돈을 요구한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11,3-6).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자기 삶의 모습으로 그들에게 평화를 전할 수 있어야 하며 구원의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 기념하는 바르나바 사도의 삶이 바로 그러하였다. 자신의 모든 재산을 팔아 사도들에게 바치고 바오로 사도와 함께 여행하였고, 결국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신 분이다. 주님의 복음은 바로 살아 계신 하느님 생명의 말씀으로 바르나바 사도에게 생명을 주었으며 그리고 우리에게도 생명을 줄 것이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 8)
-한상우신부-
누구를 믿고
살아가는지를
진심으로
묻게됩니다.
지닌만큼 더
자유롭지 못한
이 부르심의
여정입니다.
하느님만으로
이미 충분합니다.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거저 받은 것을
거저 나누는
길입니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주신 고귀한
시간을 놓치지
않는 지혜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걸어가는
모든 시간입니다.
우리의
마지막 순간또한
하느님밖에
없음을 고백합니다.
주님과
같은 방향을
걸어가는 것은
거저 나누는
삶입니다.
삶의 이유가
나누는 사랑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실상은
우리 것이 아닌
하느님의 것임을
알고 떠나는
순례의 여정임을
기억합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바라시는 바가 잘 드러납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7).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수행하시는 복음 선포, 치유, 구마 등 하느님의 일을 할 능력을 받아가지고 길을 나섭니다. 가난하고 억압받는 민중에게 그들이 베풀게 될 구체적 능력들은 그들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힘이 아니지요. 그것은 파견하시는 분이 당신을 대신할 이들에게 잠시 맡기신 능력입니다. 곧 파견과 동시에 위임받은 하느님의 손가락입니다.
"지니지 마라"(마태 10,9).
자기가 받은 것이 제 능력으로 쌓은 것이 아님을 잘 아는 제자들은 앞으로 필요한 것들도 주님께서 그렇게 채워주시리라는 신뢰를 내적으로만이 아니라 외적으로도 증거해야 합니다. 보통 사람에게 만약을 대비해 무언가 여분의 것을 적당히 챙겨두는 것이 죄는 아니지만, 사도들에게는 그마저도 주님 손에 다 맡기라고 하시는 듯합니다.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마태 10,11).
"마땅한 사람"의 조건은 저마다 차이가 있을 겁니다. 함께 머무르며 일하기에 누구에게는 이런 사람이, 또 누구에게는 저런 사람이 알맞겠지요. 각자의 성향과 소명에 걸맞는 인연을 만나는 일은 하느님께서 안배해 주셔야 가능합니다. 오늘 제1독서의 바르나바와 사울처럼 말이지요.
"착하고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바르나바"(사도 11,24 참조)는 친히 사울을 찾아내어 새로운 길에 합류시키고 기꺼이 동료가 되어 줍니다. 사울에 대해 두려움과 의혹이 가시지 않은 이들도 바르나바를 보아서 사울을 받아들였을 것 같습니다.
"떠날 때까지"(마태 10,11).
예수님은 떠남을 전제로 말씀하십니다. 사도는 길을 떠난 사람입니다. 또 머물게 된 그곳에 안주하지 않고 다시 떠날 사람이기도 하지요. 사도의 삶은 순례길을 걷는 우리 모두의 축약판입니다.
"내가 일을 맡기려고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렀으니 나를 위하여 그 일을 하게 그 사람들을 따로 세워라"(사도 13,2).
바르나바와 사울이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한창 활발히 선교 활동에 전념할 때 성령께서 이르십니다. 하느님의 뜻은 그 둘이 그곳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떠나보냈다"(사도 13,3).
그들은 순종합니다. 지상 삶에서, 더우기 제자의 삶에서 영원한 안주란 없습니다. 바람처럼 자유로운 성령에 이끌려 하느님의 뜻이 원하시는 곳 어디로나 떠나는 것이 제자된 삶의 일부입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 한때 서로에게 "마땅한 사람"이 되어 주었던 바르나바와 사울도 서로를 떠나야 할 때가 올 겁니다(사도 15,37-40 참조). 괜찮습니다. 당장은 갈등과 분열처럼 보일지라도 사심없이 주님의 뜻을 찾고 있다면 주님께서는 모두를 통해 당신의 일을 하실 것이니까요.
착하고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바르나바 성인은 바오로 사도가 교회에 자리를 잡도록 도와준 일등공신입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이방인 선교는 물론 초대교회의 신학적 기틀을 마련한 바오로 사도를 기릴 때 그의 진정한 파트너, 바르나바 성인도 함께 떠올리게 되지요. 바르나바 성인은 당장 자신이 빛나지 않더라도, 두각을 드러내는 존재가 꼭 자신이 아니어도 묵묵하고 충실히 하느님의 뜻을 추구한 진짜 사도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바르나바 성인께 우리 모두 착하고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되도록 전구를 청합시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이에게 기꺼이 손 내밀 수 있고, 그의 곁에서 충직한 협조자로 머무를 수 있는 겸손도 얻어주십사고 청합시다. 주님께 받은 것으로 만족하며 기꺼이 나눌 줄 알고, 또 머무를 때와 떠날 때를 아는 지혜도 청합시다.
성 바르나바,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명실상부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59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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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11일 화요일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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