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 3일 연중 제9주간 수요일
2020년 6월 3일 연중 제9주간 수요일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가롤로 르왕가 성인과 그의 동료 성인들은 아프리카 우간다의 순교자들이다. 우간다를 비롯한 동아프리카 지역에는 19세기 말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었다. 왕궁에서 일하던 가롤로 르왕가는 가톨릭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은 뒤 자신의 신앙을 떳떳하게 고백하며 궁전의 다른 동료들에게도 열성적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왕조가 들어서면서 배교를 강요당하던 그와 동료들은 끝까지 굽히지 않다가 1886년 6월에 살해되었다. 1964년 바오로 6세 교황은 우간다 교회의 밑거름이 된 이들을 ‘우간다의 순교자들’이라고 부르며 시성하였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마르코 12,18-27)
He is not God of the dead
but of the living.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한재호신부-
어느 선배 신부님의 누이는 신체장애가 있는데, 신부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는 말이 그다지 기쁘게 들리지가 않아. 현세에도 장애로 고통을 받는데 그것을 영원히 견뎌야 한다니 어찌 기쁠 수가 있겠니?” 이에 관하여 신부님은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빌려 설명하였습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1코린 15,42-44ㄱ).
본디 부활이란 애벌레가 나비가 되듯이, 씨앗이 나무가 되듯이 현세적인 몸은 사라지고 새로운 차원의 몸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마리아 막달레나도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도 예수님을 곧바로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우리가 부활하여 영광스러운 몸을 지니게 되면 지상에서 얽매이던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처럼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몸만 변화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느님 안에 있는 것을 기쁨으로 삼을 줄 모른다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시듯 ‘나의 하느님’이 되지 않으신다면, 아무리 천사와 같아진다 하여도 영원한 복락을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예전에 어떤 강의를 듣게 되었습니다. 법에 관한 것이었는데, 강사의 말은 느리기만 했고, 강의 내용도 너무나 지루했습니다. 어떤 예도 없이 법에 대한 원론적인 것만을 계속해서 말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 강사의 말이 잘 들렸을까요? 이 강의실에서는 강사만 말하고 있었고, 그래서 그 안은 너무나도 조용했습니다. 하지만 강사의 말이 제 귀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친한 신부와 유명한 식당을 찾아갔습니다. 맛있는 맛집으로 알려진 곳이라 사람들이 가득했습니다. 한참을 줄 서서 안에 겨우 들어갔는데, 식당 안은 사람들의 소리로 가득해서 앞에 있는 사람과의 대화가 불가능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신부와 아무 말 없이 밥만 먹고 나왔을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참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시끄러워도 상대방의 말을 듣고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면 아무리 조용한 곳이라도 상대의 말이 들리지 않습니다. 주님께 대해서도 그렇지 않을까요? 주님을 이해하지도 또 믿지도 않는다면 어떤 말을 들어도 자신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이해하고 있으며 어느 정도의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일상 안에서 주님의 말과 그 뜻을 들을 수 있고 내 마음을 그분께로 향하게 할 수 있습니다.
나 자신과 주님과의 관계를 다시금 생각해봐야 할 때입니다. 주님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는지요? 혹시 주변 탓을 하면서 주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불평불만을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사두가이들이 주님께 대한 신뢰성에 흠집을 낼 수 있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 물음은 육신에 관한 것인데, 부활한 뒤에도 혼인에 매여 있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일곱 형제의 아내가 된 한 여인을 예로 들어, 그 여인이 형제들 가운데 누구에게 돌아가야 하는지 답하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들을 향해 부활을 선포하는 성경도 모르고 있으며, 죽은 이를 살리실 수 있는 하느님의 능력도 믿지 않고 있다며 혼을 내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분 신성의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으며, 우리 역시 부활한다는 희망을 주셨습니다. 이 희망은 세상의 생각과 판단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시 살아날 때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질문을 던지고 있었던 사두가이들은 예수님을 알려고 노력하지 않았고, 예수님에 대해 말하고 있는 성경을 알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주님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없어서 주님의 반대편에 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주님을 알려고 노력하지 않고, 그분의 뜻을 이해하려는 노력도 없다면, 주님으로부터 어떤 소리도 들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잘못을 고백한 순간, 이미 절반은 용서받은거야(베르나르 베르베르).
가장 중요한 것.
“신부님, 제 딸 때문에 걱정이에요.”
“왜요?”
“아직 시집도 가지 않았는데, 살이 얼마나 쪘는지 몰라요.”
체중과 시집이 무슨 연관이 있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딸의 직업을 물었지요. 웹 디자이너라고 합니다.
