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4월 1일 사순 제5주간 수요일

Margaret K 2020. 3. 31. 19:10

2020 4 1일 사순 제5주간 수요일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이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요한 8,31-42)


"If you remain in my word, 
you will truly be my disciples,
and you will know the truth, 
and the truth will set you fre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머리가 좋다고 해서 다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건 그걸 제대로 사용하는 것이다. 머리가 아주 좋으면 최고의 선뿐 아니라 최고의 악을 실현할 수도 있다.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옳은 길로만 간다면, 너무 서두르다가 길을 잃는 사람보다 더 멀리 갈 수가 있다.”

이 말은 위대한 근대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의 말입니다. 사실 우리는 머리가 좋아야 올바른 판단도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오히려 최고의 악을 실현하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독재로 많은 사람을 고통 속으로 이끌었던 독재자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역사 속에서 온갖 악행을 저질렀던 사람 역시 머리는 너무나 좋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희망과 좋은 모범을 보여줬던 인물은 머리에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천천히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면서 ‘선’을 실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머리 좋은 것을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꾸준히 ‘선’을 실천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을 부러워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은 머리 좋은 것이 커다란 복을 받은 것처럼 착각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머리가 너무 좋으신 것 같아요.”라고 말하면 칭찬일까요? 악담일까요? 머리가 좋아서 악으로 기울어진 사람이 많다는 것을 기억하면, 이 말을 악담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열이면 열 모두가 악담이 아닌 칭찬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라고 유다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머물다’라는 의미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먼저 주님께 가는 것이 일 번이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머무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온다면, 듣는다면, 찬양한다면 등의 단어가 아니라 ‘머무르면’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이 머문다는 것은 땅에 뿌리를 내린 나무처럼 주님께 박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커다란 나무는 쉽게 뽑을 수가 없습니다. 땅속 깊이 뿌리가 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주님께 박혀 있는 상태가 ‘머무르는’ 상태입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유다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말하면서 아브라함과의 관계를 지나치게 자랑하고 있지만, 이 관계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음을 가르치면서 그 관계를 차례차례 벗겨 내십니다. 즉, 혈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행실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만이 참된 자유를 주시는 우리의 구원자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분께 믿음으로 머무는 사람은 볼 수 없는 것을 믿게 되어 진정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떤가요?
우리는 싫어하는 사람에게 상처주는 경향만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상처준 사람을 싫어하는 경향도 있다(데이비드 마이어스).



어느날 문득(정용철)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잘 한다고 하는데/ 그는 내가 잘 못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나는 겸손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나를 교만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나는 그를 믿고 있는데/ 그는 자기가 의심받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나는 떠나기 위해/ 일을 마무리하고 있는데/ 그는 더 머물기 위해/ 애쓴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나는 아직도 기다리고 있는데/ 그는 벌써 잊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나는 이것도 옳다고 생각하는데/ 그는 저것이 옳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내 이름과 그의 이름이 다르듯/ 내 하루가 그의 하루가 다르듯/ 서로의 생각이/ 다를 수도 있겠구나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 좋고 편안한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것을 틀렸다고 확신하는 순간, 상대방과의 관계는 어렵고 힘들게 될 뿐입니다.                   

나에게 인정받는 이의 말만이 나를 변화시킨다

-전삼용신부-


 성 프란치스코의 아버지는 큰 포목상을 경영해서 돈을 많이 번 부자였습니다. 그는 자기 아들이 자신의 사업을 훌륭하게 이어가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방탕하게 지내던 프란치스코의 삶은 허물어져 가는 다미아노 성당에서 하느님을 만나고는 완전히 변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서 일할 생각은 하지 않고 기도하고 주님의 뜻만을 찾았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집에 없을 때 집 안에 있던 옷감과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주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아씨시 주교에게 아들을 고발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요구합니다.

“이제 이놈은 나의 아들이 아니니 호적에서 이놈의 이름을 제거해 주시오!”

