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7일 성주간 화요일
2020년 4월 7일 성주간 화요일
“주님, 그게 누굽니까?
(요한 13,21-33.36-38)
"Master, who is i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어제 임박한 예수님 죽음에 대한 예고에 이어, 성주간 화요일인 오늘은 제자들의 배반에 대한 예수님의 예고가 펼쳐집니다. 지상에서 마지막 시간들을 제자들과 함께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극진한 사랑을 최후 만찬 때에 펼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고 당신의 몸과 피를 빵과 포도주로 내어 주셨습니다. 그런 가운데 오늘 복음은 유다의 배신과 베드로의 부인에 예수님 예언의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돈주머니를 맡아 오던 유다가 종교 당국에 당신을 넘기려는 계획과 늘 말이 앞서던 베드로의 약점이 어떻게 스승에 대한 부인으로 이어질지를 예수님께서는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알고 계시면서도 두 제자의 배신과 부인이 그대로 펼쳐지도록 허락하십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 하느님을 굳게 믿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독서인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을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제자들의 배신과 부인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더 이상 마음이 산란해지지 않으셨던 이유는 아버지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배신자를 친구라 부르시는 사랑으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셨음을 기억합시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14.17ㄴ).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며칠 전, 외출했다가 다시 성지로 돌아오는 중이었습니다. 일정을 모두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어서 마음의 여유가 있었습니다. 이날도 차들이 많아서 교통 진행이 원활하지 않았지만, 젼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냥 차들의 흐름에 맞춰서 앞으로 가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전에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새로 생긴 가게들이 보였고, 새로 출시된 차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주변을 보면서 전혀 지루하지 않게 성지에 무사히 올 수 있었습니다. 여유로움이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해 줌을 깨닫습니다.
오늘 하루 보았던 풍경,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을 기억하십니까? 풍경과 사람의 표정만으로도 충분히 순간을 만족스럽게 살 수 있는데, 너무 바쁘게 앞만 보며 살았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작지만 소중한 행복을 놓치며 사는 것은 아닐까요? 세상의 가치로 볼 때 중요하다면서 정작 행복해질 수 있는 것들을 보지 못하는 나 자신은 아니었는지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산란하십니다. 바로 자신을 배반할 유다 때문인 듯,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유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꾸짖으셨지만, 유다는 자신의 약한 곳을 공격하는 사탄에게 향합니다. 유다의 약한 곳은 물질이었습니다. 복음에서는 유다가 돈주머니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 돈을 가까이하면서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소홀히 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유다도 자신의 선택에 후회하지요. 그러나 희망을 잃어버리고 용서를 청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겠다고 베드로의 용감한 단언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세 번이나 예수님을 배반하는 헛말이 되었습니다.
그 모든 사실을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산란하실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을 사는 우리의 모습을 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하실까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만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의 모습에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고 이기적인 말과 행동을 하는 우리의 모습에서, 지금에 충실하지 못하고 과거에 연연하고 미래를 걱정만 하는 우리의 모습에서 과연 환하게 웃으실 수가 있을까요?
더는 주님의 마음을 산란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주변의 작지만 소중한 행복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제는 주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려야 할 때입니다.


인생의 정답을 찾지 마시길. 정답을 만들어가시길.
내일을 꿈꾸지 마시길. 충실한 오늘이 곧 내일이니.
남을 부러워 마시길. 그 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
시류에 휩쓸리지 마시길. 당대는 흐르고 본질은 남는 것.
멘토를 맹신하지 마시길. 모든 멘토는 참고 사항일 뿐이니.
이 책의 모든 내용을 단지 하나의 의견으로 받아들이시길.
그리고 당신 마음속의 올바른 재판관과 상의하며.
당신만의 인생을 또박또박 걸어가시길.
당신이란 유기체에 대한 존중을 절대 잃지 마시길.
박웅현 작가의 ‘여덟 단어’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내 마음, 내 행동, 내 말을 다시금 되돌아보면서 지금을 잘 살 수 있는 길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요?

신앙도 속도보다 방향이다
-전삼용신부-
속도보다 방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산인 줄 알고 열심히 올랐는데, “저 산이었다.”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황당할까요? 가만히 있는 편이 더 나았을 것입니다. 방향을 잃으면 다 잃은 것입니다.