“디자이너와 체중이 무슨 상관이 있는데요? 딸도 성인데 스스로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살을 빼겠지요.”
“그만큼 자기 관리를 못 한다는 거잖아요. 그런 정신으로 회사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겠어요?”
연예인이 살찌면 엄청난 댓글이 붙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자기 관리를 못 한다, 프로의식이 없다는 식의 댓글 말입니다. 그러나 배우는 배우 잘하는 것이 중요하고, 가수는 노래 잘하는 것이 중요할 뿐입니다. 체중은 자기 건강을 잃지 않는 한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다이어트가 자기 관리라고 여기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보다 자신의 정신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문제가 아닐까요? 부정적인 생각,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는데 더 많은 신경을 쓰고 있는 것, 여기에 물질적인 것만 최고로 여기는 욕심과 이기심의 마음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진정으로 자기 관리를 못 하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부분보다, 보이지 않는 내 마음을 아름답고 또 멋지게 만드는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가장 중요합니다.

사후세계는 현세에서 내가 선택한 행복의 기준에 의해 결정된다
-전삼용신부-
넷플릭스 드라마 ‘굿플레이스’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자기밖에 모르던 한 여인이 갑자기 죽어서 눈을 떴는데 천국에 가게 되었다는 설정에서 시작됩니다. 천국에서는 각자에게 맞는 사람들과 이웃으로 살 수 있게 해 주고 취향에 맞는 집과 환경을 제공해줍니다. 그런데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입니다. 주인공 엘리너는 우크라이나에서 봉사하던 변호사가 아니라 가짜 약을 노인들에게 사기 쳐서 팔던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주인공은 자신이 천국에 오게 된 것에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그러나 사기꾼이 선한 사람들 틈에서 살아가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개 버릇 남 못 준다고 평생 사기만 치던 이 여인은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합니다. 엘리너는 평소처럼 예쁜 여인을 기린 같다고 무시하고 파티장에 있던 새우를 훔쳐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다음 날 기린들이 길거리에 뛰어다니고 새우들이 날아다니는 등의 소동이 벌어집니다. 이 모든 것은 엘리너가 남을 흉보고 음식을 훔쳤기 때문에 벌어진 것입니다.
엘리너는 착해져 보기 위해 쓰레기 청소 봉사를 맡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처럼 놀고 싶어서 쓰레기들을 구석에 감춰놓고 놀기를 즐깁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쓰레기 비가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이기적인 행동이 모든 사람을 괴롭게 만든다는 설정입니다. 이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독재자가 탄생하면 그 사람이 자기 가족만을 위해 재산을 모을 때 다른 수많은 사람이 굶주리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드라마는 엘리너가 그곳에 적응하기 위해 착해지는 과정을 엮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지상에서 이미 그런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 과정을 거치지 않은 사람이 천국으로 들어오면 그 사람 때문에 천국이 지옥처럼 변할 수도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잘못된 행복의 기준을 가진 이들이 살 수 없습니다. 그 기준이 다른 이들을 고통스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천국에 가는지 지옥에 가는지는 이 세상에서 내가 선택한 행복의 기준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천국의 존재를 부정하기 위해 예수님께 몰려옵니다. 그들은 모세오경만을 정경으로 받아들이며 윤리적인 문제보다는 현재를 어떻게 행복하게 살아갈 것인가만을 생각하는 기회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리스에 지배받으면 그리스에, 로마에 지배받으면 로마인들에게 복종하며 현세에서 잘 살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정치인들이었다고 보면 됩니다. 만약 사후세계가 있다면 이들에겐 큰일입니다. 그래서 천국과 지옥이 나뉘어 있다고 말하는 예수님께 크게 반발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예수님께 걸고넘어지려 하는 것은 결혼 문제입니다. 모세의 법이 형이 자녀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해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일곱 형제와 다 함께 살았던 한 여인이 죽으면 누구의 아내가 되는 것이 옳으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들은 천국은 분명 행복한 곳이니 결혼을 당연히 해야 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의 모든 관계가 의미 없어진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천국에서 성모님은 여전히 예수님의 어머니이실 것입니다. 다만 새롭게 결혼의 문제가 거론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천국에서의 유일한 행복은 하느님의 존재가 될 것이고 다른 모든 것들은 그 행복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두가이들이 지극히 현실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이들이었기 때문에 결혼이 행복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고 천국의 행복이 무엇인지 아는 예수님에게는 그들이 그런 행복관으로는 천국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 잘못된 행복관으로 천국에 들어오면 남의 여자를 빼앗으면서까지 자신이 행복해지려 할 것이기 때문에 다시 지옥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의 유일한 행복의 기준이 성령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을 받는 시간이 ‘기도’이니, 행복을 누리기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이 기도가 되지 않으면 아직 천국에 들어올 행복의 기준을 갖추지 못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두가이와 같은 현세주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이 세상의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행복의 기준을 성령으로 둘 줄 알아야겠습니다.