여러모로 둘의 관계를 화해시켜보려던 주교도 결국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이제 프란치스코는 피에트로 디 베르나르도네의 아들이 아닙니다.”


      그러자 프란치스코는 옷을 벗어 아버지에게 주며 “이것 받으세요. 앞으로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를 돌보아 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주교가 자신의 망토를 벗어 프란치스코에게 입혀주었습니다. 이때부터 프란치스코는 지상 아버지의 뜻에서 자유로워지고 하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살게 됩니다.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인간은 아버지의 욕망을 욕망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무엇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겠습니까? 바로 ‘죄’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라고 하십니다. 죄의 종살이를 하는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러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분의 가르침이 곧 진리이기에 그 가르침을 따르면 죄에서 해방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죄에서 해방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분의 말씀을 아무리 들어도 계속 죄를 짓습니다. 예수님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한다.”

아버지가 다르기 때문이란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이시기에 만약 하느님을 아버지라 여기지 않고 다른 무언가를 아버지라 여기면 그 말씀은 힘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친아버지의 말씀을 따르지, 모르는 아저씨의 말을 따르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유다인들은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라고 반박합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으니, 그들은 실제로 하느님을 아버지로 인정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참 아버지로 여기면서 그분의 말씀인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느 사형수가 죽기 전에 어머니를 꼭 한번 면회하게 해달라고 간청해서 면회를 시켜주었더니 창살 안에서 어머니를 가까이 오라고 해서는 코를 물어뜯더랍니다. 그 이유는 “왜 내가 어려서 남의 것을 훔쳐 오고 나쁜 짓을 할 때 못 하게 말리지 않아서 내가 오늘날 큰 죄를 범하고 사형을 당하게 했느냐”라는 것입니다.


      아이가 잘못 나갈 때는 부모가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이 일은 아이들이 부모를 부모로 인정할 때야만 가능합니다. 사춘기가 넘어가면 아이들은 부모를 온전히 인정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부모가 하는 말들은 아이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말은 말을 하는 사람을 인정할 때야만 그 사람 안에서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사춘기가 오기 이전에 꼭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참 아버지요, 성모 마리아를 참 어머니로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 방법은 그분들의 사랑을 깨닫게 함으로써 가능합니다. 사랑으로 믿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먼저 하느님을 아버지로 인정하게 되면 그분의 말씀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변화시켜 죄에서 해방시켜 줍니다. 부모에게도 효도하게 됩니다. 이것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방식입니다.


-조재형신부-


류시화의 글을 읽었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 하나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흉년이 들어 굶주린 과부와 딸이 있었습니다. 과부는 딸에게 하나 남은 보석 목걸이를 팔자고 했습니다. 딸은 목걸이를 가지고 보석상에게 갔습니다. 보석상은 목걸이를 보았습니다. 지금은 시세가 낮으니 집에 가지고 가라고 했습니다. 대신에 약간의 돈을 빌려 주었고, 시간이 되면 내일부터 나와서 일을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딸은 목걸이를 집으로 가져갔고, 보석상과 함께 일하게 되었습니다. 딸은 보석 감정에 재능이 있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유능한 보석 감정사가 되었습니다.

 

