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5월 5일 부활 제4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20. 5. 4. 19:05

2020 5 5 부활 제4주간 화요일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라온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요한 10,22-30)


My sheep hear my voice;
I know them, and they follow me. 
I give them eternal lif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상대에 대한 답답함은 실은 자신의 불안감에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이 듣고 싶은 것’을 상대가 말해 주지 않아 답답하고, ‘자신이 당연하다는 것’을 상대가 부당하다 하니까 답답합니다. 이 모두가 자신이 만들어 놓은 편안한 일상이 깨질까 봐 답답해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비판하며 다가선 유다인들도 답답해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숱하게 당신 자신에 대하여 말씀하셨지만 유다인들이 듣고 싶던 이야기는 아니었지요. 그들에게 메시아는 나자렛 출신 예수가 아니라 왕권의 위엄을 가진 힘 있는 사람이어야 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유다인들에게 믿음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알려 주시는 메시아는 ‘하나 됨’의 메시아입니다. 양들과 하나 되고, 아버지 하느님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삶 전부를 이 세상에 내어 맡기셨습니다. 본디 유다 사회는 ‘메시아’를 흩어지고 갈라진 세상을 조화와 평화의 세상으로 바꾸는 분으로 믿고 기다렸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으로 창조 때부터 세상의 모든 피조물이 조화를 이루고 그리하여 마지막 때 모든 민족들이 예루살렘에 함께 모여 잔치를 즐기는 것이 기다리는 메시아 시대였습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우리는 우리의 익숙한 삶에 맞는 메시아가 아니라, 낯선 이와도 함께할 수 있는 여유와 배려의 삶 안에 오시는 메시아를 기다릴 줄 알아야겠습니다. 답답해하기보다 다른 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유연함을 지닐 수 있어야 메시아께서 자유로이 우리 곁에 오실 것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신학생 때 고해소에 들어갔다가 고해신부님께 엄청나게 혼나고 쫓겨난 적이 있습니다. 제 죄를 씻고자 들어갔다가, 죄를 더 만들고 나오게 되었지요. 그 신부님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 미움의 감정이 생기면서 죄가 더 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제가 되어서는 절대로 고해소에서 화를 내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사제가 된 후 지금까지 그때의 다짐을 단 한 번도 어긴 적은 없었지만, 사실 화가 났던 적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마음속으로 얼마나 많은 화가 올라오는지 모릅니다.

고해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다시 태어나는 이들도 분명히 많습니다. 그러나 형식적일 때가 종종 있습니다. 어쩌면 해치운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습니다. 단순히 판공성사 봐야 한다는 말에 억지로 들어온 것만 같습니다. 이때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과연 느낄 수가 있겠습니까?

예전에 저를 내쫓았던 그 고해신부님도 이런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었습니다.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고해성사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못 보는 것이 답답하셨겠지요.

주님께 이렇게 형식적으로 다가서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자비와 사랑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주시는 자비와 사랑을 느낄 수 있으며, 그 안에서 커다란 기쁨을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둘러싸서 말합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진실한 마음으로 나아가지 않으면서 형식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믿을 만한 표징을 보여달라고 계속 청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제까지 충분히 말씀하셨고, 또 충분히 행동으로도 보여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은, 그들이 자기들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양이면서도 목자가 앞에 있음에도 그분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스스로 목자라고 착각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리스도의 양들은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따릅니다. 이렇게 알아듣고 따르기 위해서는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께 다가서야 가능합니다. 그냥 형식적인 마음으로 곁에 서 있기만 하다면, 또 거짓된 마음을 가지고 자신을 높이려고만 한다면, 주님을 제대로 따를 수가 없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생명을 주심으로써 당신의 본성에 따라 생명이심을 보여주십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착한 양이 되어야 합니다.
평범한 것에 사랑이 더해지면 놀라운 것이 된다(김한승).



마이너스 부분은 두 개의 플러스를 만듭니다.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는 자연이 신체 기관의 결함을 매우 불가사의한 방식으로 보상해주고 있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시력에 손상을 입은 사람은 보통 사람보다 청각과 후각이 예민해지고, 신체결함을 가진 사람은 이 부분을 보상받기 위해 다른 쪽으로 재능을 발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은 마이너스 부분을 발견하면 두 배의 플러스를 만들려는 경향이 있다고 말합니다.

베토벤이 청력을 잃고서 위대한 교향곡을 작곡한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헬렌 켈러 역시 우리에게 많은 점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결국, 나의 부족함은 또 다른 멋진 나를 만들어 애는 과정이 아닐까요? 그런데 이 ‘부족함’ 자체에 묻히고 맙니다. 그 부족함 자체가 자신의 전부인 것처럼 말입니다.

부족함, 단점을 발견하면 곧바로 자기 주위를 둘러봐야 할 것입니다. 마이너스 부분은 두 개의 플러스를 만드니까요. 

