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3월 18일 사순 제3주간 수요일

Margaret K 2020. 3. 17. 19:16

2020년 3월 18 사순 제3주간 수요일 


 가장 작은 계명 중에 

하나라도 스스로 어기거나, 
어기도록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다. 
(마태 5,17-19)


Whoever breaks one of the least of these commandments
and teaches others to do so
will be called least in the Kingdom of heave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사는 것이 신앙인으로서 합당한 길일까? 나는 아는 것이 별로 없는데 무엇을 해야 할까? 하느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기도는 어떻게 하고 또 무엇을 실천하며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일까?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도 수없이 던지는 질문입니다. 율법은 이런 질문들에 가장 효과적으로 답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율법의 본질적 역할은 잊은 채 글자 그대로 이를 따르는 데에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리하여 율법은 점점 형식화되고 사람들에게 죄의식을 심어 주는 것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자신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도구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은 율법의 의미를 되살렸습니다.

지금도 우리의 삶을 가늠해 보고 성찰할 수 있는 계명과 율법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을 향하여 가는 바른길을 가리키는 이정표이자 우리가 신앙인으로 살아가도록 도움을 줍니다. 따라서 계명과 율법의 가르침을 지키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의미를 깨닫는 것입니다. 율법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율법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여전히 우리에게 하느님의 뜻을 찾고 따르도록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가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우리나라 10대가 뽑은 장래에 가장 되고 싶은 직업 1순위는 무엇일까요? 글쎄 ‘공무원’이라고 합니다. 왜 10대들이 공무원을 선택했을까요? 국가 공무원으로 어떤 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아주 단순합니다. 가장 안정적인 직업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안정 지향적인 기조는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통해 발전과 변화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계적인 투자가인 짐 로저스는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자극적인 나라가 될 수 있는 환경을 가지고 있지만 젊은 청소년들에게 꿈과 열정이 사라지고 있는 점을 보면서 큰 우려를 표시합니다. 그만큼 미래에 발전과 변화를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꿈과 열정 없이 편하고 쉬운 신앙만을 꿈꾼다면 하느님께 대한 뜨거운 체험은 불가능하고 그래서 하느님께 원하시는 방향으로의 변화도 불가능하게 됩니다.

신앙은 먼 미래에 갖는 것이 아니라, 지금 갖는 것입니다. 또 신앙은 할 일 없을 때 갖는 것이 아니라, 할 일이 있을 때 갖는 것입니다. 그래야 지금 이 순간을 더욱더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합니다. 이로써 발전과 변화를 가져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 성조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는 고향과 친척을 떠나 먼 곳으로 가라고 하셨던 하느님의 명령을 주저 없이 따릅니다. 불안한 미래이지만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주신다는 굳은 믿음으로 따랐던 것입니다. 이 명령이 지금의 우리에게도 계속됩니다. 현재에 안주하는 삶이 아닌 새로운 변화, 하느님 나라를 위한 꿈과 열정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는 하느님의 계명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별것 아닌 계명이라고 스스로 판단을 내리면서 쉽게 어기는 것은 물론이고 남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친다면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가 될 것이라고 하시지요.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은 스스로 작은 것 하나라도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결국,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의 뜻만을 내세우는 사람은 결코 큰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자기 기준에 따라서 해석하고 또 이 해석을 사람들에게 강요한다면 하늘 나라에서의 내 위치는 작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일이 바쁘다면서 그 계명을 나중에 실천하겠다고 말씀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의 계명은 지금 이 순간,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아주 작은 것이라도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한 꿈과 열정을 키우기 위해 지금 당장 해야 할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일하는 수도자는 한 사탄에게 괴롭힘을 당하지만, 일을 꺼리는 수도자는 수많은 사탄에게 공격당한다(요한 카시아노).



진정한 성공.

주식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은행이자보다 훨씬 높은 이득을 볼 수 있다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득을 보았다는 사람보다 손해 보았다는 사람이 많이 느껴지는 것은 저만의 느낌일까요?

