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5월31일 성령 강림 대축일

Margaret K 2020. 5. 30. 19:26

2020년 5월31일 성령 강림 대축일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요한 20,19-23)

 

“Receive the Holy Spirit.
Whose sins you forgive are forgiven them,
and whose sins you retain are retaine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병규신부-

 

예수님께서 주시는 성령께서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을 계속해서 일깨우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순하고 명료합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위하여 닫힌 마음을 열고, 서로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용서’의 삶으로 우리 신앙인을 초대하십니다.
성령을 통하여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는 일은 서로의 다름에 적응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오순절에 성령께서 사도들 위로 내려오실 때, 사도들의 말씀을 저마다 자기 고장 말로 들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사도 2장 참조). 하나이되 서로의 다름이 존중받는 곳을성령께서는 즐겨 함께하십니다. 단절과 반목의 자리, 굳이 다름을 같음으로 여겨야만 하는 곳에서 성령께서는 탄식하시며 아파하십니다.
성령을 받아 누리는 이들은 서로의 다름은 다름으로 놓아둔 채, 서로의 고유성을 감상하고 그 고유성을 찬미하는 데 열심입니다. 세상에 사는 누구라도 자신의 이름으로 존중받고 찬미받을 수 있는 세상을 꿈꾸는 일이 성령과 함께하는 일입니다. 성령과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늘 새로운 다름을 향한 설레는 탐험의 여정입니다. 세상의 다양한 삶을 느끼고 체험하며 다채로운 세상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하는 일입니다. 
오월의 마지막 날, 누군가에게는 잔인할 만큼 아름다운 날,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성령 안에서 온 세상을 껴안는 벅찬 감동의 시간을 기념하고 축하해야 합니다. 축하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이 삶에 함께해 주셔서 ……. 

성령의 은총

-키엣 대주교-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성령의 숨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성령은 바로 숨, 생명입니다.

“성령께서는 생명을 내려주신 분”

형체도 없이 혼란으로 가득 찬 하늘과 땅에는 어떤 생명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영이 물과 땅 위를 감돌자 하늘과 땅, 우주가 형태를 갖추게 되었고 성령께서는 세상 만물에게 생명을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바오로 성인은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부활시킴으로써 훗날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오순절이 되었을 때 그들은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성령의 은총을 받은 사도들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약하고 두려움에 떨었던 그들은 용감하고 적극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배우지 못한 어부였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다 이해하지 못한 그들은 이제 세상 사람들에게 그들의 언어로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리를 다투는 이기적이었던 사람들이 이제 주님만을 생각하고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할 준비를 하는 사람들로 변화 되었습니다.

성령은 사도들의 영혼을 바꾸었습니다. 성령의 불꽃은 그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었고, 그 생명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시 새 생명을 나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힘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성령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성령의 불꽃이 존재할 때만이 영혼이 정화될 수 있고 주님의 사랑을 담아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같이 살아야만 하는 공동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잘못이, 한 사람의 이기심이 세상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이기심으로, 경계심으로 그들을 멀리한다면 그 세상 속에 소외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질 것입니다. 같은 운명을 가진 세상을 살아가는 세상에서 메말라 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설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뿐입니다. 성령을 모신 순수한 영혼만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성령이 숨쉬는 영혼만이 서로에게 따뜻함을 전할 수 있습니다.

세속적인 욕심, 잘못된 생각과 행동들이 영적인 삶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과 이웃을 위해, 내가 살아가는 세상을 위해 나를 버리는 삶, 박애와 자비의 삶, 나를 헌신하고 봉사하는 삶, 그리고 성실하고 새로운 생명의 삶을 살아 갈 수 있도록 기도 드려야 합니다.

주님, 저희의 내면과 밖에 있는 모든 것을 순수하게 변화시킬 수 있도록 저희를 인도하여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성령께서 함께하심을 느끼고 있습니까?

2. 성령께서는 언제나 가르침을 주십니다. 성령께서는 나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셨습니까?

3. 어려운 현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령의 사람이 되면

-임상만신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40일간 세상에 머무르시며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에 대한 말씀을 해주시고, 약속의 날에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단호하게 명령하셨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나에게서 들은 대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기다려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너희는 며칠 뒤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사도 1,4-5) 

제자들은 분부대로 마르코의 다락방에 모여 열흘 동안 오직 기도에 힘썼고, 그 열흘째 되는 날인 오순절에 약속하신 대로 성령께서 그곳에 불처럼 강림하셨다. 바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성령을 통해 이 땅에 태동한 날이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라고 말씀하시며 성령을 건네주시자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했다고 전한다. 

그들은 3년 동안 예수님과 먹고 자고 듣고 살았지만, 예수님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하느님 나라의 비전에 대한 확신도 갖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랬던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나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승천을 선포하기 시작했고, 이 모든 일에 대해 확신에 찬 모습으로 살기 시작했다.(사도 2장) 이렇게 제자들의 역동적인 변화는 바로 성령 강림 때문이라고 성경은 전한다. 

오늘 독서(사도 2,1-11)에 보면 잘 배우지도 못한 제자들이 동시에 여러 나라 말을 하고 놀라운 기적을 행한다. 베드로 사도는 더 나아가 감동적인 대중 설교를 통해 한꺼번에 3000명에게 세례를 주었고, 다른 곳에서는 장정만도 5000명이나 예수님을 믿게 만들었다. 그동안 예수님의 죽음 이후 다 끝났다는 두려움으로 다락방에 숨어 지내던 제자들이 문을 박차고 나와 담대한 설교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고 있다. 바로 오늘 강림하신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믿음이 없던 제자들이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는 모습으로 돌변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도 성령을 받기 전의 제자들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가 예수님을 열심히 믿는다고 생각해도 생활에 기쁨은 거의 없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을 이웃에게 전할 용기와 열심히 봉사하려는 열의도 없다. 우리가 예수님을 잘못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불안한 때가 많다. 성령 강림을 통해 복음 선포의 사도로 변화된 제자들을 보며 우리도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완전히 새롭게 변화될 수 있다는 희망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왜냐하면, 성령은 나이나 성별, 학력이나 직업에 상관없이 성령의 오심을 열망하는 누구에게나 강림하신다. 

우리도 “여러분이 믿게 되었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사도 19,2)라는 질문에 스스로 대답해야 한다. 오랜 신앙생활에도 참 예수님을 만나보지 못했다면, 믿음 생활로 사무치는 기쁨과 평화를 누린 적이 없다면 아직 성령의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 성령은 어둠을 빛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변화시키시고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이들을 살맛 나게 해주시는 협력자이시다. 또한, 성령께서는 우리가 당신 안에서 살기를 시작하면 더 이상 세상에 두려울 것, 불안할 것, 미진한 것이 하나도 없게 인도해주시고, 우리의 모든 갈등과 혼란까지 극복해 나가도록 우리를 끝까지 붙들어 놓으시는 위로자이심을 믿어야 한다.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5,5)

뉴 노멀 시대와 성령의 숨

-김혜윤수녀-

 

‘뉴 노멀’(New Normal). 새롭게 보편화된 사회·문화·경제적 표준을 의미하는 용어입니다. 더 이상 돌이킬 수도, 수습할 수도 없는 상태가 되어서, 방향을 돌이키지 않으면 안 될 국면에 다다랐음을 드러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뉴 노멀 시대’의 도래는, 어쩌면, 기존의 ‘정상’적 삶이 얼마나 정상이 아니었는지를, 얼마나 많은 과잉과 가식, 위태로움을 품고 있었는지를 역으로 확인시켜주는 계기가 아닐까 합니다. 불과 몇 달 전까지 우리의 일상을 주도해왔던 경쟁적 소비와 인간의 상품화, 그로 인한 ‘피로사회’가, 실은 우리 스스로 초래한 모순이며 빈곤임을 똑똑히 인식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의 본문들은 온통 ‘새로움’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지향해야 할 새로움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려줍니다. 

■ 복음의 맥락
‘오순절’은 이스라엘의 모든 성인 남성들이 의무적으로 예루살렘에 모여 기념한 유다인들의 3대 순례 축제 중 하나였습니다. 원래는 밀 수확을 감사드리는 농경사회의 축제로 ‘맥추절’이라 불렸는데, 무교절을 지낸 후 7주간 후에 지낸다고 하여 ‘칠칠절’이라고도 불렀습니다. 그러나 유다인들 사이에는 점차 ‘오순(五旬)절’(히브리어 ‘샤부오트’)이라는 이름으로 정착되는데, 무교절 후 7주간이 지나 50일이 되었을 때 축제를 지내기에 붙은 명칭입니다. 이렇게 풍요로움을 감사하는 유다인들의 축제에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을 받음으로써 더욱 그 충만함을 배가하게 됩니다. 유다인들의 오순절 축제 때 그리스도인들은 성령 강림 대축일을 지내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에 봉독되는 성경 본문은 언제나 동일하므로, 왜 성령을 ‘바람’ 혹은 ‘숨’의 이미지로 표현해왔는지, 고대로부터 바람과 숨이 왜 ‘신성’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는지에 대한 설명은 필자의 작년 말씀묵상을 참조하시면 좋겠습니다. 성령의 선물로 제시된 ‘소통’(제1독서에서 강조된 각자의 언어를 모두 자기말로 이해하고 알아들음)과 ‘일치’(제2독서의 각 지체가 하나의 몸을 이룸)에 대해서도 작년 내용을 참조하시면 좋겠습니다. 이번 묵상은 복음에 집중하여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바르나바 다 모데나의 ‘성령강림’(1377).


