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30일 부활 제3주간 목요일
2020년 4월 30일 부활 제3주간 목요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요한 6,44-51)
I am the living bread
that came down from heaven;
whoever eats this bread will live forever;
and the bread that I will give is
my Flesh for the life of the worl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요한 복음서 6장의 전체 맥락 안에서 빵을 많게 하신 표징 뒤에 이어지는 오늘 복음 말씀은 단순히 성체성사에 대한 언급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생명의 빵이라는 담화 안에서 그 표징을 통하여 드러난 예수님의 몸은, 구약 성경 탈출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은 만나의 의미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고찰이라고 하겠습니다.
사실 유다인들은 광야에서 하느님께 받은 만나의 신비로움을 하느님의 지혜를 담고 있는 은총의 선물인 율법의 상징이라 여겼습니다. 율법이야말로 하느님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는지를 알고자 하는 인간의 궁극적인 배고픔을 충족시켜 주는 참된 삶의 양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가운데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로 받아들인 이들은, 마지막 만찬을 통하여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제공되는 예수님의 몸과 피를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으로 믿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것’(신명 8,3 참조)을 율법을 통하여 배우고 믿었던 이들에게 생명의 빵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한 선택을 재촉합니다. 유다인들처럼 듣기 거북하다고 투덜거리며 떠날 것인지, 아니면 제자들처럼 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받아들여 영원한 생명을 얻고 그 말씀을 전하는 이가 될 것인지, 이에 대한 깊은 성찰이 우리에게도 필요할지 모릅니다. 오늘 독서에서, 고통받는 주님의 종에 대한 이사야서 53장의 말씀을 반복하여 읽으며 그 뜻을 헤아리고자 노력하던 에티오피아 내시와 같은 자세로 늘 성경을 읽고, 또 그 뜻을 풀이해 준 필리포스처럼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이 부활의 시기를 보내며 간절히 기도해 봅니다.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직장은 우리 가족이 함께 생활할 수 있도록 재정을 도와주는 곳이고, 가정은 사랑으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곳이고, 성당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위로와 힘을 얻는 곳입니다. 따라서 일이 아니라 행복으로 나아가는 장소로 생각하면 어떨까요?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은 “나는 평생을 하루라도 일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모두 재미있는 놀이였다.”라고 말합니다. 일이라 생각하지 않고 놀이라고 생각하니 평생 발명에 몸 바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일’을 떠올리면, 동시에 따라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쉬고 싶다.’ 아닐까요? 그러나 ‘놀이’를 떠올리면, 동시에 따라오는 것이 없습니다. 굳이 있다고 한다면 ‘계속’이 아닐까요? 즉, 계속 놀고 싶다는 것이지요.
자신이 하는 것을 ‘일’이라는 프레임에 가두어서 스스로를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일보다는 놀이로 계속하고 싶은 무엇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직장에서 하는 것이 감사이고, 가정에서 하는 것이 사랑이며, 성당에서 하는 것이 행복임을 분명히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번째로 “나는 생명의 빵”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냥 한 번 해도 충분할 것을 연속해서 말씀하시며 강조하는 이유는 그만큼 주님을 아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식은 ‘쌀’이지만, 이스라엘에서 주식은 ‘빵’입니다. 그만큼 주님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 반드시 함께해야 할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님을 단순히 자신의 필요를 채워주는 분으로만 여기고 있습니다. 즉, 이 필요가 채워지면 없어도 되는 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르는 것이 하나의 ‘일’처럼 생각했던 것입니다. 무조건 함께해야 할 분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함께 해야 할 분 정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약속해주십니다. 이를 위해 생명의 빵으로 주님을 받아들이고, 언제 어디서나 주님과 함께 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세상의 관점을 채워줄 주님이 아니라, 당연히 함께해야 할 주님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 안에서 참 행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인터넷 쇼핑을 많이 이용합니다. 저 역시 물건을 사러 밖에 나가는 것이 힘들어서, 인터넷에 들어가 검색과 구매평 등을 꼼꼼하게 살피고 주문합니다. 그러면 하루 이틀 뒤에는 받아볼 수 있습니다. 제가 자리에 없어도 상품을 안전하게 받을 수 있도록 조치를 해 줍니다.
한 번은 늦은 시간에 택배가 온다는 문자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외부 강의로 자리에 없었고, 또 직원도 퇴근한 시간이라서, 이 사정을 택배 기사님께 문자로 넣었습니다. 곧바로 다음 날 아침에 배송하겠다는 문자를 받았습니다.
