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4월 28일 부활 제3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20. 4. 27. 18:50

2020 4월 28일 부활 제3주간 화요일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요한(6,30-35)
 

"I am the bread of life;
whoever comes to me 
will never hunger,
and whoever believes in me 
will never thirs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부활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 우리에게 오늘 독서는 예수님의 극진한 사랑이 드러났던 성목요일의 주님 만찬과 성금요일의 수난 예식을 떠올리게 합니다.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함께하신 뒤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예수님이 아니라, 그분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증언한 스테파노가 그 거룩한 사건의 기억을 되살려 주는 도우미가 되고 있습니다.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하여 줄곧 성령을 거역하고 있는 백성과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스테파노는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에 분노가 일어나 결국 스테파노에게 돌을 던져 죽입니다. 그의 순교는 맹목적인 신념에서 비롯된 수동적인 자세도 아니요, 편협한 사고로부터 주어진 물리적 학대에 대한 체념도 아닙니다. 스테파노의 마음을 가득 채우신 성령께서는 오히려 주님을 향한 저들의 분노와 스테파노를 향한 비난을 뛰어넘어 열린 하늘로 그의 시선을 돌리시어 하느님의 오른쪽에 계신 예수님을 보게 하셨던 것입니다.
주님 안에 머물고 싶은 우리 삶뿐만 아니라 이웃과 함께하는 사회를 짓밟으려는 부당한 폭력은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성금요일의 부당한 폭력은 예수님께만 행하여졌던 것이 아니라 첫 교회 공동체의 스테파노에게도 행하여졌습니다. 지금도 주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이러한 악한 힘의 행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네 삶의 하루하루에 성금요일의 부당한 폭력이 허락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악의 힘을 끊어 버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주님께 청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 폭력을 이겨 내도록 주님께서 성금요일 전날 저녁인 성목요일에 성체성사를 세우셨음을 날마다 기억하고 기념해야 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라 하겠습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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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미술 학원에서 모델을 앞에 두고 학생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다 되어서 학생들이 그린 그림을 확인하면 다 똑같을까요? 한 명의 모델을 똑같이 보고서 그렸으니, 똑같은 그림이 학생들의 숫자만큼 나왔을까요?

아니었습니다. 같은 모델이지만 학생들이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에 따라서 다르게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누구는 전신을, 다른 누구는 모델의 부분을 그리는 등 제각각의 그림이 나왔습니다.

똑같은 상황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도 모두 다릅니다. 어느 사람이 길에서 울고 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누구는 힘들어서 울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같이 울면서 함께 합니다. 이상한 사람 취급을 하면서 쳐다만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길에서 울고 있다고 화를 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바라보는 시각과 감정에 따라 모두 다른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바라보는 것은 어떨까요? 이 역시 모두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주님께 대한 내 생각이 정답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 생각은 단지 한 부분만을 표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같은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더라도, 보는 모습이 다르고 느끼는 것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주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 아닙니까?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인 인간의 몸으로는 그분 모두를 완전하게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반대했는지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아픈 사람을 치유해주시고,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또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사람들에게 알려주면서, 하느님과 함께하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빵의 기적을 본 뒤인데도 불구하고,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신의 닫혀 있는 생각의 틀에 주님을 가두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확신을 하니 주님께서 보여 주신 모든 표징을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이 보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과 똑같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주님께 대한 믿음이 모자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을 사는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의 주님께 대한 믿음은 흔들리지 않을까요? 만약 나와 다르다며 이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주님 역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런 습관이 주님께도 그대로 나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절대 배고프지 않으며, 절대 목마르지 않을 영원한 생명의 빵을 주시는 주님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내 생각의 틀에 주님을 가둬서는 안 됩니다.
힘겨운 상황에 처했을 때 부정적인 결정을 내리지 마라. 침울할 때 중요한 결정을 내리지 마라. 폭풍은 지나갈 것이다. 그리고 봄이 올 것이다(로버트 슐러).



더 웃고, 더 사랑하면서 행복한 ‘나’를 만드세요.