■ 성령을 받아라 
요한복음은 성령을 받게 되는 상황과 그 경위를 매우 자세하게 묘사하는데, 각각의 표현들은 매우 깊은 신학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1)주간 첫날 저녁: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날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과 동일한 날, 바로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요한 20,19)이었습니다. 부활은 매우 이른 아침에 발생하고 성령을 받은 일은 그날 저녁에 발생한 것입니다. 이는 유다인들의 안식일(주간 마지막 날) 전통과 비교되는 그리스도교적 전통(주일, 주간 첫째날)을 부각시킵니다. 

2)굳게 잠긴 문: 예수님의 처형 이후 제자들은 모두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굳게 잠겨있던 문’은, 오히려 부활하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인식하게 하는 장치가 되는데, 문이 아무리 굳게 닫히고 잠겨있었다 하더라도 부활하신 예수님의 일은 이러한 장애를 쉽게 넘어섬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3)제자들 가운데 서심과 평화의 인사: 평화의 인사는 유다인들의 일상적 인사 ‘샬롬’을 말합니다. 히브리어 ‘샬롬’(평화)은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만을 의미하지 않고 모든 것이 충만해져 더 이상 싸울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작년 연중 14주일 말씀묵상 참조) 이러한 인사를 제자들에게 건네셨다는 것은 이제 완성과 충만의 시간이 도래했음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제자들 가운데 서시어’라는 표현은 이렇게 충만한 ‘샬롬’이, 그분께서 우리 가운데 서실 때에만 가능한 은총임을 분명히 알려줍니다. 

4)상처를 보여주심: 예수님은 당신의 상처를 보여주심으로써 부활이 단순히 환영이나 상상이 아님을 확인시켜 줍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20절)고 합니다. 상처를 온전히 유지하고 부활하셨다함은 상처를 없애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상처를 가진 채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 부활임을 알려줍니다.

5)성령을 불어 넣어주심: 성령을 받음은 두 번째 평화의 인사 직후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평화가 너희와 함께!”(21절)라고 하시고 “숨을 불어 넣으며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22절) 숨을 불어 넣으시는 모습은 창세 2장 7절에 등장하는 아담의 창조를 연상시키는데,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숨을 불어 넣으심으로써 생명을 주시는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 역시 당신의 숨을 불어 넣으심으로써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인간이 신비로운 이유는 하느님의 숨으로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6)죄의 용서: 하느님의 숨을 받은 제자들은 하느님의 성령을 그들의 존재 안에 받은 것이기에, 이제 하느님의 권한 즉 용서의 권한까지 받게 됩니다.(23절) 이는 제자들에게 전권이 주어진 것과 예수님의 권한이 이제 제자들을 통해 지속됨을 선언합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숨’이고, 이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선물’입니다. 하느님의 숨으로 우리는 새로움에 초대되는데, 사실 성경이 제시하는 ‘새로움’이란 우리가 한 번도 접하지 못한 미지의 낯선 현실이 아니라,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충분히 받은 생명에로 돌아가는 ‘회복’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은 완전한 분이시고 그분의 창조도 이미 완전했기에 더 이상의 ‘새 것’은 필요하지도 존재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창조 때 하느님께서 ‘새 것’으로 창조한 것이었지만 인간의 탐욕과 원죄로 퇴색되고 ‘헌 것’이 되어버린 상처와 자국들을, 성령의 ‘숨’을 통해 본래의 ‘새 것’으로 다시 복원하는 것이 ‘새로움’의 실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뉴 노멀의 시대’로의 진입은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병들고 피폐해진 지구와 인류를, 보시니 좋았던 바로 그 창조의 상태로 회복하는 것, 인간이 보존하고 지켜내야 할 본연의 존엄과 가치들을 우리 삶의 중심에 다시 질서 세우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덜 경쟁하고 덜 소비하며 덜 투쟁할수록 인간은 더 행복하고 더 안전하며 더 생존할 수 있습니다.

더 중요한것

-이일환신부-

 

‘당신이 사색에 잠겨있는 동안 밖에 있는 사람은 사색이 되어갑니다.’ 예전에 유행했던 화장실 유머입니다. 이 우스갯소리에 잠시 나의 화장실 습관(?)을 돌아보았습니다. 생각해보니 요즘 은 화장실 안에서 사색(思索)에 잠길 시간이 없었네요. 늘 스마트폰을 들고 있으니까요. 볼일을 다 보았음에도 화면을 들여다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심지어 다리가 저려야 일어날 때가 한두 번 이 아닙니다. 사제관 화장실에서야 밖에서 기다릴 사람이 없겠지만, 많은 이들이 사용하는 곳에서 도 그런다면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정말 사색(死色)이 되어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유다인과 박해의 위험에서 벗어나고자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던 제자들은 그 안에서 편안했 을까요? 안전하다고 여겨진 그 안에서 오히려 사색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닫아 잠금으로써 바깥과 차단되면 편안할 줄 알았는데 그들이 기쁨을 찾은 순간은 되려 잠긴 문이 열리고 (혹은 잠긴 문이 소용없어지고)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며 숨을 불어넣으셨을 때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 게 쓴소리가 아닌 - 왜 문을 잠가놓고 앉아만 있는지, 왜 여인들의 증언을 믿지 못했는지, 왜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는지 등 - 가르치고 따지는 것이 아닌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며 더 큰 사랑 을 보여주셨을 뿐입니다.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신 사랑의 그 한 마디는 잠긴 문을 열게 했습니 다. 옳고 그름을 가르쳐주는 것보다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적지 않은 어른들이 청소년들에게 다가가기 어려워합니다. 청소년들이 방의 문도 마음의 문도 닫아걸었다고 말하며 아무리 두드려도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두드릴수록 그들은 더 냉랭해진다고 탄식을 합니다. 그런데 왜 그 문을 두드려 열고자 했을까요? 닫힌 문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인가 요, 그들이 걱정되어서인가요? 혹시 그들에게 어른들이 생각하는 옳고 그름을 가르치고 다그치려 고 한 건 아니었는지요. 문을 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강제로 문을 열 기 위해서는 물리적인 힘이 필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 즉, 사랑의 숨을 불어넣으면 잠긴 문은 스 스로 열릴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성령 강림 대축일을 맞아 저마다 받은 좋은 선물로 우리 청소 년들을 한 번 더 아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요한 20,19ㄴ)

성령, 바이러스, 청소년

-이승주신부-

 

비둘기도 있지만, ‘성령’ 하면 역시 불과 바람이죠. 불과 바람은 명확히 규정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어서 자유롭고 신비로운 성령의 표상으로 그보다 적합한 것이 없습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하지만 숨 쉬는 것처럼 크건 작건 어디에나 있는 바람. 물질처럼 보이나 실은 물질 이라 할 수 없는, 물질과 비물질의 경계를 넘실대는 불. 모 두 인간의 언어나 지각으로 규정할 수 없는 성령을 이해하 기에 참 괜찮은 비유입니다. 세상에는 이렇게 존재의 경계를 넘나드는 또 다른 녀석 이 있습니다. 바로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를 오가는 바이러 스입니다. 살아 있는 숙주에 기생할 때는 생물처럼 증식하 고 변이하지만 숙주가 없으면 결정화되어 돌처럼 되어버리 는, 그러다가도 다시 숙주를 만나면 활성화되는 그런 녀석 입니다. 세균과 많이 혼동할 정도로 흔하게 여기고, 아주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는 않았던 바이러스가 지금은 전 세계의 지속적인 화제가 되고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바이 러스 입장에서는 한편으로 억울할 법도 합니다. 바이러스 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인간을 공격하는 것도 아니고 실험 실에서 만들어졌든 자연적으로 발생했든 그저 생겨먹은 방 식과 기능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뿐인데 말이죠. 지금은 쑥 들어갔지만 한때는 이 바이러스라는 말이 아주 긍정적인 의미로도 자주 사용되었었습니다. 넓고 강력한 전파력이 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행복 바이러스나 사랑 바이러스처럼 

좋은 것을 널리 퍼뜨린다는 의미로도 사용되었었는데…. 앞으로 바이러스가 긍정적이었던 그 위상을 회복할 수 있 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이렇듯 경계를 넘나들고 어떤 틀로 규정될 수 없는 모호 함을 지닌 존재가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청소년’입니다. 어린이와 어른의 경계를 넘나들고 첫 번째 탄생인 육신의 탄생과 두 번째 탄생인 심리적 탄생의 경계에서 불균형과 불안정을 살아내고 있는 것이 바로 청소년입니다. 그래서 청소년은 인생의 여정 중 가장 성령의 모습을 닮아 있다고 감히 생각합니다. 신앙인들이 열정 어린 세 초기를 지나 언젠가는 ‘하느 님이 정말 계시는 걸까?’라는 질문에 맞닥뜨리게 되듯 부 모님의 보호 아래 ‘당연한’ 세상을 살아가던 이들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시작하는 것이 청소년입니다. 그 질문이 시작되었을 때 무조건 믿으라고 하거나 무조건 시 키는 대로 하라고 하는 것이 성령의 활동 방식인지 끊임없 이 고민합니다. 그 질문은 광야의 40년처럼 불안하고 두렵 지만, 그 길을 자유롭게 걸으며 의심, 실수, 일탈, 성취, 수 정, 실패, 시행착오의 경험을 통해 책임지는 법, 인생을 살 아가는 법, 하느님을 향하는 법들을 습득하여 그동안 배웠 던 가르침과 일치 시켜나갈 때 진정한 탄생이 완성된다고 생각합니다.  

