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 19일 부활 제6주간 화요일
2020년 5월 19일 부활 제6주간 화요일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요한 16,5-11)
"When the Counselor comes,
he will convince the world
concerning sin
and righteousnes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병규신부-
죄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매일, 매 순간 죄를 업보마냥 껴안고 삽니다. 죄는 사라질 대상이 아니라 우리 삶의 분신으로 평생토록 함께할 것입니다. 죄를 이겨 내고 오롯이 선한 마음으로, 진리 안에서만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죄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밝혔듯이 우리는 죄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죄는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믿고 따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 많은 세상에 예수님께서는 오셨고 죄인들을 부르러 십자가를 지셨으며, 죄인과 함께 돌아가시면서 용서를 베푸셨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께 올라가시는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절대적인 정의를 이루시려고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상일지라도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며 사랑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예수님께서는 그 고단한 지상의 삶을 견뎌 내셨습니다. 죄는 그런 예수님을 통하여 서로의 나약함을 어루만질 수 있는 자리로 다시 이해되어야 합니다.
부족하기 때문에 죄를 짓습니다. 서로 심판하고 대적하는 것을 없애는 것이 죄를 없애는 것이며 서로의 장벽과 단절을 뛰어넘는 것이 의로움을 이루는 일입니다. 세상은 각자의 판단을 내세워 다투고 대립하는 데 익숙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의 벽을 허물고 서로를 함께 껴안는 것으로 세상을 바꾸어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에페 2,14).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드디어 8살이 되어, 어머니 손을 잡고 왼쪽 가슴에 손수건을 붙이고 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저의 예상과 달리 많은 상장을 받을 수도 없고, 또 좋은 성적 받기도 쉽지 않음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한 반에 70명이 넘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저는 너무나도 평범했습니다. 더군다나 한글도 아직 제대로 모르는 저로서는 학교 문의 문턱은 너무나도 높아 보였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자신감은 줄어만 갔고 학교 가기가 싫어졌습니다.
지금은 그때를 떠올리며 “어렸으니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성인 역시 마찬가지임을 깨닫습니다. 자신 안에 자신감이 사라질 때, 남들보다 부족하다고 생각하면서 얼마나 많이 좌절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습니까?
포기하면 그것으로 끝이지만, 그래도 다시 시도하면 또 다른 미래를 만들 수가 있는 법입니다. 실제로 어떤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면 뇌 손상을 가져오게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부정적인 영향을 가져오는 두려움에 따른 포기, 자신감이 없다고 포기, 관심이 없다고 포기하는 우리의 모습이 낯설지 않게만 느껴집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이런 모습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라는 희망을 간직하면서 지금, 이 순간을 힘차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제 안 계실 것이라는 사실과 그들을 기다리는 고통스러운 일에 관한 생각으로 마음에 근심이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예수님의 부재를 눈으로 믿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믿는 사람에게는 커다란 축복이 주어질 것입니다. 이 축복이 바로 ‘성령’이었습니다.
성령께서는 세상이 단죄한 구원자의 이름으로 놀라운 일들을 행하심으로써 의로움에 관한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입니다. 즉, 주님을 단죄했던 유다인들의 잘못을 밝히시고, 주님을 따르는 길이야말로 가장 올바른 길임을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혹시나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불안한 마음을 종식하고, 대신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세상에 주님을 증거할 힘을 얻을 수 있기에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것은 커다란 축복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여전히 주님의 뜻을 따르는데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우리입니다. 그렇다고 그 뜻을 실천하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께 우리 자신을 맡기며 힘차게 주님의 길을 가야 합니다.

인간의 뇌는 활발하게 활동하기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신체 활동을 억제하는 것, 즉 게으름을 피우는 것에 고정되어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경험할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운동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이불 밖으로 나오기가 정말로 싫습니다. 뇌가 내 신체 활동을 억제하는 것입니다.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이나 보면서 쉬고 싶지 않습니까? 역시 뇌가 억제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바로 행동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심리학자 멜 로빈슨은 행동하려는 본능이 생기는 순간과 뇌에서 행동을 막는 순간 사이에는 5초의 간격이 있다고 말합니다. 뇌는 편안함을 즐기고 게으름을 추구하려는 속성 때문에, 해야 할 일이 떠오르면 그것을 방해할 만한 구실을 찾아냅니다. 이 간격이 5초입니다. 5초가 지나고 나면 해야 할 일을 행동에 옮기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립니다. 따라서 무조건 5초 안에 실행하는 ‘5초의 법칙’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5초 내에 행동하면 뇌는 자동으로 따라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곧바로 행동하는 모습, 미루거나 포기하는 모습보다 훨씬 나 자신을 위해서도 유익합니다.

