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5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2020년 4월 5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너희는 모두 이 잔을 받아 마셔라.
이것은 나의 피다.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
(마태 26,14-27,66)
"Drink from it, all of you,
for this is my blood of the covenant,
which will be shed on behalf of many
for the forgiveness of sin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고대 중국에서는 천자(天子)가 공을 세운 제후들에게 베푸는 아홉 가지 특전이 있었는데, 이를 통하여 제후의 권위를 드러냈다고 합니다.
첫째 금수레를 타는 것, 둘째 면류관을 쓰고 곤룡포를 입는 것, 셋째 옷깃에 옥을 달아 움직일 때마다 아름다운 소리가 나게 하는 것, 넷째 거처하는 집에 붉은 칠을 하는 것, 다섯째 천자가 거처하는 궁에 신을 신고 출입하는 것, 여섯째 삼백 명의 특별 친위대를 거느리는 것, 일곱째 금도끼, 은도끼를 들어 왕의 의장을 갖추는 것, 여덟째 붉은 활 한 벌에 화살 열 대, 검은 활 열 벌에 화살 천 대를 가지고 있는 것, 마지막으로 아홉째 검은 수수로 빚은 향기로운 술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를 ‘구석’(九錫)이라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이스라엘 군중에게 임금이셨습니다. 중국의 제후처럼 ‘구석’을 온전히 갖추시지는 못하셨지만, 금수레 대신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십니다.
오늘부터 성주간이 시작됩니다. 그때처럼 지금 우리도 나뭇가지를 들고 행렬을 합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행렬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환호하는 것입니까?
고통을 이겨 내는 유일한 방법은 고통에 담긴 의미를 깨닫는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고통은 희망과 한 몸처럼 엮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통 없이는 참희망이 없으며, 희망 없이는 어떤 고통도 이겨 낼 수 없습니다. 이 거룩한 주간에 십자가에서 고통을 겪으시고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께서 죄 많은 우리를 위하여 “영광의 희망”(콜로 1,27)이 되셨음을 묵상해야 합니다.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내가 선택할 길은 어떤 길입니까?
-키댓대주교-
“그분께서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시고 당신의 손 그늘에 나를 숨겨 주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처럼 만드시어 당신의 화살 통 속에 감추셨다.”
하느님의 종은 고난을 감내하고 인간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하느님의 종은 나의 힘이 아니라 그분의 권능으로 사람들을 그분께 이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충실한 종이십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권능으로 설교는 힘이 있었으며 악마를 없애고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이신 예수님께 인간으로서 견디기 힘든 시련을 주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 넘길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고통과 죽음을 통해 아버지 하느님께 효와 순명을 증명하셨습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아버지의 길을 따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 길은 성공과 명예, 물욕은 물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세상의 평화와 사랑을 위해 나를 희생할 때 도달할 수 있는 길입니다.
주님 수난 성지주일에 주님의 길을 따르면서 쉽게 변하는 인간의 마음을 보십시오. 주님의 길을 따라가면서도 나의 마음은 주님의 뜻이 아닌 나의 길을 가고 있는 지는 않은 지 되돌아 보십시오 .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성으로 가는 것은 기쁘고 쉬운 길입니다. 내가 만일 그 길에 있었다면 나도 그들과 같이 종려나무를 손에 쥐고 주님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골고다 언덕길은 가시밭길이고 고난의 길입니다. 만일 내가 그 고통의 길에 있었다면 어느 길을 선택했을까요?
유다처럼 배반의 길을 갔을까요? 아니면 베드로처럼 스승을 부인하는 길을 갔을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도망가는 제자들을 따라 갔을까요? 군중들 틈에 섞여 주님을 판결하라고 외치고 있지는 않는지요?
이제 바른 길을 찾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충실한 종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진실과 사랑을 지닌 주님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 저희가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 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주님을 따라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소서. 아멘.

1. 지금 내가 예루살렘에 있다면 어느 길을 선택할까요?
2. 군중 속에 나의 목소리를 숨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3. 내가 가고 있는 길은 어떤 길입니까?

우리 병고 떠맡고 우리 질병 짊어지신분
-구요비 주교-
금년 사순절 내내 우리 모두는 코로나바이러스19 전염병의 확산이 가져온 국가적 재난으로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광야’의 시간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환자와의 접촉을 차단하기 위한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다 보니 미사가 없는 본당 공동체 생활을 처음으로 겪고 있습니다. 점점 더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어가는 이 질병이 우리에게 안겨주는 많은 공포와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도 우리 신앙인은 깨어 있어 ‘시대의 징표’를 읽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찾는 은총의 시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말씀을 살도록 초대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요한 4,23)
오늘 주일 전례 중에 등장하는 당나귀는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수난과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고난받는 야훼의 종이신 예수님의 운명을 닮았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어린 양’(요한 1,29.36)이라고 고백하고, 오늘 마태오 복음의 수난기는 예수님께서 당신을 ‘넘겨줄 것이다’(Παραδστε, 파라도스테)라고 말씀하십니다.(마태 26,23-24) 이런 예수님의 의지는 하느님의 외아들로서 아버지의 뜻이신 인류 구원에 응답하는 순종으로 표현됩니다. “아버지, 이 잔이 비켜갈 수 없는 것이라서 제가 마셔야 한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마태 26,39.42)
이런 예수님의 순종은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실제로 드러내는 것이기에 이웃과의 관계로 표현됩니다. 특히 이웃 형제에 대한 조건 없는 사랑이 인간의 오만과 증오로 거절당할 때 이를 묵묵히 받아들이고 짊어지는 십자가의 희생을 필연적으로 수반합니다. 이를 구체적으로 인간의 온갖 질병을 고쳐주시는 치유자이신 예수님에게서 봅니다.
많은 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을 마태오 복음은 “‘그는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다’(이사 53,4)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마태 8,17)라고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치유하시고자 하는 인간의 병은 죄와 죽음을 포함한 육체의 질병까지입니다. 이 전인적인 치유인 구원을 위하여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셨습니다.
의사가 병자를 치료하기 위하여 직접 만나야 하듯이 우리의 구세주는 인간에 대한 동병상련(同病相憐)으로 하느님의 외아들로서의 모든 권능을 온전히 비우시고 인간의 모든 고통과 죄의 멍에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심으로 진정한 치유자이신 의사가 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특별히 앓는 병자들을 ‘의료인’의 손으로 치유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 면에서 코로나바이러스 감염 환자들을 자신의 건강과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헌신적으로 돌보시는 의료인들과 봉사자들 안에서 우리는 또 다른 그리스도(Alter Christus, 알테르 크리스투스)의 모습을 뵐 수 있는 것입니다.

고통이 가라앉자 구원이 떠올랐다
-김혜순수녀-
사순시기 내내 포스트잇에 써서 기도서에 붙여놓고 보았던 구절이 있습니다. “밭은 기침 콜록이며 겨울을 앓고 있는 너를 위해….” 이해인 수녀님의 ‘촛불 켜는 아침’이라는 시의 첫 구절입니다. 콜록 콜록 사투를 벌이며 아파하시는 분들을 기억하면서 간절한 마음을 모아 봉헌한 사순절이었고 그 막바지인 성지주일에 와있습니다. 이제 교회는 인류 역사상 가장 중대한 사건이 일어나고 완성된 ‘성주간’에 들어서게 됩니다.
■ 복음의 맥락
오늘 본문의 처음과 마지막은 배신과 음모의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이 첫 번째 인물로 나타나 수석 사제들과 은밀히 협상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마태 26,15) 긴 죽음의 여정이 끝난 결말 부분에도 악인들의 공모가 언급됩니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이 “사흘 만에 되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빌라도에게 가서 “셋째 날까지 무덤을 지키도록 명령”하기로 공모합니다.(27,62-64) 이처럼 고통과 음모, 배신으로 가득 찬 수난의 이야기를 마태오복음서는 자신의 고유한 스타일로 이끌어 나갑니다. 단순히 사건을 시간상으로 배열하는 데에 집중하기보다 이 죽음이 구약성경에 이미 예고된 내용에 얼마나 충실히 부합하는지를 거의 매 구절마다 확인합니다.(26,24.31.53-54.56; 27,9-10 등) 심지어 “하느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십자가상의 절규도, 해면을 가져와 신포도주에 적셔 목을 축인 것도 모두 시편 22,2과 69,22의 실현임을 의도적으로 드러냅니다.
