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3월 26일 사순 제4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20. 3. 25. 19:34

2020년 3월 26일 사순 제4주간 목요일 


너희는 성서 속에 
영원한 생명이 있는 것을 알고 파고들거니와

그 성서는 바로 나를 증언하고 있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 
(요한 5,31-47)


You search the Scriptures,
because you think you have eternal life through them;
even they testify on my behalf. 

But you do not want to come to me to have lif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벳자타 못에서 병자를 치유한 뒤에 벌어지는 논쟁의 일부로, 마치 법정에서 예수님과 유다인들이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처럼 묘사합니다. 유다인들은 율법에 따라 잘잘못을 가릴 때에 두 명 이상의 증언이 있어야 효력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유효하지 못하다.” 마치 예수님의 변호처럼 보이는 이 내용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을 담고 있습니다.


증언의 주된 내용은 진리를 드러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업적입니다.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활동은 그 자체로 하느님의 증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모든 것을 행하십니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나는 모든 일은 하느님께서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아드님을 보내셨다는 증언인 셈입니다. 요한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되는 하느님의 뜻을 진리로 선포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이미 성경에 담겨 있습니다.

이런 주장에서 가장 큰 바탕이 되는 것은 ‘파견’ 곧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유다인들은 파견되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에 의하여 이 세상에 파견되시고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 모든 일을 하시지만 그들은 그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성경의 말씀을 통하여 당신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라고 호소하십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예전에 친한 신부님들과 함께 제주도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마침 신기한 것이 많은 박물관이 새롭게 개장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신부들에게 이곳에 한 번 가자고 말했습니다. 물론 제주도의 많은 박물관 중에 괜찮은 곳이 하나도 없다면서 가지 말자는 신부도 있었지만, 저의 강한 주장으로 박물관에 갈 수 있었습니다. 입장료가 약간 비싸기는 했지만, 신기한 것들이 참으로 많았고 그래서 제 눈을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반대했던 신부는 계속해서 이런 말을 합니다.

“애들이나 오는 곳이네. 특별히 볼 것도 없는데 아깝게 돈 내고 이런 데를 온 거야?”

볼 것 없다고 또 신기하지 않다고 단정을 하니 자신의 눈에 제대로 보일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돈 아깝다고 말을 계속합니다. 하지만 신기하다고 그래서 볼 것이 많다고 생각하는 제게는 돈이 전혀 아깝지가 않더군요.

단정을 짓는 순간에 보이는 것은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우리의 삶 안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것입니다. 삶이 뻔하다고 바라보면 뻔한 모습만 보입니다. 그러나 신기하고 놀라운 삶으로 바라보면 그런 모습이 보이면서 신나게 삶을 즐길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느냐가 중요합니다. 단정을 지으면서 좁은 마음으로 살 것이 아니라,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는 넓은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원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십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요한이 증언했고 무엇보다도 하느님 아버지께서 직접 증언을 해주셨습니다. 더구나 유다인들이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성경에서도 예수님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철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을까요?

인간의 부족하고 나약한 생각을 내세워 단정 짓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자렛에 특별한 것이 나올 수 없다는 생각, 안식일 법을 어기는 사람이 하느님의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생각, 당시의 사람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위선자라고 화를 내는 모습에서 그들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단정 지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보고 싶었던 것은 로마의 지배로부터 해방을 가져올 막강한 힘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전혀 바라보지 않으면서, 사람의 영광만을 바라보려 하고 있으니 예수님을 반대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만을 바라보려고 한다면, 주님을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내 욕심을 채우는 영광만 보고, 하느님의 영광을 보지 않으면 주님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 안에 계시는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넓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행복하기 때문에 웃는 것이 아니라 웃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다(윌리엄 제임스).



내 행복의 크기.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책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 결말은 어떠했습니까? 대부분 결말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결혼 이후의 행복이 어떤 것인지 말해 주지 않습니다. 어쩌면 결혼하는 순간의 행복이 가장 크기 때문은 아닐까요? 아무리 왕자와 공주의 결혼이라도 그 후에 부부싸움도 하고 또 어려움도 겪으면서 힘든 시간을 보낼 테니 말입니다.

