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4월 18일 부활 팔일 축제 내 토요일

Margaret K 2020. 4. 17. 19:28

2020년 4월 18 부활 팔일 축제 내 토요일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마음이 완고하여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는 그들을 꾸짖으셨다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꼬 16,9-15)


He appeared to them and rebuked them

for their unbelief and hardness of heart 

"Go into the whole world
and proclaim the Gospel to every creatur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부활 팔일 축제의 마지막 날입니다. 물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과 믿는 이들의 기쁨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 강림의 순간까지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죽음을 이기고 죄에 물든 우리가 주님 부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된 기쁨을 우리 가운데 아직도 누군가가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오늘 복음을 반드시 읽고 묵상해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서 “불신과 완고한 마음”으로, 주님 부활을 증언하는 이들이 기뻐하며 환호하는 ‘알렐루야.’를 받아들이지 못한 자신을 허물어야 합니다.
부활 팔일 축제 동안 우리가 읽고 묵상한 복음 가운데 오늘 처음으로 마르코 복음사가가 전하는 주님 부활 이야기를 접하게 됩니다. 간결하고 단순한 보도 속에 주님 부활 이야기의 핵심만을 전하는 마르코지만, 그가 진심으로 우리에게 강조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따르고자 하는 이들이, 부활하시어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싶다면 그분의 실천을 계속 이어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오늘 독서의 베드로와 요한처럼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예고하시면서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 됨을 밝히셨던 예수님의 말씀은, 부활 팔일 축제 이후에도 그 기쁨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국가 간 축구 경기를 하고 있습니다. 피파 순위 세계 131위인 나라와 세계 4위인 나라가 경기를 한다면 어느 나라가 이길 확률이 더 높을까요? 물론 각본 없는 드라마가 스포츠 경기라고 하지만, 그래도 세계 4위인 나라가 손쉽게 이길 것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세계 131위인 나라가 이겼습니다. 이 나라는 예선에서 피파 순위 7위인 포르투갈과 비겼고, 유럽의 강호 오스트리아를 2:1로 이겼습니다. 그리고 지금 피파 순위 4위인 잉글랜드를 16강에서 꺾는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바로 아이슬란드 이야기입니다. 2016년 유로 남자 축구 토너먼트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아이슬란드는 1년 내내 빙하로 뒤덮인 화산섬으로 축구 시즌이 가장 짧고, 인구 33만에 불과해서 축구를 할 수 있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축구 감독이 치과 의사를 겸할 정도였습니다. 더군다나 세계적인 슈퍼스타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파란을 일으킨 것은 단순히 운이 아니었습니다. 공동체의 힘이었습니다. 실제로 뛰어난 사람으로만 구성된 공동체보다 부족하지만 서로 유기적인 협조가 이루어지는 곳이 훨씬 더 생산성이 올라간다는 실험 결과도 있습니다. 즉, 개인보다 공동체가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공동체를 만드셨던 이유를 묵상해 보십시오. 그것도 당대에 내로라하는 뛰어난 사람은 모두 배제하셨던 것은 자기 자신만을 드러내는 것보다 함께하는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개인의 능력보다 공동체의 능력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 이후 제자들은 하나 되는 공동체를 이루지 못합니다. 그들은 도대체 믿지를 못합니다. 여자에게 나타나셨다는 이야기에도, 시골로 가고 있는 제자 두 사람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씀을 듣고도 믿지 못합니다. 주님의 부활은 이미 제자들에게 예고하셨던 말씀이었지만, 믿지 않습니다.

하긴 제자 중에서 예수님을 팔아넘긴 배신자가 나왔기 때문에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원하는 모습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지요. 불신과 완고한 마음으로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는 존재 그래서 서로를 더욱더 성장시키는 공동체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 앞에 발현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십니다. 믿음 없음은 주님께서 만드신 공동체의 붕괴를 가져올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만드신 교회라는 공동체가 필요하고, 이 교회를 통해서 우리는 성장하게 됩니다. 따라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통해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성장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어두운 면과 맞부닥뜨려 봐야 비로소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베르나르 베르베르).



감사합니다.

지난 4월 15일(수)에 제 어머니께서 하늘나라로 떠나셨습니다.