그냥 성지 문 앞에 두고 가도 될 것을 왜 다음 날 배송하겠다고 할까요? 혹시라도 모를 분실 위험 때문입니다. 배달하는 물건 모두 귀하게 여기기에 안전하게 배송하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에 대해 묵상하게 됩니다. 하느님 은총의 가치는 인간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큽니다. 이렇게 귀한 은총을 우편이나 택배로 보내질까요? 아닙니다. 귀한 은총이기에 하느님께서 직접 전해주십니다.
그렇다면 이 은총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밖으로 싸다녀서는 안 됩니다. 남이 아닌 내가 직접 받아야 하기에, 하느님 앞에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 있지도 않으면서 은총을 주시지 않는다고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은 이니 우리 앞에 와 계십니다.

알고 싶지 않으면 사랑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전삼용신부-
‘대화’는 대인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누군가와 만나면 어색해지는 상황을 두려워하고 걱정합니다. 저도 그랬기에 대화의 기술에 관한 책도 읽어보고 나름대로 방법도 실천하며 살고 있습니다. 대화의 기술 5가지를 정리해보자면 이렇습니다.
1.말하는 것보다 들어라 – 입은 하나, 귀는 두 개. 내가 말하는 것보다 두 배는 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잘 들어주기만 해도 “오늘 좋은 대화였어!”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2.상대의 말에 관심을 가져라 – 보통 말을 할 때 상대의 눈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서양의 정서이고 우리는 인중 쪽을 바라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상대의 말에 호응을 해주고 장단을 맞춰줘야 합니다. 그래야 상대가 신나게 말할 수 있습니다.
3.상대를 긍정하라 – 옳고 그름은 사실 말하는 사람이 더 잘 압니다. 그것을 바로잡아 주려다가는 상대가 가진 나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됩니다. 상대는 지금 상담가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공감해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4.질문하라 –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대화에 마침표를 찍는 사람이 있고 그 대화가 계속 흐르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화를 흐르게 하려면 나의 대화 다음에 반드시 상대의 대답이 나오게 만들어야 합니다.
5.상대가 관심있는 것을 질문하라 – 질문이 취조가 되면 안 됩니다. 상대가 지금 말하고 싶은 것을 질문하면 상대는 신이 나서 말하게 됩니다. 그런 주제를 질문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를 말했지만 사실 대화의 기술의 핵심은 하나입니다. ‘상대를 사랑하라!’입니다. 사랑하면 알고 싶어지고 알고 싶어지면 내 말보다는 상대의 말을 듣고 싶어서 질문을 많이 하게 됩니다. 상대는 자신을 알고 싶어 하는 나의 마음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알고 싶은 마음과 사랑하고 싶은 마음은 하나입니다.
몇 년을 함께 지내도 나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자신의 배우자나 자녀라면 그것만큼 가슴 아픈 일은 없을 것입니다. 나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은 그야말로 슬픈 일입니다. 그런데 내가 그런 처지에 있다는 것은 어쩌면 나도 다른 사람에 대해 알고 싶어 하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느님에 대해 알고 싶고 그래서 질문을 많이 한다면 그 사람은 하느님께서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러나 묻는 것이 없다면 하느님도 침묵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질문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당신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귀를 막고 있는 사람에게 대화를 시도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체의 신비에 대한 믿음까지 오지 못하는 이들이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은 알려고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나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과 친교를 맺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요즘은 하늘나라 신비에 대해 알려고만 하면 그 정보를 아주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성경공부나 교리공부를 따로 하지 않더라도 SNS나 유튜브만 봐도 수많은 정보와 가르침들이 흘러넘칩니다. 그런데도 표징만을 요구하며 배우지 않으면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참 구원과 진리에 무관심해지는 것일까요? 다른 것에 더 관심을 쏟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습니다.
