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 26일 부활 제7주간 화요일
2020년 5월 26일 부활 제7주간 화요일
“나는 아버지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일을 다 하여
세상에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요한 17,1-11ㄴ)
I glorified you on earth
by accomplishing the work
that you gave me to do.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병규신부-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으로 아버지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히브리 말로 ‘영광’은 ‘더욱 가치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가치 있는 것들을 추구하다 보면 기쁘고 흥겨울 때도 있지만 힘겹고 고통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좋아서 하는 일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을 테지만 힘겹고 고통스러운 일은 대부분 마다하고 회피하지요.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그 힘든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 힘겹지만 인간을 사랑하시는 그 가치 있는 일에 당신의 삶을 온전히 내어놓으신 것이지요.
예수님께 ‘더욱 가치 있는 것’은 바로 우리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은 이미 태초부터 아버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작품이었고, 그 작품은 세상 끝 날까지 고귀하고 소중한 존재로 대접받아야 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른바 ‘인간 존엄성의 원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이 지켜야 할 삶의 규칙이자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 때가 되어 당신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시는 것은 세상을 향한 아버지의 끝없는 사랑을 드러내신 행위입니다. 사랑은 아프고 힘들더라도 더욱 가치 있는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데 지치지 말아야겠습니다. 사랑은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이며 세상 어떤 일보다 가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영광이고 생명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느 수녀님께 자신의 신체에 불만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 질문했습니다.
“수녀님, 제가 열심히 기도하면 저의 신체적 불만 부위가 제가 원하는 행태로 고쳐질 수 있습니까?”
수녀님께서는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열심히 기도하면 신체 부위가 원하는 대로 고쳐질 수도 있지만, 설마 고쳐지지 않고 원래 모습대로 남아 있다 하더라도 불만이 사라진 채로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원하는 대로 신체 부위가 고쳐진다면 분명히 기쁨이 클 것입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계속해서 기쁘게 살 수 있을까요? 어느 순간 고쳐진 신체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사라지면서, 또 다른 원하는 것에 대한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도는 그 이상의 응답을 가져다줍니다.
수녀님 말씀처럼 불만이 사라진 채 계속해서 행복할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따라서 어떤 마음으로 기도하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순간의 만족을 취하는 기도가 아니라, 영원한 만족을 취할 수 있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위해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십니다. 이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묵상할 수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자기 원하는 것만을 이야기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하셨던 기도는 하느님의 아버지의 영광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를 먼저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우리의 일을 말씀드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자신을 영광스럽게 해주십사고 청하시지요. 이는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청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이제 누릴 영광은 십자가의 영광이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는 커다란 굴욕으로 보이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이 굴욕처럼 보이는 십자가를 영광으로 받아들이십니다. 그리고 부활을 통해 영광이 세상에 환하게 펼쳐졌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기도의 모습을 따르는 삶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기도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만을 바치는 기도가 아닌, 하느님의 영광을 먼저 기도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의 순서를 올바로 할 수 있을 때, 믿음을 통해 더 큰 행복의 길에 들어설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반항하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NO’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거부는 해도 포기는 하지 않는다(알베르 카뮈).
우리의 고민과 염려를 어떻게 할 것인가?
아더 팽크라는 미국의 사업가는 사업에 대한 고민과 걱정으로 늘 불안했습니다. 많은 염려 가운데에 살던 그는 ‘염려에서 벗어나 사는 방법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다가, 매주 수요일을 ‘염려의 날’로 정하고 걱정거리가 생길 때마다 날짜와 그 내용을 적어서 상자에 넣어 두었습니다.
시간이 지난 어느 수요일, 그는 상자 속의 메모지를 살펴보다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상자에 넣을 당시만 해도 큰 문젯거리였던 고민과 염려들이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별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고민과 염려들이 어떠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가지고 있는 고민과 염려도 결국 별것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어렵고 힘들지만, 충분히 이겨낼 고민과 염려들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고민과 염려를 채워줄 것으로 바쳐서는 안 됨을 깨닫습니다. 그보다 주님께서 보여주셨듯이 먼저 하느님의 영광을 기도하면서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의 영광을 추구하면 하느님의 영광을 잃는다
-전삼용신부-
미국 고등학교 필립스 아카데미와 필립스 엑서터는 동문 35명 중 1명꼴로 미국 명사 인명사전에 올라 있고 백만장자 비율도 가장 높다고 합니다. 설립 이래 200년 이상 이 전통을 지켜오고 있습니다. 이 학교의 건학 이념은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입니다.