유럽에서 공부하는 저희 교구 유학생들은 한곳에 모여 성탄절과 새해를 함께 지냅니다. 한 번은 독일에 모여 스키를 탄 적이 있습니다. 리프트를 타고 오르고 또 오르니 정상이 나왔습니다. 정상에 올라가니 그곳은 오스트리아였습니다. 워낙 스키장이 큰 것입니다. 즐겁게 놀다 보니 리프트 시간이 다 되어 마지막으로 내려가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스키를 잘 탈 줄 몰랐던 로마에서 온 우리는 조심조심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조금 먼저 내려가신 어떤 신부님이 끝까지 다 내려와서 잠깐 길을 잘못 든 것입니다. 리프트로 다시 올라올 수 없어서 그분은 끝까지 내려갔습니다. 나중에 한 명이 사라진 것을 알고 전화로 통화하여 그분을 모셔왔습니다. 마지막 잠깐 길을 잘못 들었는데 차로 몇 시간 떨어진 곳에 가 계셨던 것입니다. 정말 속도가 10이 중요하다면 방향은 90이라 할 것입니다.
저도 대학 때 친구와 지하철을 거꾸로 탄 적이 있습니다. 저는 시골 사람이라 전철을 많이 타보지 않아서 지하철 지도를 잘 볼 줄 몰랐습니다. 친구가 당연히 지하철을 잘 탔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방송이 나오는 것을 몇 번 듣더니, “아니다.”라고 외쳤습니다. 우리는 황급하게 다음 역에서 뛰어내려야 했습니다.
비슷한 이야기로, 영국의 소설가 올더스 헉슬리는 더블린에서 개최되는 대영 학술협회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기차를 탔는데 연착하여 더블린에 도착했습니다. 회의 시간이 매우 촉박했습니다. 그래서 기차역에서 나오자마자 마차를 타고 마부에게 “빨리 달려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한참을 달리던 중 헉슬리는 목적지를 말하지 않은 것을 기억하고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요?”라고 물었습니다. 마부는 “모르겠는데요? 그냥 시키신 대로 빨리 달리고만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에서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게 벌어집니다. 신앙은 하나의 여정입니다. 어디서 출발하여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모르는 여행자는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하나의 여행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 출발점과 시작점을 알아야 합니다. 성당만 나온다고 전부가 아닙니다. 각자의 목적지는 각자가 정하는 것입니다. 방향은 자신이 잘 정하고 있어야 합니다.
성당을 열심히 나오면 방향을 잘 정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 주님 해도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성당에 나오는 것은 우리가 가져야 할 궁극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성당에 나와서 내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 두 제자의 방향이 극명하게 구별됩니다. 가리옷 유다와 베드로입니다. 유다는 어둠으로 나아가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려 합니다. 가리옷 유다는 예수님을 3년씩이나 따라다녔지만 계속 예수님께서 이끄시는 방향과 반대로 가려 했습니다. 성당에 나오는 것만이 목적인 사람도 자칫 가리옷 유다처럼 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묻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당에 나와 예수님께 “당신은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물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해 간다.”라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십자가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야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죄를 이기는 복음삼덕이다.”라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실질적인 신앙의 출발점은 죄로 이끄는 세 욕망인 ‘삼구’이고 그 목적지는 죄로부터 벗어나게 만드는 “복음삼덕”인 것입니다. 유다는 예수님만 따랐고 베드로는 이 복음삼덕으로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게 됩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몸으로만 따르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교만과 육욕과 소유욕에서 탈출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결국 예수님을 배반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로마에서 순교하기 직전 그 순교를 피해갈 때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도 오늘처럼 또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때 십자가를 지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십자가 순교의 영광으로 나아갑니다.
갈멜 수도회를 개혁했던 두 분이 계십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입니다. 이분들은 얼마나 힘든 회칙을 주장하였던지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같은 수도회 수녀들에게도 미움을 받았고, 십자가의 성 요한은 수사들에게 몇 달 동안 갇혀 심한 박해까지 받아야 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쓴 첫 회칙은 너무도 엄격하여 그의 제자들이 불태워버렸다는 말도 있습니다. 사실 주님을 따르겠다고 나섰으면서 여전히 삼구에서 머물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요즘 신자들 가운데서는 지옥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보다 안 믿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처럼 보입니다. 신앙생활의 방향을 잃고 있는 지금입니다. 이 세상에 머물며 영화를 누리는 것이 신앙의 목적인 줄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세계관은 이 세상에서 탈출하여 십자가로 하늘을 향해 들어 올려지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어디론가 향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따름은 예수님의 십자가 삶과 가까워짐을 의미합니다.