주님의 뜻에 열려있으면 주님의 양이다

-전삼용신부-


  저는 신학생 때 유학을 나가 성서신학을 전공하고 석사학위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사제가 되어서는 전공을 바꾸고 싶은데, 이득이 있을까 싶어 다니던 학교에 다시 갔습니다. 석사 할 때 교의 과목도 많이 들었기 때문에 공부시간을 단축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한국인들에 대한 편견이 좀 있고 깐깐하기로 소문난 분이 학장님이 되어 계셨습니다. 저는 당연히 같은 학교이니 석사 때 들은 과목들을 빼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절대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과목을 많이 신청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때는 석사과정이 2년에서 3년으로 늘리려는 분위기였습니다. 많이 들어야 2년 안에 석사를 끝낼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규정이 바뀌어 그것도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집에 돌아와 학과규정을 꼼꼼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규정에는 분명히 학장님이 말한 것보다 더 들을 수 있다고 나와 있었습니다. 아마 교수회의 때 정한 것을 책자에는 고쳐 넣지 못하였던 것 같습니다. 다음 날 다시 규정을 보여드렸더니 짜증을 내시기는 했지만, 일단 그렇게 쓰여있으니 어쩔 수 없다며 저의 학과등록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내 생각이 너무 강하면 점점 타인의 말이 들리지 않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예수님께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라고 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여러 차례 그렇다고 말씀을 하셨다고 하시며, 그들이 믿지 않는 것은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하십니다. 왜 그들은 주님의 양이 될 수 없었을까요?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라고 하십니다. 사실 그들은 알아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고 계속 말해달라고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분의 양이 맞을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있을까요? 하루에 한 번이라도 나에 대한 주님의 뜻을 여쭈어본다면 그 사람은 분명 그리스도의 양이 맞습니다. 그리스도의 목소리는 우리를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를 알려주십니다. 그러니 나의 삶의 방향에 대해 ‘어떻게 사는 게 주님의 뜻일까?’를 묻는다면 그 사람은 목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양이 맞습니다. 주님의 뜻이 옳을 수 있다는 마음을 가져야 귀가 열리고 믿음이 생깁니다.

      오늘 복음은 ‘성전 봉헌 축제’라는 배경설명으로 시작됩니다. 성전 봉헌 축제는 기원전 164년 유다 마카베오가 시리아의 하스모네아 왕조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를 물리치고 성전을 다시 주님께 봉헌한 축제입니다. 겨울이고 예수님의 탄생 날짜와도 비슷합니다. 이때는 성전과 온 가정을 촛불로 밝히는데 이는 아마도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할 때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제물을 사른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요한은 우리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성전이 될 수 있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성전을 허물면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고 말씀하신 성전이 바로 예수님의 몸을 가리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요한 2,21). 이 불은 곧 성령을 가리키는데 성령께서는 우리 뜻을 사르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주십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양이 될 수 없었던 이들은 자기 자신을 주님의 성전으로 봉헌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기 위해서는 우리 뜻보다 주님의 뜻을 우선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한 가난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학교에 갈 만큼 넉넉하지도 못했고, 어느 공장에 들어가 일을 할 만한 기술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사진술을 배워 사진기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진술을 엮어 놓은 책을 주문했습니다. 그러나 그 편지를 받은 서점의 착오로 사진술에 관한 책은 오지 않고 발성법에 관한 책이 왔습니다. 소년은 너무 가난하여 그 책을 돌려보낼 만한 배송료도 없었거니와 반송하는 방법도 몰랐습니다. 소년의 실망은 너무 컸습니다. 이 소년은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할 수 없이 발성법에 관한 책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이 소년이 그 책을 통해 복화술 인형 쇼로 유명하게 된 찰리 매카시라고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에 민감한 사람이 될 때 주님께 봉헌된 성전이 되고 주님의 양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조재형신부-


예전에 어른들께서 먹는데서 정이 난다.’라고 하셨습니다. 요즘 옆 본당 사제관에서 식사를 자주합니다. 코로나19로 밖으로 나가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서로에게 마음을 열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과 함께 자주 식사를 하셨습니다. 부활 하신 후에도 제자들과 식사를 하셨습니다. 마음이 열리면 뜻을 하나로 만들기도 쉽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바로 그런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과 하나 되는 모습으로 살아갈 때 사람들은 그런 우리들을 보면서 삶의 위로를 얻고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모습으로 살아갈 때 더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 올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해 준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평화롭고, 서로 아껴 주며, 희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고난 중에도 절망하지 않았고, 세상의 가치에 연연해하지 않았습니다. 겸손하고, 온유한 삶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존중의 말이었고, 칭찬의 말이었고, 닮고 싶은 이름이었습니다. 초대 교회의 신자들이 삶으로 보여준 자랑스러운 이름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 역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소문난 맛집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입니다. 재료가 신선하고, 음식이 맛이 있고, 가격은 착하고, 직원들이 친절하고, 경치가 좋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줄을 서서 기다리더라도 기꺼이 시간을 내기 마련입니다. 이웃들에게 소개하기 마련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교회의 모습을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늘 새롭게 묵상하고 있는지, 하느님의 말씀을 삶으로 드러내고 있는지, 이웃을 위해서 기꺼이 가진 것을 나누고 있는지,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세상 사람들이 여전히 그리스도인을 사랑과 존경을 가득 담아서 부르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3가지를 당부하셨습니다.

첫째는 병자들을 고쳐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병자입니까? 하느님을 믿었으면서도 세상의 욕심 때문에 하느님과 멀어지는 사람들이 병자입니다. 육신은 건강해도 우리는 모두 조금씩 영적으로 병들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어째서 남의 눈에 있는 작은 티는 보면서 내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느냐!’ 또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 하느님과 함께하면 영적인 치유가 일어납니다. 사도들은 바로 그런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둘째는 마귀들을 쫓아내라는 것이었습니다. 마귀는 머리에 뿔이 달린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아닙니다. 머리를 풀고 하얀 소복을 입고 길에 서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신앙인들 중에도 마귀의 유혹 때문에 흔들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마귀는 달콤한 유혹으로 우리들의 신앙이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돈 마귀 때문에 성당에 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돈 마귀 때문에 친구를 배반하고, 양심을 속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돈 마귀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만의 마귀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가족들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면서도 사람이 되셨고,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하느님께 순종하셨습니다. 교만함은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커다란 마귀의 유혹입니다.