평생 새벽 3시면 일어나서 조용히 기도하셨던 어머니이셨지요. 따라서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시겠지만, 자식으로서는 아쉬움과 함께 큰 슬픔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장례 기간에 많은 분이 빈소를 방문해 주시어 미사를 봉헌해 주시고, 어머니 천상영복을 위해 기도해주셨습니다. 저를 비롯한 유가족 모두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어제(17일) 어머니를 충남 부여의 선영에 모시고 돌아오면서 많은 기억을 하게 됩니다. 아들 신부에 대한 걱정으로 죽음의 고통 속에서도 “잘 살아야 한다.”를 말씀하셨던 어머니, 가장 좋은 길을 사는 것이라면서 사제의 삶을 행복하게 받아들이라고 하셨던 어머니, 제가 쓴 묵상 글 보는 것을 좋아하시고 또 저의 강론이나 강의 듣는 것을 좋아하셨던 어머니. 저의 삶을 변화시켜주신 어머니셨고 가장 행복한 길로 이끌어 주셨던 어머니셨습니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다시금 가슴이 뻥 뚫린 듯한 슬픔이 밀려듭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신앙과 사랑을 본받으며 주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삶을 더 열심히 살아야 함을 다짐합니다. 이 모습이 어머니께서 원하시는 것이고, 어머니를 위해 기도해주신 많은 분께 보답하는 길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교회에 대한 공경과 복음에 대한 공경은 하나다

-전삼용신부-


어느 날 신문에 나이 드신 어머니를 판다는 광고가 실렸습니다. 그날 저녁 한 부부가 광고에 적힌 주소를 보고 그 집을 찾아갔는데, 집은 뜻밖에 웅장했습니다. 벨을 누르자 한 노파가 그들을 맞았습니다. 남편이 노파에게 물었습니다.

“어느 분을 파시는 거죠?”

“바로 나라오. 그런데 남들은 있는 부모도 안 모시려고 하는 세상에 당신들은 무슨 생각으로 늙은 어머니를 사려고 하오?”

“저와 제 아내 모두 어려서 부모를 잃었답니다. 그래서 저희는 항상 부모님을 모시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부러워했지요. 그리고 마침 신문에 광고가 났기에 찾아왔습니다.”

머리를 긁적이는 남편의 말에 노파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뜻이 맞으니 이것으로 거래가 성사되었군. 그럼 이제부터 어머니로서 말을 놓겠다. 아무래도 너희 가족이 이 집으로 와서 함께 사는 것이 좋겠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너희 부부의 차림새를 보니 넉넉한 것 같지 않은데, 어떻게 나를 모시고 살겠느냐? 그러니 너희가 이 집에서 함께 살자꾸나.”

“그럼 왜 스스로 돈을 받고 팔겠다고 광고를 하신 겁니까?”

“만일 내가 양자를 구한다고 해보아라. 아마도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겠지. 하지만 모두 돈을 보고서 오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없는 살림에도 나를 사러 왔으니 진정 내 아들딸이 될 자격이 있다. 지금부터 이 집과 재산은 너희 것, 아니 우리 것이다. 나는 너희 가족과 한 식구가 되어 남은 삶을 행복하게 보내고 싶구나.”


      이 할머니는 자신을 공경할 줄 모르는 젊은 사람은 돈을 주어도 잘 관리하지 못할 것을 아는 분입니다. 부모에게 하는 것이나 부모가 주는 재산을 대하는 것이나 다를 수가 없습니다.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누군가 복음을 전하면서도 복음을 전하라고 파견한 교회를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대한다면 그 사람이 전하는 복음은 복음일 수 없습니다.

 