문득 어머니의 보석 목걸이가 생각났고, 집에 가서 보석을 감정했습니다. 딸은 놀랬습니다. 어머니의 목걸이는 도금이었고, 보석도 순도가 낮았습니다. 다음날 딸은 보석상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어머니의 목걸이가 도금인줄 알았습니까? 보석상은 이야기 했습니다. 알았습니다. 하지만 내가 사실을 이야기하면 당신은 내가 속이는 줄 알고, 다른 보석상을 찾아 다녔을 겁니다. 결국 실망하고, 집으로 돌아갔을 겁니다. 나는 사실을 말하기 보다는 당신에게 일자리를 주고 싶었답니다. 보석 목걸이가 없어도 능력이 있으면 굶주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석상의 이야기를 들은 딸은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렸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뜨겁게 타오르는 용광로에 들어갔지만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성서에는 이런 놀라운 표징이 있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넜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물위를 걸으셨습니다. 풍랑을 잠재우셨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걷게 하였습니다. 루르드의 샘물에 몸을 담그면 병이 나았습니다. 이런 표징은 분명 있었습니다. 이런 표징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불 항아리에 들어가도 좋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팡이로 홍해를 가를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물 위를 걷고, 풍랑을 잠재우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믿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서가 우리에게 전해주고 싶은 메시지는 물리법칙을 넘어서는 삶을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삶을 살라는 이야기입니다. 영적인 삶을 살라는 이야기입니다. 오리제네스는 성서해석의 3가지 차원을 이야기했습니다. 글자 그대로의 해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해석은 시대와 문화, 역사와 전통이 다른 곳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도덕적인 해석이 있습니다. 시대와 문화, 역사와 전통이 다를지라도 보편적인 공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공동선을 위한 삶으로 초대합니다. 영적인 해석이 있습니다. 보편적인 상식과 자연법칙을 넘어서는 해석입니다.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습니다. 부귀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아드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대인들은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말합니다. 오랜 시간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살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시간과 공간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살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사실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예수님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였습니다. 사실입니다. 사실이라는 관점에서는 인과관계의 그물을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소유라는 그물을 버리기 어렵습니다.

 

영화 판도라에서 주인공은 가족에게 가겠다고 말하였지만, 위험한 사고의 현장으로 돌아갔습니다. 누군가는 불을 꺼야 했습니다. 주인공은 불 속으로 들어갔고, 수많은 사람을 구하였습니다. 주인공은 불 속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가족과 살아남은 사람의 가슴 속에 살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혈연을 이야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공간을 이야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진리를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사실이 여러분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양승국신부-

 

아버지께서 정해주신 시간,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 순간, 골고타 언덕에서 예정된 끔찍한 순간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어느 순간,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끔찍이도 사랑하셨던 동족 유다인들에게 진리와 자유에 대한 말씀을 건네십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복음 8장 31~32절)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진리가 무엇인가 묵상해봅니다. 진리란 다름 아닌 예수님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겠지요.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곧 하느님이시라는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하나로서 그분으로부터 파견되신 분이라는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뵙는 것이 곧 하느님을 뵙는 것이라는 진리, 그분 안에 하느님에 계신다는 진리입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이라는 진리, 그분 손에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다는 진리, 그분은 모든 율법과 계명 전체를 수렴하고 완성하신다는 진리, 그분은 우리 인생의 최종 목표요,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는 이유라는 진리입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할수록 눈물겹고 감사한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어떤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한 하느님이시라는 진리, 나를 끔찍이도 사랑하시고 챙기신다는 진리, 내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위해 언제나 노심초사하신다는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윤곽이 잡히지 않는 멀고먼 당신이 아니라 내 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신다는 진리, 오늘도 내 바로 등 뒤에 서 계시면서 나를 바라보시고 나와 함께 움직이신다는 진리, 내가 고통과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항상 나를 떠받치고 계신다는 진리입니다.

 

 뒤돌아보니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로 믿고, 참으로 아까운 세월 허송세월했음을 아쉬워합니다.

 

 한때 재물이 최고요 진리라고 여겼습니다. 재물만이 우리를 끝도 없이 계속되는 가난과 고통과 벗어나게 해주는 진리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살아보니 정작 재물은 절대적 위치에 놓일 깜이 안되는 대상이더군요.

 

 그토록 오랜 세월 공들여 쌓아올린 천문학적인 재물들이 인간을 우리 인간을 영원히 살게 만들어주는 줄 알았었는데, 죽음 앞에, 하느님 앞에는 정말이지 하찮은 상대적인 대상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느님, 영원한 생명, 불멸, 영혼과도 같은 대상 앞에 재물이라는 가치는 너무나 부차적이면서도 상대적인 가치로 전락해버리고 말더군요. 결국 나중에는 재물이라는 것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있어 걸림돌이 되어 버리는 체험도 하게 되었습니다.