-조재형신부-
뉴저지에 있는 뉴튼 수도원엘 다녀왔습니다. 피정 하는 분들을 위한 강의, 고백성사, 성체강복이 있었습니다. 한번 가고 싶었는데 하느님께서 기회를 주셨습니다. 수도원 입구에는 문재인 대통령의 기념식수가 있었습니다. 뉴튼 수도원은 문재인 대통령이 방문할 특별한 사연이 있었습니다. 바로 수도원에서 평생을 살았던 마리너스 수사님입니다. 수사님은 1950년 화물선의 선장이었습니다. 1950년 12월 22일 14,000명을 태우고 흥남부두를 탈출했습니다. 선장은 그 뒤로 미국의 뉴튼 수도원에 입회했고, 200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수도원에서 살았습니다. 저는 당시의 상황을 영화 ‘국제시장’을 통해서 보았습니다.
배에서는 한 아이가 탄생했고, 4명의 임산부가 더 있었습니다. 14,005명은 무사히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그날은 12월 24일 성탄 전날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날, 14,005명이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돌아온 사람 중에 문재인 대통령의 부모님이 있었고, 문재인 대통령은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68년이 지난 2018년 6월 1일 문재인 대통령은 ‘한국, 1950년 겨울, 기적의 항해, 마리너스 수사님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드립니다.’라는 이름으로 기념식수를 하였습니다. 수도원 뒤뜰에는 수사님의 무덤이 있었습니다. 잠시 들러 한국인들을 탈출시켜준 수사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느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성주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외로운 ‘항해’를 하십니다. 곳곳에 암초가 있습니다. 대사제인 가야파는 ‘한사람이 죽은 것이 많은 사람이 죽는 것보다 낫다.’라는 말로 예수님의 죽음을 합리화 시키려 했습니다. 빌라도는 손을 씻으면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했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환호했던 군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어서 밤을 새워 기도했지만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제자인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 넘겼습니다. 사랑하는 제자인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하였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모두 무서워서 도망가 버렸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홀로 지고 외로운 항해를 하십니다.
저도 사제가 되면 열심히 기도하고, 겸손하게 봉사하고, 성사를 성실하게 집전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제가 된지 29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처음 먹었던 그 마음이 계속 이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민족들의 빛이 된 이스라엘 백성과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한 베드로는 서로 다른 인격체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격 안에, 베드로의 인격 안에 모든 것이 함께 내재하고 있었습니다. 나의 욕심과, 나의 이기심을 먼저 생각하면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한 베드로의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면 우리는 또한 언제나 민족들의 빛, 하느님 마음에 드는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이제 곧 성삼일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을 생각하며, 주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주었던 베로니카를 생각합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십자가를 지고 간다면, 우리가 누군가의 아픔에 동참한다면 우리는 또 다른 시몬과 베로니카가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이 몸 보호할 반석 되시고, 저를 구할 산성 되소서. 당신은 저의 바위, 저의 보루시옵니다. 저의 하느님, 악인의 손에서, 저를 구원하소서.”

예수님께 아픈 손가락 같았던 존재, 유다 이스카리옷
-양승국신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요한 복음 13장 21절)
당신을 배반할 제자에 대한 예수님의 언급 이후, 제자들은 깜짝 놀라면서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혹시?’ 하는 마음으로 서로의 얼굴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긴박하면서도 미묘한 분위기 속에 두 제자의 모습이 두드러지게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 사람은 최후만찬석상에서 예수님의 품에 기대어 앉아있는 제자입니다. 요한 복음 사가는 이 제자에 대한 실명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표현합니다. 그 제자는 요한 사도로 추정됩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품에 기대어!’ 이런 행동은 연인 중에서도 연인들이나 하는 행동입니다. 통상적인 시선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장면입니다. 솔직이 남자들끼리 좀 ‘거시기’한 모습입니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제자들의 눈총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저 친구는 시도 때도 없이 대체 뭐하자는거지? 이 긴박한 상황에 저러고 싶을까? 차라리 영화를 찍어라. 영화를!’
그러나 요한 사도는 아랑곳하지 않고 스승님을 향한 애정을 온 몸과 마음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을 향한 요한의 존경과 애정이 컸습니다. 요한는 자나깨나 예수님, 앉으나 서나 예수님, 사나 죽으나 예수님 뿐이었습니다.
이런 요한 사도였기에 목숨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골고타 언덕 십자가 아래서 예수님의 임종을 지켰습니다. 그 이유는 언제나 예수님께 ‘딱!’ 붙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예수님 가까이에 앉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한의 예수님을 향한 사랑은 세상적, 통속적인 사랑을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랑은 예수님이 하느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구세주 그리스도라는 것을 깨달았음에서 오는 사랑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분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을 알게 됨에서 오는 사랑의 고백이었습니다.