      본당에 있다 보면 하느님을 체험했다는 사람들을 많이 만납니다. 어떤 분들은 본당 사제에게 알리고 본당 사제가 안 믿어주면 개인적으로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립니다. 그리고는 교회가 자신들을 박해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그 자체로 그런 체험들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님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오상의 비오 성인은 교회가 자신의 체험을 받아들이지 않자 몇 년이고 혼자서 잠자코 미사를 했습니다. 교회가 파견하지 않으면 자신이 전하는 체험이 어쩌면 교회를 분열시키는 잘못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공경할 줄 아는 사람만이 복음도 온전하게 전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부모라고 한다면 복음은 그 교회가 주는 재산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저것도 존중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성격이 있듯이 하느님도 성격이 있으십니다. 하느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은 사랑과 반대되는 행위입니다. 사랑은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인데 그와 반대되는 것은 매우 싫어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께 기도하실 때 교회가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 본성을 버리시는 행위는 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복음 때문에 교회가 갈라질 수 있습니다.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기쁜 소식을 받았다고 주장할 때입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서도 예수님께서 부활의 기쁜 소식을 각자가 전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모든 여인과 제자들은 일제히 사도들에게로 향했습니다. 만약 각자가 그 기쁜 소식을 전했다면 교회를 파견하신 의미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도들은 어떠한 증언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사도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의 불신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사도들에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라고 하십니다. 부활을 목격했던 이들 개인을 파견하시지 않고 교회를 파견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교회가 하나가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당시 교회가 부와 권력에 집착해 있을 때 가난으로 나아가려 했습니다. 교회는 당연히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성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를 쫓아낸 교황은 그날 꿈에 자신이 사는 라떼란 성전이 무너지는 것을 프란치스코 성인이 받들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그의 회칙을 인준해줍니다. 이렇게 필요하면 하느님께서 개입하시어 교회가 하나 되게 합니다.


      교회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뛰쳐나간 개신교들이나 수많은 이단과 사이비들은 하느님께서 당신 기쁜 소식이 교회를 통해 선포되기를 원하셨음을 간과한 까닭에 생긴 것들입니다. 아무리 교회에 불만이 있어도, 자신의 체험이 아무리 강력해도 하느님께서는 그것이 교회를 통해서만 선포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을 이해한다면 이단이나 사이비에 빠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개인적인 체험이 아무리 강해도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교회의 권위를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그것을 바라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조재형신부-


마술 공연을 본 적이 있습니다. 분명 눈으로 보았지만 믿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손동작 하나로 눈앞에 있던 동물이 사라지기도 합니다. 모자에 아무것도 없었는데 새 한 마리가 나오기도 합니다. 보자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색색의 스카프가 계속 나오기도 합니다. 허공에 손동작을 했는데 카드가 떨어지기도 합니다. 규모가 커져서 탱크가 사라지기도 하고, 비행기가 사라지기도 합니다. 눈으로 보고서도 믿지 못할 일들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이 마술의 묘미입니다. 마술사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하고, 끊임없이 노력해서 신기하고, 재미있는 마술을 보여 줍니다.

 

바이러스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하였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기에 인류는 바이러스의 존재를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바이러스로 인해 생기는 질병을 통해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1930년 전자현미경을 통해서 인류는 바이러스를 눈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인류는 바이러스를 물리칠 수 있는 백신을 만들었고, 인류에게 고통을 주던 많은 질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최근에 인류는 바이러스로부터 새로운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동물에게 있는 바이러스가 변형되어 인간에게 전해지는 겁니다. 사스, 신종플루, 메르스, 이번에 세계적으로 퍼진 코로나19는 변형된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전파된 것입니다. 시간이 걸리지만 백신이 만들어지면 바이러스는 사라질 것입니다. 철저한 개인위생과 사회적 거리두기가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두 가지 차원에서 전해졌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지냈던 공동체의 신앙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을 보았습니다. 십자가를 지고가신 예수님을 배반하였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감격했습니다. 매일 함께 모여 기도하였고, 어려운 이들을 도왔고, 가진 것을 기쁘게 나누었습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의 복음이 전해지면서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신앙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표징을 보지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예수님과 함께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신앙의 신비는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체험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신앙을 전해 주어야 했습니다. 무엇으로 신앙을 전했을까요? 예수님을 체험했던 사람들이 전해준 전승입니다. 전승은 교리가 되었고, 신학이 되었고, 법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전승을 수호한 사람을 교부라고 부릅니다. 저의 신앙도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께서 전해주신 신앙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기록한 복음서입니다. 평생 성서를 번역하였던 예로니모 성인은 성서를 모르면 예수님을 모르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12)’라고 하였습니다. 성서를 가까이하면 우리의 신앙은 더 뜨거워지고, 더 깊어집니다. 나의 신앙이 약해졌다고 생각하면, 나의 신앙이 무뎌졌다고 생각하면 교회의 가르침을 가까이 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성서를 가까이 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자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 제자들은 그들의 말도 믿지 않았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마르 16,15)