-조재형신부-
학교에서 방정식을 배울 때입니다. 1차 방정식은 답이 하나입니다. 그러나 차수가 올라가면 답이 여럿이 됩니다. 2차 방정식은 2개의 답, 3차 방정식은 3개의 답이 되고 N차 방정식은 답이 N개가 됩니다. 여러 개의 답은 1차 방정식의 눈으로 보면 틀린 것 같지만 N차 방적식의 눈으로 보면 1개의 답은 없습니다. 동양의 사상도 인간의 질문에 답을 하고 있으며, 서양의 사상도 인간의 질문에 답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답은 다를 수 있지만, 서로 틀리다고 할 수 없습니다.
중용(中庸)에서 중은 희로애락이 발현되기 전의 상태라고 이야기합니다. 기쁨과 슬픔의 중간이 아닙니다. 분노와 즐거움의 중간이 아닙니다. 중은 가운데나 평균이 아닙니다. 모든 감정이 드러나기 전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기에 중은 천하의 근본이 됩니다. 영성신학에서도 중용(Indiferentia)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부귀보다 가난을 택할 수도 있고,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도 있고, 장수보다 단명을 택할 수도 있는 것이 중용입니다. 이 역시 희로애락의 감정으로는 도달 할 수 없는 영적인 길입니다. 중용에서는 교육을 통해서 희로애락의 감정을 넘어서는 도를 찾으며 그 과정을 화(和)라고 합니다. 화에 이르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들리지 않는 곳에서도 자신을 잘 돌보아야 합니다. 그것을 신독(愼獨)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늘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신독을 통해서 중용에 이르면 하늘의 기운을 얻고, 도를 찾아 화에 이르면 땅의 기운을 얻습니다. 하늘은 시간의 영역입니다. 땅은 공간의 영역입니다. 그러기에 중용에 이르면 하늘과 땅을 이롭게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늘과 땅은 자연재해를 통해서 변화를 수반합니다. 그러나 내가 중용의 삶을 산다면 자연재해 앞에서도 내 삶의 가치를 능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중용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하늘이 조화롭다고 해도 내가 그 가치를 알지 못합니다. 인간의 능력과 재능은 인간이 중용의 삶을 살 때 하늘과 땅을 능히 풍요롭게 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중용의 삶을 살지 못하면 하늘과 땅에 엄청난 피해를 주고 있음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나라는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놓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이러한 삶은 중용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도를 통해서 조화를 이루는 삶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예수님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유대인의 관습에는 형이 사망을 하면 동생이 형수와 함께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7형제가 형들이 먼저 사망해서 형수와 살았다면 부활해서 형수는 누구와 살아야 하는가를 질문하였습니다. 이 또한 고정관념에 갇힌 생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부활하면 이 세상에서의 삶과 원칙은 적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애벌레는 2차원의 삶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나비가 되면 3차원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2차원의 삶에서는 전혀 상상 할 수 없는 것들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눈앞의 것만 볼 수 있고, 느린 속도로 기어야 하는 애벌레와 하늘을 마음껏 날 수 있는 나비는 전혀 다른 차원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활을 한다는 것은 이렇게 다른 차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서에서 이야기 하는 부활은 무슨 의미일까요?
