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29일 사순 제5주일
2020년 3월 29일 사순 제5주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요한 11,1-45)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whoever believes in me,
even if he dies, will live,
and everyone who lives
and believes in me will never die.
Do you believe thi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라자로와 마리아와 마르타. 예수님과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던 이들입니다. 라자로가 병으로 고생할 때에 그 소식을 예수님께 알립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와 더불어 라자로 남매는 특별한 인물로 표현됩니다. 오늘 복음은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예수님을 보여 줍니다. 이는 요한 복음의 일곱 번째이자 마지막 표징으로, 예수님의 말씀은 부활의 의미를 미리 알려 주는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라자로의 무덤을 찾으셨을 때, 마르타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라자로의 죽음을 확증하여 그가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라자로를 다시 살리십니다. 복음은 이 표징을 통하여 많은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이 표징은 종교 지도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마음먹는 계기도 됩니다.
오늘 복음은 부활을 생각하게 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나타내는 예수님의 말씀은 모든 신앙인에게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을 주는 것이며 우리에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암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분으로 생명 그 자체이신 분이십니다. 그것을 보여 주는 사건이 라자로의 소생입니다. 그리고 다시 우리를 향하여 질문을 던집니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이처럼 요한 복음은 우리에게 믿음을 가지도록 요청하면서 질문에 답하도록 초대합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라자로야, 나오너라
-임상만신부-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과 아주 가까운 사이인 라자로, 마르타 그리고 마리아의 3남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그 자매로부터 라자로가 병이 들어 위급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셨다. 평소 같으면 당장 달려가 고쳐주셨을 예수님께서 왠지 그곳에 이틀이나 더 머무르시는 바람에 결국 라자로는 죽었다. 그리고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 나흘이나 지나자 비로소 베타니아에 있는 그들의 집을 찾아가셨다.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나가서 예수님을 만나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주님께서 구하시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하느님께서 다 이루어주실 줄 압니다”(요한 11,21-22)라고 했다.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아 라자로가 죽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마르타는 “지금이라도…”라는 말로 곁에 계신 예수님께서 무엇인가 해주시리라는 희망을 두고 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이 끝난 상황이지만 원하시면 지금이라도 당신의 일을 이루실 수 있고, 모든 상황을 역전시켜 주실 수 있는 분이심을 온전히 담고 있는 믿음이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의 고백을 들으시고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요한 11,23)고 말씀하시니 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요한 11,24)하였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만난 방금 전에 “지금이라도”라고 말했는데, 예수님께서 라자로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하시니 ‘지금, 여기서’라는 의미의 신앙 고백은 사라지고 “마지막 날 부활 때에”라는 말로 ‘다시 살 것’에 대한 현실적인 의구심을 드러내고 있다.
마르타는 정녕 부활을 믿으면서도 그 부활의 믿음이 지금 이 순간 현실화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은 별로 없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에 무덤을 찾아간 막달라 마리아도 다르지 않았다. 누구보다 주님을 사랑했고 부활하실 것을 믿었음에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단지 동산 지기인 줄 알았다. 그녀도 부활의 믿음은 충만했지만, 현재 ‘지금, 여기서’ 그 부활을 볼 것이라는 확신은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앞으로 일어날’ 신앙이 아닌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신앙을 갖도록 요구하신다. ‘먼 훗날 그렇게 해주시겠지!’라는 믿음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하느님의 일과 영광이 드러나고 있음을 받아들이는 믿음을 원하시는 것이다.
자매를 데리고 무덤에 이르신 예수님께서 “돌을 치워라” 하시며 다시 한 번 그들의 믿음을 요구하신다. 그러나 마르타가 예수님의 심정도 모른 채 “주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요한 11,39)라고 말하며 현재의 절망적인 상황만 바라보는 나약한 믿음을 또다시 보이고 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요한 11,40)고 질책하시며, 현재 상황만을 보면 절망적일 수밖에 없지만, 하느님을 보면 어떠한 기적도 이루어 낼 수 있음을 깨닫게 해주신다.
그 믿음이 무엇인가? 그것은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고 무덤을 향해 힘 있게 외치는 믿음이다. 앞으로 부활이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일어나고 있음을 고백하는 믿음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어진 상황에 적응하기보다는, 상황을 극복하는 살아있는 믿음으로 부활 신앙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하겠다.
“우리는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1코린 15,43)
무덤은 폐쇄된 암흑이며 때로는 증오와 원한을 의미하며 생명과 함께 희망과 믿음까지도 묻어버리는 곳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죽은 라자로의 무덤을 열어 주심으로서 인간에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열린 무덤의 문은 생명의 문이 열렸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희망과 함께 갇혀버린 라자로가 생명의 길로 나올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꽉 막았던 죽음의 무덤을 무너뜨리고 생명의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라자로의 몸을 묶고 있던 죽음의 천과 수건을 풀어주시어 죽음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열린 무덤의 문을 통해 믿음의 문이 열렸습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믿음에 대한 신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르타는 라자로가 새 생명을 얻는 것을 목격한 후 확실하고 구체적인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유다인들 또한 라자로가 죽음의 세계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본 후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라자로의 무덤을 꼭 막고 있던 돌들이 부숴지면서 그들의 믿음을 가로막고 있던 불신의 무덤도 같이 부숴졌기에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열린 무덤의 문을 통해 기쁨의 문이 열렸습니다.
죽음은 슬픔의 씨앗입니다. 무덤은 헤어짐과 상실, 고통, 슬픔으로 가득한 곳입니다. 슬픔은 사랑하는 사람을 아프게 하고 눈물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과 몸에 깊은 상처를 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슬픔과 눈물을 멈춰 주셨습니다.
라자로가 무덤에서 나오는 순간 사람들은 놀람과 환희로 슬픔과 절망의 장례식이 즐거운 연회가 되었습니다. 슬픔을 나누었던 말들은 기쁨을 주고받는 말로 바뀌었습니다. 새 생명의 기쁨은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완벽한 기쁨입니다.
희망의 문이 열렸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운명을 바꿔 주셨습니다. 이제 더 이상 육체의 죽음에 얽매이지 않고 새 생명의 세계에서 자유로운 영혼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죽기 위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살기 위해 태어납니다. 주님은 “생명”이시고 “이것을 믿는 이는 영원히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마르고 시들어 죽기 위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꽃을 피기 위해 태어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불안과 두려움, 단절의 무덤에 갇히고 있습니다. 매일 매일 각 나라는 보이지 않는 높고 단단한 벽을 세우고 있습니다. 그 보이지 않는 벽을 보며 불안과 두려움은 커져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불안과 두려움의 무덤에서 우리 스스로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되는 마음으로 주님께 의탁하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우리를 억압하고 짓누르는 무거운 무덤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나와 이웃을 보살펴 주시고 영혼의 안정으로 인도하여 주실 것을 기도하십시오.
모든 사람이 믿음을 통해 주님의 사랑 안에서 평안한 영혼을 누릴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이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말씀,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멘.

1. 나와 타인을 구분하기 위해 쌓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2. 나와 다른 그들을 가로 막는 담을 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3. 나와 가족, 이웃을 위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라자로는 저와 당신의 이름입니다.
-장재봉신부-
온갖 만물이 생명의 힘으로 약동하는 봄, 교회는 죽음을 선포합니다.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니며 새 생명을 향한 희망의 관문임을 선포합니다. 오늘도 살아있다고 하나 사실은 죽어있는 세상을 살리려는 주님의 외침입니다. 우리를 묶고 있는 세상의 강한 사슬을 풀어주려는 구세주 예수님의 외침입니다.
그날 죽은 지 사흘이나 지난 라자로를 살리신 주님의 능력은 사랑입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진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와 함께 영원히 살고 싶으신 하느님의 마음이 예수님의 외침으로 온 세상을 적셨던 그날처럼 주님께서는 오늘, 죽은 지 사흘이나 지나서 냄새가 나는 우리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바로 나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어 주시려 목청을 다해 외치고 계십니다.