-이영근신부-


오늘 <알렐루야 환호송>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날은 주님께서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118,24)


이 날은 인간에게 가장 큰 사랑이 베풀어진 날이기 때문입니다. 곧 당신의 죽음으로 부활생명을 선물로 주신 날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진 날입니다. 이 날의 아름다움을 교종 프란치스코께서는 <복음의 기쁨>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 구원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아름다움(36)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사랑을 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막달레나 마리아도, 엠마우스의 두 제자들도, 모여 있던 열 한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는 못 하였습니다. 그 아름다움을 보지 못 하였던 것입니다. 맑고 투명한 믿음의 눈이 열리지 않은 까닭입니다. 이미 듣고 보았지만, 믿지를 않은 까닭입니다. 이를 믿게 되면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이를 우리는 요즈음 <1독서><사도행전>을 통해서 계속해서 듣고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 이들 안에서 어떠한 어마어마한 일들이 일어나는지 말입니다.

이처럼, 부활은 오직 믿음 안에서 체험하게 되는 신비라 할 수 있습니다. 부활은 믿음이 삶이 될 때, 비로소 깨닫게 되고 증거 됩니다. 믿음이 삶이 될 때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당신의 몸을 매달 듯, 그렇게 자신을 내어놓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의 사명이 주어집니다.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마르 16,15)


여기에서, 먼저 알아들어야 할 것은 우리는 온 세상에로 가라는 파견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곧 자신 안에만 머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타자에게로 나아가라는 말씀입니다. 향하여 나아가는 존재,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신원임을 말해줍니다. 마치 당신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향하여 먼저 다가오셨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파견 받은 자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파견하신 분의 뜻을 사명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곧 그분의 부활을 믿고 따르는 제자가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파견 받았으되, 온 세상 모든 피조물에게 파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곧 유다민족이나 이방민족이나. 우방이나 적국이나,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든 민족 온 인류에게로 가라는 것이요, 또한 인간뿐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로 가라는 파견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이웃이 되고 형제가 되고 한 가족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세상에 살되 세상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땅을 딛고 걷되 하늘을 바라보며 걸으며, 동료와 손을 잡고 걷되 다름 아닌 당신과 함께 걸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회칙 [찬미를 받으소서](Laudato Si, 2015, 6,18)에서, 우리가 더불어 사는 집인 지구가 우리와 함께 사는 누이이며, 두 팔 벌려 우리를 품어주는 어머니(1)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피조물에 관한 책임을 성경의 전승에 비추어 설명해주고 있습니다(2장 피조물에 관한 복음).

그런데 오늘, 나는 내 형제에게 모든 피조물에게,

이웃이 되고 형제가 되고 한 가족이 되어주고 있는가? 아멘.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마르 16,15)


주님!

제 자신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게 하소서.

세상에로, 이웃형제들에게로, 모든 피조물들에게 나아가게 하소서.

먼저 다가가게 하소서.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자국민이나 이주민이나,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친구이거나 적이거나

사람이거나 자연이거나, 더불어 형제가 되게 하소서

세상에 살되 세상의 힘이 아닌, 복음의 힘으로 살게 하소서.

함께 걷되 손을 잡고 걸으며, 땅을 딛고 걷되 하늘을 바라보기 하소서. 아멘.


복음을 선포하여라

-반영억신부-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합니다. 다양한 사람이지만 그들을 인정해 주고 공감해 주며 위로해 준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을 기억하고 그로부터 주어진 기쁨을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은 큰 보람입니다. 그러므로 일상 안에서 행복과 보람을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는 정성이 꼭 필요합니다. 지금 이 순간 나와 만남을 이루는 이의 행복과 구원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은총을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금맥보다 중요한 것이 인맥이다.’라는 말도 합니다. 한 개인과의 관계를 얼마나 큰 정성과 사랑을 가지고 맺어야 하는가를 말해줍니다. 관계의 형성이 곧 복음의 선포입니다. 한 사람을 주님 안에 감사할 수 있도록 눈뜨게 한다면 그를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될지는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한 사람과의 선한 관계가 주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마음이 굳어져 있었던 까닭입니다. 자기 것으로 가득 차 있으면 다른 어떤 것도 들어갈 수 없는 법입니다. “담기는 것은 담는 그릇의 모양에 따라 달라진다.”는 옛 말이 있듯이 은총이 풍부해도 담을 그릇의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담을 수 없습니다. 비어 있지 않은 그릇에 무엇을 담을 수 있겠습니까? 부활의 사실을 이미 예고해 주었고 또 그대로 이루어졌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시고 이르셨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16,15). 완고한 마음은 말씀이 전달되는 것을 막고 부활이 선포되는 것을 방해합니다. 우리 마음이 거칠어지고 굳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완고해진 내 마음을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으로 고쳐주시길 청했으면 좋겠습니다.

