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5월 21일 부활 제6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20. 5. 20. 18:56

2020 5월22일 부활 제6주간 금요일 

 

 너희의 마음은 기쁨에 넘칠 것이며

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요한 16,20-23ㄱ) 

 

Your hearts will rejoice, 

and no one
will take your joy away from you.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병규신부-

 

해산의 고통은 구약 성경에서 메시아를 기다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시간을 상징하는 개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다림의 시간이 아니라 완성의 시간이라고 고백하는, 그래서 지금 이 시간이 완전한 시간이고 종말의 시간임을 기억하는 이들입니다. 
고통의 시간이 기쁨의 시간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자리와 나누는 ‘화해’를 통하여 가능합니다. 저마다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 각자가 계획하고 결심하는 것에 대한 믿음,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기쁨의 원천이 됩니다. 
세상은 어리석게도 자꾸만 내 자신이 ‘나’를 부정적으로 보게 만듭니다. ‘지금보다 나은 나’, ‘지금보다 멋진 삶’, ‘지금보다 성공한 내일’을 꿈꾸게 하는 거짓 가르침을 세상은 좋아합니다. 서점가에 쌓여 있는 자기 계발서는 이러한 가르침을 더욱 부추기고 사람들이 그런 책을 읽을수록 ‘지금의 나’는 부정되고 제거되어 버립니다. 
지금, 이 자리가 어설프고 부족하더라도 현재를 소중히 여기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부족하면 서로 돕고, 어설프면 서로 챙겨 주는 일이 그리스도인의 삶이고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갈수록 종교가 힐링 센터로 변질되어 가는 오늘날, 성당이나 교회가 경쟁에 지친 개인을 위로하는 공간으로만 머물고, ‘더 나은 내일’을 향한 결심과 격려의 자리로만 굳어진다면, ‘지금의 나’는 도대체 어디서 예수님을 만나고 기쁨을 누릴까요? 
다시 한번 되새깁니다. 우리는 지금 ‘완성의 시간’, ‘종말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후회할 어제도, 살아갈 내일도 아닌 지금 이 시간에 대한 사랑과 존중이 필요합니다. 그 사랑과 존중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을 생각하고 나 자신을 보듬는 일, 그것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의 소셜 미디어를 많은 이들이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자신의 일상을 사진에 담아서 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누구도 여기에 자신의 나쁜 것은 올리지 않습니다. 자신의 좋은 일상만을 올리고 있지요. 연인과 싸우는 모습, 돈이 없어서 힘들어하는 모습, 시험을 망쳐서 괴로워하는 모습 등을 올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좋은 모습을 보고서 부러워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나는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세상의 사람들은 모두 편하고 많은 것을 누리면서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소셜 미디어의 모습은 그 사람 삶의 몇 %에 해당하는 것일까요? 크게 잡아봐야 아마 5% 정도에 불과할 것입니다. 따라서 소셜 미디어의 모습을 보고서 누군가를 부러워하고 있다면 겨우 5%를 보고서 부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 사람의 가장 좋은 모습이 겨우 밥 먹는 것, 차 마시는 것, 옷 입는 것 등이라고 한다면, 정말로 나와 비교하면서 부러워할 것도 아닙니다. 

세상의 것들은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그렇게 부러워할 것도 아닙니다. 세상이 주는 것들은 순간의 만족만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진짜 나의 모습을 만들어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습을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나의 행복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짜의 내 모습을 만드는 것보다 진짜의 내 모습을 찾아서 사랑하는 당당한 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이후 세상에 속한 자들은 웃었습니다. 자기의 뜻대로 골치 아픈 예수님을 제거했다면서, 이제 더는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로써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돌아갔을까요? 순간의 만족만 가져다주었을 뿐, 이 세상을 마치고 하늘나라에서 큰 후회를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에 속한 자들이 웃을 때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겪는 고통을 출산의 고통에 비유하십니다. 출산의 고통은 정말로 크다고 합니다. 누군가가 그 고통을 이렇게 표현하더군요. 

“콧구멍으로 수박이 튀어나오는 것 같은 아픔” 혹은 “피가 날 때까지 양 손가락으로 입을 양쪽으로 찢는 아픔”이라고 말입니다. 제가 남자이고, 또 결혼하지 않는 신부이기 때문에 직접적으로는 체험할 수 없지만, 이 글만으로도 얼마나 큰 고통인지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고통스러운 출산을 피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출산 후의 기쁨, 내 아기를 품에 안는 기쁨이 훨씬 더 크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나중에 웃게 된 이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주시는 기쁨은 세상의 기쁨보다 크고 오래갑니다. 따라서 세상의 것이 아닌 주님께 집중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때를 놓치지 말라. 이 말은 인간에게 주어진 영원한 고통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것을 그리 대단치 않게 여기기 때문에 좋은 기회가 와도 그것을 잡을 줄 모르고 때가 오지 않는다고 불평만 한다. 하지만 때는 누구에게나 오는 것이다(앤드류 카네기).

 


못된 신부, 믿음 없는 신부.