첫 번째 의미는 ‘일어난다.’라는 뜻입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고통에서 즐거움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변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평화를 구하는 기도’는 부활의 의미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어둠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의미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이기에 불의한 죽음을 당한 이들을 다시 일으켜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구약성서의 마카베오기는 부활에 대한 믿음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순교를 하는 어머니와 아이들은 부활에 대한 믿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마티아티스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이방인들의 제사를 거부하고 순교를 합니다. 이 또한 하느님께서 다시 일으켜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부활의 신앙은 죽음 이후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부활의 신앙은 지금 이곳에서의 충실한 삶을 이야기 합니다. ‘불신과 편견’의 벽을 허무는 것입니다. 민족과 계층의 벽을 허무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라는 성의 벽을 허무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지금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부활 신앙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바치는 사랑으로 지금 이곳에 하느님 나라를 구현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다시 일어설 수 있었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들이 살고 있는 삶의 자리에서 증언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의 삶입니다. 우리들 또한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의 뜻을 우리들 삶의 자리에서 드러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분 때문에 수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나는 이 고난을 겪고 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누구를 믿는지 잘 알고 있으며, 또 내가 맡은 것을 그분께서 그날까지 지켜 주실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생각에 속박되어 있는 것이 아니냐?”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두가이들의 부활에 관한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은 ‘불신의 페러다임’과 ‘믿음의 페러다임’의 차이를 잘 보여줍니다. 사두가이들의 ‘영적무지’와 예수님의 ‘신적지혜’가 대조를 이루면서, ‘영적무지’로 인한 구속과 속박을, ‘신적지혜’로 인한 자유와 해방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믿음’에 달려 있음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마르 12,24)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들의 영적무지를 두 가지로 지적하십니다. 곧 사두가이들의 영적 무지를 ‘성경에 대한’ 무지와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무지로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대한 무지’에 있어서, 그들은 모세오경만을 받아들였는데, 인간의 합리적 사고의 범주로써 성경을 이해하려 했고, 내세와 부활과 영적존재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활한 상태를 마치 지상에서의 삶과 동일하게 여기고 질문했던 것입니다. 곧 그들은 <신명기> 25장 5-10절에 나오는 ‘수혼법’으로 부활에 대해 따지고 듭니다. 그들은 합리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부활한 상태 곧 초월적인 실재인 부활체를 마치 지상에서의 삶과 동일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한 상태를 영적 존재로, 마치 천사와 같이 장가가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는 존재로 말씀하십니다. 곧 그들이 믿고 있는 모세오경인 <탈출기> 3장 6절을 인용하시면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은 이미 죽었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살아있으며 부활하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또한 그들의 ‘하느님 능력에 대한 무지’를 말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합리적 사고와 이성적 판단 아래, 하느님의 권능을 제한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었습니다. 곧 인간을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실 수 있으며 부활케 하시는 하느님의 초월적인 권능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작 하느님의 부활의 능력이 마치 죽은 사람을 죽기 전의 생활로 되돌려놓는 정도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지 되살아난다는 것만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 안에서 다시는 죽지 않을 새로운 존재로 변화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새롭게 변화된 부활체에 대해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자, 내가 여러분에게 신비 하나를 말해 주겠습니다. 우리 모두 다 죽지 않고 변화할 것입니다. ~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이 썩는 몸은 썩지 않을 몸을 입고, 이 죽는 몸은 죽지 않는 몸을 입어야 합니다.”(1코린 15,51-53)
그렇습니다. 이러한 ‘영적 존재에 대한 무지’와 ‘하느님 권능에 대한 불신’이 그들로 하여금 부활에 대한 믿음의 거부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결국은 성경을 몰랐기에, 영적 무지에 빠지고 불신에 떨어 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분명, 우리는 믿는 이들입니다. 진정 믿으면, 신적지혜가 열릴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와 해방이 올 것입니다. 불신은 우리를 끝없이 속박할 뿐이며, 믿음은 우리를 진리에로 이끌어갈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곧 믿음이 해방을 가져올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예수님의 말씀을 새겨들어 봅니다.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생각에 속박되어 있는 것이 아니냐?”(마르 12,24)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마르 12,24)
주님!
제 안에 당신이 얼마나 생생히 살아 계신지를 알게 하소서!
당신 안에서 변화되고, 제 삶이 성화되게 하소서.
영적 무지와 불신을 몰아내시고, 제 생각이 빗나가지 않게 하소서!
제 생각에 빠져 허상에 끌려 다니지 않게 하소서!
믿음으로 기뻐하고, 진리 안에서 자유롭게 하소서. 아멘.

진리는 언제나 살아있다
-반영억신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근본정신은 살아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시대에 사두가이들은 그 무리의 숫자는 적었으나 영향력은 무척 컸습니다. 그들은 모세 오경만을 권위 있는 경전으로 인정하고 예언서나 성문서는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모세오경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것은 하느님의 계시로 믿을 필요가 없고, 믿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하였으며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취하였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부귀와 영예를 누리는 이 세상으로 충분하다는 자기만족에 빠져있었는가 봅니다. 그리고 사후 세계를 현재 세상의 단순한 연장 또는 재현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러 형제가 함께 사는’ 상황에서 ‘한 형제가 아들 없이 죽었을 경우’(신명25,5) 그 대를 이어 주어야 한다는 ‘수혼법’의 특수한 규정을 들어 ‘후사를 남기지 못하여 일곱 번이나 결혼한 여자는 부활한 후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하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것은 부활신앙의 허구성을 조롱하고 싶은 마음에서 한 질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마르12,25.26)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는 세상은 지금의 세상이 연장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세상, 새 생명이 주어지고 새 창조가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동시에 아브라함과 이사악, 야곱이 우리에게는 죽은 인물이지만 그분에게는 살아있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그 안에 충실하게 머무는 이들은 비록 죽었을지라도 ‘나는 너의 하느님이다.’라는 그분의 말씀과 능력에 의해 언제까지나 그분 안에서 살아있게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부활 신앙을 지닌 이들의 관심사는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이 아니라, 천사들처럼 하느님 곁에 있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미 세상을 떠난 분이지만 가슴에 기억되는 분이 있고, 살아있는 사람이지만 기억되지 않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참으로 살아있는 사람인가요?