설립자인 새뮤얼 필립스와 존 필립스가 성경에서 영감을 받아 이 건학 이념을 정했습니다. 코린토 전서 10장 31절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와 루카 복음 6장 38절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에서 영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은 끊임없이 ‘왜 어떤 이들은 표징을 보고 믿는데, 어떤 이들은 믿지 못할까?’를 고민합니다. 그리고 믿지 못하는 이들은 ‘자기의 영광’을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결론 내립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이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삶입니다. 성경을 공부하면서도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요한 5,44)
물론 그들도 하느님의 영광을 찾는다고 말은 합니다. 그들은 태생 소경이 눈을 뜨자 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시오. 우리는 그자가 죄인임을 알고 있소.”(요한 9,24)
저도 주님께 영광을 드린다고 열심히 강의를 다닌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결국 마음의 공허함만 남았습니다.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이들은 마음이 공허하지 않습니다. 그 영광을 다시 받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영광은 성령을 의미하는데 성령으로 이룬 열매를 그 성령을 주시는 분의 공로로 돌리면 그분은 다시 성령을 주십니다. 성령의 열매가 또한 기쁨과 평화이기 때문에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이는 마음이 공허할 틈이 없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추구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면 메마르게 됩니다. 주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것도 도둑질입니다. 도둑질하고 마음이 평화로울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의 장엄한 마지막 기도가 나옵니다. 오늘 복음은 그 시작입니다. 오늘 복음은 삼위일체 신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영광을 달라고 하십니다. 그 영광이란 당연히 성령이십니다. 성령으로만 영광스럽게 됩니다. 예수님은 마치 아내가 신랑의 사랑으로 자녀를 출산하는 것처럼 교회를 낳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당신의 것이라 하지 않고 아버지의 것이라고 여기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시고 그러면 아드님은 다시 아버지께 영광을 받으십니다.
교회를 당신의 것이라 여겼다면 예수님은 더는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마치 가지가 열매가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면 자신이 붙어있는 나무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과 같습니다. 그러한 가지는 더는 나무가 수액을 흘려보내 주지 않습니다. 자녀를 자신의 것이라 여기는 아내를 남편이 사랑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입니다. 우리 열매로 나무이신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합시다. 이것이 성령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마음이 평화롭지 못하고 기쁘지 못하면 내가 ‘나 자신을 위해서’ 사는지, 아니면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마음으로 사는지 살펴야 합니다. 분명 나 자신을 위해 살고 있을 것입니다. 가지 영광을 추구하는 성향에 빠지지 않으려면 하루 시작부터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합니다.
88년 서울올림픽에서 세계인의 이목을 끈 여자육상선수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여자’라고 불리는 그리피스 조이너입니다. 그녀가 금메달을 따내자 많은 기자가 몰려 취재 경쟁을 벌였습니다. 그 가운데 미 NBC 방송의 한 기자가 “달리면서 어떤 생각을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하느님께 영광 돌릴 것을 생각하며 달립니다. 나 자신과 싸움에서 이긴 후 하느님께 영광 돌릴 때만큼 인생의 보람을 느껴본 적은 없었습니다.”
달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순간에 주님께 영광을 드릴 생각을 해야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부터 잠자리에 들 때 주님께 영광을 돌릴 결심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으로부터 영광을 받는 하루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YTN Science에서 코로나19에 대한 다큐를 방영했습니다. 오늘은 다큐의 내용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절망에서 찬사로’가 있었습니다. 코로나19 발생 초기에 한국은 중국 다음으로 많은 확진자가 생겼습니다. 방역당국도 당황했고, 해외에서도 한국의 방역에 구멍이 생겼다고 보도하였습니다. 특히 신천지 신자와 관련된 확진자가 대구, 경북지역에서 다수 발생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방역당국은 신속하게 진단키트를 확보하였습니다. 진단키트를 이용하여 의심되는 모든 사람을 검사했습니다.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였습니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협조가 있었습니다. 방역당국의 말을 신뢰하였습니다. 사재기도 없었습니다. 한국은 점차 안정되고 있을 무렵에 다른 나라에는 코로나19가 무섭게 퍼지고 있었습니다. 확진자와 사망자가 늘어났습니다. 외신은 한국의 감염병에 대한 대책을 모델로 제시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의 방식이 감염병의 확산을 막는데 효과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진단키트를 지원하였고, 방역의 방법을 공유하였습니다. 한국은 교과서에 없는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였다는 찬사가 있었습니다.