웃기가 쉬울까요? 어려울까요? 어렵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가 가장 많이 하던 ‘웃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인이 되면서 이 웃음을 잃어갑니다. 그보다는 인상을 쓰면서 얼굴에 보기 싫은 주름들이 하나둘 늘어갑니다. 왜 웃음이 사라질까요? 그만큼 지급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또 행복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동아일보 조사 결과, 하루에 한 번 웃으면 행복지수가 50.74점이었으나, 여섯 번 이상 웃으면 65.86점에 이른다고 합니다. 사랑 표현도 하루 두 번에서 다섯 번 할 때 행복지수가 61.07점까지 올라갔습니다. 한 번도 안 할 경우는 50.76점에 그쳤습니다.

웃는 것만으로도 또 사랑표현만으로도 나의 행복지수는 올라갑니다.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부정적인 생각들을 간직하다 보니, 웃지도 또 사랑표현도 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는 결국 스스로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결과를 줄 뿐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쭉 해 온 나의 행복을 위한 말과 행동을 어른이 되었다고 멈춰서는 안 됩니다. 더 웃고, 더 사랑하면서, 더 행복한 ‘나’가 되어야 합니다. 

외적인 표징은 내적인 표징을 앞서지 못한다

-전삼용신부-


나폴레옹의 군대가 러시아에 진격했을 때, 어느 날 러시아 병사 한 명을 사로잡게 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에게 자기를 황제로 섬기면 후한 대접을 해 주겠다며 전향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포로된 그 러시아의 병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러시아 황제 폐하 이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나의 충성을 맹세하지 않겠소.”

거절하는 말을 들은 나폴레옹은 화를 내며 부하에게 지시했습니다.

“저 놈에게 거룩한 황제의 표시를 새겨 주어라.”

그러자 한 병사가 달려들더니 그 러시아 병사의 팔에 불 인두로 ‘N’자를 새겼습니다.

“자. 봐라. 이미 네 팔에는 이 나폴레옹의 인(印)이 있느니라.”

이 말을 듣자마자 이 러시아 병사는 옆에 서 있던 프랑스 병사의 칼집에서 칼을 꺼내어 자기의 팔을 뚝 잘라 버렸습니다. 피가 튀기며 하얀 눈밭에 떨어진 자기의 팔을 바라보면서 그는 말했습니다.

“나의 충성은 오직 한 분, 그분에게만 바칠 것이오. 나의 황제 짜르여.”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보고도 또 표징을 요구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외적인 표징만으로는 그 사람을 구원에 이르는 믿음으로 끌어올릴 수 없습니다. 외적인 표징은 내적인 표징을 위한 준비일 뿐입니다. 외적인 표징은 그저 살에 새겨지는 인(印)에 불과합니다. 내면에 새겨진 표징이라야 구원에 이르는 표징이 됩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이때의 믿음은 ‘도움의 은총’을 통해 열매 맺은 믿음입니다. 그러자 태중에 말씀께서 사람이 되셔 잉태되셨습니다. 이때 생기는 믿음은 ‘생명의 은총’을 통해 얻게 되는 믿음입니다. 하느님 자신이 생명의 은총이고 그 생명의 은총을 받도록 마음을 여는 힘이 도움의 은총입니다. 도움의 은총까지 이끄는 표징이 외적인 표징입니다. 그다음엔 내적인 변화를 통해 생명의 믿음이 생기게 해야 합니다. 유다인들은 이 과정을 통과하기를 거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스테파노가 유다인들에게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여러분은 줄곧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사도 7,51)라고 말한 것이 그것입니다. 도움의 은총은 원죄의 원인이 된 자아가 죽을 때 비로소 그 사람 안에서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러나 아직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이들은 믿지 못하는 것이 하느님 탓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합당한 표징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외부에서 일어나는 기적이나 이적은 자신에게 큰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물론 그것으로 도움의 은총을 받아들일 마음이 열리기는 하나 참 구원에 이르려면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자신이 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기 직전 겨울, 어머니와 밤샘 성령 기도회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놀라운 표징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기도회를 주도하는 회장님의 손 방향에 따라 사람들이 차례로 쓰러지고 걷는 동선에 따라 사람들이 줄지어 쓰러졌습니다. 백합의 향기를 맡게 해 주겠다고 했는데 사람들은 그 향기에 취해 탄성을 질렀습니다. 천상의 음악 소리를 들려주겠다고 하니 사람들은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습니다. 병이 치유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방언하고 그것을 해석하는 사람이 일어나 확신 있게 번역하였습니다. 끝나고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천상의 소리는 정말 기가 막혔다고 말했습니다. 저도 놀라웠습니다. 그러나 그런 체험들은 금방 잊혔습니다. 내가 직접 체험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회장님이란 분이 안 좋은 것과 연관되었다는 이상한 소문도 들려왔습니다.