■ 배신에 대하여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주제는 ‘배신’입니다. ①유다: 은전 서른 닢에 스승을 고발하지만 사실 이 사건은 돈 때문에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생긴 의심과 자기식의 판단이 문제였습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유다의 배신 직전에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야기와 그때 생긴 갈등을 묘사합니다.(26,6-23) 예수님에 대한 믿음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문학적 복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모든 상황을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유다가 큰 무리를 대동하고 다가왔을 때 그를 “친구”로 부르며 말씀하십니다. “친구야, 네가 하러 온 일을 하여라.”(26,50) ②베드로와 제자들: 겟세마니의 처절함 속에서도 마냥 잠에 빠져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26,40)고 호소하지만, 이후 여전히 잠들어 있는 제자들의 어이없는 태도를 그냥 놔두십니다.(26,44) 잠시 뒤 결정적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때에 제자들은 주님을 버리고 달아났다.”(26,56) 베드로는 그래도 멀리서 예수님을 따라 갑니다.(26,58) 하지만 세 번이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26,70.72.74)라고 부인한 후 닭이 울자 비참함에 슬피 웁니다.(26,75) 이후 베드로의 모습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도대체 그는 어디에서 숨죽이고 있었던 것일까요? ③빌라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의인’이며 ‘무죄한 사람’으로 고백한 사람이 있는데 빌라도의 아내였습니다. 그녀는 남편에게 꿈 내용을 전하며 충고하고(27,19) 빌라도 역시 예수님의 무죄함을 알게 되지만 군중의 위협 때문에 사형을 선고합니다. 불의에 휘말려 정의를 배신한 것입니다. ④군중들: 빌라도가 판결을 주저하자 유다인들은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의 자손들이 지겠습니다.”(27,24-25) 하며 단호히 예수님의 죽음을 요구합니다. 불과 며칠 전 “다윗의 자손께 호산나!”(21,9)라고 외치며 열광적으로 예수님을 환호했던 이들이 그토록 빨리 변할 수 있다는 인간의 한계와 가벼움을 여실히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 자발적 사랑으로 하느님의 일을 완성하다
이 모든 배신과 음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침묵을 지키십니다. 빌라도가 “매우 이상하게” 여길 정도였습니다.(27,14) 제2독서는 그 이유를 알려주는데, 모욕과 배신에 대응하는 예수님의 방식은 ‘낮아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원래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고 하느님과 같은 분”이셨지만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십니다.(필리 2,6-8)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시고 ‘하느님과 같은 분’이 ‘종의 모습’을 지니시고 ‘사람들과 같아’ 지셨다는 극명한 대조를 통해 그분의 자발적 낮아짐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리고 제1독서는 이런 낮아짐이야말로 하느님이 일하시는 절대적인 조건이 됨을 선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발적 희생과 내어줌으로 낮아지신 분에게 당신 말씀을 직접 듣고 전할 수 있는 혀와 귀를 주시고 “아침마다 일깨워”(이사 50,4) 주셔서 모든 고통과 모독을 감내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는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신다는 믿음으로 뒷걸음치지도 위축되지도 않는데,(50,5-6) 현재가 하느님의 주도권 안에 있다면 그 어떤 고통도 두렵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낮아짐을 선택하고 그렇게 낮은 자리에 조용히 침잠하고 있을 때 비로소 올라오는 구원의 맨얼굴이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행하는 동안 많은 계획들이 취소되고 일상이 고요히 가라앉자 떠오른 삶의 진실들이 그러했습니다. 여러 가지 생각들 중 뜻밖의 깨달음으로 다가온 것은 ‘모순’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모두들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죽을힘을 다해 전쟁 같은 일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과연 우리가 지킨 것이 사랑이었는지, 혹시 피로와 분노, 혐오로 비뚤어진 일상은 아니었는지, 하느님께서 나에게 부여하신 삶과 구체적 소명은 외면하고 사랑하는 이들을 외롭게 하면서 미안한 일만 더 많이 만든 삶은 아니었는지…. 어쩌면 바이러스만큼이나 무서운 치사율을 갖고 있던 것은, 인간의 생각과 행동의 자유를 박탈하고 노예화시키며 조정한 경쟁과 탐욕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정부의 지침은 2미터라는 물리적 간격을 요구한 것이었지만, 우리가 정녕 지키고 사랑해야할 소중한 대상에 대한 마음의 거리를 좁히고 가까이가게 했다는 점에서는 분명 하느님의 은총이며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계획하고 질주해야할 때가 아니라 사랑하고 토닥이며 생명의 꽃을 피울 때입니다. 부활을 기다리는 시간, 봄이잖아요.

나의 십자가
배종호신부-
주님이 지신 십자가는 구원의 표징이라는 사실입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인 동시 에 주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만큼 인간의 증오와 죄악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더 주의를 기울 여야 할 것은 십자가는 죽음의 사슬에 갇힌 인간을 향한 하느님 자비의 연대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근원적 어두움과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는 구원으로 연결되고 있다는 믿음을 지닐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은 우리는 교회가 세상에 제기하는 도전과 질문을 자신에게 적용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교회의 사명인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실현은 세상의 논리와 달리 돈이나 힘 만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성주간을 시작하면서, 예수님의 삶과 내 인생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묵상해 봅니다. 나도 존경과 사랑을 받는 때가 있었지만 비난과 외면을 받기도 했고, 죽음의 위협이 찾아올 수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를 지키려고 변명과 자기 합리화에 몰두하지만 예수님은 묵묵히 당신 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셨습니다. 인생의 돌발변수를 만나면 “왜 하필 나에게?”라고 불평하는 것 이 나의 속성이지만, 예수님은 그것마저도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거룩함이란, 때 묻지 않은 청정한 삶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진흙탕 같은 혼란과 어두움 속에서도 오히려 밝게 빛나는 작은 불빛이 아닐까 합니다. 살면서 겪게 될 돌발변수들이 두려워 가장 안전하 고 견고한 자아의 틀에 갇혀 유다처럼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속됨에 빠지기보다는 찢기고 부서져도 그 시련을 걸림돌이 아닌 디딤돌로 삼는 순간, 나는 거룩함을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 닐까 합니다.
예수님처럼 어두운 순간들도 은총의 기회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아마 내 인생은 작은 거룩함 으로 가득 차 마침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단단하게 언 땅에 연한 새싹이 움터 나오고 꽃이 피듯이 죽음보다 강한 희망으로 더욱 건강해진 몸과 마음으로 다가오는 부활을 맞이하셨으면 합니다

인간의 변심과 주님의 사랑
-김영우신부-
오늘부터 예수 그리스도 수난의 절정인 성주간이 시작됩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직접 고 난을 받아들이신 성주간의 첫날인 오늘은 예수님께서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 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어린 나 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께 주어진 영광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영광과 수난, 제자들의 찬미와 배신이 라는 상반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루살렘 입성에서 예수님은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 되십니다.”라며 찬미를 받으시고, 군중들은 겉옷을 깔고 예수님께 환호를 보냅니다. 그러나 얼마 후 예수님 은 결박당하고 매맞고 고문당하며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는 처절한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을 임금으로 환호 하던 군중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치는 무서운 군중으로 변합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호하던 그 열광과 함께 십자가 처형을 외쳐대던 군중들 속에서 나약한 우리 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나약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바로 그 인간을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열렬히 환호하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사 람들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을 살펴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리고 우리를 끝까지 사랑해주시는 예수님의 크신 사랑을 깊이 깨달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죄가 전혀 없 으신 예수님은 십자가상의 죽음을 통해 죽음보다 더 강한 사랑으로 우리를 당신에게로 초대하십니다. 어떤 고통과 어려움이 따르더라도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변함없이 따르겠다는 굳은 결심과 신앙의 용기 가 필요합니다.