2007년, 어느 추운 겨울 아침, 한 바이올리니스트가 워싱턴 D.C의 기차역에 서서 여섯 곡의 바흐 작품을 연주했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도 바이올린도 절대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음악가 중 한 명인 조슈아 벨로였습니다. 조슈아가 바쁜 직장인들로 가득한 기차역에서 350만 달러짜리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동안 2,000여 명이 그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는 45분간 계속해서 연주했습니다. 단 6명이 잠시 걸음을 멈춰 서서 그의 연주를 들었습니다. 20명가량이 돈을 냈지만 이내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연주를 마쳤을 때 기차가 내는 소음 외에는 정적이 흐를 뿐이었습니다. 박수갈채도, 군중도, 그를 알아보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워싱턴 포스트’가 진행한 이 실험은 놀라울 정도로 강력하고도 불편한 진실을 증명하였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음악가마저도 치열한 경쟁에 휩쓸리는 사람들 가운데서는 전혀 관심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안에도 우리 자신에 관한 관심으로만 가득 차 있다면 주님에 관한 관심이 없어집니다. 구원에 이르려면 먼저 그 구원에 합당한 사람이 되기 위한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 집에 뒹굴고 있는 우주에 관한 그림책을 보며 모든 것을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알려고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습니다. 더 많이 알수록 더 친밀해집니다. 더 많이 알고 싶을수록 더 많이 질문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싶다면 지금 하느님에 대해 더 알고 싶어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성체 안에서 진정으로 주님을 만나 뵈옵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을 알기 위해 어떠한 질문을 던지며 대화를 시도하셨습니까?

-조재형신부-
오늘은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우리의 성탄절처럼 불교에서는 커다란 축일입니다. 본당에 있을 때입니다. ‘호법사’라는 사찰이 본당 지역 내에 있었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에 ‘부처님 오신 날 축하드립니다.’라는 현수막을 성당에 걸었습니다. 성탄절이 되었을 때입니다. 이번에는 호법사에서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합니다.’라는 현수막을 걸었습니다. 나중에는 사찰과 성당의 교우들이 함께 ‘족구대회’를 하였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이웃 종교를 존중하면 좋겠습니다. 공동선을 위해서 서로 연대하면 좋겠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 축하드리며, 부처님의 자비하심이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불교는 정부의 코로나19 억제 대책에 협조하였습니다. 법회를 중단하였고, 부처님 오신 날에 있던 연등행사도 연기하였습니다. 종교 행사도 좋지만 국민의 건강과 안전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내린 결정입니다. 천주교도 정부의 코로나19 억제 대책에 협조하였습니다. 교우들은 사순시기를 미사 없이 지내야 했습니다. 가장 큰 전례인 성삼일과 예수님의 부활 대축일도 영상으로 보아야 했습니다. 국민의 건강과 안전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내린 결정입니다. 내일부터 성모성월이 시작됩니다. 성모님의 전구하심으로 5월에는 뉴욕에서도 모두가 함께하는 미사가 시작되면 좋겠습니다.
1998년입니다. 22년 전입니다. 전주교구의 한 사제가 교통사고를 당하여 하느님 품으로 갔습니다. 오토바이를 몰던 대학생이 대학 등록금을 잃어버렸고, 찾으러 가던 길에 사고를 냈습니다. 신부님은 고등학교의 교장 신부로 있었습니다. 신부님의 유언장에는 이렇게 적혀있었습니다. ‘나의 안구는 기증하여 누군가가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장기는 의대생들이 공부하는데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교회법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화장해서 재는 나무에 뿌려주면 좋겠습니다.’ 후배 신부들은 구치소에 있는 학생이 나올 수 있도록 했고, 등록금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것이 고인이 되신 신부님이 원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신부님 통장에는 300,000원이 있었습니다. 그 돈으로 볼펜을 사서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신부님은 안타깝게 돌아가셨지만 신부님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아직도 살아있습니다. 신부님이 기증하신 안구는 누군가의 눈이 되어 아름다운 세상을 보고 있습니다. 오늘 저의 가슴에도 신부님은 따라야 할 사제로 살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은 ‘성체성사’로 재현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아멘’하며 받아 모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우리의 몸으로 오셨고, 우리와 함께 살고 계십니다. 영원한 생명은 물리적인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미와 가치의 시간을 이야기합니다.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고 순교한 성인들은 신앙 안에서 영원히 함께 합니다. 저도 물리적인 시간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지는 않습니다. 의미와 가치의 삶을 살아 신앙 안에서 주님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당신의 죽음으로 저희 죽음을 없애시고 당신의 부활로 저희 생명을 되찾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그리스도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네. 살아 있는 우리가 이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셨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이영근신부-
요즈음 계속해서 빵에 대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 빵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요,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요, 믿는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생명의 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예언서의 말씀을 일깨워줍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44)
여기서, “마지막 날”은 육체적 숨이 멈추는 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만나기 직전의 날을 말해줍니다. 곧 생명의 주님을 만나면 이전의 자신이 죽고 나날이 변화되는 새로운 날이 시작됨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임을 말해주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세상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는 일이요, “아버지”께로 이끄심임을 말해줍니다.
