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25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2020년 3월 25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은 말 그대로 주님의 탄생 예고를 기념하는 날이다. 예전에는 ‘성모 영보 대축일’이라고 하였는데, ‘영보’(領報)란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잉태 소식을 천사에게서 들었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도 여느 사람처럼 성모님의 모태에서 아홉 달을 계셨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 대축일의 날짜는 예수 성탄 대축일에서 아홉 달을 역산한 것이다.
☆☆☆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 1,26-38)
Behold, I am the handmaid of the Lord.
May it be done to me according to your wor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선포는 메시아의 탄생을 나타내는, 예수님의 탄생을 가리키는 유명한 예언입니다. 이제 이 예언은 나자렛에 사는 한 처녀, 마리아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탄생 예고는 예언의 성취이자 구원을 향한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입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천사의 인사말은 예수님 탄생의 의미를 잘 드러냅니다. 기쁨의 실현이자 주님께서 함께하시는 사건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힘이 되는 약속은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에게 예언자들을 파견하거나 그들이 전쟁에 나설 때에도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은 그 무엇보다 강한 힘이었습니다.
이제 천사는 마리아를 통하여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다시 한번 알려 주고 그 기쁨을 전합니다. 이것이 ‘임마누엘’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모든 일을 마리아의 협력을 통하여 이루십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마리아의 응답은 개인의 응답일 뿐만 아니라 믿음을 간직한 공동체의 희망을 담은 표현입니다. 마리아와 함께 모든 믿는 이들은 하느님께 부름을 받은 셈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시며 말씀이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에 합당한 응답은 우리의 신앙과 삶을 통하여 표현되어야 합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바로 쓰레기입니다. 그래서 순례객이 많이 오실 때면 관리를 하는 직원들이 무척 바빠집니다. 만약 이 쓰레기를 그냥 놔두면 깨끗하고 잘 정돈된 성지가 아니라 지저분한 쓰레기통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것은 분명 버린 사람의 잘못입니다. 또 그분들의 잘못이니까 우리가 쓰레기를 치울 필요 없다며 그냥 놔두지 않습니다.
우리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가족일 수도, 친구일 수도, 성당 교우나 직장 동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내게 주는 아픔과 상처를 그냥 끌어안고만 있다면, 쓰레기를 버리지 않고 모두 품에 안고 있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쓰레기는 좋은 냄새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또 내게 건강을 가져다주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빨리 버려야지, 그렇지 않으면 내 몸 전체가 쓰레기통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처럼 나를 힘들게 하는 쓰레기 같은 것은 얼른 버리고, 내게 힘이 되어 주는 주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늘은 주님의 탄생 예고를 기념하는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성모님께서 천사로부터 예수님 잉태 소식을 듣게 되지요. 성모님께서는 세상의 일보다 주님의 일이 먼저였다는 것을 복음을 통해서 분명히 알게 됩니다.
만약 세상의 일이 먼저였다면 천사로부터 들은 예수님 잉태 소식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혼인하기 전에 임신한 경우 간음을 했다고 해서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약혼을 한 요셉 성인을 설득하는 문제 역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세상일에 대해 걱정하지 않습니다. 천사의 말대로 “하느님께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라는 믿음으로 이렇게 고백합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나를 두렵게 하고 걱정에 휩싸이게 하는 쓰레기 같은 세상일에 연연해서는 안 됩니다.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받아들이는 이에게 커다란 은총을 베풀어주십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을 잉태하게 되었으며,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불평불만을 늘 안고 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매사에 우울했고 당연히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을 평소에 눈여겨보았던 마을의 현자가 물 한 잔을 가져오라고 했고 여기에 소금 한 줌을 타서 마시게 했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물맛이 어떠냐?”
“너무 짜서 마실 수가 없습니다.”
이제 근처의 맑은 호숫가로 데리고 가서 아까처럼 소금 한 줌을 호수에 타게 했습니다. 그리고 호수의 물을 떠서 한 모금 마시게 한 뒤 묻습니다.
“물맛이 어떠냐?”
“시원합니다.”
“소금 맛이 나느냐?”
“전혀 나지 않습니다.”
현자는 말합니다.
“불행의 양은 누구나 똑같다. 다만 이 불행을 어디에 담느냐에 따라 크기가 달라진다. 유리잔이 아니라 호수가 되어라.”
내 마음은 유리잔일까요? 아니면 호수일까요? 불평불만이 많다면 유리잔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기쁘고 행복하다면 호수와 같은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나를 낮추는 말보다 나를 높이는 말이 믿기 더 어렵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커다란 믿음의 시험을 받습니다.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으니까, 하느님의 어머니가 된다는 믿음의 도전입니다.
