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3월 19일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Margaret K 2020. 3. 18. 19:25

2020년 3월 19일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마태오 1,16.18-21.24ㄱ)


“Joseph, son of David,
do not be afraid to take Mary your wife into your home.
For it is through the Holy Spirit
that this child has been conceived in her.
She will bear a son and you are to name him Jesus,
because he will save his people from their sins.”
When Joseph awoke,
he did as the angel of the Lord had commanded him
and took his wife into his hom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요셉 성인은 복음서에 많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탄생을 전하는 이야기에 언급될 뿐입니다. 그럼에도 요셉 성인은 예수님의 탄생에, 구원자의 탄생에 없어서는 안 될 인물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구약에서부터 예언된 메시아에 대한 약속이 이루어지는 사건입니다. 다윗의 후손을 일으켜 영원한 왕좌에 앉게 하겠다는 하느님의 예언은 예수님의 탄생을 통하여 성취됩니다. 오늘 복음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으며 그 잉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명확하게 전합니다. 이러한 사건에서 요셉은 눈에 띄게 등장하지 않습니다. 묵묵히 마리아의 잉태를 지켜 주며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게 합니다.

의로운 요셉. 성경에서 의롭다는 표현은 하느님께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입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계명을 충실히 지키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칭찬입니다. 그렇기에 이 표현은 요셉을 가장 잘 묘사합니다.

요셉 성인의 의로움은 구원 역사와 성가정의 바탕이 되고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됩니다. 그 의로움은 믿음에서 옵니다. 바오로 사도도 율법과 구분되는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을 말합니다. 마리아의 응답처럼 요셉의 의로움은 예수님 탄생의 사건이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고 따르는 행동을 통하여 우리 안에 이루어졌음을 강조합니다. 요셉 성인의 모습은 우리를 의로운 사람이 되도록,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이 되도록 초대합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두 눈이 모두 잘 보이던 사람이 어느 날 사고가 나서 한쪽 눈을 못 보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한쪽 눈을 못 보게 된 것을 행복하다고 생각할까요? 아니면 불행하다고 생각할까요? 그렇다면 이런 상황은 어떠할까요? 앞을 보지 못하던 사람이 각막 기증자가 나타나서 한쪽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행복하다고 생각할까요? 불행하다고 생각할까요?

똑같이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바라보지만, 누구는 불행하다고 말하고 또 다른 누구는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결국, 행복과 불행은 다른 사람이나 다른 조건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행복을 만드는 ‘나’를 보지 못하고 남 탓, 환경 탓, 주님 탓을 외치면서 행복하지 못한 ‘나’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 ‘나’는 누가 통제를 할 수가 있을까요? 당연히 ‘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나의 행복도 내가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주님 탓, 남 탓, 환경 탓 등 외부에서 그 이유를 찾다가는 화만 나고 절망 속에서 헤맬 수밖에 없습니다.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내가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 내가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를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외적인 조건들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나만의 행복을 만들 수 있습니다.

성모님의 남편인 동시에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요셉 성인 대축일인 오늘, 요셉 성인에 대해 묵상을 해 봅니다. 성모님과 약혼한 뒤에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그에게 큰 혼란을 주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아직 같이 살기도 전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잉태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또 꿈에 성모님을 아내로 맞이하라는 천사의 명령을 들었을 때, 그 뒤에 이어지는 모든 사건은 보통 사람들이 평생을 통해서도 겪을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특히 성경에 요셉을 의로운 사람으로 나오듯이, 율법에 어긋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이 상황에 고뇌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불행하다고 생각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요셉 성인은 이 모든 상황을 받아들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성모님을 아내로 맞아들이고, 성가정의 수호자가 되어 예수님과 성모님을 보호하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합니다. 불행의 이유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행복의 상황으로 받아들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곁에서 임종하는 이의 수호자이며 거룩한 교회의 보호자로 계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의 이유는 분명히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의 이유만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행복을 만드는 ‘나’를 바라보는 데 집중하시길 바랍니다.
무수한 사람들 가운데는 나와 뜻을 같이할 사람이 한둘은 있을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공기를 호흡하는 데는 들 창문 하나로도 족하다(로망롤랑). 



세상에서 가장 잘난 사람.

세상에서 가장 잘난 사람은 누구일까요? 바로 ‘나’입니다. 그래서 많은 판단을 다른 사람을 향해 쏟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옳다.’, ‘너는 틀렸다’라는 생각으로 상대를 무시하고 때로는 상대를 향해 화를 내는 것입니다. 그만큼 세상에서 가장 잘 ‘나’를 우리 각자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떻습니까? 완벽한 모습도 아니고 끊임없는 실수를 반복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잘나지도, 어쩌면 가장 못났으면서도 자기 잘난 멋에 사는 것은 아닐까요? 물론 자기 자신을 비하하며 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신감을 놓아버리고 수동적으로 살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잘난 ‘나’이듯, 남들도 자기 관점에서는 잘난 ‘나’라는 것을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못 한다.’라고 말하면서 뒤로만 물러서는 것이 겸손은 절대 아닙니다.

내가 나에게 소중하듯, 남 역시 자신에게 소중함을 인정하도록 합시다. 이것이 함께 살아가는 방법이며, 나를 더욱더 건강하게 살 수 있게 하는 길입니다.                   

구원은 구원의 필요를 아는 이에게 맡겨진다

-전삼용신부-


한 부자가 죽기 전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자기 재산을 천당에 갖고 가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어느 날 꿈에 천사가 나타나 말했습니다.

