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4월 13일 부활 팔일 축제 내 월요일

Margaret K 2020. 4. 12. 18:54

2020년 4월 13일 부활 팔일 축제 내 월요일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서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마태오 28,8-15)
 

"Do not be afraid.
Go tell my brothers to go to Galilee, 
and there they will see m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평안하냐? ……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는 주님의 부활을 확실히 깨닫습니다. 사실 이 여인들은 부활을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려고 그분의 무덤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분을 만났을 때, 그들은 자신들을 묶어 놓았던 슬픔에서 벗어나 부활하신 주님께 스스럼없이 다가가 발을 붙잡고 절합니다. 마침내 여인들은 죽음보다 강한 영원한 생명의 신비 앞에 몸을 숙여 수난과 고통을 통한 부활의 의미를 진정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경비병들은 겁에 질려 까무러치고, 심지어 수석 사제들에게 돈으로 매수되어 부활 사실을 왜곡하기까지 합니다. 믿음의 여인들과 달리 진실을 감추려는 수석 사제들과 물질의 유혹을 떨쳐 버리지 못한 경비병들은, 죄와 죽음을 이겨 낸 영원한 생명과 부활의 힘을 무시한 것입니다.
겨우내 죽은 듯 무심히 서 있던 나뭇가지에도 새 생명의 기운이 만연한 이 봄의 한가운데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부활, 그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한다면 밝혀진 진실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현실 삶에 만족하려는 유혹을 이겨 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두 여인과 함께 무덤 앞에 서 있습니다. 썩은 시신이 있는 무덤이 아니라 빈 무덤을 증언하려고 그 앞에 서 있음을 기억합시다.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사람 사이의 관계와 거리를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개체공간’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습니다. 모든 개체는 자신의 주변에 일정한 공간이 필요하고, 다른 개체가 그 안에 들어오면 긴장과 위협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가족과는 20cm, 친구와는 46cm, 회사 동료와는 1.2m 정도의 거리가 있을 때 안정감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단지 물리적 거리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거리도 포함됩니다. 아무리 친한 사이, 사랑하는 사이라도 적절한 거리가 필요합니다. 가까운 사이라고 해서 함부로 그 거리를 침범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우리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이 이론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사실 가까운 관계라는 이유로 상대방의 영역에 침범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공격들이 쌓이고 쌓여서 의도적으로 더욱더 멀리하게 되고, 때로는 가까운 사이에서 원수의 관계로 바뀌게도 됩니다.

적당한 거리를 지켜주는 것이 상대방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행동입니다. 이때 서로를 더욱 아낄 수가 있으며, 그 관계가 좋은 모습으로 성장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이 거리를 지켜주셨습니다. 먼저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에게는 천사를 보내셔서 당신이 부활하셨음을 알립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가는 중에 부활한 당신의 모습을 직접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자 여인들은 다가가 엎드려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합니다. 거리가 좁혀진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거리를 지켜주시면서 우리가 당신 곁으로 가까이 올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여인들에게 제자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게 하십니다. 제자들과의 거리도 좁히기 위해서는 아직 직접 만나야 할 때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과 믿음의 크기에 따라 주님께서는 늘 거리를 두십니다. 이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는 우리의 사랑이 커야 하고, 또 주님께 대한 믿음이 굳건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서 직접 그 거리를 좁혀주시기만을 원합니다. 문제는 그 거리를 좁히려는 이유가 다른 곳에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시는 주님,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도구로서만 주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서는 진정으로 주님과의 거리가 좁혀질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과의 거리가 더욱더 멀어질 뿐입니다.

주님과의 거리를 좁힐 수 있도록 더 많은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 그 자체이신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도 무덤을 찾아온 여인처럼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시야의 한계를 곧 세상의 한계로 받아들인다. 이게 바로 지성의 오류다(아르투어 쇼펜하우어).



가장 현명한 사람.

야구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물론 점수가 좀처럼 나지 않는 투수전이 재미없는 것은 아니지만, 홈런도 많이 치고 안타도 많이 치는 타격전에 더 큰 재미를 가집니다. 그래서 투수보다 타자가 더 좋습니다.

