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3월 20일 사순 제3주간 금요일

Margaret K 2020. 3. 19. 19:05

2020년 3월 20일 사순 제3주간 금요일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마르코 12,28ㄱㄷ-34 )


You shall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with all your soul, 
with all your mind, 
and with all your strength.
The second is this:
You shall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There is no other commandment greater than thes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 호세아의 외침은 하느님의 용서를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지은 백성들이 진심으로 뉘우치고 당신께 돌아올 때 그들에게 복을 내리시는 분으로 표현됩니다.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이 살게 하시며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강복하시는 모습은 백성들에게 화해하시는 하느님으로 자리 잡게 합니다. 이런 하느님의 호소에 백성들은 “저희 손으로 만든 것을 보고, 다시는 ‘우리 하느님!’이라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성경에서 인간의 손으로 만든 것은 우상 숭배를 일컫는 전형적인 표현입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향한 백성의 고백은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가장 큰 계명 안에서도 표현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가장 큰 계명 또는 황금률로도 불리는 이 계명은 단순합니다. 모든 것을 다하여 한 분이신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이 계명은 구약 성경의 요약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분이시고 다른 신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계셔야 할 자리에 무엇이든 다른 것이 놓인다면 그것은 우상 숭배입니다. 인간의 손으로 만든 것을 신처럼 섬기는 것입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말을 행동으로 드러내는 것이 이웃 사랑입니다. 더욱이 그냥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개의 계명처럼 들리지만 실상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의 실천적인 모습입니다. 여기에는 ‘나’ 자신도 포함됩니다. 우리는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패션 잡지 ‘컬러스’는 하나의 설문 조사했습니다. 그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에게 천국은 어떤 모습인가요?”

스스로 천국, 하느님 나라가 어떤 모습일지 생각해보십시오. 한가운데에 하느님께서 계시고 구름 위에서 사는 평화로운 모습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하느님 나라를 상상하기도 하지만, 지금 사는 이 세상의 모습과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천국에서는 남자들이 요리해요.”

“일광욕해도 햇볕에 살이 타지 않고, 산소통 없이 물속에서 자유로울 수 있어요.”

“초콜릿을 마음껏 먹어도 살이 찌지 않아요.”

사람들은 일상의 좋았던 그리고 사랑하는 부분을 천국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하긴 하느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을 뿐,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아주 작고 소소한 일상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곳이 하느님 나라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잡지의 편집장인 디자이너 터보 칼맨은 이렇게 말합니다.

“천국은 일상에서 즐거움을 찾는 일.”

지금의 자리가 하느님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곁에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사랑입니다. 내가 사랑을 하고 또 사랑을 받고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니까요.

율법 학자 한 명이 예수님께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 질문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두 계명에 달려 있다고 대답하십니다. 이 율법 학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하면서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다고 대답하지요. 이때 예수님께서는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라고 이르십니다.

바로 지금 사랑하며 사는 삶이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에 사는 사람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사랑에 맞춰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나 자신이 하는 사랑에 대해 묵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척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나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욕심 가득한 사랑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육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진정한 사랑을 실천해야지만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질 수 있으며, 바로 지금 이 순간에 하느님 나라를 즐기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발견은 새로운 땅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으로 보는 것이다(프루스트).



삶의 목적.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갱년기’라는 단어는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전신적 노화 현상으로 흥분, 두통, 불면 등의 이상 증세가 나타나지요. 그러나 사실 남성에게도 옛날부터 있었고 지금도 다가오는 증상이라고 합니다. 단지 남자라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는 풍조 때문에 참고 넘겼을 뿐이라고 합니다.

이런 갱년기가 오게 되면 무기력함이 동반됩니다(참고로 저 역시 갱년기에 해당하는 45~55세 범주 안에 들어왔지만 아직은 전혀 느끼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삶의 목적이 무의미해지면서 점점 분노가 찾아오고 걱정으로 밤에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는 불면증을 겪게 된다고 하더군요.

미국 미시간대 연구 팀에 따르면 은퇴한 50세 이상 중년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삶의 목적이 있느냐 하는 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결론을 발표했습니다.

“목적이 있는 사람은 마음가짐이 몸의 면역 반응을 끌어내는 듯 했다. 이는 행복한 사람이 오래 사는 것과 같다.”

삶의 목적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우리 삶의 목적이 하느님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계속 말씀하셨던 것이 아닐까요?                   

