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 14일 목요일 성 마티아 사도 축일
2020년 5월 14일 목요일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마티아 사도는 열두 사도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배신자 유다의 자리를 메우려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에 사도로 뽑힌 인물이다(사도 1,21-26 참조). 그는 예수님의 공생활 초기부터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가르침을 받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까지 목격한 이로 예수님의 일흔두 제자(루카 10,1-2 참조) 가운데 하나로 보고 있다. 마티아 사도의 활동과 죽음에 관해서 확실하게 알려진 것은 없으나, 예루살렘에서 선교 활동을 펼친 데 이어 이방인 지역, 특히 에티오피아에서 선교하였다고 전해진다.
☆☆☆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요한 15,9-17)
This is my commandment:
love one another as I love you.
No one has greater love than this,
to lay down one’s life
for one’s friends.
You are my friends
if you do what I command you.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서로 사랑하여라.” 하신 계명은 한쪽이 다른 쪽을 향하여 부탁하거나 지시하는 의무 수칙이 아닙니다.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숙제로 주어진다면 사랑하면 할수록 지쳐 가게 됩니다. 성당 일을 할 때나 세상 속에서 신앙인으로 살아갈 때나, 적어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기에 사랑하는 것을 해야 할 일이라고 다짐할수록, 우리는 그 일을 기쁨보다는 의무감으로 대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일’은 서로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한쪽이 다른 쪽을 향하여 건네는 선물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자리에 서로 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해야 할 일’로 생각하기보다 ‘하고 있는 일’로 생각하면 어떨까요? 굳이 무엇인가 행동하여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지금 이 자리에 함께 머물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 사랑이라 생각하면 어떨까요?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되시어 부조리하고 어두운 이 세상에 빛을 밝혀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거창한 선물을 인간에게 건네주심으로써 인간이 감동받고 회개하여 하느님이신 당신께 돌아오게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인간의 자리에 인간으로 오신, 그리하여 참으로 인간다운 것이 참으로 하느님다운 것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명령은 더러움을 떠나 깨끗함으로, 부족함을 떠나 완전함으로, 고통을 떠나 행복으로 나아가라는 것이 아니라 더러움을 더럽게 보지 않고, 부족함을 무시하지 않고,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그럼에도’ 함께 더불어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좋은 곳에 머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싫어도 미워도 함께 머무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랑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떤 형제님께서 “조용히 좀 합시다.”라면서 항의를 했습니다. 하지만 이 항의에 더 화가 났나 봅니다. 결국, 이 두 분의 심한 말싸움으로 이어지게 되었지요.
전화 통화로 화가 났던 형제님께서는 스트레스를 크게 받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항의하는 형제님 때문에 더 큰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기차 안에 타고 있었던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의 스트레스도 상당했습니다. 본인은 지금이 가장 힘들다고 화를 냈겠지만, 다른 사람 역시 똑같이 화가 났습니다.
감정은 이렇게 전달이 됩니다. 따라서 지금 어떤 감정이 있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자신의 감정을 이해해 주지 못한다고 억울해 할 것이 아니라, 어떤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있느냐를 먼저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주님께서 주신 사랑의 계명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듯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우리의 자애 안에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즉,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께서 명하신 모든 것을 실제로 지키는 것이 됩니다.
이 사랑을 실천하면 그만큼 하느님 안에 머무는 것이 되기 때문에 행복의 길에 더욱더 가까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친구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르고 원수는 따르지 않는다고 말씀하시지요. 우리는 단지 종에 그치지 않고 하느님의 친구이자 자녀가 되도록 불렸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명령을 따라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따름으로써 우리가 몸담은 이 세상 자체가 하느님 안에 머무르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사랑하라는 명령을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생각에만 머물면서 사랑의 길과는 정반대의 길로 걸어갑니다. 이는 자신만 정반대의 길로 가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자신의 나쁜 감정을 전달시켜서 다른 이도 같이 정반대의 길로 가도록 만듭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셔서 친구가 된 것은 그분의 은총 덕분입니다. 이 은총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당연히 사랑해야 합니다.


어느 신부의 사제관에 갔는데 단소가 눈에 보였습니다. 호기심에 단소를 들어서 불어보았지만 쉽지가 않습니다. 바람 빠지는 소리만 날 뿐 어떤 소리도 나지 않습니다. 그 신부가 말합니다.