2000년 초반, 펀드라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사람들이 펀드를 해서 얼마를 이득 보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고, 은행에 갈 때마다 은행 직원은 제게 펀드를 제시했습니다. 계속되는 제안에 펀드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면서 가입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에야 하나의 투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수익률이 계속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괜히 했다’라는 마음만 가득해졌습니다. 물론 손해 보았다고 말하기 힘들 정도로 아주 적은 액수이지만 말입니다.

당시 펀드를 해서 손해를 많이 본 사람은 소위 ‘끝물’이라 불릴 때 가입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나까지 ‘이익을 보자’ 했지만, 오히려 큰 손해를 보게 된 것이지요.

다른 사람과 똑같이 사고하고 따라 한다면 성공할 확률은 없다고 합니다. 실제로 성공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 전혀 다르게 사고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남들도 그렇게 한다면서 주님의 뜻을 따르는 데 주저한다면 주님 안에서 진정한 성공을 거둘 수가 없습니다. 어떤 순간에도 내 내면의 울림에 충실하면서 나의 주님 사랑에 집중할 때 진정한 성공,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커도 사랑이고 작아도 사랑이다

-전삼용신부-


이탈리아에서 주둔하는 미국 군인의 아들인 13세의 소년 바비 힐은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에 대한 글을 읽다가 유럽 지역 미 공군 사령관인 리처드 린제이 장군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제가 아스피린 한 병을 샀어요. 이 약을 아프리카에 계신 슈바이처 박사님의 병원에 낙하산으로 떨어뜨려 주세요.”

린제이 장군은 소년의 편지 내용을 방송국에 알렸습니다. 방송을 들은 유럽 사람들이 모은 약품은 자그마치 40만 불이었습니다. 곧 바비군은 이탈리아와 프랑스가 제공한 비행기에 약을 싣고 아프리카에 갔습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감격해서 말했습니다.

“어린아이가 이런 큰일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저도 이 아이의 나이 때는 다른 사람을 돕고자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큰 사랑, 작은 사랑이 있을 수 있을까요? 작은 황금이 가치가 없다고 믿는다면 큰 황금에 대한 가치도 모르는 사람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작은 계명, 큰 계명을 구별하여 지켜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십니다.

      작은 율법도 무시하면 안 됩니다. 그러다가 큰 율법도 무시하게 됩니다. 사실 작은 율법이 지키기 더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운전하다 갑자기 끼어들기를 하거나 급브레이크를 잡아 이웃에게 피해를 주었다면 이는 작은 율법을 어긴 것입니다. 율법은 ‘이웃사랑’입니다. 이런 일들이 모이면 어떻게 될까요? 인류가 파멸로 이를 수 있습니다. 작은 율법에 대한 무감각은 큰 율법에 대한 무감각입니다. 지금 대기가 오염되어 숨을 쉬기 힘들어지고, 마실 물이 사라지며, 바다는 플라스틱으로 가득 차고, 전염병이 창궐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온 인류를 위협하는 것들이 우리가 작은 율법을 너무 작게 여기기 때문에 발생할 문제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아주 작은 것에서까지 이웃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오히려 이익을 줄 수 있는가만을 생각해야 합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한 어린 영국 군인이 총에 맞아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군목 신부님이 군인의 몸에 손을 얹고 기도하며 유언을 물었습니다.

“제 어머니에게 전해주십시오. 아들은 고통 없이 기쁘게 죽었다고요.”

어린 군인은 짤막하게 말했습니다. 잠시 후 어린 군인은 무슨 중요한 것이 생각난 듯 숨을 헐떡이면서 간곡하게 말했습니다.

“신부님, 한 가지 부탁이 더 있습니다. 제가 다니던 주일학교 선생님께 이 말을 전해주십시오. 저는 선생님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다고요. 그리스도인으로 편안하게 눈을 감게 해주신 선생님께 감사한다고 전해주세요.”

      신부님은 어린 군인의 유언에 따라 주일학교 선생님을 찾아가 마지막 유언을 들려주었다. 주일학교 선생님은 아무 말 없이 한참 동안 눈물을 흘리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습니다.

“저는 지금 주일학교 교사가 아닙니다. 주일학교 교사라는 직분이 대단치 않게 생각되어 그만두었습니다. 그러나 제자의 유언을 들으며 결심했어요. 다음 주일부터 다시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겠습니다.”