복음 선포는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런데 복음을 선포하는 방법은 다양하고 일상 안에서 표현되는 사랑이야 말로 주님을 만나는 감동을 줍니다. 어떤 기회를 특별히 만들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매 순간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최선을 다하면 그것이 큰 사랑이요, 복음의 선포입니다. 어영부영, 양다리 걸치기는 증거와는 거리가 멉니다.

예수님께서는 듣는 사람의 반응에 상관없이 당신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자유의지를 지닌 본인의 몫입니다. 우리도 누구의 말에 구애 받지 말고 주님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자상함과 따뜻함으로 사랑을 가지고 온 정성을 다하여 그러나 사람의 눈에 들기보다 하느님의 눈에 들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고 전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마음을 읽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그들의 눈높이로 접근해야 효과 있게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제자들의 불신앙을 책망하심

 -조욱현신부-


복음: 마르 16,9-15: 말을 듣고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날은 주님께서 만드신 날 우리 기뻐하며 즐거워하세.”(시편 118,24)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은 주간 첫날이며 바로 주일이다. 만물이 빛에 휩싸인 날이다. 이날 주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고, 이날 성령께서 하늘로부터 사도들 위에 내려오셨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다. 태초에 죄의 주인공이었던 그래서 죽음을 처음 맛본 여자가 부활의 처음 본 사람이 된다. 남자에게 죄를 전해 주었던 여자가 이제 은총을 전해 준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을 들었지만 믿지 않았다.(11) 예수님께서 전에 미리 말씀하신 것을 들은 제자들이었지만,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스승이 힘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자 크게 실망하여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빵을 떼어 나누면서 예수님을 알아보고 체험한 일을 전하였는데도 그 말도 믿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자기들의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믿지 않는 그런 완고함을 보이고 있다.

 

수난하시기 전, 그들과 함께 계실 때 당신은 고난을 당하시고 돌아가신 다음 부활하시리라는 것을 다 알려 주셨지만, 그분의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은 그들의 기억을 송두리째 없애 버렸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분을 보고 너무나 혼란스러운 나머지, 그분의 가르침도 잊어버리고 부활을 기대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음식을 먹을 때, 당신을 나타내 보이심으로써, 사도들로 하여금 스승님의 부활을 받아들이게 해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신앙이 없음을 책망하고 계신다. 예수님과 그토록 가깝다고 하는 제자들까지도 아마 주님의 부활을 믿기가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예수께서 승천하시는 그 순간까지도 계속되고 있음을 복음사가는 전하고 있다.

 

이렇게 부활 사건은 하나의 지식이나 이해가 아니라 현실적인 삶이었기 때문에 제자들의 불신과 주님의 책망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제자들의 삶 속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받아들인 부활의 신비를 이제 전하도록 선포 사명을 주님께로부터 받는다.

 

제자들의 신앙이 비록 약하였으나 주님께서는 이 제자들에게 당신 부활의 신비를 온 세상에 전하라고 사명을 주신다. 이제 제자들은 자신들의 삶 속에서 고통과 죽음을 불사하면서 이 부활의 신비를 전하기 시작했으며, 이것이 우리의 신앙의 핵심이 되었던 것이다.

 

신앙이 약한 제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그 제자들을 교회의 초석이 되게 하시고 구원을 전하게 하셨다. 이제 그러면 우리들의 신앙은 어떠한가?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어떠한 믿음을 가지고 어떻게 감사하면서 사는가를 살펴보아야 하겠다.