“소리 나는 데까지도 많은 시간이 필요해.”
악기를 능숙하게 연주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악기를 완벽하게 알고 많은 시간을 연습해야 훌륭한 연주가 가능합니다. 만약 알려고도 하지 않고 또 연습도 하지 않으면, 악기의 겉을 만지작거릴 수는 있어도 똑바로 연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냥 하나의 장식품에 불과하게 되겠지요.
인간관계도 그렇지 않을까요? 상대방과 가까워지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나만 이해해 주길 바라는 것은 커다란 착각입니다. 단지 상대방의 겉만 볼 뿐 그 사람 자체를 이해할 수 없는데, 어떻게 좋은 인간관계가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악기를 연주하기 위한 노력을 떠올리며 사람과의 만남에도 정성을 쏟는 우리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그 안에 함께 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함께 모여 식사하는 일이 쉽지 않는 날들입니다. 새로운 임지로 가면 대게는 환영식을 하고, 단체들과 식사를 하곤 합니다. 이런 자리는 조금 어색하기 마련입니다. 서로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말하지 않았는데도 한정식을 좋아한다는 소식이 들리면 한동안 한정식으로 식사를 하였습니다. 전임 신부님이 좋았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환영의 식사자리는 기대감과 설렘이 함께 하는 자리입니다. 앞으로 5년 동안 함께 지내고, 함께 일할 분들과 마음을 열고 대화하는 자리입니다. 이렇게 몇 달이 지나면 새로 온 사제에서 본당신부가 됩니다. 한정식만 먹지 않고 칼국수도 먹고, 쭈꾸미도 먹고, 매운탕도 먹고, 아귀찜도 먹습니다. 서로의 식성도 알면서, 서로의 마음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족을 식구라고 불렀습니다. 같이 먹는 사람이 가족입니다.
교구 인사이동으로 새로운 곳으로 가게 되면 송별식을 하고, 단체들과 식사를 하곤 합니다. 이런 자리는 정이 들어서 정겹지만 한편으로 아쉬움의 자리가 됩니다. 이제 곧 헤어져야 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서운했던 감정도 다 풀리기 마련입니다. 함께 했던 추억이 좋은 안주가 됩니다. 가족수련회를 갔던 일, 동산을 만들었던 일, 도보 성지순례를 갔던 일, 본당 축성 미사를 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서로 이야기를 하면서 석별의 정을 나눕니다. 새로 오실 신부님과 지금처럼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를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교우들도 이제 새로운 곳에서 건강하게 잘 지내시기를 기원합니다. 아쉬움은 남지만 모든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큰 과오 없이 잘 지낼 수 있음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환영과 송별의 식사를 10번 넘게 했습니다.
레오나르드다빈치를 비롯해서 유명한 화가들은 ‘최후의 만찬’을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3년간의 공생활을 마치시고 예수님께서는 이제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의 이별을 아직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배반하기도 했고, 그래서 영광의 자리를 원하기도 했습니다. 세상의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우리의 모습도 비슷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쉬움을 달래면서 제자들에게 영원한 선물을 주십니다. 바로 성체성사입니다. 이 빵을 먹을 때마다,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할 것입니다. 비록 예수님은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성체와 성혈의 모습으로 현존하시며, 성체와 성혈을 영하는 제자들의 몸과 마음에 함께 하실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성체성사는 신앙생활의 정점이 되었습니다. 성체를 모시지 못하는 요즘, 더욱 주님의 성체가 그리울 것입니다. 그래서 화가들은 최후의 만찬을 그렇게 그렸나 봅니다.
화가들이 많이 그리지는 않았지만 ‘호숫가에서의 식사’가 있습니다. 실의에 빠진 제자들은 고기를 잡으려고 호수로 나갔지만 밤을 새워도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물을 오른편으로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물을 오른편을 던졌습니다. 그물 가득 고기가 잡혔습니다. 나중에 세어보니 153마리였습니다. 이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뜻대로 하면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갔더니 예수님께서는 이미 식사를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막 잡아온 물고기도 몇 마리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이 식사는 이별의 식사가 아니었습니다. 파견의 식사였습니다. 제자들은 이제 나약하고, 두려움에 떨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고, 제자들은 변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련해 주신 음식을 상상해 봅니다. 맛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사명을 주십니다. ‘여러분은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십시오.’