 

 한때 축척된 재능이나 학식, 그로 인해 차지하게 된 자리나 역할, 위치가 최고라 여겼습니나. 그런데 그런 것들을 열심히 쌓아 올라가던 어느 날, 우리가 원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 고스란히 남겨두고 내려서야 할 날이 순식간에 다가오더군요.

 

 그 모든 것이 별것 아니라는 것 깨달은 뒤에야 체득하게 된 진리 한 가지, 우리네 인생사 안에서 영원불변하는 건 없다는 것, 다 지나간다는 것, 다 지나가고 나면, 마침내 우리에게 남는 최종적인 대상은 사랑이신 주님 뿐이라는 진리입니다.


영혼이 자유롭게 되기를

-반영억신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아름다워지는 일입니다. 사랑하면 그를 닮게 되고 상대방의 모습으로 변하게 됩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면 사랑하는 이와 하나가 됩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사랑하는 이에게 맞춰주기 보다는 나에게 맞추려 하고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한다면 아직 깊은 사랑을 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주님의 삶의 모습에 이끌려 그분의 모습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야말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사실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얼마나 마음에 새기고 사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하였다고 하더라도 마음에 주님의 말씀을 새겨 두지 못하였고 실행하지 못한다면 그는 겉모양만 제자처럼 보일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한다(요한8,38).고 하셨습니다. 결국 주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참된 제자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나 깨나 당신을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을 생각하고, 당신의 삶으로 하여금 오직 그 말씀이 실현되게 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라고 하면 하루에 하느님의 말씀을 몇 번이나 기억하고 실행하고 있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제자는 한시도 스승의 가르침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말씀을 실천할 때이고 사랑할 때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할 때 우리는 세상의 흐름, 세속의 그늘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써 우리에게 죄악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말씀을 깊이 새겨 말씀 안에서, 말씀과 함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말로만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일상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언제나 실천을 요구 합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노예가 될 것을 원하지 않으시고 강요하지도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발적인 협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함으로써 우리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그리고 자유로운 사람은 하느님의 뜻인 진리를 따릅니다. 또한 진정한 자유는 나 자신 뿐만 아니라 이웃도 자유롭게 합니다.

그러니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사실 누가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그는 거울에 자기 모습을 비추어 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자신을 비추어 보고서 물러가면, 어떻게 생겼는지 곧 잊어버립니다(야고1,25). 자기 얼굴을 비추어 보고 무엇이 흉하게 묻었으면 지워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에 마음을 비추어 무엇이 잘못되었으면 고쳐야 합니다. 우리 영혼을 비추는 거울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그 말씀에 비추어 영혼이 자유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함으로써 주님과 하나가 되는 기쁨을 차지해야 하겠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이영근신부-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이는 이미 제자 된 이들에게 참으로 제자 되기를 초대하는 말씀입니다.

 자유로의 초대입니다. 그것은 단지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는 것을 넘어서, 나아가 그 말씀 안에 머무르는 것에로의 초대입니다.

그리고 말씀 안에 머무른다.’는 것은 <요한복음> 15장에서 말한 대로,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있듯이 말씀이신 그분께 붙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그분 영의 수액을 받아먹고 우리가 그분 안에,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시게 되는 상호내주(perichoresis)를 말해줍니다.

 이는 그저 상대 안에 머무르는 단순한 내주나 거주가 아니라, 역동적인 상호교환, 곧 서로 향하여 있음을 말합니다.

 서로 향하여 있어서 서로에게 건너가고 서로를 받아들이는 성령의 역동적인 활동(extasiskenosis)을 내포합니다. 같은 복음서 16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진리 안으로 이끌어주실 것이다.”(요한 16,13)


그렇습니다. 말씀과 우리가 이렇게 상호내주하면 진리를 깨달을 것입니다.