      작은 금 조각을 무시하면 큰 금 조각의 가치도 모르는 것입니다. 작은 금도 금이고, 큰 금도 금입니다. 작은 율법을 무시하는 사람은 큰 율법도 무시하는 것입니다. 작은 사랑을 하찮게 여기면 큰 사랑이신 하느님도 하찮게 여기는 것이 됩니다. 완전함은 아주 작은 2%의 차이에 의해 결정됩니다. 하늘에서 아주 작은 사람이 되지 않으려거든 아주 작은 사랑의 실천도 소홀하게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고전과 인생 그리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읽었습니다. 저자인 고미숙 선생님의 강의를 인터넷을 통해서 들어서인지 친숙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쉽게 읽을 수 있지만 제게는 깊이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오늘은 키케로의 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라는 부분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농익은 과일은 가지에서 떨어지듯이 노년이 되어 기력이 떨어지는 것은 자연의 이치라고 이야기합니다. 노년이 되어 쾌락과 욕망이 적어지는 것은 나쁜 주인에게서 벗어나는 자유라고 이야기합니다. 지옥의 불길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노년이 되어서 더 깊이 할 수 있고, 더 많이 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지혜에 대한 탐구와 아름다운 덕을 쌓는 것이라고 합니다. 과학 기술의 발달과 보건 복지의 도움으로 고령화된 사회가 되었고, 노년의 삶을 보내는 분들이 많습니다. 머지않은 날, 제게도 친구처럼 다가올 겁니다. 쾌락과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면, 책을 가까이하고 가진 걸 기쁘게 나눌 수 있다면 노년의 삶은 죽음이라는 새로운 여정을 준비하는 축복의 시간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우정은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라고 합니다. 함께 대화하고, 지혜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노년의 삶은 기쁨의 시간이 되고, 축복의 시간이 될 거라고 합니다. 마시고, 먹는 기쁨의 시간은 줄어들겠지만, 별을 노래하고, 문학을 이야기하고, 예술을 말할 수 있는 시간은 늘어날 거라고 합니다. 제게도 좋은 친구가 있었습니다. 23년 전 IMF는 제게도 경제적인 어려움을 주었습니다.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친구들이 제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저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용기를 얻었고, IMF의 파도를 무난히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고뇌의 순간에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친구도 있었습니다. 명분과 실리의 한 가운데서 고민할 때였습니다. 친구들은 공동체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선택을 하도록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명분 때문에 조금 마음이 아프고, 비난을 받을 수 있겠지만 공동체에 유익한 결정이라면 그것을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제가 뉴욕에서 무난하게 지낼 수 있는 것은 저를 따뜻하게 맞아 주었고, 도와주었던 동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 그러니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듯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내가 이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을 같이 나누어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 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다 알려 주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세상에 나가 언제까지나 썩지 않을 열매를 맺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다 들어 주실 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나의 계명이다.(요한 15, 9 - 17)”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우리가 하느님의 의로움을 드러내면, 우리의 사랑이 열매를 맺으면 우리는 예수님의 벗이 된다고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계명을 잘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당에 나오면서 부부싸움을 한다면, 성당에 나오면서 교통신호를 무시한다면, 성당에 나오면서 주변 사람들의 험담을 한다면, 성당에 나오면서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산다면, 성당에 나오면서 자녀들을 소유물처럼 생각한다면 이는 율법과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승차권을 사지도 않고 버스에 타려고 하는 무임승차입니다. 율법과 계명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방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먼저 실행하는 것입니다. 벗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에 충실해야 겠습니다!

 -양승국신부-

 

멋진 강아지들도 공동체 일원으로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낯선 방문객이라도 영역 안으로 들어오면 최선을 다해 컹컹 짖습니다. 나름 자기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고 아랫쪽을 예리하게 주시하는 모습이 정말 웃깁니다.

 

 “산책 가자!” 하면 얼마나 좋아하는지 펄쩍 펄쩍 뛰고 난리가 납니다. 맛있는 것 들고 나가면 좋아서 한바퀴 돌고 또 돌고 춤을 춥니다.