<저 산 너머>, 아주 특별한 씨앗

장신호주교-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이며, 청소년 주일입니다. 청소년 주일은 청소년들에게 그리스도의 진리와 사랑 을 전함으로써, 교회가 청소년들과 함께하며, 세계의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청소년들과 함께 노력하겠다고 다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다음, 오순절에 사도들이 모여 있을 때 성령께서 내려오셨습니다. 성령 께서는 사도들에게 표현의 능력을 주시어 다른 언어로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을 전하게 하셨고,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언어로 알아들었습니다.(제1독서: 사도 2,1-11 참조) 

  예수님께서는 둘이나 셋이 모인 곳에 함께 있겠다고 하셨고(마태 18,20 참조),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함 께 있겠다고 하셨으며,(마태 28,20 참조) 성령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요한 14,16-17 참조) 결국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하시며, 말씀과 성체를 통하여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데 말씀은, 그 말씀을 기록하신 성령의 비추심에 따라 읽어야 올바르게 이해하게 됩니다. 성체의 경우도 빵 과 포도주를 봉헌하여, ‘성령의 힘으로’(감사기도 제2양식) 성체와 성혈을 이루게 됩니다. 이렇듯 성령을 통 하여 주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은 우리 각자가 성령을 모시고 ‘공동선을 위하여’(1코린 12,7) 활동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어린 시절을 그린 영화 <저 산 너머>를 보았습니다. 추기경의 어머니는 “느그들(너희들) 마음속에는 아주 특별한 씨앗이 심어졌지 싶다.”라고 하셨습니다. 소년 김수환은 ‘내는(나는) 신부님 안 할 거다. 인삼 장수 할 거다.’라고 답했지만, 나중에는... [영화를 보시기 바랍니다.] 사실 우리 자신과 우리 청 소년들에게 심어진 ‘아주 특별한 씨앗’은 바로 세례와 견진을 통해 심어주신 ‘성령의 씨앗’, ‘성령의 이끄심’입 니다.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듯이’(제2독서: 1코린 12,3), 각자에게 심 어진 아주 특별한 씨앗도 ‘성령의 힘으로’ 자라나고 열매 맺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주 “오소서. 성령님”(부속 가: 성령 송가)이라고 기도하며 성령을 청합시다. 그리고 성령의 이끄심으로,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가, 다른 장소가 아닌 바로 이곳에서, 다른 시간이 아닌 바로 지금, ‘공동선을 위하여’ 활동하도록 합시다. 주님 이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좋아하지 않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손님은 왕이다.’라는 말입니다. 물론 친절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서로서로 존중하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누구는 왕이 되고, 누구는 종이 되는 계급의 관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자신이 진짜 왕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 보입니다. 다짜고짜 반말하고, 아주 작은 것에도 꼬투리를 잡기도 합니다. 소위 갑질한다고 하지요. 이런 사람을 보면 그의 인격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 한 가지만으로 그 사람을 온전하게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한 것은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의 말을 하면서 상대방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 인격적으로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되면서 존경하게 됩니다. 

가게에서 원하는 서비스를 받지 못했다고 그 자리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면 결국 자기만 손해입니다. 좋은 말로 해결할 수도 있는 것을 화부터 내는 사람은 서비스를 받을 자격도 없는 사람이 아닐까요? 

가장 낮은 자가 되신 주님께도 이렇게 소리를 치며 자신의 화를 쏟아부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당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과연 주님 앞에 갔을 때, 고개를 제대로 들 수가 있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문이 모두 잠겨 있는데도 방안에 나타나셨습니다. 문이 잠겨 있다는 것은 제자들의 두려움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려줍니다. 예수님의 죽음 이후, 자신들 역시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이 두려움을 가져다주었을 것입니다. 또 죄지은 사람이 고래를 뻣뻣하게 들 수 없는 것처럼, 주님을 배반했기에 그 사실 역시 두려움으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문이 잠겨 있음에도 아랑곳없이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시어 평화를 먼저 빌어 주십니다. 그리고 육체의 부활이라는 증거를 위해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지요.

주님께서는 불안해하는 제자들을 평화로 거듭 위로하신 뒤에,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제자들은 이제 자기 뜻이 아니라 파견하신 분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파견하신 주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용서’였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아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성령의 숨으로 죄를 용서하는 영적 권능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세례로 성령을 받았습니다. 성령을 받음으로 우리는 세상에 파견되었습니다. 파견하신 분의 뜻은 ‘용서’라는 사랑에 있음을 기억하면서, 남을 왕의 모습으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파견하신 주님의 뜻을 충실하게 따를 때, 성령의 선물은 우리 안에서 더욱더 풍성하게 열매 맺게 됩니다.

고통은 지나가지만 아름다움은 남는다(르누아르). 

 


어떤 법을 지킬 것인가?


어느 본당신부가 레지오 단원에 대해 아쉬움을 이야기합니다. 레지오 단원들이 아주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인정하지만, 레지오 교본에 맞지 않는다면서 서로 다투는 모습을 종종 본다는 것입니다. 물론 교본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율법주의에 빠진 것이 아닐까 싶다고 아쉬워합니다. 

사실 제일 편한 것이 법대로 사는 것입니다. 법이란 권력에 의해 강제되는 최소한의 사회규범이라고 합니다. 최소한의 사회규범이기에 지키려는 마음만 있으면 그리 어렵지가 않습니다. 또 모든 이가 함께 지켜나갈 때 더욱더 편안함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법, 즉 사랑의 계명은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합니다. 내 마음의 상태까지 사랑으로 기울어져 있어야 하기에 지키기가 힘든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지키기 쉬운 작은 법인 규칙만을 내세우면서 사랑의 계명을 어기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킵니다. “나는 법대로 사는 사람이야.”라고 말하면서 말이지요. 하지만 세상의 법과 규칙을 뛰어넘는 주님의 법이 더 중요합니다. 

주님의 법에 기초해서 생활해야 합니다. 더욱 주님과 가까운 관계, 주님과 함께 하는 기쁨의 삶을 우리 모두 누릴 수가 있습니다.                  

 

성령은 말귀를 선물하신다

-전삼용신부-

 

임금님에게 외아들이 있었는데 며느리를 고르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이 나라의 왕후가 될 사람이므로 가장 슬기로운 처녀를 찾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임금님이 며느리를 뽑는다는 광고를 듣고 아름다운 처녀들 수백 명이 궁전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임금님은 이 처녀들에게 시험문제를 냈습니다.

“너희들에게 쌀 한 되씩을 주겠다. 이것으로 한 달 동안을 먹다가 다시 모여라.”

      처녀들은 큰 걱정이었습니다. 쌀 한 되라면 사흘이면 다 먹어 버릴만한 적은 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처녀는 멀겋게 쌀 물을 끓여서 마시기도 하고, 어떤 아가씨는 처음부터 굶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처녀 대부분은 아예 포기해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처녀 중에 달래라는 어여쁜 소녀가 있었습니다. 달래는 임금님의 쌀을 앞에 놓고 밤새도록 연구를 했습니다.

 

‘훌륭한 임금님께서 이런 엉터리 시험문제를 내실 리가 없다. 임금님의 생각이 무엇일까?’

      아침이 되어서야 달래는 무엇을 깨달았는지 무릎을 ‘탁’ 치고 방실 웃었습니다. 달래는 곧 부엌에 가서 그 쌀 한 되를 가지고 몽땅 떡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예쁜 옷을 차려입고 시장에 나갔습니다. 임금의 며느릿감쯤 되는 이 아름다운 처녀가 떡을 파니까 잘 팔렸습니다. 동네 총각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떡을 사 먹게 되었습니다.

 

      달래는 떡 판 돈을 가지고 다시 쌀을 사서 떡을 만들었습니다. 이제는 더 많은 떡을 만들 수가 있었습니다. 달래는 떡 장사에서 아주 재미를 붙였습니다. 그리고는 남들처럼 굶는 것이 아니라 장사해서 번 돈으로 먹고 싶은 것을 실컷 사 먹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몸도 건강해지고 떡판을 이고 다니며 햇볕에서 일을 열심히 했기 때문에 얼굴도 알맞게 타서 더 아름다워졌습니다.

 

      한 달이 지나고 마감날이 되었습니다. 임금은 높은 보좌에 앉아서 궁궐로 들어오는 처녀들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습니다. 인력거에 탔거나 아버지 등에 업혀 오는 처녀들은 사람이 아니라, 뼈만 앙상하게 남은 송장들이었으니까요.