행복의 크기는 결국 같아진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로또로 벼락부자가 된 사람의 행복감도 얼마 지나면 일반인과 같아지고, 누구나 부러워할 결혼에 성공한 사람도 길어야 2년 지나면 다른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결혼 생활을 하게 됩니다. 교통사고로 반신불수가 된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 건강한 사람과 다르지 않은 정도의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결국, 나만의 행복 크기를 키워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문제는 나의 과거와 비교하면서 내 행복을 키워야 하는데, 나보다 나은 다른 사람의 현재를 지금의 나와 비교하면서 내 행복의 크기를 줄여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이의 희망입니다. 그렇다면 나만의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다른 이와의 차이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족시킬 어떤 것이 있는지를 찾아야 합니다.                   

교회에 대한 믿음이 구원을 위한 믿음의 시작이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높은 수준의 믿음에 다다르는 순서’에 대해 말씀해주십니다. 그리고 왜 성경을 연구하면서도 온전한 믿음에 이르지 못하는지도 설명해주십니다. 조금 어렵지만, 오늘 복음을 잘만 이해하면 왜 사람들이 성경을 연구하면서도 사이비나 이단에 빠지는지도 알 수 있게 됩니다.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한 몸이 되려 세상에 오셨음을 믿음으로써 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먼저 ‘세례자 요한’이라는 사람을 선지자로 파견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길을 준비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믿은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께로 왔습니다. 그는 “진리를 증언”하였습니다.


      요한의 증언을 본 이들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후에는 그리스도께서 일으키시는 ‘표징’을 보았습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하고 죽어가던 아이가 살아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나오시는 ‘성령의 힘’을 본 것입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니 “아버지께서 그리스도께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 곧 그리스도를 증언합니다.


      그다음은 ‘아버지’께서 직접 증언해주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아버지의 증언은 받을 수 없습니다. 그분의 말씀인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안에서만 아버지의 증언이 유효합니다. 아버지의 증언은 곧 당신의 “목소리”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에 다다르면 아버지께 대한 믿음이 자라납니다.


      그다음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성경”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라고 하십니다. 보통은 성경을 믿으면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을 순서대로 나열해보겠습니다.

세례자 요한 =>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들 => 그리스도 => 아버지 => 성경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을 증언하는 것 중에 성경을 왜 맨 끝에 배치하신 것일까요? 왜 성경을 읽으면서도 많은 사이비와 이단이 생겨나는 것일까요?

 

어떤 사람이 산을 넘다가 무덤을 하나 발견하였습니다. 그 무덤의 묘비에 그 무덤에 관한 이야기들이 적혀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한국 전쟁 때 매우 추운 어느 겨울날 미군의 트럭이 연료가 떨어져 어떤 다리 위에 멈추어 섰습니다. 그런데 다리 밑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내려가 보니 한 어머니가 겉옷으로 아기를 감싼 채 죽어있었습니다. 한 군인이 어머니를 묻어주고 아기를 양자로 삼아 미국으로 데려가 키웠습니다. 그리고 아기가 청년이 되었을 무렵 아들을 데리고 어머니의 무덤을 찾아왔습니다. 추운 겨울이었음에도 청년은 자신의 겉옷을 벗어 무덤에 덮어드리며 “어머니, 그때 얼마나 추우셨어요!”라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이가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믿음’은 어느 순서로 발전하였을까요? 순서상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아이 => 양아버지의 증언 => 무덤 => 어머니 => 겉옷을 벗음 => 아버지 => 묘비

 

      오늘 복음으로 보자면 ‘양아버지는 세례자 요한’이고, ‘무덤은 그리스도의 일, 혹은 표징’이며, ‘어머니는 그리스도’이시고, ‘겉옷을 벗음은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실천해야 하는 십자가 사랑’이고, ‘아버지는 하느님 아버지’이시며, ‘묘비는 성경’입니다. 이 묘비를 읽고 있는 사람은 지금 ‘성경’을 읽고 있는 것입니다.