망치를 쥐고 있는 사람에겐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인다

-전삼용신부-


평생을 인간의 욕구에 대해 연구한 애이브럼 매슬로우는 사람의 욕구를 5단계로 나누었습니다. 가장 밑의 1단계는 ‘생리적 욕구’로 먹고 마시는 등의 생존을 위한 욕구가 자리합니다. 그다음도 이와 비슷한 생존 욕구인데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자리와 지위를 차지하려 하는 ‘안전욕구’입니다. 제3단계도 생존 욕구입니다. 하지만 가족과 공동체, 사회에 소속되어 사랑을 받고 보호를 받기 위한 ‘소속과 애정욕구’입니다. 4단계도 이와 비슷한데 애정을 넘어 인정받으려는 ‘존경욕구’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5단계는 한 인간으로서 자신을 완성하려는 ‘자아실현 욕구’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의 주장에서 중요한 것은 1단계가 해결되어야 2단계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2단계의 안전욕구와 3단계의 애정욕구에 관한 실험 중에 ‘프라이팬 모성애’ 실험이 있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유대인을 상대로 한 고문으로 점점 온도가 높아지는 바닥에서 결국 엄마는 아기를 밟고 올라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실험을 일본도 했는데 731부대의 ‘물통 모성애’ 고문이라고 합니다. 물이 점점 차오르는 상황에서도 결국 엄마가 아기를 밟고 수면 위로 올라와 숨을 쉬었다고 합니다. 이런 비인간적은 행위를 통해 얻어 낸 결론이 인간은 생존 욕구가 해결되지 않으면 결코 사랑의 욕구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매슬로우는 “망치를 쥐고 있는 사람에겐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인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매슬로우가 말하는 망치는 바로 욕구입니다. 자신이 추구하는 욕구가 자신을 지배하게 되고 이성도 그 욕구에 따라 작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이웃을 심판하지 않고 사랑해야지!’라고 결심해도 잘 되지 않는 이유는 망치를 내려놓지 않고 생각만 바꾸려 하기 때문입니다. 망치를 내려놓으면 생각도 바뀝니다. 생각은 욕구에 지배당합니다. 사람들은 ‘망치로 어떤 못을 때릴까?’라는 생각만 하면서도 깊은 숙고를 하는 사람이라 착각합니다. 망치를 쥐고 있는 상태에서 하는 모든 생각은 자신을 살리려고 이웃을 이용하려는 것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러다가 자신도 망치에 맞습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망치를 쥐고 태어나는데 그것이 생존욕구입니다. 생존욕구는 이웃을 죽이는 욕구입니다. 동물들은 타자의 생명을 먹으며 자신의 생명을 유지합니다. 이 생존욕구가 인간 안에서도 일어납니다. 생존욕구가 지배하면 항상 이웃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으로만 살아야 합니다.

      매슬로우는 인간의 힘으로 이 생존욕구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절대 인간의 힘만으로는 생존욕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욕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교육을 받고 생각만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생각은 욕구를 따르기 때문입니다. 욕구를 따르는 생각이 행동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욕구를 먼저 변화시키지 않고 생각만 바꾸려다가는 사람 흉내 내는 원숭이가 됩니다. 욕구는 원숭이인데 행동만 사람처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를 지배하는 욕구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욕구는 ‘자기정체성’에 의해 결정됩니다. 자신이 누구라는 정체성이 욕구를 바꾸는 것입니다. 생존하고 싶은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라는 정체성을 갖고 나서는 자식을 위해 생명을 포기하기까지 합니다. 혹은 1년을 더 살거나, 지금 죽고 5억을 선택하거나 하라고 할 때, 아이들은 하나같이 1년을 더 살기를 선택하지만, 아버지들은 자신들이 아버지이기 때문에 1년을 더 사느니 자녀들을 위해 지금 죽어 5억을 받는 것을 선택합니다. 이런 사랑은 자신들이 부모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가졌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누구인가?’라는 자기 정체성은 무엇에 의해 결정될까요? 자기 정체성은 ‘믿음’에 의해 결정됩니다. 자신이 누구라는 자기 정체성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자신에게 준 믿음을 받아들임으로써 결정되는 것입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는 늑대로부터 그 정체성을 받아 자신이 늑대인 줄 압니다. 그러면 늑대의 본성이 그 아이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본성이 채워질 때 행복하다고 믿습니다.

      모든 인간은 부모로부터 ‘인간’이란 자기 정체성을 물려받습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기에 ‘인간’이란 자기 정체성은 곧 인간의 ‘본성’이 됩니다. 본성은 태어날 때 부모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인간이라는 이 믿음은 인간의 본성, 즉 인간의 욕구에 사로잡혀 살게 만듭니다. 인간은 남을 심판하고, 육체의 욕망을 채우며, 더 소유하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라는 정체성은 자신들의 인간인 부모에게서 받는 본성입니다. 자신을 인간이라고만 믿으면 여전히 망치를 쥐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아드님을 보내시어 당신이 우리 아버지가 되심을 믿게 하심으로써 우리가 사람의 자녀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임을 믿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정말 성체를 통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가 믿지 않을 수 없게 하셨습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는 망치를 내려놓고 마치 하느님 사랑의 본성을 멍에로 맨 소처럼 살아가게 됩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하느님의 본성, 하느님의 욕구에 지배받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당신의 멍에를 매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비로소 안식을 얻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분의 멍에는 그분의 욕구입니다. 그분의 욕구를 우리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 사랑의 욕구에 지배받으면 이웃을 어떻게 행복하게 해 줄까만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계명의 역할입니다. 계명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두 개로만 나뉩니다. 계명은 하느님 자녀의 정체성을 지닌 이들에게 주어지는 멍에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의 도구로 삼으셔서 이웃을 행복하게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소’입니다. 소는 주인의 멍에에 가하는 힘에 따라 움직이기만 하면 됩니다. 소가 망치를 쥐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종이 될 때야만 그 지겹던 이웃을 심판하던 망치가 사라집니다. 그래서 비로소 안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은 왜 이 계명들을 가지고도 그렇게 살지 못했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망치를 내려놓지 않고 그와 반대되는 사랑의 계명을 따르려는 모순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으로 새로운 망치를 만들어 자신도 그러면서 그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때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망치를 쥐여준 장본인은 ‘자아’라는 이름으로 우리 안에 숨어있습니다. 따라서 사랑이라는 하느님의 멍에는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지 않고서는 나에게서 실현될 수 없는 욕구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사람의 자녀라는 믿음은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신앙생활 해 봐야 망치로 계속 사람을 치면서도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다고 착각하며 살게 됩니다.