이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왔으니 역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들의 부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1코린 15,21) 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떠올려 줍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여기서, “살아있는”이란 말은 당신의 실재성을 말합니다. 곧 죽어있지 않고 살아있다는 실재성입니다. 그 실재는 지금도 꼬무작거리며 활동하고 있는 생 빵이요, 건너와 관계를 맺는 활동 중인 빵임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살아있는 빵”은 자신을 죽여 타인을 살리고 있는 활동 중인 빵인 것이다. 그러니 “살아있는 빵”은 “살리는 빵”의 의미를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곧 먹는 이 안에서 부활하는 빵인 것입니다.
이 빵은 다름 아닌 신성의 “당신의 살” 입니다. 살아있는 살이요, 떼어 나누어지는 살입니다. 그리하여 먹는 이에게서 살아있는 살이 되고, 우리의 살을 당신과 한 몸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 당신의 생명이 됩니다. 곧 영원한 생명이 되게 합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신비입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살은 우리의 생명을 변화시키는 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증여를 통해서, 우리 안에서 죽음을 몰아내고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변화시키십니다. 우리를 당신의 몸이 되게 하시고, 당신 생명이 되게 하시고, 당신 신성에 들게 하고, 우리에게서 부활하십니다.
그러나 이 생명의 빵을 먹을 것인지 거부할 것이지는 우리 스스로가 응답해야 할 몫입니다. 만약 먹지 않는다면 이루어지지 않는 일인 것입니다. 이를 알면서도 먹지 않는다면 참으로 어리석음은 일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오늘 이 어리석음의 완고함을 지니고 있지는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도 분명, 우리는 살아있는 이 빵을, 하느님의 참된 사랑을 받아먹습니다. 곧 “그분의 살”을 먹습니다. 하느님의 이 큰 사랑 안에서 우리는 생명을 얻어 살아갑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생명이 제 삶으로 피어나게 하소서.
제 생명이 당신의 생명으로 피어나게 하소서.
당신께서 먹혀서 저를 살리듯 저도 먹혀서 타인을 살리게 하소서.
먹히는 빵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주님!
오늘도 당신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당신 자신을 쪼개 떼어주십니다.
오늘 제가 저 자신을 위한 빵이 아니라, 세상에 건네주는 빵이 되게 하소서!
내가 만든 빵이 아니라, 당신이 주신 빵을 건네주게 하소서. 아멘.

신앙은 선물
-반영억신부-
저의 어린 시절 신앙생활은 신부님께서 상주하지 않으시는 공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아무 것도 몰랐지만 주일이면 성당에 가라고 하시는 어머니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때로는 가기 싫었지만 꾸중을 듣지 않기 위해서 갔고, 밭에 나가서 풀을 뽑는다든지 집안일을 도와야 하는 때가 되면 그것이 하기 싫어서 성당에 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에게는 본의아니게 열심히 기도하는 착실한 사람처럼 보여 졌습니다. 이제는 잘 보이려고 정말 열심히 하였습니다. 주일이면 일찍 나서서 청소도 하고 주변정돈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공소회장님이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신부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직 먼 미래의 일이었지만 저는 지금 신부가 되었습니다. 함께 어울리며 지내던 공소회장님 아들도 신부가 되었고 한 자매는 수녀님이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작은 시골 공소였지만 결코 작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웃을 통하여 저를 신앙에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 이끌리는 것은 선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순간, 순간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하여 우리를 신앙에로 부르고 계십니다. 믿음은 미처 나도 모르게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물론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을 요구하셨지만 강하게 이끌어 주신 것은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요한6,44).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먼저 불러주셨기에 응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부름을 주님의 초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야말로 은총입니다. 일상의 평범한 삶 안에서 나를 부르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만나게 되고 의탁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선물을 통하여 생명의 빵으로 다가 오시는 아들 예수님을 새롭게 영접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6,47).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생명의 빵이다…..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6,48,5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빵으로 오신 이유는 우리에 대한 ‘눈높이’ 사랑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드러내는 참 하느님이시고 이 땅에 살과 뼈를 지니신 채 사셨던 분으로 우리 곁에 가까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성체성사를 통하여 영적 양식을 제공하여 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당신 안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선포하시며 우리를 부르셔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비로소 효과 있는 은총으로 역사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짐에서 자유로울 때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은 하늘이 되었고 하늘은 이미 여기서 열렸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영국의 위대한 총리 토마스 모어는 매일 미사참례를 하였고 영성체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은 수많은 국정의 임무를 맡고 있는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내가 신경을 써야 할 일은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생각을 정리하기가 쉽습니다. 하느님을 거스르게 될 기회들도 많지만 나는 매일 예수님께로부터 힘을 얻어서 그 악의 기회들을 멀리할 수 있습니다. 나는 매우 어려운 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해 빛과 지혜가 필요한데 매일 영성체를 통해 예수님과 그것을 상의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나의 위대한 스승이십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주님을 모심으로써 그 안에서 빛과 지혜를 얻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세속적인 추구에서 벗어나 우리를 진정 살리는 것을 찾기 시작해야 합니다.