반면 다른 제자 유다의 행동을 한번 보십시오. 유다는 제자단의 총무 역할을 맡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치유의 은혜를 받은 수많은 사람들은 감사의 표현으로 예수님께 예물을 드렸겠지요.
예수님은 받은 예물을 즉시 총무인 유다에게 넘겼습니다. 그리고 제자단의 숙식이라든지 생필품 구매를 위해서 사용했습니다. 견물생심이라고 막대한 돈을 만지게 되자 유다의 머릿속에 엉뚱한 생각이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혹시라도 스승님을 통해 꿈꾸던 지상 왕국, 그에 따른 물좋은 자리, 지상에서의 복락, 이런 것들이 물건너가버리게 되면, 그때 내 청춘, 내 인생은? 그래! 혹시 모르니 미래를 위해 비자금을 좀 챙겨두자!’며 조금씩 조금씩 공금을 빼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유다는 자연스레 스승님 앞에서 행동이 부자연스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예수님 가까이 가지 못하고 늘 멀찌기에서 서성거렸습니다. 결국 말만 제자였지 이미 그는 제자직을 버렸습니다.
그런 유다를 향한 예수님의 처신이 특별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유다의 배신과 부정 행위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 순간 저 같았으면 공개석상에서 혼쭐을 냈을 것입니다. 제자단에서 축출하거나, 총무 직무에서 뺏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유다의 개인적 자유 의지를 존중해 주십니다. 끝까지 인내하시며, 유다의 배신 행위를 공개하지 않으십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곰곰히 묵상해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애초부터 유다에게 배신자의 운명을 부여하셨을까? 유다의 회개 가능성은 없었을까? 예수님께서도 유다의 운명을 아시고 그가 배신하도록 그냥 방관하신 것일까?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유다는 예수님에게 아픈 손가락 같은 존재였습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속담처럼 유다 역시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였습니다. 당연히 유다도 예수님 사랑과 구원의 대상이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유다의 고백과 회심, 새생활과 구원을 인내롭게 기다리셨을 것입니다. 그런 연유로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배신 행위에 대해서 마지막 순간까지 다른 제자들에게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실명을 거명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끝끝내 빛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져갔고, 결국 등을 돌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에게 남아있었던 것이라고는 철저한 배신과 그에 따른 참혹한 후회, 비참한 죽음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시면서도 무지하고 불충실한 제자들과 오늘 우리들을 걱정하시는 사랑과 인내의 주님이십니다.

배신의 죄보다 사랑입니다
-반영억신부-
배신은 한솥밥을 먹는 사람이 합니다. 멀리 있는 사람은 서로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등질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있는 사람은 서로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고 그것이 채워지지 않았을 때 마음이 상하게 되며 차라리 몰랐던 사람만도 못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잘 안다는 것이 오히려 별것도 아닌 것에 서운함을 갖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은 강한 것 같지만 연약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폭과 깊이, 넓이를 더해야 하겠습니다. 내 마음의 문을 열어 빛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해야 주님께서 우리 삶의 역사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오실 것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돈주머니를 관리한 것을 보면 인정받던 제자입니다. 그가 유감에 빠져 배신을 합니다. 비록 예수님을 팔아넘기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여전히 예수님의 제자였고,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마음을 알고 내내 번민하셨습니다. 속을 다 아시고 그것을 품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 안에서 침묵으로 철저히 고독을 이기셨습니다. 유다는 스승을 배반하였고 그 자책 때문에 목숨을 끊었습니다. 예수님과 유다 사이에는 마음을 주고받는 소통이 없었습니다.