세월이가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진리는 세월에 구애됨 없이 살아있습니다. 부활의 삶을 믿지 못하고 엉뚱한 질문을 한 사두가이들은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마르12,24) 는 예수님의 질문을 들어야 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여전히 같은 질문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혹 우리도 고정관념과 틀에 매여 있지는 않은지? 우리의 생각과 틀을 넘어서서 우리를 부르고 계신 주님,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가능성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언제 행복하시기를 바랍니까?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계신 주님과 함께 행복하시고 그것이 영생으로 이어지길 바랍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언제나 하느님과의 관계, 곧 하늘 이어야 합니다.
2코린4,16이하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쇠퇴해가더라도 우리의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집니다...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우리의 지상 천막집이 허물어지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건물, 곧 사라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을 하늘에서 얻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이 천막집에서 우리는 탄식하며, 우리의 하늘 거처를 옷처럼 덧입기를 갈망합니다.”(2코린4,16-5,3).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부활
-송영진신부-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모세의 책에 있는 떨기나무 대목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읽어보지 않았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너희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마르 12,24-27).”
여기서 “성경도 모르고” 라는 말씀은,
부활에 관한 가르침이 이미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도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아서, 또는 읽었더라도 믿지 않아서
부활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거나 부활을 안 믿는 것을 꾸짖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을,
특히 ‘죽음’을 지배하시는 권능과 권한을 안 믿는 것을 꾸짖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서도 권능을 가지고 계십니다.
(사람을 안 죽게 할 수도 있고, 죽은 사람을 살릴 수도 있습니다.)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사람들은
모든 욕망과 욕정에서 해방되어 있고, 그래서 그곳에서는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나 다툼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혼인제도가 없다고 해서 지상에서 맺은 가족의 인연이,
즉 부모와 자식의 인연이, 또 형제와 자매의 인연이 끊어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이 서로 못 알아보는 일도 없을 것이고,
지상에서의 인연을 부정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부부의 인연도 마찬가지일 텐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될지는 몰라도,
혹시라도 지상에서 복잡한 사연들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곳에서 그런 갈등이 반복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다고 해서
‘사랑’마저도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아마도 그곳에서는 이곳보다 훨씬 더 차원이 높은 사랑을, 즉 욕심이나
이기심이나 집착 같은 것은 하나도 없는 순수한 사랑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라는 말씀은,
원래는 “나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계약을 맺었던 하느님이다.” 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나는 ‘지금’ 내 앞에서 살아 있는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이
‘지금’ 섬기고 있는 하느님이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이 죽었다가 되살아났음을
하느님께서 증언하신 말씀으로 해석하셨고, 인용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은 죽으면 끝나버릴 허무한 인간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섬기는 신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인간들이 영원히 섬기는 분이다.” 라는 뜻입니다.
(또는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실 때 죽으면 끝나버릴 존재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당신과 함께 영원히 살아 있을 존재로 만드셨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죽은 이들’이라는 말은 죽으면 소멸되는 존재를 뜻하고,
‘죽은 이들의 하느님’은 죽은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힘을 쓸 수 없는
무능력한 신을, 즉 우상과 같은 것을 뜻합니다.
만일에 하느님이 당신을 섬기는 사람들을 ‘죽음이라는 것’에게 빼앗기는 신이라면
전능한 신이 아닌 것이고, 전능한 신이 아니라면 하느님이 아닙니다.
또 ‘산 이들’이라는 말은 저쪽 세상에서도 계속 살아 있는 사람들을 뜻하고,
‘산 이들의 하느님’은 저쪽 세상에서도 변함없이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다스리시고 보살피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라는
말씀에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우리가 죽으면 끝나버리는 관계가 아니라,
살아 있을 때에나 죽은 다음에나 변함없이 영원한 관계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 인간이 하느님을 피해서 숨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자살을 한다고 해도 하느님에게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벗어나기는커녕 오히려 하느님의 심판대에 서게 됩니다.)