 

 그런데 강아지들과 함께 살려하니 어쩔 수 없이 작은 메뉴얼들이 만들어집니다. 짜거나 매운 간식은 주지 말아야 합니다. 비가 오면 처마가 있는 뒷쪽으로 옮겨줍니다. 물 당번, 개밥 당번, 산책 당번을 정합니다. 개에 대한 규정이 한 가지씩 한 가지씩 늘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율법이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것들 위주로 단순하게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율법 조항도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율법 학자들은 너무 율법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율법 준수만이 구원에 이르는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길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율법 한 조항 한 조항에 대해 세부적으로 연구했고, 자연스레 법규들은 한도 끝도 없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그 모든 규정들은 단 한치의 빈틈도 없이 일상생활에 적용시켰습니다.

 

 율법의 핵심적인 사상은 뒷전이 되고, 셀수도 없이 많은 율법 조항들을 준수하느라 삶 자체가 피곤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의 삶을 행복하게 해주려고 제정된 율법이 반대로 사람들을 옥죄기 시작했습니다. 율법은 부담이요 족쇄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율법주의에 깊이 함몰되어 율법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 백성들을 눈여겨 보신 예수님께서는 율법 안에 담긴 정신, 가장 핵심적이고 기본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라고 강조하십니다. 결국 셀수도 없이 많은 율법 조항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환원시킴으로 단순화하셨습니다.

 

 가장 작은 계명도 소중히 여기고 충실히 지키라는 예수님 말씀을 묵상하다가 오늘 내 삶 안에서 가장 작은 계명은 대체 무엇인가 생각해봤습니다.

 

 언젠가 나름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가느라 영적생활이 많이 부실했던 때로 기억합니다. 강력한 경고 메시지 하나가 제게 날아왔습니다. 그 메시지를 대하는 순간 그야말로 화들짝 놀랐습니다.

 

 “기도생활이나 영적생활의 모범이요 본보기가 되어야 할 사제로 살아가면서 일반 신자들보다도 못한 삶을 살아간다면 그게 될 말입니까? 하루 가운데 수행하는 영적 직무라고는 고작 초스피드로 끝나는 미사 뿐이라는 것이 부끄럽지 않습니까? 그 미사조차도 영혼이나 정성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으니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따지고 보니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가장 작은 계명이란 가장 기본적인 계명, 가장 기본적으로 이행해야 하는 영적생활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생각해보니 그리 어렵지도 않은 일입니다. 기본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기본적인 기도생활, 기본적인 공동생활, 기본적인 형제적 삶!

 

 서품 때 하느님과 교회 공동체 앞에서 엄숙히 서약한 성무일도의 의무! 힘들더라도, 억지로라도 바치는 게 가장 작은 계명에 충실한 것입니다. 목숨처럼 소중히 여겨야 할 매일의 미사를 최대한의 경외심을 지니며, 지극정성으로 집전하는 것이 가장 작은 계명에 충실한 것입니다.

 

 성모님의 총애를 받는 사제로서 정성껏 묵주기도를 바치는 것이 가장 작은 계명에 충실한 것입니다. 마음과 정성을 다한 영적생활의 결실로 하루하루를 충만히 사는 것, 가장 작은 계명에 충실한 것입니다.

 

 어떤 분들 보면, 아직 기본이 튼튼하지 않은데...다시 말해서 가장 기본적인 영성 생활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뭔가 더 특별한 것, 뭔가 더 화려하고 고상해보이는 것을 추구하고 찾아다닙니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는데, 멀리 물 건너 특별한 곳, 버스 대절까지 마다않고 신통방통한 곳들을 찾아다닙니다. 심각한 영적생활의 불균형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들은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에 충실해야 겠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의외로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가정 공동체 안에, 본당 공동체 안에 진귀한 보물들이 잔뜩 숨겨져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잘 한번 찾아보는 여정을 다시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율법의 완성자

 -반영억신부-   

 

시골 본당 신부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자동차를 운전하고 성당으로 가고 있는데 앞에 트럭이 길을 막고 있었습니다. 왕복 1차선 길에서 얼마나 천천히 가던지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추월해서는 안 되는 곳이지만 속도를 내어 추월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경찰에 잡히고 말았습니다. 면허증을 주면서 죄송합니다.하였더니 그분이 신부님이시네요! 바쁘신가 보죠? 하였습니다. 속이 상해서 제가 잘못하였으니 딱지나 끊으시지요! 말했더니 그냥 가십시오. 다음부터는 천천히 다니십시오. 하며 친절하게 보내주었습니다.

