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4월 27일 부활 제3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20. 4. 26. 19:01

2020 4월 27일 부활 제3주간 월요일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요한 6,22-29)


Do not work for food that perishes
but for the food that endures for eternal life,



2020년 4월 27일 부활 제3주간 월요일 매일미사_허홍석 에제키엘 신부 집전

https://youtu.be/XQB-1_TvkB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와 복음은 그리 예쁠 것도 없는 일상의 나그네살이에 지친 우리에게 두 개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선 독서를 통하여 우리는 교회의 첫 순교자인 스테파노가 걸었던 길을 따라가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스테파노의 신앙 고백은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게 하였습니다. 반면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빵을 많게 하신 표징을 보이신 뒤 곧바로 이어진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가르침을 통해서 어떻게 당신께서 생명의 빵이신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쉴 새 없이 주어지는 일상의 소소한 일들과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그 일들의 좌절, 타인의 무시로 얻은 상처, 그리고 만족할 수 없는 자기 연민 속에서, 부활의 기쁨을 계속 간직하기에는 우리의 인내심이 턱없이 부족하기만 합니다. 바로 이때에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길이 남을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을 굳게 믿으며, 죽음 앞에서도 천사의 얼굴을 보인 스테파노의 믿음을 바라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기쁘게 살아가는 부활의 길을 묻는 제자들의 질문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무거운 멍에로 비틀거리며 삶의 문제를 되새기기보다는 미처 깨닫지 못한 삶의 축복을 헤아리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의 일을 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믿는 것입니다. 스테파노와 같은 믿음으로 삶의 문제에도 편안히 웃을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주신 생명의 빵 때문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작년 말에 양치질하다가 치아 하나가 부러졌습니다. 누구보다도 튼튼한 치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글쎄 양치를 하다가 부러진 것입니다. 어이없기도 했고 동시에 화도 났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병원에 갔더니 이를 뽑은 뒤에 임플란트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제는 서글픈 마음도 생깁니다. 임플란트하는 선배 신부님들을 보면서 ‘나는 치아 관리를 잘해서 임플란트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했는데, 저 역시 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이런 마음을 어느 선배 신부님께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50년 넘게 썼으면 오래 쓴 거지. 가전제품도 10년 쓰면 오래 썼다고 하잖아. 그 다섯 배를 사용했는데 뭐가 불만이야?”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고, 그동안 이상 없이 자신의 역할을 했던 치아에 감사의 마음도 갖게 됩니다.

올 초, 임플란트 수술을 하는데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이 걸리고 힘들 것이라고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전혀 아프지도 않고, 30분 정도에 끝났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치아 뼈가 튼튼해서 빨리 끝났고 그래서 그렇게 아프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역시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조금 더 다르게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불평하고 원망할 것이 많은 세상처럼 보이지만, 다르게 바라보면 감사하고 기쁜 것들도 많은 생각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군중들이 예수님을 쫓아서 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무엇을 얻을 생각에 그분을 찾고 있었던 것이지요. 즉, 그들의 마음은 육체의 양식에만 쏠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덧없는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양식을 추구하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육체의 양식만을 바라보면 불평불만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지만, 영원한 양식만을 바라보면 감사하고 기쁜 것들만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영원한 양식을 얻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군중은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분명히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 인정하신 아들을 믿는데 그분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하겠습니까? 그분이 원하시고 또 말씀하신 것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기 위해서 노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통해 하느님의 일을 하게 되고, 이렇게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만이 육체의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양식을 하느님 나라 안에서 먹을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을 무조건 믿어야 합니다.
절대 포기하지 마라. 장벽에 부딪히거든, 그것이 절실함을 나에게 물어보는 장치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지 마라(랜디 포시).



불편한 일을 하기.

사람들은 편안함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 삶에 편안함을 줄 수 있는 것을 마련하려고 꽤 많은 시간을 소비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편안함이 반드시 좋은 것일까요?

종이에 직접 글을 쓰는 것은 꽤 불편합니다. 저의 경우는 주로 만년필로 글을 쓰는데, 이 만년필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으면 펜촉이 굳어버려서 상하게 됩니다. 따라서 꾸준히 써야 합니다. 컴퓨터로 타이핑하는 것이 훨씬 편한 것은 분명합니다. 직접 글을 쓰는 것보다 빠르고, 프린트하면 저의 악필을 가려줄 멋진 글씨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글의 깊이가 없어집니다.