      표징을 보는 것은 이와 같습니다. 외부로부터 오는 표징은 그저 그분께 나의 마음을 열어 들일 힘이 되지만 더는 큰 작용은 하지 못합니다. 내가 자신을 버리고 그분을 받아들여 변하게 될 때 가장 확실하게 믿게 됩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믿음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여 동정의 몸으로 잉태하게 되었을 때 그것보다 더 확실한 표징은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참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지려면 표징을 요구하지 말고 말씀을 받아들여 그대로 해보면 됩니다. 그러면 표징을 몸으로 느끼게 되고 그것이 외적인 표징들을 훨씬 앞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일이 있은 후로 5년 동안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라는 10권짜리 책을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저의 삶의 목표이자 좌우명은 ‘행복’이었습니다. 25살까지는 세상에서의 성공이 행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책을 읽고 나서는 세상을 버리고 주님을 따름이 참 행복일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이것이 도움의 은총이 된 것입니다. 이 도움의 은총으로 이끌기까지 외적인 표징이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책을 통해 오시는 주님의 뜻을 믿고 신학교에 들어갔더니 그 이후로 단 한 순간도 후회한 적이 없었습니다. 조금씩 더 행복해졌기 때문입니다. 이것만큼 저에게 큰 표징은 없습니다. 하늘이 변하고 바다가 갈라지는 표징이 눈앞에 나타난다고 해도 내 안에서 일어난 표징만큼 클 수 없습니다. 외적인 표징을 구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자신 안에서 표징이 일어나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일단 그리스도를 먹고 마셔보십시오. 그러면 의심할 수 없는 표징은 자신 안에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면 더는 외적인 표징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조재형신부-


벨이 울려서 나가보니 문 앞에 지퍼백이 하나 있었습니다. 지퍼백에는 마스크가 2장 있었습니다. 미국에서도 마스크 구하기가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감사드립니다. 뉴저지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신문 배달하는 형제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신문 배달하면서 어르신들이 코로나19 때문에 마트에 가지 못하는 걸 알았습니다. 형제님은 어르신들의 주문을 받아서 신문과 함께 식료품을 배달하였습니다. 처음에는 혼자 했지만 점차 어르신들의 주문이 늘어서 아들과 아내와 함께 어르신들이 원하는 물품을 배달하였다고 합니다. 밤하늘이 아름다운 것은 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별처럼 빛나는 따뜻한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 연방정부는 코로나19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다양한 지원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언어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위해서 한국인 회계사들이 영상을 통해서 도움을 주었습니다. 저도 영상을 보면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알았습니다. 제가 받을 수 있는 정부의 지원은 3가지 였습니다. 하나는 정부의 지원금입니다. 저는 2019년 세금보고를 했기에 해당 된다고 합니다. 두 번째는 재난 경제 위기(economic injury disaster)’ 지원금입니다. 이는 신문사의 회계사가 신청할 수 있다고 합니다. 세 번째는 직원 급여 지원금(paycheck protection program)'입니다. 이는 은행에 가서 신청하면 된다고 합니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동포들에게 영상을 통해서 도움을 주신 회계사님에게 감사드립니다.