성령을 받으면 어제의 내가 끔찍하게 보인다
-전삼용신부-
마리아 고레띠는 1890년 10월 16일, 이탈리아 앙코나 부근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가정형편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마리아는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가정 일을 도와야 했습니다. 네뚜노라는 동네로 이사를 하였을 때 아버지가 과로로 돌아가셨고 마리아는 어머니까지 위로하면서 더 많은 일을 해내야 했습니다.
마리아는 거짓말을 털끝만큼도 하지 않았으며 어머니께 겸손하게 순종하였고 매일 저녁 가족들과 함께 묵주기도를 바쳤습니다. 성모 신심이 강해지면서 정결을 더 사랑하게 되었고 묵주기도를 바치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마리아는 10개월이 넘게 첫영성체 교리를 틈틈이 받아 그리스도의 몸을 영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마리아가 일해 주는 가족 중에 알렉산더라는 이름을 지닌 20살 난 청년이 있었는데 그는 단순한 욕정으로 마리아를 탐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알렉산더는 기회를 노려 마리아가 혼자 남게 되자 그녀를 껴안았고 마리아는 강하게 뿌리쳤습니다. 어머니에게 말하면 모두 죽여 버린다고 무섭게 협박하고 그날은 그렇게 넘어갔습니다.
그녀의 마지막 날,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은 못 하고 어머니께 함께 있어 달라고 간절히 애원했지만, 어머니는 무슨 의미인지 모르고 마리아를 집에 혼자 남겨놓습니다. 이미 알렉산더는 이번에도 자신을 거부하면 죽여 버리겠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칼을 들고 마리아를 주방으로 끌고 갔습니다.
마리아는 “안돼, 안돼! 하느님이 원치 않아요, 그렇게 하면 지옥에 가요!” 하고 외쳤습니다. 화가 치민 알렉산더는 거부하며 쳐든 손바닥을 시작으로 마리아의 몸을 십수 번을 찔렀습니다. 마리아는 20시간 동안의 큰 임종 고통을 겪으면서도 어머니를 위로하고 가족을 걱정했습니다. 종부성사를 주시는 신부님은 고레띠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 강도에게 하듯이 너도 살인자를 용서하겠느냐?”
“예, 신부님 그를 용서합니다. 하늘나라에서 그의 회심을 위해 기도하겠어요. 그 사람도 저와 같이 낙원에 머물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숨을 거두기 전, “어머니, 아름다운 부인이 서 계신 것이 보여요.”하고 말했습니다.
알렉산더는 30년 형을 받고 감옥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고 모든 이들에게 완강하게 저항하였습니다. 몇 년이 지난 후, 고레띠는 그의 꿈에 나타나 그에게 백합꽃을 전해 주었고 그 환시를 본 후 알렉산더도 회개하고 모범적으로 살다가 풀려나와서는 고레띠의 어머니 아쑨따를 찾아가 무릎을 꿇게 사죄를 청했습니다.
어머니는 “마리아 고레띠가 너를 용서했으니 나도 너를 용서한다.”라고 하며 함께 영성체하였습니다. 알렉산더는 이후 카푸친 수도원의 정원사로 조용히 나머지 생을 보속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죽기 얼마 전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그릇된 길을 가는 모든 젊은이들에게 청합니다. 나처럼 죄악에 빠지지 않도록 게으름에서 도망치십시오. 그리고 열심히 기도하십시오.”
성령은 내가 찌른 누군가의 ‘피’로 나에게 오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죽지 않으면 누군가에게 온전히 성령님을 내어드릴 수 없습니다. 성령님은 나의 옆구리를 뚫고 이웃에게로 나아가십니다.