우연히 높은 타율을 자랑하는 타자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는 어느 연구 발표를 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날아오는 공을 최대한 오래 바라보며 배트를 최대한 늦게 휘두른다는 것입니다. 공이 포수 미트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기다릴 줄 알아야 투구가 어디로 오는지 정확하게 판단해서 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빨리, 더 많이”를 외치는 세상처럼 보입니다. 그래야 더 현명하고 더 능력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조금 느리더라도, 조금 적더라도 정확한 판단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세상의 속도에 맞추는 것보다 주님께 맞추는 사람만이 가장 현명한 사람입니다.                   

부활의 기쁨이 커지면 세상의 기쁨이 작아진다

-전삼용신부-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솔로몬 왕은 자신의 나라에 위대한 건축 기술자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사신을 보내어 그 기술자를 성전건축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와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기술자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를 꺼렸습니다. 그 이유는 그 기술자에겐 너무도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사라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걱정하였던 것입니다. 왕은 이번에 그 지역 영주에게 사신을 보내어 기술자를 설득해보라고 하였습니다. 그 지역 영주까지 부탁하자 기술자는 이 사실을 아내에게 털어놓았습니다. 아내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며 목에 반지를 걸어주며 그 반지에 불이 붙지 않는 한 자신은 남편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으라고 하였습니다.


      기술자는 누구보다 성전을 짓는데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솔로몬 왕은 기술자를 만나 칭찬을 하던 중, 목에 걸린 반지의 이유를 물었습니다. 기술자가 그것은 아내가 자신을 향한 사랑의 징표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솔로몬 왕은 장난기가 발동해 나라에서 가장 잘 생기고 똑똑한 청년 둘을 그 집에 보내어 아내를 유혹해보라고 하였습니다. 두 청년을 맞은 기술자의 아내는 정중히 맞아주었고 잠자리까지 마련해주었습니다. 두 청년이 밤에 아내를 유혹하기 위해 문을 열려고 하자 문이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기술자의 아내가 혹시 몰라서 문을 밖에서 잠가두었던 것입니다.


      이번엔 솔로몬 왕이 변장을 하고 직접 나서기로 합니다. 그리고 기술자의 아내를 찾아가 하루 묵기를 청합니다. 기술자의 아내는 솔로몬의 지혜와 기품에 자신을 유혹하러 온 그 사람이 임금임을 바로 알아보았습니다. 그에게 여러 개의 달걀을 삶아서 저녁으로 대접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달걀에는 각기 다른 색이 칠해져 있었습니다.


      기술자의 아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임금이시여, 색이 다른 달걀의 맛이 어떻습니까?”

“아니, 내가 임금임을 알고 있었군. 물론 맛은 다 똑같지.”

“여자도 똑같습니다. 겉으로는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속은 다 똑같습니다. 저는 임금께 속한 백성이라 모든 것은 임금께 달려있습니다. 그러나 천상의 지혜를 지닌 임금께서도 세상 모든 욕망은 헛된 것임을 아시리라 믿습니다.”


      솔로몬은 자신의 장난이 지나쳤음을 사과하고 돌아와 기술자를 칭찬해주면서 다른 기술자들의 열 배에 해당하는 수고비를 주었습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예화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이 세상의 기쁨과 반대입니다. 그래서 천상의 기쁨을 얻은 이들은 세상의 기쁨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부활의 기쁨이 바로 천상의 기쁨 중 으뜸입니다. 그 기쁨이 있다면 세상의 기쁨이 자신을 유혹하게 만드는 것은 반지에 불을 붙게 하기보다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두 기쁨이 대비되고 있습니다. 천사를 만나고 기쁜 소식을 전하러 가는 여인들의 기쁨과, 천사를 만나 기절했다가 유다 지도자들에게 많은 돈을 받고 기뻐하며 거짓을 전하는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의 기쁨입니다. 경비병들도 기쁩니다. 많은 돈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그런 경비병들이 전하는 말을 더 믿습니다. 마태오복음은 말합니다.

“경비병들은 돈을 받고 시킨 대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 말이 오늘날까지도 유다인들 사이에 퍼져 있다.”