 

세 번째로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기쁜 소식은 내가 기뻐야 전할 수 있습니다. 돈으로 살 수 없고, 세상의 명예로 얻을 수 없는 참된 기쁨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기쁨입니다. 이 기쁨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이웃에게 나누어 주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진리의 파수꾼이 되어서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의 등대가 되어 험한 풍랑 속에서 흔들리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향한 나침판이 되어서 지친 이들에게, 절망 중에 있는 이들에게 용기를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하나였듯이, 우리들도 주님과 하나가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주님이십니다!

 -양승국신부-

 

이 한 세상 살아가다보면 때로 본의 아니게 짙은 어둠 속에 머무르는 순간이 있습니다. 곰곰히 따져보니 그 순간은 견디기 힘겨운 고통과 슬픔의 순간이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손해본 순간, 억울한 순간만은 아니었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왜 굳이 당신께서 애지중지하시는 인간에게 아픔과 상처를 경험하게 하시는가? 의아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나고 나서 하나 하나 따져보니, 그 혹독한 순간 역시 큰 틀 안에서 은총의 순간이요 보석같은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견디다보니 아픈 것은 나았고, 상처는 아물었습니다. 눈물을 끝내고 바라본 세상은 분명 똑같은 세상인데도 훨씬 더 소중하고 더 아름다워보였습니다. 

 

따지고 보니 아픔이라는 것이 오히려 살아있음에 대한 신호였습니다. 결국 상처라는 것 이 땅 위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훈장이요 영예가 될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의식의 전환은 우리가 어둠 속에 머물러 있느냐? 아니면 환한 빛 가운데로 나오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부족하고 유한한 인간 존재로서 어쩔 수 없이 안고 가야할 갖은 고통과 상처 속에서도 낙천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거듭 건너가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육에서 영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인간에게서 주님께로 건너가는 노력 말입니다.

 

오늘도 어둠 속에 방황하는 어린 새 한 마리 같은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너무도 은혜로운 한 말씀을 건네십니다. 

 

“나는 빛으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곳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요한 복음 12장 46~47절) 

 

깊고 어두운 동굴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강렬한 빛처럼 고마운 존재가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어둠에 사로잡혀 있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 한명 한명을 위해 예수님께서 친히 빛으로 다가오십니다. 

 

빛으로 다가오신다는 것은 나와 함께 하신다, 내 어두운 인생길에 동행하신다, 내 공간 안에 함께 현존하신다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종종 체험하는 바입니다만, 우리가 극심한 육체적 영적 고통에 사로잡혀 있을 때, 큰 고민속에 앉아 있을 때, 혹은 영적 암흑기에 머물러 있을 때, 그 누군가 따뜻한 동반자가 그저 함께 있어줄 때, 아뭇소리 않고 동고동락할 때, 존재 자체로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그런 순간 위안을 준 누군가는 종종 혈육보다 더 가까워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우리 삶의 깊은 곳에 자리한 어둠의 공간 안으로 기꺼이 들어와주었기 때문에, 함께 머뭄으로서 결코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었기 때문에, 그가 나와 강한 결속 의지를 표명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은 결국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주님, 지극히 하찮은 나와 삶을 공유하시러 오신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측면에서 우리와 결속되고 공유함을 통해 기쁨의 슬픔, 희망과 절망을 함께 나누기 위해 오신 자비의 주님이십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요한 10,25)

-이영근신부-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목소리들이 혼탁하게 들려옵니다. 제 안에서도 요란스런 생각들의 소리가 흘러 다닙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많은 소리들의 홍수 속에 휩쓸려 살아갑니다. 그 속에 주님의 목소리 들려도 듣지를 못하며 살아갑니다. 진정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 누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가? 자기 자신의 목소리인가? 아니면, 주님의 목소리인가? 대체, 나는 지금 누구의 목소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성전봉헌축제때 벌어진 논쟁을 들려줍니다. 주제는 여전히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것입니다. 때는 겨울이었다.”(요한 10,22)는 표현은 그들 유다인들의 마음이 춥다는 것을 암시해줍니다. 그들은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직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주시오?”(요한 10,24) 하고 예수님께 따지고 대들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요한 10,25)


그들은 말씀을 듣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알아듣지 못한 것은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주님의 말씀을 깨달아 알아듣게 합니다. 또한 깨달아 알아듣기만 한 것이 아니라, 깨달은 바를 믿음으로 따르게 합니다. 그러면 비로소 주님의 양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요한 10,27)


여기에는, 듣다’, ‘알다’, ‘따르다’, ‘준다.’ 라는 동사가 연이어 나옵니다. 사실, 우리는 아무 목소리나 듣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주님의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양이라면, 분명 그 많은 목소리 속에서 주님의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생각이나 고집을 내려놓고 듣는 일입니다. 듣다라는 말의 뜻은 단지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듣는 것, 곧 마음으로 듣는 것을 말합니다. 더 깊이마음으로 깨달아 알아듣는 것을 말함입니다. 그것은 내면적인 것이고, 관계의 형성을 의미하며, 받아들임을 뜻합니다.