예수님은 당신 죽음으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십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피라고 보아도 무관합니다. 따라서 성령을 주시는 분은 내 앞에 살아계신 것보다 보이지 않는 편이 더 낫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보내시기 위해 돌아가셨음을 내가 믿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찌른 분으로부터만 성령께서 나에게 힘을 발휘하십니다. 이런 의미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이렇게 성령을 받아 새로 태어나면 정말 이전의 삶이 끔찍하게 보입니다. 이전의 삶 자체가 죄였음이 보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으면 어떻게 시각이 바뀌는지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시각이 변화됩니다. 여기서 ‘세상’이라고 하면 아직 성령으로 새로난 사람들이 아닌 모든 이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죄 속에 살면서도 자신들의 행동으로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깁니다. 알렉산더도 고레띠로부터 백합을 받지 않았다면 여전히 자신이 억울하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를 의롭게 만드는 것은 그가 30년 동안 감옥에서 받는 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행위로가 아니라 오로지 그리스도의 피로써만 의로워짐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을 믿지 않는 것이 죄이고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보이지 않으셔야 함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의로움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것 자체가 이미 심판받은 것임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의미로 성령을 받기 이전의 자기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상태였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나도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시각이 바뀌었는지 살펴야합니다.
박보영 목사가 길거리 아이들을 씻기고 입히고 한 달 정도 지난 뒤 그들의 옷을 다시 입혀본다는 것을 강의를 통해 들었습니다. 이런 행위는 성령을 받아본 사람만 할 수 있습니다. 자신도 병원장으로 잘 나가며 타락한 삶을 할 때가 구토가 나올 것처럼 끔찍하게 보였기 때문에 아이들도 그렇게 가르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이전의 자기 자신이 죄 자체였고 의로울 수 없는 상태였으며 이미 지옥에 가도록 심판받은 상태였음을 명확히 볼 수 있게 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도 타락한 삶을 살다가 자신을 좇아오는 여인에게 그녀가 알던 자신은 이미 죽었다고 말한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모든 이들은 성령을 받기 이전의 자신의 상태가 끔찍한 죄 자체였음을 압니다. 그래서 절대 그 뒤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오로지 주님의 공로로만 구원됨을 알기 때문에 누구도 심판할 권한이 없음도 압니다. 이것이 성령을 통해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가셔서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이유입니다. 어제의 내가 죄 자체였음이 보입니까? 그러면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새옹지마(塞翁之馬)와 비슷한 의미입니다. 하느님께서 쉼표를 찍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는 말도 있습니다. 역시 비슷한 의미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이 있는데 ‘걸림돌과 디딤돌’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고통과 역경을 만나면 걸림돌로 여겨서 이웃을 탓하고, 자신을 원망하며 더 깊은 좌절에 빠집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고통과 역경을 만나면 그것을 디딤돌로 삼아서 영적으로 더 성숙해집니다. 코로나19는 인류에게 마침표가 아닙니다. 코로나19는 인류에게 하나의 쉼표입니다. 경제활동이 멈추고, 이동이 멈추니 생태계의 질서가 회복되고 있습니다. 사라졌던 바다거북이 산란을 위해 육지로 올라왔다고 합니다. 대기 오염이 줄어들어서 호흡기 질환의 환자들이 감소했다고 합니다. 성장, 발전, 물질, 자본, 금융, 경제, 디지털, 인공지능의 세상에 살던 우리는 연대, 협력, 생태, 나눔, 기본소득, 가정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치료약을 개발하고, 백신을 개발하면 코로나19는 사라질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성장, 발전, 물질, 금융, 경제, 디지털, 인공지능의 세상을 향해 나가야할까요? 자연을 파괴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생명을 죽이고, 대기를 오염시키고, 물을 오염시키고, 부익부 빈익빈의 세상을 향해서 달려가야 할까요? 야곱은 야뽁강가에서 하느님의 천사와 씨름을 하였습니다. 축복을 받았지만 정강이뼈를 다쳤습니다. 성공을 위해서 형을 속였던 야곱입니다. 앞만 보고 무한질주를 했던 야곱입니다. 다리를 다친 야곱은 이제 무한질주를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인생을 돌아보았고, 형에게 용서를 청하였습니다. 야곱은 이제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이 다스리신다는 뜻입니다. 코로나19라는 쉼표 다음에 우리는 어떤 삶을 선택해야할까요? 분명 쉽지 않은 길입니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는 길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 삶은 공감의 삶, 연대의 삶, 나눔의 삶, 생태보존의 삶, 기본소득을 보장해주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감옥에 갇혔던 바오로와 실라스의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지진이 있었고, 분명 밖으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와 실라스는 감옥에 있었습니다. 간수는 바오로와 실라스가 도망간 줄 알고 자결하려하였습니다. 바오로와 실라스는 간수에게 도망가지 않았다고 이야기합니다. 간수는 세상의 기준으로는 당연히 도망가야 하는데 하느님의 뜻을 따라 도망가지 않았던 바오로와 실라스에게 감동합니다. 그리고 바오로와 실라스를 집으로 초대하였습니다. 복음을 들었고, 세례를 받아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간수에게 지진은 전화위복이고, 새옹지마이며,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코로나19는 제게도 쉼표였습니다. 매주 토요일 저녁미사도 중단되었습니다. 신문홍보와 강의도 취소되었습니다. 피정도 취소되었습니다. 과테말라에서 있을 교구모임도 취소되었습니다. 멈추니 보이는 것도 많습니다. 멈추니 듣는 것도 많습니다. 수선화, 튤립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름 모를 새들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책도 읽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인간의 끝에서 하느님은 반드시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십니다!