“네 기도가 응답받았다.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다. 트렁크 가방 하나에만 채워가라.”

무엇으로 채워야 하나? 부자는 여러 가지 궁리를 했습니다. 현금으로 채울까? 유가증권으로 채울까? 진품 명품으로 채울까? 그러다가 부자는 황금 덩어리로 채우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결정 내렸습니다.

      얼마 안 있어 부자는 이 땅을 하직하고 천당에 갔습니다. 천당에 가는 동안 아주 큰 고생을 했습니다. 트렁크 무게 때문이었습니다. 황금이 든 큰 트렁크를 가지고 낑낑대며 천당 문 앞에 이르렀을 때 베드로가 문을 지키고 있다가 말했습니다.

“무엇을 그렇게 힘들게 갖고 오십니까?”

부자는 환한 얼굴로 말했습니다.

“제 재산인데 특별히 허락받고 갖고 오는 겁니다.”

“여태까지 이런 경우는 없었는데, 허락을 받았다니 그럼 어디 봅시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며 가방을 열게 했습니다. 가방이 열리니 눈부신 황금빛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부자는 얼굴의 땀을 닦으며 그것 보라는 듯 만족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천당의 모든 길은 황금으로 포장되어 있습니다. 도로포장 재료를 가지고 오셨군요. 수고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가져가야 하는 유일한 것은 무엇일까요? 부자가 황금을 가치 있다고 여기면서 잃게 된 것은 또 무엇이었을까요?

      헨리 나우웬 신부는 자신의 저서에서 “너는 보물을 발견한 사실에 기쁨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보물을 발견했다고 해서 네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할 때 보물을 네 것으로 만들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보물은 발견하는 것보다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내 것으로 만들려면 그것을 위해 다른 가치를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보물의 진정한 가치를 안다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보물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원자로 믿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아니면 누구도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가 아니면 다 지옥행이라고 말해도 되는 것입니다. 겁주기 위해 지옥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 그리스도가 아니면 우리는 다 지옥입니다. 이것은 교리입니다. 지옥은 하나의 개념이 아니라 실체입니다. 교회는 “죽을죄의 상태에서 죽는 사람들의 영혼은 죽은 다음 곧바로 지옥으로 내려가며, 그곳에서 지옥의 고통, 곧 ‘영원한 불’의 고통을 겪는다.”(1035)라고 가르칩니다.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서는 죄가 씻겨져야 합니다. 우리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서 “죄를 씻는 유일한 세례”를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그 “유일한 세례”는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세워진 성사이고 교회에 맡겨졌습니다. 교회에 맡겨진 성사가 곧 그리스도이고 그 성사의 가치를 알아야만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줄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그리스도와 그분께서 맡겨주신 성체가 아니면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믿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성 요셉은 어떠한 믿음이 있었기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맡기실 수 있으셨을까요? 성 요셉의 수많은 훌륭한 덕이 있겠지만, 오늘은 그분의 믿음을 묵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천사는 요셉의 꿈에 나타나 이렇게 말해줍니다.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이 말은 그분이 아니면 누구도 죄에서 구원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온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실 유일한 구원자의 양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큰 부담이겠습니까? 자신의 잘못으로 아기 예수님이 다치거나 혹 죽게 되신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지금까지 기다려온 인류의 구원이 허사가 됩니다. 자신이 맡은 가치를 알아, 이런 부담을 가질 수 있는 사람에게야 하느님은 당신 아드님을 맡겨주십니다. 요셉 성인은 온 인류의 희망이신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하면 수천 번이라도 바칠 준비가 되신 분이셨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분이 누구이신지 알기 때문입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다이아몬드광산 개발이 시작된 것은 우연한 기회를 통해서였습니다. 한 상인이 남아공의 어느 마을에 머물렀을 때 선반 위에서 광채를 발하고 있는 커다란 돌멩이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상인은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저 돌멩이는 누구의 것입니까?”

“저것은 내 아들이 산에서 주어온 것입니다.”

상인은 주인에게 부탁했습니다.

"내가 당신 아들을 위해 좋은 장난감을 하나 줄 테니 저 돌멩이를 내게 주지 않겠소?”

주인은 선반에 놓인 광채 나는 돌멩이를 상인에게 주었습니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감사하지요. 제 아들도 매우 기뻐할 것입니다.”

주인은 상인에게 몇 번이나 고맙다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것이 값비싼 다이아몬드라는 사실은 전혀 몰랐습니다. 결국, 이 돌은 케이프타운의 보석상에게 12만 5천 달러에 팔렸습니다. 지금은 수백만 달러가 넘습니다.

      지금 가톨릭의 신앙이 매우 흐려지고 무뎌졌습니다. 무엇이 가치 있는 것인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성당을 마음의 평화를 위해 다닌다고 합니다. 집안이 건강하고 잘 되기 위해 다닌다고 합니다. 물론 맞는 말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자녀들의 성공이나 가정의 안녕과 내면의 평화를 주는 방법은 다른 곳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성당은 지옥에 안 가기 위해 다니는 것입니다. 그래야 교회가 구원을 주는 곳이 됩니다. 그래야 구원을 위해 우리 손바닥 위에 올려지는 그리스도의 성체의 가치가 제대로 보입니다.