 

      드디어 달래가 들어왔습니다. 달래는 힘차게 두 팔을 흔들며 들어왔습니다. 그 뒤에는 쌀가마니를 가득 실은 소달구지가 따라 들어왔습니다.

 

“임금님께서 주신 쌀 한 되로 장사를 하여 그동안 제가 잘 먹고 남은 것이 한 달구지나 되었사오니 받으시옵소서.”

      임금님은 달래의 이야기를 듣고 정말 기뻐하였습니다. 그리고 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달래는 있는 것을 앉아서 먹기만 한 것이 아니라, 열심히 일해서 그것을 불릴 줄 아는 참으로 지혜로운 규수구나. 이 나라의 왕후는 일하기를 즐거워하고 지혜가 있는 달래가 되어 마땅하다.”

[출처: ‘지혜로운 며느리’, ‘양지 물고기’님의 블로그]

 

      ‘말귀’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말이 뜻하는 내용”, 혹은 “남이 하는 말의 뜻을 알아듣는 총기”라고 합니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거나, 말귀가 통하지 않는다면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려운 단어를 쓰는 것도 아닌데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다면 이는 못 알아듣는다기보다는 알아듣지 않으려 하기 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외국어를 배워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통 사람은 학교에서 10년 정도 영어를 학과목으로 배웁니다. 그런데 막상 외국인을 만나면 겁을 먹어 한마디도 못 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제가 일반대학 다니며 군대에 갔을 때, 군대 훈련소에서 ‘카투사’(주한미군 부대에 배속되는 한국군)를 몇 명 뽑는다고 해서 자원을 했습니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은 지원하라고 해서 저도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언어연수도 외국으로 가지 못하는데 군대에 있는 동안 카투사에 있으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지원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중에 두 명만 뽑히는 것인데 저는 떨어졌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쉬운 것들인데도 한 마디도 입에서 영어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10년을 배웠는데도 단순한 말도 못 하는 제가 실망스러웠습니다.

 

      신학생이 되어 “안녕하세요.”(ciao!)라는 말도 배우지 못하고 유학을 나갔습니다. 아메리카나 아프리카, 혹은 유럽에서 온 친구들은 이탈리아어를 빨리 배웠습니다. 한국인들은 도저히 그들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영어로 말하려고 했습니다. 물론 영어도 안 됐습니다. 답답해서 한국으로 전화해서 한국말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한국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문제가 뭘까?’

 

한국에서 영어를 배우듯이 이탈리아어를 배워서는 역시 10년을 배워도 안 될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원인을 찾다가 어떤 신부님이 유학 나오기 전에 해 주신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 나라 언어를 배우려면 그 나라와 사람과 말을 사랑해야 해!”

좀 생뚱맞은 말이었지만 그제야 제가 사랑하는 마음이 전혀 없이 오로지 공부를 위해서만 언어공부를 하고 있었음을 알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탈리아어를 사랑할 수 있을까?’

 

제가 좋아하는 ‘성경’과 ‘하느님이시오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이탈리아어로 읽어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랬더니 이탈리아어가 사랑스럽게 느껴졌습니다. 물론 언어습득도 매우 빨라졌습니다. 그러면서 느낀 것은 ‘말귀는 사랑해야 생긴다’는 것입니다. 달래라는 처녀는 임금을 먼저 사랑했기 때문에 말귀를 알아들은 것입니다. 사랑해야 말귀를 알아듣게 되는 것이지, 말귀를 알아듣고 사랑하려면 평생 말귀가 열리지 않습니다.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를 이해하려면 먼저 사랑해야지, 이해하면 사랑하겠다는 식의 마음으로는 평생 그 사람을 이해하거나 용서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용서는 이해해주는 것입니다. 상대에 대한 들을 귀가 있어야 이해도 할 수 있습니다. 그 힘을 성령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사랑의 열매를 주시고 사랑하니까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는 성령강림 때 제자들이 듣는 사람들 각자의 언어로 말을 했다고 말합니다. 그들 수준에 자신들을 맞출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바벨탑 사건 때 언어가 갈라져 서로 알아들을 수 없는 상황이 된 것과는 정반대입니다. 성령은 소통할 수 있게 만들어서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사람들이 갈라지는 이유는 그 안에 성령께서 함께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파도바의 안토니오 성인은 물고기에게 설교하셨다고 합니다. 그 동네 사람들이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자 물고기에게 말하니 물고기들은 잘 알아들었다는 것입니다. 그 동네 사람들보다 물고기들이 더 성령의 도우심을 받고 있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말귀를 못 알아듣게 되는 이유는 자아가 커져서 자기 생각만으로 가득 찼기 때문입니다. 말귀는 자기를 버리고 어린이처럼 순결하게 된 이들에게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우리는 인간관계를 절대 우리 힘으로 맺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를 죽이고 성령으로 가득 찰 때만 세상에 나쁜 사람은 없게 보이고 그러면 모든 사람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그때가 되면 모든 사람의 말을 이해할 들을 귀가 생기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들을 귀를 생기게 해 주시고 그로써 모든 피조물과 소통할 준비가 된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소통을 위해 말귀를 가지려면 먼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광고: 이번 주도 토요일 저녁 7시, 주일 오전 8시, 밤 10시에 제가 출연하는 오다주가 평화방송에서 방영되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성령 충만 은총 많이 받으시길 빕니다 ^^

 

-조재형신부-

 

산보를 가는 길이 어수선해졌습니다. 노후한 가스관 교체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땅을 파고, 관을 묻고, 포장하는 모습을 봅니다. 모든 작업은 다양한 장비를 갖춘 포클레인이 하였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한다면 몇 달은 걸릴 작업이 며칠이면 끝나는 걸 봅니다. 새삼 우리의 삶에 기계와 기술이 깊숙이 들어왔음을 실감합니다. 원하는 정보는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실시간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원하는 물건도 인터넷 쇼핑을 통해서 얻을 수 있습니다. 가전제품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 주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미사가 중단되었지만 영상을 통해서 미사를 볼 수 있었고,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인류의 삶에 커다란 변화를 준 사건들이 있습니다. 인식의 전환을 가져온 사건들입니다. 그 사건들이 오늘 우리 문명의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요?

첫 번째는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변화입니다. 태양이 지구를 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었습니다. 지구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 지구는 태양계의 작은 행성이었습니다. 우리가 속한 태양계는 은하계의 작은 부분이었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아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는 인식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수학과 과학은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석탄, 석유, 전기는 새로운 에너지로 변환되면서 현대문명이 열렸습니다.

 

두 번째는 창조에서 진화로의 변화입니다. 고고학과 생물학은 진화의 고리를 찾아내고 있습니다. 지구의 탄생과 생명의 시작을 찾아내고 있습니다. 45억년 지구의 역사에 5번의 큰 멸종이 있었음을 찾아내고 있습니다. 인간의 출현은 지구의 역사를 1년으로 환산할 때 12 31 11 59분에 해당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진화는 창조의 반대 개념이 아닙니다. 진화는 창조의 역동성을 드러내는 개념입니다. 진화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창조에 협력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 아니라, 인간은 만물과 함께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존재입니다.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는 시간과 공간 안에 우리와 함께 계셨던 예수님께서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셨고, 제자들과 함께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은 무엇이었습니까? 때가 되었으니 회개하고 하느님나라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느님나라는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느님나라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과 말씀이 복음이 되었습니다.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눈이 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듣지 못하는 사람은 듣게 해 주셨습니다. 걷지 못하는 사람은 걷게 해 주셨습니다. 중풍병자, 나병환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풍랑을 잠재우셨습니다. 산상수훈을 통해서 새로운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이는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지금 슬퍼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무참하게 죽으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복음이 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갈릴래아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새로운 빛을 밝히는 곳입니다. 갈릴래아는 두려움과 공포를 넘어 새로운 희망과 사랑이 넘쳐나는 곳입니다. 갈릴래아는 슬픔과 고통 속에 흘리는 눈물을 위로와 격려로 닦아 주는 곳입니다. 두려움과 공포 때문에 숨어있던 다락방은 결코 갈릴래아가 될 수 없습니다. 또다시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갈지라도 거친 광야에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다면 그곳이 갈릴래아입니다. 그곳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성령강림 대축일입니다. 성령은 은사입니다. 교회는 성령의 은사를 구체적으로 7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슬기, 통달, 의견, 지식, 굳셈, 효경,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이 은사는 우리가 받아들일 때, 열매를 맺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통해서 성령이 주시는 열매를 맺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은 따뜻함을 주고, 용기를 주고, 희망을 줍니다. 성령의 열매는 우리가 받아들이는 마음에 따래 풍성하게 열립니다. 오늘 성령강림 대축일을 지내면서 성령의 은사를 청했으면 좋겠습니다.

 

오소서, 성령님. 믿는 이들의 마음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시어 그들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성령께서는 교회 공동체와 개별 그리스도인들을 젊게 하십니다!

 -양승국신부-

 

아흔도 훨씬 넘기신 요셉 어르신께서는 요즘 동년배 친구들로부터의 미움과 지탄을 한 몸에 받고 계십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연세에 비해 너무 젊게 사신다는 것입니다.