죄 때문에 죽어가는 우리 모두가 라자로입니다. 생명이 아닌 것으로 치장하느라 지친 내 이름이 바로 라자로입니다. 이제 그분의 음성에 귀 기울입시다. 그분의 음성에 응답해 드립시다. 서둘러 그분의 음성을 쫓아 당신의 말씀대로 행동해 봅시다.
주님께서는 분노하고 질투하고 의심하며 미워하는 얼굴의 수건을 벗기시고 진리와 생명의 눈을 뜨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짓누르는 두려움과 자책과 열등감과 무기력의 천을 말끔히 치워주실 것입니다.
삶이 죄 때문에 썩어 문드러졌다 해도 괜찮습니다. 삶에 갖은 악취가 진동을 한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악에게 손발이 묶여 꼼짝할 수 없는 처지여도 무관합니다. 그분의 음성에 깨어나면 그만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만 해드리면 ‘얘기 끝’입니다. 그분의 치유를 믿고 ‘이 모습 이대로 나아가는 결단’만 있으면 됩니다.
세상에서 죽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죽기 위해서 오신 유일한 인간입니다.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작정하고 세상에 왔던 유일한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때문에 주님께서는 과거에 연연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을 배신하고 외면한 것들에 마음 쓰지 않으십니다.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마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이사 43,18)라는 말씀은 오늘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약속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당신의 부르심에 응답해드릴 수 있습니다. 건강하고 튼튼한 주님 사랑을 믿고 투신할 수 있습니다.
인류역사 안에서 인간의 악랄한 본능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건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일일 것입니다. 세상 끝 날까지 지울 수 없는 인간의 허물일 터입니다. 그런데 그 극심한 악이 저질러진 배경을 살피면 어이가 없습니다. 다만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죄 없는 예수님을 성난 군중에게 내어주었던 그 무섭고 끔찍한 인간의 책략에 할 말을 잃게 되는 겁니다. 달랑 손 한번 씻으며 책임을 벗으려던 빌라도의 가벼움에 분노가 솟구치고 예수님의 고통에서 볼거리를 원했던 헤로데의 음흉함에 소름이 돋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모욕했던 병사들의 무지도, 골고타로 향하는 주님께 가혹한 채찍을 휘둘렀던 군인들의 잔인함도, 덩달아 고함을 질러대며 합류했던 군중이 모두, 그날 그 순간에 예수님의 고통을 즐기고 있었다는 사실에 아연실색하게 됩니다.
아, 스승님의 고통을 외면한 채 도망가기에 급급했던 제자들의 모습도 빼놓을 수 없는 인간의 한계일 테지요. 그런데 솔직히 따져보면 이런 일들은 지금 우리에게도 흔한 일입니다. 고작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려고 전전긍긍하는 모습도 홀로 정의를 살아내는 양 이웃을 판단하는 모양새도 너무 익숙한 우리의 일상이니까요. 세상의 고통이 나와 무관하다는 것에 안위하며 힘없는 이웃을 외면한 채 몸을 사리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니까요.
이리도 모자라고 덜 된 우리이기에 사순의 은혜가 절실합니다. 이 허다한 죄는 오직 값없이 주시는 십자가의 피로만 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세상은 주님의 은혜가 너무나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이라 믿지 못합니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방법이 너무 쉽고 간단해서 의아해하고 의심합니다. 그 마음, 충분히 이해됩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통 큰 하느님 사랑을 선뜻 받아들여 믿지 않는 것이 곧 ‘죄’라는 진리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의 선물은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 주어진다는 특약이 있고 선물로 주신 십자가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단서가 붙었다는 사실을 알리지 못한 우리 탓인 것입니다.
때문에 사순절 묵상의 핵심은 사랑의 하느님을 온 세상에 전하는 것에 있습니다. 주님처럼 딱하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있습니다.
사순, 죄와 맞서는 능력을 얻는 복된 시기입니다. 그러기에 사순 시기에는 신앙의 큰 기쁨과 벅찬 감격이 따릅니다. 이제 믿는 척 꾸미고 사랑하는 척 겉모양에 취했던 거짓 믿음을 잘라냅시다, 오늘, 지금, 이 순간, 애타게 내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께 큰 음성으로 응답해드립시다.
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스스로의 삶을 변화시키고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기쁘게 순명하는 믿음인으로 도약합시다.
십자가를 사랑하고 끌어안는 건강한 믿음으로 주님께 힘이 되어 드리는 튼튼한 우리의 삶이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부활이요 생명
손경락신부-
요한 복음의 예수님은 여러 차례에 걸쳐 당신 자신이 누 구신지를 알려주십니다. 이제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을 겪 기 위해 예루살렘에 가시기 직전, 예루살렘 인근 베타니아 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하고 사람들에게 알려주십 니다. 오늘 복음의 많은 등장인물들은 죽음과 관련되어 각각 다른 질문들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지만 죽음을 겪은 라자로, 죽음을 각오하고 예수님을 따라 유다 지역에 들어온 제자들, 예수님이 계셨더라면 오빠의 죽음 을 막으셨을 것이라 믿는 마르타와 마리아, 치유는 가능하 면서 죽음을 막을 수는 없었느냐는 주변 사람들까지. 그들 의 질문에 논리적인 정답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예수님은 이 죽음의 문제를 두고 나름의 답을 주십니다. “내가 부활 이고 생명이다.” 죽음을 다시없는 인간의 한계로 여기면서 ‘죽음 앞에서는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나를 답으로 삼아라” 하고 말하십니다.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죽음이 없음’이 아니라, ‘부활’이 요 ‘생명’이라 말하신 것은 놀랍게 느껴집니다. 이는 예수 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구원이, 죽음의 차원을 넘어서 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실제 부활하심으 로 이것이 가능함을 보이십니다. 결국, 마지막 원수인 죽음 은 정하신 때에 극복되겠지만, 부활의 신앙을 갖게 된 그리 스도인은 죽음을 넘어 하느님의 생명에로 마음을 정향하고
관심을 쏟게 됩니다. 부활의 희망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다르게 이해하게 만듭니다. 부활의 희망은 그 희망을 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게 하며, 죽음을 지나쳐 원한 행복에로 나아가게 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곧잘 고통과 죽음에 압도되어 그것들이 나타나면 도저히 거기서 눈을 뗄 수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삶은 설명되지 않는 고통으로 점철된 것 같고, 하느님은 가 끔씩은 도와주셔도 정작 필요할 때는 나타나지 않으시는 듯합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강조점은 보통 십자가의 고통 에 귀착됩니다. 하느님은 그저 십자가를 지도록 요구하시 는 분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그 너머에 있는 부활과 생명을 건너다 보게 해 주는 도구입니다. 십자가를 겪는 이유는 그것이 주 어진 십자가라서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를 부활과 생명으 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를 진다는 말 은, 이해할 수 없으니 악으로 깡으로 버텨보겠다는 절망스 러운 상황의 표현이 아니라, 십자가가 가리키는 부활과 생 명에로 내 마음을 붙들어 매겠다는 희망스러운 결단의 표 명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다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믿음 안 에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부활과 생명에 대한 희망 가운데 그 부활이요 생명이신 분 자체를 사랑하며 그분을 향해 나 아가도록 우리 모두가 초대받았습니다. 그 초대에 우리의 초점을 맞추도록 주어진 선물의 시간이 이 사순절입니다.