초대교회에는 두 기둥이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했습니다. 두려워서 다락방에 숨었습니다. 고향으로 내려가서 고기나 잡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 사랑받았던 제자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하느님나라 운동은 끝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서 새롭게 변하였습니다. 두려움은 담대함으로 변하였습니다. 절망은 희망으로 변하였습니다. 한 번의 설교로 몇 천 명이 세례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표징을 보여주었습니다. 걷지 못하는 사람을 걷게 하였습니다. 죽은 사람까지 살려 주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제 신앙인이 따라가야 할 모범이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박해했습니다. 스테파노가 순교할 때도 찬성했습니다. 그는 율법과 지식으로 무장하였고, 초대교회 신자들은 바오로 사도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새롭게 변하였습니다. 율법과 지식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문장과 언어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바로로 사도의 신학은 초대교회 신학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방역 최전선의 영웅들’도 있었습니다. 재난의 현장으로 달려간 간호사들이 있었습니다. 방호복을 입고 환자들을 치료하였습니다. 방호복을 벗은 모습을 보니 온 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습니다. 얼굴은 마스크와 고글 착용으로 깊게 자국이 나 있었습니다. 감염병 확산을 막고, 환자를 도와 주기위해서 전국에서 모인 간호사들이 있었습니다. 부모님 몰래 온 간호사도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장갑 많이 끼고 다녀. 난 우리 딸이 자랑스럽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119 대원들도 있었습니다. 확진자의 집으로 가서 병원으로 데려왔습니다. 방호복을 입고 요양원에 있던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을 병원으로 데려왔습니다. 방호복을 벗지 못하고 길가에서 도시락을 먹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의료진과 자원봉사자들을 위해서 많은 분들이 물품을 보내왔고,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지치고 힘들 때 응원의 편지를 읽으면 힘이 난다고 하였습니다. 역학 조사관들도 있었습니다. 확진자의 동선을 추적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방역을 위해서는 꼭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한국이 코로나19의 방역 모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진단키트와 의료체계의 힘도 있었지만 자원봉사자들의 헌신과 땀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 곧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모든 뜻을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 여러분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두루 돌아다니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한 여러분 가운데에서 아무도 다시는 내 얼굴을 볼 수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압니다.” 바오로 사도의 헌신과 땀이 있었기에 교회는 예루살렘을 넘어 이방인의 땅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전하다가 고통을 받았고, 이제 죽음의 순간이 가까워 온다는 것도 알았지만 주님의 뜻을 전하는 사명을 다 하였기에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수하여, 저는 땅에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 영원한 생명, 영원한 행복은 돈, 건강, 자녀의 축복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고, 실천하는 사람이 영원한 생명,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
-이영근신부-
지금까지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고별담화를 들었습니다. 이제 오늘부터 3일 동안은 고별담화를 마치신 뒤에,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드리신 기도, 흔히 “대사제의 기도”라고 불리는 기도를 듣게 됩니다. 이 기도는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17,1-8)와 제자들을 위한 기도(17,9-19)와 모든 믿는 이들을 위한 기도(17,20-26)로 나누어집니다.
오늘 <복음>의 앞부분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아들의 영광을 청하는 기도이고, 뒷부분은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낸 사실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
가나안의 혼인잔치에서, 마리아께서 “포도주가 없구나.”하고 말씀하시자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요한 2,4)라고 말씀하시던 예수님께서는, 이제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때”는 당신 “영광의 때”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때’를 가리킵니다.