      그러나 만약 부활의 기쁨을 가진 여인들에게 유다인들이 많은 돈을 주며 거짓말을 전하라고 한다면 여인들은 그 돈에 휘둘릴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부활의 기쁨은 돈 주고 살 수 없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부활의 기쁨으로 세상의 기쁨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천국의 기쁨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기쁨이 침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기쁨을 원하는 사람들은 부활의 기쁨 역시 그들을 유혹할 수 없습니다. 어떤 기쁨을 원하느냐에 따라 각자가 사는 세상이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일반대학을 다니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느꼈습니다. 갈등이 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제가 되는 행복이 있고, 세상에서 사는 행복이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사는 행복은 어느 정도 맛보았지만, 사제가 된 행복은 추측으로만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제가 되는 행복을 택할 수 있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주님 은총의 결과인 것 같습니다. 최종적으로는 사제가 되어서 세상의 행복을 조금씩 버려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제로 사는 행복을 더 누리려면 세상의 행복을 더 버려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럴수록 더 행복해지고 세상의 행복은 더 맛이 없어집니다. 이것이 참으로 부활을 체험하는 방식인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란 세상의 행복을 색깔 다른 달걀들로 보이게 만듭니다. 그게 그것입니다.


      여인들의 기쁨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졌습니다. 천사의 말을 듣고 기뻤고, 예수님을 만나 더 기뻤으며, 그 기쁨을 교회에 전함으로서 더 기뻐졌습니다. 이 기쁨이 세상의 행복을 잊게 했습니다. 그러나 경비병들은 세상에서 받는 많은 돈의 행복은 느꼈겠지만, 그 이후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우리는 이 두 기쁨 사이에 놓여있습니다. 부활의 기쁨은 미지의 기쁨입니다. 그러나 세상 모든 기쁨을 이기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세상 모든 욕망이 그게 그것으로 보인다면 부활의 기쁨을 품은 사람입니다.


-조재형신부-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지하실로 내려가니 보일러가 고장 났습니다. 2005년에 설치했으니 15년이 지났습니다. 신문사의 일을 도와주시는 형제님께 이야길 했습니다. 형제님은 맥가이버처럼 신문사의 일을 도와 주셨습니다. 싱크대의 수도꼭지도 갈아 주셨고, 형광등의 안전기도 바꿔 주셨고, 계단의 난간도 만들어 주셨고, 샤워실 바닥의 타일도 새로 해 주셨습니다. 미다스의 손이 황금을 만들었다면, 형제님의 손을 거치면 낡은 것은 새롭게 되었습니다. 고장 난 것은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같은 손인데 저와는 많이 다른 손입니다. 형제님은 보일러를 교체해야 한다고 합니다. 수명이 다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보일러를 교체하니 다시금 따뜻한 물이 나왔습니다. 15년 동안 신문사의 난방을 책임져준 보일러, 따뜻한 물이 나오도록 해 준 보일러가 고마웠습니다. 새롭게 교체한 보일러도 맡겨진 일을 충실하게 하리라 믿습니다.

 

역사는 이어달리기입니다.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 시대가 있었습니다. 토테미즘, 애니미즘, 다신교, 일신교, 유일신교가 있었습니다. 수렵과 유목, 농경 시대, 산업혁명, 디지털과 인공지능의 시대가 있습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땅은 고조선,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후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대한제국시대, 대한민국 시대가 있습니다. 문화, 예술, 음악, 미술, 건축은 시대에 따라서 변화와 발전이 있었습니다. 인류의 역사와 문화는 단절과 고립이 아닙니다. 오래된 것이지만 좋은 것을 계승하고 발전시켜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활동하셨던 갈릴래아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 만났던 곳입니다. 인도의 철학과 종교가 만났던 곳입니다.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문명이 만났던 곳입니다. 갈릴래아는 인류 역사의 변방이 아니었습니다. 기존의 사상과 새로운 사상이 만나는 융합의 장소였습니다. 율법과 계명의 을 넘어서는 새로운 가르침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곳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여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갈릴래아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새로운 빛을 밝히는 곳입니다. 갈릴래아는 두려움과 공포를 넘어 새로운 희망과 사랑이 넘쳐나는 곳입니다. 갈릴래아는 슬픔과 고통 속에 흘리는 눈물을 위로와 격려로 닦아 주는 곳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현장으로 달려가서 환자들을 돌보는 간호사와 의료진이 갈릴래아입니다. 미사가 중지되어서 성체를 받아 모시지는 못하지만 미사의 소중함을 깨닫고,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고, 가진 것을 기쁜 마음으로 나누는 마음이 갈릴래아입니다. 두려움과 공포 때문에 숨어있던 다락방은 결코 갈릴래아가 될 수 없습니다. 또다시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갈지라도 거친 광야에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다면 그곳이 갈릴래아입니다. 그곳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부활시기 부속가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 나의희망 죽음에서 부활했네. 너희보다 먼저앞서 갈릴래아 가시리라.”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셨다.” 