예전에 본당신부로 있을 때, 본당에 한 장사꾼이 찾아왔습니다. 자신이 너무나 힘든 여건에 처했다면서 도움을 요청합니다. 물건을 팔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지고 온 물건이 너무나 조잡해 보였고, 질도 기성 제품과 비교해서 너무 안 좋았습니다. 이런 물건을 성당에 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문제점들을 하나하나 지적했더니, 화를 내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슨 신부가 어려운 사람을 도우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신자가 물건을 가져왔으면 믿어줘야지, 왜 신자를 믿지 못합니까?”

너무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더욱더 차갑게 거절했습니다. 안 좋은 물건을 사지 않는다는 이유로 못된 신부, 믿음 없는 신부로 만드는 것이 괘씸했기 때문입니다.

좋게 거절할 수도 있었는데 감정적으로만 처리한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잘한 결정이라도 감정, 특히 부정적 감정이 들어 있을 때는 좋은 결론을 맺을 수가 없는 법 같습니다. 후회할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나 자기를 되돌아볼 수 있는 마음, 스스로 낮추어 생각할 수 있는 마음, 이것이 주님의 뜻을 새기는 마음이 아닐까요? 후회를 줄이는 방법입니다.                   

 

주님 시선에만 근심하기로 결심해야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

-전삼용신부-

 

경북 대구의 근교에 ‘지산교회’라는 교회가 있었는데, 그 교회에 재정적으로 한몫을 담당하던 ‘오 부자’가 있었습니다. 성이 오씨가 되어 오 부자라고 지칭되는 것이 아니라 5형제가 모두 교회에 다니고 있는 집안으로, 모두가 부자이기 때문에 일괄하여 오부자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 오 부자가 사업 관계상 지산을 떠나 대구로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오 부자가 한꺼번에 이사하게 되자 지산교회의 재직들은 적잖게 당황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교회를 꾸려 갈 수 없다고 생각한 재직들은 대구로 선교사 안두화 목사를 찾아갔습니다. 선교사에게 사정을 말하고 재정적으로 지원을 좀 받아 볼까 하는 약삭빠른 속셈에서였습니다. 그들은 선교사 앞에 앉아서 한숨만 푹푹 내 쉬고 있었습니다. 선교사 안 목사는 이상하게 생각하여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왜들 그러십니까? 교회에 무슨 걱정되는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그러자 그들은 이때로구나 하고 “예, 목사님! 아 우리 교회의 오 부자가 글쎄 한꺼번에 이사하였지 뭡니까? 그러니 우리 교회의 유지가 문제입니다.”라고 눈치를 보아 가며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안 선교사는 “그래요? 그것참 문제로군요.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걱정이 있습니다.”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재직들은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아니 또 무슨 걱정이 생겼다는 말인가?’ 그들은 놀라서 안 목사에게 물었습니다.

“왜요? 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그러자 안 목사는 조용히 웃으면서 그들에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요. 문제지요. 이것보다 더 큰 문제는 없습니다. 지산교회의 여러분들은 주님은 믿지 않고 오 부자만 믿고 계시니 그게 어떻게 문제가 아닙니까?”

      삶이 기쁘지 않게 만드는 장본인이 바로 이 ‘근심’입니다. 근심은 누구를 믿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우리도 실제로는 나 자신과 나 자신이 믿는 것을 믿으면서 주님을 믿는다고 착각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믿음은 곧 ‘근심’과 연결됩니다. 자신을 믿어도 자신이 믿는 것에 대해 근심하고, 하느님을 믿어도 근심할 거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근심은 서로 반대이기 때문에 두 근심이 함께 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도 계속 ‘성령의 오심’과 연결됩니다. 성령의 열매는 기쁨인데, 어떻게 그 기쁨을 주시는 성령을 받을 수 있느냐가 관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상반된 ‘근심’과 그에 따른 ‘기쁨’에 의해 언급하십니다. 세상은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는 근심 속에 잠겨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더는 보이지 않으시면 세상은 기뻐합니다. 물론 제자들은 세상이 기뻐할 때 근심에 쌓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다시 만나게 되면 세상은 근심에 쌓이지만, 제자들은 기뻐합니다.

 

이렇듯 세상에 속한 사람의 근심과 주님께 속한 사람의 근심은 반대입니다. 하나가 기뻐할 때 다른 것은 근심하고, 하나가 근심할 때 다른 것은 기뻐합니다. 우리는 누구를 믿어 근심할 것인지 정해야 합니다. 주님을 믿으면 세상 것 때문에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 것 때문에 근심하면 주님 때문에 근심하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세상 근심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 가장 좋은 방법은 오늘 죽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죽으면 누구나 주님을 만나게 된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압니다. 그러면 주님 때문에 근심하게 됩니다.

빈센트 빌 박사가 거리를 걷고 있는데 한 젊은이가 매우 괴로운 표정을 하며 인사를 합니다.

빌박사 : “자네 무슨 근심이 있나? 왜 그렇게 죽을상이 되어있나?”