도망갔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증언하고 예수님처럼 십자가에서 죽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큰 사랑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깊은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실천하였고, 그 사랑 때문에 목숨을 바쳤습 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참사랑을 깨닫기만 한다면 제자들처럼 변화될 수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꿋꿋한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인간의 변덕스러운 모습과, 그래도 그 인간을 위해 서 목숨을 바치시는 예수님의 큰 사랑을 보면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찾아보려고 노 력합시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치는 군중 가운데의 나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어가는 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들은 누구보다도 먼저 기쁜 부활을 맞이할 수가 있 을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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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가 없었습니다. 잘못은 분명 상대방에게 있는데,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라는 말처럼, 먼저 목소리를 키우는 모습에서 굳이 저 역시 목소리를 키울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바로 보험회사를 불러서 사고를 처리했습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피해자 탓하기 오류에 빠진 것입니다. 피해자를 탓함으로 인해 자기를 보호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의 자기 보호는 피해자에게 더 큰 상처를 남기게 될 뿐입니다. 첫 번째 피해에 또 다른 가해를 범하는 것이 됩니다.
자신은 무조건 옳고 상대방은 틀렸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품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따라서 늘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바른 판단으로 올바른 길을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이 피해자 탓하기 오류에 빠진 당시 사람들에 의해 수난과 죽음을 맞이하신 것은 아닐까요?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주님께서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로, 오늘부터 성주간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성지 축복과 행렬을 거행하면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미사 중에 기념하고, 또 미사 중 그리스도의 수난기를 통해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게 합니다(코로나 19 예방을 위한 사회적 거리 두기로 미사를 신자들과 함께 할 수는 없지만).
주님께서는 어떤 죄도 있을 수 없는 하느님이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일이라고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한 것,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알려주신 것, 놀라운 기적으로 구원의 표징을 보여 주신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열렬히 환호하며 맞이했지만,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면서 적의를 표시하면서 예수님을 반대합니다. 죄 없으신 분을 향해 죄로 가득한 사람이 오히려 목소리를 키우며 “틀렸다”라고 피해자 탓하기를 하는 것입니다.
은돈 서른 닢에 자신을 팔아넘긴 제자, 자신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제자, 붙잡혀가자 뿔뿔이 흩어진 제자들, 거짓 증언을 하는 사람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군중들, 침을 뱉고 때리는 등 모욕을 주는 군사들, 심지어 큰 죄를 지어 십자가형을 당하면서도 예수님을 조롱하는 도둑 등등…. 얼마나 주님께서 외로우셨을까요?
우리도 주님 탓을 많이 합니다. 자기 일이 풀리지 않는다고,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서 주님 탓을 합니다. 또 주님을 외롭게 합니다.


신부라고 해서 인상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하긴 저부터가 인상 좋다는 이야기를 잘 듣지 못합니다. 그런데 어떤 신부님의 인상은 해도 해도 너무할 정도로 좋지가 않았습니다. 본당 사목을 하고 있을 때 동네 깡패로 오해받을 정도였습니다. 본인의 이런 점을 알고는 있었지만 본래 바탕이 이러니 어떻게 하겠냐면서 포기하고 있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본인이 잘 웃지 않아서 이런 오해를 받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자주 웃었습니다. 심지어 미사 중에도 미소를 띠면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신부님은 투서를 받았다고 합니다. 글쎄 미사 중에 신자들을 향해 자주 비웃는다는 것이었지요. 신부님을 잘 아는 사람은 그렇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잘 모르는 사람에게 신부님의 웃는 모습이 비웃는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알고 모르고의 차이는 이런 오해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이런 오해를 계속 만들어가며 사는 것은 아닐까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섣부르게 판단하는 그래서 누군가에게 큰 상처를 계속해서 남기는 우리입니다.
한 번 더 생각하고, 한 번 더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을 모르기에 십자가에 못 박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전철을 또다시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다'가 아니면 주님께서 나의 '모든 것이다'가 되실 수 없다
-전삼용신부-
제가 자신을 낮추고, 버리고, 죽이지 않고서는 주님을 따를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하면, 어떤 분들은 “하느님께서 당신 모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는데, 왜 인간의 가치를 그렇게 비하하느냐?”라고 반발하기도 합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존중받아야 마땅하고 그래서 인간 안에 하느님처럼 될 요소들이 다 들어있다.”라고 말합니다. 인간으로서 존중받아야 마땅하다는 말은 맞지만, 자칫 이것이 그리스도의 오심을 필요 없게 만들 수 있는 위험한 말이 되기도 합니다. 영성적으로 예수님은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Nothing)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죽여야 하는 자기부정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면 영성의 길은 시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성녀 로사로 유명한 페루의 수도 리마에 또 다른 유명한 성인이 계십니다. 일명 ‘빗자루 수사’로 알려진 마르티노 데 포레스 성인입니다. 마르티노 성인은 스페인 귀족의 아버지와 흑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혼혈입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피부를 닮아 흑인으로 태어났습니다. 당시 혼혈이나 흑인은 노예 정도로 취급되어 백인들이 흑인들의 몸에는 영혼이 들어있지 않다고 말할 정도로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마르티노 성인은 1579년에 태어나서 1639년에 돌아가실 때까지 도미니코 수도회의 평수사로서 온갖 잡일을 도맡아 하였습니다. 이발, 상처 치료, 의류수선 등뿐 아니라 남들이 꺼리는 청소까지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빗자루 수사’란 별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왜 그런 저급한 일만 하느냐고 물으면 성인은 “저는 불쌍한 노예일 뿐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수도회 재정이 나빠지자 성인은 수도원장에게 찾아가 “저는 수도원의 재산이니 저를 노예로 팔아 빚을 갚으십시오.”라고 청했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비하하는 것이 하느님 모상성을 해치고 인간 존엄성을 무시하는 행동이었을까요?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자신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는 이를 ‘모든 것’(Everything)이 되게 하십니다. 당신이 ‘모든 것’이기 때문에 당신은 ‘아무것도 아닌 것’과만 짝을 이루실 수 있습니다.
마르티노 성인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동물과도 소통할 줄 알았을 뿐만 아니라 많은 무서운 병들을 기적적으로 치유하기도 하고, 기도 중 두 번이나 몸이 떠오르는 것을 다른 수사들도 목격하였습니다. 심지어 동시에 두 장소에 나타나기도 하고, 몸에서 빛이 나와 기도하는 방을 가득 채우기도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런 기적들로 마르티노 수사와 함께 해 주시자 많은 사람이 그를 성인으로 대하였고 고아원을 설립하려고 할 때 마르티노 수사의 성덕을 보고는 많은 재정지원을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항상 빗자루를 놓지 않고 자신은 그저 불쌍한 노예일 뿐이라고 말하며 평수사로서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였습니다. 평생을 그렇게 사셨습니다. 자신을 Nothing으로 만드는 사람에게만 주님께서 Everything이 되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십니다. 왜 ‘나귀’일까요? 왜 사이비 교주들처럼 백마를 타고 당신 백성들 속으로 들어오시지 않으셨을까요? 나귀는 당신께서 주시는 십자가를 진 자신을 버리고 순종하는 사람의 상징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유다’는 그리스도의 상징입니다. 요셉을 팔아넘긴 형제들이 이집트로 양식을 얻으러 왔을 때 당시 재상으로 있었던 요셉은 형제들에게 올가미를 씌워 베냐민을 자신의 종으로 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베냐민 대신 자신이 종이 되겠다고 말했던 인물이 유다입니다. 요셉은 유다의 희생적인 마음을 보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자신들에게 했던 형제들의 모든 죄를 용서하였습니다.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유다와 같이 우리 죄를 없애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같은 하느님이시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이 됨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야곱은 유다에게서 그러한 왕이 날 것이라고 말하며 축복을 줍니다. 이 축복 속에 나귀가 등장합니다.
