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21일 사순 제3주간 토요일
2020년 3월 21일 사순 제3주간 토요일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루카 18,9-14)
Everyone who exalts himself will be humbled,
and the one who humbles himself will be exalte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성전이라는 말을 들으면 흔히 제사를 떠올립니다. 성전에서 바치는 예배를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이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전은 제사만 드리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많은 기록들이 성전을 기도하는 장소로 표현합니다. 우리가 감실에 모셔진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 기도하고 성체 조배를 하는 것처럼 유다인들도 성전을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집으로 생각하고 그곳을 찾아 기도를 바쳤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갑니다. 유명한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입니다. 바리사이의 기도는 감사의 기도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며” 기도를 바칩니다. 그는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기에 하느님 앞에서 “꼿꼿이 서서” 기도합니다. 감사 기도이지만 다른 이들과 비교하며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합니다. 그의 눈은 자신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향하고 그들의 죄를 향합니다.
반면에 세리는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자비를 청합니다. 그의 눈은 자신을, 하느님 앞에서 한없이 부족한 자기 자신을 향합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나’의 대화입니다.
의롭게 되어 돌아간 사람은 세리입니다. 의로움은 스스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과 비교해서 의로운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의로움을 구원이라는 말로 바꾸어서 이해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은 스스로 쟁취하거나 다른 이들과 비교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서품받고 보좌신부로 첫 본당에 나가서 얼마 안 되었을 때였습니다. 아주 이른 새벽에 사제관 전화가 울렸습니다. 어머니께서 갑작스럽게 쓰러지셨다며 병원에 와서 병자성사를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곧바로 병원에 가서 병자성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곧바로 선종하신 것입니다. 당황스러웠습니다. 마치 저 때문에 돌아가신 것만 같았습니다.
어머니의 죽음 앞에 오열하는 자녀들을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지, 나 자신이 너무나 무력하게 느껴졌습니다.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어떻게 전해줘야 할지를 도저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아침 식사를 하면서 주임신부님께 새벽에 병자성사를 주고 왔다는 것과 함께, 저의 고민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때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해주시더군요.
“인간의 위로는 그렇게 대단하지 않아. 진정한 위로는 하느님만 가능한 것이지.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병자성사 주는 것까지야.”
인간은 대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대단하다고 생각하는지 자기 칭찬하느라 바쁜 사람들이 많습니다. ‘나는 다른 인간들과 다르다!’라면서 사람들에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자기 자랑을 일삼는 사람이 존경받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것도 남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을 인정받으려는 모습은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뿐입니다. 다른 이에게 큰 모범이 되는 행동을 했어도 그 행동 자체의 의미가 자기 자랑을 통해서 사라지게 됩니다.
의사를 찾아간 환자가 자기 자랑만 하고 있다면 또 남의 상처만 이야기한다면 제대로 치료가 될 수 있을까요? 환자는 오로지 자신의 아픈 상처만을 온전하게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 선 우리는 바리사이와 다른 세리의 모습을 취해야 합니다. 그는 바리사이와 달리 자기 상처를 감추고 남의 허물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자신의 허물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대로 보여드렸습니다. 이러한 겸손한 모습이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참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바리사이의 기도가 아닌, 세리의 기도를 바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새벽에 일어나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조금만 더 자자’라는 뇌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늦잠을 자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첫 번째는 변화에 필요한 초기의 힘인 ‘활성화 에너지’는 그 운동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평균 에너지보다 훨씬 많은 양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즉, 새벽에 일어나는데 드는 활성화 에너지는 기상 이후의 활동(예를 들어 기도, 독서, 운동...)보다 더 많은 양의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감정에 지배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신경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95%의 사람들이 감정에 따라 결정을 내린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직장인이 “오늘 점심으로 뭐 먹을까?”라고 말하는 것은 실제의 생각을 묻는 것이 아니라, “오늘 뭐 먹고 싶은 기분일까?”라는 기분, 감정을 묻는 것이라고 합니다. 감정에 지배받고 있다는 것은 새벽에 일어나지 못하는 감정에 쌓여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목표를 향해 행동하고 싶은 본능이 생기는 순간 곧바로 몸을 움직여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방해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실천하기가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 뜻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많은 여건이 방해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아주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몸을 움직여서 곧바로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변화도 가져올 수 없습니다.