제 침대에는 매트리스가 없습니다. 푹신한 매트리스가 편안함을 주지만, 허리가 좋지 않은 저로서는 순간의 편안함이 오히려 독이 됩니다. 그래서 매트리스 없이 딱딱한 나무 위에서 잠을 잡니다.

경제, 경영지 ‘오너 매거진’의 발행인 크리스 브로건은 하루에 한가지씩 불편한 일을 했다고 합니다. 물건을 팔기 위해 인터넷에 글을 올리고, 편하지 않은 사람과 통화도 했습니다. 이렇게 불편한 일을 하면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의도적으로 편안함을 깨는 행동이 내 인생의 모든 것을 바꾸었다.”

주님 따르는 것도 분명히 불편함을 줍니다. 그러나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커다란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믿음이 양식이다

-전삼용신부-


      방관자효과(bystander effect)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위에 사람들이 많을수록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지 않게 되는 현상을 뜻하는 심리학 용어입니다. ‘제노비스 신드롬’(Genovese Syndrome)이라고도 하고 구경꾼 효과라고도 말합니다. 1964년 키티 제노비스(Kitty Genovess)라는 여인이 뉴욕의 자기 집 근처에서 새벽 3시 30분경 30분 동안 반항하며 강도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집 주변의 40가구에서 그 소리를 들었지만 누구도 그녀를 구하거나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할 것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라테인(Latane)과 로빈(Robin)이라는 심리학자가 이와 관련된 실험을 했습니다. 대학생들을 실험 명목으로 불러 대기실에서 기다리게 했습니다. 방을 여럿 나누어서, 어떤 사람들은 혼자 있게 하고, 어떤 사람들은 여럿이 같이 있게 했습니다. 그때 갑자기 문틈으로 연기가 새어들게 했습니다. 혼자서 기다리던 사람들은 75%가 2분 이내에 알렸고, 여럿이서 기다리던 사람들은 6분 이내에 불과 13%만 알렸다고 합니다. 이처럼 여럿이 있으면 서로 책임을 미루는 ‘책임감의 분산’ 현상이 일어납니다.

      이런 방관자 효과, 혹은 책임감 분산이 일어나는 이유는 ‘내가 아니어도 돼!’라는 생각이 스며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안 하면 누가 하겠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2001년 일본 신오쿠역 퇴근길로 인파가 가득 찬 지하철에서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려다 숨진 한국인 유학생 이수현씨입니다. 이 일이 있은 후로 ‘이수현 신도롬’이 일어났습니다. 한국인이 일본인을 구하려고 목숨을 바쳤는데 자신들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4명이 구했고, 6명, 9명이 뛰어내려 구했다는 기사가 수도 없이 나왔습니다.

      살아가다 보면 가끔은 무기력증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이 일을 내가 왜 해야 하는지, 저 사람과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등의 생각에 빠집니다. 이렇게 무기력증에 빠지는 이유는 내가 누구인지 명확히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소라면 일을 시키는 주인 앞에서 무기력증에 빠질 수 없습니다.

      제가 무기력증에 시달릴 때는 대학을 계속 다녀야 하는가, 아니면 신학교에 들어가야 하는가 고민할 때였습니다. 그 1년이 가장 힘들었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때였습니다. 그러나 일단 사제가 되기로 하고 주님께서 불러주셨음을 믿게 되니까 다시 힘이 났습니다.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의 주인공은 3살 때 정체성의 혼란을 겪습니다. 아버지가 있지만, 어머니가 바람을 피워 자신을 낳은 것을 알아버린 것입니다. 그는 이도 저도 싫어서 사다리에서 떨어져 스스로 자라는 것을 멈추고 그저 세상을 심판하는 일에 몰두합니다. 그런 무기력감으로 가족들에게 주는 것은 피해밖에 없었습니다.

      카인은 “내가 동생을 돌보는 사람입니까?”라고 하느님께 대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너희가 그들의 이웃이 되어주어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고통받은 이웃의 방관자가 되는 이유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정체성의 혼란은 자신의 부모가 누구인지 헛갈리는 데서 옵니다. 부모가 명확해야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압니다. 밥만 먹어서는 힘이 나지 않습니다. 밥을 주는 이가 부모임을 믿어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알고 힘도 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것이기에 하느님께서 우리 아버지이심을 명확히 믿을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주는 것들은 이제 ‘표징’이 됩니다.