젊은이 : “말씀 마십시오, 요즘은 근심과 걱정이 떠날 날이 없습니다. 하나가 지나면 또 하나가 꼬리를 무니 견딜 수가 없군요. 빌박사님 어디 근심 걱정이 없는 곳이 없을까요?”

빌박사 : “있지. 딱 한 군데가 있지.”

젊은이 : “그곳이 어딘데요?”

빌박사 : “왜, 그곳에 가겠나?”

젊은이 : “가고말고요. 그런 곳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가죠.”

빌박사 : “그래? 그럼 설명하지, 공동묘지라네. 그곳에 누워있으면 아무런 근심이나 걱정이 없지.”

젊은이 : “그럼 나더러 죽으란 말씀인가요?”

빌박사 : “그런 마음으로 살라는 것이네. 오늘 죽는다고 생각하면 자신보다는 오늘 만나게 될 그분 때문에 더 근심하게 될 걸세. 오직 그 방법을 통해서만 자네가 하는 근심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어.”

      우리는 누구 때문에 근심하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내가 잘살고 있는지 알고 싶거든 지금 그리스도께서 나를 바라보고 계시다고 느껴보십시오. 그분이 미소짓고 있다면 잘살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시선을 바라보고 눈을 맞추는 이에게만 당신이 준비한 기쁨의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신랑이 자신의 아기를 낳아준 여인에게 돈을 벌어 가져다주는 것과 같습니다. 여인은 아기를 낳아야 해서 근심하지만, 그 근심은 기쁨으로 바뀝니다. 이것이 주님 때문에 근심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주님의 시선 때문에 지금 당장은 근심스럽더라도, 그 열매 때문에 주어지는 성령으로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을 얻게 됩니다.

 

-조재형신부-

 

인터넷에서 좋은 영상을 보았습니다. 코로나19에 대한 영상입니다. 영상을 보면서 공감하였습니다. 제목은 나는 여러분을 벌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일깨우러 왔습니다.”였습니다. 북극의 빙하가 녹아내려도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호주에서 몇 달씩 산불이 멈추지 않았어도 사람들은 그런가보다 하였습니다. 가뭄이 길어지고, 사막이 넓어져도 무관심했습니다. 강력한 태풍과 쓰나미가 왔어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대기가 오염되고, 강물이 썩어가고, 바다에 쓰레기 섬이 떠다녀도 아직은 별거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미세먼지가 태양을 가리고 호흡기 질환이 늘어나도 곧 좋아질 거라고 말했습니다. 여전히 전쟁으로 사람은 죽었고, 난민들은 바다 위에서 죽어갔습니다. 적자생존, 양육강식을 이야기하며 경제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왔습니다. 여러분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 왔습니다. 코로나19는 우리에게 재앙이고, 재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누군가의 실수와 잘못으로 우리가 피해를 본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직자가 넘쳐나고, 여행도 가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가는 걸 지켜보면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니 코로나19는 우리를 일깨워주는 것 같았습니다. 성공, 명예, 재물이라는 별을 쫓아가기보다는 믿음, 희망, 사랑의 별을 쫓아가야 한다고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자연은 파괴하고 정복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잠시 머물 수 있도록 허락해주는 고마운 존재임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우리가 계속 자연을 파괴하고, 전쟁을 일삼으면 더 큰 것이 우리를 일깨워 줄 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소유와 욕망의 배에서 내려와 존재와 가치의 배를 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공동체 미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신분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고, 발열체크를 해야 하고, 손 소독을 해야 하고, 마스크를 착용해야 합니다. 사제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렇게 불편을 감수하면서 우리는 공동체 미사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어느 수도자의 글을 읽었습니다. 공감이 가기에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명단에 이름과 연락처를 적으면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녀인 나의 이름을 기억하신다는 것을 마음에 새겨둡니다.

 체온을 측정하면서, 내 사랑의 온도는 얼마나 될지 헤아려봅니다.

 손 소독제로 손을 닦으면서 하느님 앞에는 깨끗한 손, 빈손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봅니다.

 마스크를 착용하면서 말을 줄이고, 덜 먹고 덜 마시기를 다짐합니다.

 정해진 자리에 앉으면서 하느님이 내게 정해주신 자리를 찾았는지 성찰해 봅니다.

 사회적 거리를 두면서 내 이웃 사람의 고유한 영역을 존중해주었는지 반성 해봅니다.

 

생각하나 바꾸면 불편함이 나를 성찰하는 묵상이 됩니다. 아기의 출산은 분명 고통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곧 기쁨의 시간이 됩니다. 한 생명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박해와 순교는 고통의 시간이며, 절망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곧 행복의 시간이 됩니다.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물리적인 시간을 이야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의미의 시간을 이야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치의 시간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러기에 헤어짐의 슬픔은 기쁨이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가치의 시간에서는 가난함도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가치의 시간에서는 아픈 것도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은총이 될 수 있습니다. 죽음은 단절과 허무입니다. 세상에서 이룬 모든 것들과 이별이기 때문입니다. 가치의 시간에서는 죽음도 끝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에게 죽음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에로의 초대입니다. 그러기에 죽음은 두렵고 떨리는 사건이 아니라, 새로운 탄생이며, 기쁨입니다.