어찌 보면 그냥 “아멘!”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을 낮추는 말보다 높이는 말을 더 믿기 어려워합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 마리아께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라고 인사했습니다. 만약 누가 “나는 네가 어젯밤에 한 일을 알고 있다.”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섬뜩할까요? 이것이 나를 높여주시려는 하느님의 뜻을 믿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높아지면 그 높은 수준의 삶을 살기가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끊임없이 ‘자신의 가치에 대한 믿음’을 낮추려 합니다.
즈카르야는 예언자의 아버지가 된다는 말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가 된다는 말도 믿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수행해야 하는 소명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래서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신체적 장애를 남과 다른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 ‘영국의 살아있는 비너스, 앨리슨 래퍼’의 이야기입니다. 래퍼는 두 팔이 없고 기형적으로 짧은 다리를 지니고 태어나 생후 6주 만에 거리에 버려져 19년 동안 복지시설에서 자랐습니다. 스물한 살 때 결혼했지만 남편의 폭력 때문에 9개월 만에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이후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장애인의 몸으로 혼자서 아들 패리스를 낳았습니다. 그녀는 이런 상황에서도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입과 발로 그림을 그리는 구족화가 겸 사진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불편한 자신의 몸을 숨기지 않고 작품의 소재로 삼는 등 적극적인 방식으로 장애를 극복했으며, 2003년에 스페인 ‘올해의 여성상’과 영국 왕실에서 수여하는 ‘대영제국 국민훈장’을 받았습니다. 2005년에는 ‘세계 여성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장애를 갖고 태어났지만 행복하다. 장애인을 일컫는 ‘disable’이란 말은 사회에서 만들어 낸 것이지 앨리슨, 나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 나는 그저 남들과 조금 다를 뿐입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전혀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
래퍼는 작품 활동을 할 때마다 장애인의 몸이 정상인과 다르다는 것은 문제 되지 않으며, 오히려 그 다름이 내 몸을 특별하고 아름답게 만든다는 것을 깨닫는다고 합니다. 그녀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장애인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사랑했으며, 나아가서 자부심마저 느꼈다고 말합니다.
[출처: ‘안식일학교; 교과토의 자료, 제9과 자존감, 다음 카페]
사람의 삶의 질은 ‘자신이 어느 만큼 귀중한 존재이냐는 믿음’에 의해 결정됩니다.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까지 믿으셨습니다. 사실 우리도 교회라는 가브리엘 천사를 만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는 나도 예수님과 한 몸이 되어 하느님을 모신 성전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말에 “아멘!” 하며 예수님을 우리 안에 모십니다. 이제는 우리가 사람의 수준이 아니라 하느님의 수준까지 올라가게 된 것입니다.
교리서는 “교회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단순히 그리스도인이 된 것뿐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 자신이 된 것”이라고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머리로 보내 주신 이 은혜를 이해하십니까- 놀라고 기뻐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가 된 것입니다. 사실 그분은 우리의 머리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지체이기 때문에 그분과 우리는 온전히 한 인간입니다.”(795)
정말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이면, 그분의 뜻을 따라주기는 해야겠지만, 하느님의 유일한 자녀와 한 몸으로서 두려울 것이 없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누구를 두려워하고, 무엇을 걱정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 믿음을 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하느님은 성모 마리아에게서처럼 우리에게도 이 믿음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믿음이 나의 정체성이 되고, 나의 정체성만큼 변한 삶을 살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핵심이 담긴 교리를 하나 더 보도록 하겠습니다.
“‘말씀’은 우리를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2베드 1,4) 하시려고 사람이 되셨다. ‘바로 이 때문에 ‘말씀’은 인간이 되시고, 하느님의 아들은 사람의 아들이 되셨다. 인간이 ‘하느님의 말씀’과 친교를 맺고, 자녀 됨을 받아들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려고 성자께서 인간이 되셨다.’ ‘그분은 우리를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인간이 되셨다.’ ‘하느님의 외아들은 당신 신성에 우리를 참여시키시려고 우리의 인성을 취하셨으며, 인간을 신으로 만들기 위하여 인간이 되셨다.’”(460)
하느님께서 저희를 하느님이 되게 하셨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하느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한 것입니다. 그 사람 안에서 하느님의 본성인 ‘사랑’이 나와 분명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고 있을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다는 것까지 믿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들어 높여주시려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있습니까? 하느님이 된다는 것까지 믿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성모 마리아의 믿음을 닮으신 것입니다.