 

몇몇 친구들은 이미 오래전 요르단강을 건너가셨습니다. 또 다른 친구들은 뒷방에서 골골하며 누워계십니다. 하루 온종일 천장만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나마 형편이 나은 친구들은 요양원에서 훨체어에 의지한 채, 겨우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 어르신께서는 아직도 팔팔하십니다. 당당히 두발로 서계십니다. 자전거를 타고 시장도 다녀오십니다. 아직도 꼬질꼬질 하지 않으십니다. 머리숱도 풍성하고 허리도 꼿꼿하며 유머감각도 탁월하십니다. 

 

요셉 어르신께서 마을 광장 앞 카페에 등장하시면 사람들은 반가운 나머지 다들 박수를 치고 좋아합니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이라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습니다.

  

그런 소식을 전해들은 요양원 친구들은 ‘무슨 그 따위 인간이 다 있냐? 하느님께서는 왜 이다지도 불공평하시냐?’며 버럭 화를 냈습니다.

  

너무 신기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요셉 어르신께 여쭈었습니다. “젊게 사시는 무슨 좋은 비결이라도 있나요?”

 

“물론 있지!” 

 

“좀 가르쳐주실 수 있나요?” 

 

“당연하지! 이리 따라오게!” 

 

요셉 어르신께서는 당신의 서재로 안내했습니다. 벽에 걸려있는 액자를 가리켰습니다. 거기에는 당신이 직접 달필로 쓰신 글귀가 적혀있었습니다. 

 

제목은 ‘잘 늙기 위한 7가지 비결’이었습니다. 당신이 여기저기서 전해들은 것들을 나름 종합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잘 늙기 위한 7가지 비결 

까칠하게 굴지말자!

Stop and Go! 멈춤과 나아감, 기도와 활동을 적절히 병행하자!

  • 여기 아파! 저기 아파!’라는 말 입에 담지 말기!

시간도 많은데 잘 씻고 잘 입자!

  • 나 때는 말야’라는 말 절대 금지!

최고의 얼굴 맛사지, 자주 환히 웃자!

틈나는 대로 유머 감각 발휘하기. 그러나 너무 오버는 말자! 

 

요셉 어르신의 잘 늙기 위한 7가지 비결을 훑어본 사람들은 다들 고개를 크게 끄덕였습니다. 

 

성령강림대축일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인간의 유익을 위해 하시는 일들이 참 많습니다. 그중에서 하나! 아주 특별한 역할이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와 그 지체인 개별 그리스도인들을 젊게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지니신 특징 중에 독보적인 것이 강한 생명력입니다. 넘치는 활력입니다. 신명나는 에너지입니다. 신선한 역동성입니다. 따라서 성령께서는 뜨뜨미지근한 우리들을 끊임없이 자극하십니다. 잠자고 있는 우리를 일깨우십니다. 맥없이 늘어져 있는 우리를 벌떡 일어나게 하십니다. 결국 우리를 움직이게 하시고 젊게 만듭니다.

  

따라서 성령 안에 사는 사람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아무리 연세가 들어도 젊게 살수 있습니다. 성령 안에 사는 사람들은 가을이 지나고 혹독한 겨울이 다가와도 언제나 마음은 화사한 봄날입니다. 바로 성령의 능력으로 인한 것입니다.

 

성령을 받아라

.-이영근신부-

 

 오늘은 성령강림 대축일입니다.

오늘 <말씀 전례>에서는 성령께서 오시는 두 가지 모습을 보여줍니다. <1독서>에서는 하늘에서 세찬 바람의 소리와 불과 혀의 모양으로,  놀라운 모습으로 내려오십니다. <복음>에서는 닫혀 진 문을 뚫고 아무런 소리도 없이 부드러운 숨결의 모양으로,  고요한 모습으로 들어오십니다. 이 두 가지 모두 하늘 문을 열거나, 땅의 문을 열거나 모두 닫힌 문을 열면서 벌어집니다. 곧 성령의 활동은 문을 여는 일입니다.

성령께서는 하늘을 가르고, 닫혀 진 문을 부수고, 가려진 장막의 휘장을 찢고, 죽음에 갇힌 무덤을 풀며, 우리의 굳은 마음의 문을 여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늘이 문을 열고 땅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묘한 것은 하늘은 하늘이 아니라 땅에서 열리고, 닫힌 문은 마음에서 열린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하늘이 열리는 자리는 바로 우리네 삶의 자리입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 마음 깊은 곳에 계시고, 그러기에 다른 먼 곳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바로 그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성령께서는 바로 지금, 여기 우리 가운데서 활동하신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성령이 베풀어졌고, 우리는 이미 그분 신비체의 몸입니다. 오늘 <2독서>에서는 이를 잘 말해줍니다. ‘신비체는 지체로 이루어진 한 몸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몸은 바로 성령에 의해 지탱되고 존속됩니다. 그 지체를 서로 결합시키고 하나로 묶어주는 힘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발현하시어 평화를 주시는 장면과 성령으로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는 장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로써 협력자이신 성령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새 백성이 탄생되고, 새 시대가 열리고, 그리스도 몸의 신비체인 교회가 탄생하게 됩니다. 그것은 닫혀 진 문을 열고 들어 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더 이상 닫혀 진 문 뒤에 숨어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문을 잠가 놓고 있을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닫혀 진 문을 뚫고 들어오시어, 평화의 인사를 나누십니다. 팔레스티나에서 보통으로 표현하던 이 인사는 이제 인간의 구원을 약속하시는 인사가 됩니다. 이제 이 평화는 주님의 축복이요, 선물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재가 방황이요 두려움이라면, 예수님의 현존이 곧 기쁨이요 평화입니다. 예수님의 현존으로 이제 공포는 기쁨으로 바뀌고, 혼란스러운 무질서는 질서를 찾습니다. 예수님께서 공포와 두려움에 닫혀 진 마음의 문을 열고서, 성령의 숨결을 불어넣으셨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 평화의 전령으로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말씀하셨다.”(요한 20,21-22)

 

이제 제자들은 평화의 도구, 구원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주님이 주신 이 평화를 서로 나누어야 할 뿐만 아니라, 세상 안에 이 평화를 건설해야 하는 사명을 짊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평화로운 사람이 되기보다 평화를 이루기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그런데 이 평화는 우리의 힘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평화는 우리가 이루는 평화가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이루는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협조자 성령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숨을 불어넣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숨을 불어넣으셨다는 말의 원어의 번역은 숨을 건네주었다는 뜻입니다. 곧 당신의 생명을 건네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모두 용서하시고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건네주시며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를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성령을 받아라.”는 말씀은 너희는 이미 용서를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너희도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성령께서는 용서를 통해, 평화를 이루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용서할 때 평화는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먼저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먼저 당신의 숨을 불어넣으시어 새롭게 하십니다. 당신의 생명으로 우리에게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우리가 용서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렇게 평화를 주시고, 우리가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십니다. 바로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현존하시고, 우리 가운데서 활동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 감격스런 성령의 활동에 자신을 승복하고, 하느님의 현존에 푹 젖는 성령강림절이 되길 바랍니다. 바로 오늘이 용서와 평화의 축제가 되길 바랍니다. 아멘.

 

-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성령을 받아라.”(요한 20,22)

 

성령이시여!

제 안에 흐르소서!

흐르는 골골에 찌든 떼를 벗기시고, 반역과 죄를 몰아내소서!

아픔과 상처 어루만지시고,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소서!

멍들고 굳어진 마음 문지르시고, 접히고 구겨진 마음 펼치소서!

막히고 닫힌 마음 열치시어, 당신 숨결 흐르게 하소서!

새로워지고, 새롭게 살게 하소서! 용서받았으니,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하느님의 숨 안에서

-반영억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십니다. 오늘 성령강림은 바로 한결 같은 그분의 사랑을 드러내 줍니다. 슬픔에 잠긴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시고 “성령을 받아라” 하시며 두려움을 거두어주신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같은 성령의 기운을 불어 넣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영은 하느님의 얼, 숨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느님의 영’이 특별히 뽑힌 이들에게 임했습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사람들, 모세, 판관들, 전사들, 시인들, 왕이나 예언자에게 역사하셨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을 이룰 수 있도록 함으로서 하느님의 영의 역사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런데 요엘서 3장1절에 보면 “그런 다음에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내 영을 부어 주리라. 그리하여 너희 아들딸들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며 젊은이들은 환시를 보리라. 그 날에 남종들과 여종들에게도 내 영을 부어주리라.” 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사람에게만 특별히 임했던 성령이 장차 누구든지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바로 이 약속은 먼저 예수님의 일생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성령으로 가득 찬 생애였습니다. 마리아는 성령에 의하여 예수님을 잉태하였고(마태1,28-30), 예수님께서 훗날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에도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 왔습니다. 이 성령이 예수님을 광야로 데려가서 유혹을 물리치게 하였고, 예수님의 공적활동도 성령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루가 복음 사가는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루카4,14-15).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첫 설교를 시작할 때 이사야 61장 1절에서 2절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성령의 역사를 언급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은 다시 보게 하며…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14,17-19).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악령에 시달리는 이들을 풀어주었고(마태12,28) 병자를 치유하셨습니다(루카5,17). 또한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3,5이하).하시며 새로 나기 위해 성령의 세례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은 성령과 함께한 역사였습니다. 