-이영근신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제자들을 극심한 두려움으로 몰아넣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스승의 죽음이라는 당혹스런 사실 앞에서 믿음의 흔들림과 의혹과 허탈감으로 절망과 혼란에 빠졌을 것입니다.

자신들도 붙잡혀 죽게 될까 봐 불안에 떨어야 했고, 불투명한 미래가 걱정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숨어서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승을 잃은 다른 동료들이 모두 절망에 빠졌을 때도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는 그 깊은 어두움 속에서도 결코 갈망이 식지 않았습니다.

 사랑이 두려움보다 컸던 것입니다. 그만큼 사랑이 깊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그리움이 되어 이른 새벽 스승의 무덤을 찾아가게 했고, 거기서 그들은 천사를 만나 놀랍고 기쁜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셨다.”(마태 28,7)


그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마주 오면서 평안하냐?’ 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천사를 통해 사명을 주었건만, 굳이 열절하신 사랑으로 직접 오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마주 오십니다.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향하여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인간을 향하여 계신 분(본 훼퍼)이시기 때문입니다.

당신 사랑의 눈동자 안에 우리를 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찾아 나서기만 하면 나 여기 있노라.”(이사 58,9;이사 66,1) 하시며, 이미 찾아와 우리 앞에 계십니다.

항상 우리를 향하고 계셔서, 우리가 찾기 전에 먼저 우리를 향하여 찾아오십니다.

그러니, 더 이상 예수님을 붙잡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분께 붙잡혀 있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를 찾으시는 당신 앞에, 항상 ,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당신 면전에 있어야 할 일입니다. 항상 당신을 향하여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당신의 사랑이 두려움을 몰아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시어, 막달레나에게서 두려움을 몰아내시고, 당신 부활을 선포하는 첫 사도로 파견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10)


우리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가리켜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십니다.

당신을 부인하고, 배반하고, 달아나버린 제자들을 말입니다.

비록, 그들이 당신을 떠났어도 진정으로 사랑하신 까닭입니다.

이미 그들을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내 형제에게로 가라바로 이것이 당신께서 부활하시어 첫 사도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10)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형제들 안에서 예수님을 뵈올 것입니다.

척박한 땅 갈릴래야, 우리가 머물고 있는 바로 이 땅, 바로 여기, 이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주님을 뵈올 것입니다.

진정 예수님께서는 형제들 안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형제를 사랑할 때 부활 생명이 우리 안에서 피어오르게 될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형제를 사랑하게 하소서.

형제들 안에서 당신 얼굴을 뵙게 하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10)


주님!

곁에 계시는 당신을 두고도 모르는 척 무시하고 비껴가도,

당신께서는 저를 형제라 부르시며 다정히 손을 잡으십니다.

붙들리게 하소서. 당신 사랑에 늘 붙들려 있게 하소서.

사랑을 보게 하소서. 늘 함께 동행 하시는 제 안에 들어와 꽃을 피우는 당신의 사랑을 보게 하소서. 아멘.


경비병들을 매수하는 사제들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28,8-15: 병사들에게 많은 돈을 집어주며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8) 그들은 상상도 못한 놀라운 일들을 보았다. 그 여인들은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였다. 바로 얼마 전에 그분이 안장되시는 것을 보았는데 그 무덤이 비어 있었다. 이는 그들이 주님의 빈 무덤과 부활에 대한 증인이 되도록, 천사들이 그들을 무덤으로 데려간 것이다.