또 이 말씀에는 “하느님 앞에서 항상 ‘영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라는 가르침도 들어 있습니다.
미신을 믿고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죽은 신’을 섬기는 생활이고,
그것은 ‘죽어 있는 생활’입니다.
내세의 영원한 생명은 생각하지 않고
현세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대해서만 집착하는 것도 ‘죽어 있는 생활’입니다.
‘살아 계시는 하느님’을 섬기는 신앙인은
하느님과 함께 살아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언제나 항상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하느님 뜻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영적으로 살아 있는 생활입니다.
이쪽 세상에서부터 살아 있어야 저쪽 세상에서도 살아 있을 수 있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증명할 수도 없고 확인할 수도 없다는 이유로
부활을 안 믿습니다.
물론, 아직 종말이 오지 않았고,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지 않았으니,
그 나라에서 이루어질 부활과 그곳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생명을
증명하거나 확인할 방법은 아직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사도들의 증언을 믿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있고, 우리 자신의 부활도 믿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이들도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7-19).”
부활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나는 죽으면 사라지는 허무한 존재일 뿐이다.” 라는
생각 속에서 허무한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에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부활 후의 삶’을 ‘현세의 삶’의 연장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런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부활 후의 삶’은 ‘완전히 새로운 삶’이고, 모든 것이 완벽한 삶이고,
참 행복과 참 평화만 누리는 삶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고 희망입니다.
그곳에서는 그 어떤 ‘한(恨)’ 같은 것은 하나도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서로가 서로에게 기쁨이 되고 행복이 되는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르 12,18-27: 살아있는 이들의 하느님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구약의 모세 오경만을 성서로 인정하였고, 거기에 영생에 대한 언급도, 천사도 영혼에 대한 언급이 없었기 때문에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 오늘의 질문은 신명 25,5이하에 나오는 규정에 근거한 것으로서 아주 과장된 질문이다. 이 질문은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어리석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사두가이들은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는 하느님의 권능을 보지 못한다.
사두가이들은 부활을 부인했지만, 주님께서는 부활을 인정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24절) 하시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26절)고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해 확실하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 자체가 그분이 하느님이심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우리의 부활한 몸은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처럼 될 것이다. 이 세상을 떠난 뒤 부활하여 천사들과 같아질 그리스도인들에게 약속된 것은 혼인이 지니고 있는 육체적 요소들의 회복이 아니다. 혼인이라는 것은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생명을 이 세상에서 계속 이어가기 위한 방법이다. 그래서 자식을 낳는 것이 혼인의 목적이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장가를 들고 시집을 가는 것이다.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25절) 부활한 다음에는 다시 죽는 일이 없어 혼인의 필요성이 천국에서는 없어진다는 의미이다. 모두가 천사들과 같아서 일곱 형제와 차례로 결혼한 그 여자도 부활한 다음에는 그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탈출 3,6의 말씀으로 증명하신다.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이렇게 성조들의 하느님이라면 그들은 다른 모습으로 살아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이다.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들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교부들은 ‘살아있는 인간이 하느님 최대의 영광’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살아있다는 것은 목숨이 붙어있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 안에 하느님의 뜻 안에 살아있다는 의미이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마태 8,22). 이들은 구원의 길을 모르고 하느님도 모르는 알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들을 말한다.
언제나 하느님 앞에 살아있는 우리가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하느님께서 살아있는 우리들의 하느님이 되시지 않겠는가? 당신을 떠나 죽은 자들이 되지 말고 그분의 뜻을 올바로 실천하면서 언제나 살아있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산 이들의 하느님 이시다.(마르 12, 27)
-한상우신부-
꽃도 꽃잎도
마지막 순간처럼
오늘을
살아갑니다.
온 힘을 다해
사랑해야 할
지금 순간입니다.
함께 사랑해야 할
오늘의 살아있는
감사의 시간입니다.
산 이들의
하느님 안에서
행복을 찾습니다.
행복을 찾기위해
과거의 것을 먼저
떠나보냅니다.
행복의 시점은
언제나 지금
이순간입니다.
모든 시간을
이끌어가시고
끌어안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산 이들의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되는
우리의 삶입니다.
산 이들의
하느님께
이 모든 것을
맡깁니다.
산 이들의
하느님 안에서
위안과 행복
그리고 마음을 여는
기도로 이 모든
여정을 봉헌합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 각자에게 부활이 어떤 의미인지 묻습니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다"(마르 12,18).