    

 다음날이었습니다. 지역 관할 경찰간부 소양교육에 제가 강사로 초빙된 날입니다. 경찰서장을 비롯하여 70여명이 모여 있었습니다. 저는 전날의 일을 서두로 꺼냈습니다. 제가 잘못을 범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냥 보내주셔서 부끄러움이 더 컸습니다. 정말 좋은 말을 하기는 쉽지만 말 한대로 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앞으로 제가 잘못을 범하거든 앞으로는 꼭 벌점을 주십시오! 한바탕 웃고 나서야 강의를 할 수 있었습니다.

    

 가르치는 대로 행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근본정신을 사랑으로 요약하셨습니다. 율법의 완성은 계명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데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계명 준수만으로는 율법이 완성될 수 없습니다. 교통법규를 지키는 것도 법이니까 지킨다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안전과 공공의 유익을 위해서 그리고 나의 생명을 지키는 차원에서 지킨다면 그것은 큰 사랑의 행위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에 더 신경을 쓰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지만 사소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부터 챙기는 모범을 보여야 하겠습니다. 어떤 모임을 가보면 과속을 한 것이나 음주운전을 한 것을 자랑삼아 얘기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5,19).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과연 언행일치의 삶을 살고 있는가? 지금 마음을 어디에 두고 사는가를 점검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결정한 것은 미루지 말고 그분의 뜻대로 실천하시고 가장 사소한 것이 가장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구약성경의 말씀을 이루려고 오셨다'는 뜻입니다. 완성한다는 것은 부족함을 보완하고 원래의 취지를 되살린다는 의미입니다. 규정에 담긴 정신과 의미, 가르침은 세월의 흐름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현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율법의 완성자이십니다.

    

 따라서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십시오(에페6,6). 그리하여 율법을 완성하는 사람,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으로 불릴 것이다.”(마태 5,19) 

-이영근신부-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으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이는 복음을 예표하고 있던 구약의 율법이, 이제 복음 안에서 완성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에 쓰인 당신에 관한 말씀들이 일어나도록 하심으로써, 율법과 예언서를 완성하셨습니다.

곧 온몸으로 율법과 예언을 실행하셨습니다.

진정,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요한 19,30)고 말씀하심으로써, 이 모든 것이 이루어졌음을 분명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계명을 실행하는 이의 복됨을 말씀하십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으로 불릴 것이다.”(마태 5,19)


이는 먼저계명을 지키는 이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알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 안 것을 말로만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스스로 지킴으로써 계명을 실행하는 이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그렇게 실행으로 가르치는 이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 그레고리우스는 말한 바 있습니다.

설교자에게는 법이 하나 있다. 설교하는 바를 실천해야 한다는 법이다


유명한 설교가였던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도 말합니다.

가르치는 바를 행동으로 파괴시킨다면,

사람이 법을 안다고 자랑하는 것이 쓸모없는 일이다


그렇습니다. 율법은 지켜질 때라야, 비로소 그 행위 안에서 실현됩니다.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안에서 실현됩니다.

그러니 주님의 계명을 안 이는 먼저 계명을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실행하는 이라야 진정 가르치는 이가 됩니다.

그러나 스스로 자신의 의지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스로 한다는 것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이가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계명을 주신 분을 사랑하는 일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사랑이 율법을 완성합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됩니다.”(1요한 2,5)


그래서 그는 <복음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하오니, 주님!

제가 말씀의 계명을 스스로 지킴으로 당신을 사랑하는 이가 되게 하소서.

말이 아니라 행실로 사랑하게 하소서!

행실로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비록 작은 것 하나에라도 깊은 사랑을 담고 행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주님!

말씀을 이루소서.

제 안에 뿌리신 말씀을 지키게 하소서.