내가 반응하는 대상이 나의 수준이다.
-전삼용신부-
소크라테스는 유명한 그리스의 철학자입니다. 소크라테스만큼 유명했던 인물이 그의 아내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아내는 악처로 유명했습니다. 그날도 무슨 일로 화가 났는지 소크라테스의 아내가 크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태연하게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아내가 소크라테스의 머리에 물을 퍼부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머리를 닦으며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너무 놀라지 말게. 천둥이 친 후에는 비가 내리는 법이라네.”
아내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도 너무나 태연한 소크라테스도 문제는 있을 것입니다. 아내가 더 무시당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렇더라도 아내의 분노에 초연할 줄 아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또한 본받을 필요가 있겠습니다. 만약 그때 맞서 싸웠다면 소크라테스는 위대한 철학자라기보다는 아내와 같은 수준이 되어버렸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스스로 자신이 의롭다고 여기는 바리사이가 나옵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자비만을 청하는 세리도 나옵니다. 바리사이는 세리 같은 사람들보다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해서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합당하지 못한 자신의 자세를 뉘우칩니다. 바리사이는 이웃보다 잘살고 있으면 잘사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이웃보다 잘살고 있음을 알려면 이웃을 평가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의 평가에 민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비교우위에 있는 줄 알았는데 누군가가 그를 깎아내리면 참아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반면 세리는 바리사이가 뭐라 해도 발끈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원래 부족한 인간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라고 하십니다. 손바닥도 부딪혀야 소리가 나는 것처럼 타인의 심판에 신경이 쓰인다는 것은 그냥 그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심판으로부터 자유로우려면 내가 타인을 심판하는 사람이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언제나 부족한 자녀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이 당신을 심판한다고 분노에 차서 반응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심판받으실 때 침묵하셨습니다. 이 침묵의 의미는 당신께서 다른 수준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반응하면 같은 수준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도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물론 우리가 완전히 하느님의 본성에 이르지 못하고 아직도 육체의 인간으로 살고 있어서 세상의 심판에 아주 무관하게 살아가기는 힘듭니다. 그렇더라도 자주 내가 사람의 자녀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임을 기억하며 이웃의 심판에 자유롭기 위해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오래전 미국의 홀트 이반 판사는 살인을 저지른 27세의 한 여인에게 중형을 선고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가슴 아파했습니다. 살인의 동기가 너무 사소했기 때문입니다. 그 여인은 이웃과 한화로 100원도 안 되는 5센트를 서로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다가 화를 참지 못하고 총으로 상대를 쏘았던 것입니다.
5센트로 반응하고 있다는 것은 내가 그 수준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그 수준에 맞게 살고 죽게 됩니다. 우리가 그런 것에 반응하는 수준이 아니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5센트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듯 그러한 수준의 사람들이 사는 삶에서도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내가 반응하는 대상을 보고 내가 어느 수렁에 빠져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빨리 믿음의 줄을 잡고 그 수렁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내가 무엇에 반응하는지 항상 살핍시다. 자신을 보고 짖는 개에 반응하면 자신도 개가 될 뿐입니다.

-조재형신부-
서울시는 중국 북경과 자매결연 하였다고 합니다. 서울시는 신종코로나 바이러스로 어려움에 처한 북경에 구호물품을 보냈고, 위로와 격려의 영상 메시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서울시의 영상 메시지는 4억 명이 넘는 중국 사람이 보았다고 합니다. 4억 명의 중국 사람은 서울시의 따뜻한 위로에 감사의 마음을 가졌을 겁니다. 사스, 조류독감, 신종플루, 메르스도 피해를 주었지만 다 지나갔습니다. 이번 신종코로나 바이러스도 결국은 지나갈 겁니다. 지나친 공포와 두려움은 위기를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남는 것은 위로와 공감이 있을 겁니다. 어려울 때 잊지 않고 도와 준 사람을 기억할 겁니다.