이렇게 성령과 함께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승천을 통한 작별을 하기에 앞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시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파라끌리또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15,26-27). 

이 말씀은 당신이 얼마 후 제자들의 곁을 떠나게 되겠지만 대신에 이들을 도울 보호자이신 성령께서 그들과 함께하실 것을 확신시켜 주시기 위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상 제자들은 이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떠나신 후 두려움에 사로잡혀 다락방에 모여 문을 모두 잠가놓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아! 그래서 그러셨구나.’ 하며 무릎을 친 것은 바로 오늘 성령의 강림을 체험하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구약의 예언말씀과 예수님의 약속은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이 성령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길에서 뿔뿔이 도망쳤던 겁쟁이 제자들을 당당한 복음의 선포자로 변화시켰습니다. 죽음이 두려워 문을 걸어 잠그고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을 복음의 증거자로 변화시켜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전하게 하였습니다(사도2,1-11). 한마디로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제자들이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제자들이 송두리째 바뀌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령강림 대축일을 교회의 탄생일로 보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음으로 인하여 베드로와 바오로도 예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사도행전을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성령의 힘으로 절름발이를 낫게 하였고, 죽은 이를 살려내고 악령을 몰아냈으며 열정적으로 설교하게 하였고 복음을 전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사람들이 성령을 받도록 이끌어 주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성령께서는 공동체가 한마음, 한뜻이 될 수 있도록 하여 가진 것 모두를 공동 소유로 내놓고 나눔의 생활을 하였으며 그 안에서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공동체가 커졌습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말합니다.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3,28).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도 성령의 손길이 더욱 더 요청되고 있습니다. 사실 성령께서 나와 함께 하심에도 불구하고 그 성령의 역사를 느끼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내 선입견과 욕심, 세상 걱정 때문에 그분의 숨결을 내가 놓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다가오시지만 내가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한 까닭으로 역사하지 못하십니다. 아니 우리가 역사하심을 알아채지 못합니다. 

성령세미나를 참여해 보면, 성령의 역사를 다양하게 체험할 수 있는데 보통 5일째 되는 날 ‘성령 안수식’이 있습니다. 이 때 성령의 역사가 얼마나 다양하게 나타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눈물을 통하여, 어떤 사람은 웃음을 통하여, 어떤 사람은 뜨거운 열기를, 어떤 사람은 시원한 바람으로, 어떤 사람은 온 몸에 기운이 빠져 안식을 갖고 어떤 사람은 이상한 언어를 하고 어떤 이는 마음의 어두움을 씻어내어 평화를 회복시켜 주심으로, 어떤 이는 친절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채워 주심으로, 어떤 이는 용서의 마음으로, 그렇게 미웠던 배우자가 사랑스럽고 더 잘해주지 못했던 동안의 부족함을 볼 수 있게 해 줌으로써 ……그야말로 오만가지 방법으로 알맞게 오십니다. 

같은 자리에 앉아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방법으로 채워주시는 놀라운 역사를 볼 수 있었습니다. 한 자매는 일찍 아버지를 잃고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그리웠고 그 사랑을 느끼고 싶었다고 하였습니다. 성장하면서 상처를 받았는지 자기 안에 하느님을 무서운 하느님, 두려운 하느님, 벌을 주시는 하느님으로 자리 잡고 있었는데 제발 한번 만이라도 사랑의 하느님으로 만나고 싶다고, 기쁨을 회복하고 환히 웃고 싶다고 간절히 기도하였더니 자기도 모르게 너무도 평화롭게 한없이 웃을 수밖에 없게 해 주셨습니다. 남들은 울고불고 하는데 그 와중에 너무도 기뻐 어쩔 줄 모르게 해 주셨습니다. 정말 그 자매의 웃는 얼굴이 환희 빛났습니다. 

성경을 쳐다보면 졸음이 쏟아졌는데 한 시간을 읽고 두 시간을 읽어도 더 읽고 싶은 마음이 솟구쳐 오른다고 하신 분도 계시고…….늘 만나던 사람이지만 유난히 사랑스럽게 보이고 그야말로 사물까지도 다르게 보였다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다양하게 은총의 역사를 이뤄 주셨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장거리 운전에 강의를 하며 밤잠을 자지 못하였는데도 지치지 않고 일주일을 마무리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오늘도 여전히 각 사람에게 알맞은 방법으로 다가오십니다. 
불길처럼, 뜨거운 감동으로 오기도 합니다. 불은 정화하고 갱신하며 불순한 것을 깨끗이 태워버립니다. 그렇듯이 우리 안에 옛 것을 태워버리고 새 삶을 살도록 인도합니다. 불은 또한 어둠을 비추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은 인간의 마음을 비추어 죄를 알게 해 주고, 고해성사에로 인도하여 자비를 입게 합니다. 마음을 비추어 진리를 깨닫게 해 줍니다. 말씀에 맛들이게 해주십니다. 불로 표상 되는 성령의 특성을 교회는 빨간색으로 상징화 하였습니다. 붉은 제의는 바로 내면의 불꽃을 상기시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바람처럼 임하기도 합니다. 세찬 바람으로, 때로는 여린 바람으로 나의 진부한 것들을 쓸어내기도 하시고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기도 하십니다. 인간을 만드실 때 진흙으로 빚어 만드시고 당신의 숨, 입김을 불어 넣어주셨는데 입김은 곧 바람(히브리어 ‘루아흐’)입니다. 이 바람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새롭게 창조해 주십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자격을 허락하십니다. 또한 물처럼 샘솟기도 합니다. 내면의 기쁨이 솟구쳐 올라 기쁨과 활력을 주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비둘기처럼 다가옵니다. 평화와 온유함으로 어떤 상황 안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요란스럽지 않게 다가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일상 안에서 성령의 강림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기도하는 가운데, 성경말씀을 읽으며 주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그리고 주님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성령의 손길이 더 강하게 역사하시니 만큼 그에 걸 맞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힘과 능력을 얻기를 희망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성령이여, 제가 거룩함을 생각하도록 제 안에서 숨쉬게 하소서.
성령이여, 제가 거룩함을 행하도록 제 마음을 움직이소서.
성령이여, 제가 거룩함을 사랑하도록 저를 이끌어 주소서.
성령이여, 제가 거룩함을 보호하도록 저를 강하게 해주소서.
성령이여, 제가 결코 거룩함을 잃지 않도록 저를 보호 하소서. 

성령, 우리 생명의 의미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하느님은 멀리만 계신다.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그리스도는 과거에만 머무신다.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복음은 죽은 문자에 불과하다.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교회란 한낱 조직에 불과하다.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권위란 한낱 지배하는 것일 뿐,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선교란 한낱 선전광고에 불과하고,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전례란 한낱 과거의 회상일 뿐,
성령이 아니 계시다면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노예들의 윤리에 불과하다.
그러나 성령 안에 우주는 온통 잠을 깨고
왕국을 낳는 산고로 신음하고 있다.
성령이 계시면 부활하신 그리스도 여기 계시고
복음은 찬란한 생명력을 내뿜고
교회는 성삼위와의 통교를 의미하고
권위는 해방자의 섬김이 되며
선교는 성령 강림의 축제가,
전례는 기념이자 왕국에 미리 참여함이 되고
인간의 행위는 하느님으로 가득 차리라.
- 이냐시오 드 라타뀨이에 대주교-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1). 슬기 (지혜) : 하느님과 하느님께 관한 것들을 올바로 판단하고, 맛들이고, 실천하도록 돕는 은혜입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 관점에서 보고 판단하며, 하느님의 눈, 하느님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이지요. 주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아무리 큰 꿈과 희망도 하느님 마음에 들지 않고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이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2). 통달 (깨달음, 이해) : 하느님 계시진리를 깊이 통찰하여 잘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은혜입니다. 성경의 의미, 전례의 의미등 숨은 뜻을 알게 됩니다. 더 열심히 기도하고 노력하면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감동을 얻게 되고 기쁨을 차지하게 됩니다. 

3). 의견 (일깨움) : 마땅히 해야 할 것, 피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판단하게 하는 은혜입니다. ‘예’, ‘아니오’를 분명히 하고 자기 분수를 알며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아는 것입니다. 부모는 부모로서, 자녀는 자녀로서의 역할이 있고 직장인은 직장인으로서, 학생은 학생으로서의 고유역할이 있습니다. 자기역할에 충실하게 하는 은사입니다. 

4). 지식 (앎) : 영원한 생명, 피조물에 대해서 올바로 판단하는 습성입니다. 믿어야 할 진리, 믿지 말아야 할 거짓에 대해서 확실히 분별하는 은사입니다. 피조물은 하느님의 연장입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도 분명히 피조물입니다. 하느님의 섭리, 주관하심을 알고 그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알기 때문에 달라집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는 것이 병’일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여 섬기는 것이 지식의 근본입니다. 