 

비록 나 자신의 신앙이 강하지는 못하지만,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같이 나를 당신의 도구가 되기를 원하신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을 우리의 삶 속에서 발견하도록 노력하며 구원을 선포하는, 비록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용감히 전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이 미사를 봉헌하면서 우리의 삶을 이끌어 주시기를 간절히 청하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와 우리 가정에 언제나 함께 하시면서 당신의 뜻에 맞게 인도해 주시도록 은총을 청하면서 기도하자.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 15)

-한상우신부-

우리에게는
복음이 있습니다.

삶을 바꾸어
놓는 복음이
있습니다.

나누고
선포해야 할
생명의
복음입니다.

전하고
선포해야 할
복음은 생명이신
우리 주님의
부활입니다.

살아계신
주님의 기쁜
소식입니다.

생명이 생명에게
복음을 전하는
기쁨입니다.

복음의 삶이
우리를 찾아
왔습니다.

언제나
어디서든지
함께하시는
부활의 기쁨입니다.

우리를 끝까지
도와주시고
안아주시는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복음을 향해
나갈 우리의
삶입니다.

복음선포는
주님 부활의
아름다운
소명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예수님 부활에 대한 믿음을 촉구합니다.

"나타나셨다는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마르 16,11).
"그들의 말도 믿지 않았다"(마르 16,13).

예수님 곁에 머물며 직접 가르침을 듣고 때로는 파견되어 주님의 일을 수행하기까지 했던 소위 엘리트 그룹 열한 제자들이 영 면이 서지 않네요. 예수님 생전에 수난과 부활 예고를 여러 차례 들었건만, 좀처럼 부활 소식을 믿지 못하니 말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게 맞다면 마리아 막달레나나 다른 두 제자에게가 아니라, 그래도 자기들에게 먼저 나타나셔야 한다고 생각한 걸까요. 그들의 완고한 불신 안에는 정예부대 제자단의 우월감과 주님과 끝까지 함께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구겨진 자존심도 뒤엉켜 있는 듯 보입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마침내 열한 제자에게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시지요. 하지만 꾸짖음도 잠시, 곧바로 그들을 파견하십니다. 주님의 꾸짖음은 실망이나 단죄, 영원한 절연이 아니라 깨우쳐 주시려는 가르침의 한 방식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아직도 부활을 믿지 못하는 이들을 뭘 어떻게 믿고 파견하시는 걸까요? 그들의 신앙은 아직 검증되지 못한 상태인데도 말입니다.

제1독서에는 유다 지도자들, 원로들, 율법 학자들에게 신문 당하는 베드로와 요한이 등장합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푼 좋은 일 때문이지요.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20).

사도들의 변화된 모습이 보이십니까? 그들은 겉으로만이 아니라 속부터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제대로 믿지도 못하는 부적격자 상태에서 "감히" 온 세상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도록 파견을 받은 그들은 자기들의 믿음 수준과 스승의 믿음이 완전히 다른 차원임을 절감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아무리 좋은 일을 보여 주고 그분의 가르침을 전해도 자기들을 불신하고 배척하는 세상 앞에서 자기들의 믿음이 어떠했는지를 떠올리며 인내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제자들은 "무식하고 평범한"(사도 4,13) 자기들의 복음 선포를 들으면서도 기꺼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 앞에서 무한한 겸손과 존경을 품게 될 것입니다. 믿지 못했던 자기들보다 백 배 천 배 나은 그들 앞에서 겸손해지고 낮아지게 될 것입니다.

부활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주님의 선택입니다. 특출난 인성도 충직한 신앙도 제대로 갖추지 못해 한없이 부족한 상태인 우리에게 주님께서 모험을 감행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그분을 제대로 믿지 못하지만 그분은 우리를 진심으로 믿으시기 때문이지요.

우리를 향한 주님의 믿음이 기적을 일으킵니다. 도망치고 외면하고 미지근하던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 자체가 불구자를 일으킨 것 이상의 기적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그래서 더 낮아지고 더 겸손해지며 더 인내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부활 축제가 무르익어 갑니다. 부족한 죄인인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면서" 부활의 증인으로 변모할 때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서 연장되고 완성되는 것이지요. 우리 영혼 깊숙한 곳에서 울려나오는 "알렐루야"를 선포하지 않을 수 없으니 우리 역시 부활의 사람입니다. 부활의 증인인 벗님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불신의 완고함에서 신앙의 확고함으로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39076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4월 7일 부활 팔일 축제 내 토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