“‘살아있는 생명의 빵’은 살아있는 양식으로 모셔야 합니다. 살아있는 빵을 죽은 양식으로 모셔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매 미사 때마다 모시는 거룩한 성체는 우리의 영혼과 삶 안으로 모셔야 살아있게 됩니다. 그저 입 안으로 성체의 빵만을 먹으면 결국 이스라엘처럼 만나를 먹고도 죽은 백성이 됩니다. 우리는 성체를 모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살아야 합니다”(함께야).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생명의 빵
-송영진신부-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48-51).”
“나는 생명의 빵이다.” 라는 말씀을
단순하게 “나는 생명이다.”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요한 14,6).
예수님은 ‘참 생명’이신 분이고, 그 생명을 사람들에게 주시는 분입니다(요한 1,4).
그렇기 때문에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라면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사람을 살리신 기적들을 통해서 당신이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드러내셨고, 부활을 통해서 당신이 생명
자체이신 분이라는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라는 말씀은, ‘만나’가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은 아니었다는 말씀이기도 하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수동적으로 받기만 하고,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능동적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그 생명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만나’는 분명히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양식이었지만,
사람들의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주신 ‘일용할 양식’이었을 뿐입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라는 말씀의 뜻은,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입니다.
여기서 ‘먹다.’ 라는 말은, 뜻으로는 ‘믿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믿는다.’를 ‘먹는다.’로 표현하셨을까?
듣기가 너무 거북한 표현이 아닌가?(요한 6,60)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일’은 ‘당신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그런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우리는 음식을 먹고, 음식 속에 들어 있는 생명력을 섭취함으로써 생존합니다.
음식 안에 들어 있는 영양분은, 또는 생명력은
내 몸 안에 들어와서 내 몸의 생명을 유지해 줍니다.
그 단계에서는 음식 안에 들어 있는 생명력과 나는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고 생존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받아서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려면, 예수님을 믿고(먹고), 예수님의 생명이 곧
나의 생명이 될 때까지 예수님과 완전한 하나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 가르침을 더욱 생생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빵’으로 표현하시고, “나를 먹어라.” 라고 표현하셨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선언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이라는 말은, 그 생명이 하느님에게서 왔음을 나타내고,
“살아 있는”이라는 말은, 예수님 자신이 곧 생명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라는 말씀은,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라는 앞의 말씀을 반복한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죽지 않는다.” 라는 말과 “영원히 살 것이다.” 라는 말은,
단순히 안 죽고 영원히 사는 것만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하느님, 예수님과 함께 누리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은 그 생명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지상에서의 죽음은 그 생명으로 건너가는 관문입니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라는 말씀을 단순하게 표현하면,
“나 자신이 곧 생명이다.”입니다.
이 말은, 앞에서 이미 언급한 “나는 생명이다.”와 같은 말입니다.
“나의 살이다.”는 뜻으로는 “나다.”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풀어서 말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내가 주는 빵을 받아먹어라. 그 빵은 곧 나다.
나를 믿는 것은 곧 내가 주는 빵을 받아먹는 것이다.”입니다.
< “나의 살이다.” 라는 표현도 당신에 대한 신앙은 당신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어야
하는 것임을 강조하신 표현으로 생각됩니다.
예수님과 ‘한 살’(한 몸)이 될 정도로 완전하게 일치되는 것,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사랑이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사랑이란, 나를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을(당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는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을
“나는 너희를 크게 사랑하기 때문에, 너희를 위하여 나의 모든 것을 내놓았다.