 

교통수단의 발전, 무역의 발달, 인터넷은 촘촘한 그물이 되어 지구촌을 하나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불안, 공포, 두려움은 도미노처럼 퍼져나갑니다. 이는 극심한 사재기로 이어지기도합니다. 국경을 봉쇄하고, 외국인의 입국을 금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방법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바이러스는 우리의 불안, 공포 두려움을 타고 퍼지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빨리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연대와 협력 그리고 정보의 공개도 도미노처럼 퍼져나갑니다. 이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협조로 이어집니다. 진단키트를 나누고, 새로운 방법을 나누고, 가진 걸 나누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봄이 오면 눈이 녹기 마련입니다. 따뜻한 마음이 모이면 바이러스도 사라질 겁니다. 이 길만이 최선의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굶주린 사람들을 측은한 마음으로 보셨습니다. 제자들에게 가진 것을 모으라고 하셨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불가능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굶주린 사람 모두가 먹고도 12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어린아이가 가진 것을 기꺼이 내어 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축복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기쁜 마음으로 나누었습니다. 이 이야기에는 불안, 공포, 두려움이 없습니다. 감사, 나눔, 축복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입니다. 나눔, 축복, 감사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풍요로운 결실이 맺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생명의 빵입니다. 나에게로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입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난 하느님의 종들에게 하늘나라의 문을 열어 주셨으니 세례의 은총이 그 안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어 그들이 모든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요한 6,33)

-이영근신부-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보고서 몰려든 군중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라고 말씀하셨는데, 군중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묻자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분을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8)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미게 하시렵니까?”(요한 6,30)라고 표징을 요구 장면으로부터 오늘 <복음>은 시작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요한 6,33)


그렇습니다. 이 빵은 인간이 만든 빵이 아닙니다. 선사되고 주어진 은총의 빵입니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 입니다. 그러니, 이 빵은 더 이상 하늘에만 차려져 있는 빵이 아니며, 이미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 안에 우리 가운데 있는 빵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빵을 이 세상에서 먹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빵은 하늘에 올라가서야 먹게 되는 빵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늘을 살게 하는 빵입니다. 이 세상을 하늘로 만드는 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요한 6,33)


그러니,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위해 먹는 빵이 아니라,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 되어야 합니다. 곧 자신을 세상에 빵으로 내어 주어야 합니다. 자신만이 아니라, 세상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하는 사명으로 주어진 빵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자기 자신을 위한 빛과 소금이 아니라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하듯, 자신을 위한 빵이 아니라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이미 자신이 받아먹은 하늘에서 선사된 빵을 세상에 생명으로 다시 내어놓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생명이 이 세상에서 살아 있게 됩니다. 하여, 하느님의 생명이 이 세상에서 증거 되는 부활의 삶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호수 건너편까지 찾아온 이들이 예수님께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요한 6,34)하고 간청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결코 굶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양식으로 내어놓으십니다. 베네딕도 16세 교종께서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에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이나 고결한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삶의 새로운 시야와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한 사건, 한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분이야말로 우리를 진정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게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말씀이신 이 생명의 빵을 먹어야 할 일입니다.

아모스 예언자는 말합니다.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아모 8,11)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내가 생명의 빵이다.”(요한 6,35)


주님!

부서져 먹히게 하소서!

부서져 먹히는 빵이 되고서야 양식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먹혀 형제들 안에서 사라져버리게 하소서!