예수님 시대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지만, 죽음 이후의 삶은 인간의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입니다. 경험을 쌓아 공유할 수 없을 뿐더러 증명할 수 없는 영역이라 그렇지요. 게다가 죽음은 인간의 약함과 고통이 절정에 이르러야 관통하는 문으로 보이니, 무지에 두려움까지 더해져서 그런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마르 12,25).
예수님께서 부활을 이야기하십니다. "다시 살아남"! 하지만 부활 이후의 삶은 지상 삶의 형태와 다르다고 하십니다. 지상 삶의 구조에 집착해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차원입니다.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마르 12,25).
혼인 제도를 빌어 부활 이후에 대해 여쭈니 예수님도 그에 상응하는 예를 드시지요. 자손 번식이 혼인의 목적 중 하나라면 천상의 삶에는 그 목적성이 불필요합니다. 또 자기 증여와 상호적 사랑이라는 목적성 역시 이미 보편적으로 이루어진 상태이니 굳이 두 사람을 엮어 발휘할 이유도 없을 터입니다.
"산 이들의 하느님"(마르 12,27).
중요한 건 우리의 아버지 하느님이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라는 점입니다. 창조와 소멸의 주권자시고 생명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그분은 우리 죽음 이전과 이후에도 변함없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육의 눈으로 볼 때 펄펄 살아 움직이건, 육의 생명이 소진되어 저 세상으로 건너갔건, 우리는 하느님 앞에 살아 있습니다.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의 눈에 우리 생명의 연속성이 육신의 죽음 따위로 단절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 숨을 받아 생명을 누리기 시작한 순간부터 다시 생명의 나라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때까지 우리는 그분 앞에 살아 있는 존재이고, 그분은 살아 있는 우리의 살아계신 하느님이십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히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2티모 1,9).
하느님께서 우리가 구원되고 거룩히 살기를 원하십니다. 죽음 이후만이 아니라 이 지상의 삶에서도 그러기를 바라시지요. 구원과 성화는 죽음 이후 어느 순간에 짠 하고 이루어지는 사건이기 이전에 이미 이 지상에서부터 돋아나 자라는 나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폐지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을 환히 보여 주셨습니다"(2티모 1,10).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죽음 이후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버린 사람입니다. 구원과 성화는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이제로부터 영원히 누리는 상태이니까요. 또 당신 죽음으로 죽음을 폐지하시고 우리의 생명이 되어 주신 예수님 덕분에 우리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생명을 꿈꿀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벗님은 지금 구원과 성화의 여정을 걷고 계시지요? 그렇다면 죽음 이후에도 그처럼 살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살아 숨쉬고 춤추며 지상에서부터 몸에 밴 찬미와 흠숭, 사랑을 완성해 나갈 것입니다. 그 행복을 앞당겨 전율하고 용약하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다시 불태우려면
-김찬선신부-
오늘 바오로 사도는 제자 디모테오에게 여러 가지 권고를 합니다.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라고 하고,
하느님께서 주신 것은 비겁함의 영이 아니니 자신이 복음을 전하게 된 것과
스승 바오로가 복음을 전하다 수인이 된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권고하는 것은 다모테오가 하느님의 은사를 받고도
그것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그래서
은사를 불사르지 않고 잠자코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잖습니까?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라는 것은 한때 불태웠던
불꽃이 지금은 꺼져있으니 다시 불태우라는 것이 아닙니까?
게다가 이어서 비겁함의 영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까지
받았음을 얘기하고 있으니 한때 성령의 은사에 힘입어 힘차고 열정적으로
복음을 선포하던 그가 이제 힘도 빠지고 사랑과 열정도 사라져
복음 선포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닌가 충분히 생각이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권고의 배경은 젊은 혈기로 의욕적으로 복음을 선포하던
디모테오가 안팎의 어려움으로 복음 선포가 아무런 성과도 없고,
이 사람 저 사람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구석으로 몰리게 되고,
움추려들자 젊은이답게 그리고 자신의 안수로 성령을 받은 사람답게
다시 힘을 내라고 바오로가 격려하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아무튼 오늘 바오로의 권고는 성령의 힘을 되찾으라는 것인데
우리도 나이 먹어서 힘이 없든 아파서 그렇든 힘이 없을 때
보약을 먹을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힘입어야 합니다.
왜냐면 보약은 몸에 좀 힘을 줄 수는 있지만 모든 힘을 줄 수 없지요.
모든 힘을 주는 것은 성령뿐입니다.
얼마 전 어떤 형제님이 요즘도 작곡을 하는지 물어오셨습니다.