5년 전 한국이 메르스로 상당히 어려움을 겪었을 때입니다. 북경시는 서울에 사절단을 보냈고 메르스가 아직 끝나지 않았어도 대규모 관광객을 보냈다고 합니다. 위기를 극복하는 것은 공감과 위로입니다.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됩니다. 이 우주에 수많은 별이 있지만 이성, 감성, 오성을 지니고 같은 역사의식을 가지며 문화와 문명을 공유한 별은 오직 푸른 지구입니다. 이 외롭고 작은 별에서 민족, 나라, 사상, 이념, 종교를 가지고 벽을 만들고, 차별하는 것은 슬프고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우리는 이미 두 번의 세계 전쟁에서 경험했습니다. 서로 연대하고, 공감하고, 위로하면 비록 위기와 고통의 파도가 밀려올지라도 희망의 빛이 함께 할 겁니다. 그것이 인류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지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를 이야기하셨습니다. 바리사이는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바리사이의 기도는 흠 잡을 데가 없습니다. 죄를 짓지 않았고, 율법과 규정을 잘 지켰습니다. 세리는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세리의 기도는 내 세울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세리의 기도를 의롭다고 하십니다. 바리사이에게 기도는 있었지만 공감이 없었습니다. 세리의 기도는 내세울 것은 없었지만 하느님과의 공감이 있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호세아 예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 하느님을 아는 예지란 무엇입니까? 돌아온 아들을 용서하고, 잔치를 베풀어 주는 자비입니다. 강도당한 이웃을 외면하지 않고 도와주었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연민입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서 밤을 새워 들판을 돌아다니는 목자의 사랑입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희생입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는 겸손함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바로 공감과 연민입니다.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사탄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우리를 사랑의 백신으로 치유해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하느님, 당신 자애로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크신 자비로 저의 죄악을 없애 주소서. 제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제 잘못을 깨끗이 지워 주소서.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이러한 재난과 시련의 시기는 성찰과 성숙의 때이기도 합니다!
-양승국신부-
우리 민족은 물론 인류 공동체 전체를 위협하는 대재난 앞에서 자주 생각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은 과연 무엇인가? 하느님께서는 이 대재앙을 통해 바라시는 바가 무엇인가? 전지전능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인류 전체가 겪는 이 극심한 고통 앞에 왜 신속하게 개입하지 않으시는가?
아무리 곱씹고 또 곱씹어도, 아무리 묵상하고 또 묵상해도, 납득할만한 명쾌한 답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어떤 종교 지도자는 하느님께서 진노하신 결과라고, 그에 따른 징벌을 내리셨다고 외치는데, 위험하기 짝이 없는 발상입니다. 괜히 별 생각없이 엉뚱한 말했다가 비난의 대상, 공공의 적이 되기 십상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하나의 강력한 메시지라는 것을 느낍니다. 인간 본연의 나약함과 한계를 자각하고 더 겸손해지라는 메시지. 지구촌 전체를 위협하는 다양한 형태의 거대악과 재난, 질병에 효과적으로 맞서기 위해 서로가 더 연대하고 협력하라는 메시지. 평소 잊고 살았던 가장 작은 것들의 소중함을 깨달으라는 메시지 말입니다.
지난 성 요셉 대축일에 배포된 한국천주교주교회의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야겠습니다.
“이러한 재난과 시련의 시기는 성찰과 성숙의 때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시련을 허락하시지만 동시에 시련을 이겨 낼 힘을 주십니다.”
“여러분에게 닥친 시련은 인간으로서 이겨 내지 못할 시련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성실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여러분에게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시련과 함께 그것을 벗어날 길도 마련해 주십니다”(1코린 10,13).