      따라서 인생을 힘있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에너지를 아버지의 사랑을 믿으려고 하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이 믿음만이 살아갈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만 얻으려며 살다가는 점점 자신을 잃어가고 그러면 그런 양식들에 파묻혀 무기력과 우울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우리의 모든 에너지를 믿는 데 사용해야 하는 이유가 그것이 나의 삶의 양식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주 겉으로는 전혀 그럴 필요가 없어 보이는 젊고 예쁘고 돈 많고 명예 있는 이들이 자살하는 경우를 봅니다. 그들은 모든 에너지를 육적인 양식을 얻는 데 사용했기 때문에 그런 결말을 맞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육적 양식과 영적 양식을 대비시키며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당신을 찾은 것은 표징을 보아서가 아니라 배를 채웠기 때문이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구하지 말고 표징을 통해 당신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양식을 먹는 이유는 힘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양식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입니다. 믿음이 증가하면 정체성이 확고해지고 그러면 삶의 의욕도 증가합니다.

-조재형신부-


사순시기가 시작되면서 미사가 중단되었습니다. 부활이 되면 당연히 중단된 미사가 시작될 줄 알았습니다. 40일이면 정화의 시간으로 충분할 줄 알았습니다. 40일이면 현대의 과학과 의술이 충분히 바이러스를 이겨낼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부활의 시간이 되었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미사가 없는 신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은 예배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저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네는 예배를 드려야 하는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아,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전례와 형식이 갖춰진 미사가 있습니다. 성전, 제단, 성가, 강론, 영성체, 친교로 이루어진 미사가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사마리아 여인이 되어서 또다시 묻는 건 아닌지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미사를 드려야 하나요? 전례와 형식을 갖출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전에 함께 모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또 다른 형태의 미사와 전례(典禮)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경읽기, 묵상, 애덕의 실천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방송을 통한 미사참례를 권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하느님은 영이시라 이야기하십니다. 그러기에 영은 장소와 형식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리와 영에 충만하다면 비록 전례와 형식을 갖추지 못할지라도, 공적인 미사에 참례하지 못할지라도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쁨을 전할 수 있습니다. 성인과 성녀 중에는 전례와 형식, 미사에 참례하지 못하신 분들이 많습니다. 박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진리와 영안에서 하느님과 일치하였습니다.

 

예전에는 일정표의 칸마다 빼곡하게 적혀있었습니다. 강의, 면담, 미사, 모임, 여행, 식사, 봉성체, 홍보, 피정, 운동으로 일정표는 제가 해야 할 일을 알려주었습니다. 하루에 몇 가지 일을 했던 적도 있습니다. 오전에는 길음동 수녀원, 오후에는 해방촌 성당, 저녁에는 안양 라자로 마을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몸은 피곤했지만 보람 있었습니다. 부족한 저를 불러주심에 감사드렸습니다. 텅 빈 일정표를 봅니다. 사순시기에 예정되었던 특강과 홍보가 모두 취소되었습니다. 부활 후에 예정되었던 성지순례가 취소되었습니다.

 

텅 빈 일정표를 보면서 빈 무덤을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요청과 요구에 의해서 일정표를 채웠습니다. 지금은 스스로 일정표를 채워야합니다. 십자군 이야기, 로마제국 흥망사를 읽어보려 합니다. 바쁜 일정표에서는 엄두를 내지 못했던 책입니다. 요한복음 강의록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밤이면 핸드폰을 충전하듯이, 텅 빈 일정표에 진리와 영을 채우고 싶습니다. 외부로 향했던 시선과 생각을 성찰의 시간으로 만드는 것도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곧 없어질 양식을 위해서 살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 사람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을 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나를 믿으면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삶, 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목마른 사람에게 한모금의 물이 되어 주는 것, 지치고 힘든 사람에게 따뜻한 위로의 쉼터가 되어 주는 것, 가난한 이웃에게 빵이 되어 주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을 믿는 것이고, 이것이 영원한 생명을 위한 삶입니다. 이것이 진리와 영안에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러나 그 길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오늘 스테파노의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길은 박해를 받기도 하고, 그 길은 모욕을 받기도하고, 그 길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길입니다. 곧 없어질 음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8

-이영근신부-


우리의 관심사 중의 하나는 먹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맛 집을 찾습니다. 맛이 좋은 음식, 몸에 좋은 음식을 찾습니다. 한편, 일용할 양식마저 없어 죽어가는 이들도 많습니다. 양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양식을 가진 자들이 나누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밥그릇만 키워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는 오늘 대체 어떤 양식에 허기져 있는가?