“그는 제 어린 나귀를 포도 줄기에, 새끼 나귀를 좋은 포도나무에 매고 포도주로 제 옷을, 포도의 붉은 즙으로 제 겉옷을 빤다.”(창세 49,11)
포도주로 옷을 빨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마치 피를 흘리는 사람처럼 됩니다. 이사야는 구원자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며 깜짝 놀라 “어찌하여 당신의 의복이 붉습니까? 어찌하여 포도 확을 밟는 사람의 옷 같습니까?”(이사 63,2)라고 물어봅니다. 에돔에서 오는 구원의 큰 능력을 가진 분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나는 혼자서 확을 밟았다. 민족들 가운데에서 나와 함께 일한 자는 아무도 없다. 나는 분노로 그들을 밟았고 진노로 그들을 짓밟았다. 그래서 그 즙이 내 옷에 튀어 내 의상을 온통 물들게 한 것이다.”(이사 63,3)
히브리어에서는 포도즙에서의 ‘즙’이나, 인간의 ‘피’나 같은 단어(네짜흐)로 사용합니다. 다시 말해 이사야서의 피로 물든 구원자의 모습이나 창세기의 유다의 후손인 그리스도 왕의 모습이나 다 같은 십자가의 피 흘리시는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드는 도구입니다. 이 Nothing이 됨을 통해 세상의 Everything이 됨을 보여주는 신비가 ‘나귀’와 연계되는 것입니다.
나귀는 포도나무에 매여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포도나무로서 당신 피를 내어주십니다. 그 나무에 매여 있는 나귀는 그리스도로부터 성령을 받는 이들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당신 성령을 받는 이들을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성령을 받는 이들은 성령이 아니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는 나귀가 두 마리 등장합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딸 시온에게 말하여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암나귀를, 짐바리 짐승의 새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는 즈카르야서 9장 9절을 인용합니다. 암나귀는 그리스도를 등에 업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고, 그 새끼는 그 어머니를 본받는 새로 태어나는 자녀입니다. 암나귀와 새끼나귀는 그리스도라는 포도나무에 매여 그분에게서 오시는 성령의 힘으로 살아가는 ‘교회’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람들에게로 향하는 교회의 모습은 마치 나귀처럼 그분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마치 자신이 ‘어떠한 존재’(Something)가 되려 한다면, 자신 등에 타신 그리스도께서도 그 사람에게서는 ‘모든 것’이 아닌 또 다른 ‘어떠한 존재’밖에 되지 않으십니다. 내가 참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든 것’임을 전하는 이가 되려면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들어야 합니다.
코로나19로 많은 고통 받으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나 저 개인적으로는 사순절을 이렇게 편안하게 지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특별히 사순시기는 특강으로 일 년 중 가장 바쁜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사순 특강이 다 끝나갈 이맘때쯤 마음의 큰 공허감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였으니 기뻐야 하는데 마음은 공허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원인을 살펴보니 제가 자신도 모르게 많은 강의와 박수를 받으면서 ‘어떠한 존재’가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어떠한 존재가 되니 그 많은 사람의 칭찬과 박수로는 성이 차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만큼 참 행복이신 그리스도께서 나의 전부가 되지 않으시고 그저 어떤 분이 되어버리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리스도를 맞아들이기 위해 ‘나뭇가지와 겉옷’을 깔았습니다. 나뭇가지는 그분을 자신의 왕으로 인정하겠다는 뜻이고, 옷은 자기를 버리겠다는 뜻입니다. 자신을 버리지 않고 그분을 자신의 왕으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겉옷을 벗는 행위가 Nothing이 되는 행위입니다. 그래야 그분이 나의 참 왕으로써 Everything이 되십니다. 이 시기에 주님이 아니시면 우리는 그저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인정하고 고백하고 그분만을 자신의 전부로 고백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조재형신부-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기도하실 때 ‘피와 땀’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로 결심하셨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사랑하는 제자들은 기도하지 못하고 잠이 들었습니다. 제자들은 꿈속에서 이렇게 기도했을 것 같습니다. “스승님! 영광의 자리에 오르시거든 저희에게도 합당한 자리를 주세요. 저는 예수님의 오른편 자리에, 제 동생은 예수님의 왼편 자리에 앉게 해 주세요.” 제자들이 원하는 것은 재물, 명예, 권력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랜 동안 병원에 있어야 했던 형제님이 병실에 적어 놓았던 기도문이 있습니다. “주님, 저는 저의 출세의 길을 위해 건강과 힘을 원했으나, 당신은 제게 순종을 배우라고 나약함을 주셨습니다. 주님, 저는 위대한 인물이 되고 싶어 건강을 청했으나, 보다 큰 선을 하게 하시려고 제게 병고를 주셨습니다. 주님, 저는 행복하게 살고 싶어 부귀함을 청했으나, 제가 지혜로운 자가 되도록 가난을 주셨습니다. 주님, 저는 존경받는 자가 되고 싶어 명예를 청했으나, 저를 비참하게 만드시어 당신만을 필요로 하게 해주셨습니다. 주님, 저는 제 삶을 즐겁게 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청했으나 당신은 모든 이를 즐겁게 해주어야 하는 삶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주님, 제가 당신께 청한 것은 하나도 받지 못했지만, 주께서 제게 바라던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길이였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진리였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생명이었습니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을 지내면서 고인이 되신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말씀을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제게는 깊은 바다와 같았고, 높은 산과 같았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가야 할 길을 삶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언제나 책을 가까이 했습니다. 사건의 현상을 이야기하기보다는 본질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신문의 행간을 읽기보다는 신문의 편집의도를 말하였습니다. 책을 가까이하고, 본질을 보았기에 쉽게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술버릇이 있는 아들에게 말로 타이르지 않았습니다. 30년 동안 즐겨 하시던 술을 끊으셨습니다. 돌아가실 때까지 한잔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사제가 되겠다는 아들에게도 덕담을 하지 않았습니다. 매일 기도하였고, 성서를 읽으셨고, 성무일도를 하였습니다. 기도하는 사제, 말씀에 충실한 사제가 되라고 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깨어있지 못하고 잠을 잤던 제자들처럼 저 역시 아버지가 보여준 길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수난 복음을 함께 읽었습니다. 주님의 수난에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배반했던 베드로, 자신의 꿈과 다른 길을 가시는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갈대처럼 수시로 마음이 변하는 군중,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려는 대사제,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을 조롱했던 도둑이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들 또한 평소에는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내게 피해가 온다 싶으면, 나에게 더 큰 즐거움이 있다면 기꺼이 신앙의 이름표를 떼고 살 때가 있습니다. 우리들 또한 십자가, 희생, 겸손, 사랑이라는 길이 있지만 재물, 명예, 권력이라는 꿈을 쫓아갈 때가 많습니다. 너무도 쉽게 우리의 신앙을 팔아넘길 때가 있습니다. 우리들 또한 지금 내가 가진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 가난한 이들의 외침, 절망 중에 있는 이들의 절규, 아파하는 이웃의 고통을 외면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등장인물 중에 ‘키레네 사람 시몬’이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사람입니다. 오늘 성서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수건으로 닦아준 베로니카의 이야기도 알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두려워 도망갔지만 예수님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함께 했던 여인들의 이야기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주간을 지내고 있습니다.
만일 2000년 전에 내가 예수님 수난의 길을 보고 있다면, 나는 어떤 자리에 있을까요? 지금 나는 나의 삶 속에서 어떤 자리를 걸어가고 있을까요?

어린 나귀! 만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타시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동물입니다!
-양승국신부-
지금 우리는 교회 전례력 안에서 가장 정점이자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성주간을 시작합니다. 교회는 이 성주간 동안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잘 묘사하고 있는 예수 수난 복음을 깊이 묵상하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성주간의 첫째날인 오늘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예수님께서는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당신 지상 생애 가운데 가장 의미있고 중요한 한 주간을 시작하십니다.
