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25일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2020년 4월 25일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루살렘 출신으로,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 사도가 선교 여행을 할 때 동행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사도 12,25; 13,5.13; 15,37-39; 콜로 4,10 참조). 본디 이름이 ‘요한 마르코’(사도 12,12.25 참조)인 그는 또한 베드로 사도의 제자로 일했으며(1베드 5,13), 주로 안티오키아와 키프로스, 로마에서 선교 활동을 펼쳤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기원후 64년 네로 황제의 박해가 있고 난 뒤인 65년에서 70년 사이에 주로 베드로 사도의 가르침을 기초로 삼아 로마에서 「마르코 복음서」를 기술하였다. 이 복음서가 네 복음서 가운데 가장 먼저 저술된 것이다.
★★★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코 16,15-20)
“Go into the whole world
and proclaim the Gospel to every creatur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카이사리아에 있는 회당 앞에서 이교도들의 제사가 행하여지자, 이에 분노한 유다 최고 의회의 지도자들은 모든 이교도의 제사를 금지하였습니다. 그러자 로마 제국은 유다인들의 저항에 잔인하게 대응합니다. 성난 유다 군중이 안토니아 요새를 습격하였고, 로마군은 마침내 기원 후 70년 예루살렘 성벽을 무너트리고 성전을 파괴하였습니다. 게다가 제국의 수도 로마에서는 대화재의 주범으로 몰려 누명을 쓰게 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네로 황제의 박해로 교회의 두 기둥인 베드로와 바오로가 순교합니다.
성전을 잃은 유다인들은,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과 결별하여 그들을 회당에서 추방하였고, 로마인들은 끊임없는 박해로 그들을 위협하였습니다. 마르코는 바로 이 어려운 상황에서 주어진 소명을 다합니다. 마르코는 기적적으로 감옥에서 탈출하여 자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찾아온 베드로를 만나 그의 마지막 생애에 아들로서, 시종이며 통역관으로 함께하였습니다. 또한 사촌 바르나바의 소개로 함께 복음 선포 여행을 하였던 바오로와도 친분을 쌓았습니다. 베드로가 설명해 주는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해석을 덧붙여 글로 남긴 복음사가가 마르코입니다. 그리고 박해받는 신자들을 위한 기쁜 소식으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글로 전한 교회의 첫 복음서가 마르코 복음입니다.
마르코는 베드로와 십자가형을 집행하던 로마 백인대장의 신앙 고백을(마르 8,29; 15,39 참조) 담아,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르 1,1)으로 복음서의 제목을 제시합니다. 그러므로 마르코 복음의 마지막 예수님 말씀은 이렇게 풀이됩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참조).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을 지내며 우리 신앙의 정체성을 살피고자, “나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신가?” 하고 스스로 물어야겠습니다.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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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3학년 때였을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그림 숙제를 내주셨고, 저는 밤늦게까지 흰 도화지에 정성껏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선생님께 제가 그린 그림 때문에 혼이 났습니다. 그림을 성의 없이 그렸다는 이유였습니다.
억울했습니다. 당시에는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납니다.’라는 멘트가 저녁 9시면 나올 때였습니다. 이를 무시하고 더 늦은 시간까지 그림을 정성껏 그렸는데, 선생님은 성의 없이 그렸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뒤 저는 어떤 그림도 그릴 수가 없었습니다. 못 그린 것을 성의 없다는 말로 바뀌어 들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이런 모습은 계속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많은 이들이 못하는 것을 정성이 없다고, 노력하지 않는다고 쉽게 말합니다. 그 결과 할 수 있는 것도 못 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우리의 이런 모습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함께 하는 공동체,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는 공동체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복음이란 말 그대로 ‘기쁜 소식’입니다. 절망과 좌절로 향하는 소식이 아니라,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는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는 나의 이웃들에게 어떤 말을 전하고 있습니까? 힘이 되어 주는 말이 아니라 힘이 빼는 말을, 함께 하는 말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닐까요?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주님을 믿고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주님을 거부하고 구원의 길에서 멀어져 단죄를 받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를 위해 주님을 전하는 우리의 모습이 아주 중요해집니다.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주님의 뜻을 충실하게 전하는 도구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나의 아들’이라고 부를 정도로 베드로 사도의 충실한 협력자였던 마르코 복음 사가 축일입니다. 그는 주님의 뜻을 받아들여서 충실히 따르는 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복음서를 쓰면서 참된 회개와 복음의 기쁨을 지금 이 시대에까지 전해주십니다. 주님의 충실한 도구로 자기 자신을 봉헌하면서 복음서를 쓰셨던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 사가를 기억하면서, 지금을 사는 자신의 모습을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르며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사람으로 살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소설책을 읽다가 주인공이 엄마와의 여행에서 의견이 맞지 않아 힘들어하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엄마는 가격이 비싸다, 식당이 지저분하다, 쓸데없는 곳에 왜 돈을 쓰냐 등등의 잔소리를 계속합니다. 딸인 주인공은 큰맘 먹고 엄마를 위한 여행 이벤트를 진행하는데, 엄마는 계속해서 딸이 하는 일에 딴지를 거는 것입니다. 딸은 마음이 상했고 엄마와의 여행이 쉽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그러다가 이런 말을 남깁니다.