-양승국신부-
기원 후 50년경 바오로 사도와 살라스가 필리피에 도착해 복음을 전할 때였습니다. 필리피는 마케도니아 지역에서 첫째 가는 도시였습니다. 또한 행정 자치권을 가진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따라서 로마 시민권자였던 바오로 사도가 복음을 선포하기에 용이했을 것입니다.
마침 필리피에는 ‘점귀신’들린 여자 노예가 있었는데, 그녀는 점을 쳐서 주인에게 큰 돈벌이를 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가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녀에게서 점 귀신을 쫒아내주었습니다.
그러자 상황이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가버렸습니다. 큰 돈벌이의 도구였던 하녀에게서 점 귀신이 쫒겨나버리자 주인이 노발대발한 것입니다. 주인은 자신의 영업을 크게 방해한 바오로와 살라스를 지역 행정관 앞으로 끌고가 고발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유다인인데 우리 도시에 소동을 일으키면서 우리 로마인으로서는 받아들이기에도 지키기에도 부당한 관습을 퍼뜨리고 있습니다.”(사도행전 16장 20~21절)
군중들도 합세하여 바오로와 살라스를 공격하자, 행정관들은 난데 없이! 갑작스레! 두 사람이 입고 있던 옷을 찢어버립니다. 그리고 치욕스럽게도 옷을 벗겨버립니다.
혹시라도 공개적인 장소에서 타의에 의해 옷벗김 당해본 적이 있습니까? 엄청 치욕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평생 트라우마로 남을 흑역사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뿐만이 아닙니다. 바오로와 살라스는 혹독한 매질까지 당합니다.
그리고 꼼짝달싹 못하게 발에 차코까지 채워서 깊은 지하 감방에 투옥시켰습니다. 짐승이 따로 없습니다. 제가 그 지경이었으면 너무나 어이없고 억울해서 소리소리를 지르며 악담을 퍼부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오로와 살라스를 한번 보십시오. 그 상황에서 두분은 하느님께 찬미가를 부르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모습이 신기했던지 다른 수인들은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두발에 채워진 족쇄도, 깊은 지하감방도 바오로와 살라스의 찬양과 기도를 막지 못했습니다. 다른 수인들 앞에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모습을 막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의 힘은 원수와 적대자들의 박해를 능가합니다. 인간의 끝에서 하느님은 반드시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십니다.
오늘 얼마나 슬픈 날인지 하늘 조차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떠나신 분들 생각하니 슬프지만, 살아남은 분들이 40년 세월 동안 겪으셨던 참혹한 고통을 생각하니 더욱 슬픕니다.
인간 존재라는 것, 참으로 강인한 존재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부서지기 쉬운 나약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단 한번 겪은 끔찍한 체험 한번이 평생 가기도 합니다.
함께 길을 나선 동료들이 끔찍히 죽어가는 모습을 두눈으로 생생히 목격한 살아남은 분들이 겪는 트라우마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틈만 나면 죄책감에 눈물을 흘립니다.
한참 어린 군인들 앞에 강제로 무릎을 꿇리우고, 옷벗김 당하고, 인정사정없는 군화발에 짐승처럼 짓밟히고, 정신없이 두드려맞던 기억은 40년 세월이 흐른 후에도 매일 밤 악몽으로 되살아납니다.
