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12일 예수 부활 대축일
2020년 4월 12일 예수 부활 대축일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요한 20,1-9)
On the first day of the week,
Mary of Magdala came to the tomb early in the morning,
while it was still dark,
and saw the stone removed from the tomb.
2020년 4월 12일 주일 주님 부활 대축일 매일미사_유 철 베드로 신부 집전
https://youtu.be/lu2SNnIkVH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예수님 부활에 대하여 복음서들은 ‘빈 무덤’과 ‘부활하신 주님의 발현’을 이야기합니다. 특히 파스카 성야와 주님 부활 대축일 모두 예수님의 빈 무덤을 찾은 여인들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사실이 확인됩니다. 여기서 마리아 막달레나는 여인들 가운데 맨 먼저 빈 무덤을 발견하였고,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립니다.
그런 가운데 요한 복음사가는 “아직도 어두울 때”를 더욱 강조합니다. 물론 다른 복음사가들이 요한처럼 ‘주간 첫날 새벽’(또는 이른 아침)을 언급하지만 이렇게 ‘어둠’을 덧붙이지는 않습니다. 이는 분명 복음서 처음에 요한이 사용하였던 ‘빛과 어둠’(요한 1,5 참조)을 상기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이처럼 ‘빛과 어둠’을 강조한 예수님의 사랑받던 제자는 빈 무덤을 ‘보고’ 주님의 부활을 ‘믿었습니다’(요한 20,8 참조). 사실 요한에게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만나는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와서 보라.’(요한 1,39 참조)는 초대를 받았던 안드레아는 물론 베드로, 필립보, 나타나엘, 사마리아 여인 그리고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이 모두 그렇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복음서 집필 목적을 마지막에 분명히 밝힙니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1).
그렇다면 믿는 것은 예수님께 사랑받는 지름길입니다. 곧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그분을 믿는 이 사이에 내재하는 밀접한 관계를 나타내며, 그 결과로 주님의 사랑을 이끌어 냅니다. 따라서 어둠 속에서 모든 사람을 비추는 생명의 빛을 보고 믿는다면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입니다. 빈 무덤을 보고 주님의 부활을 믿는다면 우리는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빈 무덤은 주님의 말씀을 떠올려 주님과 다시 만나는 곳이라 하겠습니다.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어둠을 가르는 빛
어둠과 허무의 암울한 우주에서 하느님의 영으로 빛이 나타나 어둠은 사라지고 행복하고 아름다운 우주가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만드시고 아름다운 세상에 사는 은총을 주셨지만 나약한 인간은 악의 유혹에 빠져 다시금 죄악과 어둠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무한한 사랑의 하느님께서는 어리석은 인간을 위해 당신의 하나뿐인 구세주를 내려 보내셨습니다.
탈출기의 빛
유대인들은 희망이 없는 어둠 속에 살았습니다. 어린 사내아이는 죽임을 당하는 참혹한 고통 속에서도 그들은 이집트를 탈출하려는 어떤 희망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과월절 밤, 주님께서는 이집트 군을 전멸시키고 절망밖에 없는 그들을 이집트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인도하셨습니다. 홍해에 다다르자 그들은 노예였던 과거의 삶을 버리고 주님의 자녀가 되어 자유로운 인간,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노예였던 과거를 버렸기에 그들은 주님의 은총으로 메마른 홍해를 건널 있었습니다. 다시 희망의 빛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스도 부활의 빛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시는 순간 이 세상에는 악과 어둠만이 존재하였습니다. 단단한 무덤안에 영원히 갇히신 예수님과 함께 인간의 희망도 영원히 묻혔습니다. 그러한 어둠과 절망 속에 주님 부활의 빛이 비추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악의 어둠을 무너뜨리고 부활하시어 다시 우리 곁으로 오시었습니다.
예수님 부활로 세상은 다시 희망과 믿음의 빛, 새로운 생명의 빛이 비추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 부활의 빛으로 우리 내면의 어둠과 우리 앞을 가로막는 어둠을 벗어내야 합니다. 어둠을 벗어내고 주님의 빛으로 한발을 내디뎌보십시오. 새 생명과 희망의 빛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죄의 그늘에서 벗어나십시오.
오늘 세례를 받은 새 형제 자매를 맞이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흘러내리는 거룩한 성수에 그들은 침례하고 세례를 받습니다. 성수에 침례하는 것은 과거를 버리고 예수님과 함께 묻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과거 그들의 모습, 절망적인 마음 그대로 예수님의 시신을 찾아 무덤에 들어갔지만 그들은 새로운 사람이 되어 무덤을 나왔습니다. 무덤에 과거를 묻어두고 새로운 영혼으로 부활한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부활을 맞이하는 거룩한 밤에 우리는 깨어 있습니다.
그러나 무덤에 묻힌 사람을 지키는 경비병처럼 밤을 지새워서는 안될 것입니다. 비록 멀리 떠나셨지만 언젠가는 돌아오실 거라는 믿음을 가진 간절한 자녀의 마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사악함과 욕망을 죽이기 위해 예수님과 함께 묻혀야 합니다. 그리고 과거를 묻고 예수님과 함께 다시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야 합니다.
매년 부활절을 맞이하여 예수님과 함께 부활할 때만이 의롭고 용기 있는 삶, 자신을 잊고 이웃을 사랑하고 나눔을 실천하는 삶, 고귀한 이상을 지향하는 자유롭고 가치 있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스스로의 삶을 구속하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욕망의 노예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숭고한 삶을 위하여 집착에서 벗어나십시오. 옹졸함과 편협함에서 벗어나 광활하고 안락한 세상으로 들어가십시오. 나를 버려야 합니다. 나의 잘못된 과거를 버려야 새로 태어날 수 있습니다. 그 것만이 주님의 부활을 진정으로 맞이하는 자녀의 모습입니다. 나의 잘못된 과거를 버리고자 한다면 앉아서 주님을 기다리지 마십시오. 주님의 무덤에 들어가 나를 버리고 주님과 함께 새로 태어나십시오. 그것이 해마다 맞이하는 부활의 의미입니다.