또한 알다의 뜻은 단순히 정보를 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밀애의 영역에서 체험하여 알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따르다는 뜻은 받아들이다’, ‘환영하다란 의미로 옆에 혹은 근처에 있다는 표현합니다. 옆에서 함께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이 세 동사는 모두가 깊은 관계성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관계야말로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믿음에서 옵니다. 주님께서는 믿는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요한 10,28).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그들을(내 양들) 내 손에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0,27)


당신의 손에서 아무도 당신의 양들을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당신의 손은 권능을 드러냅니다. ‘아무도 우리를 당신의 손에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이 말씀은 아무도 그분의 손에서 떨어져 내릴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곧 아무도 우리를 당신의 손에서 빼내 갈수는 없지만, 자칫 스스로가 떨어져 내릴 수는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다시 말하면, 유대인들처럼, 스스로 완고함으로 주님의 목소리를 믿지 않고 배척하는 이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가리켜 너희는 내 양들이 아니기 때문이다.”(요한 10,26)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결코 우리는 예수님의 손에서 스스로 빠져나가는 일이 없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0,28)

  

주님!

제게는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도, 빼앗길 수도 없는 기쁨이 있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손수 빚어 만드시고, 제 영혼에 당신 손의 지문을 새기신 까닭입니다. 아멘.


하나가 되기 위하여

-반영억신부-


“담기는 것은 담는 그릇의 모양에 따라 달라진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담는 그릇이 중요하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주어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준비되지 못하였다면 담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담기는 것은 담는 그릇의 모양에 따라 달리 보이기 마련입니다. 준비된 마음에는 깊이 있게 담기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귀한 것도 빛이 나지 않습니다. 무엇이 주어지든 소중하게 담을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던진 질문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예수님께서 ‘너는 언제까지 내 속을 태울 작정이냐?’ 하고 유다인을 향해 하셔야 할 말씀이었습니다. 말썽쟁이 자녀를 둔 어버이 마음입니다. 여러 표징을 보여주면서 당신에 대해 이미 다 말하였는데도 믿지 않으면서 진리를 알고 싶어 하는 소망이 있는 것처럼 교묘히 말하는 그들을 모를 리 없으신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이 말씀은 마음의 문을 열어 일단 믿어라! 문을 닫고 있으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마음을 닫으면 아무리 좋은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들리지 않는 것뿐 아니라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들려서 문제가 됩니다. 어떤 것에 대한 자기의 기대나 생각, 바람, 선입견이 그를 귀먹고 눈멀게 합니다. 유다인들의 지도자들은 자기 머릿속에 메시아상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어려운 경제사정을 해결해 줄 수 있고, 주변으로부터 안전을 지키고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이러이러한 사람이 ‘메시아다, 구세주다’라는 생각이 그릇된 ‘메시아 상’을 만들고 결국은 눈앞에 계신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외면하였습니다. 내가 아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 고집을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라고 하신 말씀은 믿지 않는 유다인들에게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때로는 아는 것에서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습니다. 내 것을 내려놓을 때 상대방과 하나가 될 수 있고, 주님과도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자유를 얻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자세하고 친절한 설명도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설명이 분명할수록 그들의 고집은 더욱 굳어질 따름입니다. 이렇게 되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길을 가고, 유다인들은 유다인들의 길을 갈 데까지 가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농사를 짓는데도 ‘농사법’을 끊임없이 개선하지 않으면 더 큰 수확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자기 방법을 고집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실패를 통해서 다시 방법을 얻게 될 것입니다. 품종개량도 하고 거름을 주는 시기도 바꿔보고....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함으로써 더 큰 것을 얻게 됩니다.

하나가 되려면 먼저 나를 버려야 합니다. 내가 마음을 비우고 상대의 것을 내 안에 담아주지 않는 한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된 것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목숨을 내 놓은 순명에서 온 것입니다. 억지로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 놓은 것입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22,42).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히브5,8) 그리고 우리를 살리고 우리와 하나가되기 위해서 성체성사로 오셔서 생명의 빵으로 먹히십니다(요한 6,51.55).

내 뜻을 이루려다 보면 무리가 생기는 법입니다. 그리고 거짓 포장과 술수가 지배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속을 태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하나가 된 예수님을 본받아 내 뜻을 접고 주님의 뜻을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지금은 마음의 문을 열어 주님을 가슴에 모셔드려야 할 때입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달려 있는 듯이 하십시오! 또한 모든 것이 하느님께 달려 있는 듯이 기다리십시오”(성 이냐시오). 베드로와 사도들이 말하였습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사도5,29). 순종함으로써 하나가 되기를 바랍니다. 먹힘으로써 일치를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송영진신부-


사도들이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고, 메시아이신 분이고,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라고 믿고, 그 믿음을 세상 사람들에게 선포한 것은,
어떤 ‘연구’를 통해서 그렇게 결론을 내렸기 때문도 아니고,
누군가에게서 들은 말을 반복한 것도 아닙니다.
사도들은 ‘처음부터 승천하실 때까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사도 1,22)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직접 보고 체험했고,
그래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깨달았고, 믿었기 때문에(확신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믿음을 ‘목숨을 걸고’ 증언했고, 선포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교 신앙의 바탕은 ‘이론’이 아니라 ‘체험’과 ‘증언’입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여러 기적과 이적과 표징으로 여러분에게
확인해 주신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그분을 통하여 여러분 가운데에서
그것들을 일으키셨습니다(사도 2,22).”
“이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사도 2,32).”
오늘날에도 ‘체험’과 ‘증언’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이 그분을 둘러싸고 말하였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요한 10,25)”