그 어떤 보상이나 사과로도 치유되지 않을 그 깊은 상처를 자비하신 주님께서 당신 크신 사랑의 힘으로 위로해주시고 치유해주시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폄훼와 왜곡을 강력히 처벌하는 특별법이 조속히 제정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법적 책임이 없다! 사죄할 필요성을 못느낀다. 사죄할 것이 없는데 어떻게 사죄하냐?”며 오리발을 내미는 그들을 제대로 된 법정에 세우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요한 16,5)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앞부분>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승천과 성령의 파견을 예고하시는 장면이고, <뒷부분>은 세상에 대한 성령의 역할에 대한 말씀입니다. <뒷부분>은 내일 복음과 함께 보도록 하고, 오늘은 <앞부분>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승천을 암시하십니다.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요한 16,5)
이는 당신이 파견 받아 오셨다는 것과 보내신 분의 사명을 마치실 때가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당신이 떠나간다는 말에 제자들의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찼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또 다시 ‘보호자’이신 성령의 파견에 대해서 거듭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 16,7)
왜 꼭 당신이 가셔야만 그분을 보내시는 것일까? 아니, 성령은 이미 당신과 함께 계시는 분이 아니신가?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는 이 말씀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해설하면서, “그리스도를 육에 따라서만 아는 한 성령을 받을 수 없다는 뜻”이라고 말합니다. 곧 “동정녀의 태에서 잉태된 종의 모습이 우리 육체의 눈앞에서 사라지고 나야,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 자체에 순수한 마음의 눈을 두기 시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를 그레고리우스도 “내가 나의 육체를 너희 눈앞에서 사라지게 하지 않으면, 보호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너희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깨달음으로 이끌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설합니다. 이는 마치 사도 바오로가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육적인 판단으로 알아보지 않으렵니다.”(2코린 5,16) 하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이렇게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같이 계실 수가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눈이 그분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의 눈이 영적으로 열리게 되면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어제가 가야 오늘이 오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함께 있으면서도, 오늘을 통하여 어제도 내일도 드러나는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차원에서, 그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만물을 지으시고 구원하실 수 있으시지만 아들을 통하여 그것을 이루시면서 아들을 드러내시듯이, 예수님께서도 모든 일을 이루실 수 있지만 성령의 존귀함을 드러내시기 위하시는 까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사랑이신 하느님의 본성이며, 삼위일체 사랑의 특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사랑은 자신 안에서 자신이 아닌 타자를 드러낸다는 사실입니다. 곧 아버지께서는 아들과 성령을 드러내시고, 아들은 아버지와 성령을 드러내시고, 성령께서는 아버지와 아들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진정 그분을 사랑한다면, 우리 안에서 우리 자신이 아닌 그분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요한 16,7)
주님!
저를 부수고 당신을 드러내소서!
보는 것, 아는 것에 매여 있는 저를 부수소서.
제 자신에게 매이지 않는 영을 보내소서.
눈을 비추시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소서. 아멘.
보호자 성령
-송영진신부-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 16,7).”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모습은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에는 ‘떠나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보면 멀리 떠나시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상태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으로 ‘존재 방식’이 바뀌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떠나는 것이” 라는 말씀의 뜻은,
“내가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입니다.
“너희에게 이롭다.” 라는 말씀은, “더 이롭다.”가 아니라,
“이로움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로 해석됩니다.
예수님께서 보이지 않게 되고 성령께서 오시는 것이
신앙인들 곁에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는 것보다 더 이롭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어떤 식으로 존재하시든지 간에
신앙인들이 받는 영적 은혜에는 아무런 변화나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과 성령께서 임무 교대를 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신앙인들 곁에 영원히 함께 계시기 위해서
존재 방식을 바꾸실 필요가 있다는 설명으로 해석됩니다.
우리 인간은 시각과 청각과 촉각 같은 자연적인 감각의 한계에 갇혀 있는데,
이제 그 한계를 초월해서 ‘믿음으로’ 예수님을 만나야 하고,
믿음 속에서 예수님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바로 그것을 도와주기 위해서 보이지 않으면서도 함께 계시는 것으로
예수님의 존재 방식이 바뀌고,
또 성령께서 내려 오셔서 신앙인들 안에 머무르시는 것입니다.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라는 말씀은,
“너희의 눈에 내가 보이지 않더라도 성령을 통해서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라는 약속으로 해석됩니다(마태 28,20).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 그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며, 그들이 심판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요한 16,8-11).”