향기 없는 꽃과 같은 삶
-이태혁신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불안에 떨며 온갖 갈등과 불신과 이기심을 불러 일으키고 마는 모습을 보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미약하고 초라한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 다. 코로나바이러스가 두려운 것은 그것이 일으키는 폐렴이라는 병 때문이다. 하지만 병에 걸려 시름 시름 앓는 것도 두려운 일이지만 그보다 더 두려운 일은 나이 먹어서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 는 것이라고 한다. 사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오늘 복음에서 들었듯이 죽어서 냄새나는 라자로의 모습과 별로 다를 바 없다. 수의를 두른 그의 모습은 생명의 필연적인 조건이다. 우리의 삶은 그것이 아무리 화려하고 성 공한 것이라 해도 향기 없는 꽃에 지나지 않는다. 작은 바이러스 때문에도 공포를 느끼고 자기 자신 의 궁극적인 갈망을 채워주지 못하는 이 세상에서의 삶은 있는 듯하면서도 없고 순간에 사라지고 마 는 아지랑이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예수님께서 그런 하찮은 삶을 마감한 라자로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시고 그를 다시 이승의 삶으로 불러내셨다는 것이다. 그냥 두었더라면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 짖음도 괴로움도 없을(묵시 21,4)”영원한 생명을 살았을 라자로를 무엇 때문에 불러내신 것일까? 그 런데 더욱 이상한 일은 그렇게 라자로를 다시 살려주신 분이 정작 자기 자신을 십자가상의 죽음에 부 치셨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오늘 복음 말씀은 죽음과 같은 절망 한가운데 있는 인간에게 친구처럼 다가와 붙들어 주시는 하느 님의 모습을 보여준다. 죽음이라는 필연적인 조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공포에 떨고 좌절하고 고통받 아야 하는 인간을 감싸주시는 하느님, 더 나아가 부활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새 희망으로 제시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을 무덤과 같은 노예살이에서 해방하시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해주시는 하느님에 대한 희망의 말씀을 전한다. 바로 그 하느님의 모습을 예수님은 라자로의 소생을 통해 몸소 보여주신 것이다. 영원이라는 보증이 없는 이 세상에서, 살고 죽고 얻고 잃는 것은 하찮은 뜬구름 같은 것이다. 그래 서 시인 괴테도 이렇게 말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그 행복을 나는 아무에게도 절대로 양보하 지 않을 것이다. 미래의 생명에 희망을 두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지금 살고 있다 하더라도 모두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예수님을 잃는 것은 절대적인 고통 속에서 유일하게 함께 있어 줄 수 있는 친구를 잃는 것과 같다. 예수님으로부터 떠나는 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기 자신의 궁극적인 희망을 잃는 것과 같 다. 봄이 와서 모든 것이 소생하고 주님 부활을 얼마 남겨 두지 않은 때에 자신의 진정한 삶과 죽음 의 문제를 곰곰이 반성해 보자!

자연속의 인간! '너는 무엇을 믿느냐?"
-곽재진신부-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들처럼 우상을 따르다가 바빌론 유배를 당합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런 유배 상 황을 무덤에 비유합니다. 그런데 당신 말씀에 충실하시고 당신 구원 경륜을 주도적으로 완성하시는 하느님 께서는 이스라엘을 무덤에서 꺼내어 되살리고자 하십니다. “내 영을 넣어 너희를 살린 다음 내가 주님임을 알게 할 것이다.”(에제 37,14 참조)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분”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을 당신의 의로움으로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로마 8,11 참조)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영을 통하여 죽은 나자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새로운 삶을 열어 주심으로써 주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지난 1월 늦겨울부터 우리는 불안과 두려움, 죽음이라는 무덤가에 있는 듯 살고 있습니다. 이 위기를 통 하여 다시 깨달아야 하고 배워야 합니다. 이제 우리의 관심사는 경제, 정치의 문제보다 공중보건과 공동선 을 우선으로 하는 삶의 방식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아니, 인간 중심도 아니고, 하느님과 인간만의 관계도 아니고, 하느님과 우리 그리고 생태계가 함께 살 수 있는 삶의 방식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죽고 난 뒤 부활 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부터 생태적 회개의 부르심을 듣고, 돌을 치우고 냄새나는 무덤으로부터 걸어 나 와야 합니다. 생태적 회개의 삶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새로운 삶의 방식이 필요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하느님께서 참으로 생태계의 창조주요, 생태계의 구세주요, 완성자이심을 세상이 올바로 믿지 않겠습니까?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요한 11,4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 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5-26)
“주님, 깊은 곳에서 당신께 부르짖습니다. … 나 주님께 바라네. 내 영혼이 주님께 바라며 그분 말씀에 희 망을 두네.”(시편 130)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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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구두 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일찍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학교도 제대로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외모 콤플렉스가 심해서 늘 외톨이였지요. 이런 그가 어느 날 배우가 되겠다고 코펜하겐으로 상경했지만, 어디에서도 그를 배우로 뽑아주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작가가 되겠다고 글을 씁니다. 하지만 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않은 그였기에 문장 실력이 형편없었고 맞춤법도 엉망이었습니다. 따라서 어느 출판사에서도 그의 글을 출판해주지 않았습니다.
단 한 번의 성공도 없었고, 그래서 충분히 포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살려서 동화를 씁니다. 실연의 아픔을 기억하며 ‘인어공주’를, 어렸을 때 가난했고 학대받은 기억을 살려 ‘성냥팔이 소녀’를, 친구 없이 혼자 지내던 기억으로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친구로부터 못생겼다는 놀림을 떠올리며 ‘미운 오리 새끼’를 지었습니다.
그가 지은 동화는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그의 명성도 올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그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겪은 역경의 시간은 오히려 축복이었다.”
사실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고 난 뒤에야 그 모든 것이 축복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라자로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러나 바로 찾아가지 않고 무덤에 묻힌 지 나흘이나 지나서 가십니다. 마르타, 마리아 자매는 주님께서 계셨다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을 알고 있었기에 원망의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르타는 이렇게 고백하지요.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원망스럽지만 하느님의 선택을 믿는다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결정적인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오빠가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이 체험 후에 그들은 어떠한 마음을 가졌을까요? 오빠의 다시 살아남으로 인해 다른 곳에서는 절대로 얻을 수 없는 큰 기쁨을 갖게 되었을 것이고, 하느님의 영광이 자기들 앞에 펼쳐짐에 크게 감사했을 것입니다.
역경의 시간이 오히려 축복을 얻을 수 있는 순간임을 잊지 마십시오.


예전에 가짜 휘발유 문제가 크게 드러났던 적이 있습니다. 기름값 인상으로 인해 큰 이익을 얻기 위해 사기 행각을 벌인 일당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가짜 휘발유에 가장 많이 들어간 주성분은 무엇일까요? 답은 진짜 휘발유입니다. 100% 가짜 성분으로 진짜 휘발유인 양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거짓말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거짓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어떨까요? 100% 거짓말을 할까요? 아닙니다. 90%의 진실에 10%의 거짓말먼 섞여도 큰 거짓말이 된다고 합니다. 90%의 진실을 말한다고 해서 진실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 안에 악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이 악은 100%의 악으로 사람에게 다가올까요? 아닙니다. 10%의 악과 90%의 선을 가지고 다가옵니다. 따라서 조금의 악도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다’라면서 많은 선을 위해서라고 말한다면, 더욱더 악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게 될 것입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는 것은 많은 선을 위해 약간의 악을 행해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악은 100% 피할 수 있어야 주님을 온전히 따를 수 있습니다.

밀떡과 포도주의 삶이 표징의 재료가 되는 삶이다.