예수님께서 당신 입으로 직접 “나는 메시아다.” 라고 말씀하신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라는 말씀은, “내가 이미 ‘나는 메시아다.’ 라고
말하였는데도” 라는 뜻이 아니라, 여러 가지 가르침들과 일들을 통해서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충분히 드러내셨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들과
일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들은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주신
가르침들이기도 하고, ‘아버지의 가르침들’이기도 합니다.
“나의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이다(요한 7,16).”
또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신 일들이기도 하고,
‘아버지께서 하신 일들’이기도 합니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요한 5,19).”
‘아버지의 이름으로’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시고,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길을
알려 주시고,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신 일 등은 전부 다
하느님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전해 주신 일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그 일들을 보고서도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은
그들의 마음속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요한 5,42).”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니 하느님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그것이 사랑인 줄을 모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주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믿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특히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 없이’ 율법을 지키는 일에
대해서만 집착했고, 그러면서 자기들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는데,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요한 10,26).”

이 말씀은 뜻으로는 “너희는 나를 믿지 않기 때문에 내 양이 될 수 없다.”입니다.
예수님의 양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을 안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안 믿기
때문에 예수님의 양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다 예수님의 양입니다.
그러나 구원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또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자기들 스스로 예수님의 양떼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잃은 양’ 하나를 찾으려고 애쓰는 착한 목자이신 분이지만,
자기 스스로 목자를 버리고 떠난 양은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이유로 믿음을 잃었든지, 아니면 믿음은 있어도 신앙인으로서 사는 것을
소홀히 했든지 간에, 신앙생활을 하다가 중단하고 냉담자가 된 사람도
‘목자를 버리고 떠난 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본당 사목을 할 때에 비신자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하는 것보다
냉담자들을 대상으로 ‘잃은 양 찾기 활동’을 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고 성과도 적습니다.
복음을 모르고 있는 사람보다 마음이 식어버린 사람이
더 단단하게 마음의 문을 닫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교회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해서 권고하고 인도해야 하지만, 자기 스스로
거부하고 예수님에게서 멀어져 가는 사람은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습니다.
냉담자들 가운데에는 냉담 상태로 지내는 것이 무슨 특권이라도 되는 듯이
교회가, 또는 사목자가 자기에게 더 특별한 관심을 가져 주기를 요구하는,
이상한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잃은 양’은, 목자에게 가는 길을 잃었지만 목자에게로
돌아가기를 갈망하면서 돌아가려고 노력하는 양입니다.
목자에게로 돌아갈 마음도 없고, 돌아가려는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자기를 찾으라고 목자에게 요구하는 경우는 ‘잃은 양’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잃은 양’이 아니라 ‘스스로 목자를 버린 교만한 양’입니다.
그런 ‘교만’은 목자의 길을 방해하는 걸림돌입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요한 10,27).”

이 말씀은 뜻으로는 “내 양이 되려면 내 목소리를 알아들어야 하고,
나를 알아야 하고, 나를 따라야 한다.”입니다.
여기서 ‘알다.’ 라는 말은 ‘일치’를 뜻하는 말입니다.
목자가 앞장서 가면서 양들에게 자기 뒤를 따르라고 명령하는 것은
양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입니다(요한 10,10).
살고 싶다면(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한다면) 목자 뒤를 잘 따라가야 합니다.
세례대장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예수님의 양’의 자격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항상 ‘말씀’ 안에서, ‘말씀’과 함께 살아야 하고, 예수님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의 삶입니다.
신앙인은 ‘믿는 사람’이 아니라, ‘믿음을 사는 사람’(‘믿는 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즉 ‘믿음이 곧 삶’인 사람입니다.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믿음을 온 삶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요한 10,22-30: 나는 내 양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라온다.

성전 봉헌 축제가 있었다고 한다. 예루살렘 성전 봉헌을 기념하는 축제를 말하는데 마카베오가 안티오쿠스에 의해 황폐해졌는데 그 군대를 쳐 이겼고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도움으로 옛 모습을 되찾았다. 이 승리를 기념하여 이 날을 기렸다. 이 축제가 시작되면 모든 사람이 모여들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던 것이다. 이 축제는 온 백성이 참여하는 대규모 축제였다.

 

유다인들은 그분을 둘러싸고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요?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24)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관해 필요 없는 말을 하지 않으시고,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말보다 행동으로 드러내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유다인들이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이것은 그분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들은 예수님을 자극하여 빌미를 잡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들은 그분의 말씀이나 행적을 믿기 때문에 그렇게 물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26)라고 하신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27) 우리가 참으로 양떼라면 그분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분의 양이라면 그분의 말씀을 기꺼이 듣고 따르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알아듣는다.’는 말은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따른다는 뜻이다. 하느님을 듣는 사람은 그분께서 아시는 이들이다. 이렇게 아시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가족이 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에 힘입어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른다. 그리스도의 계명을 따르며, 말씀의 인도를 받아 은총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라 불린다.(마태 5,9 참조)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라가실 때 그들도 그분을 따라간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28)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다. 생명을 주심으로써 당신이 생명이심을 보여 주신다. 바로 당신 자신이 가지고 계신 생명을 주시는 것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요한 6,54)라는 말씀대로 우리가 그분의 몸에 참여할 때, 그분은 당신 자신의 생명을 우리 안에 심어 주시도록 성체성사를 통해서 그렇게 하신다. 이 생명에 대해서는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 10,9)라고 하셨으며, 이 좋은 풀밭은 영원한 생명으로 불리는 것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29) 아버지께서는 양들을 아드님께 주셨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또한 아드님이 아버지께로부터 나신 분임을 말씀하시고 계시다. 아버지께로부터 나신 분으로 낳으심과 동시에 아들은 당신과 동등한 분으로 나신 분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위대하신것이다. 이것이 아무도 양들을 그분의 손에서, 그리고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는 이유이다. 여기서 은 권능을 의미하며 아버지와 아들의 권능은 하나이다. 같은 것이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30)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는 것은 바로 가장 영예로운 차원, 즉 하느님으로서 하나라는 말씀이다. 이 하나라는 표현은 숫자가 아니다. 이것은 다른 존재와의 관계를 드러내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상태를 의미하는 말이다. 둘이 하나인 상태이다. ‘나와 아버지는두 위격이기 때문에 ‘~이다라는 동사는 우리라는 복수 일인칭을 사용하셨다. 여기서 하나라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이 의견과 사랑과 호의에서 일치하듯이, 의견의 일치, 판단의 동일성, 사랑 깊은 관계 자체를 나타낸다. 그분은 아버지에게서 나셨기에, 그분은 아들이시다.