사막에서 기도하실 때, 사탄이 나타나 자신을 경배하면 “세상의 나라와 그 영광”을 주겠다고 하자, “주 너의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마태 4,8-10) 라고 대답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이제 아버지만을 경배하고 섬기면서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십니다. 이제 당신의 “때”가 왔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이란, <성경>에서 하느님의 존엄함과 거룩함의 광채가 현재적으로 나타나는 위업과 현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한다.’는 것은 아버지의 위업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아들을 영광스럽게 한다.’는 것은 아들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공생활을 통해서 아버지를 드러내셨고, 또한 아버지께서도 당신을 아들로 드러내셨지만, 이제 그 절정의 때가 왔으니,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십니다.
이제, “당신의 영광”은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주신 권한인 영원한 생명을 모든 이에게 주심으로써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 곧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당신을 아는 것’(요한 17,3)을 통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결국, 이 기도는 십자가를 통해 영광이 드러나게 해 주시기를 바라는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바로 그 영광에로 부르십니다(1테살 2,12). 그리고 우리는 사도 바오로의 고백처럼, “(우리 또한)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아멘’이라고 합니다.”(2코린 1,20).
“영광”이란 나라는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변화’를 말한다 할 수 있습니다. 곧 말씀이 자신 안에 육화될 때,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고 우리는 아버지께 영공을 받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로고스 찬가”에서는 말합니다.
“정녕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서 거처하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요한 1,14)
그야말로, “영광”은 <요한복음>의 결론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영광송>을 바치며, 그 영광의 찬미를 드립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아멘.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
주님!
당신께서는 영광을 드러내시되, 굴욕 받음으로 드러내셨습니다.
그리하여 죽음의 굴욕을 발아래에 두셨습니다.
썩는 것을 썩지 않는 것으로 바꾸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아버지를 알게 하시고, 당신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 어떤 굴욕에도, 그 어떤 수난에도,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안다는 것은 통교하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성체조배나 묵주기도, 9일기도, 15기도, 자비의 기도, 십자가의 길 등 열심히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가끔 “9일기도를 하면 소망을 꼭 들어주신다고 하는데 그렇습니까?” 하는 질문을 받습니다. 믿음으로 기도 하고 기도하는 만큼 주님과의 일치를 이룬다면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삶의 변화나 주님과의 사랑의 일치를 이루지 못한 채 기도문만 외운다고 그렇게 이루어지겠습니까? 횟수나 형식에 매이지 말고 진심어린 마음으로 그 기도가 지향하는 바대로 삶의 쇄신을 이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면 기도한다는 것은 결국 그분과의 깊은 만남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떠나시기에 앞서 당신자신과 제자들, 그리고 앞으로 당신을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자신을 위해 기도하신 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권한을 통해 아버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나, 당신의 죽음을 통해 사랑을 보여주신 것은 오로지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였습니다.” 또한 아버지께서 주신 이들과 앞으로 당신을 믿게 될 이들을 위하여 기도함에 있어서 밑바닥에 깔려 있는 기본핵심은 사랑의 일치에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아들과 제자들, 그리고 제자들의 증언을 통하여 믿게 되는 이들, 바로 우리와의 사랑의 관계를 완성하길 바라십니다. 그리하여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로부터 하늘과 땅의 권한을 받았기에 믿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빵과(요한6,32이하) 생명의 물(요한4,10이하)을 주시며 풍부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이란 아버지 하느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이요, 안다는 것은 결국 통교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단순히 겉모양을 아는 것이 아니라 깊은 일치에서 나오는 앎이요, 알기 때문에 삶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한 몸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은 주님과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주님은 아버지와 하나가 되어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과 하나가 되어야 비로소 온전히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사랑하면서 사랑의 친교 안에 있는 것입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기도는 “심장과 심장의 만남”이라고 하였습니다. 작업시간에는 일로써, 기도시간에는 기도로써 우리는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기도를 말, 생각, 장소, 시간에 국한시키지 말고 그 한계를 넘어서서 언제 어디서든지 현존하시는 주님과 친교를 나누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항상 기도할 수 있습니다. 부디 삶이 기도이기를 갈망합니다. 사랑으로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행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이웃을 향해 열려있기를 희망하며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영원한 생명
-송영진신부-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여기서 ‘알다.’ 라는 말은 ‘일치’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이란 아버지를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것은, 단순히 안 죽고 영원히 산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면서 사는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물론 안 죽고 영원히 사는 것도 포함됩니다.)