(너희에게 나를 모두 주었다.)”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첫 번째로 할 일은, 예수님의 그 큰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
즉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라는 예수님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일이, 요한복음 6장에는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을
먹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고, 15장에는 “포도나무 가지가 나무에 잘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곧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가지가 나무에 잘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으려면
나무의 생명력을 잘 받아먹어야 합니다.
<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는 나무줄기와 가지의 관계와 같은 것인데,
사실 나무줄기와 가지는 ‘한 몸’이고, ‘한 살’입니다.
신앙인이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것은, 가지가 줄기와 완전히 하나가
되어 있는 것과 같은 일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여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우리가 그 다음에
할 일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예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여라.” 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입장에서는 ‘서로’ 라고 표현하셨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내가 먼저’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사랑은 ‘내가 먼저’ 하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내가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내가 준 사랑이 다시 사랑으로 돌아오지 않더라도,
실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변함없이 사랑해야 합니다.)

세상에 생명을 주는 살
-조욱현신부-
복음: 요한 6,44-51: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44절)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 다가갈 수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께 가는 것도 아버지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그리스도께 다가갈 수 없다. 우리는 믿음이라는 선물 덕분에 그리스도께로 왔다. 그러나 아직 목적지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 가는 길에 있는 존재들이다. 이 하느님께 이끌리는 것은 사랑에 의해서 이끌린 것이다. 인간의 마음에는 하늘의 빵을 달게 느끼는 어떤 갈망이 있다. 이러한 갈망을 가지고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45절) 이 말씀은 이사 54,13의 말씀으로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방법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분이 이끄신다는 것은 강요가 아니라 진리를 가르치심으로써 이끄신다. 이 이끄심은 하느님의 일이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45절) 즉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로 온다. 그것을 누구에게서 배우느냐? 바로 아드님에게서 배운다. 그분은 말씀이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말씀’으로 가르치시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46절)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웠다는 것은 바로 그분의 목소리를 아드님에게서 들었다는 말씀이다. 그 아드님은 아버지를 아시며 말은 말을 하는 사람에게서 나오듯이 그분은 아버지에게서 오셨다. 이렇게 나오는 말씀은 지나가고 없어지는 소리가 아니라, 말씀하시는 분에게 남아 있으며 그 말씀을 듣는 이를 끌어당기는 말씀이시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46절) 아들과 성령만이 그분을 제대로 보신다. 외아들과 성령만이 아버지를 온전히 아신다. “모든 것을, 그리고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1코린 2,10)하시기 때문이다. 외아들과 성령은 하느님으로 아버지를 아신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47절) 이 영원한 생명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영원한 생명이 죽음을 취하셨다. 생명이 죽음을 죽이도록 생명께서 죽으셨다. 그분이 영원한 생명이시라는 것은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 이 영원한 생명께서 당신께서 취하신 육에게도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 그분은 죽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그분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48절) 하느님께서는 살아 계신 당신의 ‘말씀’을 시켜 모든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시고 당신의 ‘말씀’을 우리들에게 양식이요 생명으로 주신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언제나 갈망으로 배고파한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마태 5,6)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사랑하는 이들이 이 음식을 갈망할 때, 그들은 한층 더 흡족해질 것이다. 우리는 이 빵을 통하여 그분과 한 몸, ‘그분 몸의 지체’(에페 5,30)가 된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49절) 하느님께서는 조상들에게 만나를 내려주셔서 나날이 배부르게 먹었다. 그래서 “천사들의 빵을 사람이 먹었다.”(시편 78,25)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 빵을 먹은 이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었다. 그러나 우리가 받아 모시는 이 음식,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은 영원한 생명을 주며, 이 빵을 먹는 이는 누구나 “영원히 살 것이다.” 이 빵은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50절) 이 빵은 성체성사이다. 성체성사는 우리를 하늘의 빵이 되게 하시며 생명을 주신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51ㄱ절) 그분은 아버지의 완전한 빵으로서 우리에게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셨다. 우리가 당신의 삶을 통하여 배우고 하느님의 말씀을 먹고 마실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 아버지의 영인 불사의 빵을 우리 안에 담을 수 있게 하셨다. 우리는 기도하며 하느님께 청해야 한다. 그 빵을 청해야 한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라고 하신 그리스도를 청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과 한 몸이 되어야 한다. 많은 밀알들이 모아지고 갈리고 섞여서 하나가 되어 빵이 되듯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빵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51ㄴ절)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의 생명을 위해 당신의 몸을 바치셨고, 그 몸을 통하여 생명이 우리 안에 머무르게 하신다. 생명을 주신 말씀께서는 육안에 머무르고 계셨기에 그 육을 생명을 주는 것ㄷ으로 만드셨다. 그러기에 그분의 몸은 그것을 먹는 모든 이에게 생명을 주신다. 그 몸은 죽어가는 사람들에게서 죽음을 몰아내고, 말씀으로 완전히 충만해진 그 몸은 부패를 사라지게 한다. 이 성체성사를 잘 준비하고 영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 51)
-한상우신부-
생명의 빵을
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생명의 빵을 봅니다.