 

우리도 사랑으로 하나가 된다. 사랑이라는 관계는 우리 모두를 하나가 되게 한다. 그러한 모습이 삼위일체의 모습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전혀 다른 분이시지만 사랑이라는 관계, 완전한 사랑 안에 하나이신 하느님이시다. 그러니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우리 모두가 서로 다르지만 사랑의 관계로 하나가 되는 것이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럿이지만 한 몸 그리스도를 이루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의 참 모습일 것이다. 이러한 삶을 노력하자.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 30)

-한상우신부-

우리가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깨닫게됩니다.

하나라는
이 사실을
알려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하나되는
일치의
신비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도
한 분이시며
일치의
하느님이십니다.

다시 한번
예수님께서는
일치를
강조하십니다.

모든 길은
하나이신
하느님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온전한 사랑으로
일치된 인격으로
우리를 이끄시고
하나로
끌어 모으십니다.

하나이시기에
모든 것을
건네주시는
하느님의
참사랑입니다.

그 참사랑을
만나는
사랑의 시간
되십시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도 목자이신 예수님과 양들인 우리의 관계가 잘 드러납니다.

"때는 겨울이었다"(요한 10,22).

성전 봉헌 축제 기간에 유다인들과 예수님 사이에 한창 긴장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복음사가는 이 시간적 배경을 기술하면서 예수님과 유다인 무리 사이에 흐르는 기류를 전합니다.

겨울은 황량히 죽은 듯 보이나 내면에 생명을 배태하는 시기입니다. 겨울의 침묵과 멈춤이 없다면 찬란한 생명의 봄도 없지요. 지금 유다인들의 꽉 막힌 상태가 마치 겨울 같습니다. 배척 당하시는 예수님께서 맞이하실 고난과 죽음 역시 겨울을 떠올려 줍니다. 지금 그들 모두는 겨울 한복판에 있습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요한 10,27).

예수님 목소리에 안타까움이 묻어 있습니다. 유다인들이 주님의 양이었다면 예수님의 목소리를 진즉에 알아들었겠지요. 일찌기 이사야 예언자가 전한 주님의 말씀 "너희는 듣고 또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마라. 너희는 보고 또 보아라. 그러나 깨치지는 마라"(이사 6,9) 하셨던 목소리가 떠오릅니다.

이미 속으로 답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어떤 기적이나 표징이 일어나도 꿈쩍하지 않습니다. 고착된 신념이 진실을 덮어버리기 때문이지요. 이미 그들에겐 예수님이 메시아이신지 아닌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율법이 정한 태생적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메시아일 수 없고, 혹 스스로 메시아라 한다면 신성모독이니 결론은 뻔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복음이 어떤 경로로 퍼져나가 주님의 양떼가 형성되는지 보여줍니다.

"박해 때문에 흩어진 이들이 ... 유다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하였다"(사도 11,19).

페니키아와 키프로스와 안티오키아까지 간 신자들을 통해 이스라엘 국경을 넘은 복음은 초반엔 유다인들 위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키프로스 사람들과 키레네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이 안티오키아로 가서 그리스계 사람들에게도 ... 복음을 전하였다"(사도 11,20).

그러다가 다양한 민족을 통해 그리스계 사람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지요. 오묘한 파장이 느껴집니다. 복음이 살아서, 우연을 가장한 섭리적 경로로 예상치 못한 길을 확장해 나갑니다.

살아계신 말씀께서 나아가시는데 사람은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말씀께서 친히 이러저러한 경로로 당신 양들에게 가 닿으십니다. 그리고 양들은, 마치 기다리기나 한 것처럼 복음을 듣고 받아들입니다. 스펀지처럼 흡수해 말씀과 하나가 되지요.

"그곳에 도착한 바르나바는 하느님의 은총이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며"(사도 11,23)

성경에 이름을 남기지 않은 이들이 개척한 새 교회에 바르나바가 파견됩니다. 이제 막 시작되는 교회 공동체가 예루살렘 모교회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아름답고 유연한 유기체를 이룹니다.

바르나바의 기쁨은 복음을 전하는 이의 기쁨이고 말씀과 하나된 이의 기쁨입니다. 사도의 기쁨이고 목자의 기쁨입니다. 바로 주님의 기쁨입니다.