예루살렘 안으로 들어오신 예수님께서는 월요일에 속화된 성전을 말끔히 정화하십니다. 화요일에는 군중을 향하여 성전 파괴라든지, 재림 때의 징조라든지, 여러 중요한 비유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수요일에는 하루 휴식을 취하시고, 드디어 성 목요일,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거행하십니다. 만찬 중에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고, 만찬이 끝난 다음 겟세마니 동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십니다.
이윽고 체포되신 예수님께서는 성금요일 혹독한 고통과 죽음의 날을 맞이하십니다. 부당한 재판을 받으시고, 이리저리 끌려 다니시다가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마침내 오후 3시경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십니다. 성 토요일에는 무덤에 계시다가, 주일에 영광스럽게 부활하십니다.
성지(聖枝) 주일, 예수님의 첫 행적은 올리브산 동쪽에 위치한 벳파게에서 시작하십니다. 벳파게는 히브리어로 번역하면 ‘무화과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벳파게를 떠나 올리브 산 정상으로 올라가십니다.
올리브산은 예루살렘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장소입니다. 해발 810미터 높이의 올리브산 정상은 예루살렘 성전보다 110미터 가량 더 높기 때문에 다들 정상에 올라서면 감탄사를 연발합니다.
더구나 많은 성지순례객들이 예리코에서 유다 광야를 거쳐 마지막 여정으로 올리브 산을 넘게 됩니다. 긴 여행에 지친 순례객들이 올리브 산 정상에 도달하면, 참으로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되지요. 서쪽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과 함께, 꿈에 그리던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의 전경이 한 눈에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그런 기쁨을 만끽할 여유가 조금도 없습니다. 견고하게 쌓아올려진 예루살렘 성이지만 조만간 돌 하나 남지 않을 파멸이 닥쳐올 것을 내다보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번 주간에 당신에게 벌어질 참혹한 일들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윽고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입성 때 타고 들어가실 동물을 선택하시는데, 좀 웃깁니다. 이제 마지막인데, 이왕이면 좀 있어 보이게, 코끼리 정도 타고 들어가시면 참 좋았을텐데. 코끼리가 아니라면 키큰 낙타나 멋진 백마 정도도 괜찮았을텐데.
예수님께서 최종적으로 선택하신 동물은 어린 나귀였습니다. 말과에 속하지만 말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하고 왜소합니다. 생긴 것도 좀 웃기고 생뚱맞습니다.
어린 나귀! 창조주 하느님의 외아들이요 만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타시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동물입니다. 수난과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특유의 유머 감각을 마음껏 발휘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코믹한 모습! 여기에는 큰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존경과 환영의 표시로 나뭇가지를 길에 깔고,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길에 까는 군중들, 그들의 마음과 예수님의 마음은 큰 차이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크게 환영하고 박수를 치던 예루살렘 군중은 마음 속으로는 다들 세속적인 기대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강력한 통치자가 되셔서, 이스라엘에게 정치적인 해방과 경제적 번영을 안겨줄 것을 기대하며 환호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지금 그들이 외치는 ‘호산나’가 조만간 저주와 악담, 고발과 십자가 처형으로 뒤바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승리자나 정복자가 타는 건장한 말이 아니라, 작고 왜소한 어린 나귀를 타신 것입니다.
탄생 때 부터 시작해서 죽음의 순간까지 시종일관 계속된 예수님의 겸손, 아래로의 행보가 돋보이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끝까지 사랑합니다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에 대한 주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십니다.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리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이 시간 한결 같은 사랑을 쏟아주시는 주님을 생각하는 가운데 풍부한 은총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입성할 때에 제자들은 어린 나귀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걸치고 예수님을 거기에 올라타시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군중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습니다. 그들은 “ ‘다윗의 자손께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마태2,9)하고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렬히 환영을 받았습니다.
옷을 길바닥에 깔았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을 바친 것입니다. 당시의 겉옷은 단순히 옷 그 이상의 것입니다. 겉옷은 담보 삼을 수 있을 만큼 중한 것으로 밤을 넘길 수 있는 이불이요, 햇빛을 가릴 수 있는 천막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소중한 것을 길바닥에 깔고 주님을 환영하였던 그들인데 빌라도 앞에 선 예수님을 보고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마태27,22.23)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리고 조롱하며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마태27,29)를 외쳤습니다. 그야말로 ‘감탄고토’입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뜻입니다. ‘자기에게 이로울 때는 이용하고 필요하지 않을 때는 배척한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환영받던 예수님을 통해 소경이 보게 되고 귀머거리가 듣게 되었고, 나병환자가 낫게 되었으며 중풍병자가 일어섰고 빵을 배불리 먹는 기적도 체험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 앞에 서니까 마음들이 완전히 돌변하였습니다. (신자 중에 가장 무서운 신자? 배신자! 누구? 은전 서른 양에 주님을 팔에 팔아먹은 유다, 십자가 죽음 앞에 도망간 제자들...우리는?)
베드로도 그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고난의 길을 걷게 되리라고 예고할 때 베드로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다가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는 꾸중을 들었고, 결정적으로 예수님께서 수난을 예고하시며 “오늘 밤에 너희는 모두 나에게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마태26,31) 하고 말씀하시자 “모두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 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마태26,33). 하였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과 함께라면 감옥에 갈 준비도 되어있고, 죽을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루카22,33).하고 장담하였습니다. 그것은 솔직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급박한 상황이 닥치자 자기도 모르게 3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말하였습니다.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까지 하였습니다. 닭이 울고서야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너는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슬피 울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연약합니다. 강한 것 같지만 시련과 고통의 두려움 앞에서 무너집니다. 우리는 바로 이 약함 때문에 주님께 더 간절히 의탁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어떤 고난의 역경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의지만을 믿고 방심하면 걸려 넘어지고 맙니다. 사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행위’는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나의 모습입니다. 좋은 일에는 생색내기, 어려운 일에는 꽁무니 빼기에 익숙합니다. 그러고 나서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으면 ‘그 일을 위해서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느냐?’하며 속보이는 소리를 합니다. 평상시에는 드러나지 않던 모습이 위급한 상황에서는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시기에 이 사람이 참된 사람인지 거짓된 사람인지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세례성사를 받으면서 하느님의 자녀로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모든 죄를 끊어 버리고, 죄의 지배를 받지 않기 위해 악의 유혹을 끊어버린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죄를 범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으며,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을 믿는다고, 부활의 삶을 믿는다고 선언하고서는 그 부활이 없는 것처럼 처신하고 있습니다. 우환이 생기면 성체 앞에 쫓아와서 기도할 생각보다도 ‘어디 용한 사람 없나?’ ‘오늘의 운세가 좋지 않더니만…이런 일이 생겼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점쟁이를 찾고 사주팔자를 보시는 분도 많이 계십니다. 풍수지리를 본다고 하다가 마음의 혼동을 가져와 신경쇄약으로 힘들어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점괘가 좋고 사주팔자가 좋으면 뭐합니까? 노력하지 않는데! 묘지를 잘 쓰면, 조상이 복을 줍니까? 아무 노력 없이 복이 굴러옵니까?
가정 안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결혼하실 때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마지못해 하셨습니까?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고 ‘너 없이는 못산다.’고 하였습니다. 눈에 꽁깍지가 씌워져 보이는 게 없었죠. 그래도 어찌 되었든 하느님과 일가 친척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할 때나 아플 때나 신의를 지키며 일생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선언해 놓고는 상대방을 무시하고 자기 뜻에 맞춰주지 않는다고 바가지 긁고, 변명을 늘어놓고……. 인간의 변덕은 죽 끓듯 합니다. 성당에는 하느님이 계시고 가정에나 밖에서는 하느님이 안 계신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시기 질투하며 흉보고 욕하며 싸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럴 때는 신자라는 사실이 부끄럽게 보입니다.