      코로나 때문에 관광객이 오지 않으니 이탈리아 베네치아 운하의 물이 처음으로 맑아졌고 지나다니는 물고기까지 보인다고 합니다. 대기도 맑아진 느낌입니다. 우리 교회도, 우리 신앙도 이렇게 깨끗해진 모습으로 이 힘든 시기를 함께 위로하고 인내하며 부활을 준비해야겠습니다.

      어쩌면 한국과 바티칸 교회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이렇게 오랜 기간 성체를 모시지 못하는 시기를 지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가톨릭 신자들에게 ‘정말 성체가 우리 구원의 유일한 희망임을 믿는가?’라고 물으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성체 한 번 영하기 위해 몇 달을 산길을 넘어 미사에 참여했습니다. 호랑이에 물려 죽고 눈 속에서 파묻혀 죽었지만 성체의 가치를 알았습니다. 지금은 주차장이 부족하다거나, 여행을 가야 할 일이 있다고 주일이 되어도 성체를 영하지 않기도 합니다. 이러다가 어떤 분들은 정말 보석을 장난감과 맞바꾸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요셉 성인처럼 성체를 바라볼 수 있어야겠습니다. 손바닥 위에 놓인 성체를 바라보며, 이것이 아니면 다 지옥행임을 절실히 믿을 때, 양식이 되기 위해 말 밥통에 놓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요셉의 마음과 같아질 것입니다. 성체가 유일한 구원의 길이기에 목숨을 바쳐서라도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기도를 바쳐야겠습니다. 물론 이런 일은 지나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교훈은 깊이 새길 필요가 있겠습니다. 성체는 우리를 지옥에 떨어지지 않게 만드는 유일한 보물입니다.


-조재형신부-


거울을 보면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이 보입니다. 웃으면 거울 속에 비친 나도 웃습니다. 찡그리면 거울 속에 비친 나도 찡그립니다. 거울 속에 비친 주름, , , , , 머리카락이 바로 나의 모습입니다. 거울은 거짓말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울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나의 의식, 마음, 생각, 신념입니다. 내가 온 길을 보면 내가 가야 할 길이 보입니다. 내가 온 길이 절망, 어둠, 두려움, 욕망의 길이었다면 앞으로 가야할 길은 슬픔, 분노, 갈등, 고독의 길이 될 겁니다. 내가 걸어온 길이 인내, 온유, 희생, 친절의 길이었다면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보일 겁니다. 믿음, 희망, 사랑, 나눔의 길이 될 겁니다.

 

사순시기는 나의 삶을 십자가라는 거울에 비추어보는 겁니다. 삶이 극단적이라면 길가에 뿌려진 씨와 같습니다. 누군가의 비난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애써 가꾼 사랑의 밭을 망쳐버립니다. 좋을 때는 모든 것을 줄 것 같이 행동하지만, 자존심이 상하면 모든 것을 부술 것처럼 행동합니다. 예수님을 배반했던 유다의 삶이 그렇습니다. 삶이 거짓과 위선이라면 돌밭에 뿌려진 씨와 같습니다. 타인의 희생을 발판 삼아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아 진실의 빛이 비추면 곧 무너지고 맙니다. 남의 눈에 있는 작은 티는 들추어내지만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는 감추려합니다. 율법과 계명을 말하지만 실천하지 않았던 위선자들의 삶이 그랬습니다. 삶이 이웃을 억압하고, 무시한다면 가시밭에 떨어진 씨와 같습니다. 가야파는 대사제였지만 자신의 권위와 능력으로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빌라도는 총독이었지만 자신의 권력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했습니다. 많이 배웠고, 많이 가졌지만 갑질의 삶을 사는 사람이 그렇습니다.

 

요셉 성인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약혼한 처녀 마리아가 결혼 전에 잉태한 것을 알았던 요셉 성인은 조용히 파혼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법대로 하면 요셉은 마리아를 상대로 고소를 할 수도 있었습니다. 당시의 법은 무척 엄격하였기 때문에 마리아는 재판을 받고 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요셉이 기분대로 사는 사람이었으면 자신 앞에 놓인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집에 찾아가서 한바탕 소동을 벌였을지도 모릅니다. 요셉 성인이 법대로 했다고 해도, 기분대로 했다고 해도 당시 사람들은 손가락질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은 명백히 마리아의 잘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마리아를 고발하지도 않았습니다. 마리아의 집에 찾아가 한바탕 난리를 치지도 않았습니다. 말 할 수 없었던 마리아의 입장을 생각하였고, 조용히 파혼만 하기로 하였습니다. 사실 이 정도만 해도 커다란 배려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요셉은 이제 또 다른 삶을 살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의로운 삶을 뛰어넘어서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요셉은 꿈에서 가브리엘 천사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잉태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대로 살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 역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온 몸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 또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했습니다. 유명한 겟세마니의 기도입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고난의 잔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나사렛 성가정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중심에 놓고 살았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 신앙은 은총을 주며, 그 은총으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을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의 뜻보다는 나의 뜻이 먼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때가 많습니다. 출세와 성공이 삶의 기준이 되곤 합니다. 왜 공부를 하는지를 생각하기 전에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것이 용서되고 이해되는 세상입니다. 돈이 삶의 중심이 되는 세상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위해서 돈을 벌고, 돈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돈의 노예가 되어서 양심을 팔고, 사람을 속이고, 소중한 것들을 멀리합니다.

 

오늘 성 요셉 대축일을 지내면서 나의 삶의 중심은 어디에 있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성 요셉 우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진지하게 침묵하고 숙고하며, 깊이 성찰하고 기도하던 하느님의 사람, 요셉!