"바르나바는 사울을 찾으려고 타르수스로 가서 그를 만나 안티오키아로 데려왔다"(사도 11,25-26).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실한 바르나바의 업적 중 하나가 바로 사울을 교회 안에 편입시켜 자리잡게 해 준 것입니다. 사울에 대해 의혹을 떨치지 못하는 이들도 바르나바를 믿기에 옛 사울인 바오로 사도를 받아들일 테니까요. 야구에서 감독이 적시에, 적재적소에 구원투수를 내보내듯이, 이 역시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라 아니 할 수 없겠지요.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0,28).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보내신 이들은 세계 곳곳 어디에 드러나지 않게 숨어 있어도 결국 예수님과 연결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머리와 계획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만남과 마음의 움직임과 실행을 통해 복음은 세상 끝, 가장 말초 신경에 해당하는 땅 끝까지 이르러 아버지의 뜻을 완수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렇게 모여든 당신의 양들을 끝까지 지키십니다. 아무도 아버지와 아들의 손에서 그들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 우리 각자의 신앙의 여정을 되짚어 봅시다. 우연을 가장한 하느님의 뜻이 얼마나 오묘하고 신비롭게 나에게까지 전해져 왔는지요! 창조 때부터 나를 선택하신 하느님의 뜻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부지불식 중에 협력했는지요!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된 초세기 안티오키아에서 지금 여기 나에게까지 이어진 신앙의 혈류를 느껴 봅시다. 이 모두는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요한 10,28) 하신 아버지와 예수님의 의지로 가능한 기적입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

아버지와 예수님이 하나이시듯, 우리도 그분들과 하나입니다. 그분들과 우리를 이어준 신앙의 선조들과도 하나이고, 저마다 신앙의 진리를 고백하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 역시 하나입니다. 교회는 이렇듯 거대하면서도 섬세한 유기체입니다

 증언력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루살렘 사람들은 당신의 정체를 밝히라고 주님께 요구하자
주님께서는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고 답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사람들이 당신을 믿게 하는 데 실패를 한 것입니다.
이에 비해 오늘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신자들은 평범한 신자인데도
주님을 믿게 하는 데 성공을 하고, 안티오키아에서는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묻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하는데
어찌하여 평범한 신자들보다도 못할까요?
자신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증언력이 떨어지기 때문일까요?

그렇지요. 보통은 그렇습니다.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내가 얘기하면 자기 자랑한다고 생각하거나
자랑한다고 생각지 않더라도 순수성과 진실성에 대해 의심하게 되지요.

세상에 사기꾼이 얼마나 많고,
자기가 재림예수라고 하는 사이비 교주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니 내가 메시아라고 하는 말에 유대인들도 똑같이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말뿐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오늘 주님 말씀 대로 당신이 하신 일들은 증언력이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결과적으로 보면 이런 일들도 당장은 증언력이 있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놀라운 표징들을 제일 많이 본 제자들도
주님을 메시아로 믿는 데 실패했으니 사람들은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메시아를 이스라엘의 민족적 해방자나 구원자나 왕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주님께서 보여주신 표징들도 그런 표징으로 볼 것이기에
이런 표징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메시아는 죽어야 합니다.

사실 참된 증언은 죽어야 증언력이 있습니다.
가짜는 죽으면 잊혀지고 사라지니
죽었는데도 죽지 않아야 진짜이며
나는 죽었는데 남에 의해 살아나야 진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주님의 증언과 관련시키면 여기서 남은 누구입니까?
주님은 죽었는데 남에 의해 주님의 증언이 살아나야 한다고 할 때
여기서 남은 누구입니까?

제 생각에 여기서 남이란 성령과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증언이라는 말이 34번 나오는데 요약을 하면
아무리 주님이실지라도 자신에 대한 증언은 증언력이 없고,
성령께서 증언해주셔야 주님의 증언도 증언력을 갖게 되고,
사람들도 성령으로 충만하여 증언할 때 증언력을 갖게 됩니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유효하지 못하다.
그러나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분이 따로 계시다.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들을 보냈을 때에 그는 진리를 증언하였다.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요한 5,31-36)

그런데 이제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사람들의 증언입니다.
지금 우리도 주님이 메시아이심을 믿지 못하거나 믿더라도 증언을
잘하지 못하는데 이제 증언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희망을 가져도 됩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주님을 믿게 한 사람들도
처음에는 다 믿지 못하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를 포함하여 사도들도 믿지 못하던 사람들이고,
일반 사람들은 더더욱 믿지 못하던 사람들이었지요.

그런데 믿지 않거나 믿지 못하던 사람들이 믿게 되고 증언할 때
오히려 그 증언이 증언력을 갖게 되지요.
그리고 믿지 않던 사람이 증언할 때 오히려 관심을 더 가집니다.
하느님 믿는다고 아내를 두르려 패던 깡패가 주님을 믿게 되면
어떻게 그가 믿게 되었는지 사람들이 더 관심을 가지는 것과 같지요.