오늘 예수님께서는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실로암 연못으로 보내시어 앞을 보게 하시는 치유의 은총을 베푸십니다.
오늘 이 시대 역시 저 자신을 포함해서 만사 제쳐두고 실로암 연못으로 달려가야 할 사람들이 참 많다는 생각을 합니다. 보고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 들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 죽었다 깨어나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평소 같으면 수많은 교우들로 붐빌 텅빈 성전, 평소 같으면 수많은 아이들로 요란스러웠을 텅빈 교정, 텅빈 수련원 경당에 앉아, 늦었지만 절실한 한 가지 깨달음을 얻습니다.
평소 별 생각 없이 대하던 교우 한분 한분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송이 꽃이었다는 것을. 아이들 한명 한명이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값진 보물이었다는 것을. 그래서 눈만 뜨면, 만날 때 마다, 백번이고 천번이고 존재 자체로 선물이요 축복인 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교회의 가장 기본 세포요 조직인 교우들이 사라진 본당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이들이 사라진 교실은 그저 황량한 건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사태가 진정되고 정상화되는 어느 날, 한분 한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답답하고 제한적인 삶을 시작한지 꽤 많은 날들이 지났습니다. 짧다고 하면 짧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날들, 우리는 그간 단 한번도 체험해보지 못한 초유의 단절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흘러넘치도록 풍성했던 날들, 하고 싶은 것은 뭐든 다 할 수 있었던 날들을 돌아봅니다. 자신도 모르게 극단적 물질만능주의에 깊이 함몰되어 살았음을 반성합니다. 내 삶 안에 하느님의 영역, 신앙의 영역, 영적인 영역은 한없이 초라하게 위축되고, 인간의 영역, 세상의 영역은 괴물처럼 확장되었음을 성찰합니다.
고통과 시련의 시기, 볼 줄 아는 눈이 없어 그간 놓치며 살아왔던 일상의 지극히 작은 것들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밥맛 떨어지는 사람
-반영억신부-
초등학생의 눈에는 어떤 사람이 제일 싫은 사람일까요? ‘잘난 척 하는 사람, 자기 자랑하는 사람이 제일 밥 맛 없답니다.’ 자기 자랑을 하는 사람은 결코 현명한 사람이 아니며, 사람들은 자기 자랑 하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자기를 드러내고 남을 깎아내리기 좋아하는 사람은 인정받지 못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그럼에도 자격지심에서 자기를 내세우지 못해 안달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하고 가슴을 치는 세리와, “저는 세리와 같지 않고 일주일에 두 번씩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하고 자랑하는 바리사이 중 누가 하느님께 의롭게 인정받은 사람인가?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집니다.
자기만 옳은 줄 믿는 것은 무지에서 나오는 과오요, 남을 업신여기는 것은 교만에서 오는 죄입니다. 사람들은 겉모양을 보고 ‘의인이다, 불의한 사람이다.’ 판단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속마음을 보십니다. 인간은 겉모양을 보지만 하느님께서는 속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자신을 포장하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주님의 눈에 들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사람에게 기대지 말고 주님께 의탁해야 합니다.
루카 복음에 보면 베드로는 밤새 고기잡이에 실패하였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후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고 그것을 통해서 주님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깊은 곳에 그물을 치라는 한 말씀에 예수님을 모시기에 너무도 부족한 자신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더 이상 고기가 보이지 않고 주님만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루카5,8).하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도 주님 안에서 자신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람들은 장애물이 밖에 있으면 쉽게 피해 다닙니다. 그러나 장애물이 자기 안에 있으면 그 장애물을 피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맙니다. 밖에 있는 큰 장애물보다 안에 있는 장애물이 더 무섭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장애를 거두어 주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나의 장애를 없애 주시고 나를 통하여 당신의 일을 하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뜻에 응답함에 있어서 주저함이 없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행여 자기만 옳다는 과오나 남을 무시하는 죄는 짓지 않기를 바랍니다. 모쪼록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하는 은총의 사순절이 되길 희망합니다.