진리이신 말씀이 우리의 삶을 밝혀주실 것입니다.

곧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말씀이신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깨닫지 못한 이들을 지탄하여 말씀하십니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요한 8,37)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안에 당신 말씀이 있을 자리를 마련할 수 이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삶 안에 당신 말씀이 머무르는 보금자리를 마련해 드려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향하여 있으면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 머무르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이 머무르는 자리요, 궁전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신 말씀이 우리의 삶 안에서 지켜지고 실현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당신의 참된 제자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진리이신 주님만이 진정, 저희를 자유롭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의 노예이고(요한 8,34), 진리를 짓는 사람은 누구나 다 진리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 저희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요한 8,36).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요한 8,36)


주님!

제 안에, 당신 말씀이 있을 자리를 마련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말씀이 머무르는 보금자리가 되게 하소서!

당신 말씀이, 제 삶 안에서 지켜지고 실현되게 하소서!

당신은 진리이오니, 저를 자유롭게 하소서. 아멘.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송영진신부-


1) 죄를 짓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고,
그래서 ‘죄’는 하느님과 나의 관계를 차단하는 ‘벽’입니다.
그 ‘벽’의 이쪽은 하느님과 나의 관계가 차단되고 자유가 없는 감옥이고,
‘벽’의 저쪽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된 자유를 누리는 안식처입니다.
2) 죄를 짓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등지는 것이고,
그래서 ‘죄’는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킵니다(1요한 4,18).
그 두려움은 나에게서 영혼의 평화와 안식을 빼앗아 갑니다.
평화와 안식이 없다는 점에서 ‘죄’ 속에 있는 상태는 곧 감옥입니다.
3)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지은 다음에
하느님의 시선을 피하려고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창세 3,8).
그것은 죄를 지은 인간들의 ‘부끄러움’을 나타냅니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내리실 때
백성들은 하느님을 두려워하면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습니다(탈출 20,18).
그것은 죄 속에 있는 인간들은 감히 하느님 앞에 나서지 못한다는 것을
나타내는데, 하느님께서 인간들을 밀어내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 자신들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를 깨닫기 때문에 그렇게 됩니다.
그 경우의 두려움도 사실은 부끄러움입니다.
하느님 앞에 당당하게 나서지 못하게 만드는 그 부끄러움 때문에
‘죄’는 영혼의 감옥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 속에 있는(감옥에 갇혀 있는) 인간들을 구원하려고,
즉 인간들에게 참된 해방과 자유와 평화와 안식을 주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들을 감옥에서 억지로 끌어내시는 분이 아니라, 감옥 문을
열어 주시면서 인간들이 스스로 그 감옥에서 걸어 나가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감옥 문을 열어 주신 일은 ‘용서’이고,
내가 그 감옥 밖으로 걸어 나가는 일은 ‘회개’입니다.

< 양심이 완전히 마비되어 있는 사람은 죄를 지어도 죄의식이 없고,
그래서 심판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부끄러워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가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을 모르고,
누가 그것을 알려 주어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위선자들도 그런 사람들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위선자들을 아주 심하게 꾸짖으신 말씀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것은 위선자들을 회개시키는 것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위선자들 자신들이 고집을 부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 죄를 짓고 나서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회개와 구원을
포기해 버리는 사람도 있는데, 예수님도 그런 경우에는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배반자 유다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지옥을 향해서 자기 발로 걸어가는 사람에게 “그쪽으로 가면 안 된다.” 라고
타이를 수는 있지만, 강제로 붙잡아서 천국으로 끌고 갈 수는 없습니다.
회개하고 구원받는 일은 강제로 해서 될 일이 아니고, 각자 자신의 자유의지로,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스스로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요한 8,34-36).”