성령께서 밝혀 주실 것이라는 말씀은, 우리 입장에서 생각하면,
교사가 학생들을 가르치듯이 가르치신다는 뜻은 아니고,
우리가 배워서 알고 있는 진리를 믿을 수 있도록,
‘앎’에서 ‘믿음’으로 인도해 주신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무 일도 안 해도
성령께서 모든 일을 다 알아서 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잘 받으려면 우리 쪽에서도 노력해야 합니다.
구원의 진리를 믿으려고 노력해야 하고,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그리고 궁극적인 구원을 얻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성령의 인도는 언제 어떻게 우리에게 작용할까?
또는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오순절 날 사도들에게 성령이 내린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고(사도 2,3),
바오로 사도가 경험한 것처럼 성령의 지시를 직접 받을 수도 있습니다(사도 16,6).
그리고 베드로 사도가 경험한 것처럼 어떤 ‘깨달음’의 방식으로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도 있고(사도 12,11), 에티오피아 내시가 경험한 것처럼
낯선 나그네의 도움을 통해서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사도 8,26-40).
중요한 것은 방식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도달하는 일입니다.
성령은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좀 더 예수님을 잘 만나게 되고, 예수님과 함께 살게 되었다면,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다고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잘 받으려면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첫 번째는 ‘기도’입니다.
두 번째는 ‘실천’입니다.
신앙인으로서 해야 할 일들을 최선을 다해서 한다면,
언제나 어디서나 성령의 도움을 받을 수 있고,
그 도움 덕분에 넘어지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 라는
말씀의 뜻은, “나를 믿지 않은 것이 그들의 죄다.”입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그들의 죄를 꾸짖으신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에게는 죄가 없다고 생각했고, 예수님을 죄인으로 취급했지만,
성령께서 오셔서 진짜 죄인은 유대인들이라고 밝히시고,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그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며” 라는 말씀의 뜻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그래서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 곧
나의 의로움(죄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죄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 계신다는 것 자체가 예수님의 의로움(죄 없으심)을 나타냅니다.
그것을 성령께서 깨우쳐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것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의로움(죄 없으심)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의롭지 않다면 아버지께로 가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이 심판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의 뜻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사실은 유대인들이 심판에 대해서 잘못 생각했음을 드러낸다.”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예수님을 심판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유대인들 자신들이
심판 받아야 할 자들이라는 것을 성령께서 드러내십니다.
여기서 ‘세상의 우두머리’는 사탄입니다.
사탄이 심판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죽음으로써 사탄을 멸망시켰음을 뜻합니다.
성령께서는 사도들과 교회 안에서 활동하심으로써
사탄의 심판과 멸망을 증명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사탄의 하수인이 되어서
죄가 없으신 예수님을 죽였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즉 자기들이 심판에 대해서 잘못 생각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
-조욱현신부-
복음: 요한 16,5-11: 협조자이신 성령께서 오시리라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5절) 이 말씀은 당신의 수난에 대한 말씀이었다. 주님께서는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요한 13,13)고 하셨던 것이다. 베드로는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요한 13,36) 하고 대답하셨다. 제자들은 아직 그분의 수난과 죽음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것을 보고나서야 신비를 깨닫게 되었다. 지금은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어디로 가시는지 묻지도 못하고 있다.
“내가 이 말을 하였기 때문에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찼다.”6절) 제자들은 성령께서 주실 위로를 받기 전이기 때문에 스승의 모습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주님을 잃게 되리라는 주님의 말씀이 눈으로 그분을 볼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알고 인간적 감정에 슬픔에 빠진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것이 그들에게 좋은 일이라고 하셨다.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다는 것은 성령께서 주시는 축복이다. 성령 안에서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믿음을 고백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시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7절)고 말씀하신다. 그분이 떠나시는 것은 당신이 영광 속에 계시며 우리도 그 영광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 위해서이다. 성령을 통하여 우리도 그 영광을 누릴 수 있도록 당신이 떠나시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온갖 다양한 선물을 주신다. 그리스도를 이제는 성령 안에서 뵙고, 제자들이 눈으로 그분을 뵈올 때와 같이 그분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즉,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되었다. 더 높은 차원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모실 수 있게 성령을 보내 주시는 것이다.