‘엄마와 자신은 뼛속까지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기억했다.’
모녀 관계라도 완전히 다른 사람임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행동을 모두 이해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실 이 사실을 자주 잊어먹는 우리입니다. 나를 이해해 줄 것이라고, 나를 지지해 줄 것이라고……. 그러나 이런 생각과 반하는 모습을 보게 될 때, 큰 실망과 함께 분노까지도 일게 됩니다. 상대와 내가 다른 사람임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다른 사람임을 인정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주님도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 않습니까?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이웃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 못한다면 안 되지 않을까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이 복음이다
-전삼용신부-
아프리카의 밀림지대에 파견된 어느 병사가 있었습니다. 그가 소속되어 있던 부대는 밀림 한가운데서 적들에게 포위당해서 그 병사만 살고 전멸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모두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6개월뒤 그 병사는 홀홀 단신으로 밀림을 헤쳐나와 구조되었습니다.
그를 발견했던 사람들은 그가 손에 꼭 쥐고 있던 지도를 보고 생각했습니다.
“역시 그는 밀림의 지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살아난 거야!”
하지만 그가 펼쳐 보인 종이에는 밀림의 지도가 아닌 영국의 지하철 지도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는 영국의 지하철 지도를 그리고 그것을 보면서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님께서 주신 ‘복음’은 이런 힘을 발휘합니다.
오늘은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라고 하셨고, 마르코 복음사가는 그렇게 복음을 선포한 인물입니다. 그의 집이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하시고, 또한 성령강림이 있었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 승천 이후 유다인들의 공격 대상 1호 가정이 그 집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고 자기 민족으로부터, 또 이방 민족으로부터 미움받아 오갈 데 없는 상황에서도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를 보필하며 복음서까지 집필하였습니다. 그의 안에 있는 복음은 세상 모든 절망적인 상황에서 더욱 빛을 발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다 잃고도 남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우리가 전해야 할 복음입니다.
가끔은 우리가 무슨 복음을 전해야 할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성당 나오면 가정이 모두 평안하고 남편이나 자녀도 하는 일이 잘 될 거야!” 이렇게 말하면 이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일까요? 남편과 자녀, 가정이 풍비박산 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복음은 이보다 더 큰 무엇이어야 합니다. 사실 복음은 우리가 이 세상의 모든 즐거움을 다 잃고 절망 속에 빠져 있을 때도 우리를 기쁘게 해 주는 무엇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복음은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것입니다. 집에 불이 나서 홀라당 다 타버렸는데, 그 가운데서도 무언가 찾을 힘이 생긴다면 그것이 복음입니다. 집은 1억짜리이고 찾고 있는 보석은 10억짜리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안의 복음은 그런 것이어야 합니다.
2013년 TV프로, SBS 힐링캠프에서 차 사고로 몸 55%에 3도 화상을 입고도 살아난 이지선씨가 출연한 적이 있습니다. 얼굴과 온몸이 성치 못함에도 “지금이 행복해서 과거의 예쁜 얼굴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합니다.
이지선씨는 대학교 4학년 때 오빠와 차를 타고 신호대기를 하던 중 뒤에서 음주운전 뺑소니 차량에 사고를 당했습니다. 온몸에 화상을 입었고 의사도 포기한 상태였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사는 것이 더 큰 고통이었습니다. 40번의 수술을 해야 했으며, 진통제의 효과가 떨어지는 몇 시간 동안은 극도의 고통을 당해야 했고, 살이 오그라들어 눈과 입을 몇 달 동안 깜빡이거나 다물 수 없었습니다. 목의 살이 오그라들어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볼 수 없어서 목과 척추까지 휘어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그녀는 밝은 면을 보려 노력했습니다. 손가락이 곪아 8개를 잘라내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울고 있는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엄마, 더 많이 자르지 않아서 감사하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목사님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살게 될 것이고, 또 세상에 희망을 전하는 큰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해 준 것입니다. 이지선씨는 그것이 하느님에게서 들리는 음성처럼 느껴져 힘을 냈다고 합니다. 이것이 복음을 받아들인 이의 자세입니다. 복음을 지녔다면 절망이 그 사람을 짓누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복음이 그렇게 쉽게 자신 안에 자리 잡을 수 있었을까요? 잉태했다면 그 안에서 열매를 맺도록 잘 보살펴야 합니다. 이지선씨는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감사를 찾으려고 했다.”라고 말합니다. 사고를 낸 사람의 차가 보험에 들어 있어서 감사했고, 몇 달 만에 눈을 깜빡거릴 수 있게 되었을 때 감사했고, 손가락으로 글을 쓰고 숟가락을 들 수 있는 것에 감사했으며, 환자복의 단추를 혼자 힘으로 끼울 수 있어서 감사했고, 문을 열 수 있어서 감사했으며, 무엇 보다 살아있다는 것에 대해 감사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금은 매우 행복해서, ‘진심으로’ 과거의 예뻤던 얼굴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당당히 말합니다.