제자들은 파견의 식사를 맛있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그 제자 중의 한분인 마티아 사도 축일입니다. 이제 곧 성체성사와 함께 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날을 기다리며 오늘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새로운 계명을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아 세웠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5,12)
-이영근신부-
우리는 지금 부활 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사도 마티아 축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가리옷 유다의 빈자리를 마티아가 채우게 되는 선출과정을 보여줍니다. 곧 하느님께서 뽑으신 이를 받아들여 사도단이 채워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가 부활의 증인으로 직무를 맡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그처럼, 부활의 증인이 된 제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어떻게 살게 되면, 부활의 증인이 되고 참된 제자가 되는 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십니다. 이는 서로 사랑하는 이가 바로 부활의 증인이요, 참된 제자라는 말씀입니다. 단지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제자들은 서로 사랑해야 하는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곧 우리가 서로 더불어 살아야 하는 까닭이 바로 서로 사랑하기 위함임을 말해줍니다. 곧 타인은 적이거나 경쟁자가 아니라, 사랑해야 할 대상임을 일깨워줍니다. ‘서로 사랑하되,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이 ‘먼저’ 하신 사랑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5,12)
이는 당신께서 이미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을 밝혀줍니다. ‘이미’ 우리가 사랑받았음을 말해줍니다. ‘이미’ 사랑을 먹은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받은 이 사랑을 아는 만큼만 서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당신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라는 것은 다름 아닌 ‘이미’ 우리가 받은, 바로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기 방식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방식으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당신의 그 사랑은 십자가에서 온전하게 드러납니다. 그것은 “벗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사랑이었습니다.”(요한 15,13). ‘우리에게’ 벗이 되어주신 사랑입니다. 곧 우리의 사랑이 되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사랑하기를 바라십니다. 당신께서 그렇게 우리의 벗이 되어 주신 바로 그 방식으로 말입니다. 그것은 상대를 자신의 방식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사랑이 되게 하는 사랑을 말합니다. 곧 자신의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사랑이 되는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하는 사랑이 상대에게 사랑이 되고 있는지 아니면 오히려 해가 되고 있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형제를 사랑하기보다 형제에게 사랑이 되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마치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29)하고 묻는 율법학자에게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루카 10,36)하고 물으시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형제에게 벗이 되어주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이 되기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셨습니다. 벗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는 사랑을 통하여, 우리도 당신의 벗이 되게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우리도 바로 그런 사랑을 하라는 호소입니다.
그리하면, 당신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또한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지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오늘 예수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서 타올랐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진정 부활의 증인이 되고,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고 벗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요한 15,9)
주님!
저는 분명, 이미 사랑을 먹었습니다.
아무런 자격이 없지만, 당신의 호의를 입었습니다.
먹고서도 먹은 줄을 모르는 무지를 깨우치소서.
더 이상은 그 사랑을 내팽개치거나 무시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제 삶이 온전히 당신의 사랑으로 차오르게 하소서. 아멘.

억지로 하면 헛고생
무슨 일을 하든 억지로 마지못해 의무감으로 하면 기쁨을 갖지 못합니다. 그러나 똑 같은 일을 하면서도 자발적으로 하면 보람과 기쁨이 큽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명령이나 의무에 의해 한다면 진정한 사랑을 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나 계명을 내리는 분의 뜻을 알기 위해 또 그분과 하나 되기 위해 지킨다면 그 의미가 풍요로워집니다. 사실 진정한 사랑을 한다는 것은 그만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자기를 먼저 생각하는 부족한 사랑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많은 사랑을 받아야 하고 또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고 사랑 받는 것이 우리 존재의 가장 큰 행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 ‘사랑 안에 머물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무조건 ‘머물러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그들을 위한 당신의 사랑이 선행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내리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신 것과 같은 사랑으로 제자들을 사랑하였습니다. 아버지께 받은 사랑은 제자들을 위한 사랑의 기초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아들 예수님께서 받으셨고 예수님의 사랑을 제자들이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제자들 서로 간에 사랑을 하는 것에 머물지 말고 이웃 사람에게로 사랑의 손길을 펴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13,35).