자녀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교육한다고 해놓고서는 신앙은 자유라고 합니다. 커서 자기가 판단해서 선택하게 한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다른 교육은 왜 하십니까? 유치원은 왜 보내고, 학교는 왜 보냅니까? 더군다나 학원은 왜 보내요? 돈 들여가면서. 자기가 커서 알아서 하게 두지. 부모의 의무는 일상이나 신앙이나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에 직면해서도 당신을 뱉어버린 사람들을 용서하시고 그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걸려 넘어지는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있다는 것은 큰 복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께 알게 모르게 약속한 모든 것들에 대해서 충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행위가 더 이상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에 이르면서도 자기를 기억해 달라는 죄수에게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하시며 구원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허물을 고백하며 주님께 의탁하여 구원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하고 숨을 거두실 때 이 광경을 목격한 백인대장이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루카23,47)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조롱과 모욕, 억지로 우겨대는 사람들을 상대하여 한마디의 항변과 변명도 없이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마태27,46)하고 아버지께 기도하며 무력하게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그 깊은 침묵 속에서 백인대장과 예수님을 지키던 이들은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태2754).고 말하였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나를 모함하고 헐뜯고 비방하며 흉을 본다면 그렇게 침묵할 수 있을까요? 상대를 용서하고 아버지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해 줄 수 있을 까요? 우리도 어떤 예기치 않은 상황과 처지에서 그리고 구설수에 침묵의 언어로 사랑의 깊이를 더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침묵은 진정한 사랑이었습니다. 깊은 침묵으로 사랑에 사랑을 더하고 사랑을 담는 한 주간 되시기 바랍니다. 토마스 머튼은 “왜? 라고 묻지 않고 십자가를 포용할 때 침묵은 흠숭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매순간 흠숭을 드리는 기쁨을 차지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의 묘비에는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줄 알았네.”라고 쓰여 있다고 합니다. 말씀을 행하는데 있어서는 결코 ‘어영부영’, ‘우물쭈물’, ‘할까말까’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아버지, 이 잔이 비켜갈 수 없는 것이라서 제가 마셔야 한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마태26,42)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쓰더라도 뱉지 않고 기꺼이 마실 수 있는 은혜를 간청합니다.
성모님의 삶의 여정을 보면, 나약함과 비참함, 예기치 않은 일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감당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었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믿음 안에서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며 인내하셨고, 희망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분’이십니다.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었던 그 믿음을 끝까지 지키셨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마음을 혼란케 하는 말씀을 들으셨던 재수가 없는 여인 이었고, 남편 요셉에 대해 걱정을 해야 하는 근심하는 여인이었으며 아들을 마굿간에서 출산을 해야 했던 딱한 여인이었습니다. 헤로데의 칼날을 피하여 아기예수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난길에 올랐던 비운의 여인, 아기를 율법의 규정에 따라 성전에 봉헌했을 때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픈’ 고통을 겪을 것이라는 예고를 받았던 비통의 여인이셨습니다. 12살 난 소년 예수를 성전에서 잃고 애태웠던 여인, 세상과 인류 구원을 위해 아들 예수를 철저히 남에게 빼앗겨야 했던 처절한 어머니, 아들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서 있어야 했던 애간장이 녹아난 어머니, 죽은 아들을 가슴에 껴안은 채 소리 없이 애통해하던 기구한 어머니셨습니다(김수환 추기경 강론 참조).
성모님의 놀라움은 그토록 많은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셨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는 성모님의 신앙이 변함없이 살아있었다는데 있습니다. 성모님은 끝까지 믿음을 지켰습니다. 우리도 어떠한 처지, 환경 안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지켜야 하겠습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을 끝까지 지킬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이런 말을 하고 저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
-이영근신부-
오늘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사건을 기념하는 <성지주일>입니다.
동시에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는 <수난주일>입니다.
<제1독서>의 <야훼의 종의 셋째노래>는 <수난주일>의 특성을 드러내는 반면,
<제2독서>의 <그리스도 찬가>는 <성지주일>의 특성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을 임금으로 환영하는 상징적 행위로 성지가지를 들고 성당에 들어와, 동시에 예수님의 수난사를 듣습니다.
오늘 <전례>는 기쁨과 슬픔이 혼합되어 교차됩니다.
한편으로는 “호산나”를 환호하는 기쁨이 차오르고, 또 한편으로는 수난과 죽음으로 치닫는 비탄이 흐릅니다.
환영의 행렬은 곧바로 조롱의 십자가 행렬로 바뀌고, 손을 흔들던 환호의 성지가지는 등을 내리치는 채찍으로 바뀝니다.
겉옷을 벗어 길에 깔았던 이들은 예수님의 속옷마저 벗겨가고, 나귀 등위에 타셨던 분은 십자가 위에 못 박혀 매달리게 됩니다.
그리고 왕으로 성 안으로 모셔진 그분은 강도와 함께 성 밖에서 처형됩니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에 따른 우리 주님의 수난기입니다.
이 수난사는 “다윗의 자손 호산나”라고 외치는 군중의 환호로부터 시작되어, 바로 그 군중들이 외치는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는 배신과 욕설로 마무리 됩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을 따르던 제자들의 배신은 예수님을 더욱더 처참하게 만듭니다.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하루 밤 사이에 세 번이나 스승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가리옷 유다는 은전 서른 냥에 스승을 팔아넘겨버리고,
다른 제자들이 스승이 붙잡힐 때는 옷마저 벗어던져버리며 달아나 버립니다.
호시탐탐 기회를 보고 노리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 그리고 대제관은 서로 결탁하여 온갖 음모를 꾸미고, 예수님을 심문하고 박해하며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예수님은 외적으로는 군중과 모든 적대세력들로부터 위협당하고, 내적으로는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의 공동체가 와해되는 절대극명의 위기상황에 빠지게 됩니다.
오늘은 26장 마지막 장면인 베드로의 배반 장면(26,69-75)만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냐는 추궁이 거듭될수록 격한 반응을 보입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부인하다가(70절),
다음에는 맹세까지 하고(72절),
급기야는 거짓이면 천벌까지 받겠다고 극구 부인합니다(74절).
결국, 그는 단지 예수님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가르침인 “맹세하지 말라”(마태 5,33-37)는 가르침도 따르지 않습니다.
사실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맹세하라고 다그치는 대사제의 추궁에도 맹세하지 않고 담대하셨는데 말입니다(26,63-64).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째 부인했을 때, 닭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습니다.
베드로의 눈에서 비닐이 벗겨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구원의 카이로스의 순간이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라는 그의 무지와 불신에 광명이 비추어진 것입니다.
‘닭 울음’은 어리석음에 갇힌 그의 영혼을 깨웠습니다.
그것은 하늘을 뚫고, 영혼의 귀를 뚫고 내리는 청천벽력의 뇌성이었습니다.
그 소리는 그의 불신과 의혹, 무지와 어리석음을 부서 버렸습니다.
그의 울음은 단지 죄에 대한 울음이 아니었습니다.
스승을 모른다고 부인한 거짓과 비겁함에 대한 울음도, 혹은 스승을 배신한 불효나 불충에 대한 울음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게”(75절) 하는 성령의 ‘죽비’요 ‘할’이었습니다.
닫힌 가슴을 헤치고 들어오는 주님 말씀의 광채요 섬광이었습니다.
죄가 아니라 그분의 사랑을 깨우치는 빛이었습니다. 먼저 베풀어진 주님의 사랑 말입니다.
당신을 배신할 줄을 빤히 알면서도 먼저 베푸신 사랑 말입니다.
비록 의혹과 불신에 휩싸여 배신했어도 바로 그러한 그를 끝까지 믿고 희망하신, 그분의 먼저 베풀어진 사랑 말입니다.
“사탄이 너희를 밀처럼 채질하려고 나섰다. 그러나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주어라.”(루카 22,31-32)하시며, 결코 희망과 신뢰를 저버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사명을 주시는 그 사랑을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바로 이 먼저 베풀어진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찬란한 울음을 울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의 배신은 당신 사랑에 대한 거절 때문이지만, 실상 드러난 것은 당신의 크신 사랑이었습니다.