      양아버지의 증언이 없으면 아이는 믿음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먼저 파견하신 이유는 그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을 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하시는 모든 일은 당신께 대한 믿음으로 향하게 만드는 표징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되고, 그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파견하신 아버지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이것을 볼 수 있도록 문자로 남깁니다. 그것이 성경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당신께 대한 믿음으로 오지 않는 이유를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 뜻보다는 자기 뜻을 우선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버려야 하느님 뜻을 실천할 텐데, 이웃을 위해 자신을 버릴 뜻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무덤을 만나면 옷을 벗어야 하는데, 옷을 벗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양아버지의 말부터 거부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의 증언부터 믿지 않으면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그 사람에게는 어떠한 구원을 주는 믿음에도 도달할 수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마태 3,8)라고 하며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3,11), 또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루카 3,14)라고 가르칩니다. 이웃을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내어줄 마음이 없으면 아예 믿음의 길을 시작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믿음의 진화를 순서대로 나열하면 이렇게 됩니다.

=> 교회의 증언 => 성사(그리스도의 일; 표징) => 그리스도 => 십자가 => 아버지 => 성경


      신천지는 거짓말을 정당화합니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려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거짓이 얼마나 안 좋은지 잘 압니다. 우리나라가 그나마 코로나19에 잘 대처하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투명성’이었습니다. 만약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거짓말을 정당화하는 신천지의 성경공부에 화들짝 놀라 당장 성경공부를 그만둘 것입니다. 그곳에 빠지는 이들은 어느 정도는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 교리는 선한 의도로 하는 거짓말까지 금지하고 있습니다.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나의 영광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추구하려는 마음부터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참 사랑을 실천하게 해 줄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의 증언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온전한 믿음에 다다랐을 때야 성경이 온전하게 해석되어 참 표징이 됩니다.


      바오로가 교회에 대한 믿음에 들어오지 않은 채 한 모든 행동은 본인은 하느님을 위한 것이라고 믿었겠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영광을 위함이었습니다. 세례를 받고 눈에서 비늘이 떨어진 이후에 성경도 올바로 해석하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교회의 증언은 먼저 믿지 못하면 그 이후의 믿음도 비뚤어지게 되어있습니다. 먼저 교회의 가르침을 믿읍시다. 교회는 성체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통해 드러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조재형신부-


집을 지으려면 순서가 있습니다. 먼저 땅을 파야합니다. 기둥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벽을 세우고, 지붕을 덮어야 합니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굳이 배우지 않아도 경험으로 알 수 있는 순서입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기도, 단식, 자선을 하고 있습니다. 우선순위가 있다면 어떤 걸 먼저 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우선순위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순서일까요?

 

첫 번째 자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누지 않고 창고에 재물을 쌓아놓은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라자로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지 않았던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겠다고 했던 자캐오를 칭찬하시면서 오늘 이 가정은 구원받았다.’라고 하셨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실천이 없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조금씩만 더 나눈다면 가난, 굶주림, 질병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조금씩만 더 나눈다면 난민들이 쉴 수 있는 자리를 만들 수 있습니다. 자선은 재물을 나누는 것도 있지만, 재능과 능력을 나누는 것도 있습니다. 자원봉사도 좋은 나눔입니다.

 

두 번째는 기도입니다. 자선하는 마음이 식어 가면, 신앙의 실천이 어려워지면 성찰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쁘신 중에도 따로 시간을 내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구하여라. 얻을 것이다.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청하여라. 주실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청하면 산도 옮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표징을 보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기도하는 법을 물어보는 제다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셨습니다. 기도의 핵심은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는 것입니다. 기도의 내용은 나의 뜻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먼저 이웃과 화해해야 합니다.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더 큰 자비를 얻을 것입니다.