제 삶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복된 땅이 되게 하시고, 크신 사랑을 이루소서.

이루어지지 못한 채 폐지되지 않게 하시고, 완성을 이루소서. 아멘.


율법의 완성 ♣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마태 5,17-18).”

이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율법 준수만 강조하는 율법주의자들의 말과 비슷한
말씀으로 보이는데, 이 말씀은 율법주의가 아니라, 계명들과 율법들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일에 관한 가르침이고,
또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37-40).”
계명들과 율법들을 ‘한 자 한 획’까지 다 성실하게 지켜야 한다는 예수님 말씀은,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표현만 다를 뿐입니다.)
사랑이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쏟아 붓는 일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생활이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는 생활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율법의 모든 규정들을 노이로제 걸릴 정도로 소심하고 세세하게
다 지켜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 라고 말합니다.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없이 계명들과 율법들을 억지로 지키는 것,
그것이 바로 율법주의이고, 그것은 계명들과 율법들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계명들과 율법들은 ‘사랑으로’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는 예수님 말씀은,
“사랑을 완성하러 왔다.”는 말씀입니다.

또 예수님 말씀은, 사람들이 자기가 지키고 싶은 것만 지키고,
지키기 싫은 것과 부담스럽고 불편한 것은 안 지키는 태도를
꾸짖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자기가 사랑하고 싶은 부분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전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계명들과 율법들을 큰 것과 작은 것으로,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으로 분류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입니다.
그렇게 분류하다 보면, 꼭 지켜야 하는 율법과 무시해도 되는 율법을
인간 마음대로 정하는 잘못을 범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 가운데에는 ‘빈말’이 없습니다.
그러니 무시해도 되는 율법 같은 것은 아예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들에게 내려 주신 계명들과 율법들은 전부 다
인간들을 위한 것이고,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만든 규정이나 인간 세상의 관습 가운데에는
쓸데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계명들과 율법들을 잘 지키겠다고 인간들이 정한
세부 지침들 가운데에도 쓸데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것들을 폐지하셨습니다.
음식에 관한 규정들을 폐지하신 일이 대표적인 예입니다(마르 7,14-15.19).
구약성경 레위기 11장과 신명기 14장을 보면,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어서는 안 되는 것들에 관한 규정을 하느님께서 직접 명령하신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예수님께서 음식에 관한 규정들을 폐지하셨기 때문에,
그 규정들은 하느님께서 정하신 율법이 아니라,
인간들이 만든 규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 구약성경은 예수님 말씀을 기준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구약보다 신약이 우선입니다.
음식에 관한 규정들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1,45).” 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실천하기 위해서
인간들이 만든 실천 지침으로 해석됩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유대인들은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하느님의 명령은
잊어버리고, 음식에 관한 규정들에 대해서만 집착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마르 7,9).” 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런 유대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9).”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어떤 계명이나 율법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서 안 지키고,
또 그 계명과 율법은 안 지켜도 된다고 사람들을 가르치는 자”입니다.
그래서 그런 자는 그 자신도 계명과 율법을 안 지키는 죄를 짓는 자이고,
동시에 ‘남을 죄짓게 하는 자’입니다.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라는 말씀은,
“그런 자는 하늘나라에 못 들어간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 자들도(마태 23,3) 그런 자들입니다.
가르치는 일을 잘하긴 하는데(강론이나 설교나 강의를 잘하긴 하는데),
그 자신의 ‘삶’은 그렇지 않을 때, 그것이 바로 ‘위선’입니다.
배우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배우는 사람은 가르치는 사람의
말만 듣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 사람의 삶을 보면서도 배웁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사람이 위선자라면 배우는 사람도 위선자가 될 것입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위선자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사람의 말을 안 들을 것이고,
듣기는커녕 비웃을 것입니다.
만일에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신앙인들의 ‘삶’이 복음적이지 않다면,
세상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기는커녕 비웃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의 복음적이지 않은 삶은 복음을 모독하는 죄가 됩니다.)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말과 행실에서 신앙생활의 모범이 되는 사람입니다.
우리 교회가 모범적인 신앙인들을 성인으로 선포할 때 가장 먼저 보는 것은
바로 그분들의 ‘삶’입니다.
(“신앙인답게 사는 것이 곧 성인답게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인이 되는 것은 어려운 일 같으면서도
사실은 쉬운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5,17-19: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남에게도 지키도록 가르쳐라