그토록,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보다 먼저 사랑하시고, 그 사랑 때문에 고통 받으시고, 그 어떤 고통 속에서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그 어떤 처지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통 받더라도 사랑하기를 결코 멈추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상처받더라도, 오히려 그 속에서 사랑하는 법을 배워가야 할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베풀어진 사랑을 관상하며 기쁨의 거룩한 울음을 울어야 할 일입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저를 더더더더~ 사랑하십니다.
저의 사랑이 부족하고 변덕스러워도 당신은 그러한 저를 끝까지 사랑하시니, 주님 사랑 받들게 하소서.
주님 믿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더더더더~ 저를 믿으십니다.
저의 믿음 약하고 미진하여도 당신은 저에게서 믿음을 거두지 않으십니다.
당신께 대한 저의 믿음이 아니라 저에 대한 당신의 믿음으로 제가 구원되오니, 주님께 의탁하게 하소서.
주님 희망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저를 더더더더~ 희망하십니다.
저의 희망이 그릇되고 빗나가도 제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고 기다리오니, 저의 희망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제가 당신의 희망이 이루어지는 응답의 장소요 공간이 되게 하소서.”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2)
주님!
더 이상 고집 부리지 않게 하소서.
생각을 움켜잡기보다, 생각에 붙잡히기보다, 생각을 바꿀 줄 알게 하소서.
저의 바람이 아니라, 당신 말씀을 따르게 하소서.
당신을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 조정 당하게 하소서. 아멘.

십자가, 십자가의 길
-송영진신부-
신앙생활의 기본 원리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라는 예수님 말씀입니다.
신앙인은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얻기를 희망하면서, 또 예수님만이 그것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믿으면서 예수님 뒤를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예수님 뒤를 따라가는 것이 곧 신앙생활입니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라는 말씀은,
예수님 뒤를 따라가는 과정에서 신앙인들이 실천해야 할 ‘행동 지침’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버리는 일과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일은
두 가지 일이 아니라 한 가지 일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들을 기꺼이 받아들여서 지고 가는 것 자체가
바로 자신을 버리는 일이고, 또 자신을 버리는 것 자체가
십자가를 받아들여서 지고 가는 일입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말은,
예수님 뒤를 따르는 일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다 버린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속된 욕망, 욕심, 이기심 같은 것을 버려야 하고,
온갖 유혹들을 물리쳐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고,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하고 싶지 않지만 신앙인으로서 해야 하는 일들을 기꺼이 하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고, 반대로, 하고 싶지만 신앙인으로서 하면 안 되는 일들은
멀리하면서 하지 않는 것도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라는 말을 들으면, 또 ‘십자가의 길’이라는 말을 들으면,
고통, 고난, 시련 등을 연상할 때가 많은데, 십자가 자체는 고통이지만,
십자가가 십자가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부활로 가는 과정이었을 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고통만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 승리, 생명을
상징하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수난이었기 때문에 사랑도 상징합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고 가는 십자가도
부활과 생명으로 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세속의 믿음 없는 사람들은 눈앞의 고통만 보겠지만,
믿는 사람들은 그 고통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부활과 승리와 생명을,
또 영원한 기쁨과 행복과 평화를 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일이 힘들긴 하지만, ‘기쁨으로’ 지고 갈 수 있습니다.
(기쁨 없이 억지로 지고 가면 고통만 커지고, 더 힘이 들고,
그러다가 “더 이상 못 가겠다.” 라고 주저앉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기쁨 없이 억지로 하면 결국 냉담자가 되어버립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고통만 볼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부활과 승리와 생명을 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기쁨 가득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해마다 성지 주일을 지내면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역사적인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앙생활이란 예수님 뒤를 따르는 생활이라는 것을 되새기면서,
더욱 충실하게 예수님을 잘 따르겠다고 다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뒤를 따르는 일은,
잘 따르겠다는 생각만으로는, 또는 마음만으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 때에 제자들이 보여 준 모습들을
교훈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쪽으로 가실 때 토마스 사도는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요한 11,16).
또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가 당신을 부인하게 될 것이라고 예고하는 말씀을
하시자, 베드로 사도는 자기는 절대로 그런 짓은 하지 않겠다고 장담했습니다.
“......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스승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모두 그렇게 말하였다(마태 26,35).”
사도들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분명히 그들은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랬던 제자들인데,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습니다(마태 26,56).
달아났다가 되돌아온 베드로 사도는 멀찍이 떨어져서 예수님을
따라갔다가(마태 26,58), 박해자들의 압박을 이겨내지 못하고,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대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마태 26,69-74).
제자들의 마음이 변하거나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식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행동한 것은, 그때는 아직 ‘부활 신앙’이 없었기 때문이고,
또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수난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너무 당황하고 겁에 질려서 그랬던 것입니다.
(그렇게 나약했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에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위대한 신앙인으로 완전히 새롭게 변화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고,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 뒤를 따르는 일은, 바로 그 ‘부활 신앙’을 바탕으로 한 일입니다.
‘부활 신앙’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을 포함해서,
우리 자신의 부활도 믿는 신앙입니다.
죽음은 인생의 끝이 아니고 하나의 과정일 뿐이며, 죽음 너머에 또 다른 삶이
있고, 충실한 신앙인은 죽더라도 부활해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믿는다면, 아무런 망설임 없이 예수님 뒤를 용감하게 따라갈 수 있습니다.
< 잘 따르겠다는 생각이나 마음만으로는 예수님 뒤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나의 부활을 믿고 있어야만(확신하고 있어야만)
따라갈 수 있습니다.>
사실 ‘부활 신앙’이 없다면, 그리스도교 신앙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 15,13-14).”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성지 주일과 성금요일에 봉독하는 ‘주님의 수난기’는
‘부활 신앙’을 바탕으로 해서 읽어야 하고, 묵상해야 할 말씀입니다.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셨고, 지금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그리고 왜 수난을 당하셨는지를 묵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참혹하게 수난을 당하시고 돌아가신 것은
‘죄인인 나를’ 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로 따라오라고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당신이 주시는 생명을 얻으라는 초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것은, 그 초대에 응답하는 일이고,
응답함으로써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의 수난
-조욱현신부-
이제 성주간이 시작된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왕이신 그리스도를 공경하여 기념하는 ‘팔마 가지’의 축성과 행렬로 시작되지만, 이것이 또한 반대 받는 표적이 되어 예수님을 육체적으로 압박하는 음모로 바뀔 것이다. 오늘의 전례는 ‘무죄한 이’를 거슬려 자행되는 이유 없는 폭력으로 꾸며지는 비극적인 역사적 사건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참된 ‘승리’의 기치를 높이 들어 올리신다. 즉 십자가 위에 승리의 ‘팔마 가지’를 높이 매다신다.