주님, 저희에게 진정한 영혼의 부활을 일깨워 주소서. 아멘

1.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2. 매년 부활절에 나의 과거를 버리고 있습니까?
3. 부활절을 맞이하며 해마다 다시 태어나고 있습니까?

새로운 부활의 증거
-임상만신부-
언젠가 석가모니를 화장(다비)했던 자리에서 석가모니 유해가 발견되었다며 인도를 위시한 불교 국가에서 한동안 떠들썩했던 적이 있다. 그 후 발굴된 유해들은 잘 정돈되어 신도들을 위해 시가 행렬을 했고, 수많은 사람이 유해가 지나갈 때 땅에 엎드려 절하며 믿음을 드러냈다. 이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한 가톨릭 사제가 나직이 말했다. “만약 예수님 무덤에서 뼛조각이 하나라도 발견되었다면 그리스도교는 이미 산산조각이 났을 텐데….” 그리스도교 신앙은 기본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나온 말이다.
오늘 복음은 빈 무덤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면서 텅 빈 무덤이야말로 예수님 부활의 완벽한 증거가 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무덤이 비어있으니까 예수께서 당연히 부활하신 것이라는 이 논리는 부활의 증거라기보다는 차라리 교회 신앙의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빈 무덤 소식을 들은 제자들뿐만 아니라 소식을 전한 막달라 마리아마저도 빈 무덤이 부활의 증거라고 보지 못하고 단지 누군가 주님의 시신을 가져갔다며 걱정만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빈 무덤을 보고서도 부활을 믿지 못하던 제자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았다고 다수가 증언하는데도 절대로 믿지 못하던 제자들이 어느 순간부터 어떤 이유로 부활을 확신하고, 노래하고, 증거하다 죽어갔다면 분명히 그들에게 부활을 믿게 한 엄청난 증거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 부활에 대한 완벽한 증거가 어떤 것인지는 잘 알 수 없지만, 부활에 대한 완전한 믿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적이고 객관적인 증거가 아니라 바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주관적인 체험으로써 그 부활의 증거를 수용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빈 무덤에서 우리가 주님을 새롭게 만남으로 부활 믿음이 시작되고, 그 빈 무덤에서 우리 이름을 불러주실 때 부활을 깨닫게 되며, 예수님께서 쪼개어 주시는 빵을 나누어 받을 때 그 부활의 진실을 보고 깨닫게 되는 부활 신비의 출발점이 빈 무덤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주님의 부활을 노래하는 이 시기에 주님의 부활이 모든 이에게 전달되고 그들 또한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우리 자신이 새로운 부활의 증거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이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의 삶을 보고 주님의 부활을 믿게 되었고, 사도들의 치유 기적을 통해서 주님을 만났으며, 사도들의 전교를 통해서 주님의 부활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빈 무덤 대신에 우리가 주님 부활의 증거가 되어 부활을 선포하고, 우리의 변화된 삶으로 세상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손바닥과 옆구리를 만져보고 믿을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리고 절망의 슬픔에 젖은 사람들이 주님의 따스한 목소리를 듣고 위안을 느끼며 부활하신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해야 한다.
이제 객관적인 증거로서의 빈 무덤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사실 증거를 보았다고 해서 다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 사도는 가장 먼저 빈 무덤에 들어가 보았고 또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었음에도 성큼 부활의 증인으로 나서지 못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은 객관적인 증거나 목격으로 누구나 증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주님의 성령 안에 변화된 새 삶을 살아야 부활을 증언할 수 있고, 예수님의 부활로 변화된 모습이 가장 강력한 주님 부활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빈 무덤으로 부활을 증거하기 보다는 우리 스스로가 부활의 증거가 되고 부활의 믿음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빈 무덤도 절망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 15,14)

빈 무덤은 영원한 생명의 문이다
-김창선-
주간 첫날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시어 저희 마음에 희망의 등불을 밝혀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빈 무덤’ 사건은 ‘부활이요 생명’(요한 11,25)이신 주님께 대한 믿음과 부활의 희망을 새롭게 합니다.
신종 바이러스가 돌풍을 일으킨 사순 시기는 특별합니다. ‘무지의 구름’ 아래 죽음의 공포에 떠는 병든 세상의 민낯을 보았고, 반면에 재난의 극복을 위해 불철주야 사투하는 의료진과 봉사자들의 인내와 희생에 감사했습니다. 우리는 기도와 조용한 봉사로 함께 하면서 믿음이 세상을 이기는 힘(1요한 5,4)임을 알고 주님의 영원한 자애에 희망을 봅니다.
코르넬리우스의 집에서 베드로가 행한 설교(제1독서)는 나자렛 예수님을 알고 있는 초기교회공동체에 그리스도에 관한 전형적인 가르침입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됨을 봅니다. 베드로의 증언은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역사적 현존과 복음을 보존하고 일치를 이룬 교회의 전통을 충실히 이어갑니다.
사도들은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에 대한 전문가입니다. 베드로는 성삼위께서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의 공생활, 그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성찬의 전례, 생명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증언합니다. 이는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말씀과 성체를 모시고 천상생명에 참여(제2독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녀는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을 생각하지 말라”(콜로 3,2)는 바오로 사도의 권고는 마음에 간직해야 할 교훈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영도자”(사도 3,15)이십니다. ‘영혼의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고”(사도 10,43), 다시 오실 때 그분과 함께 하느님의 현존에 함께하는 ‘영광’(콜로 3,4)을 누릴 것입니다.