 

세 번째는 단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시기 전에 40일간 단식하셨습니다. 자선은 여유 있는 것을 나누는 것만이 아닙니다. 자선은 아끼고, 절약해서 나누는 것입니다. 단식을 통해서 굶주리는 사람의 심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1983년 겨울입니다. 보좌신부님께서 23일 동안 청년 피정을 준비하셨습니다. 피정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23일 동안 단식했던 것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청년들의 몸은 점점 지치고 힘들었지만 눈빛은 더욱 반짝였습니다. 눈 덮인 길 위에서 신발을 벗고 십자가의 길을 했습니다. 30년이 훌쩍 넘었지만 그때의 십자가의 길은 아직도 기억납니다. 물에 들어가야만 수영을 배울 수 있습니다. 차를 몰아야 운전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웃의 아픔과 고통에 동참하는 것이 단식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오늘 우리는 제1독서에서 황금송아지를 만들었던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청을 받아들여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겸손하지 않는다면, 표양을 보이지 않는다면, 거짓과 변명, 비방과 질투의 말을 일삼는다면, 희생과 봉사를 하지 않고 대접을 받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 마음에 이미 황금송아지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의 잘못을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분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사순시기는 우리를 위해서 목숨까지 바치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완벽하신 변호인이십니다


눈 먼 열심

  -반영억신부-  

 

열심히 일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열심히 노력하는 만큼 풍성한 수확도 기대할 수 있으니 신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정작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열심히는 하지만 눈먼 열심으로 쉽게 지치고 결과도 좋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물론 자기 자신 안에 화를 쌓게 됩니다. 따라서 참된 열심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요한5,39-40). 유다인들은 열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고 하느님에 관해서, 메시아에 대하여, 율법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두루두루 많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정작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고 심지어 하느님의 의를 세우고 하느님의 법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예수님을 처형 하였습니다. 아무리 많이 알고 연구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들은 헛일을 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우리도 참 바쁘게 움직이며 많은 일을 합니다. 또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일들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인지,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지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 하느님 마음에 꼭 드는 일이라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우리는 실상 많은 일을 하면서도 주님의 일에는 소홀합니다. 많은 지식을 쌓으면서도 주님을 진정으로 마음에 모시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반 서적을 보는 시간의 극히 일부만이라도 신심서적을 읽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합니다. 텔레비전 앞에서는 몇 시간을 보내지만 성경을 펴 들고 있는 시간은 너무도 미약합니다. "성경대로 생각하고 성경대로 살자"는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무엇보다도 모든 것의 원천이신 하느님에 관해서 열심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권고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나 주님의 일을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의 노고가 헛되지 않음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1코린 15,58). 열성이 줄지 않게 하고 마음이 성령으로 타오르게 하며 주님을 섬기십시오(로마12,11) . 주님을 섬기는 일에 열심한 오늘이기를 기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죽이려는 이들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이들을 살리려고 무던히도 애쓰셨습니다. 그러한 큰마음으로 갈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요한 5,42)

-이영근신부-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두 번째 표징인 왕실관리의 아들을 살리신 다음,

예루살렘에 오시어 벳자타 못에서 세 번째 표징을 행하셨습니다.

그날은 안식일이었고,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율법을 앞세운 반대자들과의 논쟁을 통해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오늘 <복음>에서,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당신의 정체성을 4중적 증거를 통해 입증하십니다.

곧 세례자 요한(33-35)과 성부 하느님(30-32)과 당신 자신의 활동(36)과 성경(38-47)이 당신을 증거하고 있음을 밝히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증거는 명확하고 확실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분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것은 그들의 마음이 닫혀 있는 까닭이었을 것입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함은 결코 증거가 부족해서거나 계시가 없어서가 아니라, 믿고 받아들이지 못한 그들의 완고함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을 가리켜 오늘 <1독서>에서는 목이 뻣뻣한 백성(탈출 32,9)이라고 표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러한 완고함의 특성을 두 가지로 밝혀주십니다.

 한편으로는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분을 믿지 않았다.’ 라는 말로 표현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지 않았다.’ ‘그분의 말씀을 품지 않았다.’ 라는 말로 표현 되고 있습니다.

이는 완고함은 주님이신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인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믿어버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결과 우상숭배에 빠지고, 주님이신 하느님을 거역한 결과를 초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하느님을 거역한 다윗에게 말합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1사무 15,23)


사실, 이러한 우상숭배를 두고, <예레미아서>(5,7)에서는 하느님을 저버리는 것으로써, 영적 간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에제키엘서>(23,27)에서도 야훼 하느님 외에 것을 찾는 것은 영적 간음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정배이신 주님이 아닌 우상을 섬기고 따르고 하느님을 거역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완고함이란 한편으로는 말씀을 거역함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이 자신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않는 이들의 이유를 이렇게 밝히십니다.