우리에게 고난은 참으로 두려운 장애물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 모든 고난을 이길 힘을 줍니다. 이지선씨는 그 울퉁불퉁한 얼굴로 찬송가를 부르고, 짧아진 손을 들어 하느님을 찬미하고, 연예인과 자신이 10가지나 닮은 것이 있다고 하며, 지금 자신의 모습에 매우 감사해하고 있습니다. 이지선씨는 자신의 이런 마음이 ‘가난’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도 가진 것을 다 잃고 그렇게 가난해 졌을 때도 자신에게 빛이 되는 복음을 가져야 합니다. 가진 것만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피조물에게 전할 복음이 꼭 있어야겠습니다.

-조재형신부-
신부님들과 대화하면서 ‘교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교리는 나무의 뿌리와 같은 것입니다. 뿌리가 약하면 줄기가 제대로 뻗지 못합니다. 줄기가 제대로 뻗지 못하면 바람이 심하게 불면 부러지기도 합니다. 이런 나무는 제대로 열매 맺지 못하기 마련입니다. 코로나19로 ‘신천지’가 드러났습니다. 신천지는 뿌리가 약한 신자들을 포섭해서 자신들의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신천지는 ‘모략전도’라는 방법으로 사람들을 속이고,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전교하였습니다. 신천지에 들어간 사람들 중에는 교회에 다녔던 사람, 성당에 다녔던 사람도 많았습니다. 신천지의 거짓된 선교도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교리를 잘 모르고, 성서를 잘 몰랐던 신자들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습니다. 교리를 충실하게 알고, 성서를 성실하게 읽으면 이단의 바람이 불어도, 세상의 유혹이 다가와도 굳건하게 신앙을 지킬 수 있습니다.
오늘은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사도들이 순교하였고, 예수님을 직접 만났던 사람들도 대부분 순교하였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교리서가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분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왜 우리가 그분을 따라야 하는지 알려야 했습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전해준 교리교사였습니다. 그 뒤로 마태오, 루가, 요한복음서가 나왔습니다. 복음은 유대인들에게도, 이방인들에게도, 지식인들에게도 전해져야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임을 강조했습니다. 메시아임을 이야기했습니다. 이방인들에게는 예수님을 믿으면 죽더라도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지식인들에게는 예수님이 참된 말씀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갈릴래아에서 선포된 ‘하느님 나라’는 복음서가 되었고, 복음서는 교회의 기둥이 되었고, 세상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 질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고, 가치 있는 일이고, 보람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 일은 결코 기쁘고, 즐거운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 고난이 있고, 역경이 있고, 시기와 질투가 있고, 박해와 시련이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과 낚시를 하는 것은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나는 여러분을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해 주겠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물고기를 많이 잡는 ‘기적’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낚시를 잘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밑밥을 열심히 주는 것입니다. 낚시를 할 때 밑밥을 주는 것은 고기들이 모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밑밥에는 고소한 향이 있습니다. 밑밥이 있는 곳으로 고기들이 모이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낚시를 하기 쉽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도 비슷합니다. 친절, 겸손, 나눔, 사랑의 밑밥을 주면 사람들은 마음을 열기 마련입니다.
둘째는 밑밥은 같은 곳에 주어야 합니다. 낚시를 잘하는 사람은 같은 곳으로 밑밥을 줄 수 있습니다. 초보자들은 밑밥을 같은 곳에 던지지 못합니다. 고기들은 여러 곳으로 떨어진 밑밥 때문에 같은 장소에 모이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초보자들은 고기를 잡지 못하기 마련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도 비슷합니다. 마음을 정한 사람이 있으면 꾸준히 기도를 해야 합니다. 정성껏 대해야 합니다. 그러다보면 얼어붙었던 마음이 조금씩 녹기 마련입니다.