묵시록을 보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묵시 21,3-4).”
“그곳에는 더 이상 하느님의 저주를 받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묵시 22,3).”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면서 사는 것은, 그 어떤 슬픔도 아픔도
없이 영원하고 참된 평화와 행복과 기쁨과 안식을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면서 살 때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일부 사이비 종교에서는 안 죽고 영원히 사는 것만을 말합니다.
그런데 영원히 산다고 해도 슬픔과 울부짖음과 괴로움이 있다면,
또 하느님의 저주를 받는 것이(죄와 악이) 있다면, 그것은 영원한 행복을 누리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고통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또 공상과학 영화들 가운데에는
과학 기술을 사용해서 안 죽고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하는 영화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역시 영원한 고통 속에서 사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하느님 없이’ 사는 것은 ‘선(善) 없이 사는 것’,
즉 악(惡)이 가득한 곳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 곳에서 산다면, 참된 평화와 행복과 기쁨과 안식은 결코 누릴 수 없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부활해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르 12,25).
본능적인 욕망이나 욕심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시기, 질투 같은 것도 없고,
다툼과 갈등 같은 것도 없는, 참 평화를 누리는 생활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 라는 말은, 우리가 믿고 있는
그 하느님만이 참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은 한 분이시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 라는 말은,
우리가 믿고 있는 그 예수님만이 메시아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 우리는 ‘세상에 우상이란 없다.’는 것과
‘하느님은 한 분밖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늘에도 땅에도 이른바 신들이 있다 하지만
- 과연 신도 많고 주님도 많습니다만 -
우리에게는 하느님 아버지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1코린 8,4-6).”
다른 하느님, 다른 메시아는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한 분이신 참하느님과 예수님만을 믿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자칭 메시아가 40명이 넘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모두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속아서 인생을 낭비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하느님,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면서 사는 것이다.”
라는 말씀을 거꾸로 생각하면, “하느님,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면서 산다면,
지금 이곳에서도 영원한 생명을 누리면서 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지금 이곳에서 하느님,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면서 살 때 시작되고,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됩니다.
신앙생활은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이기도 하고,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는 생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만일에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이웃의 고통에도 관심이 없고, 사랑 실천도 하지 않고,
현세적인 복을 받는 일에만 집착하고, 그 복을 빌기만 하는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기를 바라시는
하느님과 예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고,
하느님,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지 않는 생활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닥친 불행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지금 당장 나에게 필요한 것은 영원한 생명이 아니라, 이 고통에서 벗어나서
조금이라도 사람답게 사는 것이다. 그래서 도와달라고 주님께 기도하는 것이
잘못인가?” 라고 묻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기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어떤 고통을 겪고 있어서 주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할 일이고, 필요한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잘 걸어가려면 ‘영육 간에’ 건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영혼뿐만 아니라 육신도 건강해야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모든 고통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는 분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나의 고통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웃의 고통’도 생각하고,
이웃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권한을 예수님에게 주셨기 때문에(요한 3,35)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데,
예수님을 믿는 것은 곧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입니다(요한 14,21).
그리고 예수님께서 특별히 강조하신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라는 계명입니다.
(‘사랑 없는’ 영원한 생명은 - 만일에 그런 것이 있다면 -
아마도 대단히 끔찍하게 잔인하고 비참할 것입니다.
사랑 없는 곳은 지옥과 같은 곳이고,
그런 곳에서 영원히 사는 것은 영원한 형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참으로 행복한 생명이 되려면 가장 먼저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랑은 바로 지금, 이곳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요한 17,1-11: 아버지, 당신 아들의 영광을 드러내 주십시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 제자들을 위해 하신 마지막 기도이다. 이것을 주님의 사제적 기도라고 한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1절) 아들의 영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며 죽음을 통한 부활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님 일생의 정점이며 이미 영광으로 요한복음은 드러내고 있다. 십자가와 “높이 들리심”은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분은 부활로써 더욱 영광스럽게 되셨다.