      나를 죽이고 그리스도께서 살게 하는 것, 이것이 망치를 쥐고 태어나 원죄에서 벗어나 다시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되는 자격을 얻는 유일한 길입니다. 매슬로우가 불가능하게만 여겼던 그 다양한 망치들을 내던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를 믿어 나를 죽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당신 욕구를 실현하게 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이해한 율법학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조재형신부-


신학생들을 위해서 피정 지도할 때가 있었습니다. 8일 동안 학생들과 함께 있으면서 같이 기도하고, 묵상하고, 산책하면서 지냈습니다. 한 신부님께서 사제들의 모임방에 선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성당과 성화를 주제로 한 퍼즐이었습니다. 신부님들은 퍼즐을 맞추면서 자칫 무료한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피정이 끝날 때쯤이면 퍼즐이 완성되었고, 피정의 집에는 액자로 만들어서 드렸습니다. ‘최후의 만찬, 고딕 양식의 성당, 돌아온 아들과 같은 퍼즐을 만들어서 드렸습니다. 저는 집중력이 부족하고, 끈기가 적어서 퍼즐 완성에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지만 몇몇 신부님은 놀라운 집중력과 상상력으로 퍼즐을 맞춰나갔습니다. 전체 퍼즐을 맞추기 전에 색깔별로 분류를 하였습니다. 모양별로 분류를 하였습니다. 맞추기 비교적 수월한 모서리 면부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시작하면 하나 둘 모습이 나타나고, 마지막 하나의 퍼즐을 맞추게 됩니다.

 

중국에서 시작한 신종코로나 바이러스가 한국과 일본에도 큰 피해를 주었습니다. 지리적으로 가깝기도 하고, 경제와 문화 교류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신종코로나 바이러스라는 퍼즐을 어떻게 맞추는 것이 좋을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나친 공포와 두려움은 퍼즐을 맞추는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특정한 집단이나,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도 퍼즐을 맞추는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보건 당국의 책임을 추궁하고, 비난하는 것도 퍼즐을 맞추는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을 정쟁의 도구로 삼는 것도 퍼즐을 맞추는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원인을 규명하고, 환자를 돌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신종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치료제를 개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증상이 의심되는 사람은 자가 격리를 하고, 보건당국에 신고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정부는 정보를 신속하게 공개하고,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보건당국과 정부의 지침을 따르는 것이 필요합니다. 전염력이 강한 독한 감기라 생각하고, 조기에 치료받으면 완치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퍼즐을 맞추는 최상의 방법을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모두 서로에게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주는 겁니다. 바이러스는 물리쳐야 하지만,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은 사랑해야 할 우리의 이웃입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신종코로나 바이러스라는 퍼즐이 빨리 맞춰지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은총을 저희에게 인자로이 내려 주시어 언제나 저희가 지나친 욕망을 끊고 주님의 거룩한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게 하소서. 그들은 다시 내 그늘에서 살고 다시 곡식 농사를 지으리라. 그들은 포도나무처럼 무성하고 레바논의 포도주처럼 명성을 떨치리라. 내 백성이 내 말을 듣기만 한다면, 이스라엘이 내 길을 걷기만 한다면, 내 백성에게 나는 기름진 참밀을 먹이고, 바위틈의 석청으로 배부르게 하리라.”


우리는 하느님의 강렬한 빛과 은총으로 인해 성화(聖化)되고 의화(義化)됩니다!

-양승국신부- 

 

외적으로 드러난 것으로만 판단할 때, 오늘 비유에 등장하는 바리사이의 모습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기도를 통해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잘 소개했습니다.

 

 그는 강도짓이나 불의나 간음과는 담을 쌓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그는 일주일에 두번 단식했고 소득의 실일조를 꼬박꼬박 바쳤습니다. 세상에 이런 훌륭한 신앙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바리사이의 탁월한 신앙생활은 절대로 과소평가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가운데 그 정도로 철저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내린 결론은 꽤나 의외의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에 있어서 귀감이 되는 대단한 신앙인 바리사이를 칭찬하거나 격려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이런 특별한 선언을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복음 18장 14절)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 비유를 통해 우리는 다시 한번 외적으로 드러난 것보다도 마음을 중요시 여기시는 주님, 교만한 인간의 우월감과 자만심을 여지없이 깨트리시는 통쾌한 주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가 지니고 있었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다 좋았지만 딱 한가지 치명적인 결함, 주님께서 가장 혐오하시는 결점을 지니고 있었으니, 그의 과도한 허영심과 교만함이었습니다.