제1독서는 ‘야훼의 종’의 셋째 노래의 일부만을 전해주고 있는데 여기서 야훼의 종은 굴욕적인 모욕을 당하고 있지만, 하느님께 대한 결코 흔들리지 않는 굳은 신뢰심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스도의 찬가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가지셨던 신성을 ‘비우시고’, ‘벗어버림’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렇게 하여 스스로를 낮추시는 마지막 단계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명’하기 위해 받아들이신 ‘십자가의 죽음’에서 나타난다(6-8절). 그러나 바오로는 이 그리스도의 참담한 능욕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고 놀라운 부활의 영광을 통하여 ‘영광의 주님’으로 들여 높여지시는 것까지 내다본다.(9-11절)
복음: 마태 26,14-27,66: 마태오의 수난기
마태오 복음의 수난기를 전체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개념은 ‘자유’이다. 즉 예수께서는 이 ‘자유’로써 죽음을 맞으신다는 것이다.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이끌어 가신다. 당신이 원하셨다면, 피하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모든 행위에 있어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아버지의 ‘뜻’이다. 이 ‘뜻’ 때문에 자진하여 당신을 해치려는 사람들의 손에 당신 자신을 맡기신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39절). “아버지, 이 잔이 비켜 갈 수 없는 것이라서 제가 마셔야 한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42절)
그리고는 “이제 때가 가까웠다.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어간다. 일어나 가자. 보라, 나를 팔아넘길 자가 가까이 왔다.”(26,45-46)라고 하신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생애 전체가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그 ‘때’에 맞춰져 있음을 본다. 그 ‘때’는 예수께서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될 ‘때’이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 이 외에도 예수께서 현실에 이끌려 가시지 않고 자유롭게 십자가의 길을 가신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말씀이 여러 군데 나타난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26,24), 또는 “너희는 강도라도 잡을 듯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를 잡으러 나왔단 말이냐? 예언자들이 기록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이다.”(26,55-56). 이것은 모두 아버지의 뜻에 ‘완전한 순명’(필립 2,8 참조)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마태오 복음의 수난기에는 예수님을 ‘죽을죄인’(26,66)으로 만들려고 애를 쓰지만, 그분의 ‘무죄하심’이 명백하다는 것이다. 빌라도의 아내는 남편에게 무죄한 사람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고 하고(27,19), 빌라도는 손을 씻으며 책임을 회피하고, 군중은 책임을 자기들이 지겠다고 한다(27,24-25). 이렇게 무죄한 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함으로써 그 잘못에 대한 선언을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자신들에게 스스로 하고 있다. 이렇게 그리스도와 길을 달리함으로써 더 이상 하느님의 백성이 되지 못한다. 그들의 자리를 교회가 대신하게 될 것이다.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백인대장의 고백이다.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백인대장과 또 그와 함께 예수님을 지키던 이들이 지진과 다른 여러 가지 일들을 보고 몹시 두려워하며 말하였다.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27,54).
여기서는 또한 인간들의 잘못이 역설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빌라도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죄가 없는 줄 알면서도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예수님을 사형장에 내몰고 있지 않은가? 대사제들이나 율법학자들조차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깨닫기를 거부하고 있다. 그리고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분을 단죄하고 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유다는 예수님을 30은전에 팔았고, 베드로는 큰 소리를 치고도 예수님을 배반하였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모두 도망쳤다.
유다처럼 돈을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자기 자신마저도 팔 수 있는 것이며, 스스로 목을 맨 절망적 행위는(27,5) 지나치게 자신의 목적에만 눈이 어두웠던 행위의 반작용이다. 베드로나 다른 사도들은 아직도 용기가 부족하다. 빌라도의 모습은 진리나 정의보다 자신의 안이함을 추구하는 양다리를 걸친 자들이며, 많은 형제들의 고통스러운 상황 앞에서 맥을 놓고 있는 사람들은 겟세마니 동산에서 그분과 더불어 “단 한 시간도 깨어있지 못하는”(26,40) 사람들이다.
이러한 모습들은 우리 자신의 모습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이 수난사는 우리의 문제가 아닌가? 그 비극적 사건의 장본인들이 우리이기 때문에 수난사의 주역들이 무대 위에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아닐까? 지금 나 자신이 하느님과 형제들 앞에 어떠한 자세로 있으며 살아가고 있느냐에 따라 수난의 비극을 재현하고 있을 수도 있고, 부활의 기쁨을 나누는 삶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성대주간을 지내면서 참으로 부활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순간들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살아가자.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마태 26, 22)
-한상우신부-
꽃 피고
꽃 떨어지는
사이 성주간을
맞이했습니다.
슬픔이 지나가는
시간입니다.
다시 예수님 앞으로
가기 위한 은총의
거룩한
성주간입니다.
예수님의
발걸음을
기억합시다.
예수님께서
꾸신 그 꿈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십자가와
함께 있습니다.
십자가에
속하여 있는
우리들 삶입니다.
이 성주간이
우리 영혼을
되찾는 시간이길
기도드립니다.
가장 맑은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는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기심을
빠져 나오기가
이리도 힘이 듭니다.
쌀쌀한
이기심 사이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서
지나가십니다.
주님의 십자가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우리 삶에서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를
깨닫고 실천하는
성주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수난으로
우리의 삶이
더 맑아지길
기도드립니다.
생명까지
내어주시며
십자가의 그 길을
쓸쓸히 걸어가십니다.

-오상선신부-
성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미사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겪으실 수난과 죽음을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여주고 있습니다.
"얼굴을 땅에 대고 기도하시며"(마태 26,39)
예수님께서 겟세마니라는 곳에 가셔서 아버지께 기도하십니다.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는 것은 종이나 노예, 포로들이 취할 법한 자세인데, 예수님께서 친히 아버지 앞에 엎드리셨습니다. 그만큼 절실한 순간에 다다른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마태 26,39).
복음사가는 이 말씀에 도달하기까지의 예수님의 고뇌를 모른 체 건너뛰지 않습니다. 약한 우리 인간처럼 그분도 근심과 번민으로 괴로워 죽을 지경이라고 하셨지요. 루카 복음사가는 이 고통을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졌다"(루카 22,44)고까지 표현합니다.
"원하시는 대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아십니다. 그분의 계획과 사랑과 고뇌를 아십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 당신이 겪어야 하는 과정도 모르시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 의지에 나의 의지를 포함시키는 것입니다. 그저 끼워넣는 것과는 다른 차원입니다. 내 의지가 그분 의지 안에 녹아 형체도 없이 사라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제1독서는 이사야서에 나오는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입니다.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이사 50,5).
누구라도 모욕과 수모는 피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게 자연스럽기도 하고 정상으로 보이지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 모두를 기꺼이 받아 안기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이사 50,7).
주 하느님께 의탁하면 아무리 심한 모욕과 수모가 쏟아져도 나를 작아지거나 비참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당장 인간적으로는 곤욕스러우나 원천도, 과정도, 지향도 하느님일 경우에는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을 요약하여 들려줍니다.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8).
순종.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시라는 예수님의 기도는 순종의 기도입니다. 종의 모습으로 자신을 낮출 대로 낮추시고는, 지금은 마치 아들이 아니라 종인 듯 아버지께 전권을 드리십니다. 아버지께서 주셨던 모든 권한을 되돌려 드리십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유다의 배반으로 촉발되었지요. 그래서 유다가 받았다 되돌려 준 은돈 서른 닢을 두고 수석 사제들은 "피 값"(마태 26,7)이라 이야기합니다. 결국 그들은 성전 금고에 넣을 수 없는 그 돈으로 "옹기장이 밭을 사서 이방인들의 묘지로 쓰기로"(마태 26,7) 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피의 값이 "이방인의 묘지"가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이스라엘을 넘어 온 인류에게 영원한 안식처를 제공하게 된 것입니다. 게다가 그 땅은 본래 "옹기장이 밭"이었다고 하지요.
"옹기장이 손에 있는 진흙처럼 너희도 내 손에 있다"(예레 18,6).
여기서 옹기장이는 하느님을 비유합니다. 그렇다면 옹기장이의 밭은 하느님께서 소유하신 온 세상이 되겠지요. 결국 예수님께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공로로 원래 하느님 소유였던 모든 민족들이 하느님의 땅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그것도 유다의 수석 사제들, 원로들의 협력으로 말이지요 모르고 한 그들의 행위가 더 큰 그림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현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이제 예수님의 고뇌와 수난에 깊이 머무르는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비록 전례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 하더라도, 말씀 안에서 주님과 생생히 동행합시다. 지난 3월 마지막 금요일 새벽에 온라인을 통해 참여한 교황님과의 성체강복에서 우리는 그 가능성을 체험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품고 주파수를 주님께 맞추고 있으면 가능한 신비입니다. 그분께서 원하시니까요. 그러니 우리, 힘내어 성주간을 걸어갑시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수난 성지 주일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34652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너희는 모두 이 잔을 받아 마셔라. 이것은 나의 피다.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마태 26,14-27,66)
기도는 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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