-전삼용신부-
요한복음은 ‘표징의 책’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표징은 믿음을 가져다주는 어떠한 사건을 말합니다. 믿음으로 하느님 자녀가 되는 창조가 이루어짐으로 7일 동안의 창조를 생각하여 요한은 아마도 7개의 표징으로 맞추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카나에서 성모 마리아의 믿음으로 제자들이 믿게 되는 첫 번째 표징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카파르나움에서 왕의 신하가 끝까지 청함으로써 두 번째 표징이 되었습니다. 그다음은 벳자타에서 38년 동안 죄에서 벗어나기를 바랐던 사람이 세 번째 표징이 되었습니다. 5천 명을 먹이신 것도 표징입니다. 한 아이의 작은 봉헌이 수많은 사람을 배부르게 먹이는 표징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려는 사람을 통해 표징이 완성됩니다. 다섯 번째 표징은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오신 사건입니다. 그리스도를 맞아들임으로써 두려움이 사라지고 마음에 평화가 깃드는 것을 보는 것도 하나의 표징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의 라자로를 살리시는 것이 마지막 표징입니다.
많은 유다인들은 그 많은 표징을 주셨음에도 믿지 않고 죽어서 이미 몸이 부패한 사람을 살리는 정도의 강력한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들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죽어서 몸이 썩어가는 것까지 받아들일 제물이 필요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일부러 그렇게까지 사랑하는 사람을 내버려 두시는 것을 받아들이고 끝까지 희망할 수 있는 사람들도 필요로 하셨습니다. 어떠한 표징도 믿음의 중개가 없이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신 것은 표징을 주시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까지 대해야만 하시는 것이 가슴 아팠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에 자신을 십자가에 봉헌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큰 표징의 재료가 되고, 천국에서는 하느님의 가장 큰 사랑을 받게 됩니다.
이탈리아 한 의사가 미국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가장 어두운 악몽 속에서 나는 이탈리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지난 3주간 우리 병원에서 보고 경험하게 되리라고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악몽은 강처럼 계속 흐르고 있고, 그 강물은 점점 더 커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몇 명의 환자가 왔고, 다음에는 수십 명이, 다음에는 수백 명이 왔습니다. 지금, 우리는 더는 의사가 아니라, 누구는 살고 누구는 집으로 보내져 죽어야 할지를 결정하는 분류자에 불과합니다. 이 모든 환자가 평생을 이탈리아 건강 보험료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2주 전까지만 해도 나와 나의 동료들은 무신론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의사이기 때문에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과학이 하느님의 존재를 배제한다고 배웠습니다. 나는 나의 부모님들이 교회에 가는 것을 비웃었습니다.
9일 전에, 75세 된 한 사제가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그는 친절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호흡하는 데 심각한 어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성경을 가지고 있었고, 죽어가는 환자들의 손을 붙잡고 그 성경을 그들에게 읽어주었습니다. 그 모습은 우리에게 감명을 주었습니다. 우리 의사들은 모두 지쳤고, 낙심했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끝장이 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시간이 있을 때, 우리는 그 사제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우리는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매일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진맥진했습니다. 우리 동료 중 두 명이 죽었고, 다른 동료들은 감염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쉬는 시간 몇 분이 생길 때 기도합니다. 나와 동료들이 서로 얘기할 때, 우리는 이 사실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비록 격렬한 불신자들이었지만, 우리는 이제 매일 평안을 구하고 있으며, 주님께 우리가 병자들을 돕는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합니다.
어제, 그 75세 된 사제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3주 동안 여기에서 120명 이상의 사망을 봐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 사제가 자신의 상태와 우리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평안을 가져다주었었습니다. 그 평안은 우리가 이제는 더 찾을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던 평안이었습니다. 그 사제는 주님께로 갔습니다. 그리고 만일 상황이 지금처럼 계속된다면, 곧 우리도 그분을 따라갈 것입니다.
나는 6일 동안 집에 가지 못했습니다. 나는 마지막으로 식사를 한 것이 언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지구상에서 나의 무가치함을 깨닫게 됩니다. 나는 내가 마지막으로 한 호흡을 쉴 때까지 다른 사람들을 돕고 싶습니다. 비록 나는 고통 받는 사람들과 나의 동료들의 죽음에 둘러싸여 있지만, 내가 하느님께로 돌아왔다는 사실에 행복합니다.”
75세의 한 사제는 자신이 십자가의 제물이 됨으로써 많은 이들에게 본보기가 되었고 많은 사람에게 잃었던 믿음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표징이 된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안위부터 챙기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 사제는 이웃부터 챙겼던 것이고 사람들은 그 위에 내리시는 하느님의 영광을 보았던 것입니다.
지금은 표징이 아주 많이 필요한 때입니다. 누구 하나 십자가에 못 박히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성당에 와서 가장 큰 표징은 성체성사를 영하면서도 자신은 세상에서 살기만을 원하고 그런 것만을 청합니다. 물로 그런 것도 청할 필요가 있겠지만 주님은 표징의 재료가 될 제자들을 찾으십니다.
몬테 팔코의 십자가의 글라라 성녀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신의 심장에 박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십자가를 박을 굳은 땅이 없다고 슬퍼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심장 안에서 그리스도의 수난 도구들이 나왔고 많은 이들이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만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는 세상에서 편하기만을 바라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더욱더 십자가 희생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성령은 제물 위에 내립니다. 부서진 밀알 위에 성령으로 당신이 들어오시고, 짓이겨진 포도 속으로 당신이 잉태되십니다.
믿음은 자신을 죽이는 십자가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사랑받기 위해 자신을 죽이는 십자가를 가장 사랑합시다. 이 제단 위에서만 다른 이들이 믿음을 가지게 되고 나는 주님의 표징의 도구로서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 믿음을 줄 표징의 밀떡과 포도주가 됩시다. 내가 부서지고 갈리지 않고 물과 불로 단련되지 않고는 밀떡이 될 수 없고, 짓이겨져 나의 피가 흐르지 않고는 포도주가 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주님의 영원한 사랑을 받을 표징의 재료가 되는 것만큼 의미 있는 삶은 없습니다.

-조재형신부-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이 질문은 3가지 차원에서 성찰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달마’입니다. 달마에게는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무엇(깨달음)을 얻고자하는 의지입니다. 무엇(깨달음)을 주고자 하는 의지입니다. 예전에 교리문답은 이렇게 묻고 답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온 이유는 무엇인가? 하느님을 믿고 알아 구원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 왔습니다. 남자와 여자로 왔습니다. 사는 곳도 다르고, 직업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생각도 다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현상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온 본질을 아는 것입니다. 달마가 그 이유를 알았다면 달마가 가는 곳은 모두 동쪽(깨달음)일 것입니다. 반대로 그 이유를 몰랐다면 수십 년을 걸어가도 동쪽(깨달음)에는 도착할 수 없을 겁니다.
둘째는 ‘동쪽’입니다. 동쪽은 방향을 의미합니다. 방향은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기준은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어딘지를 알면서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담아! 어디에 있느냐?’ 아담은 어디를 가지 않았습니다. 아담은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묻습니다. ‘아담아! 어디에 있느냐?’ 우리 삶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서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유익하면 기꺼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 대리석은 성모상이 되기도 합니다. 포도주는 사제의 축성으로 성혈이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유익하지 않으면 기꺼이 버릴 수 있습니다. 돈 때문에 친구를 배신한다면 돈을 버려야 합니다. 권력 때문에 양심을 속인다면 권력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방황하는 이유는 방향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방황하는 이유는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삶의 원칙과 기준이 뚜렷한 사람에게 장소는 피었다가 지는 꽃과 같습니다. 시간은 공간보다 더 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공간에 더 집착하기 마련입니다. 뿌리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까닭’입니다. 우리의 행위는 이유가 있기 마련입니다. 낮이 있으면 밤이 있습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습니다. 선이 있으면 악이 있습니다. 생하는 것이 있으면 멸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두 개의 깃발을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깃발이고, 다른 하나는 사탄의 깃발입니다. 신앙인은 행동하기 전에 어느 깃발 아래 있어야 하는지 선택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카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동생 아벨은 어디 있느냐?’ 하느님께서는 카인의 행동에 대해서 묻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생을 돌로 쳐서 죽인 카인의 행동에 대해서 묻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발자국을 보면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겸손과 온유함의 발자국이 남았다면, 믿음과 사랑의 발자국이 남았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깃발을 향해 가고 있는 겁니다. 시기와 질투의 발자국이 남았다면, 욕망과 이기심의 발자국이 남았다면 우리는 사탄의 깃발을 향해 가고 있는 겁니다.