그리고 어떤 양식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오늘 <복음>에서 호수를 건너 가파르나움으로 몰려 온 군중은 대체 무엇을 찾아 온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은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요한 6,25)


그렇습니다. 군중들은 이미 예수님을 만났고 빵을 배불리 먹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배고팠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현세적 음식과 자신들의 이익에만 매달릴 뿐, 참된 생명인 표징을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요한 6,27)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루를 사는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우리 주님으로부터 얻습니다. 바로 당신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이란 무엇인가?


여기에 나오는 양식(βροσισ)이란 단어는 사마리아의 우물가에서 사용되었던 단어입니다. 곧 마을에서 돌아온 제자들이 예수님께 무엇을 좀 잡수십시오.”라고 하였을 때,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다.”(요한 4,34)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고 하느님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참된 양식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군중들이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요한 6,28) 하고 질문하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8)


우리는 여기에서 아주 익숙한 단어인 하느님의 일란 단어를 만납니다. 여기서, (εργα)이란 단어는 음식의 소화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마치 양식은 눈앞에 두고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입에 넣고 잘 씹어 삼켜야만 비로소 양식이 되듯,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님과 그분의 뜻을 믿고 받아들여 우리 안에서 흡수하고 실행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양식을 소화시키는 일은 그 양식을 믿고 받아먹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 진정 이것이야말로 양식을 얻는 하느님의 일인 것입니다. 믿는 일, 이것이야말로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소화시켜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는 일안에서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해 나갑니다. 그래서 믿음은 행위가 되고 실현이 됩니다. 아멘.


-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요한 6,27)


주님!

당신이 주시는 양식을 눈앞에 두고 바라만 보고 있지 않게 하소서.

입에 넣고서 잘 씹어 삼키게 하소서.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완성하는 것이 제 양식이 되게 하소서.

말씀을 이루는 일, 바로 그 일을 하게 하소서.

사랑하는 일, 바로 그 일을 하게 하소서. 아멘.


생명의 양식을 찾아라.

-조욱현신부-

 

복음: 요한 6,22-29: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 힘쓰지 말고

오천 명을 배부르게 하신 기적을 본 백성들이 예수님을 억지로라도 왕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피하셨다. 그리고 나중에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과 합류하셨다. 그러나 군중들은 제자들을 먼저 떠나보낸 예수께서 혼자 남으신 것을 알고 이튿날 다시 예수님을 그 곳에서 찾으려 하였다. 그러나 찾지 못하고 카파르나움으로 가서야 예수님을 찾아보고는 놀란다.

 

당신을 찾아온 군중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26) 이 말씀은 너희는 영이 아니라 육을 만족시키기 위해 나를 찾는다.’는 뜻이다. 많은 사람들이 현세에서 이익을 얻어 보려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고 있다. 어떤 사람은 사업이 난관에 부딪치면 신부들에게 기도를 청하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느님을 원망하는 사람들이 있다. 교회는 이런 사람들로 가득하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27) 신앙인이라고 하면서도 예수님만을 원해 그분을 찾는 이는 드물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다른 것을 위해 나를 찾는다. 나를 원해 나를 찾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즉 당신 자신이 양식이시라는 진리를 암시하신다. 빵의 기적을 통하여 길이 남아 영혼을 기르는 음식을 찾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너희는 즉시 덧없는 음식을 찾고 있다. 너희는 육체 대신 영을 살지게 하는 음식으로 인도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27) 하느님의 모습이신 아드님은 하느님이시다. 이분이 그 양식을 주실 것이다. 이제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 은총에 의해 하느님과 닮은 모습으로 새로 모양 지어진다. 이렇게 우리는 그분 아들과 같은 모습이 되는 은총을 받는다. 빵의 기적의 의미는 우리의 참 생명을 위한 표징으로 보여주신 것이었는데 그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계속 엉뚱한 것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28) 하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29)라고 하셨다.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길이 남을 양식을 얻고자 힘써야 한다. 이 양식을 우리에게 주는 이는 아버지께서 인정하신 아드님이시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며, 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아버지께서 보내신 아드님을 믿어야 한다.