성령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대한 세상의 잘못된 생각을 밝혀주신다고 말씀하신다. 먼저,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9절)라고 하시는 것은, 그들에게는 믿음이 없기 때문에 당신이 오셔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지만 당신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신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오신 빛을 거절한 것이다. 빛을 피하여 어둠속으로 숨는 것 자체가 심판받은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그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며,”(10절) 라고 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것은 그분의 의로움을 입증하는 것이다. 바로 당신은 흠잡을 데 없는 삶을 사셨음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분이 율법을 위반하는 죄인이기 때문에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았다고 비난하였다. 의로움에 대한 세상의 그릇된 것을 우리 신앙인들의 의로움으로 깨닫게 해야 한다. 우리는 보지 못하는 주님을 믿고 있음으로 그 의로움이 세상의 그릇됨을 밝혀줄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이다.
“그들이 심판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11절) 우리는 성령 안에서 큰 영광을 누리게 되며 그때 이 세상의 우두머리인 사탄은 단죄되며, 주님의 영광이 분명히 드러나게 되며 원수들의 죄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는 사탄이다. 그 사탄이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을 그릇된 방법으로 다스려 하느님을 거스르게 하기 때문이다. “협조자”이신 성령께서는 우리가 주님의 뜻을 올바로 실천하는 것 뿐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아닌 것을 알려주실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더욱 아버지와 아들을 잘 알게 하여 주실 것이고, 당신의 인도 하에 살도록 이끌어주실 것이다. 우리의 마음을 언제나 성령께 열어놓는 자세가 필요하다. 언제나 성령 안에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려고 깨어있는 삶이 중요하다. 항상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삶이란 이렇게 깨어있을 때 가능하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는 삶이 될 것이다. 순간순간의 우리의 삶이 기쁘고 아름답게 가꾸어질 수 있도록 주님께 청하자.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요한 16, 7)
-한상우신부-
떠날 수 있기에
하느님께
갈 수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사랑은
떠나심 속에서도
계속 이어집니다.
모든 길의
시작은
떠남에 있습니다.
떠나는 것이
더 깊이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떠나간 만큼
더 깊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삶의 이야기는
떠나보내고
만나는 애절한
이야기입니다.
내려놓지 않고서는
진정 떠날 수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그래서 성장을
필요로 하는
우리들
여정입니다.
보호자이신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사랑은
서로의 소중함을
지켜주고
보호하여주는
성령을 맞아들이는
것입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보호하시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우리는 굳어 있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뒤흔들어 깨뜨리시는 성령을 만납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 16,7).
믿고 의지하는 이, 사랑하는 이가 떠남을 이야기할 때 동요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두렵고 근심이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께서 떠나시는 것이 오히려 제자들에게 더 낫다고 하시지요. 보호자께서는 육신에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현존으로 제자들을 일깨우시고 세상을 새롭게 하실 것이니까요.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요한 16,8)
세상은 자기 나름의 제도를 구축하여 굴러갑니다. 설사 그것이 진리와 동떨어져 있다 해도 고수하지요. 예수님은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대한 통념"을 유다교 사회에서 아버지의 뜻과 가장 괴리된 것으로 짚으십니다. 성령의 개입이 필요한 부분이란 뜻이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 죄사함을 믿지 못하는 이들은 스스로 죄의식에 사로잡혀 살아가거나, 함부로 타인을 단죄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이들은 그분의 죽음이 그분께 내려진 정의라고 착각하고 율법 안에서 의로움을 찾지요. 또 예수님과 구원을 배척함으로써 세상이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걸 모릅니다. 이 모든 것을 성령께서 바로잡아 주실 것입니다.
제1독서는 바오로와 실라스가 필리피 감옥에 갇혔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큰 지진이 일어나 감옥의 기초가 뒤흔들렸다. 그리고 즉시 문들이 모두 열리고 사슬이 다 풀렸다"(사도 16,26).
이 천재지변은 당시 바오로가 겪은 생생한 사실일 뿐만 아니라, 성령의 시대를 보여 주는 상징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고착되고 억압된 사고의 근본을 기초부터 뒤흔들어, 닫히고 막힌 것들을 열어젖히고 풀어 주실 것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으니까요.
"두 분 선생님, 제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사도 16,30)
간수의 변화는 많은 점을 시사합니다. 그는 아무래도 죄수를 지키는 직업이다 보니 죄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있었겠지요. 그런데 지진 상황을 겪은 뒤, 죄인인 두 사도를 데리고 나가 치료해 주고 음식을 나누며 세례까지 받습니다. 그의 행동은 직업적 행동 강령에 위배되는 명백한 죄일 수 있지만 개의치 않습니다.