오늘은 사순 제5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연민’입니다. 죽은 라자로에 대한 연민이 있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오빠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르타와 마리아에 대한 연민이 있으셨습니다. 오천 명에게 빵을 먹이신 것도, 나병환자를 치유하신 것도, 중풍 병자를 걷게 하신 것도,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 것도,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도 측은히 여기시는 마음에서 비롯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주신 것도 연민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닮았다면 이렇게 죽어가는 모든 것을 품어주는 연민이라고 생각합니다. 연민의 마음이 가족, 이웃, 국가의 벽을 넘어서 함께한다면, 연민의 마음이 사랑하는 사람을 넘어서 원수와도 함께한다면 세상은 기쁨과 평화가 넘쳐날 것입니다.
둘째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때가 되었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회개하고 기쁜 소식을 믿으십시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구체적인 모습을 ‘산상설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 가난한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슬퍼하는 사람,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꿈꾸었던 나라입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나고, 사자와 어린이가 함께 춤추고, 늑대와 어린양이 같이 노는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나는 나라입니다.
셋째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라자로야 나오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입니까? 무한대의 시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지 않는 삶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거짓과 욕망의 동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근심과 걱정의 동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시기와 질투의 감옥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머물렀던 제자들은 근심과 걱정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가슴이 뛰었고, 살아있는 기쁨을 얻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이제 다락방이라는 동굴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는데 그때 보는 것은 예전에 보는 것과 다릅니다. 영원한 생명은 의미와 존재의 차원입니다.
“내가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린 다음, 너희 땅으로 데려다 놓겠다. 그제야 너희는, 나,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저희와 똑같은 사람으로서 친구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하며 우시고 영원하신 하느님으로서 라자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셨으며 인류를 자비로이 굽어보시고 거룩한 신비를 통하여 새 생명으로 이끌어 주셨나이다.”

눈물을 흘리신 예수님
-반영억신부-
‘코로나19의 종식’을 위해 기도합니다. 이 시련의 시기에 하느님의 뜻을 헤아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 안에서 고통을 극복해 내야 합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바라봐야 하고 나를 새롭게 발견하는 기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내 안에 갇혀 있는가? 아니면 이웃을 향해 열려 있는가? 나의 색깔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루카19,41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 이르러 그 도시를 내려다 보시며 눈물을 흘리시며 한탄 하셨습니다.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너는 그 길을 보지 못하는 구나.”멸망할 도시에 대한 안타까움에 대해 한탄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회개를 호소하시며 눈물을 보이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께서는 인간으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당신을 죽음에서 구해 주실 수 있는 분에게 큰 소리와 눈물로 기도하고 간구하셨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마음을 보시고 그 간구를 들어 주셨습니다.”(히브5,7)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눈물로 기도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요한 11장 절이하)을 보면. 마리아도 울고, 그와 함께 있던 유다인들도 울고 예수님께서도 그들처럼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눈물을 흘리셨을까? 한마디로 예수님께서는 살아있는 생명이셨기 때문에 우실 수 있었습니다. 죽은 사람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신적이 있습니까? 살아있기 대문에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사실 라자로를 무덤에서 다시 살릴 수 있는 분이 죽음을 보고 슬퍼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눈물을 아십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죽음의 길로 들어설까 노심초사하시고, 그분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큰 슬픔을 아십니다. 인간의 모든 고통에 깊이 연민하십니다. 슬퍼하는 사람과 함께 슬퍼하고 기뻐하는 사람과 함께 기뻐하는 바로 그곳에 살아있는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신 것은 마리아와 다른 문상객처럼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해서가 아니라 그분이 살아있는 생명이셨기 때문입니다. 죽은자의 가슴은 공명을 모릅니다. 깊이 공감할 줄을 모릅니다. 살아있는 자만이 공명합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 눈에서 눈물을 흘리신 것은 “마리아 뿐 아니라 같이 따라온 유다인들까지 우는 것을 보시고” 비통한 마음이 북받쳐 올랐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마리아와 마르타 다른 문상객들이 슬프게 운 것은 인간의 죽음에 대한 깊지 못한 이해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께로부터 와서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슬퍼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유가 어디에 있든 그들의 슬픔은 순수한 것이었고 예수님의 가슴도 그 슬픔에 깊이 공감하고 공명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눈물은 큰 축복입니다. 마태복음 참된 행복의 선언에서도 보면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울어 줄 수 있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 깊은 참회의 눈물로 아버지 하느님께 간구할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눈물을 흘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주 우십시오. 눈물을 흘리면 복이 옵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깊이 공명하는 곳에 축복이 주어집니다.
그러니 가끔은 대성통곡하십시오. 아무 곳에서 하지 말고 주님 앞에서, 성체 앞에서 하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생명의 샘터로 인도하실 것이며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줄 것입니다.” 묵시21,4에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입니다. 이제는 죽음도 없고 슬픔도 울부짓음도 고통도 없을 것입니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인색해진 눈물을 회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눈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영혼이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어떻게 보면 울지 못한다는 것은 병입니다. 영혼이 마를 대로 말라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우시기 바랍니다. 요즘은‘코로나19’로 인해 웁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울고, 경제적 고통의 압박으로 울고, 사회적 거리두기로 공명을 잃을까 두렵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한 몫 잡으려고 합니다. 자기만을 위해서 사재기를 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고통을 받는 이들을 생각하며 헌신과 희생으로 그 현장에 나섭니다. 분명한 색깔이 납니다. 생명을 지닌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분명해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야 “살아나거라.”하고 말씀하시지 않고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죽은 자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에게 하는 말입니다. 그분이 무덤 앞에 섰을 때 이미 라자로는 살아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입장에서 보면 라자로는 죽지 않았습니다. 사실 목숨이 끊어졌다는 것을 죽었다고 하지만 여기서는 그런 의미보다는 부활의 삶에 희망을 두어야 합니다. 하느님 안에 있는 사람은 결코 죽지 않습니다.
‘나오너라. 무덤에서 나오너라!’무슨 얘기냐 하면 진짜 죽는 것은 내가 무덤에 갇히는 것입니다. 선입견, 똥고집,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마음, 시기, 질투, 집착, 소유, 지배, 명예욕, 교만함, 사재기 등등. 이런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일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무덤에서 나오너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부정적으로 생각한다면 바로 그 생각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공명하지 못한다면 공명하라는 것입니다. 나만 생각한다면 이웃을 향해 열려 있으라는 초대입니다. 사람들이 돌을 치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치웠습니다. 마르타가 냄새난다고 하지 말라고 말렸지만 예수님은 명하셨고 그대로 했더니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였는데 그것을 풀어주라고 하셨습니다.
풀어주는 일이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입니다. 내 스스로를 옭아매지도 말 것이며 남을 내 잣대로 재어 판단하고 단죄하여 무덤에 가두어 옭아매지도 말아야 하겠습니다.‘코로나19’를 통해 나를 새롭게 발견하는 은총의 기회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이웃사랑에 열려있음을 확인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베푸는 마음에 인색하다면, 용서하고 화해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면 십자가 위에서 처절하게 나를 위해 울고 계시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우리도 그분 마음으로 이웃에게 다가가 공명하는 한 주간 되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 11,25)
-이영근신부-
<사순 5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성지주일을 앞두고, 마치 부활을 연주하는 ‘전주곡’과 같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무덤에서 끌어내시고,
<복음>에서는 죽은 라자로를 무덤에서 나오게 하시며, 당신이 주님이심을 밝힙니다.