오늘의 복음에 나오는 ‘빈 무덤’ 사건은 네 복음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요한 20,1)” 하고 전합니다. 마리아의 첫 반응은 “누가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릅니다”라고 두 번이나 말합니다(요한 20,2.13).
인간의 이성으로 부활의 신비를 어찌 알겠습니까. 첫 새벽에 여자 혼자 문밖에 나가는 것도 이례적입니다. “마리아야!”(요한 20,16)하고 이름을 불러주신 주님을 만나 뵙고서야 부활의 진리에 경탄합니다. 마리아는 일곱 마귀의 악령에 시달리다 치유의 은총을 입었고, 자기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든 인물(루카 8,2-3)입니다.
마리아는 주님 따라 골고타 십자가의 길을 걸었고, 십자가상에서 숨을 거두시고, 무덤에 묻히시는 모습을 지켜본 뒤, 돌아가 향료와 향유까지 준비(루카 23,49.55-56)합니다. 온전히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인 삶을 산 그녀만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부께로 올라가신다는 특별한 계시를 받습니다. 마리아는 주님 분부대로 제자들에게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말씀을 전합니다(요한 20,17-18).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사도들에게 이 메시지를 전한 마리아에게 ‘사도들의 사도’(교황 베네딕토 16세, 2006)란 영적 지위를 부여합니다.
마리아가 무덤에 간 때는 주간 첫날 아직 어두울 때입니다. 주간 첫날은 안식일 다음 날인 ‘여덟째 날’입니다, 주님 부활로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여신 하느님을 찬송하며 부활 팔일 축제를 지냅니다. ‘주님이 마련하신 날’(화답송)인 주일은 은총의 날이기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의 생명을 누리는 그리스도인은 주일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마리아의 전갈을 받은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 중 애제자(요한)가 먼저 무덤에 도착했으나, 뒤에 도착한 베드로가 먼저 무덤 안으로 들어가 조사를 합니다. 요한은 잘 포개놓은 수의를 보고 믿었습니다. 성탄 때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 예수님의 포대기와 빈 무덤에 개켜있는 수의에서 강생의 신비와 부활의 진리를 깨닫습니다.
제자들이 발견한 빈 무덤은 부활의 직접증거는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 다시 살아나야 한다.” 하신 성경 말씀(수난과 부활 3회 예고; 요나의 표징; 사도행전 2,32)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요한 20,9). 그리스도 강생과 십자가 수난과 부활의 신비를 믿고 고백하는 우리는 성경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빈 무덤 사건은 땅에 있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하늘 위에 있는 걸 바라보는 자기발견의 영적 체험입니다. “영은 생명을 주나 육은 쓸모없다.”(요한 6,63) 하신 말씀을 되새깁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분이 그리스도(요한 1,14)이십니다. 십자가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성체가 ‘그리스도의 몸’이듯이 말씀도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친교로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돕는 사랑의 삶이 영원한 생명의 문을 향한 여정임을 깨닫고 하늘 위 하늘을 바라보고 기도와 성사로 나아갑니다.

비움의 부활 체험
-신희준신부-
‘부활’ 하면 뭐가 떠오르시나요? 잠깐 눈 감고 떠오르는 것들이 뭔지 보시겠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것들이 떠 오릅니다. 봄, 병아리, 부활달걀, 토끼, 개나리, 노란색, 부활초 등 뭔가 활기차고 생기가 넘치고 꽉 차 있는 이미지들이 눈에 선합니다. 왠지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 근처에 갔을 때 무덤 문을 박차고 예수님이 ‘짜자~ㄴ’ 하고 위풍당당하게 등장하셔도 하나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은 부활 이미지! 음?! 그건 아 무래도 슈퍼맨의 이미지 아니냐고요?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진심을 털어놓자면, 마리아 막달레나 와 베드로와 요한이 체험한 ‘부활 체험’, 곧 ‘빈 무덤 체험’은 저에게는 어쩐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사건입 니다. 광으로 꽉 차고 넘쳐야 할 ‘부활 체험’인데, 전혀 그 렇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로 텅 비어 있는 모습에 어리둥 절할 뿐입니다. 게다가 이렇게 빈 무덤을 보고 곧바로 예 수님의 부활을 확신하고는 사도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달려간 마리아 막달레나, 또 빈 무덤을 들여다보고는 즉시 주님의 부활을 믿은 요한과 베드로! 이들은 과연 빈 무덤에서 무엇을 보았을까요? 그리고 이들이 본 것을 저는 왜 보지 못하고 있을까요?