셋째는 집중을 해야 합니다. 낚시를 잘하는 사람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항상 ‘찌’를 바라봅니다. 어느 순간 찌는 물위로 올라오고, 그때 낚싯대를 들어 올리면 고기를 잡을 수 있습니다. 초보자들은 집중을 잘 하지 못합니다. 잠시 딴 곳을 바라보거나, 옆에 사람과 이야기를 할 때 찌가 올라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낚싯대를 들어 올려보지만 고기는 이미 다른 곳으로 가고 없습니다. 집중을 하고, 관심을 가지면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상대방이 아픈 곳은 어디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넷째는 기다림입니다. 성격이 급한 사람은 낚시를 하기 어렵습니다. 낚시는 때로 밤을 새워야 할 때도 있습니다. 비를 맞을 때도 있습니다. 하루 종일 있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기다리면 결국 고기를 잡을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도 이와 비슷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기다려 주시고 계십니다. 우리들이 마음의 문을 열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꾸준히 참고 기다리면 희망의 꽃, 사랑의 꽃, 복음의 꽃은 피기 마련입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복음을 전하는 이들의 마음 자세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겸손의 옷을 입는 것입니다. 걱정과 불안은 주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있으라고 합니다. 굳건한 믿음으로 이겨내라고 합니다. “복된 마르코 복음사가를 뽑으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으니 저희도 그의 가르침으로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충실히 따르게 하소서.”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이영근신부-
오늘은 성 마르코 복음사가의 축일입니다.
<마르코복음>의 저자이기도 한 마르코(‘큰 망치’, ‘큰 철퇴’라는 뜻)의 원래 이름은 요한이었습니다(사도 12,12-15). 그는 예루살렘 출신의 레위 사람으로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였고 그의 집은 사도들이 자주 모였던 곳으로 전해집니다. 성서학자들은 겟세마니 동산에서 예수님이 잡히실 때에 아마포를 버리고 알몸으로 달아났던 젊은이(마르 14,51-52)가 바로 마르코 자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바오로 사도와 함께 제1차 선교여행을 했고, 사촌 형인 바르나바와 함께 선교하였으며, 바오로가 로마에서 투옥되었을 때 옥바라지를 했고(골로 4,10), 베드로 사도의 통역자로서 선교활동에 참여했는데, 특히 베드로는 그는 그를 “나의 아들”(1베드 5,13)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는 네로 황제의 박해 때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가 순교한 뒤, 로마를 떠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서 활동했으며, 목에 줄을 매어 시내를 돌게 한 다음에 참수 당했습니다. 그의 유해는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 성 마르코 대 성당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마르코 복음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것으로, 주님의 유언을 전해줍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이처럼,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명이 주어집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사명이 아닌 다른 것을 앞세우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러한 ‘말씀선포’가 그리스도인에게 부여된 사명이요 의무임을 다음과 같이 말해줍니다.
‘(복음 선포하는 것이)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에,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1코린 9,16 참조)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명만 주시고 이를 우리에게 강요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을 확증해주셨습니다.”(마르 16,20). 그렇습니다. 이는 우리 안에서 ‘함께 일하시는 주님’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일하고 있는가?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고, 예수님과 함께 사랑하고 있는가?
하여, 함께 일하시는 바로 그분을 선포하고 증거 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의 말씀처럼, 우리에게는 ‘하느님만’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복음만’으로, ‘말씀만’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정녕, 복음을 믿고 말씀을 따르는 일, 그 일 외에는 아무 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하면, 사도 바오로의 표현대로 ‘모든 것을 통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 저희가 주님께서 하시는 구원의 일에 깊이 동참하고, 주님의 영광을 찬양 드리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주님께서는~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주셨다.”(마르 16,20)
주님!
당신께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으면서도 결코 홀로 일하시지 않으십니다.
너무도 겸손하신지라 저희의 도움을 받아 일하시기를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제가 당신의 소중한 파트너가 되게 하소서.
당신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하시고
무슨 일을 하든지 당신과 함께하게 하소서.
제 안에서 활동하시는 당신의 말씀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희망을 잃었을 때
-반영억신부-
사랑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사랑은 하느님과 하나가 되게 합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가운데 하느님을 만나 뵙는 은총에 눈뜨기를 바랍니다. 사랑 받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면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에 사랑을 더 하십시오. 사랑이신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의 모든 기대와 희망이 무너졌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미워하는 모든 사람들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하시리라고”(루카1,68.71 ;2,38) 희망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에 찬 행동을 보았던 제자들과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아, 임금님이라고 환호하였고 (루카19,37-38), 예수님께서 당장에 예루살렘에서 하느님의 다스림을 시작하실 것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루카19,11).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무기력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메시아가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고난을 받으시며 삶을 마감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에서 죄수로 죽어야 한다는 것은 유다인들이 가지고 있던 메시아에 관한 모든 희망들과는 모순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자신이 원수들에게 예속 당한다면 어떻게 그가 원수들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해낼 수 있다는 말입니까? 제자들과 많은 사람은 영광을 쫓았으니 메시아의 죽음은 절망을 가져왔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소문은 절망에 절망을 더했습니다. 낙심과 불안이 커지니 슬픔만 커질 뿐입니다. 그래서 빨리 그곳을 떠나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온 백성은 분명히 알아두시오.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주인 이 예수를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주님이 되게 하셨고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사도2,36.)라고 선포하기까지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았습니다.