‘자기를 높이면 남들이 낮아지고 낮아진 사람들이 그를 또한 끌어내립니다. 자기를 낮추면 남들이 높아지고 높아진 사람들이 그를 더욱 높여 올립니다. 주는 대로 받는 것이 세상의 어김없는 법칙이기 때문입니다’(이현주). 마리아는 외쳤습니다.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 마음 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루카 18,13)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에는 대조를 이루는 두 인물, 곧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여기는 죄인인 바리사이와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여기는 의인인 세리가 있습니다.
그들은 뭐가 서로 다른 걸까요? 대체, 무엇이 이들을 서로 다르게 만드는 걸까요?
그들은 보는 ‘눈’이 서로 달랐습니다.
첫째,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달랐습니다.
한편에는 자신을 의롭다고 보는 눈이고, 다른 한편에는 자신을 죄인이라고 보는 눈이 있습니다. 곧 자신을 높이는 눈이 있고, 자신을 낮추는 눈이 있습니다.
둘째, 타인을 보는 눈도 서로 달랐습니다.
한편에는 타인을 업신여기는 눈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타인을 중히 여기는 눈이 있습니다.
꼿꼿이 서서 하늘을 향하는 눈이 있고,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눈이 있습니다. 그래서 타인의 가슴을 치는 이가 있고, 자신의 가슴을 치는 이가 있습니다.
셋째, 눈이 누구를 향하여 있는지가 달랐습니다.
바리사이는 자신을 향하여 있고, 세리는 하느님을 향하여 있습니다.
바리사이는 스스로 의롭다 자신하고 혼자말로 기도하지만, 세리는 자신의 가슴을 치며 하느님을 향해 기도합니다.
그렇습니다. “바리사이는 혼자말로 기도했습니다.” 이 말의 원어를 직역하면, “자신을 향해 기도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루카 18,11)라고 말하지만, 실은 긴 독백으로 하느님께 설교하려 들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자신을 위해 있어야 했습니다.
곧 하느님이 자신의 가치 확인과 자화자찬을 위해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우러르기보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자신을 앞세웁니다.
그러나 세리는 하느님을 향하여 있으며, 자신과 하느님의 거리를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그분을 감히 올려다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분 앞에서 자신이 진실로 누구인지, 곧 죄인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가슴을 치고. 회개의 마음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에 자신을 맡깁니다.
시나이의 성 이사악은 말합니다.
“자신의 죄를 아는 이가 기도로 죽은 이를 살리는 이보다 위대하다.
~자기 자신 때문에 한 시간 동안 우는 이가 온 세상을 통치하는 이보다 위대하다.
자신의 나약함을 아는 이가 천사들을 보는 이보다 더 위대하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겸손’은 하느님 앞에 있기에, 자기를 비하하거나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자비가 필요함을 알고 그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낮추되, 결코 자신을 하잖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을 중히 여기고 자비를 구하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도 귀중하게 여기고 중시합니다. 그러기에, 겸손은 자신을 낮추기만 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우러르며 존경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중시 여기지 않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실은,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중시 여기지 않는 사람은 오히려 교만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니 언제나 주님 앞에 서 있고, 주님을 향하여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분의 자비를 입고서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자비가 아니면 살 수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필요한 것은 당신의 자비, 그 외엔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가슴을 치며 하느님을 향해 기도합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루카 18,13)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마치신 다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8,14)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8,14)
주님!
낮추는 이가 되게 하소서.
타인의 평가나 꾸짖음을 물리치지 않게 하소서.
인정할 줄을 알고 굽힐 줄을 알게 하소서.
타인을 차별하지도, 업신여기지도 않게 하소서.
존중하고 존경하게 하소서.
언제나 당신 앞에 서 있는 자 되게 하소서!
제 자신을 내세우지도, 숨기지도 않게 하소서.
용서를 청하고 자비를 구하게 하소서.
, 주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아멘.