예수님께서 사랑 안에 머무르시라고 당부하는 것은 당신의 기쁨을 제자들에게 전해 주고 그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쁨은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만이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충만한 기쁨을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에서 얻게 될 것입니다. "아닌 척 해도 있는 사랑을 오래 감출 수 없고, 없는 사랑을 있는 척 속일 수 없습니다."
혹 계명을 억지로 지키는 사람은 헛고생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계명을 지키십시오. “마음 속 깊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도 그를 아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채비가 갖추어져 있는 만큼 그는 하느님을 사랑합니다”(디아도쿠스주교). 그리고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 사랑 받는 존재가 됩니다”(작은 거인들에서). 망설이지 말고 사랑을 위한 사랑을 함으로써 주님의 계명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기억합니다. "여러분이 서로 사랑하면 그것을 보고 여러분이 나의 제자임을 모든 사람이 알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이웃 사랑이 생겨나고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하느님사랑이 자랍니다." 그러니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움직이는 것입니다. 정체되어 있다면 부족한 사랑입니다. 참 된 사랑은 흐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풍요로워집니다.
오늘 기억하는 마티아 사도는 유다의 빈자리를 채우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가 선택될 때 사도들은 요셉과 마티아 두 사람을 앞에 세우고. 기도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 이 둘 가운데에서 주님께서 뽑으신 한 사람을 가리키시어, 유다가 제 갈 곳으로 가려고 내버린 이 직무, 곧 사도직의 자리를 넘겨받게 해 주십시오.”(사도123-25) 사도들은 ‘주님께서 뽑으신 사람’을 알려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15,16).는 주님의 말씀을 알아들었습니다.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주님께서 뽑아 쓰신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더욱 더 겸손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최고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
-송영진신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9-11).”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5장 4절에서는 “내 안에 머물러라.” 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것’과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은 무엇이 다른가?
뜻은 같은데 표현만 다르게 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같은 말씀이지만 강조점이 다른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는 ‘믿음’에 초점을 맞추고, 충실한 신앙생활을 강조한
말씀으로,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는 ‘사랑’에 초점을 맞추고, 사랑 실천을
강조한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떻든 ‘믿음’은 ‘사랑’과 하나이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잘 받아들이고,
그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고, 사랑을 통해서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의 사랑 안에 잘 머무르려면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1) 우리는 어떤 고난을 만나서 고통을 겪게 되면, “예수님께서 정말로 나를
사랑하시는가? 사랑하신다면 왜 이런 고통을 주시는가?” 라고 의심하면서,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고난과 고통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예수님께서 주신 것은 아니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고통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또 ‘내가’ 고통을 겪고 있을 때(고통 중에 간절하게 기도할 때),
그것을 모르는 척 내버려 두시는 분도 아닙니다.
고통을 겪는 시간이 길어진다고 해도(기도의 응답이 늦어진다고 해도),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사정을 모두 알고 계시고,
어떻게든 도와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 사실 신앙생활은, 또는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생활은
고통이 하나도 없는 생활이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안 믿는 사람들보다 더 큰 고통을 더 자주 겪기도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성인 성녀들의 생애를 보면,
고통 없이 편안하게 살았던 분은 한 분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신앙인이 다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것은 아니고,
고통을 겪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도 아니지만,
우리는 우리가 살면서 겪는 고통보다 그 고통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2) 죄를 짓고 나서, 또는 죄 속에서 살면서, “예수님께서는 나 같은 죄인도
사랑하실까? 미워하시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서 회개하기를 포기하고,
예수님에게서 영영 멀어져 버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나에게 죄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죄가 있든지 없든지 간에 그냥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죄가 없을 때만 나를 사랑하시다가
내가 죄를 지으면 나를 미워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을 때
‘회개’를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회개하는 것은 사랑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변함없이 사랑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의 사랑 안에 잘 머무르려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일을 잘해야 합니다.
세속에서도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다.”,
또는 “사랑을 주는 것이 곧 사랑을 받는 것이다.” 같은 말을 흔히 합니다.
신앙인의 사랑 실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사랑 실천을 잘하든지 안 하든지 간에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시는데, 그 사랑을 내가 잘 받는 방법은(그 사랑 안에 잘 머무르는 방법은)
내 쪽에서 사랑 실천을 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그러니 너희도 나를 사랑하여라.”
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고,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라는 말씀만 하셨습니다(요한 13,34; 15,12).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고,
예수님의 사랑 안에 잘 머무르는 방법입니다.