공지: 유튜브 강론을 보시려면 유튜브 검색창에 “삼용 묵상”만 치시면 됩니다. 그리고 해당하는 날짜의 강론을 찾아 클릭하시면 됩니다. 묵상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전날 저녁 6시에 올리기로 하겠습니다. 동영상을 통해 여러분을 더 가까이 만나 뵐 수 있게 되어서 기쁘고 감사드립니다.

-조재형신부-
무선 이어폰을 사용할 때가 있습니다. 활동이 자유롭고, 편하기 때문입니다. 저렴한 무선 이어폰을 주로 사용했습니다. 가격은 만족스러웠지만 기능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충전이 잘 안 되기도 했고, 음감이 떨어지기도 했고, 오른쪽은 되는데 왼쪽이 안 되기도 했고, 이유 없이 안 되기도 했습니다. 이웃 본당 신부님과 무선 이어폰 이야기를 했습니다. 신부님의 지론은 이왕 구입하려면 비용이 들더라도 좋은 걸 구입한다고 합니다. 신부님의 권유를 받아들여 조금 비싸지만 ‘정품’을 마련했습니다. 역시 정품은 달랐습니다. 디자인이 깔끔했습니다. 외부의 소리도 들리면서 음량이 좋았습니다. 한번 충전하면 10시간 이상은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교우 분들은 사제에게 관심과 사랑을 주십니다. 자리에 앉으면 상석을 권하곤 합니다. 사진을 찍으면 가운데 자리를 마련해 주시곤 합니다. 식사에 초대하시면 가능하면 좋은 음식을 권합니다. 강론을 조금만 잘 해도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좋은 물건이 있으면 기쁜 마음으로 선물해 주십니다. 사제가 누구이기에 그럴까요? 사제의 제의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사제의 복장에서 그리스도의 희생과 헌신을 보기 때문입니다. 사제의 독신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기 때문입니다. 사제의 순명에서 그리스도의 열정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셨을까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는 삶을 사셨습니다. 넘어질지라도 포기하기 않고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언제나 기도하셨습니다. 고난의 잔일지라도 하느님의 뜻이라면 받아들였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교우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정품 사제인가?’ 교우들의 관심과 사랑을 당연한 것처럼 여겼던 적이 있습니다. 자리를 마련해 주지 않으면 서운했던 적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십자가는 이야기했지만 그것을 실천하지 못한 적도 많습니다. 때로는 교만했고, 때로는 게을렀고, 때로는 하느님의 뜻보다는 저의 뜻을 이루려고 했습니다. 사제는 세상에 상처받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합니다.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 주어야 합니다.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으면 같이 그곳에 머물면서 함께해야 합니다. 사제는 하느님의 심부름꾼이어야 합니다. 높은 곳에서 벼락을 맞아야 하는 피뢰침처럼, 거친 바다에서 불을 밝혀야 하는 등대처럼 사제는 고독과 침묵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런 사제가 ‘정품’사제입니다.
오늘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천사 가브리엘을 나자렛에 사는 마리아에게 보내셨습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말했던 것처럼 하느님께서 몸소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를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리아를 통하여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놀라운 일이고,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렇게 응답하였습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나자렛의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 성모님이 되었습니다.
성모님은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하며 자신의 몸이 구원 사업의 도구가 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성모님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잔치의 즐거움이 계속 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하게 합니다. 예수님 또한 성모님의 그런 마음을 아시고, 아직 때가 되지 않았지만 혼인잔치를 더 풍요롭게 하셨습니다. 성모님은 혼인잔치에 손님으로만 간 것이 아니라, 그 잔치에 부족함이 없는지를 살피시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성모님의 그런 마음을 본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웃의 아픔을 헤아리는 마음,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마음, 자신의 고통 보다는 사도들을 추스르고 교회를 걱정하는 마음, 바로 그것이 성모님의 마음입니다. 성모님처럼 해야 할 일을 분별하여,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열린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천주의 성모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존재 자체로 순례 하는 우리들에게 확실한 희망과 위로의 표지가 되어주시는 성모님!
-양승국신부-
가브리엘 천사가 전해준 하느님 측의 메시지 ‘주님 탄생 예고’ 앞에 보여준 나자렛의 마리아의 모습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놀랍고 은혜로운 초대, 그러나 부담스럽고 두려운 초대 앞에 마리아는 즉각적이고 호의적으로 응답합니다. 나자렛 소녀의 응답의 말씀이 참으로 기특하고 갸륵하며 사랑스럽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복음 1장 38절)
단순하면서도 겸손한, 그러나 단호한 결기로 가득한 마리아의 응답 앞에서 하느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시고 흐뭇해 하셨을 것입니다. 하느님 입장에서 그녀를 각별히 사랑하시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럴 때 어울리는 표현이 아마도 총애(寵愛)가 아닐까 싶습니다.