사실 누구나 유다처럼 약한 마음을 지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양상이 다릅니다. 베드로나 바오로는 주님을 등졌던 사람이지만 회개하여 주님의 도구로 항구 하게 살았습니다. 한때 주님을 배반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주님의 자비를 믿고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유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주님의 자비가 심판을 이긴다.’는 진리를 믿지 못한 탓입니다. 유다의 파멸은 자비를 거부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처지나 상황에서도 주님의 자비 안에 굳건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가장 큰 약점은 어떠한 죄도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결코 용서하는 데 더디지 않습니다. 인간은 죄에 따르는 벌을 생각하지만 주님은 용서와 자비의 기회로 삼으십니다. 용서를 청하는데 굼뜬 것은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유혹은 나를 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유혹 앞에서 나를 가장 확실하게 알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 의탁할 수밖에 없는 나의 한계성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혹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시험입니다. 하느님 편에서 생각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면 커다란 공로가 될 것이고, 사탄의 편에 서서 그 유혹을 받아들이면 파멸의 길, 죽음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에는 항상 사탄의 말만 있는 것도, 그렇다고 늘 하느님의 말씀만 들리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끊임없는 선택의 길에 서게 됩니다. 단호하게 하느님을 선택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유혹은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요, 나에게 자유가 주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하느님 앞에서의 그만한 책임을 져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심판보다는 자비를 갈망하는 만큼 예수님 곁에 꼭 붙어 그분만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절대 놓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던 제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사랑을 받는 제자였습니다. 눈에 뛰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궁금한 것이 있으면 가까이 다가가 부끄러움이 없이 묻고 답을 얻었습니다. 그는 그야말로 주님과 소통을 잘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허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사명에 충실할 수 있었습니다. 자책으로 목숨을 건 유다와는 다른 모습입니다. 결국 선한 열매를 맺는 것은 주님과의 끊임없는 소통입니다. 주님과의 대화로 사랑을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요한 13,21)
-이영근신부-
우리는 <성삼일>을 이틀 앞두고 있습니다. 이제 제자들에게도 어둠과 절망이 깊어갑니다. 오늘 <복음>은 절망과 어둠이 더해가는 이야기입니다. 빛으로부터 떠나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 간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는 두 개의 밤이 있습니다. 그리고 두 개의 배반이 있습니다. 하나는 유다의 밤이요, 또 하나는 베드로의 밤입니다. 유다의 밤은 캄캄한 어둠이 짙어져가는 밤이요, 베드로의 밤은 닭이 울기 전, 새벽이 밝아져오는 밤입니다.
유다의 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놓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요한 13,21)
예수님께서는 배반하는 제자를 마지막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빵을 적셔서 그에게 주었습니다. 빵을 적셔서 주는 것은 애정의 표현이었습니다. 당신을 배반할 제자에게 끝까지 베푸는 충실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사랑을 등지고서 밤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택했습니다. 그는 의도적으로 면밀히 계획한 바를 어둠 속에서 행했습니다.
베드로의 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놓겠다고 장담하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새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한 13,38)
베드로는 주님을 배반할 의향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약한 순간에 그만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닭이 울면, 어둠은 밝아질 것입니다. 베드로는 지나친 자기 과신 속에서 넘어졌습니다. 사실, 우리가 넘어질 때는 가장 약할 때가 아니라, 가장 강할 때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우리가 약할 때는 오히려 강해질 것입니다(2고린12,10).
그렇습니다. 유다의 밤은 죄를 깨닫고서도 더 짙은 어둠으로 빠져들어 멸망으로 가는 밤이요, 베드로의 밤은 죄를 깨닫고서는 어둠을 헤치고 밝은 빛으로 나아가는 생명의 밤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곧잘 넘어집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넘어지는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두가 일어서는 존재인 것은 아닙니다. 혹 넘어진 사실을 까달아 알고 뉘우치고 성사를 본다고 해도, 일어선 사람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단지, 넘어진 채로 넘어진 자신을 본 것일 뿐, 비록 용서는 받았다할지라도 일어서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이제는 일어서서 넘어졌던 자신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일어선 자만이 빛나는 새벽을 만날 것입니다. 진정, 일어선 자만이 빛 속에 들 것입니다. 먼저 베풀어진 그분의 사랑을 만난 자만이 그분의 빛 속을 걷을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가 비록 넘어지더라도 일어나 빛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빛이신 주님, 저를 비추소서! 제가 일어나 빛 속을 걷게 하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한 13,38)
주님!
어둠에 휩싸여 넘어지고 또 넘어집니다.
빛을 비추소서.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넘어지기도 전부터 베풀어진 당신의 사랑을 보게 주소서
일어나게 하소서. 빛 속을 걷게 하소서.
십자가를 지고 사랑의 길 걷게 하소서. 아멘

배반자 유다
-송영진신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자체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일은 열두 사도 가운데 하나인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뽑으실 때,
유다가 배반할 것을 알고 뽑으셨을까? 모르고 뽑으셨을까?
그것을 아시면서도 그를 사도로 뽑으셨다면, 예수님의 수난과 유다의 배반은
마치 잘 만들어진 각본대로 진행된 일처럼 되어버리고,
유다에게는 배반의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됩니다.
또 모르시고 뽑으셨다면 하느님의 전지전능과 모순되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사도들을 뽑으실 때의 일은, 우리는 알 길이 없는 영원한 수수께끼(신비)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은 유다가 배반했기 때문에 생긴 일일까? 그것은 아닙니다.
그의 배반과 상관없이, 또 그가 배반하기 전부터,
예수님을 죽이려는 박해자들의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유다의 배반은 예수님의 죽음을 초래한 일이 아니라,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자들 편에 선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유다가 배반하기 전에 그것을 막지 않으셨을까?