이런 질문을 던지는데 문득 이번 사순 시기의 첫날인 재의 수요일 복음 말이 떠오릅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제자 들에게 말하십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 6,1) 그러 면서 자선, 기도 및 단식에 힘써야 한다고 가르쳐 주십니 다. 그런데 남들한테 드러나지 않게 자선이나 기도나 단식 을 실천하자면,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들을 포기하면서 우 리 자신을 비워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음으로 단식에 대해서 성찰해 보자면, 이사야 예언자 의 말이 참으로 유익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 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 네 양식 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 58장 참조) 단식은 단순히 굶는 데에 그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내 것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어려운 이웃들을 향해 나아가는 데 그 의 미가 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끝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려면 기도를 해야 하는 데, 내 생각, 내 계획, 내 욕심이나 집착으로 가득 차 있으 면 예수님이 보일 리가 없을 겁니다. 이렇게 ‘빈 무덤’은 온갖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비워 진 우리의 내면을 나타냅니다. 부디 이번 부활절에는 마리 아 막달레나,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온갖 욕심과 집착들로 부터 해방된 우리 ‘빈 무덤’에서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알렐루야
-송문식신부-
오늘은 예수 부활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주님 부활의 은총과 축복 그리고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이 거룩한 날에 우리가 느끼게 되는 그 기쁨은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부활 시키시는 놀라운 일 중의 놀라운 일 때문에 생깁니다. 인간들보다 더 현명한 건축가이신 하느님께 서는 집 짓는 자들이 내버렸던 돌인 그리스도를 그와 더불어 죽음을 이겨낸 모든 구원된 자들의 새 로운 성전을 짓기 위한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으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죽음에 처한 반면,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의 심판자로 세우시고 오직 그분을 통해서만 구원이 가 능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억압받는 이들, 고통받는 이들, 박해받는 이 들, 인간 존엄성을 침해받는 이들을 일으켜 세워주는 정의와 선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을 적극적으 로 성취시켜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결코 인간의 희망을 좌절시키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그리스 도의 부활 때문에 굳은 믿음과 확신을 지닐 수 있고 동시에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간직할 수 있 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에게 다가왔지만, 아직도 미래에 완성될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와 같이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미 과거에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임은 틀림없지만, 아직 완성되 지 않았기에 끊임없이 새롭게 이루어져야 할 미래의 사건이며 꿈이고 이상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땅에서 죽음을 넘어서는 부활 신앙의 산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오래전에 어떤 형제께서 “세례성사를 받기 전에는 세례 받은 모든 분이 천사 같은 줄 알았는데 신자 생활을 해보니 아니던데요.”하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큰 충격을 느 꼈습니다. 부활 신앙을 살아야 할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어려움과 고통, 현실적 욕심 때문에 가야 할 걸음을 멈추거나 중단할 때가 많은 삶을 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과 십자가, 죽음 앞에서 절망하는 삶이 아니라 그 안에 숨어있는 희망을, 빛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아 야 합니다. 어떠한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알렐루야’를 노래하며 부활의 증인으로, 주님 사랑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굳건한 신앙을 주시길 주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날은 주님께서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자, 춤들을 추자. 알렐루야!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이 기다림의 시간을 가지면서, 우리 삶 전체가 여러 형태의 기다리는 일이 더해져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밥 먹을 시간을 기다리고, 미사 할 시간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마지막을 주님 앞에 나아갈 날을 기다립니다.
이 기다림이 지루하다면서 그냥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기다릴 수 없다면서 서둘러도 먼저 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때까지 반드시 해야 할 그리고 그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는 순간을 떠올려 봅니다. 솔직히 피하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주님 앞에 서기가 너무나 부끄럽고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지금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기다림의 시간은 절대로 피할 수 없으며 피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날 우리가 주일이라고 하는 주간 첫날 아침 일찍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이긴 날인 주일을 우리는 매번 기념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모르고 무덤에 처음 왔다가 시신이 없어진 사실을 보고서는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알립니다. 이에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으로 서둘러 달려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 마리아를 비롯해서 제자들 모두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복음에 나오듯 ‘아직 곧 어두울 때’라는 말처럼, 제대로 바라볼 수 없는 흔들리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다려야 했습니다. 어둔 밤의 시간을 견뎌야만 했습니다. 주님을 배반했다는 부끄러움, 주님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는 절망, 앞으로 주님 없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걱정 등으로 힘든 시간이었지만 기다려야 했습니다.
무덤에 다녀온 마리아의 말을 듣고서 베드로와 요한은 서둘러 달려갑니다. 주님께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기다림 뒤에는 서둘러 주님 앞으로 달려가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주님의 뜻에 맞춰서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주님 앞으로 서둘러 달려가십시오.


IQ가 높은 사람 천재들의 모임인 멘사(MENSA)를 연구한 자료에서 아주 흥미로운 결과를 볼 수 있습니다. 글쎄 그 머리 좋다는 멘사 회원의 44%가 점성술을 믿고 있고, 56%가 외계인이 지구를 찾아왔다고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점성술이나 외계인의 존재를 믿는 것은 결코 합리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즉, 합리적 사고로는 믿을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머리 좋은 사람들은 합리적이지 않은 믿음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특별히 머리가 좋은 그들의 주장이므로 다른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할까요? 지능에는 이렇게 허점이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지능이 합리적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모든 사람은 나름대로 특별하지만, 또 나름대로는 한없이 부족한 존재입니다.
유일하게 완벽한 분은 주님뿐입니다. 이 주님께서 오늘 부활하셨습니다.