 

많은 군사들이 바로 곁에 앉아 있었으니, 아무도 그분의 시신을 훔쳐갈 수 없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니 그분은 부활하신 것이다. 그래서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했던 것이다. 여자들은 예수님을 계속 따라다닌 보상을 받았다. 그들이 가장 먼저 부활을 목격하였고, 자기들이 들은 것과 본 것을 기쁘게 선포하였던 것이다. 주님을 체험했을 때, 우리도 두려움과 기쁨에 싸인 적이 있는가?

 

그 여자들이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갈 때, 예수님께서 마주 오시며 평안하냐?”(9)고 하신다. 그들은 몹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그분께 달려갔다. 그들은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하였다. 이렇게 그들은 부활에 대한 증거를 보았고 확신하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10) 주님께서는 이 여인들을 통해 당신의 제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신다.

 

경비병들은 일어난 일에 대해 보고하러 왔을 때, 사제들은 그들에게 돈을 주며 부정한 일이 일어났다고 거짓말을 하도록 시킨다.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갔다.”(13)라고. 그러나 무덤은 권력자의 명으로 봉인되어 있었고, 무덤 주위에는 경비병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그리고 무덤을 막고 있는 거대한 돌을 옮길 수 있었을까? 그들이 돌을 움직일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많은 사람 몰래 그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의 설명은 처음부터 끝까지 말이 안 된다. 유다에게 돈을 주어 배신하게 만들었던 사제들은 경비병들에게도 돈을 주어 입을 막고 신앙을 무덤 속에 가두어 놓으려고 하였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칠 생각이었다면,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장되고 무덤이 봉인되기 전에 시신을 훔쳐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 밤 무덤에 제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들은 모두 골방에 숨어있었다.

 

수석 사제들은 무덤을 지켜야 하는 이유를 빌라도에게 말하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신을 훔치고서는 부활하셨다고 할지 모른다고 하면서 그렇게 되면 이 마지막 기만이 처음 것보다 더 해로울 것”(마태 27,64)이라고 했는데 제자들이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들은 주님께서 살아계셨을 때, 돈을 주고 그분의 목숨을 사더니, 그분이 돌아가시고 되살아나시니, 또 다시 돈을 주고 그분이 부활하신 증거를 지우려 했다. 그들은 돈만 쓰고 말았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고 한다.”는 말이 있다. 진리를 은폐하려는 행위가 바로 그런 것이라고 하겠다. 마치 태양을 손으로 가려보려는 행위는 어리석은 행위와 같은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비병들만 매수해서 가릴 수 있었다면, 그 진리가 어떻게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올 수 있었겠는가? 그러기에 순간적으로 현실적으로 어느 경우에도 자신의 안일을 위하여 잘못된 것을 은폐하기보다 진리를 따르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그때에 우리는 진리 안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 10)

-한상우신부-

주님과
우리 사이에는
첫마음의
갈릴래아가
있습니다.

아직도
식지 않은
우리 삶의
갈릴래아입니다.

삶을
가르쳐준 곳에서
예수님을 다시
만나게됩니다.

우리가 아는
일상의
갈릴래아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빼고
부활을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예수님과
함께합니다.

갈릴래아로
가는 모든
일상이 주님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두려움과
불안마저
사랑이 됩니다.

다시 시작하는
부활의 일상입니다.

우리에게
거저 내어주시는
우리의 일상입니다.

거기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오상선신부-


주님 부활 대축일을 지낸 우리는 한 주간 내내 그 기쁨을 이어갑니다. 오늘 미사의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구약성경과의 연속성 안에서 보여주며 우리의 믿음을 북돋아 주고 있습니다.

제1독서는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부분입니다. 그는 성령을 받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시편 16,10을 인용하여 증명합니다.

"(다윗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견하며 '그분은 저승에 버려지지 않으시고 그분의 육신은 죽음의 나라를 보지 않았다' 하고 말하였습니다"(사도 2,31).