 

 바리사이가 지니고 있었던 과도한 선민의식, 우월의식, 자만심은 공들여 따놓은 점수를 다 잃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주님으로부터 선택받았으며 총애를 받는 맏아들이라는 자의식이 지나쳤습니다.

 

 신앙생활 안에서 정말 기본적이고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가 물었을 때, 그것은 다름 아닌 겸손의 덕입니다. 그 겸손의 덕은 성전 안으로 들어갔던 또 다른 인물인 세리를 통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세리는 자신이 얼마나 주님 앞에 비참하고 나약한 존재인지를 잘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비록 부끄러운 삶을 살아가지만 언젠가 주님 자비에 힘입어 회개의 삶으로 나아가겠다는 간절한 바람을 안고 있었습니다.

 

 한없이 부족한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백성의 일원으로서 성전으로 가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자비를 구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탈출구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 인간 존재는 하느님의 강렬한 빛과 은총으로 인해 성화(聖化)되고 의화(義化)됩니다. 근본적인 속성상 우리 인간은 스스로 성화되거나 의화되기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오직 유일하게 거룩하신 분 하느님에 의해서 성화와 의화가 가능합니다.

 

 오늘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 비유 말씀은 좁은 의미의 특별한 성소(聖召)를 살아가고 있는 봉헌생활자들에게는 아주 강력한 경고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자칭 하느님과 가까이 살아가는 사람들, 성전 안에 몸담고 살아가는 사람들 역시 거듭 성찰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즉시 타성에 빠지기 쉽습니다. 거룩한 소명의식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나태한 직업인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거룩해보이나 내실이 부족한 속빈 강정같은 존재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무엇보다도 큰 어려움은 영적으로 극단적 결핍 상태 속에 살아갈 때조차도 외적으로는 거룩함을 가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외면이 아니라 내면, 형식이 아니라 내용을 중요시 여기시는 하느님 앞에 솔직한 우리의 내면 상태를 열어드려야겠습니다. 텅 비어버린 공허한 내면을 어떻게 채워나갈 수 있겠는지 주님께 도움을 청해야겠습니다.


실천함으로써 완성됩니다 

 -반영억신부-

 

으뜸가는 계명이 무엇인가를 논하는 일은 예수님시대 전후에 종종 있었던 일입니다. 유다교에는 613개 조항의 계명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248조항은 명령, 365조항은 금령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많은 계명 가운데 어느 것이 중요한지에 대한 논의가 자연스럽게 생겨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잡다한 계명들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계명으로 요약하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불가분의 관계로 결합시키셨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12,30. 참조 : 신명6,4-5)는 것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12,31. 참조: 레위19,18).는 사랑의 이중계명은 십계명의 핵심정신이고,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의 근본정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전 생애는 하느님 아버지와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이웃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신 헌신으로 요약됩니다(손희송).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이중계명에 대하여 동의를 표하는 율법학자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마르12,34).하고 이르셨습니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고 하였지 아직 들어간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계명에 대하여 슬기롭게 말하고 동의한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말씀입니다. 천상의 나라는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실천함으로써 완성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바로 그 자리가 하느님 나라요, 알고만 있다면 멀리 있지 않은 밖이라는 사실입니다. 운동경기에서 골인을 한 것과 골인할 번한 것은 분명 다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자캐오 이야기(루카19,1-10)를 기억하시지요? 예수님께서 나무에 오른 자캐오에게 “오늘 이집에 구원이 내렸다.”고 선언하셨고 율법학자에게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학자는 학자답게 이론으로 알고 있었고, ‘훌륭하십니다. 과연 옳은 말씀입니다.’라고 말하며 감히 예수님을 평가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캐오는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하며 즉시 변화된 행동을 보였습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1요한4,12).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2,17). 그러므로 사랑에 목말라 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마르 12,29)-

-이영근신부-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 신앙의 원천을 밝혀줍니다.

곧 우리 신앙의 근거가 되는 그 바탕이 무엇인가를 말해줍니다.

오늘 <1독서>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호세 14,10)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화답송>에서는 내가 주님, 너희 하느님이다.”(81,11)라고 노래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마르 12,29)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행동의 원리로서의 계명을 말씀하기 전에, 먼저 존재의 원리를 말씀하십니다. 곧 행동규범으로 사랑을 말씀하시기에 앞서, 왜 사랑을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밝히십니다.

곧 하느님께서 한 분이신 우리 주님이라는 그분의 존재차원을 밝히십니다.

동시에, 이는 우리의 존재의 차원도 밝혀주십니다.

곧 우리가 그분의 것, 그의 소유라는 것을 밝혀줍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슬기롭게 대답하는 율법학자에게 너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마르 12,34)고 할뿐 하느님 나라에 들어와 있다고는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아마도 율법학자에게 있어서 아직 사랑의 실천이 남아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는 아직 더 확장되어야 할 사랑의 계명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구약>사랑의 계명<신약>사랑의 새 계명으로 완성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구약>에서는 이웃 사랑을 동포 사랑으로 한정하면서(레위 19,18) 함께 사는 이방인들까지를 포함(레위 19,34)시키고 있다면,

<신약>에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루가 10,30-37)에서 보여주듯이 무제약적, 무차별적인 이웃에 대한 사랑을 말하고 있으며, 나아가서 원수까지도(마태 5,44) 포함하는 완전한 사랑을 말합니다(마태 5,48).