 -양승국신부-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때, 요셉처럼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가 다시 또 있을까 싶습니다. 이미 마리아와 약혼까지 하였으며, 결혼식 날짜가 코앞으로 다가온 어느날, 해괴망칙한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약혼녀 마리아가 결혼식도 치르기 전에 덜컥 아이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약혼자로서 마리아를 향한 배신감이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끓어오르는 분노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머리 뚜껑이 활짝 열리면서 연기가 풀풀 새어나왔을 것입니다.

 

 요셉의 머릿 속은 별의 별 생각이 다 교차했을 것입니다.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얌전한 척 하던 마리아가 어떻게 이런 일을 벌일 수가 있지? 이 사실을 사방팔방에 확 불어버릴까? 법대로 해버릴까?’

 

 그러나 의로운 사람 요셉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배신감을 꾹 눌러참았습니다. 그리고 쥐도 새도 모르게 마리아와 파혼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렇게 마음 먹은 요셉에게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상황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오 복음 1장 20~23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 입장에서 억울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을 향해 하소연도 했을 것입니다. "다 좋은 데 왜 하필 나냐고요?"

 

 희귀한 사건으로 인해 마리아와의 단란하고 행복한 새 인생을 꿈꾸던 요셉의 소박한 희망은 순식간에 산산조각나고 말았습니다. 요셉의 인생은 한 마디로 닭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럭저럭 괜찮은 인생이 제대로 꼬여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이같은 생각은 단지 인간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갑작스레 다가온 마리아의 혼전 잉태가 요셉에게 엄청난 시련이요 상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납득하기 힘든 대 사건 앞에 침묵하고 기도하며 하느님을 뜻을 찾았습니다. 이해하기 힘든 사건을 인간적인 시각에서가 아니라 영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자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리아와 함께,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신비스런 신앙 여정을 출발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요셉은 깨달았을 것입니다. 마리아로 인해 자신이 겪은 희생과 포기는 절대로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는 진리를 말입니다.

 

 은혜롭게도 하느님 아버지께서 요셉 자신을 인류 구원 사업의 협조자로 선택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점점 커져갔을 것입니다. 그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하느님께서 내게 협조를 구하시다니요? 하느님께서 나를 동반자로 불러주시다니요?

 

 따지고 보니 세상 만사가 그런 것 같습니다. 짧은 안목으로, 그리고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때, 우리가 매일 겪는 시련과 고통은 견딜 수 없는 불행입니다. 그러나 마음 한번 크게 바꿔 먹고, 호흡 한번 크게 하며, 긴 안목에서 바라볼 때, 시련과 고통은 더할 나위없는 축복이요 은총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과 철저하게 다르신 분입니다. 참으로 묘하시고 신비스러운 분이십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깊은 뜻을 이해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요셉처럼 너그러운 마음이요 의로운 성격입니다. 진지하게 침묵하고 숙고하며, 깊이 성찰하고 기도하는 태도입니다.


꿈같은 얘기

 -반영억신부-  

 

저는 가끔 꿈을 꿉니다. 그러나 꿈은 꿈입니다. 아무리 좋아도 꿈이고 아무리 나빠도 꿈입니다. 그래서 꿈은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꿈보다 해몽이 낫다는 옛말이 있듯이 꿈은 해몽을 잘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꿈이 사나워서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고 생각하는데 꿈을 나쁘게 꾸어서 나쁜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꿈에 지배당하기 때문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꿈을 다스릴 줄 알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때로는 꿈을 통하여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해 받기도 하지만 역시 잘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늘 기억하는 요셉은 마리아와 약혼을 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1,20-21)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꿈에서 깨어난 요셉은 천사가 명령한대로 하였습니다. 정말 꿈같은 얘기입니다. 그러니 믿음이 없이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이에게는 그만한 기쁨이 은총으로 주어집니다. 결국 하느님의 역사는 그분의 은총과 인간의 협력으로 이루어집니다. 군말이 필요 없습니다. 그저 하느님의 뜻을 따른 것입니다. 깊은 신앙은 어려울 때 드러난다고 하였는데 바로 이 순간이 그의 믿음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요셉이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은 데서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선한 마음을 통해 결국 천사를 만나게 되었으며 모든 장애를 극복하게 되었습니다. 당혹스러운 일 앞에서 신중한 처신을 하는 것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일상 안에서 의롭게 살았던 요셉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사실 구약 성경에 나타나는 의로운 사람이란 항상 하느님을 마음에 두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 생활하며 기쁘고 진실한 마음으로 율법을 지키는 사람입니다.(울프강 트릴리) 일상 안에서 주님을 섬기는 의로움을 살지 않고 갑자기 의로운 처신을 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따라서 하루 한 순간순간을 주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라는 뜻은 하느님은 구원이시다, 하느님은 구세주시다라는 뜻을 지녔습니다.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마태1,21)입니다. 그런데 그분께서 바로 인간의 협력을 통해서 오셨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기쁨이면서도 그만한 소명을 일깨워 줍니다. 오늘 나의 길에서 그분께 협력하는 몫이 얼마나 되는지 점검 해야겠습니다. 부끄럽지만.. . “믿는 이들에게는 질문이 없고, 믿지 않는 이에게는 대답이 없다.” 라고 합니다. 오늘을 침묵으로, 그리고 믿음의 응답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축일을 맞이한 모든 이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리며 주님의 은총이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대로 하였습니다.”(마태 1,24).