여기서 ‘진리’는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뜻’을 가리킵니다.
‘자유’는 구원과 생명을 뜻합니다.
그래서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사람들이 모두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알게 될 것이라는 뜻이고,
다시 이 말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깨달음’은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깨달음과 다릅니다.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인간 자신의 힘으로 수행과 수련을 해서 도달하는 어떤 높은 경지인데,
여기서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우리가 받고 있는 상태를 뜻하는 말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만이 사람들에게 참 자유를 준다는 뜻이고, 또 이 말씀은 사실상
“내가 너희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겠다.(내가 너희를 구원하겠다.)”는 선언입니다.

그 자유와 해방을 얻으려면(구원을 받으려면)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무르면서
‘참으로’ 예수님의 제자가(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무르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가르침들과 계명들을
‘마음을 다하여 온 삶으로’ 실천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렇게 실천하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신앙인이) 되고,
그런 사람만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자유와 해방을 얻어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신앙인들 가운데에는 예수님의 계명들을 실천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고
힘들어 하면서 그것을 멍에나 짐으로 여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몇몇 계명들은 실천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계명들을 멍에나 짐으로 여기는 것은,
마음이 온전히 예수님 쪽으로 향하지 않고
다른 마음을 품거나 한눈을 팔거나 딴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속된 욕심과 욕망을 제대로 버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의무가 아닙니다.
그리고 신앙인들이 신앙인이기 때문에 당연히 해야 하는 일들도
의무가 아니라 특권입니다.
(우리는 힘들어서 못하는 것과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라는 말씀은,
누구든지 죄를 지으면, 죄 때문에 하느님 앞에 떳떳하게 나서지 못하고,
영혼의 자유를 잃게 되기 때문에 ‘죄의 종’처럼 되고 만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누구나 겪게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죄를 지은 다음에만 자유를 잃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는 순간부터 자유를 잃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혹을 받거나 느끼는 첫 순간부터
그것을 물리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죄인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무르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요한 8,31-42: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 안에 머무르라고 우리를 초대하신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31) 우리가 그 말씀 안에 머무른다는 것은 진리와 자유에 대한 희망 때문이다. 우리가 신앙인이라는 것이 바로 믿음과 희망으로 사는 이들이며, 진리와 자유를 얻기 위해서 기다림과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32) 이 때에 우리는 진리 자체를 향해 가는 것이며 그 진리는 참된 자유를 주시는 분이시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하느님의 참된 자녀가 된다.

 

이 자유는 우리가 진리에 우리 자신이 온전히 따를 수 있을 때 얻을 수 있다. 이 진리는 우리를 죽음, 곧 죄의 노예상태에서 자유롭게 해주시는 하느님이시다. 우리가 평화 속에서 진리를 누리지 못하는 한 어떠한 자유도 누리지 못한다. 자유롭게 된다는 것은 죽음으로부터, 부패로부터, 변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는 의미이다. 진리는 그 자체가 죽지 않고 썩지 않고 변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죽지 않고 썩지 않으며 변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이시다.

 