또 그가 배반한 후에도 왜 그를 타이르거나 설득하지 않으셨을까?
예수님께서는 왜 당신의 사도인 유다를 구원하지 않고,
그가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을 내버려두셨을까?
예수님께서 적극적으로 유다를 꾸짖으시거나 타이르시지 않고 내버려두신 것은,
그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유다의 배반이 하느님의 계획에 속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를 내버려두신 것은 아닙니다.
유다의 배반은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느님의 계획을 방해하는 걸림돌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가 회개하기를 바라셨는데,
회개란 전적으로 그 자신의 자유의지로, 스스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사탄이 유다에게 들어갔고, 그래서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것으로 기록했는데, 사탄이 유다에게 들어갔다는 말은
유혹을 했다는 뜻이지 유다의 자유의지를 빼앗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일은 전적으로 그 유혹을 받아들인 유다 자신이
자기의 자유의지로 행한 일이고, 따라서 배반의 책임도 그 자신에게 있습니다.
(사탄에게는 유혹한 책임이 있습니다.)
다른 사도들은 왜 유다가 배반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을까?
배반했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는 왜 적극적으로 그를 막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 당시에는 사도들의 공동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유대감이 약한, 느슨한 공동체였을 것입니다.
“누가 더 높은 사람인가?” 같은 문제로 사도들이 서로 다투는 모습이
그 공동체는 별로 친밀하지 않은 공동체였음을 잘 나타냅니다.
그래도 유다가 혼자서 따로 떨어져서 돌아다니는데도
다른 사도들이 그것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랬던 사도들이 성령 강림 후에는 완전히 한 몸이 되는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유다가 배반했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는
사도들이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을 정도로 일이 급박하게 전개되어서,
적극적으로 무엇인가를 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유다를 원망할 틈도 없이, 예수님을 버리고 모두 달아났으니...)
도대체 유다는 왜 배반했을까?
예수님을 배반한 대가로 유다가 돈을 받았고(마태 26,15),
또 평소에 공금을 횡령하던 도둑이었다는 말이 있어서(요한 12,6),
일반적으로 그가 돈 때문에 배반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꼭 돈 때문만은 아닐 것이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아마도 유다는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또는 ‘메시아의 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나라가 자기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라서
실망했을 가능성도 있고, 십자가를 향해서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 때문에
믿음이 흔들렸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 베드로 사도가 십자가 수난을 향해서 가시는 예수님을 말릴 때(마태 16,22),
어쩌면 유다도 베드로 사도와 같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또 제자들이 받게 될 박해와 고난을 예고하시는 말씀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포기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유다는 사탄의 유혹도 받았고, 돈을 밝히는 사람이었고,
박해와 고난을 감수할 마음도 없었고,
그래서 그런 여러 가지 이유로 예수님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배반자 유다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나오는
‘길, 돌밭, 가시덤불’에 모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유다는 언제 예수님을 배반할 생각을 했을까?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쳐 줄 수 있는 능력을 주실 때(마태 10,1),
유다도 그 권한과 능력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선포하라고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마태 10,5),
유다도 파견을 받아서 복음 선포 활동을 했습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배반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들고, 예수님께서 자주 기적을 행하시던
활동 초기에는 자기가 장차 누리게 될 영광 같은 것을 꿈꾸었을 것입니다.
그 시기에는 자기가 나중에 변절해서 배반자가 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예수님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마도 예수님에 대한 박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무렵이었을 것입니다.
유다가 마지막에 자살한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를 받게 될 줄을 몰랐는지,
사형 선고 후에 자기 잘못을 뉘우쳤습니다(마태 27,3).
그러나 회개하지는 않고 자살해버렸습니다(마태 27,5).
(유다의 이야기를 통해서
‘뉘우침’과 ‘회개’는 구분되는 다른 일이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잘못을 뉘우치는 것은 회개의 시작일 뿐이고,
회개의 완성은 예수님의 사랑 안에 완전히 머무를 때 이루어집니다.)
도대체 유다는 왜 자살했을까?
아마도 자기는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해서
용서받기를 포기했을 것이고, 그래서 자살했을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 자신을 심판하고 단죄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모습입니다.
사실 유다의 죄 가운데 가장 큰 죄는 ‘자살’입니다.
회개하기를 포기하고 용서받기를 포기하고 구원받기를 포기한 죄이기 때문입니다.