예수님의 수난은 그분의 영광보다 치욕을 보여 준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 치욕이 영광이 되었다. 부활의 영광이란 치욕에 대한 상이었다. 이제는 치욕이라는 씨앗을 심을 때이니 열매라는 영광을 늦추지 않게 해달라고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아들도 아버지도 영광스럽게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에 의해 부활로써 영광스럽게 되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부활을 선포하심으로써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도를 바치신 것이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3절) 영원한 생명은 굳건한 믿음에서 온다. 하나이신 하느님을 믿고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시고 세상의 구원을 위해 아버지로부터 오신 아들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이 실천되어 참으로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아들을 아는 것이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맡기신 사명을 완수하심으로써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셨다고 하신다.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고 부활하셨다. 아버지께 대한 사랑은 십자가 위의 죽음으로 표현되었으며, 그것이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냈으며, 그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세상이 아버지와 아들을 믿게 되었으니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 세상이 생기기 전에 제가 아버지 앞에서 누리던 그 영광으로, 이제 다시 아버지 앞에서 저를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하고 기도하신다. 이제는 “제가 당신 오른쪽에서 누리던 영광을 이제 다시 누리게 될 시간이 왔다.”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버지를 계시하셨고 그들은 또한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켰다고 하신다. 그 말씀이 바로 스승이신 그리스도이셨고, 그분의 말씀이 바로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승의 가르침을 통하여 아들이 가지고 계신 모든 것이 아버지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스승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것은 그 말씀을 따르며 살아가면서 신비를 깨닫게 되었다는 말이다. 제자들은 그 말씀을 믿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아들이 참으로 아버지에게서 오셨다는 것을 알고,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고 하신다.
그래서 “저는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9절) 대사제요 중개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인간으로서 기도하신다. 동시에 언제든 자격 있는 이들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께 순명할 준비가 되어 계신다.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의 세상은 세상의 욕망을 따라 살며 아버지께서 세상에서 뽑으신 이들처럼 자비를 입지 못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뽑힌 이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것이다. 그들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래서 “이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9ㄷ절)이라고 하신 것이다.
“이 사람들을 통하여 제가 영광스럽게 되었습니다.”(10ㄴ절)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이들이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면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고 찬미를 드리는 동시에 그리스도를 닮게 되기 때문에 아들도 영광스럽게 하는 것임을 말씀하신다. 또한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필리 2,10-11)할 것이다. 모두가 아버지를 위해서, 그리고 아들을 위해서도 죽는다. 아버지를 선포하며 동시에 아들을 선포한다. 그리고 기도를 하면서 아들의 이름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더 이상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아직 세상에 남아있어야 하는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신다.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그들이 세상을 변화시키도록 하는 누룩의 역할을 하도록 용기를 주신다. 그들을 미워하는 세상을 사랑하며 하느님의 뜻으로 변화시키려 노력하는 존재들이다. 영적 생명은 시련과 고통을 통해 성숙한다. 그리스도인들도 박해받을 때마다 늘어난다. 이것도 하느님께서 주신 훌륭한 지위이다.
우리는 이제 우리의 삶을 통하여 주님의 영광이 더 드러나도록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주님의 영광은 십자가를 통하여 나타났으며,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통해서 그 영광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이러한 삶을 살기로 결심하자.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요한 17, 1)
-한상우신부-
나의 때도
너의 때도 아닌
아버지 하느님의
때가 중요합니다.
되돌릴 수 없는
시간속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들 삶입니다.
삶의 기쁨도
삶의 슬픔도
모두
삶의 의미를
묻게하는 삶의
소중한
여정입니다.
기쁨과 슬픔 속에서
길을 만드시는 분도
하느님이시고
그 길위에서
때를 주시는 분도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때는
하느님의 참된
사랑입니다.
순간순간이
하느님의 때이며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하느님의 때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믿음은
아버지께로 가는
길임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온
아버지의 때는
바로 예수님의
모든 삶임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때에
아버지께로
가십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두 개의 고별사를 만납니다. 둘 다 아름답고 진실한 사랑이 깊게 흐르는 기도입니다.
복음 속 예수님의 기도는 아버지께, 제1독서 바오로의 고별사는 에페소 원로들을 향하지만 그 내용 안에 겹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요한 17,1).