예수님은 율법을 없애러 오지 아니하고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식사의 신비를 당신의 수난으로 완성하셨을 때 율법을 완성하셨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사람들이 건네준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고 하심으로써 당신에 관해 쓰인 율법과 예언서의 말씀이 모두 이루어졌다고 분명히 보여주셨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의 파스카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기 때문입니다.”(1코린 5,7)라고 한다.

 

그러므로 거룩한 계명들은 어느 것 하나도 폐지해서도 고쳐서도 안 된다. 모든 것을 그대로 보존하며 잘 가르쳐 하늘 나라의 영광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인간적으로 작고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하찮은 것이 아니라 필요하게 여기신다. 주님께서는 그 계명들을 모두 가르치셨고 또 지키셨기 때문이다. 작은 것들도 하늘나라라는 위대한 미래를 가리킨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17) 율법과 예언서는 둘 다 유효하다. 이 책들을 보면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들과 살아가는 일에 관한 법이 담겨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를 둘 다 완성하셨다.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 그 율법을 완성하게 될 것이다. 말씀을 실천하며 우리는 주님의 계명을 완성해 갈 것이다.

 

우리에게는 주 하느님께서 만드실 새 하늘과 새 땅이 약속되어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되면, 그에 따라 옛 것은 사라질 것이다.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18)라는 말씀은 율법에서 가장 작다고 여겨지는 것조차도 영적 상징으로 가득 차 있으며, 이 모든 것이 복음서에 요약되어 있음을 알려주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19)는 곧바로 지옥과 벌을 떠올려야 한다. 이 계명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마지막 날에 가장 작은 자, 내쳐진 자요 말째가 되어 벌을 받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제쳐 놓는 이는 누구나 당신과 맞서는 자로 여겨 옆으로 제쳐 놓으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 업신여김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지금 중요한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다. 부활을 향한 여정을 계속하고 있다. 이것이 단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행사로만 끝난다면, 우리가 맞는 부활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 부활은 우리 자신의 새로운 탄생을 촉구하고 있으며, 또한 영광스러운 나 자신의 하느님 안의 변화를 요청하고 있다. 여기에 우리가 부활을 축하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제 하느님의 사랑의 계명을 통하여 우리 자신이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올바로 실천하도록 하자.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 17)

-한상우신부-

아무리 좋은 것도
폐지하기는
쉬워도 완성하기는
어렵습니다.

완성은 여정을
필요로합니다.

사랑의 완성은
수난을 통해
완성의 여정을
걸어갑니다.

핑계와 이유가
너무 많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뜨겁게 사랑하지
않는 우리들의
인색한 사랑입니다.

완성을 향해
가야할 우리들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 하나씩
사랑으로
가까워지십니다.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율법을 핑계삼아
너무 쉽게
빠져나갑니다.

예언서에서
수난과 죽음을
무시합니다.

율법과 예언서는
사랑으로
접근해야합니다.

하느님이
계시기에 율법이
있고 예언서가
있습니다.

율법과 예언서들
모두 하느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되심으로
십자가의 여정으로
사랑을 완성하십니다.

모든 사랑을
완성하시는
주님이심을
믿습니다.

완성의 길을
십자가와 함께
걸어갑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율법'에 대해 들려 주십니다.

제1독서인 신명기는 모세가 요르단 건너편 모압 땅에서, 온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주님의 진노로 모세는 요르단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되지요. 그는 40년간 광야에서 이끌어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님의 율법을 자세히 전합니다.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신명 4,7)
"이 모든 율법처럼 올바른 규정과 법규들을 가진 위대한 민족"(신명 4,8)

이스라엘 민족은 두 가지 이유로 위대합니다. 하느님께서 친히 뽑아 동행해 주시는 존재이고, 또 율법을 가진 백성이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이는 곧 이스라엘이 스스로 위대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위대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율법은 나와 하느님, 나와 공동체, 나와 모든 피조물, 나와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보호하는 규정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주신 법이니 그 근본 정신은 "사랑"일 수밖에 없지요. 이 "사랑"이라는 원천에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세부 항목들이 분화되어 나옵니다.