나자렛의 마리아에 앞서 이스라엘 역사 안에는 수많은 위인들과 예언자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보인 반응들을 보면 제각각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왜 하필 저입니까?”하고 하느님께 따졌습니다. 어떤 예언자는 “죽어도 못합니다?”라며 도망가버렸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런 저런 핑계를 댔습니다. “저는 이미 나이가 너무 많습니다. 이제 곧 세상을 하직할 나이라 죄송합니다!” “제 나이 이제 열 여섯입니다. 도저히 자신이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마리아께서 보인 응답은 참으로 각별합니다. 예라고 응답했을 경우 자신에게 닥쳐올 고통과 시련이 엄청날 것임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주님께서 저를 원하시니, 주님께서 저를 선택하셨으니, 주님께서 저를 초대하시니, 앞뒤 돌아보지 않고 예! 라고 응답하신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다양한 형태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많은 경우 우리의 귀, 영적인 귀, 마음의 귀가 제대로 열리지 못한 관계로, 초대의 말씀을 미처 듣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매일의 다양한 사건들,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서 말입니다.
다양한 음성을 통해 매일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느님의 초대, 하느님의 음성을 나자렛의 마리아처럼 잘 경청할 수 있는 은혜를 청해야겠습니다. 하느님의 초대 앞에 망설인다거나 뒤로 물러서지 말고 기쁘게, 즉각적으로 순명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영성생활이란 다른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음성,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인간측의 적극적인 호응과 응답과 협력, 그것이 참된 영성 생활이 아닐까요?
그런 면에서 나자렛의 마리아는 가장 충실하고 모범적인 영성생활의 길잡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마리아는 존재 자체로 순례 하는 하느님 백성인 우리들에게 확실한 희망과 위로의 표지가 되어주시니, 기쁨에 찬 감사와 공경을 드려야 마땅하겠습니다.
척박한 산골 나자렛에서 태어나신 마리아께서 평생에 걸친 순명과 기도, 각고의 노력 끝에 영광스럽게도 하느님의 어머님이 되셨습니다. 성모님의 생애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각자에게도 큰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한없이 부족한 우리들이지만 우리도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하느님의 큰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오늘 우리는 기억해야겠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지기를
-반영억신부-
성경을 보면,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1,30).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리아는 이해되지 않고 믿을 수 없는 이 말씀에 결국은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세상은 바로 마리아의 이 믿음과 믿음에 따르는 순명으로 인하여 하느님이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십니다. 사실 당시의 풍습을 생각하면 약혼한 처녀가 부모도 모르고 약혼자도 모르게 임신하여 배가 불러온다는 것은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처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리아의 응답은 죽음을 각오한 대답이었습니다. 사실 순종 없는 믿음은 그림의 떡입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1,37)고 하셨지만 인간의 협력을 요구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결코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복종이 없이 천명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이현주). 그렇다면 내가 있는 자리가 어디이든 주님의 뜻에 기꺼이 순명할 수 있는 믿음이 있다면 그 자리에 하느님께서 분명히 역사하십니다. “마리아는 자신을 ‘주님의 종’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종’은 그야말로 노예를 뜻합니다. 그러기에 이 말에는 그 고통을 미리알고 그것을 참아내겠다는 의지가 담겨있습니다..그런데 그 종에게 견디어 내는 희망을 주는 것은 바로 ‘말씀’입니다...‘말씀하신대로’라고 라는 말씀이 우리에게도 희망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함께야). “종은 자신의 의지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의지를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당신이 쉼을 원하시면 저는 사랑으로 쉬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일하라고 명을 내리시면 저는 일을 하면서 죽고 싶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일상 안에서 언제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을 더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지만 하느님께서는 선인이나 악인이나 모두에게 은총을 쏟아 부어주십니다. 그러나 은총을 알아채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의 손 안에 있는 연장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연장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도구가 되는 기쁨을 놓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마리아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 감수하면서 단테의 표현대로 "처녀인 어머니로서의 고통", 그리고 "아들의 딸" 즉 하느님의 딸로서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하느님을 따르는 길에서 고통은 항상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천사가 마리아에게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루카1,35). 하였습니다. 바로 그 성령께서 우리에게도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우리를 덮어 죽기까지 믿음에 따르는 순명의 삶을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따르는 경청의 달인이요, 행동하는 어머니이셨습니다. 우리도 일상 나에서 다가오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말씀대로 행하는 성모님을 닮은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기뻐하시오. 은총을 입은 이여, 주님께서 함께 계십니다.”(루카 1,28)
-이영근신부-
오늘은 주님탄생예고 대축일입니다.
참으로 기쁜 날입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기쁨에 찬 인사말을 전합니다.