-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18,9-14: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폄하하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이다. 내가 먼저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신학을 공부하여 교사가 되었기 때문에 이런 교만에 빠진 사람들이 염두에 두어야 할 말씀이다. 바리사이는 하느님께 기도하러 간 사람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가 하느님을 향하여 감사기도를 바친다고는 하지만 실은 자기 자신을 향하여 기도한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찬사를 하느님 앞에 올리러 간 사람이었다.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한다는 핑계로 허영에 빠져 교만하고 이기적인 사람이 된다면 단식이 그에게 무슨 득이 되며, 십일조를 바치면서 자랑하고 그것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는 남을 비난하고 단죄한다면 그 십일조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바리사이는 계속 ‘나는 다른 인간들과 다르다.’라고 칭찬하기에 바쁘다. 바리사이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 자신의 교만을 늘어놓고 있다.
주님의 이름을 고백하며 찬양의 제물을 하느님께 바치는 사람은 자신 안에 숨어있는 사악한 자를 경계해야 한다. 우리가 감사 찬양을 드리는 바로 그때 우리를 덮치려고 사탄이 몸을 숨기고 있다. 바리사이에게 한 것처럼 행실로 우쭐거리게 하지 않고 다른 교만으로 우리를 취하게 할 것이다. 아마 아직도 자신의 행위로 우쭐거리게 하는 것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세리는 감히 눈도 들지 못하고 ‘멀찍이 서서’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기죽은 태도가 보이는 것 같다. 하느님의 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방종한 삶을 살아온 자신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이 두려웠던 것이다. 우리는 그의 몸짓에서 자신의 악행을 책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어리석은 바리사이는 뻔뻔스럽게 눈을 치켜뜨고 꼿꼿이 서서 제 자랑을 했지만, 세리는 자신의 행동을 부끄럽게 여긴다. 자기 죄를 고백하고 의사에게 자신의 병을 알리며 자비를 간청한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주님께서는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14절) 바리사이가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다. 그는 교만하게 자기 자랑을 했고 세리는 겸손하게 자기 죄를 고백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바리사이의 자선보다 세리의 고백을 더 기꺼워하신 것이다.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돌아간 것은 그가 겸손했기 때문이다. 바리사이의 교만한 기도는 하느님의 진노를 불러 일으켰고, 세리의 겸손한 기도는 더 큰 힘을 발휘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이웃과 비교하여서는 안 된다. 우리가 보고 또 비교하며 따라야 할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다. "내가 남들만큼 선한가?"가 아니라, "내가 하느님 앞에 선한가?"이다. 즉 우리들의 선행이나 신앙생활이나 그 기준, 척도는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마 우리가 우리의 삶을 예수님의 생과 비교할 때는 우리도 "오, 하느님! 이 죄안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할 것이다. 이 사순절이 우리에게 큰 은총의 기간이 될 수 있도록 이런 삶을 살자.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루카 18, 14)
-한상우신부-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오가며 사는 우리들
신앙입니다.
나의 기도는
어떠한지를 다시금
성찰하게 됩니다.
하느님 앞에서
고개 숙이는
요즈음 우리들의
간절한 시간입니다.
기도안에서
제자신의 허물을
보게됩니다.
마주치고
마주하며 살아가는
우리들 모든 시간이
우리를 보게만드는
기도입니다.
세리의 뜨거운
기도를 기억합시다.
가장 약한
부분이
가장 강력한
기도가 됩니다.
저마다 삶의
무게를 안고
기도로
살아가는
우리들 삶입니다.
기도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기회를 얻는
것입니다.
다시 태어나고
다시 새로워지는
참된 기도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어떠한
기도를 바치며
살아가는지요.
온 마음을 다해
기도드립니다.
제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기도의 은총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저는 한 가여운 사람을 만납니다. 바로 바리사이입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한 사람은 세리였다"(루카 18,10).