<구약>에서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레위 19,18)하여 이웃 사랑의 시금석으로 자신에 대한 사랑을 제시하고 있는 반면에,

<신약>에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15,12)하여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웃사랑의 시금석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근본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신명기>(6,4-5)하느님 사랑<레위기>(19,18)이웃 사랑을 한데 묶으시면서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요구하십니다.

곧 새로운 변혁, 새로운 틀의 패러다임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는 관점입니다.

아니, 애시 당초 이란 없다는 관점입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이 있을 뿐! 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자매가 있을 뿐이라는 관점입니다.

우리가 한 몸이라는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야, 이웃도 내 몸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은 흔히 생각하는 남에게 베푸는 시혜나 자선이 아니라, 바로 한 몸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같아집니다.

물론, 이 때 한 몸이란 너의 몸이 내의 몸이고 나의 몸이 너의 몸이라는 혼합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요한 바오로 2세 교종께서 [새 천년기](24)에서 표현한 대로, 나의 일부인 형제들이란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한 몸의 지체로서, 나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나의 일부이기에, 나의 일부인 형제의 아픔이 바로 나 자신의 아픔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형제가 나의 일부이듯 하느님의 일부가 되고, 형제 사랑이 곧 하느님 사랑이 되고, 하느님 사랑이 곧 형제 사랑이 됩니다.

 더 나아가서는 형제가 곧 하느님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석 유영모 선생님의 표현을 빌려본다면,

남편에게는 아내가 하느님이요, 상인에게는 손님이 하느님이요,

 본당신부에게는 본당신자들이 하느님이요,

대통령에게는 국민이 하느님이요,

나에게는 공동체 식구들이 하느님이 됩니다.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이처럼 사랑의 이중계명은 새로운 관점, 새로운 틀을 요구합니다.

인 이웃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의 전환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소명입니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


주님!

당신 사랑으로 새로 나게 하소서!

내 자신을 통째로 바꾸어 새로워지게 하소서!

이웃을 타인이 아니라, 내 자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그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하소서.

이웃 안에서, 주님이신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아멘.


사랑 

-송영진신부-


“율법 학자 한 사람이 ...... 그분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28-31)”

율법학자는 ‘첫째가는(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계명의 근본정신’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계명들을 ‘더 중요한 계명’과 ‘덜 중요한 계명’으로 구분하지 말고,
계명의 근본정신을 생각하면서
모든 계명을 똑같이 잘 실천하라는 가르침입니다(마태 5,17-19).
예수님께서는 ‘계명의 첫째’는(근본정신은)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시는데,
‘사랑’은 계명의 근본정신이기도 하고, 계명을 지키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사랑’은 신앙생활의 근본정신이기도 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이 가르침에 대해서, “그러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 사랑에 대한 정의(定義)는 없는데,
우리는 예수님 말씀을 그대로 사랑에 대한 정의로 삼을 수 있습니다.
“사랑이란,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섬기고 싶어 하는 마음이고,
또 그렇게 섬기는 일이다.”
이 정의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뿐만 아니라
이웃에 대한 사랑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 이 정의는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뿐만 아니라,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에도 해당됩니다.
여기서 ‘섬긴다.’ 라는 말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섬기는 것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전부를 주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섬기는 사람’으로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루카 22,27).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우리는 그 사람을 지극 정성으로 섬기게 됩니다.
이 말은, 부모와 자녀, 연인과 부부, 형제와 친구와 동료 사이의 사랑에
모두 적용되고, 교회에도, 국가와 민족에도 모두 적용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좋아하는 감정이나 소유욕을 사랑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사랑은(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감정의 영역에 속한 어떤 무엇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과 삶을 모두 바치는 ‘의지’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1요한 4,8-10).”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6).”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라는 말을 “사랑은 하느님입니다.”로 바꿀 수 있습니다.
사랑은 하느님이고(모든 것이고),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모든 것을 다 주고 싶어 하는 마음입니다.)
잃은 양을 애타게 찾는 ‘착한 목자’의 그 애타는 마음이 곧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내주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셔서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신 예수님이 곧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1요한 3,16).”
(예수님 덕분에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고,
사랑이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생활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면서, 그 사랑을 누리는 생활입니다.
따라서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어떻게 사랑하나?
요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1요한 5,3).”
“그분의 계명은 이렇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1요한 3,23).”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을 통해서 실현됩니다.
동시에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

(이웃을 외면하고 스스로 고립되어서, 혼자서만 신앙생활을 하고,
혼자서만 구원받으려고 하는 것은 ‘사랑 없는’ 태도입니다.
그 자신은 자기가 아주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생각은 착각일 뿐입니다.
사랑 없는 생활은 신앙생활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생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웃을 외면하는 것은 사실상 자기 자신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과 자기 사이에 높은 벽을 세워 놓고 자기 혼자서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영혼 구원도 외면하고 헛일을 하는 것입니다.)