“기뻐하시오. 은총을 입은 이여, 주님께서 함께 계십니다.”(루카 1,28)
오늘 <복음>은 가브리엘 천사와의 세 번의 대화를 통해 마리아께서 어떻게 자신의 신원과 소명을 알아듣고 응답하게 되는 지를 보여줍니다.
<첫째 대화>는 천사의 인사말에 대한 마리아의 당황, 곧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함입니다(루카 1,29).
<둘째 대화>는 천사의 아기 잉태 예고와 그 아기의 신원과 소명에 대한 마리아의 물음, 곧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루카 1,34)라는 물음입니다.
<셋째 대화>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한 마리아의 응답, 곧 “주님의 종이오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는 응답입니다.
<첫째 대화>에서의 마리아의 당황은 ‘은총을 입음’과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아직 실감하지 못함이요, 이를 어떻게 알아들어야 할지에 대한 곰곰이 생각함입니다.
<둘째 대화>에서의 마리아의 물음은 아기의 잉태와 그 아기의 사명이 자신과는 무슨 상관이 있는지, 그리고 이를 어떻게 따라야 할지에 대한 물음입니다.
<셋째 대화>에서의 마리아의 응답은 ‘하느님의 뜻’ 아래 놓인 자신의 신원과 소명을 깨닫고서 이에 순명함입니다.
우리는 마리아의 이 깨달음을 세 가지로 알아들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지금 이 일을 하시고자 하는 분이 누구인지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곧 성령이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고 거룩한 하느님의 아들이 탄생하는 이 일은 다름 아닌 “하느님이 하시는 일”임을 깨달음입니다.
다음에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신의 신원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곧 “주님의 여종”임을 깨달음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소명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는 ‘아기 잉태’를 원하신다는 것이며, 바로 이 ‘하느님의 뜻’에 응답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임을 깨달음입니다.
그렇다면 이 소명에 마리아께서는 어떻게 응답하였을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것은 사랑하기에 앞서 먼저 그분의 사랑을 허용하는 일, 곧 그분께서 당신의 사랑을 내 안에서 이루시도록 나 자신을 그분께 허용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수락하고, 그분의 사랑을 수락하고, 그분의 사명을 수락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름 하여,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예”(피앗)라는 동의, 곧 받아들임이었습니다.
또한 그것은 그분의 은총이 나에게 파고들도록 자신을 그분께 승복하는 일이었습니다.
곧 당신께서 원하신 바를 내 안에서 하시도록 나 자신을 하느님의 뜻에 승복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화답송>에서처럼 “주님, 당신 뜻을 따르려 이 몸이 대령했나이다.”(시편 39,8)라고 말하는 것이요,
<제2독서>에서처럼 “하느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려고 왔습니다.”(히브 10,9)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름 하여, 하느님의 뜻에 대한 “순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분께 결혼의 단란함과 미래뿐만이 아니라, 율법의 위반자로서 목숨까지도 내어드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는 일이었습니다.
나아가서 그것을 희망하고 바라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로지 그분만이 자신의 전부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이름 하여, 말씀에 대한 “믿음”의 봉헌이었습니다. 그분의 희망 안에 일치를 이루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천사의 인사말을 들어봅니다.
“기뻐하시오. 은총을 입은 이여, 주님께서 함께 계십니다.”(루카 1,28)
이제 우리는 마리아와 함께 이 크고 큰 은총을 입었음에 그리고 주님께서 함께 계심에 기뻐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드님을 구세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 기쁨보다 하느님의 기쁨은 더할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사랑을 받아주는 이가 있다는 기쁨일 것입니다.
그 기쁨이 큰 까닭은 사랑이 아무리 크고 크다 하여도 그 사랑을 받아줄 이가 없다면, 그 사랑은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모님은 바로 그 크신 사랑을 받아들인 사랑의 감실, 거룩한 성전이 되셨습니다.
이제, 마리아의 소명은 구세주의 구원은총을 입은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의 소명이요, 교회의 소명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먼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이요,
그 사랑을 믿고 따르는 일이요,
먼저 받은 바로 그 사랑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실상 필요한 한 가지는 임이 나를 사랑하도록 허용하는 일,
임의 사랑에 나를 승복하는 일,
임이 온전히 나를 사랑하도록 나를 온전히 내어주는 일,
사랑에 앞서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
하여, 받아들인 그 사랑으로 사랑하기,
임으로 임을 사랑하기.
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요.
내 안에 사랑이 있다는 사실,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사랑을 받아주는 이가 있다는 이 사실이 그 얼마나 큰 기쁨인지요!
우리는 참으로 기쁘고 행복합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주님!
참으로 큰 기쁨입니다.