가진자는 더 받지만, 나누지 않으면 가진 것이 아니다
-전삼용신부-
기쁜 부활 축하드립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여인들이 가장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뵙는 행복을 맛봅니다. 그런데 복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여인들은 천사들로부터 예수님 부활의 소식을 듣고는 두려워서 덜덜 떨며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마태오 복음에서 여인들은 천사들의 말을 듣고 그 기쁜 소식을 들으러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왜 무덤에서 나타나셔도 되는데 가는 도중에 나타나셨을까요? 요한복음에서는 이미 사도들에게 예수님께서 사라지신 것을 알린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루카 복음은 천사의 말을 듣고 말씀을 전한 여인들과 그것을 듣고 자신들도 말을 하는 또 다른 여인들이 있었던 것처럼 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부활을 접하는 우리의 각자 다른 자세와도 관련이 됩니다. 저는 마리아 막달레나, 복음을 전하다가 예수님을 만난 여인들, 그리고 천사들만 만나서 겁을 먹고 말을 하지 못하던 여인들, 이렇게 세 부류로 여인들이 나뉘어 있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 차이가 나는 이유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오늘 복음에서 천사들이 “이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해준 것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구두장이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이 구두장이 할아버지의 간절한 소원은 예수님을 단 한 번만이라도 만나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이 꿈속에 나타나 내일 너희 집을 방문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어찌나 기뻤던지 온갖 정성을 들여 음식을 가득 차려놓고 기다렸으나 어찌 된 셈인지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예수님은 그날 저녁 가게 문을 닫을 때까지도 오시지 아니하였습니다. 단지 거지가 한 번 오고, 또 한 번은 청소부 할아버지가 오고, 저녁때는 사과 장수 아주머니가 왔을 뿐이었습니다. 이 구두장이 할아버지는 그만, 거지와 청소부 할아버지와 사과 장수 아주머니에게 예수님을 대접하려고 정성스럽게 준비한 음식을 나누어 주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들 모두 너무나 불쌍하게 보였고 실제로 추위 때문에 또 배고픔 때문에 떨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날 밤 예수님께서 꿈속에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구두장이 할아버지는 왜 오시지 않으셨느냐고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뜻밖에도 “나는 오늘 너희 집에 세 번이나 갔었는데 세 번 다 대접을 잘 받았다. 참으로 너는 나를 사랑하는 줄을 알겠다. 네 이웃에 사는 보잘것없는 사람을 대접하는 것이 곧 나를 대접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톨스토이 작품 속에 나오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사랑하는 사람들 안에 이미 머물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자세요, 기준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가진 자는 더 받게 될 것”이라는 진리가 있습니다. 이는 부활의 기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사들로부터 부활의 기쁨을 전해 받고 제자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러 가던 오늘의 여자들(루카 복음에서는 요안나와 야고보의 마리아로 나옴)은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녀들이 이미 갈릴래아로 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갈릴래아는 이미 가진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복음을 이미 가졌으니 복음 자체이신 부활하신 예수님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갈릴래아로 가야 만난다는 말씀은 진짜 갈릴래아로 가라는 말씀이 아니라 갈릴래아처럼 ‘가진 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갈릴래아 호수는 자신이 가진 물을 끊임없이 요르단강으로 흘려보내 주위를 비옥하게 합니다. 그러나 실제 물의 양이 훨씬 많은 사해는 밖으로 자신의 물을 내놓지 않아 죽은 바다가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가졌다는 말은 내어놓을 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이 잔에서 흘러넘치듯, 이웃에게 내어놓을 줄 알 때 비로소 가진 것이지, 아무리 많이 가져도 내어놓을 줄 모르면 사해와 같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천사들의 말을 듣고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러 가던 여인들은 이미 부활의 기쁨을 가진 여인들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 기쁨을 더 완전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반면 천사들의 말을 듣고 두려움에 떨며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여인들은 아직 갈릴래아에 도달하지 못하여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이신 주님을 만나려면 사랑을 해야 합니다. 사랑도 마중물처럼 메마른 곳에는 가지 않으십니다. 저의 동기 신부 아버지는 수원 빈센트 병원의 영안실로 들어가려다가 살아나신 분입니다. 가스 폭발로 사망 선고를 받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은 물론, 2시간 만에 다 타 버린 살이 어린이의 살로 변하는 기적까지 체험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체험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여 정말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 오게 하셨습니다.
이분이 강조하시는 것이 성호경입니다. 성호경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지만, 그 이후에도 목숨을 끊이시려고 약을 먹으려고 할 때도 성호경을 긋는 자신을 보며 예수님께서 함께 계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열심히 사셨습니다. 내가 지금 흘려보내고 있는 것들 안에 주님은 현존하십니다. 그리고 더 많이 내어줄수록, 더 많이 그분을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가지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것을 내어놓으십시오. 믿음을 가지고 싶다면 믿게 하려고 노력하십시오. 기뻐지고 싶다면 기쁘게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교회라는 천사에게서 예수님 부활의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려면 오늘 복음의 여인들처럼 주위 사람들에게 그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만나 더 기뻐집니다. 예수님은 갈릴래아가 된 사람들에게만 그 기쁨을 더 충만하게 해 주십니다. 가진 자가 더 갖게 되는 것은 진리입니다. 내가 나누는 것이 앞으로 내가 더 충만해질 것입니다. 기쁜 부활을 먼저 전하기를 결심하며, 더 기쁜 부활 맞으시길 빕니다.

-조재형신부-
부활 대축일에는 교구장님의 ‘부활메시지’를 읽어드렸습니다. 저는 본당에 있는 것이 아니고, 코로나19로 본당의 미사가 중지 되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미주지사의 이름으로 부활절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내려주시는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 모두와 온 세상에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뉴욕이 세계적인 관광지가 된 것은 자유의 여신상과 맨해튼의 고층 건물과 브로드웨이의 공연도 있겠지만 센트럴 파크가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뉴욕 시민이 가장 좋아하고, 자주 가는 곳도 센트럴 파크라고 합니다. 공원을 조성하면서 이렇게 비싸고, 좋은 땅에 빌딩을 세우자는 의견도 많았다고 합니다. 당시 공원을 설계하던 분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지금 이 땅에 건물을 세우면 당장 이익이 오겠지만 먼 훗날 이 땅 만큼의 병원을 지어야 할 겁니다.” 뉴욕시는 설계자의 의견을 받아들였고, 센트럴 파크는 뉴욕 시민은 물론 세계인이 사랑하는 공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은 신앙의 센트럴 파크가 되도록 믿음, 희망, 사랑의 나무를 심도록 하겠습니다. 나눔, 헌신, 친교의 꽃이 피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교회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어야 할까요?
첫째는 ‘성사’입니다. 성사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세례성사는 두 가지 은총을 줍니다. 지난날의 잘못을 용서받는 은총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다른 성사에 참여할 수 있는 은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용서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도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고백성사는 하느님과 화해하는 성사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결심의 성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시면서 ‘이는 여러분을 위한 내 몸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성체성사는 가장 거룩한 성사입니다. 주님께서 가신 길을 따르겠다는 다짐의 성사입니다. 아픈 이를 위한 병자성사, 신앙인으로 굳세어지는 견진성사, 하느님의 창조사업을 이어가는 혼인성사,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신품성사가 있습니다. 성사생활에 충실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이 나라를 사는 겁니다.