유다 사회에서 극과 극을 이루는 두 인물이 성전 안에 함께 있습니다. 경건하고 열심한 모범적 사회구성원 바리사이와, 동족을 착취해 이민족의 배를 불려주고 자기도 한몫 단단히 챙기면서 손가락질 받는 세리입니다. 바리사이와 세리 사이에는 무수한 층위의 보통 사람들이 존재할 겁니다. 이 둘은 그들 모두를 아우르는 표본 집단일 뿐이지요.
믿는 사람은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기도는 낯설지 않습니다. 누구에게 비느냐에 따라 종교명이 달리 붙을 뿐이지요. 종교성은 인간이 지닌 보편적 특징 중 하나입니다. 그러니 기도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루카 18,14).
하느님 앞에서 하나 부끄러울 것 없는 바리사이와 고개도 못 들 정도로 자신이 없는 세리가 크게 대비됩니다. 세속적 시각에서는 바리사이가 합격, 세리는 불합격일 터인데 예수님은 반대로 말씀하시네요.
이 둘을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눈을 관상합니다. 그토록 당당한 바리사이를 향해 하느님은 애처로움과 안타까움이 가득한 눈길을 보내십니다. 왜 그러실까요? 하느님은 바리사이와 그의 기도를 외면하거나 내치신 게 아닙니다. 그가 전혀 다른 곳을 향해 혼잣말을 한 것일 뿐, 그는 기도하지 않았던 겁니다. 바리사이는 자기 자랑과 무용담과 공치사를 들어 줄 허공에, 자기가 만든 신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대화가 아니라 자기 만족적 혼잣말일 뿐이었지요. 그가 서 있던 곳이 아무리 성전이었어도 그는 하느님 앞에 있지 않았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8,14).
하느님,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낮추실 수 있는 최대치까지 스스로를 끌어내리신 분입니다. 창조가, 강생이, 십자가 제사가 말해 주는 역설이지요. 결국 무뢰한들과 같은 취급을 받으시고 가장 치욕적인 죽음을 당하신 그분은 가장 낮아지신 까닭에 가장 높아지셨습니다.
불행히도 바리사이는 이를 모릅니다. 스스로 완벽한 신앙인이라 자부하는 그는 너무 높이 있어서 낮은 곳에 계신 하느님께 도무지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가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러니 주님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호세 6,3).
제1독서에서 호세아 예언자는 하느님을 제대로 알자고 이스라엘을 독려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배반과 고집은 많은 경우 그분을 제대로 모르는 무지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호세 6,6).
우리도 일껏 상대방에게 잘 해줬는데 반응이 맘에 들지 않을 때가 있지요? 하느라고 했지만 상대방이 진정으로 바라는 게 뭔지 모르면서 내 식대로 했기 때문에 좋은 소리를 못 들은 경험 말입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신 것 같습니다. 정작 그분은 당신 백성의 "마음"을 바라시는데 백성은 율법이 정하는 황소나 양, 곡식으로 적당히 때우고는 마음은 온통 저만 잘 사는 데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순간이 닥쳐도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은 애틋한 아버지, 사랑하는 신랑이 아니라 저 멀리 계시는 심판자일 뿐이었으니까요.
그래서 하느님은 나를 좀 알아달라고 호소하십니다. 다른 것 필요 없고 그저 "하느님을 아는 예지"를 바라십니다.
사실 오늘의 주인공 바리사이는 세상 눈으로 죄인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리보다 열심히 지킬 것 지키고 사는 사람이니까요. 단 하나 그에게 문제가 있다면 하느님을 몰랐다는 점입니다. 세리는 알고 있는 하느님, 판단하지 않고 단죄하지 않는 자비의 하느님, 용서의 하느님을 바리사이는 몰랐습니다. 그리고 이 차이는 영의 세계에서 상당히 다른 결과를 가져옵니다.
예수님은 결코 세리처럼 살라고 말씀하시는 게 아닙니다. 어떤 삶을 살더라도 "고쳐 주시고 싸매 주시고 살려 주시고 일으키시는"(호세 6,1-2 참조) 하느님을 알고 믿으라고 하시는 겁니다.