<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사이비 종교들의 경우에,
사랑 실천 없이 이기적으로 살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바라는 어떤 ‘복’을 받는 것에 대해서만 집착하면서
이웃의 사정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선과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5).”
아무리 지극 정성으로 주님을 섬긴다고 해도
선과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단언했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1코린 13,2).”
아무리 열심히 믿어도, 사랑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사랑 없는 사이비 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한 말에 대해서,
“도대체 왜 그렇게 사랑이 중요한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대답은 간단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8).
신앙생활은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가는 생활인데,
하느님은 사랑이신 분이기 때문에 사랑 없이는 그 나라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하느님 안에 사는 삶
-조욱현신부-
복음: 요한 15,9-17: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
오늘의 복음은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더욱 발전시키고 있다. 즉 그리스도께 대한 결속과 공동체적 차원에서 그리스도께 일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에 대해 당신의 깊은 뜻을 말씀하신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9절).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서로 사랑함으로써, 그분과 일치하고 그분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하시는 것이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10절) 우리가 사랑의 관계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그분 안에 머무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이 없이는 은총도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비록 떠나시지만, 사랑으로 가지와 포도나무처럼 그들과 함께 계심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기에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살며, 그분과 튼튼히 연결되어 있어야 함을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11절)라는 것이다. 우리 안에 있는 기쁨이란 우리가 그분의 기쁨이라는 것이고 그 기쁨이 충만해진다는 것은 참으로 우리가 그분과 친교를 나눈다는 의미이다. 우리 안에 있는 그분의 기쁨은 은총이며, 그것이 또한 우리의 기쁨이기도 하다. 이 기쁨은 우리 신앙인들 모두가 언제나 간직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기쁨은 하느님 안에서만 가질 수 있다. 그 기쁨을 갖기 위해서는 사랑을 통해서만이 가능한 것이다. 사랑하면서 가질 수 있기에 우리는 계속 나 자신과 싸워야 한다. 나를 이길 때 그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12절) 이것은 외적으로만 머물러 있게 되면 사랑의 증거가 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 위에 돌아가셨듯이 우리의 사랑도 구체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계명이라고 하신 것은 우리를 '당신의 사랑스러운 자녀'로, '친구'로 삼아주셨다는 사실을 늘 새롭게 의식하려는 삶 속에서 실현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 계명을 잘 지키려 할 때 다른 계명들도 잘 지킬 수 있다. 이 사랑의 계명 안에 다른 모든 계명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13절) 이것은 사랑의 의무에 대한 완벽한 표현이다. 이 사랑의 의무가 삼위일체적 사랑의 관계 안에서 제시되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보여 주신 사랑으로,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심으로 아버지께 사랑을 드렸다. 이 같은 사랑을 우리도 형제들에게로 향하도록 하여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부르겠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14-15절)라고 하셨다. 우리가 그분의 친구라면, 우리도 그분과 같은 사랑을 하여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할 사랑의 모델로서 보여주셨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있게 하려는 것이다."(16절) 하셨다. 우리는 주님의 이런 사랑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드러내야 한다. 참된 사랑이란 다른 사람의 칭송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심 없이 주고 또 아무런 대가도 없이 베풀 줄 아는 것이다.
이 사랑은 그저 베푸는 사랑이다. 주님께 선택받은 자들로서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15, 5)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그분과 일치하여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사랑의 능력을 갖추어 그분 안에 남아있게 될 것이다.
주님의 사랑과 같이 사심 없이 베푸는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은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 우리의 사랑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 머물러 있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변화시켜 그들도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시키기 위한 것이다. 우리의 사랑은 그리스도적인 사랑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화로 이끄는 사랑이다.
오늘 복음은 '전교'에 관한 말씀으로 마치고 있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있게 하려는 것이다."(16절). '열매를 맺는다.'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모든 사람 가운데 선포되고 널리 퍼져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끼리 주고받는 사랑으로는 족하지 않다. 우리의 사랑이 보편적인 표지가 되어, 마침내 모든 사람이 말로만이 아니라 매일의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 형제적 공동체를 이룰 수 있게끔 하여야 한다.