오늘 복음 대목은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에 바치신 대사제의 기도 중 당신 자신을 위한 기도와 제자들을 위한 기도의 일부입니다.
영광의 "때"가 닥쳐옵니다. 그 "때"는 사람으로서도 하느님의 아들로서도 직면하기 어려운 시간입니다. 아들은 인류의 속죄를 위해 수난과 죽음에 순종함으로써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할 것이고, 아버지는 그 아들의 제사를 받아들이시면서 그를 다시 살리심으로써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를 향한 완전한 신뢰와 사랑으로 서로를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이제 나는 성령께 사로잡혀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사도 20,22).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종교와 정치의 중심지이지만 또한 예언자들이 피를 흘리고 죽어간 도시지요. 예루살렘을 향하는 바오로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당시로서는 그도 원로들도 모르지만 그의 고백에는 비장함과 더불어 홀가분함이 서려 있습니다. "달릴 길을 다 달려"(사도 20,24) 사명을 완수한 그를 통해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자유롭습니다.
"모든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도록 ... 권한을 주셨습니다"(요한 17,2).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에게 진정한 권한이란 무엇인지 들려 줍니다. 세상은 자기에게 주어진 권한을 제 명예와 재물, 영달을 위해 휘두르고 그 과정에서 억압과 착취, 폭력도 불사합니다. 하지만 예수님 말씀처럼 권한은 생명을 주라고 주어지는 것이지요.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모든 권한은 타인을 생기있게 활짝 피어나도록 돕는데 기여해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말씀을 제가 이들에게 주고"(요한 17,8)
말씀이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아들에게서 제자들에게로 주어집니다. 아낌없이! 남김없이!
"유익한 것이면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 ... 알려 주고 가르쳤습니다"(사도 20,20).
사도 바오로 역시 혼신의 힘을 다해 자신이 받은 모든 것을 신자들에게 쏟아주었지요. 이는 다른 모든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렇듯 하느님을 아는 지식과 말씀은, 원천이신 하느님에게서 나와 성자를 통해 그리고 교회를 통해 우리에게까지 주어집니다. 이 앎에서 믿음이, 믿음에서 사랑이, 사랑에서 일치가 피어나지요.
"저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은 제 것입니다"(요한 17,10).
일치를 이룬 이들은 존재와 더불어 소유를 공유합니다. 앎도 믿음도 사랑도 일치도 영광도 생명도 죽음까지도 아버지의 것인 동시에 아들의 것이고, 과분하게도 그 일치에 참여하는 우리의 것이기도 합니다.
아버지께 드리는 예수님의 기도 안에는 더할 나위 없는 친밀함이 드러납니다. 아버지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순종, 신뢰가 하나로 녹아 있는 기도이기에 그렇습니다. 동시에 제자들에 대한 염려와 기원 또한 가득하지요. 이는 바오로의 고별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의 영광을 위해 자신을 잊는 사랑은 이렇듯 아름답고 자유롭습니다. 사심 없이 "달릴 길을 다 달려"(사도 20,24) "맡기신 일을 완수"(요한 17,4)한 이는 제 영광의 무게를 훌훌 내던진 이의 자유로, 오히려 더 가벼운 마음으로 "때"를 맞이할 수 있지요.
사랑하는 벗님! 우리도 당신의 "때"를 향해 담담하게 자유로이 나아가시는 예수님 뒤를 따릅시다. 더 겸허히, 더 홀가분하게, 더 진실하게... 그것이 바로 우리가 "아버지 앞에서 누리던 영광"(요한 17,4), 본래의 영광입니다.
성령의 꼭두각시
-김찬선신부-
"이제 나는 성령께 사로잡혀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오늘 바오로는 에페소 원로들과 작별하면서 자기가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 성령께 사로잡혀 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실은 사도행전 19장을 보면 자신이 예루살렘에도 가고
로마에도 가는 계획을 세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끝난 뒤, 바오로는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고, '거기에 갔다가 로마에도 가 보아야
하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사도 19,21)
그렇다면 성령에 사로잡혀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다는 말은 거짓말인가요?
19장의 바오로 말과 20장의 말은 모순되는 말인가요?
영감靈感을 받는다는 말이 있지요.
영감이란 그대로 풀이하면 영적인 느낌이지요.