우리 중 누구도 하느님 앞에 완전한 존재는 없습니다. 알고도 짓고 모르고도 짓는 허물들을 문득문득 깨달을 때마다 지치지 않고 주님께 돌아가려면, 너른 그분 품에 달아들려면 먼저 그분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미사 참여가 어려워 실감이 덜 날 수도 있지만 사순절이 중반을 훌쩍 넘었습니다. 그분을 아는 지식에서 나는 바리사이와 세리 사이에 어디쯤 서 있는지요? 나는 과연 주님의 용서와 자비를 진짜로, 진짜로, 진짜로 믿는지 곰곰이 숙고하는 하루 되시길 기원합니다.

의롭다 자부하는 죄인은 아닐까?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28589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루카 18,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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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반응하는 대상이 나의 수준이다.
오래전 미국의 홀트 이반 판사는 살인을 저지른 27세의 한 여인에게 중형을 선고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가슴 아파했습니다. 살인의 동기가 너무 사소했기 때문입니다. 그 여인은 이웃과 한화로 100원도 안 되는 5센트를 서로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다가 화를 참지 못하고 총으로 상대를 쏘았던 것입니다.
5센트로 반응하고 있다는 것은 내가 그 수준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그 수준에 맞게 살고 죽게 됩니다. 우리가 그런 것에 반응하는 수준이 아니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5센트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듯 그러한 수준의 사람들이 사는 삶에서도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내가 반응하는 대상을 보고 내가 어느 수렁에 빠져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빨리 믿음의 줄을 잡고 그 수렁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내가 무엇에 반응하는지 항상 살핍시다. 자신을 보고 짖는 개에 반응하면 자신도 개가 될 뿐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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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뭐가 서로 다른 걸까요? 대체, 무엇이 이들을 서로 다르게 만드는 걸까요?
그들은 보는 ‘눈’이 서로 달랐습니다.
첫째,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달랐습니다.
한편에는 자신을 의롭다고 보는 눈이고, 다른 한편에는 자신을 죄인이라고 보는 눈이 있습니다. 곧 자신을 높이는 눈이 있고, 자신을 낮추는 눈이 있습니다.
둘째, 타인을 보는 눈도 서로 달랐습니다.
한편에는 타인을 업신여기는 눈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타인을 중히 여기는 눈이 있습니다.
꼿꼿이 서서 하늘을 향하는 눈이 있고,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눈이 있습니다. 그래서 타인의 가슴을 치는 이가 있고, 자신의 가슴을 치는 이가 있습니다.
셋째, 눈이 누구를 향하여 있는지가 달랐습니다.
바리사이는 자신을 향하여 있고, 세리는 하느님을 향하여 있습니다.
바리사이는 스스로 의롭다 자신하고 혼자말로 기도하지만, 세리는 자신의 가슴을 치며 하느님을 향해 기도합니다.
그렇습니다. “바리사이는 혼자말로 기도했습니다.” 이 말의 원어를 직역하면, “자신을 향해 기도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루카 18,11)라고 말하지만, 실은 긴 독백으로 하느님께 설교하려 들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자신을 위해 있어야 했습니다.
곧 하느님이 자신의 가치 확인과 자화자찬을 위해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우러르기보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자신을 앞세웁니다.
그러나 세리는 하느님을 향하여 있으며, 자신과 하느님의 거리를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그분을 감히 올려다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분 앞에서 자신이 진실로 누구인지, 곧 죄인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가슴을 치고. 회개의 마음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에 자신을 맡깁니다.
시나이의 성 이사악은 말합니다.
“자신의 죄를 아는 이가 기도로 죽은 이를 살리는 이보다 위대하다.
~자기 자신 때문에 한 시간 동안 우는 이가 온 세상을 통치하는 이보다 위대하다.
자신의 나약함을 아는 이가 천사들을 보는 이보다 더 위대하다.”
-이영근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