제 안에 사랑이 있다는 이 사실, 참으로 놀랍고 아찔한 감미로움입니다.
하오니, 이제는 그 사랑에 승복하게 하소서.
항상 저를 향하여 있는 당신 사랑 안에 머무르게 하소서. 아멘.

순종, 응답
-송영진신부-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우리 교회는 마리아의 응답과 동시에 예수님께서 잉태되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은 주님께서 성모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신 날이고,
실질적으로 인간 세상에 들어오신 날입니다.
따라서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은
성탄절만큼이나 중요한 대축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리아의 응답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지, 또 얼마나 위대한
일이었는지를 강조하면서, 그 응답과 순종을 본받자는 말을 자주 하는데,
혹시라도 사람들 가운데에는 “왜 그게 그렇게 중요하고 위대한가?” 라고
의문을 품을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 자료를 찾아보면, 마리아가 처한 상황보다 더 심각하고 복잡한 상황에서,
마리아보다 더 과감한 결단을 내리고 그것을 실행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마리아의 ‘응답의 결과’입니다.
(그 응답 덕분에 이루어진 일의 위대함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응답한 그날은
인류 역사가 새롭게 시작된 날이고, 모든 사람의 인생이 새롭게 시작된 날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관심도 없겠지만, 구세주께서 세상에 들어오심으로써
인류 구원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날이고,
구원받을 길을(또는 구원의 진리를) 알지 못해서 방황하던 인류가
그 길과 진리로 나아가기 시작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마리아는 자신의 응답과 순종의 위대함을 인식하고 있었을까?
충분히 잘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루카 1,48ㄴ-49).
(아무 생각 없이, 즉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맹목적으로 응답하고
순종한 것이라면, 응답과 순종의 의미와 가치가 많이 떨어지게 됩니다.
자신이 무엇을 응답하는지, 그리고 응답의 결과로 어떤 일이 생길지를
잘 알고 있어야 응답의 결과로 이루어진 일의 위대함만큼
응답 자체도 위대한 일이 됩니다.)
사람들 가운데에는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라는 말 때문에,
혹시 “하느님의 뜻이니까(명령이니까) 어쩔 수 없이 복종한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라는 말은,
실제로 자유의지 없이 명령에 복종만 해야 하는 종이라는 뜻이 아니라,
종이 주인의 뜻에 따르듯이 그렇게 하느님의 뜻에 기꺼이 순종하겠다는 뜻입니다.
자유의지 없이, 즉 명령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복종한 것이라면,
그 복종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자유의지는 마리아의 응답과 순종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인의 신앙생활에도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자유의지로 자유롭게 순종을 선택했고, 응답했습니다.
우리가 하는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인데,
신앙생활은, 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과 구원과 생명을 얻는 일은,
아무에게도 강요되지 않습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주님 탄생 예고’ 소식을 전한 일은,
무조건 따라야만 하는 명령을 전한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전한 일입니다.
‘부르심’은 ‘초대’입니다.
응답하기를 거절하는 사람을 강제로 끌고 가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특별한 사명을 맡기시는 ‘부르심’에 응답하기를 거절하는 일 자체는
죄가 아닌데, 응답했을 때 얻게 될 ‘큰 은총’을 얻지 못하는 일이 됩니다.)
또 사람들 가운데에는,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 1,34)” 라는 말 때문에 “혹시 마리아는 즈카르야처럼
천사가 전하는 말을 안 믿고 의심한 것은 아닌가? 아니면 믿었더라도
응답하기를 망설인 것은 아닌가?” 라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즈카르야가 천사에게 했던 말,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루카 1,18)” 라는 말과
마리아의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라는 말은,
뜻이 완전히 다릅니다.
즈카르야의 말은, “제가 그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라는 뜻입니다.
그는 자신과 엘리사벳의 나이가 많다는 점 때문에
아기를 낳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말은,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는 뜻입니다.
마리아는 동정녀인 자신이 아기를 낳으려면
약혼자인 요셉과의 결혼을 서둘러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루카 1,35).” 라는 천사의 대답은,
“하느님께서 다 알아서 하실 것이니 네가 따로 할 일은 없다.” 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 라는 천사의 말은,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니
동정녀를 통해서 메시아가 태어나게 하실 수 있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망설였을지도 모른다.”는 의문에 대해서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자유의지로 기꺼이 순종하고 응답했더라도, 묵상과 기도도 하지 않고,
고민 같은 것은 전혀 하지 않고, 천사의 말을 듣자마자 즉시 응답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고, 아마도 천사의 말과 마리아의 응답 사이에
어느 정도 시간 간격이 있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충분히 기도하고 묵상한 다음에 응답했을 것이고,
천사는 재촉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천사가 한 말들은 전부 다 마리아로서는
상상한 적도 없는,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일에 관한 소식이었습니다.