 

바오로 사도와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주님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걸어서 먼 길을 갔으며, 때로는 매를 맞기도 하고, 멸시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는 오뚝이처럼 주님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치의 시간을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들 역시 가치의 시간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예수님 안의 참 기쁨은 한 인간을 치유하고 고무(鼓舞)시키는 힘입니다!

 -양승국신부-

 

놀랍고도 영웅적인 바오로 사도의 선교 여정을 오늘도 계속됩니다. 오늘 소개되고 있는 장면은 바오로 사도가 각별히 염두에 두고 있었던 도시, 당대 나름 잘 나간다고 자부하던 도시 코린토에서 펼쳐집니다. 어느 날 밤, 주님께서는 환시 속에서 바오로 사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잠자코 있지 말고 계속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헤치지 못할 것이다.”(사도행전 18장 9~10절) 

 

당시 한 마리 들짐승처럼 이리저리 내쫒기며 갖은 박해와 고초 속에 있던 바오로 사도, 내일의 생사를 기약하기 힘들 정도로 코너에 몰려있던 바오로 사도에게 주님의 말씀은 너무나도 큰 위로요 희망이었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우리 주님께서도 요구가 참 많으신 분입니다. 이방 선교에 전념하느라 몸과 마음이 모두 너덜너덜 해진 바오로 사도, 여기 저기 쑤시고 아파 어디 한 군데 성한 곳이 없는 바오로 사도였습니다. 

 

그런 바오로 사도를 향해 주님께서는 ‘이제 그만하면 됐다! 그간 고생 많았다! 어디 한적하고 안전한 곳으로 가서 몇달간 푹 좀 쉬거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잠자코 있지 말고 계속 말하여라.” 

 

주님께서는 잔뜩 웅크리고 있던 바오로 사도에게 잠자코 있지 말고 군중들이 운집한 광장으로, 사람들이 모든 회당으로 나가라고 재촉하십니다. 그리고 입을 다물고 있지 말고 계속 말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바오로 사도에게 무엇을 말하라고 요청하셨을까요? 예수님 당신의 운명과 사명을 외치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얼마 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떠나 처참한 몰골로 돌아가셨습니다. 더 이상 이 지상에서 그분을 뵙지 못하겠다는 생각에 우리 모두 울며 통곡했습니다.

  

더 이상 예수님의 온화한 얼굴, 따뜻한 미소, 그윽한 눈길을 뵐 수 없다는 생각에 깊은 슬픔이 밀물처럼 밀려왔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분께서는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에게 돌아오셨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우리에게 다시 돌아오신 그분의 얼굴은 부활의 영광에 빛나는 광채로 찬란했습니다.

  

잃었던 주님을 다시 찾은 우리 모두는 넘치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떠나시기 전 우리에게 예고하셨던 스승님의 말씀이 글자 한자 틀림없이 우리들 눈앞에 실현되었습니다."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요한 복음 16장 22~23절)

  

예수님 안의 참 기쁨은 한 인간을 치유하고 고무(鼓舞)시키는 힘이자 에너지입니다. 그 기쁨은 생명력을 낳습니다. 그 기쁨은 절망스런 상황 가운데서도 희망하게 합니다. 그 기쁨은 깊은 슬픔 가운데서도 미소 짓게 합니다. 그 기쁨은 결국 우리를 생명과 구원에로, 창조자이신 하느님께로 인도합니다.

  

우리의 나날이 늘 고통과 슬픔의 연속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지나서 돌아보면 많은 기쁨의 순간들이 있습니다. 사는 것 자체가, 삶 자체가, 하루하루가 기적이며 가장 큰 기쁨의 원동력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오늘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이영근신부-

 

 오늘날에는 아파하고 고통 받는 이들이 유난히도 많아 보입니다. 슬픔과 외로움에 지친 이들, 부당한 처사로 괴로움을 당하는 이들과 근심걱정과 절망에 빠진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누군들 슬픔에서 해방되고 싶지 않는 이가 있을까요?

누군들 고통과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지 않는 이가 있을까요?

기쁨을 향해 달려가지 않으려 할 이가 누가 있을까요?