당신의
고통과 희생으로
우리의 죄와 고통을
없애 주십니다.
고통과 희생의
살아계신
생명의 빵입니다.
살아계신
예수님께서
살아있는 생명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생명의 빵은
믿음의 빵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입니다.
다시 살게 하시고
다시 살리시는
생명의 강력한
믿음입니다.
생명의 빵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말씀이 있고
가르침이 있습니다.
살아있는
생명속에서
새로운 행복을
맛보게 됩니다.
빵으로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살과 피로
생명이 생명을
끌어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생명은
죽지 않고서는
생명의 빵이
될 수 없음을
말씀과 믿음으로
가르쳐주십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예수님의 자기 계시는 절정을 향해 달려갑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요한 6,48).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요한 6,51).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예수님의 말씀이 점층적으로 강도를 더해갑니다. 당신은, 조상들이 먹고도 죽어간 만나와 비길 수 없는 "생명의 빵"이시라는 말씀도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시니 군중을 당혹스럽게 만드십니다.
게다가 "살"은 인간 조건을 가리키는 참으로 실제적인 표현이 아닐 수 없지요. 너나 할 것 없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살아가는 "살"은, '가능성과 나약성을 포함해 인간의 실체를 이루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살을 빵으로, 양식으로 세상에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는 그동안 접해보지 못한 방식입니다. 혹자는 식인을 떠올릴만큼 무시무시한 표현으로 받아들이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미친 소리쯤으로 냉소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지요.
제1독서는 필리포스의 선교 대목입니다.
"그는 하느님께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면서 자기 수레에 앉아 이사야 예언서를 읽고 있었다"(사도 8,27-28).
천사의 안내로 필리포스가 만난 사람은 이방인인 에티오피아 사람 내시로 왕궁의 고관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경배나, 여행 중간에 성경을 봉독하는 것으로 보아 유다 신앙을 받아들여 독실하게 실천하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의 생명이 이 세상에서 제거되어 버렸으니 누가 그의 후손을 이야기하랴?"(사도 8,33)
하느님께서 그의 실존을 건드리는 말씀을 통해 그에게 다가가십니다. "후손"은 말씀 속 '주님의 종'에게서도, 내시인 그에게서도 박탈된 하느님의 축복이지요. 대개 사람들은 자기에게 허용되지 않은 부분에 대해 미련을 갖게 마련입니다. 주님께서 내시의 마음속에 의문을 일으키시고 답을 일러 줄 필리포스를 보내신 것입니다.
"필리포스는 입을 열어 이 성경 말씀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그에게 전하였다"(사도 8,35).
흔히 생명과 후손을 결부시켜 생각하면 자손을 위한 인간의 생식 기능을 떠올릴 겁니다. 이 차원에서는 주님의 종이 가리키는 예수님이나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희망은 없습니다.
필리포스는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육신적 "생명"은 끝났지만, 그분이 남긴 "살"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는 "후손"들이 온 세상 모든 민족 안에서 이어져갈 것임을 설명했을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난 전대미문의 부활 사건으로 이제 생명과 후손의 개념은 다른 차원으로 건너간 것이지요.
"내시는 그를 더 이상 보지 못하였지만 기뻐하며 제 갈 길을 갔다"(사도 8,39).
말씀에서 위로를 얻은 내시는 자청해 세례를 받고 기쁨에 넘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기쁨은, 생명과 후손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과 희망으로 배가됩니다. 이후 성경은 더 이상 그를 언급하지 않지만 분명히 그는 자신의 실존 안에서 누릴 영원한 생명에 대해 전율하며 행복하게 살았을 것 같습니다.