계명에 관해서 예수님께 질문한 율법학자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자
예수님께서는,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를 칭찬하십니다(마르 12,34).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가 있다.”이기도 하고, “아직은 하느님 나라에 완전히 도착한 것은 아니지만
방향은 잘 잡고 있다.”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그 방향으로 끝까지 잘 가라는 칭찬과 격려의 말씀입니다.
또는 알고 있는 것은 정확하니까 그것을 잘 실행하라는
격려의 말씀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대해서, 또 사랑 실천에 대해서 올바르게 아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는 것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알고 있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그것은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르 12,28-34: 우리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니 그분을 사랑하라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28) 예수님께서는 모든 율법서와 예언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두 계명에 달려있다고 하신다. 이 사랑의 계명은 어떻게든 선을 행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랑이 없이는 선을 행할 수 없다. 모든 계명들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말하고 있는데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이러한 질문을 한 것이다.

 

예수님은 신명6,4를 인용하면서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29) 라고 대답해 주신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주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이다. 이 하느님은 살아있는 자들의 하느님이시며 인간을 지배하는 분이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30)고 하신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31)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과 연결되어 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를 모른 체하지 않고, 돈을 자기 몸보다 더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만물의 주님께서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해 자비롭게 행한 것을 바로 당신께 해드린 것으로 여기심을 알고 있다. 그리고는 열심히 그 선행을 실천한다.

 

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함께가 아니면 완전하게 표현될 수 없다. 이웃을 떠나서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고, 하느님을 떠나서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온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확증은 바로 우리 가운데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꾸준히 일하고 그들을 끊임없이 돌보아 주는 일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고 당신 계명을 지키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우리에게 요구하시지 않는다고 하신다.

 

한 분이신 하느님에 대한 친밀한 사랑을 알고 이웃 사랑이 자기 사랑처럼 진실해야 한다고 고백하며,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다고 말한 율법학자의 대답은 주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우리도 자비를 가로막는 판단은 하지도 말고 듣지도 않아야 한다. 자비는 모든 번제물괴 희생제물보다 낫기 때문이다. 사순절의 모든 삶은 바로 이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어야 한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34) 이 말씀은 율법학자가 하느님의 나라에서 아직도 떨어져 있음을 암시하는 말씀이다. 율법학자는 성경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 말씀을, 그 자비를 구체적으로 실행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아직 멀리 있는 것이다.

 

인간은 사랑하면서 상대를 닮아간다고 한다. 부부의 모습이 닮은 것도 서로간의 사랑이 그렇게 만드는 것일 것이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갈 것이다.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마르 12, 28)

-한상우신부-

생명을 깨우는
사랑의 계명입니다.

끝내 사랑한다는
이 한 마디를 남기고
떠나는 우리들
시간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은 분명
사랑입니다.

그 어떤 상황에도
버릴 수 없는
첫째 가는 사랑의
참된 계명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한자리에
모아들이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한도
끝도 없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삶의 가장
첫째가는 순서또한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으로
다시 시작하는
우리들 삶입니다.

너와 나 사이에
하느님 사랑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보다
더 강력한 힘은
없습니다.

힘들어도
살아갈 이유가
사랑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이 사순이
사랑의 참된
시간이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사랑을 위한
아픈 시간이며
사랑을 위한
첫째 계명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얼핏 듣기에 우리가 하느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제시하는 듯하지만, 곰곰이 머물러 보면 사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고 계신지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마르 12,28)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정말 몰라서 배우고 싶은 걸까요? 아니면 답을 훤히 알지만 예수님을 시험해 보려는 걸까요? 이도 저도 아니라면, 모든 계명을 아우르는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계명을 콕 집어 달라는 걸 보니 그동안 세부적인 조항들을 열심히 따지며 지키다가 제 풀에 지친 걸까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0).

이 말씀에 가만히 머무릅니다. 이 계명이 단순히 내 편에서 해야 할 절대 의무라면 부담스럽고, 늘 부족해 송구스럽고, 또 무겁게 느껴져야 할텐데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뭉클해지고 눈시울도 뜨거워집니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 계명이 나에게 부과된 의무이기 이전에 먼저 하느님께서 나에게 하고 계신 것이기에 그런 것 같습니다. 사실 이 계명은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법입니다.

주님은 나에게 다 주십니다(예수님께서 1인칭 단수인 "너"라고 하셔서 그대로 받았습니다). 당신 마음, 목숨, 정신, 힘을 다 내어 주십니다. 그렇게 나를 사랑하고 또 사랑하십니다.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호세 14,2).

제1독서에서는 호세아 예언자를 통해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이제 저희는 황소가 아니라 저희 입술을 바치렵니다"(호세 14,3).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화려하고 엄청난 제물이 아니라 우리 마음입니다. 소박하고 진솔한 사랑 고백이고 가난한 영의 기도입니다.

"나의 분노가 풀렸으니 이제 내가 반역만 하는 그들의 마음을 고쳐 주고 기꺼이 그들을 사랑해 주리라"(호세 14,5).