 

아버지께서 보내신 이는 누군가? 아버지께서 인정하신 분이시다. 아버지께서 인정하신 이는 누구인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주시는 사람의 아들이다.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 우리의 믿음을 주님 안에서 자랑으로 여겨야(1코린 1,31 참조) 할 것이다. 믿음으로 우리는 아드님을 닮아가야 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속에 하느님을 찾는 굶주림을 주셨다. 이것은 세상의 음식이나 현세적인 욕망을 채워주는 그러한 만족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느님이 주시는 영원한 삶을 통해서만 만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현세적인 만족을 넘어 그 이상의 것을, 즉 참된 생명, 구원을 베푸시는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라고 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더 깊은 뜻을 알아듣고 실천해 나아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청하자.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 27)

-한상우신부-

영원한 생명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다시 살리시는
주님께서 다시
살아갈 힘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당신 생명을
떼어 우리에게
주십니다.

영원한 생명이
내려오시어
말씀이 되시고
빵이 되십니다.

생명을 생명답게
하시며 생명의 길을
보여주십니다.

썩어 없어질
생명이 아닙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닙니다.

생명은
소유하는 것이
아닌 새로워지는
사랑에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영원한 생명을
향하게 합니다.

두려움과
어둠을 비추는
생명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이 생명을
사람이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받아 모시는
감사의 날 되십시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생명의 빵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요한 6,25)

군중이 예수님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됩니다.
배를 타고 빵의 기적이 있던 곳에 왔다가 거기에 주님이 계시지 않자 카파르나움까지 가서 드디어 예수님을 뵙지요. 매우 적극적이고 열성가득한 모습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기 위해 시간과 수고, 노력을 아끼지 않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요한 6,26).

군중이 당신을 찾는 이유를 잘 아시는 예수님의 지적은 그들을 부끄럽게 하시려는 게 아니라 표징의 진정한 의미에로 그들의 눈을 뜨게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사실 "빵"은 당장 물리적으로 배를 곯는 이들에게는 실질적 양식이 되겠지만, 좀 더 나은 삶을 바라는 이들에게는 재물이나 명예, 권력까지도 의미할 겁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

주님을 그토록 간절히 찾는 이유가 썩어 없어질 세속의 환영을 얻기 위함이라면 참 허무하지요. 인간에게 필요한 진정한 양식은 영원까지 이어지는 행복인데 말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적대자들 앞에 선 스테파노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사도 6,10).

스테파노는 은총과 능력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그가 사심이나 탐욕으로 세속의 양식을 좇는 이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보인"(사도 6,15) 것도 이를 증명합니다. 부와 명예의 바벨탑을 아슬아슬 쌓는 자의 얼굴에서는 찾기 힘든 빛입니다.

"권세가들 모여 앉아 저를 헐뜯어도 이 종은 당신 법령을 묵상하나이다"(화답송).

힘 있는 자들이 함부로 자신을 도마 위에 놓고 온갖 모함과 음모로 난도질하는 순간에도 평정을 유치하며 말씀에 머무를 수 있다면 엄청난 내공이 아닐 수 없겠지요. 평소 사람의 평판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꿋꿋이 진리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평정심일 겁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영성체송).

세상의 양식과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다르듯, 세상이 주는 평화와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는 다릅니다. 대개의 사람들이 세상 양식으로 만족스런 상태를 평화라 착각하지만, 어떤 환난과 고통 앞에서도 우리를 지혜와 성령으로 굳건히 하며 천사의 얼굴처럼 순수하게 만드는 힘은 영원한 양식에서 옵니다. 감사하게도 지금 우리에게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의 양식은 말씀과 성체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이 말씀 묵상을 읽는 벗님은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찾는 분입니다. 아니라면 재미나고 감동적인 글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굳이 시간을 내어 여기까지 두드리셨을 리 없겠지요. 벗님은 누구를 찾아서 오셨습니까? 그리고 주님께서 무엇을 주시기를 원하시나요? 주님을 찾아 헤매다 만난 군중이 되어 이 질문에 깊이깊이 머무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지만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43203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4월 16일 부활 제3주간 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요한 6,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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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인은 “내가 동생을 돌보는 사람입니까?”라고 하느님께 대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너희가 그들의 이웃이 되어주어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고통받은 이웃의 방관자가 되는 이유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정체성의 혼란은 자신의 부모가 누구인지 헛갈리는 데서 옵니다. 부모가 명확해야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압니다. 밥만 먹어서는 힘이 나지 않습니다. 밥을 주는 이가 부모임을 믿어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알고 힘도 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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