너희는 ~말씀이 너희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요한 5,38)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요한 5,42)


결국, 완고함은 말씀을 품지 않고 있고, 하느님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있지 않음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품지 않으면 곧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품게 되기 때문입니다.

4중의 증언의 말씀을 듣고도 품지 않은 까닭입니다.

결국, 완고함은 하느님 사랑이냐, 자기 사랑이냐?, 하느님 사랑하는 마음과 주님의 말씀을 품고 있느냐, 자기 자신을 품고 있느냐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을 위한 마중의 시간인 이 사순절이 말씀을 품고서 하느님의 뜻에 충실한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이 있다.”(요한 5,36)


주님!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해야 할 일, 맡기신 일을 하게 하소서.

계산하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믿고 하게 하시고,

의무에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하게 하소서.

바라는 일이 아니라 주어진 일을 하게 하시고,

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 함께 하소서.

시작만 하는 것이 아니라 완수하게 하시고,

일을 통해 내 자신이 아니라 당신이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하느님께서 보내신 아드님

 -조욱현신부-


복음: 요한 5,31-47: 너희를 고발할 사람은 모세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에 관하여 하신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분이 따로 계시다.”(32) 그분은 믿지 않을 수 없는 진실한 증인이시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요한을 찾아갔을 때도 그는 진리를 증언하였음을 상기시키신다.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었다. 너희는 한때 그 빛 속에서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였다.”(35) 바로 그 요한이 주님을 증언하였다.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주셨다.”(요한 1,33)

 

그러면서 예수께서는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36) 예수님께서는 권능을 증거로 대시면서 당신이 아들이시라고 입증하신다. 그분이 하느님의 권능으로 하신 일들이 바로 하느님께서 그분을 보내셨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분이 하신 일들은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이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를 위하여 증언해 주셨다. 너희는 그분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한 번도 없고 그분의 모습을 본 적도 없다.”(37) 이 말씀은 그분께서 행하신 일들이 모두 그분에 관한 아버지의 증언이라는 것이다. 그분의 일들은 아버지께서 그분을 보내셨다는 것을 증언하는 것이다. 즉 아들이 행하는 일은 아버지의 증언이므로 그리스도 안에는 같은 본성이 작용하고 있으며 아버지께서는 그 일들로 인해 그분을 증언하신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는다.

 

또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39) 그들은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하지만,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분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40) 그렇기 때문에 그들 마음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신다.(42) 이 말씀은 믿음 없이 단지 성경을 읽기만 해도 구원을 얻는다는 생각이기 때문에 진정한 성경의 열매는 거두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하는 내용에는 귀 기울이지 않고 성경을 읽기만 하는 것을 그들은 자랑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결정적 말씀을 하신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43) 성경은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이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기록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는 이는 복되어라.”(시편 118,26) 그러므로 그분은 그들에게 나타나신 바로 그 주 하느님, 곧 하느님의 말씀이셨다. 그분이 바로 복되신 분이시다.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사람들 가운데 오셨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하리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었던 모세이다.”(45) 그들은 모세를 믿는다고 하면서 감히 모세가 기록해 놓은 그분을 거스르고 있다. 그것은 모세를 잘못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을 고소할 이는 그들에게 율법을 준 모세가 될 것이다. 그들이 모세를 올바로 알았더라면 그가 나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하였기 때문”(46)에 그리스도를 믿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의 글을 믿지 않기에 예수님의 말도 믿지 못한다.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를 다 이루신 분이시다. 그분은 하느님께로부터 오신분이시며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믿고 생활해야 한다. 이 사순시기에 더욱 그분을 믿고 따르는 우리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 온

모세이다.(요한 5, 45)

-한상우신부-

모든 것은
예수님께 이르러
희망이 됩니다.