둘째는 ‘성서’입니다. 성서를 읽고, 성서를 쓰는 모임이 있으면 좋습니다. 성서 백 주간, 청년 성서 모임이 있으면 좋습니다. 마르코 복음으로 성서공부를 했었습니다. 신학적인 내용도 필요했지만, 사회학적인 내용도 함께 나누었습니다. 본당에서 성직자, 수도자들은 교우들과 함께 성서공부를 하면 좋겠습니다. 복음 나누기 7단계는 성서를 묵상하는 좋은 방법입니다. 주님을 초대하고, 주어진 본문을 읽습니다. 그중에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보물을 찾은 것처럼 기뻐하며 선포합니다. 성서 말씀을 읽고 느낀 점을 나누어도 좋고, 생활 나눔을 해도 좋습니다. 본당에 있을 때입니다. 매일 새벽에 그날의 복음 묵상을 본당 홈페이지에 올렸습니다. 일이 있어서 평일 미사에 나오지 못하는 분들이 읽으셨고, 좋아하셨습니다. 하루의 시작을 복음을 묵상하면서 시작해서 좋다고 하셨습니다. 미주가톨릭평화신문 홈페이지에도 오늘의 묵상을 올리고 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묵상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꾸준히 선행하면서 영광과 명예와 불멸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선을 행하는 모든 이에게는 영광과 명예와 평화가 내릴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로마 2, 7) 우리의 신앙도 알찬 열매를 맺으면 좋겠습니다. 씨앗은 바람을 타고 날아가 어느 곳에선가 자리를 잡습니다. 어디에 자리를 잡는지는 바람만이 알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많은 씨앗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뿌리를 내리고, 꽃과 열매를 만들어 냅니다. 우리의 선행도 그래야 합니다. 지치고 힘든 사람들의 가슴에 위로와 용기의 꽃을 피워야 합니다. 절망과 근심 중인 사람들의 마음에 희망과 기쁨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성실한 성사생활은 교회의 센트럴 파크입니다. 말씀에 충실한 신앙생활 역시 교회의 센트럴 파크입니다.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은 복음의 센트럴 파크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도 그분 곁에 머물면 좋겠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28,5.10)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면서 희망을 간직하고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서로를 배려와 사랑으로 대하면서 이 시련의 시간을 잘 견뎌야 하겠습니다. 불안과 고통 속에 있는 이들의 위로자이신 성모님에게 위로와 평화를 주시도록 전구합니다.
다시 한 번 부활하신 주님께서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풍성한 축복을 내려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저 위의 것을 추구하는 삶
-조욱현신부-
복음: 요한 20,1-9: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주간 첫날”(1절), 오늘 우리가 주일이라고 부르는 날, 주님께서 부활하셨다. 당신의 탄생으로 인간의 탄생을 거룩하게 하신 분이 당신의 부활로 죽은 이들에게 생명을 주셨다. 이날, 부활하신 분과 함께 낙원이 열린다. 그 낙원으로 죽을 수밖에 없던 인간들이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아직 어두울 때 무덤에 갔다. 그곳에 분명히 주님께서 묻히셨는데, 돌은 치워져 있었고, 그 안에 시신은 없었다. 마리아는 깜짝 놀랐다.
마리아는 시신이 없자 누가 훔쳐 갔다고 생각한다. 마리아는 무덤에 왔을 때, 아직 어둠 속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2절)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꺼내 갔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참히 돌아가셨지만, 예수님께 대한 존경의 마음이 변하지 않고 있음을 보인다. 살아계실 때처럼 똑같이 ‘주님’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가서 이 사실을 알린다.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그 말을 듣고 무덤으로 달려가 무덤을 살핀다.
그들이 무덤으로 달려가 본 때는 환할 때였다. 그들은 어둔 밤에 와서 그분의 시신을 훔쳐 갔다는 수석 사제들의 얼토당토않은 주장을 아무도 믿지 않게 하였다. 이렇게 그들은 밤이나 아직 어두울 때가 아니라 환할 때 왔다. 유대인들이 무서워 한 집에 모여 문을 걸어 닫고 있었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용감하게 집 밖으로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마리아의 말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은 부리나케 무덤으로 갔다. 그들은 아마포가 놓여있는 것을 본다. 그것이 부활의 표지이었다. 누가 시신을 훔쳐 갔다면, 시신과 함께 아마포까지 다 들고 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몰약을 바르면 아마포가 납처럼 시신에 달라붙지 않는다. 예수님의 얼굴을 싸매었던 수건이 아마포와 따로 잘 개켜져 놓여있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분의 시신을 누가 훔쳐 갔다고 하는 사람들 말에 넘어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여기에 중요한 것이 있다. 처음에 막달라 마리아가 빈 무덤을 보았고, 베드로와 요한이 와서 보았는데 베드로는 수의가 흩어져 있고, 예수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은 따로 한 곳에 잘 개어져 있었음을 보았으나 그는 신앙의 눈으로 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본다는 것’은 믿음을 일으키게도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부활이 빈 무덤이나, 예수님을 싸맸던 물건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는 것으로 추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2절)의 믿음은 막달라 마리아의 경우나(blépein,1절), 베드로의 경우처럼(theoréin,6절) 시각적인 면에서 ‘보는 것’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차원, 즉 피상적인 차원을 넘어 내적인 의미를 파악함으로써 이해하는 그런 차원에서 ‘보는 것’(oràn)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보기 위해서는 자신이 파악하려고 하는 것에 감화되고 매료되어 자신을 그 현실에 동화시킴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랑, 연민, 다른 사람의 요구에 대한 개방성 등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보고 믿었던’ ‘다른 제자’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2절)라는 독특한 표현으로 소개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요한으로 하여금 아직 예수를 보지 않고서도-실제로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나타나심은 후에 나타난다(20,19-29)-그분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보고’ ‘믿게’ 해준 것은 바로 사랑이다. 이 사랑의 힘으로 요한만이 빈 무덤과 개켜져 있던 수건에 감추어진 의미를 이해했다.”(D. Mollat, La foi pascale selon le chapitre 20 de l'Evangile de Jean, in Resurrexit, Libreria Ed., Vaticana, Roma 1972, pp. 316-332).