유다의 ‘어둔 밤’
-조욱현신부-
복음: 요한 13,21-33.36-38: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산란하시어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21절) 그분의 마음이 산란해진 이유는 우리의 나약함 때문이다. 그분은 마음으로 우리와 공감을 드러내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은 정신적인 고통 때문이 아니라, 연민 때문에 산란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산란하다는 표현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이미 일어난 일처럼 아신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도 주님께서는 유다의 배반에 노하시고 그의 사악함에 동요하심을 의미한다.
제자들은 어리둥절하였다. 자신의 양심에 대해서는 알았지만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기에 자신에 대해서만 확신할 뿐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여기서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로서 예수님 품에 기대어 있는 요한에게 그 자가 누구인지 여쭙게 하였다.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25절)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26절) 유다도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빵을 받았으나, 빵을 물에 적심으로써 빵에서 축복을 씻어 배반자에게 주셨다.
그러기에 유다는 축복받은 빵을 먹지 못했고 생명의 잔도 마시지 못했다. 유다는 자신이 생명에 합당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화가 났다. 이에 대한 분노는 그로 하여금 예수님의 피의 잔을 마시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는 사람들에게 갔고 그래서 축성된 잔을 보지 못하였다. 이것은 유다가 다른 이들과 생명의 성사를 받지 못하게 하려고, 사탄이 그를 그곳으로부터 떠나게 하였다. “때는 밤이었다.”(30절) 인간이 하느님을 떠나서 하느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뜻을 행하며 나아갈 때 그 자체가 언제나 밤이라고 할 수 있다.
유다가 사탄과 함께 밖으로 나가자 예수님께서는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31절)고 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필리 2,8) 했을 때, 그를 높이 들어 올리셨다. 이렇게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면 그분 안에서 하느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된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광을 받으신다면, 영원하신 말씀께서 취하신 인성도, 즉 그 인간이신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 안에서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32절) 아버지의 뜻을 완성하심으로써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셨다면,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일어난 사건들, 땅이 흔들리고 해가 빛을 잃고 땅이 어둠에 덮이고 무덤들이 열리고 바위가 갈라진 일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분의 위엄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백인대장은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15,39)고 고백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 뿐이다. 너희는 나를 찾을 터인데,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33절)라고 하신다. 주님은 수난 때까지만 제자들과 함께 계실 것이며, 당신이 가시는 곳에 제자들은 올 수 없다는 말씀은 당신의 죽음이 썩는 육체는 갈 수 없는 영광으로 옮겨가시는 것임을 알려 주신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고 하신 것은 지금은 그들이 용감하게 죽음과 맞서지 못함을 뜻한다. 그들은 모두 도망을 갔고 시몬은 그분을 모른다고 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박해와 시련을 잘 이겨낼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36절)
“주님, 어찌하여 지금은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37절) 베드로가 말하자, 예수님께서는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38절) 베드로는 여기서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을 말하고 있다. 그는 자기가 말한 것을 이룰 능력이 없었다. 그것은 베드로가 스승을 위해서 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베드로를 위해서 하신 일이었다. 베드로는 두려움 때문에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말했던 것이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자신의 욕심에 주님을 배반하고 그분을 죽음에로 몰아넣었으며, 베드로는 필요 이상의 자신감으로 자신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눈물로 다시 살아난다. 우리 안에도 유다와 같은 탐욕이 있어 주님을 버리고 어둠을 향해 나가는 잘못을 범하기도 한다. 또한 베드로와 같은 두려움 때문에 주님께 대한 신앙을 용감히 고백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분의 식탁에서 생명의 빵과 구원의 잔을 항상 마시며 그분을 따르는 우리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의 삶은 항상 이 빛과 어두운 밤을 넘나드는 삶의 연속이다. 베드로는 그렇게 세 번이나 넘어졌지만, 다시 일어섰고 주님께로 돌아왔기 때문에 빛 속에 살 수 있었다. 유다는 빛 속으로 다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고 말았다. 우리의 실수로 어두운 밤에 떨어졌더라도 즉시 빛을 향하여 머리를 돌리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이 시간 주님께 도우심을 청하자.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한 13, 38)
-한상우신부-
만개한
꽃들속에서
모순으로 얼룩진
제자신을 봅니다.
사랑하기에
많이 아프고
아픈 성주간입니다.
무너지는
시간은 언제나
한순간입니다.
가장 무서운
존재는 늘
사람이라는
존재입니다.
사람이 사랑이
되기까지
수 많은 고개를
넘고 넘습니다.
회개는
배신속에서
탄생하고
배신은
망각속에서
탄생합니다.
배신의
고통을 안고
마지막 길을
걸어가십니다.
베드로의
배신속에서도
사랑의 길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의 마음에
십자가를
새겨주십니다.
변심과
배신 사이에
우리가 있습니다.