그 와중에 예수님께서는 무너진 가슴에 다시 희망의 싹을 틔워주기 위하여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동행하셨습니다. 그러나 눈이 가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도 상관하지 않으시고 함께 걸으셨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여정에서도 무거운 시련과 고통 안에 함께 동행하십니다. 그분이 함께 하시지만 내 눈이 가려 못보고 못 느낄 뿐입니다. 문제에만 매여 있으면 다른 것이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사실 돌아보면 은총인데 당장은 은총으로 느끼지 못하고 힘에 겨워합니다. 은총의 순간을 은총으로 느끼는 것은 뒷날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습니다. 정신을 차려 깨어있으면 희망을 잃었을 때, 그때야말로 기도할 때이고 주님을 만날 수 있는 때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이 뜨기 까지는 갈 길이 멉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기적은 문제가 있는 곳에서 믿음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실망으로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던 제자는 날이 저물어 동행하던 사람과 서로 헤어져야 할 때가 왔을 때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하고 그분을 붙들었습니다. 너는 너의 길을 가고, 나는 길을 가면 그만인데 구지‘함께 묵자’고 붙잡았습니다. 여기서 그들의 됨됨이가 드러납니다. 나그네를 외면하지 않는 모습이 창세기 18,1-15의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천사를 만난 아브라함의 모습을 떠오르게 합니다. 결국 집에 들어가서 함께 식탁에 앉아 찬미를 드리고 빵을 떼는 순간에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나그네를 소홀히 하지 않는 사랑의 실천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서 하느님을 뵐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사랑의 구체적 실천인 자선은 “하느님의 자비를 우리 위에 내리게 하는 힘이고 우리 구원의 확실한 표입니다.”(성 요한 비안네) 따라서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하고 민첩하게 해야 합니다.”(나지안즈의 성 그레고리오) 때를 놓치면 그만큼 충분한 효과를 얻지 못합니다.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그 사람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개신교 신자에게도 전화를 많이 받게 되었는데 저에게 전교하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분이 하시는 말씀은 대략 “오늘도 한 영혼이 지옥불에 떨어지고 있습니다. ……이단에 빠지는 사람이 많으니 설교에서 바르게 가르쳐 주십시오.”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성모님께서는 예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직 주 예수그리스도만이 섬김을 받으셔야 할 분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제가 미처 받지 못하면 메시지를 남기고 새벽에도 상관없이 전화를 합니다. 어느 날은 미안했던지 “요즘 사제님을 괴롭혀서 죄송합니다.” 하고는 또 시작하더라고요. 정말 지나친 열심도 문제입니다. 열심히 하는 것도 고상하게 열심 해야 합니다. 친절하게도 문의할 것이 있으면 연락하시라고 전화번호까지 알려 주었는데 신자분들에게 알려드릴까도 생각했었습니다. 새벽에, 한 밤중에 시도 때도 없이 문의하면 어떨까요? 그러면 똑 같은 사람되지요!…
이웃의 요구를 잘 받아주어야 하는데 특히 개신교에서 열성을 보이는 이가 이렇게 나올 때 우리가 성모님에 관하여 기본적으로 알려줘야 할 것을 준비하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성모님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자기 어머니는 어떻게 모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마리아. 마리아하고 부르는 사람들이 목사님 부인에게는 사모님, 사모님 하잖아요!
성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성모님의 신앙의 모범을 본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천사를 통해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을 겸손과 순명,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구세주의 탄생을 가져오셨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주님을 철저히 따르셨던 어머님께 존경을 표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믿음의 대상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는 구세주의 어머니로서 합당한 공경을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첫 표징을 보여 주셨는데 잔칫집에 술이 떨어진 것을 먼저 알아채신 분이 어머니셨습니다. 그리고 능력을 지니신 아들, 예수님께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어머니는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순명하시며 때를 기다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의 말씀을 지나쳐 버리지 않으시고 마침내 물을 포도주로 만든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어머니의 역할이 이런 것입니다. 곤란한 처지에 있게 된 사정을 미리 알아채시어 그 사람과 공명하시고 그것을 주님을 통해 해결해 주시는 분입니다. 어머니의 전구는 이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철저히 아들의 삶에 동행하셨으며 십자가 밑에 서 계셨고 아들의 시신을 가슴에 품어야 했던 분이십니다. 요람에서 무덤에까지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직접 갈 수도 있지만 효과적으로 가기위해 어머니의 손을 빌어 예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치마폭이 예수님을 가릴 수는 없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고, 오직 예수님을 들어 높이셨습니다. 당신에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신 것도 “당신 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로다”,“능하신 분이 큰일을 하셨음이요, 그 이름은 거룩하신 분이시로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분 마음에는 늘 주님이 모두였습니다. 이런 어머니를 모시고 있음을 자랑으로 여겨야 합니다.