주님의 살은 영원한 생명을 약속합니다. 우리가 받아모시는 주님의 몸이 나에 대한 그분의 완전한 자기 증여이고, 살을 베어 먹일 만큼의 사랑의 결정체라는 사실에 전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코로나19 사태로 미사 참례가 제한되어 성체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사무쳐가는 이 시기에, 우리가 사랑하는 그 님의 살(몸)을 향한 이 허기와 갈망이 얼마나 소중한지 다들 느끼실 겁니다. 이 결핍이 우리의 실존을 주님께 더 가까이, 더 깊은 일치에로 이끄시니 감사합시다. 우리가 초대받은 생명은 일시적이지도 한시적이지도 않고, 선착순이나 인원 제한이 없는 "영원함"이니 인내로이 기다리며 사랑을 깊여 갑시다. 믿음을 굳히고 희망을 키우며 나아갑시다.
"잔인한 달",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썪은 나무 뿌리에서 새싹이 돋음을 보았으니, "생명의 달" 오월은 성모님과 함께 이 생명의 충만함을 만끽하는 '제일 좋은 시절'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아버지께 데리고 가는 우리의 큰 형님
-김찬선신부-
요한복음이 하는 얘기는 이렇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아버지께 가는 길이시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14장의 말씀인데 오늘 6장에서는 이렇게도 얘기합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그러니까 아버지께 가려면 아들에게 가면 되는데
아들에게 가려면 다시 아버지의 이끄심을 받아야 한다는 말씀이고,
아버지의 이끄심은 아버지 말씀을 듣고 배움으로써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마치 막내아들이 아버지가 있는 부산에 가기 위해서는
서울역에 가서 형을 만나 함께 부산행 기차를 타면 되는데
아버지가 가르쳐준 대로 가면 형을 만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는 우리의 큰 형이고 우리를 당신께로 데려오라고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그리스도이시며,
그래서 우리는 이 형을 따라가면 아버지께 틀림없이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형을 우리가 만나본 적이 없어서
어떤 사람이 우리의 형인지 알아볼 수 있어야 하는데
예수가 바로 우리의 형이라는 것을 아버지께서 알려주신다는 겁니다.
사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예수님 당시 대다수 유대인이 믿지 않았고,
지금도 무신론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예수를 그저 한 인간이고 뛰어난 스승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친히 이끌어 주신 사람,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이라야 당신께 온다고 하십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만이 아버지의 이끄심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누구는 이끄시고 누구는 이끌어 주지 않으시는,
그런 것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을 듣고 배우는 사람은 누구나 이끄심을 받고,
듣지도 않고 배우지도 않는 사람은 이끄심을 받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누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어떻게 들을 수 있을까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하느님의 말씀은 들으려는 사람이나 듣습니다.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고 물을 만나듯 하느님이 그립고,
하느님의 말씀이 목마른 사람이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 말씀을 듣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누가 하느님이 그립고 하느님의 말씀이 목마릅니까?
지상의 모든 위로와 행복이 완전히 끊긴 적이 한 번이라도 있는 사람입니다.
그때 그는 비로소 눈을 지상에서 지상 아닌 곳으로 향하고,
위로와 희망의 말씀을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에서 찾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느님을 만나는 원체험原體驗을 하고 나면
그는 모든 것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게 됩니다.
풀벌레 소리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바람 소리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외치는 사람들의 소리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을 믿는 이들의 말과 성인들의 가르침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 성경 말씀과 성체 안에서 하느님 말씀을 듣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만난다는 것은 더더욱 자명합니다.
그리고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하느님께로
안전하고 확고하게 이끄시는 우리의 길이 되시고
하느님을 아버지로 만나게 해 주시는 우리의 큰 형님이 되십니다.
그래서 감사드리는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요한 6,4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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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위대한 총리 토마스 모어는 매일 미사참례를 하였고 영성체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은 수많은 국정의 임무를 맡고 있는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내가 신경을 써야 할 일은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생각을 정리하기가 쉽습니다. 하느님을 거스르게 될 기회들도 많지만 나는 매일 예수님께로부터 힘을 얻어서 그 악의 기회들을 멀리할 수 있습니다. 나는 매우 어려운 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해 빛과 지혜가 필요한데 매일 영성체를 통해 예수님과 그것을 상의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나의 위대한 스승이십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반영억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