그런데, 대체 참된 기쁨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오늘날 세상의 슬픔과 고통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가장 깊이 공감하며 함께 아파하고 계신 프란치스코 교종의 권고문헌인 <복음의 기쁨> 1항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이의 마음과 삶을 가득 채워줍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죄와 슬픔, 내적 공허와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참된 기쁨을 예수님에게서 만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내 안에서 탄생되는 기쁨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제자들은 주님이 죽음에 처했을 때 슬퍼했지만, 그분께서 부활하신 것을 알자 그 슬픔은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 5,4)

 

<시편> 작가도 말합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126,5)

 

제자들은 지금 신음하며 해산중입니다. 해산을 마치면 그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고통이 사라질 뿐만 아니라, 기쁨이 너무 커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고 하십니다. 그때에는 슬픔이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이 기뻐하는 것은 한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서가 아니라, ‘자신의 아기가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기쁨은 아기가 내 안에서 태어나야 오는 기쁨입니다. 그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은 내 안에서 이루어져야 됩니다. 그것은 내가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새로 탄생하는 것이 곧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그렇습니다. 부활이 내 안에서 탄생하는 이 기쁨은 빼앗겨지지도, 빼앗겨 질 수도 없는 기쁨입니다. 사실, 내가 기쁨을 낳은 것이 아니라, 기쁨이 나를 낳은 것입니다. 이것야말로 바로 예수님께서 주신 참된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예수님의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임을, 죽음이 아니라 생명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고별담화의 마지막 마지막을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주님!

저에게는 자랑할 것이 딱 한 가지 있습니다.

자랑하고 또 하고 또 해도 다하지 못할 자랑입니다.

방에 들라치면 먼저 들어와 있고

일어날라치면 내 안에서 먼저 일어나고

기도할라치면 이미 내 안에 들어와 있는 임의 사랑입니다.

바로 이것이 저의 기쁨입니다. 아멘.

 

고통을 품어 안는 힘

-반영억신부-

 

성 아우구스띠노는 “주님 안에서의 기쁨이 세상을 두고 누리는 기쁨에 승리를 거두게 하십시오.” 하고 권고합니다. 사실 “주님은 기쁨이십니다.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 할지라도 주님은 언제나 기쁨이십니다. 하찮은 우리의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까롤로 까레또). 그러므로 기쁨이신 주님을 차지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예고를 듣고 근심에 싸인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다”(요한16,22).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보게 된다는 말씀은 곧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부활은 완전한 기쁨의 원천이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랑의 승리요, 사랑의 삶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죄악의 어둠에 죽고 거듭나는 일상의 새 삶을 통해서 부활의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기쁨이 크다는 것은 그만큼 기쁨에 앞서 괴로움을 크게 겪었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의 것에 맛들이지 않고 주님을 희망하고 천상의 것에 마음을 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실 주님을 갈망하면 처음에는 갈등이 생깁니다. 할 일도 많아집니다. 손해보고 불이익을 당하는 것 같고 괜한 일을 시작하였다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남들은 편히 사는데 사서 고생한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께 가까이 가면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조금만, 더! 또다시 참아 내고 이겨내면 하느님의 위로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산할 여자가 어여쁜 아기를 기다리는 진통의 시간을 겪듯이 우리 또한 아픔의 시간을 이겨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고통은 없어질 것이 아니라 품어서 극복되어질 고통이라는 사실이고 진통이 끝난 뒤 새로운 생명의 기쁨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부활의 기쁨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의 상처를 극복하는 사건이지 그것을 없던 일로 만드는 사건은 아닙니다. 인생 여정에서 겪는 고통과 시련은 부활의 기쁨을 향한 디딤돌이지 없애야 할 절대악은 아닙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7).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입니다. "혼돈과 실망과 눈물의 순간에 그리스도의 눈물은 아버지 하느님을 향한 기도가 됩니다. 기도는 우리의 고통의 진정한 치료제입니다. 기도에서 또한 우리는 하느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분의 자애로운 눈길이 우리를 평안케 합니다. 그분 말씀의 힘은 우리를 지지하고 희망을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의 무덤 옆에 서시어 기도하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요한 11.41-42). 

참된 기쁨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위로를 얻기 전에 하느님을 애타게 기다리고 찾아나서는 일부터 해야 하겠습니다. 기도 안에서 주님을 차지하여 고통을 감당하고 기쁨을 만드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당신 말씀을 발견하고 그것을 받아먹었더니 그 말씀이 제게 기쁨이 되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주 만군의 하느님, 제가 당신의 것이라 불리기 때문입니다”(예레15,16).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송영진신부-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1-22).”