-이영근신부-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신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복음사가들은 예수님의 모친이신 마리아께 대한 관심에 비하면, 성 요셉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는 그가 구속사에 있어서 해야 할 일을 다 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계획하신대로를 일찍이 다 이루셨다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두 가지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통해, 태어날 아기가 구세주 메시아임을 알려줍니다.

첫째는 그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이요,

둘째는 그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난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계획과 예언이 요셉의 믿음의 결단과 행동을 통해서 성취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요셉은 하느님 구원계획의 온전한 조력자로 제시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성 요셉의 인품을 세 가지로 묵상해 봅니다.

첫째,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마태 1,19).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데, 열심을 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의로움으로 자신의 안락과 평안을 포기하였고, 마침내 하느님의 뜻을 따라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둘째, 그는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마태 1,19).

타인에 대한 깊은 이해심과 자비심을 겸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공적인 고소를 통해 마리아를 수치스럽게 만들지 않으려고, 조용히 파혼하기로 작정했습니다. 물론, 그렇게 된다하더라도 결국 그에게는 모욕이 될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모욕을 감수하면서라도, 마리아의 안녕을 도모하고자 했습니다.

 참으로 그는 사려 깊은 처사를 할 줄 아는, 자비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셋째>, 그는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대로 하였습니다.”(마태 1,24). 순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깊은 침묵으로, 하느님의 음성에 마음의 귀를 열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뜻에 행동하는 믿음으로 순명하였습니다.

사실, 요셉은 오늘 <복음>에서뿐만 아니라, <복음서> 전체에서 단 한마디의 말씀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행동하는 믿음과 순명으로 구원받는 모든 이들의 양부가 되셨습니다.

그는 <2독서>에서 아브라함이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듯이(로마 4,18), 그도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믿음으로 순명하여, 구세주의 양부가 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미 얻은 외아들을 포기했어야만 했다면, 요셉은 아들을 얻기도 전에 이미 외아들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아니, 아브라함에게는 그래도 아내가 있었지만, 요셉은 아내마저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침묵하되, 참으로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믿되, 참으로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행동하되, 참으로 순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려 깊되, 참으로 자비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그는 우리 신앙의 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깊은 침묵, 자신의 안락과 평안을 접고 오로지 하느님께만 내맡기고 행동하는 믿음, 타인의 처지를 배려하는 사려 깊은 자비심과 사랑,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참다운 순명이, 바로 우리의 모델입니다.

오늘 우리도 성 요셉께 전구하며, 하느님 구원의 온전한 조력자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 1,20)


주님,

믿음으로 침묵할 줄을 알게 하소서.

행동으로 사랑할 줄을 알게 하소서.

타인의 처지를 자비로 헤아리고,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희망하게 하소서.

선하신 당신의 뜻을 따르며 당신의 의로움을 따르며,

영으로 인도되는 다 헤아려지지 않은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의로운 사람 요셉 

-송영진신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마태 1,18-21.24).”

결혼을 앞둔 요셉의 소망은, 또 그의 인생 계획은,
다른 사람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화목한 가정을 이루어서
평범하고 소박한 행복을 누리게 되기를 소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그리고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중대한 시련을 만났습니다.
여기서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라는 말은,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이 ‘저절로’ 드러났다는 뜻은 아니고,
아마도 마리아가 자신이 ‘성령으로 잉태했음’을 요셉에게 알려 주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마리아를 믿었을 것이고, 마리아의 말을 믿었을 것입니다.
믿었으니까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마리아를 보호하려고 한 것입니다.
(만일에 요셉이 마리아를 안 믿었다면,
그것으로 요셉의 이야기는 끝나버렸을 것입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말을 믿었지만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아주 많이 고민하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라는 말은, 요셉이 자기 자신의
희생으로 마리아와 아기를 모두 보호하려고 했음을 나타냅니다.
(요셉이 감추려고 한 것은 마리아의 잉태 사실이 아니라, 파혼 사실입니다.
세상 사람들 모르게 파혼하면, 사람들은 마리아가 낳은 아기를
요셉의 아기로 생각할 것이고, 그러면 마리아와 아기는 무사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요셉이 마리아와 함께 살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가정에 대해서 무책임한 사람이라고,
또는 가정을 버린 사람이라고 요셉을 비난하게 될 것입니다.
요셉은 자기가 그런 비난을 받게 되는 것을 감수하고서
마리아와 아기를 지키려고 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작정하였다.’ 라는 말만 있고, ‘실행하였다.’ 라는 말이 없는 것은,
요셉이 그렇게 결심하긴 했지만 차마 실행하지는 못하고
계속 고민하고 기도했음을 암시합니다.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난 일은 요셉의 기도에 주님께서 응답하신 일입니다.
천사가 요셉에게 한 말은, 예수님의 탄생 예고 때에 마리아에게 한 말과 같습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라는 말은, 요셉이 ‘다윗의 자손’으로서 하느님의 선택을
받았음을 나타내고, 또 ‘메시아의 보호자’로 선택되었음을 나타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라는 말은,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는 일은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라는 말은,
마리아가 요셉에게 자신이 성령으로 잉태했다고 알려 준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확인해 주는 말이고, 또 이 모든 일이 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확인해 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라는 말은,
태어날 아기는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것을 알려 주는 말입니다.
(아기의 이름을 짓는 것은 아버지의 권한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아버지 하느님께서 직접 지으셨습니다.)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라는 말은,
예수님이 메시아(구세주)라는 것을 알려 주는 말입니다.