먹혀 사라지고서야 생명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영적 목마름으로 허기지면

-반영억신부-


일반적으로 세상의 것은 ‘이것, 저것 다 해봐도 결국은 싫증이 납니다. 물론 취미생활로 한 곳에 투신하기도 하지만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신비롭고 깊어만 집니다. 그러니 세상 것에 매이지 마십시오. 세상 것은 결국 그의 혼을 유혹 할 뿐입니다.’천상 것에 마음을 두고 하느님만을 갈망해 보십시오. 자유를 얻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광야에서 조상들에게 만나를 내려준 분은 모세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만나를 내려주신 분 보다는 만나, 즉 빵에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에게‘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준 것은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하자,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외에는 보이는 게 없는 군중에게 스스로 빵이 되겠다는 일종의 ‘눈높이’식 깨우침을 주시고자 당신을 빵으로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차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생명의 빵이신 그분을 믿어야 합니다. 성녀 체칠리아는“영원을 살기 위해서라면 이 세상에서의 몇 년은 잃어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영원히 살 수 있다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하고 말합니다. 현세생활을 하면서도 마음은 천상의 것을 바라며 영원한 것을 미리 준비하며 투신을 해야 하겠습니다. 농사 준비를 하더라도 가을의 풍요로운 수확을 위해서 봄부터 씨를 뿌리며 온갖 수고와 땀을 흘리는데 영생을 위해서 그만한 대가를 감당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물론 인간의 공로 이전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선물을 주십니다. 영생은 무상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선물을 받을 준비를 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을 내어놓고 비워내야 하며 온전히 내어 맡겨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동의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 하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시고 여인이 그것을 거절 하자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하시고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하셨습니다. 그러자 여인이 말했습니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이리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군중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했듯이 그리고 여인이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하고 간청했듯이 우리도 영원의 빵을, 생명의 물을 갈망해야 하겠습니다. 영적 목마름으로 허기를 느끼면 좋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 허기를 채워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빵이십니다. 과거에 한때 주신 빵이 아니라 지금 내려 주시는 빵입니다. 풍성하게 베풀어 주시는 주님을 믿고 모든 것을 맡기면 주님께서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않게 해 주실 것입니다. 사실 “인간이 마음으로 앞길을 계획하여도 그의 발걸음을 이끄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잠언16,9). 그러므로‘우리의 앞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 몸소 해 주실 것입니다.’빵이 아니라 빵을 주시는 분에게 시선의 초점을 두어야 하고 그분의 말씀에 집중해야 하겠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스승의 가르침에 오직 순명할 따름이요 자기의 주견과 고집을 세우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하는 자리에 세상 걱정만 가득해서 도무지 예수님께서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사실 우리 신앙의 최대 걸림돌은 바로 우리 자신일 수 있습니다. 믿음 안에서 생명의 빵, 생명의 물을 희망하는 오늘을 축복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생명의 빵 

-송영진신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요한 6,32-33).”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라는 말씀은,
아무리 위대한 예언자라도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거나 주지 않을 권한은 하느님만의 권한입니다.
(지금의 인간 세상을 보면, 사람을 신격화하는 일도 많고,
하느님이 아닌 것들을 하느님으로 떠받드는 일도 많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 해도 그 ‘사람’을 하느님처럼 떠받드는 것은
신성모독죄이고, 우상숭배죄입니다.
이것은 사이비 종교나 이단 종파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어떤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를 신으로 떠받드는 일이 너무 흔해서,
그런 일들에 대해서 무감각해질 정도인데, 그런 모습들을 보면,
세상이 온통 우상숭배와 신성모독으로 넘쳐난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냥 재미삼아 하는 일인데, 뭘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는가?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일과 우상숭배는
재미삼아서 해도 되는 일도 아니고, 농담으로 해도 되는 일도 아닙니다.
자기 부모의 이름은 함부로 부르지 않으면서
하느님의 이름은 왜 그렇게 함부로 부르는가?)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거나 주지 않을 권한은 하느님만의 권한이라는 말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 10,28).”
(이 말씀을,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의 멸망을 두려워하여라.”로,
조금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육신의 생명은 잠깐 스쳐 지나가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영혼의 생명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면, 영원한 것입니다.
물론 육신의 죽음을 무서워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무서워하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닌데, 우리는 그 무서움을
극복하고, 죽음 너머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완전한 믿음을 갖는 단계에 도달하면,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순교자들은 바로 그런 단계에 도달한 분들입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만이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고, 그 생명은 ‘참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영원한 생명’은
단순히 안 죽고 영원히 사는 것만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만일에 지금의 인간 세상이 아무것도 바뀌지 않고, 또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나 환경이나 여건에 아무런 변화도 없는 채로, 그저 안 죽고 영원히 살기만
한다면 그것은 아주 끔찍한 지옥과 같을 것이고,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상태가 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인간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하느님 나라’에서,
완전하고 참되고 영원한 평화와 안식과 행복을 누리면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원한다면
나를 믿어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 라는 뜻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원천은 하느님이신데,
하느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권한을 예수님께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원한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같은 뜻의 말씀을 표현만 바꿔서 반복하신
말씀인데,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배고픔’과 ‘목마름’은
누구나 겪는 생로병사의 고통을 상징하는 말로 해석됩니다.)
이 말씀은, 마르타에게 하신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26).”