<화답송>에서는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음을,
<복음 환호송>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찬미하며,
<제2독서>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영을 통하여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 생명의 주님이심을 선포합니다.
오늘 이 ‘부활의 전주곡’을 들으면서, 사순시기가 생명으로 가는 길, 곧 부활로 가는 길임을 봅니다. 그리고 그 막바지에 이르러, 두려움보다는 설렘이, 쓰라림보다는 감미로움이 서광처럼 비쳐옵니다.
또한 우리는 3월을 뒤로 보내며, 봄의 길목에 들어섰습니다.
봄도 또한 분명 하나의 길입니다.
사순이 부활로 가는 길이듯, 봄은 여름, 가을, 겨울로 가는 길입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을 꽃피우고 열매 맺고, 또 다시 생명으로 피어오르는 봄의 길은 생명의 길입니다.
“봄길”이라는 정호승 시인의 시가 떠오릅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봄길’입니다.
생명을 열어주고, 부활을 가져다주는 참된 생명길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걷는 이 길에 사랑이 걸어갑니다.
이 길을 걷는 여행은 아나톨 프랑스의 말처럼,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생각의 이동’이요, 참된 생명에로의 이동이요, 사랑에로의 이동입니다.
오늘 우리는 ‘라자로의 소생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는 이와 함께 울어주는 봄바람 같은 이야기입니다.
어둠의 동굴에 갇혀있는 이를 불러내는 봄 햇살 같은 이야기입니다.
주저앉아 웅크리고 죽어 있는 이를, 빛으로 불러내는 봄비 같은 생명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의 주제는 라자로의 소생이라기보다, 죽음 앞에서 드러나는 예수님의 정체입니다.
곧 죽은 라자로를 살리는 당신이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당신은 스스로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 11,25)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이십니다.
<요한복음>의 머리말에서,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라고 장엄하게 예고된 그 “생명”입니다. 곧 빛이신 생명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어 하신 일은 바로 사람을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죽음의 어둠 속에 생명의 빛을 비추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생명이시오, 빛이신 까닭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를 생명의 길로 부르십니다. 참 생명에로 이동입니다.
그 길은 ‘앎’에서 ‘믿음’에로의 이동입니다.
곧 ‘당신이 생명이요 부활임에 대한 믿음’에로의 초대입니다.
<본문>에서 마르타는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11,22)라고 고백합니다.
마르타는 “알고 있다.”고 고백할 뿐, “믿는다.”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11,23)라고 말씀하셔도 여전히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11,23)라고, “안다.”고만 고백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아직 알지 못한 것이다.”(1코린 8,2)라는 사도 바오로의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쩌면, 여전히 마르타는 마지막 날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예수님을 마주하고 있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부활과 생명을 믿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믿음”을 촉구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6)
‘아는 것’을 넘어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믿을 때라야, 그 믿는 이에게 부활과 생명이 부여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생명과 부활은 먼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발생하는 구체적인 사건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곧 부활은 믿음 안에서 현재의 사건이 됩니다.
그렇게 믿음은 오늘도 여전히 우리의 일상과 현재를 변화시킵니다.
그러기에, 부활은 “지금 여기”에서 믿어야 하는 진리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죽음 이후에야 얻을 수 있는 생명이 아니라, 현세와 현세를 넘어서 얻을 수 있는 풍만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르타는 여전히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는 질문에, 동문서답을 합니다.
“예, 주님,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것을 믿습니다.”(요한 11,27)
예수님께서는 “부활이요 생명”임을 믿느냐고 물으시는데, 마르타는 “그리스도이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신원에 대한 믿음을 고백할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라자로의 동굴 무덤의 돌을 치우라고 했을 때도 “주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요한 11,39)하고 여전히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거듭 강조하시어 나무라듯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요한 11,40)
이처럼, ‘앎’에서 ‘믿음’으로의 이동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선사하십니다.
불신과 어둠의 묻혀있는 저희의 무덤을 열어주십니다.
그리고 저희를 당신 생명의 빛에로 부르십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오너라.”(요한 11,43)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6)
주님!
부활을 믿게 하소서!
제 생명이 죽고, 당신 생명이 피어나게 하소서!
제 안에 살아계신 당신 생명을 보게 하소서!
제가 사라지고 당신이 드러나게 하소서!
믿음으로 당신의 영광을 보게 하소서! 아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송영진신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26).”
1)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권한과 주시지 않을 권한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2) 이 말씀은,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 자체이신 분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어디 다른 곳에서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와서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 있는 생명력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서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라는 말씀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이쪽 세상에서 저쪽 세상으로 가는데, 그 가운데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부활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뜻입니다.
< 여기서 ‘대부분의 사람들’이라고 표현한 것은, ‘모든 사람’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죽지 않고 곧바로 하느님 나라로 직행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에녹’은 죽지 않고 승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창세 5,24),
그리고 엘리야 예언자도 죽지 않고 승천했습니다(2열왕 2,11).
우리 교회는 성모 마리아도 승천하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살아 있는 동안 종말과 재림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게 됩니다(1테살 4,15-17).
그래서 “모든 사람이 반드시 한 번은 죽어야 한다.” 라는 말은 맞지 않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친다고 말해야 합니다.>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두 번째 죽음’을 겪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약속입니다.
‘두 번째 죽음’은 종말의 심판 때에 영원한 멸망을 선고받은 사람이 당하게 되는
‘영원한 죽음’입니다(묵시 20,11-15).
이 말씀에서, “살아서 나를 믿는”이라는 말씀은, 신앙생활과 회개와
사랑 실천 등은 이쪽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저쪽 세상으로 가면 할 수가 없습니다.
(지옥으로 가면 벌을 받을 것이고, 연옥으로 가면 보속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곳에 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여기서 ‘모든 사람’이라는 말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뜻에 합당하게 충실한 신앙생활을 했다면,
아무도 탈락하지 않고 모두 구원과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실수로 누락되는 일도 없고, 불공평하게 차별대우를 받는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음’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만’ 믿는 것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다른 무엇에 관심을 갖거나,
한눈을 팔거나, 그것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2)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어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예수님께 기도하지는 않고,
돈이나 권력이나 세속의 연줄 같은 것만 찾고 그것들만 의지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3)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되지 않고, 받아들이기 어렵고,
실감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요한 6,68).
4)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머릿속으로 믿는다고 생각만 하고, 말씀을 실천하지 않으면,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생각이 아니라 ‘삶’입니다.
그리고 ‘부활과 생명’에 대해서도 좀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있고, 얻기를 희망하고 있는 ‘부활과 생명’은,
죽은 다음에 저 세상에 가서야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시작되어서 그곳에서 완성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부활과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이기도 하고,
지금 이곳에서 ‘부활과 생명’을 누리는 생활이기도 합니다.
물론 지금 누리는 ‘부활과 생명’은 미완성 상태이기 때문에
아직은 많이 부족하고 약하고 희미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부활과 생명’은, 또는 ‘부활과 생명’에 대한 믿음과 희망은
신앙인들의 삶의 바탕이고, 살아가는 힘입니다.
이 힘은 세속의 그 어떤 힘보다 더 강력합니다.
(박해자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힘을 과시하면서
순교자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빼앗으려고 했는데,
그 박해자들이 빼앗은 것은 순교자들의 육신의 목숨뿐이었습니다.
순교자들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은 빼앗지 못했습니다.
세속의 박해자들이 가지고 있는 ‘권력의 힘’이
순교자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힘’보다 약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부활과 생명을 믿고 희망하는 신앙인은,
순교자들이 그랬듯이, 어떤 고난과 시련을 만나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혹시 넘어졌더라도 다시 일어섭니다.