이야기를 보면, 요셉은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기계적으로(수동적으로)
움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것은 아니고, 천사의 말을 묵상하고, 믿고,
결심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천사의 명령’(주님의 명령)이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이 명령은 자유의지 없이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명령이 아니라,
요셉 자신이 자유의지로 결단해야 하는 ‘부르심’입니다.
(요셉이 도저히 용기가 안 나서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대답했어도,
그것을 죄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그럴 인물이었다면 선택되지도 않았겠지만......)
어떻든 요셉은 자유의지로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요셉의 ‘응답’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바라면서,
자신의 인간적인 소망과 계획 등을 모두 버린 일이고,
응답함으로써 지게 될 십자가들을 기꺼이 받아들인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요셉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라는 예수님 말씀을
‘온 삶으로’ 실천한 첫 번째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셉 자신의 입장에서 표현하면,
천사가 전해 준 주님의 부르심에 그가 응답한 일은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한” 일입니다.)

우리가 요셉의 믿음과 응답과 의로움을 본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지금 나에게 생긴 일이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나?”
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 수 있나?
첫 번째로 할 일은 ‘기도’이고,
두 번째로 할 일은 영적 지도자에게 조언을 청하는 일입니다.
요셉의 꿈에 나타난 천사는 영적 지도자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마리아에게 일어난 일을,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부부가 요셉보다 먼저
알았을 것이고, 그래서 자기들에게 일어난 일과 자기들의 믿음을
요셉에게 증언해 주었을지도 모르고, 그 ‘증언’을 통해서 요셉을 위한
영적 지도자 역할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신앙생활은 혼자서는 하기 어려운 생활입니다.
특히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은 혼자서는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자기가 받은 ‘부르심’이 정말로 ‘하느님의 부르심’인지를 식별하는 일과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을 결정하는 일과, 응답한다면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 등을 영적 지도자와 함께 의논하고 심사숙고해야 합니다.
(영적 지도는 대체로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이 해 주지만,
신앙생활을 나보다 더 많이 한 이웃이나 친구나 가족이 해 줄 수도 있습니다.)  


-조욱현신부-


오늘은 성 요셉 대축일이다. 우리는 성 요셉을 성가정의 수호자, 보편교회의 수호자이시며, 노동자, 가정, 동정자, 환자, 임종자의 주보로 공경 받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성서에서는 의인’, ‘동정녀 마리아의 남편이며 충실하고 현명한 종이다. 원죄 없이 잉태 되신 동정 마리아와 더불어 한국교회의 공동 수호자이시다.

 

복음: 마태 1,16.18-21.24a: 요셉은 천사가 일러준 대로 하였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18) 이 잉태는 거룩한 신비이다. 성령께서 감추시어 눈에 띄지 않는 성사이다. 이 잉태로 인해 우리는 요셉의 놀라운 모습을 본다. 요셉은 조금도 마리아의 마음을 괴롭게 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그 일을 해결하려 한다. 약혼은 했지만 마리아를 자기 집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고, 그 일을 드러내어 마리아를 재판에 넘긴다면 마리아를 죽음에 내주는 것이 된다고 생각하여 조용히 파혼하려 했을 것이다.

 

이때에 꿈에 천사가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20) 이것은 요셉이 마리아의 순결을 의심하지 않도록 그 신비를 알려준 것이다. 또한 요셉이 의심이라는 악을 떨쳐버리고 신비라고 하는 선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리아는 아무 죄가 없으며 동정잉태를 인정할 수 있었다. ‘요셉이라는 뜻은 흠잡을 데 없는이라는 뜻이다.

 

여기에도 신비가 있다. 창세기에서 악마는 동정이었던 하와에게 먼저 말을 건 다음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이 말은 그들에게 죽음을 건네기 위한 말이었다. 동정잉태의 사건에서는 거룩한 천사가 마리아에게 먼저 말하였고 다음에 요셉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그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앞의 사건에서는 죄를 위해, 죽음을 위해 여자가 선택되었고, 뒤의 사건에서는 구원을 위해 여자가 선택되었다. 앞의 사건에서는 여자로 말미암아 남자가 넘어졌고, 뒤의 사건은 동정녀로 말미암아 남자가 일어섰다. 그래서 천사는 요셉에게 그렇게 말한 것이다.

 

천사는 또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21)라고 했다. 그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 했는데 그 뜻은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 구원자라는 뜻이다. 이는 하느님께 어울리는 이름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해, ‘하느님이요 구원자는 나밖에 없다.’(참조: 이사 43,3; 호세 13,4)라고 하셨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주셨다.”(이사 49,1) 즉 그 이름은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분의 육에 붙여진 이름이다.

 

요셉은 천사에게서 계시를 받고 기쁘게 하느님의 뜻에 따른다. 그는 마리아를 맞아들이고 기쁘게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가게 되었다. 천사의 말은 동정 어머니를 그의 아내로 부를 자격을 갖도록 하였다. 요셉 성인이 의롭다고 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뜻을 채우려 노력했다고 하는 것이다. 오늘 1독서에서도 보면 다윗은 하느님의 뜻을 따른 사람이었다. 다윗이 하느님의 뜻에 충실했던 상급을 하느님께서는 다윗 가문과의 약속을 통하여 그의 왕권을 튼튼히 해 주시겠다고 하신다.