그리고 메시아의 어머니가 되는 것은, 마리아 자신은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원한 적도 없고, 청한 적도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놀라고 당황하고 망설이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그런 점에서도 마리아의 순종과 응답은 위대한 일입니다.
<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어떤 ‘특별한 부르심’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사제직에 대한 부르심이나 수도생활에 대한 부르심뿐만 아니라,
본당에서 어떤 직책이나 임무를 맡는 것도 모두 ‘특별한 부르심’입니다.)
그런 ‘부르심’을 받았을 때,
신앙인으로서 마리아의 순종과 응답을 본받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기꺼이 참여하는 것은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는 일이고,
동시에 내가 큰 은총과 큰 기쁨을 얻는 일입니다.>

-조욱현신부-
오늘은 주님의 탄생 예고 대축일이다. 하느님께서 마리아의 응답을 통해 사람이 되시는 위대한 사실을 오늘 복음은 전해주고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다는 것은 곧 인간의 차원이 하느님의 차원으로 들어 올려졌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하느님과 같이 되게 하려고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이다. 하느님의 뜻에 대한 마리아의 응답은 이제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룰 수 있게 하였고, 그 마리아의 자세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의 모범이 된다.
복음: 루카 1,26-38: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탄생 예고가 이어지고 있다. 복음에서는 가브리엘 천사가 등장하는데 ‘가브리엘’은 ‘하느님의 힘’이라는 뜻이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28절) 이런 인사는 남자가 들은 것이 아니라 오직 마리아에게만 주어진 인사였다. 주님께서는 그냥 마리아를 보러 오시는 것이 아니라, 태어남의 새로운 신비를 통해 마리아에게로 내려오시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28절) 주님께서는 그냥 마리아를 보러 오시는 것이 아니라, 태어남의 신비를 통해 마리아에게로 내려오시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천사를 바라보던 그 자리에서 하늘의 심판관을 몸에 받아 모시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하느님께서는 한 처녀를 당신의 어머니로 만드셨고, 당신 여종을 어머니로 삼으셨다. 온 세상도 하느님을 품지 못하지만, 하느님은 온전히 그 품에 오시어 사람이 되셨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31절) 천사는 마리아에게 하느님께서 그녀 안에서 행하시는 거룩한 신비를 드러내 줄 아기에 대하여 말한다. 마리아는 처녀로서 어머니가 될 것이다. 그 아기는 하느님의 아들이자 사람의 아들이 되실 분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그분이 하시는 일을 의미한다. 그분은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세상을 다시 창조하실 분이시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34절) 예수님의 탄생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다. 이 물음은 동정 잉태라는 신비에 대한 깊은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천사는 성령께서 마리아에게 내려오시어 잉태하리라고 한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35절) 마리아가 열매를 맺게 하신 분은 성령이시다. 물 위를 감돌며 창조를 이루신 분도 성령이시다.(창세 1,2 참조)
마리아가 하느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심으로써 아들이신 말씀을 잉태하시게 되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하느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며 말씀을 잉태하고 그 말씀을 구체적으로 이웃에게 낳아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말씀을 잉태한다는 것은, 마리아와 같이 자신의 인간적인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버려야 한다. 나 자신을 온전히 버리지 못하면 주님을 올바로 따를 수 없다. 하느님의 말씀을 산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매 순간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자신을 끊고 자신을 버리는 고통이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십자가이다. 이 십자가를 통해서만이 우리는 마리아와 같이 말씀을 잉태하고 그 말씀을 낳아줄 수 있을 것이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38절) 마리아는 하느님께 순종함으로써 하와의 불복종을 되돌려 놓는다. 그리하여 한 천사였던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첫 번째 처녀의 타락이 다른 천사의 말을 받아들인 이 처녀 마리아의 믿음으로 극복되고 있다. 마리아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 마리아는 평범한 한 시골 처녀였다. 우리와 같은 한 사람이고 평범한 삶을 사는 인간이었다. 그 마리아가 그렇게 하느님께 자신의 신앙을 고백할 수 있었다면, 우리도 마리아와 같이 고백하고 실천해야 한다.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 1, 31)
-한상우신부-
말씀을
헤아려보는
사순의 봄입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오십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를
가르쳐주십니다.
그것은
말씀입니다.
우리 몸에
담아야 할 것또한
말씀입니다.
말씀의 잉태로
뼈와 살이
형성됩니다.
말씀만한
탄생은 없습니다.
말씀은
말씀으로
통합니다.