5). 굳셈 (용기) : 어떤 어려움이나 시련, 위험을 극복할 수 있다는 확고부동한 신뢰를 지니고 덕을 실천하도록 성령께서 영혼에게 주시는 힘입니다. “끝까지 참는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고 했으니 흔들림이 없는 믿음으로 가야할 길을 가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을 지키셔서 복되십니다. ‘초장에 초싹, 파장에 파싹’이라고 하나요? 한번 시작을 했으면 끝까지 하는 것입니다. 

6). 공경 (받듦, 섬김, 효경) :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자녀다운 사랑과 모든 인간 안에 보편적 사랑의 정을 담아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선언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모시고 삽니까? 데리고 삽니까? 한입으로 두말하지 않고 오로지 주님을 섬겨야 하겠습니다. 

7). 두려워함 (경외) :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으로 죄를 피하는 은혜입니다. 무서움과는 다릅니다. 벌 받을 것에 대한 무서움이 아니라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린 것에 대해 죄송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만큼 감각적인 절제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하게 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

-송영진신부-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19-23)”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뒤에 제자들은 유대인들의 박해가 무서워서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숨어 있었습니다.
그랬다가 성령을 받은 뒤에는 두려움 같은 것은 하나도 없는 모습으로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용감한 선교사들이 되었습니다(사도 2장).
그런데 제자들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는데도
성령 덕분에 자동적으로 그렇게 변화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그 믿음을 증언하기 위해서
숨어 있었던 방에서 나가 사람들 앞에 나선 것은 제자들이 스스로 한 일입니다.
용기를 내려고 노력한 것은 제자들 자신들이 한 일이고,
성령께서는 그 용기를 북돋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안 믿었다면,
또는 믿었더라도 용기를 내지 않고 계속 무서워하면서 숨어 있었다면,
그들은 성령께서 주시는 도움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오순절 날 제자들은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복음을 선포했고(사도 2,4),
사람들은 그 복음을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 말로” 들었습니다(사도 2,6).
우리는 그날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릅니다.
제자들이 배운 적도 없는 외국어를 갑자기 잘하게 되었는지,
아니면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외국어로 설교를 하게 되었는지...
그런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제자들의 외국어 실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듣는 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령의 은사’는 제자들에게 내렸지만
그 은사의 혜택은 ‘듣는 사람들’이 누렸습니다.
따라서 오순절 날 ‘성령의 은사’가 내린 일은,
복음을 선포하는 제자들을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복음을 듣는 사람들을 위한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한 은사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혜택을 누린 사람들이 모두 복음을 믿은 것은 아닙니다.
그날 제자들의 설교를 듣고 세례를 받은 사람은 ‘삼천 명 가량’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사도 2,41), 믿지 않고 그냥 가버린 사람도 많았을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의 혜택은 그곳에 있었던 모든 사람에게 내렸지만,
모든 사람이 다 믿음을 갖게 되고, 은혜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은혜는, 받으려고 하는 사람만 받고, 안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못 받습니다.

요한복음의 이야기에서, “너희를 보낸다.” 라는 말씀과
“성령을 받아라.” 라는 말씀과 ‘용서의 권한’에 관한 말씀은 모두
하나로 이어진 말씀으로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려고 그들에게 성령을 주셨고,

또 그들에게 성령을 주시면서 용서에 관한 일을 임무로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만 보면, ‘용서의 권한’에 관한 말씀이 뭔가 좀 안 어울리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이 말씀은 루카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7-48).”
이 말씀에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라는 말은,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을”이라는 뜻입니다.
“선포되어야 한다.”는 “선포하여라.”입니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라는 말씀에서 ‘이 일’은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과 예수님의 복음을 가리키고,
‘증인이다.’는 “증인이 되어라.”, 즉 복음을 선포하는 선교사가 되라는 명령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오순절 설교를 보면 이렇게 마무리되었습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사도 2,38).”
루카복음의 예수님 말씀과 사도행전의 베드로 사도의 말에 들어 있는
‘용서’ 라는 말은 모두 예수님을 믿고 회개해서 얻게 되는 ‘구원’을 뜻합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의 말씀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는
“교회와 신앙인들이 복음 선포 활동을 충실하게 하면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것이고”로,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는
“복음 선포 활동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을 것이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권한’보다는 ‘임무’에 관한 말씀이고,
성령을 주신 것은 그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한 것입니다.
< 제자들이(교회가) ‘구원의 복음’을(용서를) 선포하거나 선포하지 않는 것을,
자기들 마음대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권한이든지 임무든지 간에 항상 예수님 뜻에 합당하게 수행해야 합니다.
만일에 제자들이(교회가) 제대로 활동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한 상태로(용서받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다면
그 책임은 제자들에게(교회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성령을 주신 것과
오순절 날 그들이 성령의 은사를 받고서 첫 번째로 한 일이
복음을 선포하는 설교였다는 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 가운데
첫 번째 일은 ‘복음 선포’를 도와주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코린토 1서 12장에 나오는 성령의 은사들도
단순히 어떤 개인의 능력을 키워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복음 선포 활동을, 즉 사람들을 구원하는 활동을 도와주기 위한 은사들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세례성사 때 성령을 받고
견진성사 때 성령의 은사를 받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는 일을 하는 것,
그것이 성령을 받은 사람의 첫 번째 임무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성령을 받고서도 복음 선포 활동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성령의 도움을 받기를 스스로 거절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런 도움도 없습니다.)  

 

새로운 창조를 위한 성령

 -조욱현신부-

 

오늘은 부활 시기가 마무리되는 성령강림 대축일이다. 성령은 오늘도 주님 부활의 가장 완성된 열매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고 있다.

 

1독서: 사도 2,1-11: 성령으로 가득 차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사도행전의 성령강림 사화는 구약의 시나이 계약(탈출 19,16-20; 신명 5,4-5)과성령의 창조적 능력으로 모든 민족이(바르티아 사람, 메대 사람, 엘람 사람 등) 언어와 종족의 장벽을 넘어 이루는 거대한 하느님 백성의 새로운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먼저 인간에게 다가와 인간을 새롭게 변화시켜 주시는 분이심을 의미한다. 하느님과 접촉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태우는 불길처럼 흔적을 남긴다. 즉 하느님의 말씀은 귀먹은 이들의 꽉 막힌 귀까지도 뚫어주신다. 루카는 성령강림을 시나이 당신 백성의 새로운 계약의 공적인 시작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율법이 선포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께서 내리시는 것이다. 즉 성령께서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율법이 되신다. 다시 말하면 성령께서 그리스도인 각자의 내면에서 부드럽고 사랑스럽게 선한 것과 악한 것을 가르쳐 주시며 또한, 그것을 판단하여 실행할 능력도 주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삶의 형태도 이루어 준다. 그러므로 성령강림의 오순절과의 근본적인 새로움은 하느님께서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아들의 성령”(갈라 4,6)을 통하여 우리 가운데 당신 자신으로서 현존하신다는 사실이다.

 

이제 성령께서는 이스라엘 민족뿐 아니라, 지상의 모든 민족을 부르셔서 새로운 백성으로 만드신다. 예루살렘에 모여든 많은 순례자는 모든 민족의 대표자로 제시하는 것이다. 언어의 기적도 모든 사람이 단일한 신앙을 받아들이도록 인도하시는 성령의 하나로 일치시키시는 능력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온 세상 곳곳에 사는 우리가 같은 계시 진리를 믿고 있고, 또한 하느님의 위업”(11)을 기념하여 거행하고 있는 오늘도 그 여러 가지 언어의 기적은 계속 실현되고 있다.

 

2독서: 1코린 12,3b-7.12-13: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

바오로 사도께서도 하나로 일치시키시는 성령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사도께서는 공동체에 주어진 카리스마는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모든 은총의 선물들이 단일한 성령에게서 온다고 강조한다(4-7).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받았다. 우리는 모두 그래서 우리가 받은 은총의 선물을 잘 사용하여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공동의 이익을 위한 하나인 것이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12). 그러므로 우리의 개인적인 특별함을 실현하기 위해 자기 계발이 철저히 되어야 할 것이다.

 

 다양성 전체 또는 공동체를 향하지 않을 때 조직체가 붕괴할 수도 있다. 다양성으로서 각 부분이 개별적으로 완전히 실현될 수 있을 때 전체는 더욱 아름답게 빛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교회는 구성원들이 신앙과 사랑과 활동을 통하여 서로 일치할 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바로 이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이루어 주시는 분이 성령이시다. 즉 오순절 날 구원의 메시지를 여러 나라말로 알아들을 수 있도록 언어와 문화와 종족과 심지어 종교의 장벽까지도 뛰어넘어 다 같이 하느님의 크신 일들을 알아들을 수 있게 하신 성령이시다. 그러므로 은총의 선물에 들어있는 선물의 특성만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3.13절 참조).

 

복음: 요한 20,19-23: 성령을 받아라

예수께서는 부활 축일 저녁에 성령의 선물을 숨을 내쉬시며 주셨다. 바로 죄를 용서하는 권한도 성령의 선물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22-23). 바로 죄가 신자들의 공동체를 와해시킨다. 신자들의 공동체란 본질적으로 사랑과 은총의 공동체이다. 그러나 죄는 하느님의 뜻을 어기고 형제들을 향해 마음의 문을 닫는 것이다. 죄는 모든 것을 파괴한다. 이러한 죄의 상태에서 성령을 통하여 주시는 평화의 선물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성령께 자기 자신을 온전히 내가 맡기는 자세가 필요하다. 성령 안에서 신앙인 개인뿐 아니라, 교회도 그분 안에 생기를 되찾고, 악과 죄로 말미암아 더럽혀지고 나약해지는 이 세상에도 생기를 되찾아 줄 수 있을 것이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라고 표현한다. 관계라고 한다면 사랑의 관계일 것이다. 그러한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을 때, 삼위일체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 안에는 성령의 기운이 가득합니다.