이 말씀에서 강조되고 있는 말은, ‘잊어버린다.’ 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가 얻게 되는 기쁨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때에 겪었던
슬픔을 잊어버릴 정도로 ‘큰 기쁨’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지 못하는 기쁨”, 즉 ‘영원한 기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의 기쁨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강조하시는 것은
제자들이 당신의 수난과 죽음 때문에 겪게 될 슬픔과 고통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서이지 그 슬픔과 고통을 잊어버리라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왜, 무엇을 위해서 수난을 당하셨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일을 당하셨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그러나 그 은총이 자동적으로 나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기를 바란다면,
누구든지 스스로 믿고 회개해야 합니다.
믿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는 사람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헛일로 만들어버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다음 시편이 연상됩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 126,5-6).”
우리의 신앙 여정은 눈물로 씨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마지막에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환호하며 추수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날이 되면 씨를 뿌릴 때의 눈물은 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사실 기억하고 있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종말 후의 일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씨를 뿌리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봄에 씨를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곡식이 없습니다.
지금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심판 때에 후회만 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 여정은 목적지가 확실하게 정해져 있는 여행입니다.
(신앙생활은 결과를 알고서 하는 생활입니다.)
물론 각 개인의 운명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든 어디를 향해서 가야 할지, 어떤 길을 걸어야 할지 몰라서
방황하거나 헤매는 일은 없습니다.
각 개인에게 주어진 십자가에 초점을 맞추어서 말한다면, 십자가는 부활을 향해서
가는 길의 한 과정일 뿐이고, 십자가 자체는 목적이 아닙니다.
사람에 따라 십자가가 조금 더 무거울 수도 있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시간이
조금 더 걸릴 수도 있지만, 목적이 아니라 과정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죄인들의 그러한 적대
행위를 견디어 내신 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낙심하여 지쳐 버리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히브 12,2-3).”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히브 12,7)”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히브 12,11).”
(여기서는 우리가 살면서 겪는 고난과 고통들을 하느님의 훈육이라고 표현했지만,
사실 하느님의 훈육이 아닌, 악에서 온 고난과 고통들도 있습니다.
그 경우에도 참고 견디는 일이 필요합니다.
인내는 십자가 수난을 견디어 내신 예수님을 본받는 일입니다.)

신앙 여정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뒤따라 걸어가는 일입니다.
사도들과 순교자들과 수많은 신앙인들이 이미 그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 길을 걸어가고 있는 신앙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결코 외로운 길은 아닙니다.
혼자라고 느껴지는 때에도 예수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걸어가시는 분입니다.
만일에 너무 힘들어서 걷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업고 걸어가실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분명 천사들을 보살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보살펴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히브 2,16-18).”
신앙생활은 ‘내가’ 구원받으려고 하는 생활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나 혼자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이 먼저 나를 도와주십니다.
내가 구원받는 것을 어쩌면 나보다 예수님께서 더 바라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생활입니다.)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요한 16,23ㄱ).”

‘그날’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날입니다.
(‘성령 강림의 날’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에는, 또 성령을 받은 뒤에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 하느님의 섭리 등을 모두 깨닫게 될 것이고,
그래서 예수님께 물을 필요가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다가 어떤 고난과 고통을 겪게 되면
“도대체 왜?” 라고 물을 때가 많습니다.
그 고난과 고통도 힘들지만, 이유를 알지 못해서 답답한 것도 힘든 일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부족하고, 또 우리의 신앙생활이 부족할 때,
하느님의 계획과 섭리를 깨닫는 일도 더디게 됩니다.
알고 싶고 깨닫고 싶다면, 단순하게 믿고, 인내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아무도 빼앗지 못하는 기쁨

-조욱현신부-

 

복음: 요한 16,20-23: 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가는 것은 제자들에게 슬픔이 되겠지만 그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게 될 것이라는 것을 산모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 여자가 해산할 때에 진통이 없이는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킬 수 없다는 말씀이다. 새 생명을 탄생시킨 후에는 새 생명이 태어났다는 것 때문에 그 진통의 고통을 잊고 기쁨을 느끼게 된다고 하신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스승을 잃는다는 고통은 두려움을 느끼게도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나게 될 때에는 고통이나 두려움은 모두 잊게 되고 다시 만난 기쁨만 남게 될 것이며, 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아갈 수 없다.

 

산통과 같은 고통을 겪게 되겠지만, 그 고통은 기쁨을 낳는 고통이다. 이는 그분의 부활의 의미를 알려주시는 말씀이다. 주님께서 그들을 떠나시는 것은 태 안에 있다가 밝은 대낮으로 옮겨 가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우리도 이러한 고통을 통하여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도 말씀하시는 것이다. 새 생명이 태어날 때도, 내가 새로이 태어날 때도 그 기쁨이 하도 커서 그 고통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산모가 기뻐하는 것은 한 생명이 세상에 왔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아이가 태어났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다.

 

아기가 태어날 때, 어머니가 기뻐하듯, 우리도 장차 우리가 차지할 세상으로 태어날 때 교회도 기뻐한다. 교회는 우리 신자들이 그렇게 태어나도록 현세에서 수고하고 신음하며, 출산하는 여인처럼 근심한다. 교회는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천상 탄생으로 이야기 한다. 아기가 어머니 태에서 나와 빛 속으로 오는 것을 태어난다고 하는 것처럼, 사람이 육체의 굴레에서 벗어나 영원한 빛 속으로 들어 올려지는 것을 태어난다고 표현하는 것은 적절하다. 우리는 성인들의 축일을 그분들이 돌아가신 날을 천상탄일로 표현하며 지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22) 희생과 고통이 지불되지 않은 다른 사람이 주는 기쁨은 내 마음 안에 오래 남지 못하고 없어진다. 내가 취한 기쁨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희생과 고통을 지불한 결과로 기쁨을 갖는다면 그 기쁨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은총이기 때문에, 그리고 하느님께서 완전한 분이시고 영원한 분이시기 때문에 그 기쁨도 완전하며 영원히 가치를 갖는다. 그래서 아무도 그 기쁨을 빼앗을 수 없다고 하신다. 주님께로부터 오는 이 기쁨은 그러기에 자기가 지불한 고통을 잊게 하고, 자기가 지불한 고통보다도 더 큰 보상을 받은 것 같아 주님께 감사드릴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기쁨을 간직하고 살 때,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23) 하신 것 같이,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갈 것이며 하느님의 지혜로 충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깊이 알아들을 수 있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씀, 즉 복음 말씀을 우리의 삶 속에 실천하여야 한다. 복음에서 나의 마음에 드는 구절 하나라도 구체적으로 실천하여 참된 기쁨을 체험하게 되면 우리는 다른 말씀도, 성서를 깊이 있게 알아듣게 된다.