제자들이 나그네를 집안에 모셔드려 대접하고 믿음의 눈이 뜨였듯이 우리가 성모님을 마음에 모셔 들이면 예수님을 어떻게 모셔야 할지를 가장 효과적으로 깨우치게 됩니다. 성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결국 “성모님을 통하여 예수님께로!”가는 것이고 결국은 주님의 능력을 만나는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우리가 직접적으로 만나든 간접적으로 만나든 예수님을 만나길 바란다면 성모님을 잘 모셔야 하고 이웃을 사랑으로 받아드려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함께 하십니다. 실망과 좌절의 늪이라 생각될 때 더 간절히 기도하고 사랑하면 믿음의 눈을 뜨게 되어 비로서 주님과 함께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하십시오. 이웃을 결코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한 가지 질문으로 정리하겠습니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누가 말했을까요? ‘하루살이’가 말했답니다. 하루살이에게는 내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약속해 주신 내일이 있어 행복합니다. 부활한 새 생명의 내일이 있어 기쁩니다. 부디 내일을 희망하는 만큼 오늘을 사랑에 사랑을 더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르 16,15-20: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15절)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세상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무지렁이였고 말재주도 없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만민에게 가르치도록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파견하셨다는 것을 하느님의 권능으로 온 인류에게 증언하였다. 사도들이 이렇게 파견된 것은 하느님의 뜻이었으며 세상의 모든 이들이 자기의 창조주를 알아 뵙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 복음 선포는 모든 나라와 도시에 있는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다. 그분의 섭리는 온 우주를 통틀어 펼쳐지고 있다. “너희는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8)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16절) 신앙은 신경을 통하여 교육된다. 신경은 최대한 요약된 형태로 외우게 되어 있다. 이것은 믿어야 할 바를 간략하게 규정해 놓은 것이다. 우리 신자들은 그에 대한 설명을 들음으로써 성숙해지고, 겸손과 사랑의 튼튼한 토대 위에서 이해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베푸신 은총에 합당하게 감사드려야 한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17-18절) 당시 사도들을 통하여 행했던 일이 오늘에도 영적인 형태로 날마다 이루어지고 있다. 사제들은 구만 은총으로 안수함으로써 악령이 머물지 못하게 하는데 이것이 바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신앙인은 자신의 삶으로 온 힘을 다하여 창조주의 영광과 권능을 선포하는데 이것이 새로운 언어를 말하는 것이다.
훌륭한 권고로 다른 사람 안에 있는 악의 불을 끈다면, 그것은 뱀을 없애는 일이며, 악하게 유혹하는 말을 듣고도 악에 끌려다니지 않는다면, 독을 마시고도 해를 입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표징은 영적이고 우리를 생명으로 이끌어 주기에 더욱 큰 것이다. 이러한 은사들은 모든 피조물에 복음을 선포하도록 사도들이 먼저 받았고, 그다음에는 믿는 이들에게 주어졌다. 이 은사들은 그것을 행하는 이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믿지 않는 이들에게 확신을 주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표징으로 그들이 믿음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19절) 부활절에는 주님의 부활이 우리 기쁨의 이유였지만, 이제는 그분의 승천 때문에 기뻐한다. 보잘것없는 우리 인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높이 현양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이러한 복을 누릴 수 있도록 부활하신 후 당신 제자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승천하셨다. 하느님께서 정해 놓으신 때가 완성되기까지 아버지 오른편에 계시기 위해 육체적 현존을 끝내셨다. 여기서 오른쪽은 장소적 개념이 아니다. 오른쪽이라는 것은 복됨의 의미이다. 인간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이 복됨 속에는 오른쪽만 존재한다. 이제는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시며 우리와 함께 계시는 참된 “임마누엘”이 되신다.
이제 제자들은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떠났다. 그들은 복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들어냈다. 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행한 기적들도 그분의 가르침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결국 기적을 행하시는 분도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복음을 전한다고 한다면, 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복음 선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마르코 복음 사가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참된 도구가 되어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더욱 확실히 드러나는 삶이 되어 복음을 전하는 우리가 되도록 기도하자.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 15)
-한상우신부-
숨차게 달렸고
심장처럼 요동치는
회의와 의심의
강을 건넜습니다.