그러므로 우리 믿지 못하던 사람들도 이제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그리고 주님을 증언하기 위해서 성령으로 충만하도록 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나는 내 양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라온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요한 10,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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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대에 대한 답답함은 실은 자신의 불안감에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이 듣고 싶은 것’을 상대가 말해 주지 않아 답답하고, ‘자신이 당연하다는 것’을 상대가 부당하다 하니까 답답합니다. 이 모두가 자신이 만들어 놓은 편안한 일상이 깨질까 봐 답답해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비판하며 다가선 유다인들도 답답해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숱하게 당신 자신에 대하여 말씀하셨지만 유다인들이 듣고 싶던 이야기는 아니었지요. 그들에게 메시아는 나자렛 출신 예수가 아니라 왕권의 위엄을 가진 힘 있는 사람이어야 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유다인들에게 믿음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박병규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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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의 자비와 사랑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주시는 자비와 사랑을 느낄 수 있으며, 그 안에서 커다란 기쁨을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진실한 마음으로 나아가지 않으면서 형식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믿을 만한 표징을 보여달라고 계속 청했던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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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가난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학교에 갈 만큼 넉넉하지도 못했고, 어느 공장에 들어가 일을 할 만한 기술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사진술을 배워 사진기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진술을 엮어 놓은 책을 주문했습니다. 그러나 그 편지를 받은 서점의 착오로 사진술에 관한 책은 오지 않고 발성법에 관한 책이 왔습니다. 소년은 너무 가난하여 그 책을 돌려보낼 만한 배송료도 없었거니와 반송하는 방법도 몰랐습니다. 소년의 실망은 너무 컸습니다. 이 소년은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할 수 없이 발성법에 관한 책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이 소년이 그 책을 통해 복화술 인형 쇼로 유명하게 된 찰리 매카시라고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에 민감한 사람이 될 때 주님께 봉헌된 성전이 되고 주님의 양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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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왜 굳이 당신께서 애지중지하시는 인간에게 아픔과 상처를 경험하게 하시는가? 의아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나고 나서 하나 하나 따져보니, 그 혹독한 순간 역시 큰 틀 안에서 은총의 순간이요 보석같은 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견디다보니 아픈 것은 나았고, 상처는 아물었습니다. 눈물을 끝내고 바라본 세상은 분명 똑같은 세상인데도 훨씬 더 소중하고 더 아름다워보였습니다.  

따지고 보니 아픔이라는 것이 오히려 살아있음에 대한 신호였습니다. 결국 상처라는 것 이 땅 위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훈장이요 영예가 될수도 있습니다. 

오늘도 어둠 속에 방황하는 어린 새 한 마리 같은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너무도 은혜로운 한 말씀을 건네십니다. 

“나는 빛으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곳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요한 복음 12장 46~47절) 

-양승국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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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요한 10,27)

우리가 주님의 양이라면분명 그 많은 목소리 속에서 주님의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그것은 자신의 생각이나 고집을 내려놓고 듣는 일입니다듣다라는 말의 뜻은 단지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알아듣는 것곧 마음으로 듣는 것을 말합니다곧 더 깊이’ 마음으로 깨달아 알아듣는 것을 말함입니다그것은 내면적인 것이고관계의 형성을 의미하며받아들임을 뜻합니다.

또한 알다의 뜻은 단순히 정보를 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더 깊은 밀애의 영역에서 체험하여 알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그리고 따르다는 뜻은 받아들이다’, ‘환영하다란 의미로 옆에 혹은 근처에 있다는 표현합니다곧 옆에서 함께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결국이 세 동사는 모두가 깊은 관계성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진정한 관계야말로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합니다그리고 그것은 믿음에서 옵니다주님께서는 믿는 이에게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요한 10,28)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그들을(내 양들내 손에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0,27)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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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가 되려면 먼저 나를 버려야 합니다. 내가 마음을 비우고 상대의 것을 내 안에 담아주지 않는 한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된 것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목숨을 내 놓은 순명에서 온 것입니다. 억지로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 놓은 것입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22,42).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히브5,8) 그리고 우리를 살리고 우리와 하나가되기 위해서 성체성사로 오셔서 생명의 빵으로 먹히십니다(요한 6,51.55).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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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요한 5,42).”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니 하느님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그것이 사랑인 줄을 모릅니다.

목자가 앞장서 가면서 양들에게 자기 뒤를 따르라고 명령하는 것은
양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입니다(요한 10,10).
살고 싶다면(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한다면) 목자 뒤를 잘 따라가야 합니다.
세례대장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예수님의 양’의 자격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항상 ‘말씀’ 안에서, ‘말씀’과 함께 살아야 하고, 예수님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의 삶입니다.
신앙인은 ‘믿는 사람’이 아니라, ‘믿음을 사는 사람’(‘믿는 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즉 ‘믿음이 곧 삶’인 사람입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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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길은
하나이신
하느님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온전한 사랑으로
일치된 인격으로
우리를 이끄시고
하나로
끌어 모으십니다.

하나이시기에
모든 것을
건네주시는
하느님의
참사랑입니다.

-한상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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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나바는 사울을 찾으려고 타르수스로 가서 그를 만나 안티오키아로 데려왔다"(사도 11,25-26).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실한 바르나바의 업적 중 하나가 바로 사울을 교회 안에 편입시켜 자리잡게 해 준 것입니다. 사울에 대해 의혹을 떨치지 못하는 이들도 바르나바를 믿기에 옛 사울인 바오로 사도를 받아들일 테니까요. 야구에서 감독이 적시에, 적재적소에 구원투수를 내보내듯이, 이 역시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라 아니 할 수 없겠지요.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된 초세기 안티오키아에서 지금 여기 나에게까지 이어진 신앙의 혈류를 느껴 봅시다. 이 모두는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요한 10,28) 하신 아버지와 예수님의 의지로 가능한 기적입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

아버지와 예수님이 하나이시듯, 우리도 그분들과 하나입니다. 그분들과 우리를 이어준 신앙의 선조들과도 하나이고, 저마다 신앙의 진리를 고백하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 역시 하나입니다. 교회는 이렇듯 거대하면서도 섬세한 유기체입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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