참으로 우리가 주님의 사랑 안에 남아있어 하느님 아버지와 깊이 일치되고, 주님을 통하여 그분의 사랑과 은총을 받으며, 우리는 또한 다른 사람에게 열려진 신앙인으로 썩지 않을 열매를 맺는 삶이 되도록 주님의 은총을구하자

성 마티아 사도 축일.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 17)
-한상우신부-
가장 어렵고
힘든 사랑을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어렵기에
사랑이고
힘들기에
사랑입니다.
아낌없는
주님의 사랑과
마주하게 됩니다.
사랑은 주님과
하나되는
부르심입니다.
주님께서
간절히
원하시는 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관계안에
존재합니다.
사라지지 않을
사랑의
관계입니다.
영원한 것은
오직 사랑뿐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입니다.
삶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분명
사랑뿐입니다.
어렵고 힘들어도
사랑의 힘을
믿습니다.
영원한 생명
영원한 사랑을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서로 사랑하는
길만이
우리모두를
살리는 길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를 한층 더 주님과 친밀하게 만들어 줍니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요한 15,15).
스승이 제자들에게 위계의 울타리를 허물고 성큼 다가서시어 그들 마음속으로 쑥 들어가십니다. "친구"! 이제 그들은 예수님의 친구입니다. 친구와 종의 차이는 상대가 하는 일을 알고 모르고에 달렸지요.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요한 15,15).
계급사회에서 종은 주인의 뜻을 알 필요 없이 그냥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존재이지만, 친구 사이에서는 다릅니다. 친구는 서로 무엇이나 사심없이 공유하고 나눕니다. 상대가 잘 알아듣고 이해해 주면 더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속을 터놓고 나누지요.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그렇게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5,16).
예수님께서 제자들을(우리를) 뽑아 세우신 것은 열매를 바라셨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그분이 당신 이득을 위해 우리를 이용하려고 뽑으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주님께 뽑혀 그분 친구가 되었다는 자체가 곧, 우리가 그분 사랑의 목적이라는 뜻이니까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예수님은 비천한 우리를 친구로 삼고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친 "가장 큰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이 하신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는 당부를 덧붙이셨지요. 당신의 사랑이 된 우리(친구가 된 우리)가 사랑을(열매를) 맺길 바라시는 겁니다. "친구"도 "열매"도 실은 "사랑"의 다른 단어입니다.
제1독서는 마티아 사도의 선출 장면을 보여 줍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 이 둘 가운데 주님께서 뽑으신 한 사람을 가리키시어 ... 사도직의 자리를 넘겨받게 해 주십시오"(사도 1,24-25).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 이 호칭은 모든 기도의 바탕이고, 신뢰에 찬 순종의 열쇠이며 근거입니다. 주님이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신다는 확신이 없으면 주님 손에 공동체를 맡겨드리기 어렵지요. 작건 크건 가정 공동체부터 인류 공동체까지 포함해서 예외는 없습니다. 모든 이의 마음을 아시는 분이 누군가를 뽑으시고 그를 통해 공동체를 끌어가고 계십니다.
주님께 선택된 이, 뽑힌 이는 그 자체로 이미 주님 사랑의 열매이면서, 동시에 주님의 친구인 공동체 일원 하나하나에게 다가가 사랑으로 열매를 맺으라는 엄중한 요구 앞에 서게 됩니다. 사도직은 맡겨진 이들을 종으로 부려도 된다는 감투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주님의 친구임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인정하고 기꺼이 그들의 종이 되는 봉사 직분입니다.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입당송, 복음 환호송).
길이 남으리라는 축복은 영원으로의 초대입니다. 영원은 하느님의 속성이지요. 주님께 선택된 이로서 우리가 맺는 열매(사랑)는 우리의 부족하고 죄스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느님께서 곧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주님의 친구인 우리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의 열매인 우리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맺을 열매도 또한 사랑입니다. 친구인 예수님과 함께 미우나 고우나 우리게 맡겨 주신 이들을 여한없이 사랑하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모든 선출은 다 하느님의 선출
-김찬선신부-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늘 하느님의 뜻을 찾고, 늘 하느님 섭리에 따르려는 프란치스코와 관련한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하루는 성 프란치스코가 맛세오 형제를 데리고 길을 가고 있었다. 맛세오 형제는 조금 앞서 가다가 피렌체와 시에나와 아레쏘의 세 곳으로 갈라지는 네거리에 당도하자, '사부님 어느 길로 가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로..'라고 대답하였다.