말씀은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말씀이 점점
자라고 커지고
성장합니다.
말씀이 우리를
품어줍니다.
말씀으로
잃어버린 사랑을
얻게됩니다.
말씀의 잉태이며
말씀의 탄생입니다.
말씀의 때에
말씀이 탄생하실
것입니다.

-오상선신부-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네 역사를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가, 함께 계시지 않는가"로 평가하는 것 같습니다. 환난의 때에는 주님께서 더 이상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다고 슬퍼하고, 회복의 때에는 다시 오신 주님을 기리며 고개를 쳐들었지요. 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주님 현존을 묻는 인간에게 주시는 주님의 자상한 답변이 될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임마누엘의 선포가 울러퍼집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이사 7,14; 8,10).
당시 유다 임금 아하즈와 그의 백성은 예루살렘을 치려는 아람과 이스라엘로 인해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이때 주님께서 아하즈에게 이사야 예언자를 보내시어 경고와 함께 "임마누엘"의 희망을 전하십니다. 유다 임금과 백성에게 "임마누엘"은 주님께서 지금 백성과 함께 계신다는 위안이요 승리의 표징인 동시에, 앞으로 오실 이스라엘의 구원자를 특정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당신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히브 10,9).
제2독서에서는 당신 백성과 함께하길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이 그리스도의 강생으로 실현됨을 드러냅니다. 세상에 오신 성자를 통해 드러난 아버지의 뜻은 그분의 구원 의지, 곧 사랑과 자비입니다.
"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히브 10,5).
육화하신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마련해 주신 "몸"으로 율법에 따라 바치는 제물이나 예물을 대신할 전존재적 희생 제사를 봉헌하시지요. 임마누엘 예수님의 현존은 추상이나 관념이 아닌 생생한 실재였습니다.
복음 안에서도 우리는 임마누엘의 기쁜 소식을 듣습니다.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의 시골 처녀 마리아가 천사의 방문을 받습니다. "임마누엘"의 공동체적 의미를 익히 들어왔을 마리아는 자기 개인에게 부여된 "임마누엘"의 축복에 몹시 놀라며 무슨 뜻인지 곰곰이 생각합니다. 지금 이 순간은 "임마누엘"의 의미가 공동체적으로, 전 인류적으로 실현되기 위해 먼저 한 개인에게 주님께서 현존의 가능성을 타진하시는, 숨막히는 긴장의 찰나입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루카 1,35).
마리아는 성자의 거처가 되기 위해 성 삼위 하느님께 온전히 둘러싸여 하나를 이루는 신비의 순간을 맞이하십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특별한 방식으로 성령과 일치하신 성령의 신부, 성령의 정배시지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당신 백성과 함께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열망은 이렇듯 인간의 협력을 필요로 합니다. 정결한 처녀로서 두려움도 일었겠지만, 하느님께 대한 무한한 신뢰가 두려움과 의혹을 이깁니다. 그녀는 지혜롭고 용감한 믿음의 소유자였지요. 마리아의 이 응답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세상 안에서 형체를 갖추어 현존하도록 자신을 내어드리는 엄청난 결단입니다.
예수님의 강생은 원죄 이후 타락한 세상을 회복시켜 주시려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 뜻을 실현하러 오셨고, 마리아는 그 뜻에 자신을 던집니다. 그렇게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현실이 이루어진 것이지요.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온 세상이 그분의 현존을 담고 있지요. 우리가 알아채건 못 알아채건 하느님의 뜻이 온 세상에 가득합니다. 영의 눈으로 보면, 주님을 믿는 우리는 섭리라 부르고, 믿지 않는 이들은 우연이라 부르는 주님의 뜻이 도처에 깃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당신 혼자서 뚝딱 이루시지 않으십니다. 그 뜻이 세상에서 사랑이 되고 온기가 되고 희망이 되도록 우리를 참여시켜 주십니다. 협력이 필요하다며 보잘것없고 불결하며 빈틈 많은 우리에게 겸손되이 손을 내미십니다.
"얘야, 내가 너를 통해 세상에 현존하고 싶단다."
우리는 마리아처럼 주님의 초대 앞에 섰습니다. 마치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은 혼돈과 고통의 시대에 무척 긴급하고 절박한 이 요청이 거의 호소에 가깝게 들립니다. 지금 우리게 필요한 건 두려움을 딛고 일어설 단순한 믿음과 결단입니다.
"Fiat Voluntas Tua!"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아멘.
오늘 교황님께서 함께 기도하자고 청하십니다. 성모님처럼,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청하며 하루종일 짬나는 대로 틈틈이 "주님의 기도"를 바칩시다!

하느님 앞에서 잔머리는 일거에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30025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