"평화"(요한 20,19.21).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 평화를 기원하십니다. 스승을 잃고 두려움과 근심에 찬 시기를 지나고 있는 그들에게 평화는 예수님께서 떠나신 후에도 그분 현존 만큼의 축복이 될 것입니다. 평화는 성령의 분위기입니다.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요한 20,20).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이심을 보여 주시려고 상처를 열어 보이십니다. 스승을 죽음에 이르게 한 형벌의 자국이지만 지금은 스승을 알아볼 단초인 셈이지요.

세상에 상처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만, 상처라는 걸림돌에 발목 잡힌 사람과, 상처라는 디딤돌을 딛고 일어선 사람으로 나뉠 겁니다. 지금의 예수님처럼, 상처는 "나"임을 증거하는 훈장이 되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언젠가 주님 앞에 마주섰을 때, 우리가 지상에서 당신을 따르느라 입은 상처를 보시고 주님은 우리를 알아보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 상처는 영혼에 아름다운 무늬로 새겨져 향기마저 풍길 겁니다. 상처는 성령의 은신처입니다.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당신을 파견하셨듯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그들이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지만 감행하십니다. 제자들의 인간적 수준과 상태를 보면 어불성설이지만, 예수님은 믿는 구석이 있으십니다.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께서 제자들을 변화시켜 주시고 지켜 주시리라는 것을 아시기에 예수님은 그러실 수 있습니다.

파견은 성령을 받은 교회의 정체성입니다. 매순간 우리는 성령에 힘입어 누구에겐가 파견됩니다. 가족이든, 이웃이든, 온라인상의 친구든, 아니면 우리 기도에 맡겨진 세상 저편의 누군가든 말입니다.

"숨을 불어넣으며"(요한 20,22).

우리는 창조의 첫 숨을 아버지 하느님께 받았습니다. 이 숨이 우리 영혼과 육신의 생명이 되어,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살 수 있게 되었지요.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불어넣어 주신 숨, 곧 성령을 받아 그리스도를 입습니다. 우리 안에 내재된 하느님 모상성이 극대화되어 성령의 사람이 됩니다. 교부들이 '신화(Deificatio)'라 일컫는 상태입니다.

"용서"(요한 20,23).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후 콕 짚어 언급하신 것이 용서입니다. 용서가 얼마나 중요하면 그러셨을까요?

살아가면서 상처를 입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처럼, 용서할 일이나 용서받을 일이 없는 사람도 드물 겁니다. 주님 앞에서 영혼을 살피며 성찰을 게을리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용서한, 혹은 용서하지 못한 사연들이 어렵지 않게 떠오를 겁니다.

맨 힘으로는 어려운 게 용서지요. 여간 잘 하지 않고는, 열심히 애쓰다가 한 순간 와르르 무너져 되돌이표를 찍고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게 용서 같습니다. 그래서 용서에는 성령의 숨이 필요합니다. 사랑이 바탕이 된 용서와 그렇지 않은 용서는 천양지차입니다. 용서는 성령의 증거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오순절에 제자들에게 성령이 내리신 순간이 펼쳐집니다.

"하느님의 위업을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언어로 듣고 있지 않은가?"(사도 2,11)

인간의 오만이 쌓은 바벨탑의 몰락은 언어의 분열을 초래합니다(창세 11,1-9 참조). 의미를 담고 소통하는 언어의 전달 방식뿐 아니라 사고방식과 문화, 습성 등등 모든 것이 갈라지지요. 그뿐입니까? 우리는 같은 언어, 같은 역사, 같은 문화를 공유한 이들 안에서도 도무지 소통할 수 없는 한계를 자주 느끼며 살아갑니다.

성령께서 개입하신 영혼은 나와 다른 문화, 출신, 인종, 성별, 공통분모 없는 삶의 기반을 지닌 이들의 말을 경청하고 알아듣는 능력 또한 받게 됩니다. 지성으로 이해한다기보다 사랑으로 수용하는 것이지요. 또 성령 안에서 나누는 우리의 말을 공통분모 없는 그들이 자기 언어로 알아듣는 기적도 일어납니다. 말이 언어로 전달되는 차원을 넘어 사랑으로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이때 말하는 주체는 사랑입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성령께서 오신 목적을 정확히 제시합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1코린 12,7).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사와 직분과 활동, 능력과 열매는 공동선을 위함입니다. 혼자만 간직하고 즐기라고 주시지 않으셨다는 뜻이지요. 주인에게서 받은 한 탈렌트를 땅 속에 묻었다가 혼쭐이 난 종의 이야기처럼(마태 25,24-30 참조), 자칫 성령의 은사를 외면하거나 사장시키는 잘못은 은총의 착복과 배임이라고까지 볼 수 있을 겁니다.

사랑하는 벗님! 올해 성령 강림 대축일은 특별한 것 같습니다. 재의 수요일 즈음에 시작된 공동체 미사 중단이 부활 시기 중반을 지나면서 조금씩 풀리다가, 부활 시기를 마무리하는 요즘 다시 긴장 상태로 이어지고 있지요. 우리의 얕은 지력이나 좁은 시각으로는 도무지 끝을 알 수 없는 상황이 온 세상을 휩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령을 받아 더 새로운 영혼으로 거듭나는 오늘, 다시 한 번 우리 자신과 온 세상을 성령께 의탁합니다. 우리 각자가 받은 성령의 은사가 모여 세상이 외치는 절규의 외마디를 알아듣는 귀가 되기를, 세상이 흘리는 고통의 눈물을 닦는 사랑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받은 은사가 공동선을 위해 모두에게 유익이 되고 힘이 되는 백배의 열매로 맺히기를 축원합니다.

오소서, 성령님! 새로 나게 하소서! 아멘. 알렐루야!

 

은사가 똥이 되지 않고 독이 되지 않게   
-김찬선신부-

 

이번 성령 강림 대축일에는 오늘 사도행전의 첫 구절이 마음에 와 닿으며
그 의미를 확대해서 묵상케 되었는데 그 첫 구절은 이러합니다.
"오순절이 되었을 때 사도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러니까 사도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습니다.
이 말씀에서 <모두>, <한자리에>, <모여>라는 말이 모두 의미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교회적인 성령 강림,
합동적인 성령 강림의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두 번째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듯이
성령의 은사에는 각각의 은사 또는 개인의 은사가 있고,
각각이 하나게 되게하는 은사 또는 일치의 은사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서로 다른 은사를 각각에게 주십니다.
그것은 성격이 제각각이고 능력이 제각각이며 생김새가 제각각이듯
은사도 제각각인데 제각각이란 다르다는 것의 다른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의 은사도 인정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내게도 은사를 주셔서 받았듯이
다른 사람에게도 성령께서는 은사를 주셨음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겁니다.

이것이 각각의 은사를 교회적인 은사가 되게하는 첫 번째 요건입니다.
너를 배척하지 않고 너의 은사를 무시하거나 배제하지 않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우리는 흩어지지 않고 모두가 모인 교회가 되고,
선물 종합 세트가 있듯이 교회는 은사들의 종합이 됩니다. 

이것은 가정이나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에게만 성령께서 오시지 않고 내가 미워하는 사람에게도 성령께서 오시고,
내가 무시하는 사람이나 어리다고만 생각하는 아이에게도 성령께서 오신다는
것을 인정하면 그의 안에서 은사를 발견하고 존중케 될 것입니다.

이럴 때 오늘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숨과 성령을 주시며
평화를 주신 것처럼 우리 가정과 공동체에 평화도 있게 됩니다.

각각의 은사가 교회적인 은사가 되게 하는 두 번째 요건은
은사의 봉헌 또는 내어줌입니다.
첫 번째 요건이 다른 사람의 은사를 부정하지 않는 것이라면
두 번째 요건은 내 은사를 독점하거나 자기만을 위해 소유치 않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하느님께서 은사를 주셨는데 자기는 받은 것이 없다고 하거나
은사를 받아놓고도 남이나 공동체를 위해서 쓰지 않고 묵혀둡니다.
이럴 때 성령의 은사는 똥이 됩니다.

그런데 똥이 되는 것보다 더 나쁘고 그래서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가 독이 되는 것입니다.

은사와 교만이 만났을 때 이런 일이 벌어지는데
자기만 성령의 은사를 받은 듯 남의 은사를 무시할 때
그 독선으로 인해서 은사는 독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성령 쇄신 운동을 하는 사람들 안에서 많이 보는 분열이 바로 이것
때문인데 이 독선성으로 인해 일치의 성령이 분열의 성령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씀을 명심해야겠습니다.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사람들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독선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동선을 위해 주시는 성령을
우리 오늘 받도록 하십시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