우리가 전하고 있는 예수님 말씀에 대해서, 또는 예수님 말씀을 믿고 있는 우리의
믿음에 대해서, “영원한 생명을 증명할 수 있는가? 증거가 있는가?” 라고
시비를 걸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사실 ‘영원한 생명’ 자체는 증명하지 못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하느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또 ‘영원’이라는 시간 자체를 증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영원’이라는 시간을 증명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어떻든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영원 속으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영원을 증명할 수도 없고, 영원을 알 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인간의 생명과 죽음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증언’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실 때 그것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사람들의 증언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그 증언들을 믿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의 말씀에 관한 예수님 말씀도 믿고 있습니다.
(믿음은 논리적인 설명이 아니라 ‘온 삶’을 걸고 하는 결단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유를 내세우면서 안 믿는 것은 그들의 자유입니다.
믿는 우리는 믿기 때문에 우리 인생 전체를 바쳤습니다.
나중에 누가 어떻게 될지는 그때가 되면 알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 기록되어 있는 ‘생명의 빵’에 관한 논쟁은
어떤 이론에 관한 논쟁이 아니라, 믿을 것인가? 안 믿을 것인가? 에 관한
선택과 결단에 관한 일입니다.
안 믿으려고 한 사람들은 예수님 말씀이 이해되지 않아서 못 믿겠다고
불평했지만, 예수님 말씀이 어려워서, 또는 증명할 수 없는 허황한 이론이어서
그들이 못 믿은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는 일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안 믿은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달라고 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안 주시니까,
또 자기들이 원하지도 않는 것을 주겠다는 말씀만 하시니까,
예수님 말씀을 안 들으려고 했고, 안 믿은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빵.

 -조욱현신부-


복음: 요한 6,30-35: 하느님께서 주시는 빵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29)이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하시자, 군중들은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30)하고 말한다. 그러면서 모세의 이야기를 한다. 군중들은 모세가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다가 백성들을 먹였다고 한다. 빵의 기적을 보았지만 그것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다른 기적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의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31)고 한다.

 

유대인들은 모세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킨 위대한 구원자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께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라면, 그것을 증명해 보이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즉 모세보다 더 위대한 기적을 해보라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 아직도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먹이신 기적이 하느님께로부터 온 그분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일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빵에 대해 말씀하신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32) 그 말씀을 듣자 그들은 선생님, 그 빵을 저희에게 주십시오.”라고 한다. 그들은 아직도 그 빵을 우리가 먹는 빵으로 생각하고 있다. 아직도 식욕을 채우려 그분께 달려간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인도하시며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33) 이 빵은 바로 그리스도의 몸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기적을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것을 행하셨다. 그리고 광야에서 빵의 기적을 일으키셨다. 그분은 당신의 몸과 피를 그들에게 주시기 전에 그들의 입을 당신의 빵과 포도주에 익숙하게 하시려 하셨다. 그들에게 당신의 살아 있는 몸과 피를 충만히 누리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썩어 없어질 빵과 포도주를 충분히 맛보도록 허락하신 것이다. 성체성사라고 하는 최고의 선물을 주시려고 작은 것들을 공짜로 주셨다. 빵과 포도주의 기적의 의미를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시니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생명의 빵이시다.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33)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기도는 그리스도 안에 영원히 있으면서 그분의 몸과 떨어지지 않기를 청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유일한 양식으로서의 빵을 청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확실히 배불리 먹이고 완전하게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을 선택하여야 한다. 하느님의 외아들이야말로 아버지 하느님께서 주신 참된 만나,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시다.(베들레헴: 빵의 집)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35)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성인은 이렇게 말했다. “제가 바라는 것은 하느님의 빵, 곧 다윗의 후손이신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피, 곧 썩어 없어지지 않을 사랑을 음료로 마시기를 원합니다.”(로마 7) 이 빵은 그분의 신성을 가리킨다. 성찬례의 빵이 거기에 내리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빵이 되듯이 이 신성은 말씀이신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이다. 그래서 이 빵은 삶 전체를 영원한 생명으로 바꾸어 놓을 빵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풍요로운 보물이시다. 그분의 빵이 풍요롭기 때문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배고픔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사도들에게 그 빵을 주셨고(마태 15,36 참조), 오늘날에는 당신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주신다. 그분은 사제로서 매일 당신의 말씀으로 그것을 축성하시기 때문이다. 이 빵은 그래서 신자들의 양식이 되었다. 이 빵으로 참 생명을 약속하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이 세상을 살아가도록 도우심을 청하자.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요한 6, 33)

-한상우신부-

고된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들 삶에
생명의 빵이
있습니다.