그 얘기를 하면서 저는 10년 전부터 작곡을 못하고 있다고,
작곡이든 글이든 창작이란 엄청난 힘을 요구하는 것인데
힘이 달려서 못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사실 저는 요즘 매일 강론 쓰는 것에 많은 시간을 쏟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전에보다 더 깊이 있고 신선한 강론이 나오지 않습니다.
전에는 새벽에 일어나 1시간 정도면 나오던 강론이 서너 시간 끙끙
앓아도 잘 나오지 않으니 작곡에 이어 강론도 쓰지 말아야 하지 않나
작년부터 사실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사실 힘에는 몸의 힘, 곧 체력, 시력, 청력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집중력, 창의력, 추진력, 설득력, 인내력, 포옹력, 이해력, 정신력, 등과
사랑, 절제, 용기, 가난, 겸손과 같은 덕들도 다 힘이지요.
그런데 덕에 하늘이 주는 천부덕과 인간이 노력하여 얻는 습득덕이 있듯
다른 모든 힘에도 하늘이 주는 힘과 땅에서 우리가 얻는 힘이 있지요.
음식이나 보약이나 체력 단련이나 기운동과 같은 것이 우리가 땅에서
얻는 힘이라면 기도로 성령의 힘을 입는 것이 하늘이 주는 힘이지요.
그런데 앞에서 열거한 힘 중에서도 사랑과 절제와 인내와 용기 같은 것은
밥 많이 먹는다고 생기는 힘이 아니고 근본적으로 영적인 힘이며,
영의 힘 중에서도 성령의 힘인데 성령은 힘 주시는 영인데 비해
악령은 힘을 빼앗는 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음의 권고를 우리도 오늘, 아니 영원히 마음에 새겨야겠습니다.
"내 안수로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마르코 12,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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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의 유일한 행복의 기준이 성령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을 받는 시간이 ‘기도’이니, 행복을 누리기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이 기도가 되지 않으면 아직 천국에 들어올 행복의 기준을 갖추지 못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두가이와 같은 현세주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이 세상의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행복의 기준을 성령으로 둘 줄 알아야겠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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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中庸)에서 중은 희로애락이 발현되기 전의 상태라고 이야기합니다. 기쁨과 슬픔의 중간이 아닙니다. 분노와 즐거움의 중간이 아닙니다. 중은 가운데나 평균이 아닙니다. 모든 감정이 드러나기 전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기에 중은 천하의 근본이 됩니다. 영성신학에서도 중용(Indiferentia)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부귀보다 가난을 택할 수도 있고,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도 있고, 장수보다 단명을 택할 수도 있는 것이 중용입니다. 이 역시 희로애락의 감정으로는 도달 할 수 없는 영적인 길입니다. 중용에서는 교육을 통해서 희로애락의 감정을 넘어서는 도를 찾으며 그 과정을 화(和)라고 합니다. 화에 이르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들리지 않는 곳에서도 자신을 잘 돌보아야 합니다. 그것을 신독(愼獨)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늘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신독을 통해서 중용에 이르면 하늘의 기운을 얻고, 도를 찾아 화에 이르면 땅의 기운을 얻습니다. 하늘은 시간의 영역입니다. 땅은 공간의 영역입니다. 그러기에 중용에 이르면 하늘과 땅을 이롭게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늘과 땅은 자연재해를 통해서 변화를 수반합니다. 그러나 내가 중용의 삶을 산다면 자연재해 앞에서도 내 삶의 가치를 능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중용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하늘이 조화롭다고 해도 내가 그 가치를 알지 못합니다. 인간의 능력과 재능은 인간이 중용의 삶을 살 때 하늘과 땅을 능히 풍요롭게 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중용의 삶을 살지 못하면 하늘과 땅에 엄청난 피해를 주고 있음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나라는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놓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이러한 삶은 중용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도를 통해서 조화를 이루는 삶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부활하면 이 세상에서의 삶과 원칙은 적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애벌레는 2차원의 삶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나비가 되면 3차원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2차원의 삶에서는 전혀 상상 할 수 없는 것들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눈앞의 것만 볼 수 있고, 느린 속도로 기어야 하는 애벌레와 하늘을 마음껏 날 수 있는 나비는 전혀 다른 차원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활을 한다는 것은 이렇게 다른 차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신앙은 죽음 이후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부활의 신앙은 지금 이곳에서의 충실한 삶을 이야기 합니다. ‘불신과 편견’의 벽을 허무는 것입니다. 민족과 계층의 벽을 허무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라는 성의 벽을 허무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지금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부활 신앙의 핵심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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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지 안았어야 할 인간으로 살지 않게 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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