아픔과
함께 하시는
살아계신 치유의
희망입니다.

삶의 가장
약한 부분을
파고드는 우리의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을
희망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참된 희망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희망을 먹고 사는
우리들 삶입니다.

한 모금의
희망이 필요한
우리들입니다.

이 사순시기가
참된 희망이 되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기쁨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의 길을
내십니다.

우리를 살리시는
주님과 희망은
하나입니다.

우리의 두려움이
희망이신 주님을
향해 나가는
살아있는 희망이길
기도드립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독서 안에서 우리는 고독하지만 충만한 두 인물을 만납니다. 바로 모세와 예수님입니다.

"나는 사람의 증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요한 5,34).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유다인들에게 예수님은 당신을 증언해 주는 증인들을 밝히십니다. 일찌기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 있었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놀라운 일들이 그분을 증언하며, 그분 말씀과 손에 힘을 주시는 아버지 역시 예수님을 증언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성경이 예수님을 증언하고 있지요(요한 5,39).

"나는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받지 않는다"(요한 5,41).

예수님은 죄로 물든 인간의 본성이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며 물질과 명예에 약하다는 걸 너무도 잘 아시기에 사람들의 평판에 일희일비하지 않으십니다. 모두가 예수님에게 등을 돌린다 해도 아버지께서 주시는 영광으로 충만하신 예수님은 흔들리지 않으시지요.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이러한 이해와 통찰은 실망이나 미움으로 번지지 않고 오히려 더 깊고 진한 연민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날을 세우는 유다인들조차도 미워하시거나 단죄하실 수 없으십니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하리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온 모세이다"(요한 5,45).

유다인들 입장에서는 몹시 불편한 말씀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모세의 권위, 율법의 권위를 무시한다고 여겨 그분께 신성모독의 혐의까지 씌울 참이었으니까요.

모세는 이스라엘의 희망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하느님 백성으로 살아갈 율법을 받아 전한 존재이고 주님이 얼굴을 마주 보고 사귀시던 사람이었으니까요(신명 34,10 참조).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와 율법은 하느님과 그들 사이의 대체 불가능한 중개자인 셈이었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 숭배로 진노하신 하느님과 그 앞에서 다급하고 절절히 애원하는 모세가 등장합니다.

"당신 자신을 걸고 ... 맹세하신 당신의 종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이스라엘을 기억해 주십시오"(탈출 32,13).

모세는 결코 이 백성이 잘했다고 두둔하거나 변명하지 않습니다. 정상 참작이나 유예를 간청하지도 않지요. 그저 일찍이 하느님께서 조상들에게 친히 발하셨던 맹세를 기억해 달라고, 그래서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애원합니다.

유다인들이 희망하는 중개자는 이렇듯 하느님과 자기들 사이에 서서 하느님의 노여움을 풀어 드리고 율법을 전달하는 존재입니다. 그 이상은 불편하고 그 이하는 못마땅할 터이지요.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요한 5,43).

때가 차자 아버지께서 세상에 보내신 중개자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전하고 실행하시는데 그치지 않고 당신 자신을 바쳐 아버지와 세상의 화해를 이룩하십니다. 그분은 한낱 짐승의 피로 하느님의 노여움을 풀어드리던 희생 제사의 시대를 매듭 지으시고, 단 한 번의 완전한 제사로 아버지와 자녀들의 관계를 새롭게 세워 주신 겁니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영성체송).

새로운 하느님 백성은 율법을 사랑의 이름으로 저마다 마음 속에 새겨넣은 사람들입니다. 율법은 단죄와 심판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혼 안에서 자비와 사랑의 원천으로 간직되어야 합니다. 모든 믿는 이들의 희망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 오직 한 분뿐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다른 사람이 나를 믿어주고 인정해 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하느님이 벗님을 인정해 주시고 믿어주시니까요. 하느님이 벗님의 증인이십니다. 그러니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영광을 받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하느님이 벗님을 영광스럽게 만들어 주실 테니까요. 벗님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만 하십시오. 아멘.

부정의 습관과 부정의 인격에 벗어나야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30504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3월 15일 사순 제4주간 목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