참된 믿음은 하느님의 말씀, 구체적으로 성서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지, 빈 무덤이나 잘 개켜진 수건과 같은 어떤 구실이나 단서를 찾는 그런 것이 아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9절).
제2독서: 콜로 3,1-4: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부활의 은총으로 새로이 창조된 그리스도인은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 계신 천상을 갈망하면서 부활을 숨 쉬며 살아야 한다. 부활을 숨 쉰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자신의 삶이 매 순간 부활을 체험하며, 부활 체험 안에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권고하고 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1-2절).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저 위에 있는 것들은 바로 우리 이웃이 필요로 하는 것을 보고 관심을 기울이는 사랑의 마음과 봉사의 정신으로 사는 것이며, 이로써 부활하신 주님의 뜻에 맞게 사는 것이다. 그분이 바로 형제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바치시고 구원을 주실 수 있었던 한없는 사랑을 사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은 이 사랑에 대해 하느님을 향한 감사의 삶으로 드러나야 한다.
이러한 삶은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천상의 삶을 이미 이 땅에 끌어내려 사는 삶이 될 것이다. 이 삶은 바로 예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이며, 부활한 후의 삶은 바로 이런 모습이라고 그분이 우리에게 확실히 알려주셨기 때문이다. 남은 것은 이제 우리가 부활을 확실히 체험하는 것이다. 천상의 것을 추구하면서 이 세상에 살고 있으나 이 세상에 대해서 죽는 연습, 아니 죽어야 한다.
죽는 삶을 통해 우리는 부활을 체험할 수 있으며, 우리는 사도들이 한 말과 같이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 4,20)라고 한 것처럼 우리도 외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복음선포이며, 그리스도, 즉 구원을 전하는 것이다. 우리도 항상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라고 전할 수 있어야 하겠다.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요한 20, 1)
-한상우신부-
다시 시작되는
생명의 희망찬
아침입니다
절망을 허물며
부활의 힘줄이
환히 드러납니다.
출렁거리고
넘실대는
부활의 힘찬
새날입니다.
끝까지
사랑을 지켜내신
주님 부활의
가슴뛰는
이 아침입니다.
부활은 함께하는
사랑의
참기쁨입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이 계시기에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되살아나신
예수님의 부활로
하느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우리는
알게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끝장난 무덤에서도
부활의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우리또한
힘든 상황에서도
희망을 선택하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부활의 희망은
끝까지 함께
가는 것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주님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말씀의 진리가
부활의 진리입니다.
부활의 심장소리가
다시 시작하는
기쁨과 감사가
되었습니다.
길이 있습니다.
절망한 그 자리에서
부활소식이
울려퍼지듯
주님의 여정안에서
부활의 참된 길을
만납니다.

-오상선신부-
우리는 여느 때보다 더 길게 느껴지는 사순시기를 지나 어느덧 주님 부활을 맞이했습니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요한 20,1).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간 시간은 새벽녘입니다. "아직 어두울 때"라는 복음사가의 설명은 마리아 안팎의 상태를 가리키지요. 물리적으로도 어둠이 가시지 않은 시간이지만, 예수님을 떠나보내고 발이 묶여 지낸 안식일이 그녀에게 얼마나 길었을지 우리는 공감할 수 있습니다.
"모르겠습니다"(요한 20,2).
그런데 무덤 입구의 돌이 치워져 있고 무덤 안은 빈 것 같습니다. 놀란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달려가 상황을 알리지만, 그녀로서도 아는 바가 없습니다. 제일 먼저 현장을 목격한 증인이기는 한데 아직 모든 것이 베일에 싸인 듯합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요한 20,9).
예수님의 가장 측근이었던 두 제자가 달려와 무덤 안을 살피지만 그들 역시 영문을 모르기는 매한가지입니다. 복음사가는 제자들조차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가감없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활 사건은 이미 예수님께서 여러 차례에 걸쳐 예고하셨음에도 제자들이 인식하기에는 너무 크고 깊은 신비입니다. 생명의 주인께서 인간의 한계인 죽음을 정복해 거두신 승리는 이제껏 누구도 이루지 못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부활을 맞아 뭔가 선명하고 확실한 표징을 붙잡고 싶지만, 오늘의 말씀은 아직 안개 속처럼 무지와 모호함이 가득합니다. 그저 그분께서 무덤에 계시지 않는다는 정황이 부활을 암시할 뿐 명확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1독서는 베드로가 고르넬리우스의 집에서 이방인들에게 설교하는 대목입니다.
"하느님께서 미리 증인으로 선택하신 우리"(사도 10,41).
베드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요약하면서 자신들을 "증인"이라 표현합니다. 빈 무덤 앞에서 영문을 몰라 했던 베드로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승천과 성령 강림까지 체험한 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듯 보이지요.