살다 보면 어떤 때 번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지요.
영감이란 이렇게 번뜩 떠오르는 생각일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제게 아이디어가 많은 이유가 번뜩 떠오르는 생각이 많기 때문인데
지나고 나서 보면 그 많은 생각 중에 어떤 것은 그야말로
저의 잡다한 생각 중의 하나이고, 어떤 것은 정말 영감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생각은 떠오르는 것이고, 영감은 받는 것입니다.
생각은 나에게서 비롯된 것이고 영감은 성령에서 비롯되는 거라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영감이란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픈
열망을 가지고 있을 때 그 열망을 이루도록 성령께서 주신 것이지요.
아무튼, 영감은 내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이고,
이렇게 영감을 받아서 하면 내가 하는 것이 곧 성령이 하는 것이 되는데
그런데 생각을 해보면 영감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지만
영감이 주어진다고 해도 주어지는 것을 다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영감을 받아서 하는 것이든 성령에 사로잡혀서 하는 것이든
자기 뜻대로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성령의 꼭두각시 짓으로 생각되어 거부감이 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꼭두각시라는 것이 자기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 의해 조종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잖습니까?
사실입니다.
성령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성령의 꼭두각시가 되는 것입니다.
단지 악령의 꼭두각시가 되는 것과 차이가 있다면
악령의 꼭두각시가 싫고 그래서 원치 않는데도 그 꼭두각시가 되는 거라면
성령의 꼭두각시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는 열망을 가진 사람이
스스로 성령을 영접함으로써 되는 것의 차이이지요.
옛날에 무당은 최하층 천민이었기에 무당 되는 것을 누구나 싫어했지만
무병巫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림굿을 통해 무당이 되었지요.
이렇게 무당이 되면 평소에는 다른 사람과 똑같은 존재이지만,
단골이 찾아와 굿을 청하고 신탁을 내려달라고 하면 이제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 곧, 신이 들린 사람이 되어야 하기에 한바탕 푸닥거리를 하고
비로소 신이 들렸을 때 단골이 원하는 신탁을 내려줄 수 있게 되지요.
성령에 사로잡히는 것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면에서는 같습니다.
나로서 살겠다는 사람은 성령에 사로잡히기를 거부할 것입니다.
진정 하느님 사랑 때문에 스스로 성령에 사로잡히기를 원할 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스스로 종이 되듯 능동적 수동태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자유가 있습니다.
다만 하느님 사랑 때문에 스스로 성령의 꼭두각시가 될 뿐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나는 아버지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일을 다 하여 세상에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요한 17,1-11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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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주님의 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입니다. 우리 열매로 나무이신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합시다. 이것이 성령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마음이 평화롭지 못하고 기쁘지 못하면 내가 ‘나 자신을 위해서’ 사는지, 아니면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마음으로 사는지 살펴야 합니다.
88년 서울올림픽에서 세계인의 이목을 끈 여자육상선수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여자’라고 불리는 그리피스 조이너입니다. 그녀가 금메달을 따내자 많은 기자가 몰려 취재 경쟁을 벌였습니다. 그 가운데 미 NBC 방송의 한 기자가 “달리면서 어떤 생각을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하느님께 영광 돌릴 것을 생각하며 달립니다. 나 자신과 싸움에서 이긴 후 하느님께 영광 돌릴 때만큼 인생의 보람을 느껴본 적은 없었습니다.”
달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순간에 주님께 영광을 드릴 생각을 해야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부터 잠자리에 들 때 주님께 영광을 돌릴 결심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으로부터 영광을 받는 하루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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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한 생명, 영원한 행복은 돈, 건강, 자녀의 축복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고, 실천하는 사람이 영원한 생명,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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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생명이란 아버지를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것은, 단순히 안 죽고 영원히 산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면서 사는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면서 사는 것은, 그 어떤 슬픔도 아픔도
없이 영원하고 참된 평화와 행복과 기쁨과 안식을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면서 살 때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하느님 없이’ 사는 것은 ‘선(善) 없이 사는 것’,
즉 악(惡)이 가득한 곳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 곳에서 산다면, 참된 평화와 행복과 기쁨과 안식은 결코 누릴 수 없습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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