이 거친
길을 걸으며
신앙을 발견한
마르코
복음시가를 오늘
만나게 됩니다.
가장 어렵고
사나운 시대에
마르코 복음이
쓰여집니다.
부딪히며
깨닫게 되는
복음의
참된 빛입니다.
복음의 빛은
수많은 난관을
극복합니다.
복음의 길은
막을 수 없습니다.
공중누각이 아닌
생생한 현실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게합니다.
복음의 세상이
진실로 올 것임을
마르코 복음시가는
믿었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십자가의 여정을
피하여 갈 수 없듯이
십자가의 여정이
필요함을 깨닫게
합니다.
비껴갈 수 없는
십자가의
수난에서
하느님의 때와
하느님의 뜻을
만납니다.
십자가의 여정에서
진리를 재발견하는
은총의 기쁜
축일 되십시오.
십자가는
복음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김찬선신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오늘 우리가 축일을 지내는 마르코 복음사가는
복음을 제일 먼저 쓴 분인데 올해는 축일을 지내면서
마르코는 왜 복음을 썼을까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아들로 여길 정도로 애제자였는데
이 베드로 사도가 주님의 복음을 쓰라고 당부하여 쓴 것일까요?
아니면 예수님을 알리고 싶은 순수한 마음도 있지만
저처럼 문학적인 욕심이 있어서 예수님을 소재로 삼아 썼던 것일까요?
지금은 감히 그런 꿈을 꾸지 않지만
옛날의 저는 꿈이랄까 욕심이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20대 초반에는 수도생활을 하고 싶은 마음보다
소설가가 되고 싶은 마음이 더 컸고 그래서 실제로 소설을 끄적거리기도
했는데 소설을 쓸 때는 저의 머릿속이 구상하고 있는 얘기들로 가득차
있어서 정상적인 수도생활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타협적으로 생각한 것이 소설을 쓰되 성서의 인물이나 성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앤소니 퀸이 주인공으로 나온 바라빠 영화가 있었고,
김동리의 소설 <사반의 십자가>는 예수님 덕분에 회개한 바라빠라는
플롯의 소설인데 저는 이런 영화와 소설에 자극을 받기도 하여 언젠가는
이런 류의 소설을 써야겠다고 마음 먹은 적이 있고 지금도 있습니다.
이런 저이기에 매일 강론을 쓰는 것도 그 동기가 순수한 복음 선포인지
아니면 소설가가 되고 싶었던 그 욕심의 변형인지 반성도 하는데
사실 글쟁이들은 끊임없이 자기를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기에
제가 과연 참된 복음 선포자인지 글쟁이일 뿐인지 반성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저이기에 마르코 복음사가도 이런 관점에서 한번 본 것인데,
마르코 복음이 복음 중에서 가장 군더더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자기 관점의 투사를 하지 않은 진정한 주님의 복음 선포라고 해야겠습니다.
그런데 한 군데만은 자기 얘기를 집어넣은 것이 아닌가 교회는 추측합니다.
곧 마르코 복음 14, 51-52의 얘기로서 제자들이 모두 주님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얘기를 전한 다음, 특별히 한 젊은이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어떤 젊은이가 알몸에 아마포만 두른 채 그분을 따라갔다.
사람들이 그를 붙잡자 그는 아마포를 버리고 알몸으로 달아났다."
옛날에 처음 성서 통독을 할 때 이 부분을 읽으면서 참으로 인상적이어서
제가 십자가의 길 묵상을 할 때 이 젊은이가 누구일까도 생각해보고,
상황극을 만들어보기도 했는데 교회는 이 젊은이가 바로 마르코라고,
그러니까 요한 복음에서 요한이 자기를 '사랑을 받던 제자'라고 하며
살짝 끼어놓듯이 마르코도 자기의 부끄러운 얘기를 슬쩍
한 부분으로 끼어놓은 거라고 추측을 하기도 합니다.
교회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마르코는 주님의 가장 젊은 추종자였을 것이고,
다른 제자들은 애초에 도망쳤지만 혼자라도 주님을 더 따라간 분이었고,
그러나 붙잡히게 되자 알몸으로 도망칠 정도로 급히 주님을 떠난 분입니다.
그러나 이 얘기는 추측이고 확실치 않지만 그가 바오로와 바르나바와 함께
바오로의 1차 전교 여행에 동행한 복음선포자였던 것은 역사적이 사실이고,
베드로 사도의 사랑받는 제자였으며 베드로의 가르침을 받아
이방인들과 후대 사람들을 위해 복음을 처음으로 쓴 것도 사실입니다.