증인은 처음부터 모든 걸 아는 사람이라기보다, 보고 듣고 체험한 내용이 주님의 개입으로 인식되고 내면화되는 과정을 거친 존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언젠가는 깨닫게 되리라는 걸 아시기에 지치지 않고 반복해서 미리미리 일러 주셨지요. 거기에 더하여 예수님께서 보내 주신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기억하게 하시고 일깨워 주셨기에 스승의 죽음 앞에 오합지졸 같았던 제자들이 어엿한 "증인"으로 변모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콜로 3,1).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콜로새 사람들에게 새 삶을 살라고 역설합니다. 그렇게 증인이 된 이는 이처럼 타인에게 자기 삶을 본보기로 하여 말씀을 선포하기에 강한 힘과 설득력이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의 버거운 현실 한가운데를 지나는 우리도 복음 속 등장인물들과 비슷할지 모릅니다. 기약 없는 단절과 멈춤, 일상화된 발병과 죽음, 이별 앞에서 빈 무덤 앞 제자들처럼 무지와 모호함을, 고독과 두려움을 견뎌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동시에 우리도 그들처럼 믿음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죽음의 그늘에서 더욱 확고히 생명을 부여잡고 희망을 견지하는 이는 그간 겪어온 모든 과정을 부활의 시각으로 재해석하고 내면화하여 "증인"으로 탄생됩니다.
사랑하는 벗님! 부활을 어떻게 맞이하셨나요. 화려한 장식도, 생기 넘치는 성가와 환호도, 밝게 축하 인사를 나눌 공동체도 없는 부활절이지만, 여명이 걷히고 나면 우리는 진정한 부활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함께 견디어낸 고통은 굳은 신뢰와 자부심으로 피어날 것이고, 가슴을 치며 뉘우쳤던 이기주의, 분열주의, 생태계 파괴의 채무는 이웃과 세상을 다시 아름답게 가꾸는 존중과 헌신의 에너지로 탈바꿈할 것입니다.
"아직 어두운 때"지만, 주님 부활과 함께 분명 새 생명이 약동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기쁨은 감정이나 분위기를 넘어서 믿음과 희망이 낳은 선택입니다. 그러니 벗님! 우리,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합시다. 터널 한가운데서, 터널의 끝을 앞당겨 경축하며 감사합시다.
부활을 축하합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오만을 깨고 사랑을 돌려드릴 때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36994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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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빈 무덤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면서 텅 빈 무덤이야말로 예수님 부활의 완벽한 증거가 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무덤이 비어있으니까 예수께서 당연히 부활하신 것이라는 이 논리는 부활의 증거라기보다는 차라리 교회 신앙의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빈 무덤 소식을 들은 제자들뿐만 아니라 소식을 전한 막달라 마리아마저도 빈 무덤이 부활의 증거라고 보지 못하고 단지 누군가 주님의 시신을 가져갔다며 걱정만 했기 때문이다.
부활에 대한 완벽한 증거가 어떤 것인지는 잘 알 수 없지만, 부활에 대한 완전한 믿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적이고 객관적인 증거가 아니라 바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주관적인 체험으로써 그 부활의 증거를 수용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빈 무덤에서 우리가 주님을 새롭게 만남으로 부활 믿음이 시작되고, 그 빈 무덤에서 우리 이름을 불러주실 때 부활을 깨닫게 되며, 예수님께서 쪼개어 주시는 빵을 나누어 받을 때 그 부활의 진실을 보고 깨닫게 되는 부활 신비의 출발점이 빈 무덤이기 때문이다.
이제 객관적인 증거로서의 빈 무덤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사실 증거를 보았다고 해서 다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 사도는 가장 먼저 빈 무덤에 들어가 보았고 또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었음에도 성큼 부활의 증인으로 나서지 못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은 객관적인 증거나 목격으로 누구나 증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주님의 성령 안에 변화된 새 삶을 살아야 부활을 증언할 수 있고, 예수님의 부활로 변화된 모습이 가장 강력한 주님 부활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빈 무덤으로 부활을 증거하기 보다는 우리 스스로가 부활의 증거가 되고 부활의 믿음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빈 무덤도 절망이기 때문이다.
-임상만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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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의 말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은 부리나케 무덤으로 갔다. 그들은 아마포가 놓여있는 것을 본다. 그것이 부활의 표지이었다. 누가 시신을 훔쳐 갔다면, 시신과 함께 아마포까지 다 들고 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몰약을 바르면 아마포가 납처럼 시신에 달라붙지 않는다. 예수님의 얼굴을 싸매었던 수건이 아마포와 따로 잘 개켜져 놓여있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분의 시신을 누가 훔쳐 갔다고 하는 사람들 말에 넘어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여기에 중요한 것이 있다. 처음에 막달라 마리아가 빈 무덤을 보았고, 베드로와 요한이 와서 보았는데 베드로는 수의가 흩어져 있고, 예수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은 따로 한 곳에 잘 개어져 있었음을 보았으나 그는 신앙의 눈으로 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본다는 것’은 믿음을 일으키게도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부활이 빈 무덤이나, 예수님을 싸맸던 물건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는 것으로 추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2절)의 믿음은 막달라 마리아의 경우나(blépein,1절), 베드로의 경우처럼(theoréin,6절) 시각적인 면에서 ‘보는 것’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차원, 즉 피상적인 차원을 넘어 내적인 의미를 파악함으로써 이해하는 그런 차원에서 ‘보는 것’(oràn)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보기 위해서는 자신이 파악하려고 하는 것에 감화되고 매료되어 자신을 그 현실에 동화시킴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랑, 연민, 다른 사람의 요구에 대한 개방성 등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보고 믿었던’ ‘다른 제자’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2절)라는 독특한 표현으로 소개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요한으로 하여금 아직 예수를 보지 않고서도-실제로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나타나심은 후에 나타난다(20,19-29)-그분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보고’ ‘믿게’ 해준 것은 바로 사랑이다. 이 사랑의 힘으로 요한만이 빈 무덤과 개켜져 있던 수건에 감추어진 의미를 이해했다.
-조욱현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