간수는 세상이 죄인으로 몰아 감옥에 가둔 그들에게서 진정한 의로움을 봅니다. 또한 세상의 심판과는 별개로 구원의 희망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께서는 단단히 굳은 제도와 마음의 심저에서 바닥부터 뒤집으시고는 자유와 해방으로 열린 새 질서를 심어 주십니다.
"하느님을 믿게 된 것을 온 집안과 더불어 기뻐하였다"(사도 16,34).
성령의 흔적은 기쁨입니다. 비록 흔들리고 전복되고 열리는 동안 두렵고 아프고 당혹스러울 수 있지만, 결국 그분은 기쁨으로 당신의 현존을 확신시켜 주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건네시는 말씀의 행간에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입당송)는 위로가 감춰져 있습니다. 예수님을 떠나보내야 하는 마음은 서운하고 안타깝지만 성령을 통한 주님의 현존이야말로 주님과의 사랑을 더 뜨겁게, 더 영원하고 더 진실하게 영속시켜 주실 것이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더 기쁘고 행복하고 자유롭게 주님을 따를 수 있도록, 성령께서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대한 우리의 낡은 관념을 변화시켜 주시길 청하며 성령께 마음을 열고 온 존재를 의탁합시다.
오소서, 성령님!

구원과 행복의 차이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52192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요한 16,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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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매일, 매 순간 죄를 업보마냥 껴안고 삽니다. 죄는 사라질 대상이 아니라 우리 삶의 분신으로 평생토록 함께할 것입니다. 죄를 이겨 내고 오롯이 선한 마음으로, 진리 안에서만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죄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밝혔듯이 우리는 죄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죄는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믿고 따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 많은 세상에 예수님께서는 오셨고 죄인들을 부르러 십자가를 지셨으며, 죄인과 함께 돌아가시면서 용서를 베푸셨습니다.
-박병규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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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받으면 이전의 자기 자신이 죄 자체였고 의로울 수 없는 상태였으며 이미 지옥에 가도록 심판받은 상태였음을 명확히 볼 수 있게 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도 타락한 삶을 살다가 자신을 좇아오는 여인에게 그녀가 알던 자신은 이미 죽었다고 말한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모든 이들은 성령을 받기 이전의 자신의 상태가 끔찍한 죄 자체였음을 압니다. 그래서 절대 그 뒤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오로지 주님의 공로로만 구원됨을 알기 때문에 누구도 심판할 권한이 없음도 압니다. 이것이 성령을 통해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가셔서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이유입니다. 어제의 내가 죄 자체였음이 보입니까? 그러면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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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좋아하는 말이 있는데 ‘걸림돌과 디딤돌’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고통과 역경을 만나면 걸림돌로 여겨서 이웃을 탓하고, 자신을 원망하며 더 깊은 좌절에 빠집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고통과 역경을 만나면 그것을 디딤돌로 삼아서 영적으로 더 성숙해집니다.
오늘 제1독서는 감옥에 갇혔던 바오로와 실라스의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지진이 있었고, 분명 밖으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와 실라스는 감옥에 있었습니다. 간수는 바오로와 실라스가 도망간 줄 알고 자결하려하였습니다. 바오로와 실라스는 간수에게 도망가지 않았다고 이야기합니다. 간수는 세상의 기준으로는 당연히 도망가야 하는데 하느님의 뜻을 따라 도망가지 않았던 바오로와 실라스에게 감동합니다. 그리고 바오로와 실라스를 집으로 초대하였습니다. 복음을 들었고, 세례를 받아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간수에게 지진은 전화위복이고, 새옹지마이며,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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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꼭 당신이 가셔야만 그분을 보내시는 것일까? 아니, 성령은 이미 당신과 함께 계시는 분이 아니신가?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는 이 말씀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해설하면서, “그리스도를 육에 따라서만 아는 한 성령을 받을 수 없다는 뜻”이라고 말합니다. 곧 “동정녀의 태에서 잉태된 종의 모습이 우리 육체의 눈앞에서 사라지고 나야,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 자체에 순수한 마음의 눈을 두기 시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를 그레고리우스도 “내가 나의 육체를 너희 눈앞에서 사라지게 하지 않으면, 보호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너희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깨달음으로 이끌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설합니다. 이는 마치 사도 바오로가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육적인 판단으로 알아보지 않으렵니다.”(2코린 5,16) 하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할 수 있습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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