생명의 빵이
있기에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생명에서
생명이
탄생합니다.

살리시는
생명이 생명을
부르십니다.

생명을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생명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생명입니다.

생명의 빵 앞에서
생명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생명의 자녀임을
깨닫게 됩니다.

생명을 내주시는
사랑의 빵으로
우리가 살아갑니다.

생명의
빵이 있기에
우리가 있음을
기억하는
생명의 날 되십시오.

생명이 있기에
연두빛 세상을
만날 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 안에는 예수님께 올가미가 될 계시들이 매우 담대하게 선포됩니다.

"모세가 아니다 ... 내 아버지시다"(요한 6,32).

이스라엘은 긴 광야살이에서 조상들의 목숨을 부지하게 해 준 만나에 대해 기억합니다. 그런데 사십 년을 한결같이 만나로 백성을 먹이신 하느님의 충실한 사랑보다 모세의 능력과 권위에 기대는 경향이 짙었지요. 이는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에 집착하느라 율법 안에 깃든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당시 이스라엘의 모습과도 일치합니다.

"내 아버지시다."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신 기적을 베푸신 분, 즉 하느님이 당신의 아버지시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다인들이 궁금해하면서도 듣고 싶지 않았던 가장 민감한 부분이었을 겁니다. 예수님은 다른 설명 없이 본질로 성큼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이 진실이 곧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 것입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예수님께서 당신을 빵이라 하십니다. 생명을 유지하고 몸과 마음을 흡족하게 해주는 빵은 사람에게 필수불가결한 양식을 가리킵니다. 유다인들은 당신을 먹으라고 내 주신 사랑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문자적 어휘에 발이 묶여, 이 역시 불편해 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스테파노의 죽음이 전해집니다.

"그들은 의로우신 분께서 오시리라고 예고한 이들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러분은 그 의로우신 분을 배신하고 죽였습니다"(사도 7,52).

이스라엘 역사에서 참 예언자들은 그들이 전하는 말씀의 진리 때문에 박해와 죽임을 당해왔지요. 이제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은 그 진리이신 분을 죽입니다. 아예 진리의 숨을 끊어버리려는 악의 행태입니다. 이 폭력의 연속성을 짚는 스테파노가 유다인들의 눈에 고울 리 없겠지요.

"그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았다"(사도 7,57).

그들이 보인 반응은 참으로 많은 상징을 담고 있습니다. "큰 소리"를 지름으로써 말씀을 끊어버리고 공명마저 막아버린 것이지요. 또 "귀를 막음"으로써 더 이상 듣지 않겠다는 심중을 매우 강하게 표출합니다. 말씀을 듣지 않고 말씀이신 분을 거부하는 의지적 행동인 셈이지요.

예수님은 온갖 위협과 음모 앞에서 당당히 진리를 밝히십니다. 스테파노도 주저없이 예수님의 길을 따르지요. 제 것을 섞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기에 그렇습니다. 생명의 빵이신 주님으로 속이 꽉 차고 영혼이 충만하기에 이미 죽음 너머의 영원을 누리고 있는 까닭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이 부활시기에 주님께서 우리를 다시 세우십니다. 담대하게 진리를 선포하고 외치라고 부르십니다. 기쁨으로, 사랑으로 흘러넘치는 영원한 생명, 부활은 가슴 속에 가둬둘 수 없는 진실입니다. 그러나 믿지않는 이들에겐 너무도 큰 불편한 진실이랍니다.

미움과 분노를 단칼에  
-김찬선신부-

"그는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았다."