주님은 마치 실컷 죄 지으며 제멋대로 살던 우리가 이제 그만 당신께 돌아서려고 마음만 살짝 먹어도 당장 모든 걸 용서하려고 기다리시는 분 같습니다. 그분은 사랑하는 우리를 기다리며 언제라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는 분이십니다.

"이슬, 나리꽃, 싹, 아름다운 올리브 나무, 레바논의 향기, 내 그늘, 포도나무, 포도주, 열매..."

이어지는 주님의 축복들이 얼마나 생기 넘치고 찬란한지요. 이 모든 것이 죄로 기울어 등돌리고 있는 동안에는 볼 수 없었던 하느님의 아름다움입니다. 우리가 회개함으로써 이 모두를 얻는다기보다, 이 모두를 주시려는 하느님께로 방향을 돌리는 것이 회개가 아닐까 합니다. 바로 "내 것이 다 네 것"(루카 15,31)이었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내 백성에게 나는 기름진 참밀을 먹이고 바위틈의 석청으로 배부르게 하리라"(화답송).

마음을 다해 당신께 다가서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기름진 참밀은 빵의 형상으로 오시는 당신이십니다. 바위틈의 석청은 꿀보다 단 그분 말씀이시지요. 성체와 말씀!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가장 귀한 것을, 아니 당신을 통째로 주십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사랑은 하느님과 우리의 상호적 사랑입니다. 더할 수 없을 만큼 극진히 서로에게 쏟아붓는 사랑은 그래서 하나입니다. 사랑으로 하나 된 존재들에서 네 사랑과 내 사랑을 칼로 베듯 구분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랑에서 넘쳐 흘러나오는 이웃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 모상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계명 가운데 첫째라고 하십니다. 지식 안에 맴도는 것은 아직 사랑이 아닙니다. 화려한 언변으로 불러대어도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는 사랑은 주님만이 아십니다.

사랑하는 벗님! 온 존재를 바쳐 주님을 사랑하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그 사랑이 이웃으로 흘러 세상에 온기와 향기를 더하고 있으니 감사합니다. 어려운 시기를 함께 동행하며 진정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벗님이 있어 행복합니다. 고맙습니다.

대신사랑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28148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3월 9일 사순 제3주간 금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마르코 12,28ㄱㄷ-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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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은 일상에서 즐거움을 찾는 일.”
지금의 자리가 하느님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곁에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사랑입니다. 내가 사랑을 하고 또 사랑을 받고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니까요. 

바로 지금 사랑하며 사는 삶이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에 사는 사람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사랑에 맞춰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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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치를 쥐고 있는 사람에겐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인다

-전삼용신부-


평생을 인간의 욕구에 대해 연구한 애이브럼 매슬로우는 사람의 욕구를 5단계로 나누었습니다. 가장 밑의 1단계는 ‘생리적 욕구’로 먹고 마시는 등의 생존을 위한 욕구가 자리합니다. 그다음도 이와 비슷한 생존 욕구인데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자리와 지위를 차지하려 하는 ‘안전욕구’입니다. 제3단계도 생존 욕구입니다. 하지만 가족과 공동체, 사회에 소속되어 사랑을 받고 보호를 받기 위한 ‘소속과 애정욕구’입니다. 4단계도 이와 비슷한데 애정을 넘어 인정받으려는 ‘존경욕구’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5단계는 한 인간으로서 자신을 완성하려는 ‘자아실현 욕구’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의 주장에서 중요한 것은 1단계가 해결되어야 2단계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2단계의 안전욕구와 3단계의 애정욕구에 관한 실험 중에 ‘프라이팬 모성애’ 실험이 있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유대인을 상대로 한 고문으로 점점 온도가 높아지는 바닥에서 결국 엄마는 아기를 밟고 올라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실험을 일본도 했는데 731부대의 ‘물통 모성애’ 고문이라고 합니다. 물이 점점 차오르는 상황에서도 결국 엄마가 아기를 밟고 수면 위로 올라와 숨을 쉬었다고 합니다. 이런 비인간적은 행위를 통해 얻어 낸 결론이 인간은 생존 욕구가 해결되지 않으면 결코 사랑의 욕구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매슬로우는 “망치를 쥐고 있는 사람에겐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인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매슬로우가 말하는 망치는 바로 욕구입니다. 자신이 추구하는 욕구가 자신을 지배하게 되고 이성도 그 욕구에 따라 작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이웃을 심판하지 않고 사랑해야지!’라고 결심해도 잘 되지 않는 이유는 망치를 내려놓지 않고 생각만 바꾸려 하기 때문입니다. 망치를 내려놓으면 생각도 바뀝니다. 생각은 욕구에 지배당합니다. 사람들은 ‘망치로 어떤 못을 때릴까?’라는 생각만 하면서도 깊은 숙고를 하는 사람이라 착각합니다. 망치를 쥐고 있는 상태에서 하는 모든 생각은 자신을 살리려고 이웃을 이용하려는 것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러다가 자신도 망치에 맞습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망치를 쥐고 태어나는데 그것이 생존욕구입니다. 생존욕구는 이웃을 죽이는 욕구입니다. 동물들은 타자의 생명을 먹으며 자신의 생명을 유지합니다. 이 생존욕구가 인간 안에서도 일어납니다. 생존욕구가 지배하면 항상 이웃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으로만 살아야 합니다.