(꺾이지 않는 그 모습 자체가 복음 선포이고, 신앙의 증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고 희망하는 신앙인은
부활과 생명의 ‘완성’을 향해서 능동적으로 나아갑니다.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이야기를 보면, 무덤 앞으로 가신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하고 부르시기만 했습니다(요한 11,43).
무덤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걸어 나온 일은 라자로 자신이 한 일입니다.
(죽은 사람을 살려서 일으켜 세우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지만,
일어나서 앞으로 걸어가는 것은 그 사람 자신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고,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곁에서 지켜 주시고,
함께 걸어가시는 분이지만, 걸어가는 일 자체는 우리가 스스로 해야 합니다.
능동적인 신앙생활이 바로 ‘살아 있는 신앙생활’입니다.
(“죄만 안 지으면 된다.”, 또는 “지옥에만 안 가면 된다.” 라는 소극적인 마음으로,
또 수동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지옥에 가는 것은 피할 수 있겠지만,
천국에 들어가지는 못할 것이고, 부활과 생명을 얻는 것도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아마도 연옥에 가서 아주 오랫동안 많은 보속을 해야 할 것입니다.)

생명을 주시는 주님!
-조욱현신부-
우리는 지난 몇 주일의 복음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그리스도의 모습이 드러남을 볼 수 있다. 우선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는 그리스도는 무한한 행복을 갈망하는 우리의 갈증을 풀어주는 ‘물’이시며, 태생 소경의 치유를 통해 우리의 어둠을 밝혀주시는 ‘빛’이시며, 오늘 라자로를 살리신 이야기에서 그분은 ‘생명’을 소유하고 계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나타나신다.
이렇게 사순절 전례는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로부터 ‘풍성하게’ 생명을 얻기 위해(요한 10,10 참조) ‘물’과 ‘빛’의 원천이신 그분께로 나아가도록 해 준다. 이 여러 가지 상징들은 그리스도께로 집중되고 ‘생명’으로 그 의미가 최고로 표현되고 있다. 우리는 바로 그 생명을 무엇보다도 갈망하고 있다. 사순절은 사순절 그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 비록 무수한 죽음과 고난의 시련을 겪는다고 할지라도 ‘부활’이라는 밝은 목표를 향해 힘차게 정진한다.
복음: 요한 11,1-45: 라자로를 살리시다
이것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라자로의 부활에서 입증되고 있다. 예수께서는 친구 라자로가 죽을병에 걸렸다는 말씀을 들으셨을 때도 그 죽음이 마침내 극복되리라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에 “그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 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4절). 예수께서는 라자로를 살리시고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즉, 예수께서는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기적이 더 화를 초래한 당신의 죽음에 의해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즉 당신의 부활로 최대의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이것이 오늘 복음의 주제이다.
라자로의 기적은 예수께서 죽음을 지배하는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다. ‘돌’을 치우라고 명령하셨을 때에 “벌써 냄새가 납니다.”(39절)라고 하는 마르타에게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40절)라고 하신다. 그리고는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43절) 하시며 라자로를 살리신다. 이것은 곧 다가올 예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역사를 미리 상징적으로 예시하는 것이다. 즉 라자로는 그리스도의 부활 예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라자로의 기적은 공관복음의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에 비길 수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 수난에 앞서 제자들에게 부활의 영광을 보여주심으로써 그들이 전혀 생각지 못하는 십자가의 의미를, 즉 죽음이 아니라 생명에 이르는 길이며, 패배가 아니라 승리에 이르는 길인 십자가의 의미를 가르쳐 주고자 하신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의 정점을 이루는 말씀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25-26절)이다.
예수께서는 이제 라자로를 살리셨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부활 원천이 되시기 때문에 ‘부활’이시며, ‘생명’이시기에 모든 피조물의 존재를 생성시키는 원천이시기에 ‘부활’이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분이 ‘생명’의 창조자이신 하느님에게서 오심을 ‘믿는다.’라는 조건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믿음을 예수께서는 마르타에게 요구하신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마르타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26-27절).
이 ‘믿음’은 모든 그리스도의 제자들 안에 이미 ‘부활’을 현존케 한다. 그 부활은 마지막 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계속 체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활을 이야기하는 것은 먼저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부활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다 해도, 그에 앞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죽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매 순간의 삶이 만나게 되는 불확실성과 어려움과 괴로움 속에서도 희망을 주고 이끌어주는 사순절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삶을 통하여 진정으로 영광스러운 부활을 맞을 수 있고, 새로운 나로 변화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바오로 사도께서도 우리에게 성령을 따라 살라고 권고한다. 그 성령께서는 당신의 권능을 통신의’ 부활의 터전을 마련해 주신다. 그러기에 성령의 ‘능력’ 안에 삶으로써 성령의 ‘하여 우리의 육신을 휩쓸어갈 죽음으로부터 해방을 주신다고 한다.(10-11절)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살아 계시며’ 우리의 영적 생명을 길러주시며, 이 생명력은 ‘육인도를 따라 사는’(로마 8,14) 것이 죽음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이며 이로써 우는리 부활의 영광을 차지할 것이다. 이러한 마음으로 부활을 맞이하기 위해 노력하여야 하겠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요한 11, 43)
-한상우신부-
다시 생명을
부르시고
다시 생명을
깨우십니다.
나의 생명이 아닌
주님의 소중한
생명입니다.
라자로를
살리십니다.
우리의 고통과
함께 하신다는
이 사실을
알게됩니다.
생명을
어루만져 주시는
예수님의 눈물에서
고통을 이겨낼
힘을 얻습니다.
어루만져 주시는
그 사랑으로
우리모두를 다시
살리십니다.
고통 없는
사랑이란 없습니다.
사랑도 고통과
함께 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사랑이 고통을
일으켜 세웁니다.
우리에게
다시 생명을
주십니다.
주님께로
가야 할
생명입니다.
비껴갈 수 없는
사랑의 만남입니다.
이 사랑으로
모든 생명을 위해
기도하는 사순입니다.
다시 생명을
살게하시는
주님의 이 사랑을
믿습니다.
사랑이 묶여 있는
생명을 풀어주듯
우리의 슬픔을
벅찬 환희로
바꾸어 주십니다.
주님 사랑이
새로운 이길을
걷게 하십니다.
다시 생명을
깨우는
사순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은 당신 영을 우리에게 부어주시어 다시 생명을 주시겠다는 하느님의 애타는 사랑의 마음을 느끼게 해줍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요한 11,3).
평소 예수님과 가까운 마리아 마르타 자매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전합니다. 무척 다급했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에서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 곧 라자로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지요. 저마다 개성이 뚜렷한 자매들에 비해 라자로의 모습은 특징이 뚜렷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성경은 그에게 가장 보편적인 인간상을 투영하고 있지 않을까 짐작해 봅니다.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요한 11,11).
예수님께서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르시는 동안 라자로는 세상을 떠납니다.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맞는 죽음은 한 인간과 그를 사랑하던 가족에게는 가장 비극적인 일이지만, 예수님은 그의 병과 죽음이 결국 하느님과 하느님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요한 11,4).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요한 11,21.32).
라자로의 자매들이 안타까움과 원망이 뒤섞인 신앙 고백을 예수님께 쏟아냅니다. 아마도 라자로 역시 자매들 못지않게 예수님을 기다리다가 숨을 거두었겠지요. 자매들의 목소리에는 마지막까지 희망의 끈은 놓지 않았던 라자로의 바람도 묻어 있습니다.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요한 11,34)
예수님께서 죽은 이가 어디 있는지 물으십니다. 라자로는 공포와 우울과 상실과 경계심으로 질식되어, 더 이상 영으로 숨쉬기를 포기한 채, 어두운 절망의 동굴에 갇혀버린 인간 실존을 대변합니다. 그를 되살리려면 그가 묻힌 자리, 정확히 그 지점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돌을 치워라"(요한 11,39).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라자로는 지금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육신의 죽음 상태에 있습니다. 살아 생동하는 바깥 세상과 어둠만이 짙게 드리운 동굴 사이를 가로막은 돌은 생명과 죽음의 경계이고 인간 힘으로는 넘을 수 없는 장벽입니다. 무덤을 막은 돌은 생명이 약동하는 바깥에서 살아있는 누군가가 힘껏 굴러내어 주어야만 합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요한 11,43).