살다 보면 꼴 보기 싫고, 보기만 해도 화가 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데 정말로 미치겠는 것이 꼴 보기 싫은데도 그 꼴을 보며
계속 그 인간 때문에 화를 내고 있는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눈을 떼지 못하는 두 가지 경우가 있는데
그가 너무도 아름답고 그래서 내가 너무도 사랑하여 눈을 떼지 못할 때와
앞서봤듯이 꼴 보기 싫고 그래서 너무 얄미운데도 눈을 떼지 못할 때입니다.
사랑할 때도 눈을 떼지 못하고 미워할 때도 눈을 떼지 못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미움에 분노까지 더해지면 눈을 더더욱 떼지 못합니다.
그것은 악감정 두 개가 숫자적으로 합쳐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분노란 감정이 본래 타오르는 불처럼 맹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움이 음의 감정 곧 냉랭한 감정이라면
분노는 양의 감정 곧 뜨거운 감정으로서
도저히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는 감정이지요.

그리고 분노/화는 화가 치밀어오른다고 하는 것처럼 올라오는 것이고,
화를 누를 수 없었다고 하는 것처럼 누르는데도 밖으로까지 터져 나오는데
그것이 폭력적으로 터져 나옵니다.
화가 나면 마구 부수거나 때리거나 죽이거나 하는 것이 다 이 때문입니다.

게다가 미움이나 분노 모두 자기 중심성에서 비롯된 악감정이지만
미움이 수동적인 데 비해 분노는 공세적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미움은 바라는 것을 속으로만 바랄 뿐 요구치 않고 그래서
충족시키지 않을 때도 혼자서 새초롬하니 또는 꽁하니 미워할 뿐이지만
분노는 바라는 것을 충족시키라고 요구하고 요구대로 되거나 하지 않으면
앞서 말한 대로 분노를 억누를 수 없어 겉으로 터트립니다.

그렇잖아요? 예를 들어 어린애한테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하면 화가 나고,
여러 번 얘기했는데도 그러면 더 화가 나지요.

아무튼 오늘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인 유대인들은 화가 치밀대로 치밀어
스테파노가 하늘을 보라고 하지만 하늘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스테파노에게 눈이 꽂히어 결국 죽이고 맙니다.

관상이 실패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 세상을 너무 사랑해도 하늘 관상이 어렵지만
누구를 너무 미워하고 화로 가득 차도 어렵습니다.

사실은 시작부터 실패하게 되어있었습니다.
애초에 하느님 안에서 그리고 하느님의 눈으로 형제를 봤으면
미워하지도 않고 분노하지도 않았을 텐데 하느님 관상 없이
형제를 봤기에 빚어진 것이 미움과 분노이고,
그렇게 해서 생긴 악감정의 상태에서 눈을 하늘로 돌린다는 것은
시위를 떠난 화살을 다시 화살통에 주워 담으려는 것처럼 어렵습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이, 특히 오랫동안 관상기도라는 것을 해온
저와 같은 수도자가 이까짓 부정적인 감정 하나 때문에
하늘 관상을 할 수 없다니 이 얼마나 한심하고 불쌍한 노릇입니까?

그렇지만 이것을 깨달았다면 이제라도 이제까지 이어져 온
미움과 분노의 사슬을 단칼에 끊고 다시 시작하고 새롭게 시작해야 합니다.
쉬운 것이 아니지만 이 어리석음을 크게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그 깨달음이
단칼이 되어 과거를 끊어버리고 다시 시작하고 새로 시작하게 할 것입니다.

곧 이 깨달음으로 인해 사람 앞에 서게 하는 육의 영은 이제 신물이 나
몰아내고 주님의 영을 영접함으로 성녀 클라라가 얘기하듯이
하느님 앞에 자신을 위치시키게 될 것입니다.

클라라는 'Pone(위치시키라)'라는 동사를 쓰며 이렇게 권고합니다.
"그대의 정신을 영원의 거울 안에 놓으십시오(Pone).
그대의 영혼을 영광의 광채 안에 두십시오(Pone).
그대의 마음을 하느님 본질의 형상 안에 두고(Pone)
관상을 통하여 그대 자신 전부를 그분 신성의 모습으로 변화시키십시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4월 17일 부활 제3주간 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6,3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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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일단 그리스도를 먹고 마셔보십시오. 그러면 의심할 수 없는 표징은 자신 안에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면 더는 외적인 표징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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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빵은 하늘에 올라가서야 먹게 되는 빵이 아니라이 세상에서 하늘을 살게 하는 빵입니다이 세상을 하늘로 만드는 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요한 6,33)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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