베드로는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신원을 구약성경과의 연속성 안에서 포착하여 설명하는 것입니다. 유다인들이 시편의 저자라 믿는 다윗의 권위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당위성을 입증하고 있지요.

복음에서는 부활의 첫 증인이 된 여인들이 등장합니다.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마태 28,8).

빈 무덤 앞에서 천사로부터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은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는 천사가 일러준 대로 달려가기 시작합니다. 애당초 무덤이 목적지였던 그들의 방향이 바뀝니다. 예수님 생전에 그분의 측근이었던 제자들에게 이번에는여인들이 예수님의 소식을 전하러 가야 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마태 28,10).

갑자기 나타나신 예수님이 다가오셔서 천사의 말을 다시금 반복하십니다. 갈릴래아!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사 8,23-91을 인용해 갈릴래아를 "이민족들의 갈릴래아"(마태 4,15)라고 칭한 바 있지요. 갈릴래아는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변방에 속하고 구성원들도 단순 소박한 민중과 이방인들이 주를 이루는 곳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여인들은 제자들에게 달려가고, 제자들은 갈릴래아로 달려갈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예수님을 뵙고, 때가 되면 전 세계방방곡곡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선포하러 뛰어나갈 것이고요. 시편이 증언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부활의 증인인 여인들과 제자들을 통해 세상 끝날까지 그 방향성을 이어갈 것입니다. 이 연장선이 구원의 연속성을 드러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두려움과 기쁨이 뒤섞인 상태에 있는 여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움은 방향성의 발목을 잡아 연속성을 단절시키고 파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인들은 빈 무덤에서 시작된 새로운 구원의 동선이 온 인류에게 이어지도록 그들이 받은 말씀대로 달려가야 합니다.

어쩌면 부활은 하느님의 전체 그림 안에서 보면 전혀 엉뚱하고 생뚱맞은, 얼토당토 않은 사건이 아닐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이 "때가 차서" 이루어진 것이니까요. 하느님 구원 계획의 연속성은 이를 받아들이는 이들에게서 축복과 은총이 되고, 한사코 거부하고 배척하는 이들에게는 자기 기만과 고착의 벼랑이 될 것입니다.

"수석 사제들은 원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한 끝에 군사들에게 많은 돈을 주면서"(마태 28,12)

진정 두려움에 빠진 이들은 누구일까요? 여인들과 함께 지진과 천사 발현을 체험하다 까무러친 군사들을 돈으로 매수하면서까지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고 왜곡하는 종교 지배층이 아닐까 합니다. 이는 두려움이 방향성의 발목을 잡아 연속성을 단절하고 파괴한 실제 예시가 될 것입니다. 유다인들이 성경의 권위를 빌어 자행한 폭력과 거짓은 두려움에서 시작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 부활 사건 앞에서 우리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숙고해 보라고 초대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과연 나는, 구원의 연속성 안에서 순항하고 있는지요? 마치 쇼트트랙 계주의 밀어주기처럼 내 등 뒤까지 와닿은 구원의 "밀어주기"에 순응해 기쁜 소식을 전하러 힘껏 달려가고 있는지요? 예수님의 부활 소식은 그 순간을 실제로 본 이들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믿고 따른 이들을 통해 전해졌음을 기억합시다. 잘났건 못났건, 의인이건 죄인이건 우리 모두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바뀐다면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37232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4월 2일 부활 팔일 축제 내 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서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마태오 28,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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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인들의 기쁨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졌습니다. 천사의 말을 듣고 기뻤고, 예수님을 만나 더 기뻤으며, 그 기쁨을 교회에 전함으로서 

더 기뻐졌습니다. 이 기쁨이 세상의 행복을 잊게 했습니다. 그러나 경비병들은 세상에서 받는 많은 돈의 행복은 느꼈겠지만, 그 이후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우리는 이 두 기쁨 사이에 놓여있습니다. 부활의 기쁨은 미지의 기쁨입니다. 그러나 세상 모든 기쁨을 이기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세상 모든 욕망이 그게 그것으로 보인다면 부활의 기쁨을 품은 사람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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