 

복음의 말씀은 모두가 사랑으로 연결되어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이신 하느님 안에 남아있다는 것은, 그분과 하나를 이룬다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이며, 사랑으로만 하느님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하느님과의 더 깊은 일치를 이루는 기쁨을 갖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모두 부활하신 주님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인간은 항상 편한 것을 바라며, 고통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 나아가는 데 있어서는 고통이 없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이 고통과 희생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실천하기 위한 고통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그 고통은 내가 극복해야할 나 자신과의 싸움이다. 나 자신과의 싸움이 가장 큰 희생이며, 고통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고통을 지불할 수 있을 때, 새로운 생명인 기쁨이 우리에게 태어날 것이고, 우리의 고통을 모두 잊게 할 것이며, 새 생명은 나를 하느님 앞에 더 가까이 이끌어줄 것이다. 이러한 삶을 충실히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자.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요한 16, 21)

-한상우신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고통으로 
익어가는
우리들 삶입니다.

이겨낼 수 있는
고통을 
저마다에게
주십니다.

고통과 기쁨은
우리 삶안에서
함께 걸어갑니다.

고통과 기쁨
이 모든 것이
하는님 안에
있습니다.

해산의 진통처럼
고통으로 다시
태어나는 우리의
영적 여정입니다.

고통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는
축복임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고통이 없는
삶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탄생이 고통이고
부활이 고통의
여정을 지나갑니다.

다른 곳이 아닌
여기 이곳에
고통을 잊게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기쁨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변치 않을 기쁨을 약속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떠나신다는 스승의 말씀에 근심이 가득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재회를 언급하십니다. "다시 봄." 제자들은 반드시 잃었던 스승을 다시 만날 것이고 기쁨에 넘칠 것입니다.

"다시 봄"이 당시 제자들에겐 예수님의 부활을 의미하고, 우리에게는 예수님 재림의 때를 가리킬 것입니다. 이 "다시 봄"의 효과와 위력이 얼마나 큰지 이후에는 어떤 고통과 환난이 닥쳐도 일희일비하지 않고 그 기쁨을 굳게 간직할 것입니다.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요한 16,23).

이 말씀은 우리를 티베리아스 호숫가의 아름다운 장면으로 데려갑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아침식사에 부르셨을 때,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요한 21,12)라고 하지요. 제자들은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주님을 감지합니다. 그들의 기억과 사랑이 확신하니까요.

더 이상 물을 필요가 없는 상태는 서로에 대한 앎이 충만한 상태, 곧 사랑의 상태입니다. 관심이 없어서 물음조차 침묵해버린 상태와는 완전히 다른 얘기지요. "언제", "왜", "어떻게"를 물어대던 두려움과 조바심 가득한 제자들이 처참하게 잃었던 주님을 "다시 봄"으로써 하나의 앎, 하나의 사랑 안에 잠겨듭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선교가 계속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잠자코 있지 말고 계속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치지 못할 것이다"(코린 18,9-10).

주님께서 환시 속에서 바오로를 친히 격려하십니다. 서간 어디에도 바오로가 느낀 감정적 반응이 언급되지 않지만, 낯선 곳에서 적대자들에 둘러싸여 주님을 전하는 그가 이 말씀으로 얼마나 힘을 받고 기뻤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실 환시만 해도 어마어마한 신비적 은총인데 주님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 역시 크나큰 위로의 내용이니 말입니다.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기 때문이다"(사도 18,10).

이 말씀은 어쩌면 오늘의 격려 중 백미일 것 같습니다. 사람들에게 극심한 거부와 배척을 당하더라도 바오로가 끝까지 사람들을 경계하거나 피하지 않고 기꺼이 형제자매로 인식할 수 있게 해 주었을 것 같지요. 바오로는 실제적이고 또 잠재적인 주님의 백성 틈에서 살아가며 의혹과 불신의 눈초리가 아닌 사랑과 신뢰의 눈길로 모두를 대했을 겁니다.

"바오로는 한동안 그곳에 더 머물렀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프리스킬라와 아퀼라와 함께 배를 타고 시리아로 갔다"(사도 18,18).