 

2독서에 나오는 말씀의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이다. 자식이 없던 아브라함의 모습은 절망적이었다. 그러나 그가 모든 믿는 이들의 조상이 된 것은 그의 자세가 하느님을 온전히 신뢰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도 하느님을 신뢰하고, 의탁하여야 한다. 우리가 그런 믿음으로 그분의 말씀을 들을 때에 우리도 요셉과 같이, 다윗과 같이, 아브라함 같은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

 

요셉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즉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루는데 협력하셨던 그 삶을 우리도 본받아, 우리의 삶의 순간순간에 주님의 뜻을 이루려고 노력하며 그분을 본받도록 하자. 요셉 성인이 어떤 큰 공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온전한 믿음을 통해서 주님께 인정을 받았다. 우리의 믿음은 바로 하느님의 뜻에 대한 올바른 응답이어야 한다. 요셉이 자신의 뜻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듯이, 마리아가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였듯이 주님의 뜻을 따르며 주님의 뜻을 따르려 노력하여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조금씩 실천하고 그 말씀을 살면서 주님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삶의 순간순간이, 조그마한 행위 하나하나가 하느님 구원사업에 협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요셉 성인과 같이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이루는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도록 깨어있을 수 있어야 한다.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대로 하였다.(마태 1, 24)

-한상우신부-

봄꽃 하나
피기 위해서도
수 많은 사랑의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요셉 성인은
예수님과 성모님을
온 삶으로 끝까지
보살펴 주십니다.

지켜야 할 것은
하느님과 우리의
뜨거운 믿음의
약속입니다.

요셉 성인은
믿음으로
주님의 보호자가
되십니다.

한 사람의 믿음이
끝내 주님의
양부가 되게합니다.

사랑 받고
사랑 하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게됩니다.

사랑과 무관한
일은 없습니다.

믿음과 무관한
일은 없습니다.

지나가는 시간 속에
아버지가 있고
어머니가 있습니다.

뜨겁게 흐르는
사랑의
새역사입니다.

이 사순시기가
요셉 성인처럼

하느님의 뜻을
찾고 사랑을
실천하는 시간이길
기도드립니다.

생명과 믿음
공동체와 사랑은
하나이듯

세상을 바꾸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신앙의
참된 실천임을
믿습니다.

참된 실천은
참된 순명입니다.

서로를 살리는
순명의 길을
우리또한
걸어갑시다.


-오상선신부-


성가정의 보호자이신 요셉 성인을 기리는 오늘, 미사의 독서들 안에는 하느님 사람 셋이 등장합니다.

제1독서에 등장하는 다윗과 제2독서의 아브라함은 구약 역사 안에서 하느님께 각별히 사랑받은 이들로 꼽힙니다. 성경은 이 두 사람에 대해서 그들이 받은 축복은 물론 그들의 실수와 약점에 대해서도 주저없이 펼쳐놓지요.

그런데 신약의 문턱에 선 요셉에 대해서 성경은 "의로운 사람"(마태 1,19)이라는 수식 외에 어떤 표현도 절제합니다. 어디에서도 요셉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마리아와 예수님의 배경으로서밖에는 별다른 일화가 등장하지 않으니까요.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 1,20).

요셉이 무얼 두려워했을까요? 아니, 천사가 간파한 요셉의 두려움은 무엇일까요? 보통의 두려움이 자기가 해를 입을까 염려하는 데서 오는 감정이라면 지금 요셉의 상태에는 맞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마 보통 사람이라면 배신당했다는 분노로 떨고 있을 법도 하니까요.

요셉은 마리아의 임신으로 인해 자기가 당할 모욕이나 난처함을 두려워한 것이 아닐 겁니다. 관습에 따라 마리아에 대해 권리를 가진 약혼자로서 그녀를 억지로라도 소유할 수 있지만, 그것이 마리아의 행복에 최선이 아닐 수도 있다는 염려에서 나온 두려움일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마태 1,19)하지요. 혹시 마리아에게 사랑하는 이가 따로 있다면 자기가 조용히 물러서 주려는 것입니다. 오로지 마리아의 행복을 위한 포기의 결단이지요.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마태 1,24).

하지만 요셉은 천사의 말을 듣고 마음을 바꿉니다. 뭔지 정확히 잘 몰라도 정결한 마리아를 통해 하느님께서 무엇인가를 하시리라고 믿게 되지요. 두려움이라 표현된 그의 내적 갈등이 꿈속 천사를 통해 개입하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일순간 정리된 것입니다.

요셉의 의로움은 생각이나 이념에 있지 않고 실행에 있습니다. 그는 믿고 행동함으로써 그 자신이 진정한 의로움이 되었습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은 다윗에게 영원한 왕좌를 약속하십니다.

"네 몸에서 나와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 그 나라의 왕좌를 영원히 튼튼하게 할 것이다"(2사무 7,12-13).

하느님께서는 성자 예수님을 다윗의 후손인 요셉에게 맡겨 이 약속을 이루십니다. 제1독서와 화답송에 무수히 반복되는 "영원"이라는 단어는 하느님의 이 약속이 단지 이스라엘 왕좌의 혈통적 연속성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로마 4,13)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율법에 따라 사는 이들만이 아니라 믿음에 따라 사는 이들에게도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는 약속이 보장된다고 역설합니다. 복음사가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양부에게 부여한 "의로운 사람"이라는 표현은 요셉이 육의 질서뿐만 아니라 영의 질서 안에서도 다윗 왕좌와 예수님을 잇는 계승자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마리아와 요셉, 두 충실하고 소박한 의인들의 협력으로 실현의 물꼬가 트입니다. 인간적 합리적 계산으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건 앞에서 이해하기를 중지하고 믿기를 선택한 이들의 결단이 있었기에 구원의 역사가 이어진 것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오늘날 과학과 지성이 지배하는 듯한 이 세상에도 믿음으로 복되고 믿음으로 의로운 수많은 마리아와 요셉들이 세상의 격류에 역행해 진리와 사랑의 말씀에 머무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족하고 어리석지만 하느님의 신비 안에서 믿고 의탁하며 살아가는 벗님이 바로 그 마리아고 요셉입니다. 믿어서 복되고 믿어서 의로운 우리는 바로 그 믿음으로 구원받을 것입니다. 아멘. 피앗. 아멘.