맛세오 형제는 다시, '그러면 어떻게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성인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 방법을 알려주겠습니다. 이제 거룩한 순종으로 명하니, 형제가 서 있는 이 네거리에서 아이들처럼 혼자 빙글빙글 도십시오. 그리고 내가 말 할 때까지 그치지 말고 계속 도시오.' 맛세오 형제는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였다. 얼마나 많이 돌았던지 이런 운동에 으레 생기게 되는 현기증 때문에 몇 번이나 땅에 쓰러지곤 하였다. 마침내 그가 가장 빨리 돌고 있는 순간, 성 프란치스코는 '그만, 더 움직이지 마시오!'라고 말하여, 그는 딱 멈추어 섰다. 성인이 '어느 쪽에 얼굴을 향하고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맛세오 형제는 '시에나 쪽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성 프란치스코는 '그 길이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가 가기를 원하시는 길이오' 라고 말했다."
우리 교회 내 모든 선출은 기도로 선출을 하고, 특히 성령 기도를 바치고
선출을 하는데 그것은 인간의 선출이 오늘 마티아 사도의 선출처럼
하느님의 선출이 되기를 바라고 믿으며 그렇게 선출을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의 수많은 선출을 보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저를 포함하여
우리가 진정 이런 바람으로 선출을 하고,
선출의 결과를 이런 믿음으로 받아들이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선출된 이들이 거부하는 것을 많이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나를 뽑으신 것이라면 그렇게 거부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께서 바로 내 앞에서 나를 뽑으셨다면 그렇게 거부할 수 없겠지요.
저는 지금까지 선출이나 임명에 대한 이런 믿음은 지켜왔습니다.
곧 형제들의 선출이든 장상의 임명이든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어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선출에 대해서는 '왜 저런 사람이 선출되었지?'하고
의아해하다가 이내 '그렇게 생각하면 하느님의 선출을 믿지 않는 거지' 하며
저의 믿음 부족을 반성하곤 하였습니다.
이렇게 저는 지금까지 우리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헤아리며 선출하고,
선출한 다음에는 그 선출이 하느님의 선출이라고 믿는 것에만 유념했는데,
그런데 오늘 마티아 사도의 선출 얘기를 보면서 새로운 점을 보게 됐습니다.
곧 사도들이 먼저 사도가 될 자격에 대한 기준을 마련합니다.
우선 처음서부터 지금까지 주님과 동행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과 계속 동행했어도 유다처럼 배반자가 되어서는
안 되고 앞으로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기준에 따라 사도들이 후보자 둘을 선출해 놓고,
하느님께서 그 두 사람 중에서 하나를 뽑아주시기를 청하는
기도를 하는데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이라고 하며 기도합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도 우리 인간의 뜻의 헤아려 뽑아달라는 청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들의 선출은 이런 것이 되겠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생각하며 선출하고,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의 뜻을 아시고 뽑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민심이 곧 천심이라는 믿음을 가져도 되겠습니다.
더 나아가서 몇 사람에 의한 부정 선거만 아니라면
총회에서의 선출이건 임명이건 제비 뽑기건
교회 내 여러 방식의 선출은 모두 주님의 선출이라고 믿어도 되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요한 15,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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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곳에 머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싫어도 미워도 함께 머무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랑입니다
-박병규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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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라는 것은 다름 아닌 ‘이미’ 우리가 받은, 바로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기 방식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방식으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마치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29)하고 묻는 율법학자에게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루카 10,36)하고 물으시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형제에게 벗이 되어주라는 말씀입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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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고,
예수님의 사랑 안에 잘 머무르는 방법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가는 생활인데,
하느님은 사랑이신 분이기 때문에 사랑 없이는 그 나라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송영진신부-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 이 둘 가운데 주님께서 뽑으신 한 사람을 가리키시어 ... 사도직의 자리를 넘겨받게 해 주십시오"(사도 1,24-25).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 이 호칭은 모든 기도의 바탕이고, 신뢰에 찬 순종의 열쇠이며 근거입니다. 주님이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신다는 확신이 없으면 주님 손에 공동체를 맡겨드리기 어렵지요. 작건 크건 가정 공동체부터 인류 공동체까지 포함해서 예외는 없습니다. 모든 이의 마음을 아시는 분이 누군가를 뽑으시고 그를 통해 공동체를 끌어가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