마르타의 현실적 우려로 잠시 잡음이 일었지만 결국 돌이 치워집니다. 성경 안에서 내내 침묵하고 또 지금도 무덤 안에서 침묵하던 라자로에게 예수님께서 말을 건네십니다. 예수님은 지금 빛 한가운데 서서 동굴이라는 어둠, 죽음이라는 어둠 속에 갇힌 사랑하는 이를 부르고 계십니다.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
자 이제 겨울은 지나고
장마는 걷혔다오"(아가 2,10-11).
예수님의 목소리는 아가의 한 대목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아가의 연인이 사랑하는 이를 불러내는 장면입니다. 아가에서 연인과 여인은 하느님과 당신 백성인 우리를,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신부인 교회, 우리를 상징합니다.
"그러자 죽었던 이가 ... 나왔다"(요한 11,44).
과연 라자로가 나옵니다. 나오기 전에 되살아난 게 먼저겠지요. 그는 사랑하는 분, 마지막 순간까지 간절히 기다렸던 분의 목소를 듣고 기꺼이 순종합니다. 마지막 숨을 하느님께 되돌려드리는 순간까지 온 존재로 붙잡고 있었을 그분이 이제 오셔서 그를 깨우신 것입니다. 사랑이 부르니 일어나야지요. 사랑이 시키시니 시키는 대로 나와야지요.
"그를 풀어 주어 걸어가게 하여라"(요한 11,44).
막 죽음에서 깨어난 라자로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자신을 부자유스럽게 하는 천과 수건을 사람들이 벗겨내도록 그 손길에 자신을 내어맡기면 됩니다. 예수님 명을 따르는 이들이니 두렵지 않습니다.
제1독서에서도 무덤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 이제 너희 무덤을 열겠다"(에제 37,12).
이스라엘은 유배라는 무덤에 갇힌 상태입니다. 예루살렘과 성전과 축제와 경신례를 잃어버린 상실의 무덤이기도 합니다. 하느님 백성이고 율법을 소유한 탁월하고 위대한 민족이라는 자긍심은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그런데 그 무덤을 하느님께서 여시겠답니다.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린 다음 너희 땅으로 데려다 놓겠다"(에제 34,14).
자기들 힘으로는 도저히 되돌릴 수도 재건할 수도 없는 절망의 나락에서, 그 무덤을 열고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겠다는 주님의 말씀은 생명을 주는 한 줄기 빛입니다. 그런데 되살리시는 힘이 "주님의 영"이라고 하십니다. 창조 때 우리를 살아 숨쉬게 만드신 힘 역시 "하느님의 숨"(창세 2,7 참조)이었지요. 첫 생명도, 부활의 생명도 하느님의 영(숨)에서 옵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영으로 사는 삶을 언급합니다.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사시기만 하면 여러분은 육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됩니다"(로마 8,9).
하느님의 영이 머무르는 이는 주님을 몰랐을 때의 육적인 삶을 버리고, 주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에 머물며 그분의 뜻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옛 인간의 욕정과 탐욕과 야망은 주님 영의 순결하고 거룩한 힘에 밀려나게 되고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납니다.
우리가 오늘 만나는 부활은 첫째, 라자로에게 일어난 육신의 되살아남입니다. 영혼과 육신의 부활은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이기도 하지요.
둘째는 제1독서에서 보듯 죽음과 같은 상실과 절망 상태에서의 부활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불어넣어 주신 당신의 영이 우리의 흩어졌던 정신과 뼈마디와 힘줄과 살을 다시 이어붙여 생기를 심어 주실 겁니다.
셋째로 우리가 새롭게 살아가는 성령 안의 삶이 곧 부활의 삶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으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입니다(로마 8,9 참조).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올해 죽음을 매우 가까이에서 보고 듣고 체험하는 특별한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전염병으로 사랑하는 이를 마지막 인사도 못한 채 보내야 하는 슬픈 소식부터, 숫자로만 전해지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지구 반대편의 죽음까지 연일 우리의 애도와 전구를 기다리는 소식들이 마음의 문을 두드립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5-23)
주님께서 오늘, 이 순간, 전 인류와 함께 인간 실존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그 물음엔 이미 답을 갖고 계십니다.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린 다음 너희 땅으로 데려다 놓겠다"(에제 34,14). 이것이 하느님의 바람이시고 의지입니다. 라자로를 살리신 예수님의 마음이고 이스라엘을 살리신 하느님의 속마음입니다.
우리는 결연히 신앙을 고백한 마르타이기도 하고, 함께 울어 주는 마리아이기도 합니다. 또 사랑하는 분의 목소리에 무덤에서 뛰쳐나온 라자로이기도 하고, 돌을 치워 준 이웃이기도 하고, 묶인 것을 풀어 주는 벗이기도 합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예, 주님! 믿습니다" 하고 고백하며 부활을 앞당겨 사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를 통해 희망의 영이 온 세상, 저 무덤 속에까지 퍼져나갈 것입니다. 아멘.

죽기 전에서 죽어서 죽은 다음 사는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31637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요한 1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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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는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담아! 어디에 있느냐?’ 아담은 어디를 가지 않았습니다. 아담은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묻습니다. ‘아담아! 어디에 있느냐?’ 우리 삶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서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유익하면 기꺼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
대리석은 성모상이 되기도 합니다. 포도주는 사제의 축성으로 성혈이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유익하지 않으면 기꺼이 버릴 수 있습니다. 돈 때문에 친구를 배신한다면 돈을 버려야 합니다. 권력 때문에 양심을 속인다면 권력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방황하는 이유는 방향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방황하는 이유는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삶의 원칙과 기준이 뚜렷한 사람에게 장소는 피었다가 지는 꽃과 같습니다. 시간은 공간보다 더 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공간에 더 집착하기 마련입니다. 뿌리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카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동생 아벨은 어디 있느냐?’ 하느님께서는 카인의 행동에 대해서 묻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생을 돌로 쳐서 죽인 카인의 행동에 대해서 묻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라자로야 나오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입니까? 무한대의 시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지 않는 삶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거짓과 욕망의 동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근심과 걱정의 동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시기와 질투의 감옥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머물렀던 제자들은 근심과 걱정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가슴이 뛰었고, 살아있는 기쁨을 얻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이제 다락방이라는 동굴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는데 그때 보는 것은 예전에 보는 것과 다릅니다. 영원한 생명은 의미와 존재의 차원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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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 몇 주일의 복음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그리스도의 모습이 드러남을 볼 수 있다. 우선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는 그리스도는 무한한 행복을 갈망하는 우리의 갈증을 풀어주는 ‘물’이시며, 태생 소경의 치유를 통해 우리의 어둠을 밝혀주시는 ‘빛’이시며, 오늘 라자로를 살리신 이야기에서 그분은 ‘생명’을 소유하고 계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나타나신다.
이렇게 사순절 전례는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로부터 ‘풍성하게’ 생명을 얻기 위해(요한 10,10 참조) ‘물’과 ‘빛’의 원천이신 그분께로 나아가도록 해 준다. 이 여러 가지 상징들은 그리스도께로 집중되고 ‘생명’으로 그 의미가 최고로 표현되고 있다. 우리는 바로 그 생명을 무엇보다도 갈망하고 있다. 사순절은 사순절 그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 비록 무수한 죽음과 고난의 시련을 겪는다고 할지라도 ‘부활’이라는 밝은 목표를 향해 힘차게 정진한다.
-조욱현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