바오로는 한 바탕의 소요를 겪으며 동족 손으로 재판정까지 끌려갔지만, 성경 저자는 이에 대한 반응에 관해서도 환시 체험 때와 마찬가지로 침묵합니다. 그저 할 일을 묵묵히 수행하고는 다른 선교지를 향해서 떠나는 담담하고 초연한 모습이 보일 뿐입니다.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바오로가 보여준 태도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증명합니다. 바오로 안에 차곡차곡 쌓여온 죄와 용서, 섭리와 만남과 환시의 체험들이 그를 가벼이 흔들리지 않는 존재로 무게중심을 잡아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은 각자 주님을 체험한 원체험의 순간을 떠올려 봅시다. 그분 사랑에 전율하고 그 자비에 눈물 흘리며,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나오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 세상에 대고 '주님 안에서 사랑한다'고, '주님과 함께 함께 행복하자'고 외치고 싶었던 환희의 체험 말입니다.

세파에 밀려다니느라 그 기쁨을 혹 잊고 있었다면 다시 찾아내어 머물러 봅시다. 없는 듯, 잃은 듯 보여도 분명 있습니다. 그 기쁨은 잊을 수도 없거니와 누구도 빼앗지 못하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골방을 샅샅이 뒤져 그 기쁨을 찾아내고 사랑을 회복하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고통과 기쁨의 관계  
-김찬선신부-


"너희는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제가 너무 심하게 말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요즘 많은 사람이 기쁨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제게 많은 분이 그것이 도대체 무슨 말이냐,
기쁨을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고,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
하실 텐데 진정 그렇습니다. 기쁨을 좋아하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막상 기쁨을 추구하라고 하면 기쁨을 포기하기에
기쁨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제가 얘기한 것이고,
좋아하더라도 원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기쁨을 좋아하면서도 원하지는 않을까요?
그것은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얻으려면 고생스럽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말은 고생스럽지 않고 얻을 수 없는 기쁨은 없다는 겁니다.

무릇 모든 기쁨은 고통을 전제하고, 수반합니다.
영어로 'No Pain, No Gain'이라는 말이 있지요.
고통 없이 얻는 것이 없다는 말인데 그런데 문제는
기쁨이 원하는 것을 얻을 때 오는 만족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쁨이란 원하는 것을 얻을 때 오는 만족감인데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어려움이나 고통이 없을 수 없다는 것이고,
설사 어려움이나 고통 없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얻은 것은 그리 큰 기쁨이 되지 못하지요.

실로 기쁨은 고통과 정비례하는 거기 때문입니다.
내 집이 있기를 누구나 원하지만
그 원하는 집을 사달라고 하자마자 부모가 사준 부부와
누구의 도움 없이 부부가 10년을 고생고생하여 산 부부가 있다면
부모가 하루 만에 사준 부부보다 10년을 고생고생하여 산 부부가
더 기쁘고, 그 집을 산 것 때문에 더 행복하겠지요.

집이나 재물뿐 아니라 우리는 힘들게 원하던 대학에 합격했을 때,
원하던 승진을 힘들게 하거나 천신만고 끝에 박사학위를 땄을 때,
또 어찌 살지 몰라 어둠 속을 헤매다 인생의 큰 깨달음을 얻었을 때,
이런 때에도 그 어려움과 고통만큼 큰 기쁨을 얻을 수 있는데 그러나
고통을 싫어하는 사람은 사과를 먹고 싶지만, 나무에 올라가면서까지 
따먹기는 싫어서 먹기를 포기하듯 고통스러운 기쁨들을 포기하고 맙니다.

그런데 이런 기쁨들을 포기하는 것보다도 더 안타까운 것이
바로 사랑의 기쁨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이 있고, 사랑보다 더 원하는 것이 있습니까?

그런데도 요즘 사랑하기를 포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결혼을 포기하는 사람은 더 많고
사랑하는 사람 대신 반려동물과 사는 사람도 많지요.

사람을 사랑하고 반려 동물도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진짜 생명을 사랑하고 모든 존재를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사람 사랑하기를 그만 두고 반려 동물을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쉬운 사랑만 하겠다는 거라고 해야겠지요.

또 이렇게도 얘기할 수 있습니다.
미워하는 사랑은 않겠다는 거라고 말입니다.
미워하면서도 사랑하는 고통이 싫어서 아예 사랑을 포기하는 것이니.

오늘 주님께서는 근심이 동반되는 기쁨을 포기하거나 뺏기지 말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진정 구더기 무서워서 장 담그는 것을
포기하는 우를 범하지는 말아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5월11일 부활 제6주간 금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너희의 마음은 기쁨에 넘칠 것이며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0-23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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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은 완전한 기쁨의 원천이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랑의 승리요, 사랑의 삶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분명한 것은 고통은 없어질 것이 아니라 품어서 극복되어질 고통이라는 사실이고 진통이 끝난 뒤 새로운 생명의 기쁨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부활의 기쁨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의 상처를 극복하는 사건이지 그것을 없던 일로 만드는 사건은 아닙니다. 인생 여정에서 겪는 고통과 시련은 부활의 기쁨을 향한 디딤돌이지 없애야 할 절대악은 아닙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7).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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