이 말씀에 유대인들은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적이 없습니다.”(33) 라고 한다. 이 말이 이미 진실이 아니다. 요셉이 팔려갔고(창세 37,28 참조), 예언자들이 포로로 끌려가지 않았는가?(2열왕 24 참조) 또한 400여 년 동안 이집트에서 진흙을 이겨 벽돌을 만들며 이집트인들을 섬기지 않았는가?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종살이하던 집에서 구해내시지 않았는가?(참조: 탈출 13,3; 신명 5,6) 그리고 지금도 유대인들은 로마에 세금을 내면서 살고 있지 않은가?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34) 어떤 문제 어떤 상황에서든 악에 의지할 경우 그는 죄의 종이 되는 것이며, 죄로 인해 생긴 상처와 낙인은 그 도망친 종이라는 드러내 준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들과 딸의 참된 자유를 주신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머무른다.”(35) 죄의 종은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영원한 벌을 받지만, 자유를 얻을 자격을 받은 아들딸은 언제나 하느님의 호의를 받고 결코 그것을 빼앗기지 않는다. 아들을 통하여 자유롭게 되고 아들의 자격을 얻으면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37)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자랑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도 게으름으로 소홀한 실천으로 그의 자손이라는 지위를 잃어버릴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을 알려주신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즉 그들의 마음이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말씀이 그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시면서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따라 해야 할 것이다.”(39) 이 말씀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말하고 있다. 전 생애를 통하여 하느님과 아브라함이 가졌던 관계를 말한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그러한 신앙으로 살아가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지금,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이야기해 준 사람인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40)고 하셨다. “그러니 너희는 너희 아비가 한 일을 따라 하는 것이다.”(41) 하시니까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41)라고 한다.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42) 하느님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이들의 아버지가 아니시다. 예수님께서 사랑받으셔야 하는 이유는 당신이 하느님에게서 나셨고, 그 하느님을 자기들의 아버지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아들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또한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이 순간 이후 진정 우리는 하느님 앞에 그리고 다른 사람 앞에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아가도록 노력하면서, 이 사순절을 통하여 나 자신이 하느님과 이웃 앞에 새로이 태어나는 기회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요한 8, 36)

-한상우신부-

사람과 생명
사랑과 자유는
따로떼어
설명될 수 없습니다.

하나의 자유가
또 하나의 자유로
우리를 생명으로
이끌고 갑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자유를
우리에게 기꺼이
내어주십니다.

내어주는 자유가
우리를 괴롭히는
죄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예수님 없는
자유는
오래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자유가
참된 자유입니다.

자유가 우리를
생명의 기쁨을
맛보게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식은 언제나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참된 자유입니다.

우리 삶으로
내려오시어
가장 좋은 사랑을
내어주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향해
나가는 사랑의
사순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우리는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이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을 만납니다. 그 선물은 다름이 아니라 "자유"입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말씀, 머무름, 제자, 진리, 자유!
이 문장 안에는 축약하거나 뭉뚱그릴 수 없을만치 소중한 단어들로 가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에 머무르면 제자가 되어 진리를 깨닫고 자유를 누리리라고 선언하십니다.

"우리는 ...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적이 없습니다"(요한 8,37).

진리가 자유롭게 한다는 말에 유다인들이 발끈합니다. 자유로이 하느님의 뜻을 찾아 숙고하고 적용하는 대신, 이미 정답으로 주어진 율법에 맹목적으로 매여 살다 보니 자유와 부자유의 차이조차 망각한 듯합니다.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종은 단순히 신분적으로 예속된 상태만을 가리키지 않지요. 아버지께서 보내신 성자를 믿지 않고 배척하는 이는 율법과 관습의 종입니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요한 8,37)

예수님은 종과 아들, 노예와 자유인의 차이가 존재의 내면에 말씀을 품을 자리가 있느냐 없느냐에 달렸다고 과감히 말씀하십니다. 자기 안에 말씀을 간직한 이는 말씀이신 분을 알아볼 뿐만 아니라 그 말씀과 하나 되어 무엇이든 말씀께서 기뻐하실 일을 합니다. 의무나 책무로 움직이지 않고 사랑하기에 자유로이 나아갑니다.

제1독서는 바빌론으로 유배갔다가 왕궁에 발탁된 세 청년이 우상숭배를 거부하자 불가마에 던져지는 무시무시한 대목입니다.

"다친 곳 하나 없이 불 속을 거닐고 있다. 그리고 넷째 사람의 모습은 신의 아들 같구나"(다니 3,92).

이 말은 해설자나 일반 목격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이 흉포한 일을 지시한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기에 더욱 힘이 있습니다.

세 청년은 생사고락을 비롯해 온 존재를 하느님께 의탁하였기에 진정 자유롭습니다. 고수하고 움켜쥐어야 할 자기 것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자유로울 수 없지요. 그리고 자유로운 이는 설령 불가마 같은 시련과 고통의 도가니에 던져진다 해도 상처를 입지 않으리라는 의미입니다.