구원 사업에 협력하는 의로움 
-김찬선신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는 약속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을 통해서 주어졌습니다.”


자기 의로움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의합한 의로움

개신교에서는 이신득의以信得義를 많이 얘기합니다.
이것은 이행득의以行得義와 비교되는 말로서
인간의 행위 또는 공로로 의로움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늘 사도 바오로의 말처럼 믿음으로 의로움을 얻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가톨릭이 이행득의를 강조하고 자기들은
바오로 사도의 이 이신득의를 강조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의롭다고 할 때 보통 의를 위해 자신을 바치거나 의에
어긋나지 않는 행위를 하는 것을 말하고 그래서 이것을 통해서 볼 때
의로움은 자기 의로움이 아니라 자기 밖의 기준이 되는 어떤 의로움이 있고,
그 의로움에 맞는 또는 그 의로움에 어긋나지 않는 행위나 태도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내 밖의 기준이 되는 의로움이란 무엇인가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진 양심이 그것일 수 있고
각 문화나 종교에 따라 정해진 어떤 규정이나 법규가 그것일 수 있으며,
구약에서는 율법이 그것이었고 이 율법 대로 살아갈 때 의롭다 하는데
신약에 와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하느님을 믿을 때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이 의로움이라는 얘기인 것 같습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요셉은 의로운 사람으로 일컬어지는데
요셉도 애초에는 율법을 따르는 의로운 사람이었지만
그리스도로 인해 은총으로 의로워진 사람이 되었고,
은총으로 의로워진 것은 그가 하느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예수님의 탄생을 알렸을 때
그것을 믿은 것은 마리아뿐 아니라 요셉도였습니다.

그것은 동정녀가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을 믿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하고 믿을 수 없는 말이지만 하느님을 믿은 것이고,
하느님을 믿었기에 그 불가능한 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믿음은 '그가 하는 말은 무슨 말을 해도 다 믿겠다.'고 할 때의
그런 인격적인 믿음이고, 그 모든 어려움을 감수하겠다는 믿음이지요.

그런데 상상도 할 수 없는 생각을 한번 해봅니다.
만약 요셉이 의롭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요셉이 거부함으로 하느님 구원사업이 끝나게 되는 건가요?
하느님의 구원사업이 한 인간에 의해 좌우될 수 있는 건가요?

그럴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불의한 요셉이 마리아를 거부하고 주님의 양부되기를 거부할지라도
마리아의 수락과 성령에 의한 잉태로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을 테지만 이후 구원의 역사는 사뭇 달라졌겠지요?

마리아와 아기 예수께서 엄청 고생하셨거나
아니면 하느님의 뜻을 거부한 요나가 예스할 때까지
고래 배속에서 죽다가 살아난 것처럼 하느님의 뜻을 거절한 요셉도
예스할 때까지 그래서 주님의 아버지다운 의로움을 이룰 때까지
어떤 시련을 겪었을 지도 모르지요.

아무튼 요셉의 의로움은 단지 인간적인 의로움이나 율법의 의로움이 아닌,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협력하는 의로움임을 묵상하며
이 의로움을 본받는 우리가 되고자 다짐하는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3월 19일 월요일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마태오 1,16.18-21.24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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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 성인은 모든 상황을 받아들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성모님을 아내로 맞아들이고, 성가정의 수호자가 되어 예수님과 성모님을 보호하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합니다. 불행의 이유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행복의 상황으로 받아들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곁에서 임종하는 이의 수호자이며 거룩한 교회의 보호자로 계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의 이유는 분명히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의 이유만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행복을 만드는 ‘나’를 바라보는 데 집중하시길 바랍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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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에서 깨어난 요셉은 천사가 명령한대로 하였습니다정말 꿈같은 얘기입니다그러니 믿음이 없이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그러나 받아들이는 이에게는 그만한 기쁨이 은총으로 주어집니다결국 하느님의 역사는 그분의 은총과 인간의 협력으로 이루어집니다군말이 필요 없습니다그저 하느님의 뜻을 따른 것입니다깊은 신앙은 어려울 때 드러난다고 하였는데 바로 이 순간이 그의 믿음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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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에서 악마는 동정이었던 하와에게 먼저 말을 건 다음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이 말은 그들에게 죽음을 건네기 위한 말이었다동정잉태의 사건에서는 거룩한 천사가 마리아에게 먼저 말하였고 다음에 요셉에게 말하였다이것은 그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앞의 사건에서는 죄를 위해죽음을 위해 여자가 선택되었고뒤의 사건에서는 구원을 위해 여자가 선택되었다앞의 사건에서는 여자로 말미암아 남자가 넘어졌고뒤의 사건은 동정녀로 말미암아 남자가 일어섰다그래서 천사는 요셉에게 그렇게 말한 것이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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