저는 아직도 알몸으로 도망친 마르코를 주인공으로 하여
소설을 쓰고 싶어하는 사람이지만 마르코는 저와는 달리
오직 예수님과 그분의 가르침만을 정확하게 우리에게 전해준 분이었고,
오늘 주님 말씀대로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한
진정한 사도였기에 이런 마르코 성인에게 감사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저는 마르코 복음사가가 전하는 특별한 메시지에 이끌렸습니다. 현재 인류가 맞닥뜨린 재앙에 대해 말씀이 길을 제시하고 계신 듯 느껴진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 안의 예수님 부활 메시지에서 복음 선포의 대상이 "모든 민족"(마태 28,19; 루카 24,47 참조)이라면, 마르코 복음에서는 "모든 피조물"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여기서 제자들에게 제시하시는 선교 활동의 범위는 "온 세상"이고, 그 대상은 "모든 피조물"입니다. 기쁜 소식은 이스라엘을 넘어 온 세상으로 퍼져나가야 하고, 사람뿐 아니라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존재에게 전해져야 한다는 뜻이지요. 복음 앞에서 소외되는 존재는 단 하나도 없어야 합니다. 그것이 온 세상을 사랑하시는 모든 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제1독서는 하느님의 백성이 이 세상에서 수행해야 하는 사명과 태도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베드로의 첫째 편지 중 일부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 대하십시오"(1베드 5,5).
원문에서 이 권고는 "젊은이 여러분"이라는 대상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만, 오늘 말씀의 연관성 안에서 보면 부족하고 미숙하나마 주님의 길에 들어선 우리 모두를 향하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주님께서 부르셔서 그분의 사랑을 배운 사도들과 우리는 서로에게 겸손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가르치신 바이며 또 그분께서 친히 행하신 바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비단 사람들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 앞에서도 그러해야 한다고 주님은 역설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거대한 우주의 질서나 자연의 조화 앞에서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아무리 우리가, 하느님께서 특별히 당신 모상으로 만들고 숨을 불어넣어 주신 만물의 영장 인간이라도, 저마다 제 목적과 사명을 띠고 자기 자리에서 고유의 아름다움을 눈부시게 피워내는 피조물 앞에서 경이로움을 가지게 마련이지요.
근시안적인 자기 이익에 눈이 먼 인류의 생태계 파괴는 우리에게 피조물을 맡기신 주님의 당부를 간과하고 무시한 데서 온 것이 아닌가 반성합니다. 과연 우리 인류는 주님의 당부대로 모든 피조물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왔는지요! 만일 이 말씀을 경청하고 행동했다면 기후 변화나 생태계 파괴, 금일 겪는 바이러스 재앙은 아마도 없었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강한 손 아래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1베드 5,6).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인간은 하느님의 뜻과 섭리 앞에 자신을 낮추기보다, 권력자와 자본가가 조장하는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분열 정책에 자신을 맡겨 왔습니다. 언젠가 자신도 그 정책에서 소외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하고, 자신도 그들처럼 재물과 힘을 소유하리라는 로망에 들떠 힘 없는 피조물을 착취하고 파괴하면서 말이지요.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기후 변화와 온갖 자연재해, 신종 돌연변이 바이러스들로 공격받고 있습니다. 훼손된 우주가 참다 참다 몸살하는 아픔의 여파를 고스란히 겪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렇다면 모든 피조물과 관계를 회복하기에 우리가 너무 늦은 걸까요?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1베드 5,7).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1베드 5,8).
오늘 우리가 듣는 베드로 사도의 권고는 아직 우리에게 길이 있다는 희망을 전제하면서, 그 희망을 위해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를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근심과 공포, 좌절을 야기하는 모든 걱정을 만물의 주인이신 주님께 내맡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 세상 만물이 함께 살아갈 방식을 깨어서 선택하고 실천하라고 하십니다.
"그 은총 안에 굳건히 서 있도록 하십시오"(1베드 5,12).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은총에 은총을 받은 존재들입니다만, 어쩌면 그동안 발전이나 성과, 부의 축적을 은총과 혼동하며 살아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세상 모든 피조물과 형제자매라는 관계성을 자각하고 회복할 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내리신 은총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자신과, 이웃과, 그리고 피조물, 이 네 바퀴의 축과 각각 평화로이 공존하며 화목할 때 하느님의 모상성과 은총을 충만히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오늘 마르코 복음사가의 축일을 맞아 우리의 형제인 "모든 피조물"이 말을 걸어온 듯합니다. 우리의 이기주의와 탐욕에 그들이 병들고, 그들의 몸부림에 우리가 무너지는 이때, 다시 한 번 주님의 당부를 기억하며 각자의 자리에서 작은 것 하나라도 실천하고 행동합시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이제라도 우리가 움직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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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25일 수요일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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