"그분께서는 ... 저희를 구해 내실 것입니다 ...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다니 3,18)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그들의 자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구해 주시리라는 것을 의심의 여지없이 굳게 믿지만, 설령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괜찮습니다. 모든 일과 사건이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영광을 향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바라는 대로 되지 않으면 하느님을 마치 빚쟁이 다루듯 다그치고 토라지고 실망하는 얕은 속으로는 감히 이해하기조차도 버거운 믿음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요한 8,42).

누가 아들인지 종인지, 자유인인지 노예인지가 판가름 되는 기준은 사랑입니다. 세상 구원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바치러 오신 아드님을 믿고 감사하고 사랑하는 이는 인종, 신분, 국적, 빈부, 직업에 관계 없이 하느님의 자녀이고 자유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부활의 여명을 고대하며 더 짙은 어두움에 잠긴 이때, 말씀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실 자리를 마련하고 실제로 그분을 모셔들입시다. 하루종일 다가오신 말씀을 되씹고 곱씹으며 머무르는 사이 우리는 그분을 더 믿고 더 사랑하게 됩니다. 믿음과 사랑이 견고히 성장한 이들은 삶의 필요와 요구, 바람 앞에서 설령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에 흔들림이 없습니다. 다친 곳 없이 불 속을 거닐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 안에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사랑으로 충만하실 벗님을 축복합니다.

자유로운 영혼이 되고자 한다면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32447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3월 21일 사순 제5주간 수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이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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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무엇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겠습니까? 바로 ‘죄’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라고 하십니다. 죄의 종살이를 하는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러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분의 가르침이 곧 진리이기에 그 가르침을 따르면 죄에서 해방됩니다.

사춘기가 오기 이전에 꼭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참 아버지요, 성모 마리아를 참 어머니로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 방법은 그분들의 사랑을 깨닫게 함으로써 가능합니다. 사랑으로 믿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먼저 하느님을 아버지로 인정하게 되면 그분의 말씀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변화시켜 죄에서 해방시켜 줍니다. 부모에게도 효도하게 됩니다. 이것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방식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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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뜨겁게 타오르는 용광로에 들어갔지만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성서에는 이런 놀라운 표징이 있습니다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넜습니다예수님께서는 물위를 걸으셨습니다풍랑을 잠재우셨습니다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걷게 하였습니다루르드의 샘물에 몸을 담그면 병이 나았습니다이런 표징은 분명 있었습니다이런 표징의 의미는 무엇입니까불 항아리에 들어가도 좋다는 것이 아닙니다지팡이로 홍해를 가를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물 위를 걷고풍랑을 잠재우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믿으면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서가 우리에게 전해주고 싶은 메시지는 물리법칙을 넘어서는 삶을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믿음의 삶을 살라는 이야기입니다영적인 삶을 살라는 이야기입니다오리제네스는 성서해석의 3가지 차원을 이야기했습니다글자 그대로의 해석이 있습니다그러나 그런 해석은 시대와 문화역사와 전통이 다른 곳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도덕적인 해석이 있습니다시대와 문화역사와 전통이 다를지라도 보편적인 공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공동선을 위한 삶으로 초대합니다. 영적인 해석이 있습니다보편적인 상식과 자연법칙을 넘어서는 해석입니다벗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습니다부귀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그래야 하느님의 아드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으셨습니다혈연을 이야기하지 않으셨습니다공간을 이야기하지 않으셨습니다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진리를 이야기하셨습니다그리고 말씀하십니다사실이 여러분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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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앞에 당당하게 나서지 못하게 만드는 그 부끄러움 때문에
‘죄’는 영혼의 감옥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감옥 문을 열어 주신 일은 ‘용서’이고,
내가 그 감옥 밖으로 걸어 나가는 일은 ‘회개’입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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