      매슬로우는 인간의 힘으로 이 생존욕구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절대 인간의 힘만으로는 생존욕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욕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교육을 받고 생각만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생각은 욕구를 따르기 때문입니다. 욕구를 따르는 생각이 행동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욕구를 먼저 변화시키지 않고 생각만 바꾸려다가는 사람 흉내 내는 원숭이가 됩니다. 욕구는 원숭이인데 행동만 사람처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를 지배하는 욕구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욕구는 ‘자기정체성’에 의해 결정됩니다. 자신이 누구라는 정체성이 욕구를 바꾸는 것입니다. 생존하고 싶은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라는 정체성을 갖고 나서는 자식을 위해 생명을 포기하기까지 합니다. 혹은 1년을 더 살거나, 지금 죽고 5억을 선택하거나 하라고 할 때, 아이들은 하나같이 1년을 더 살기를 선택하지만, 아버지들은 자신들이 아버지이기 때문에 1년을 더 사느니 자녀들을 위해 지금 죽어 5억을 받는 것을 선택합니다. 이런 사랑은 자신들이 부모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가졌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누구인가?’라는 자기 정체성은 무엇에 의해 결정될까요? 자기 정체성은 ‘믿음’에 의해 결정됩니다. 자신이 누구라는 자기 정체성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자신에게 준 믿음을 받아들임으로써 결정되는 것입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는 늑대로부터 그 정체성을 받아 자신이 늑대인 줄 압니다. 그러면 늑대의 본성이 그 아이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본성이 채워질 때 행복하다고 믿습니다.

      모든 인간은 부모로부터 ‘인간’이란 자기 정체성을 물려받습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기에 ‘인간’이란 자기 정체성은 곧 인간의 ‘본성’이 됩니다. 본성은 태어날 때 부모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인간이라는 이 믿음은 인간의 본성, 즉 인간의 욕구에 사로잡혀 살게 만듭니다. 인간은 남을 심판하고, 육체의 욕망을 채우며, 더 소유하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라는 정체성은 자신들의 인간인 부모에게서 받는 본성입니다. 자신을 인간이라고만 믿으면 여전히 망치를 쥐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아드님을 보내시어 당신이 우리 아버지가 되심을 믿게 하심으로써 우리가 사람의 자녀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임을 믿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정말 성체를 통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가 믿지 않을 수 없게 하셨습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는 망치를 내려놓고 마치 하느님 사랑의 본성을 멍에로 맨 소처럼 살아가게 됩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하느님의 본성, 하느님의 욕구에 지배받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당신의 멍에를 매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비로소 안식을 얻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분의 멍에는 그분의 욕구입니다. 그분의 욕구를 우리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 사랑의 욕구에 지배받으면 이웃을 어떻게 행복하게 해 줄까만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계명의 역할입니다. 계명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두 개로만 나뉩니다. 계명은 하느님 자녀의 정체성을 지닌 이들에게 주어지는 멍에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의 도구로 삼으셔서 이웃을 행복하게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소’입니다. 소는 주인의 멍에에 가하는 힘에 따라 움직이기만 하면 됩니다. 소가 망치를 쥐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종이 될 때야만 그 지겹던 이웃을 심판하던 망치가 사라집니다. 그래서 비로소 안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은 왜 이 계명들을 가지고도 그렇게 살지 못했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망치를 내려놓지 않고 그와 반대되는 사랑의 계명을 따르려는 모순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으로 새로운 망치를 만들어 자신도 그러면서 그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때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망치를 쥐여준 장본인은 ‘자아’라는 이름으로 우리 안에 숨어있습니다. 따라서 사랑이라는 하느님의 멍에는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지 않고서는 나에게서 실현될 수 없는 욕구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사람의 자녀라는 믿음은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신앙생활 해 봐야 망치로 계속 사람을 치면서도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다고 착각하며 살게 됩니다.

      나를 죽이고 그리스도께서 살게 하는 것, 이것이 망치를 쥐고 태어나 원죄에서 벗어나 다시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되는 자격을 얻는 유일한 길입니다. 매슬로우가 불가능하게만 여겼던 그 다양한 망치들을 내던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를 믿어 나를 죽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당신 욕구를 실현하게 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이해한 율법학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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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1요한 5,3).”
“그분의 계명은 이렇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1요한 3,23).”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을 통해서 실현됩니다.
동시에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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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0).
이 말씀에 가만히 머무릅니다. 이 계명이 단순히 내 편에서 해야 할 절대 의무라면 부담스럽고, 늘 부족해 송구스럽고, 또 무겁게 느껴져야 할텐데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뭉클해지고 눈시울도 뜨거워집니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 계명이 나에게 부과된 의무이기 이전에 먼저 하느님께서 나에게 하고 계신 것이기에 그런 것 같습니다. 사실 이 계명은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법입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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