하느님마저
배신하는
우리들임을
아프게 반성합니다.
우리자신을 위해
울 수 있는
성주간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신앙은
장담하는
입술에
있지 않습니다.
신앙은
사랑하기에
찔리는 고통마저
받아안고
하느님을 향하는
용서의 눈물임을
믿습니다.
베드로의 눈물
예수님의 눈물이
십자가에서 다시
뜨겁게
만날 것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영광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제자들은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몰라 어리둥절하여 서로 바라보기만 하였다"(요한 13,22).
예수님께서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시자 제자들이 동요합니다. 수백 명도 아니고 딱 열둘인데, 그 안에서 누군가가 스승님을 팔아넘긴다니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잘못하면 서로 의심하다가 갈등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당사자야 알겠지만 나머지 제자들은 도무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아무도 몰랐다"(요한 13,28).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하신 말씀에 대해서도 역시 영문을 몰라합니다. 예수님과의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제자들은 정말 모르는 것 투성이입니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한 13,38).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다 아십니다. 제자들의 무지에 대비되는 예수님의 앎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그런데 그 앎이 우리 마음을 저리게 만드네요. 제자에게 배반 당하실 것을 아시는 앎, 더욱이 수석 제자가 당신과의 관계를 부인하리라는 것을 아시는 앎... 아마 우리 인간에게 이런 앎이 허락되었다면 우리는 평상심은 커녕 제정신으로 관계를 맺으며 살기 어려울 겁니다. 그러니 적당히 모른다는 게 우리 인간 수준에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요.
제1독서는 주님의 종의 둘째 노래 부분입니다.
"그분께서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시고 당신 손 그늘에 나를 숨겨 주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처럼 만드시어 당신의 화살통 속에 감추셨다"(이사 49,2).
이상하지요... 날카로운 칼과 화살처럼 벼린다는 것은 전쟁 때 당장 활용할 수 있게끔 만반의 준비를 해놓는 것인데, 제 역할을 서슬 퍼렇게 하라고 보란듯이 내놓아도 모자랄 판에 하느님은 숨겨 두고 감추십니다.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이사 49,3).
그러면서도 당신의 영광이 드러난다고 하시니 헷갈립니다. 숨기고 감추신 이에게서 무슨 영광이 드러날 수 있을지요. 그래서 예언자는 다음과 같이 푸념을 덧붙입니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이사 49,4).
충실히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는데 기껏 돌아오는 거라곤 박해와 조롱 뿐인 예언자들의 처지나, 수난과 죽음을 향해 한 발 한 발 내딛고 계시는 예수님의 처지를 인간적으로 보면 이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이사 49,4).
하지만 예언자는 이내 마음을 돌이킵니다. 인간적 영화와 주님께서 주시는 영광을 분리한 까닭입니다. 당장 사람들 눈에 예언자를 영광스럽게 보이게 한들 반짝 하고 지나갈 가볍디 가벼운 남의 일일 뿐이니까요.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광이란 당장 눈앞에 보이는 성공을 넘어섭니다. 그러니 누가 봐도 영광이라 느끼는 뻔하고 뻔한 것이라면 영광이 아닙니다. 그건 세상이 저희끼리 주고 받는 거래요 자기만족일 뿐입니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이사 49,6).
눈에 보이는 영광이 아니라 감추어진 진정한 영광을 주시려는 하느님의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분께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으로서 당신 백성에게 승리와 탈환의 기세등등한 영광을 안기신다면 그건 그 민족에게서 끝날 일입니다. 이민족 입장에서 놀랄 것도 감사할 것도 없는 당연지사일 겁니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요한 13,32).
우리의 예수님은 구원의 포문을 이스라엘 너머로 열어젖히십니다. 뻔한 영광이 아니라 가장 수치스러운 자리를 선택하심으로써 진정한 임금의 자리를 탈환하신 영광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이사야서에서 이야기하듯, 구원의 지평을 활짝 열어 "땅끝까지 이르는 모든 민족들의 빛"이 되십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서 봅니다. 가장 비참하고 처절한 순간까지 떨어지신 그분은 "영광"의 세속적 한계를 치우시고 그 범위를 극한대로 확장하셨습니다. 저 하늘 끝에서 저 깊은 땅속 끝까지 주님의 영광이 가득합니다.
장엄하고 화려하고 강하고 충만한 곳에서 영광을 보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 믿는 이들은 초라하고 비참하고 약하고 텅 빈 곳에서 진정한 영광을 보는 이들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이 그곳에 매달려 계시니 그 영광에 동참하러 함께 달려갑시다. 십자가를 더 깊이 사랑하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나중에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35381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