"너희는 오로지 조심하고 단단히 정신을 차려"(신명 4,9)

그런데 사랑이라는 근본 정신으로 율법을 살아가는 이에게 율법은 친절한 안내인이 되는 반면, 무수한 세부 항목들에 질식되어 하나라도 어길까봐 신경을 곤두세우고 사는 이에게는 매서운 심판관이 됩니다. 율법이 무거운 짐이 되어 버리지요.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율법이 하느님 자리를 차지해 버린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님을 경계합니다. 강생하신 하느님으로서 예수님 자신이 살아 움직이는 율법이시건만 이스라엘은 죽은 문자를 움켜쥐고 버팁니다. 당신처럼 사는 것이 율법을 사는 삶이라고 예수님이 온 몸으로 역설하고 계셔도 도무지 먹히질 않지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마태 5,18)

십자가의 희생 제사로 사랑을 완성하실 예수님은 이미 율법과 하나이십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은 사랑이고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우리도 사랑으로 완성되어 갈수록, 아니, 사랑이 되어 갈수록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던 하느님 모상으로서의 본성이 일깨워집니다. 그러면 사랑이 사랑을 깨워 자연스럽게 배어들고 표출되게 되지요. 이제는 어떤 인위적이고 가식적인 계산이 불필요하게 됩니다. 그쯤 되면 사랑을 배우기 위한 첫걸음 안내서에 시시콜콜 매달릴 일이 줄어듭니다. 이미 존재 안에 새겨졌으니 "잊지 않도록 ... 마음에서 떠나지 않게"(신명 4,9) 기억하면서 사랑을 살면 되니까요.

"주님 저에게 생명의 길 가르치시니 당신 얼굴 뵈오며 기쁨에 넘치리이다"(영성체송).

시편 저자는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한 이에게 펼쳐질 지복직관의 행복을 노래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가르치신 생명의 길은 주님의 말씀이고 또 그분의 삶입니다. 마음을 다해 이를 따라 걸은 이는 사랑 안에 완성되어 하느님의 얼굴을 마주 뵈올 것입니다. 기쁨에 넘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 길 안에 있는 도반들입니다.

길잡이이신 주님의 계명  
-김찬선신부-


제가 막내라고 하면 거의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랍니다.
전혀 막내같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냐고 물으면 막내는 남 의식치 않고
자기 좋을 대로 하는 편인데 그렇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사실 저는 자기 검열을 하면서 살아왔는데
그것은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제가 애비없는
후레자식 소리 듣지 않으려고 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입니다.

무엇을 할 때마다 이렇게 해도 되나?
이렇게 하면 애비없는 후레자식 소리 듣는 것 아닌가?
이런 자기 검열을 매번 한 거지요.

그리고 제가 사춘기에 접어들어 방황을 할 때나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되면 여지없이 '아버지가 계시면 얼마나 좋을까,
내 옆에 계시면 이런 때 가르침이나 지침을 주실 텐데'라고 생각하고,
소신학교 방학 때 집에 와 있을 때는 아버지 무덤에 자주 가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무덤에서 아버지께 여쭈면 답을 주시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느님을 만나기 전까지이고 인생의 방황과
신앙의 방황이 끝나고 하느님을 만나고 나서는
복음 말씀이 아버지 없어도 어떻게 살지를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저는 엘리사가 엘리야의 겉옷을 늘 지니고 다녔듯이
제가 늘 입고 다니던 아버지의 야점 잠바를 더 이상 입지 않고
조카에게 유물로 물려주고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옷입었습니다.

이것은 배가 오랜 항해 끝에 항구에 닻을 내리듯
참으로 긴 인생과 신앙의 방황 끝에 얻은 안정과 평화였습니다.
물론 이후 방황이나 어려움이 없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나이 먹을수록 그리고 큰 책임을 맡을수록 그만큼 더 큰 문제가 해결해야
하고 그만큼 고민도 컸지만 이제는 물어볼 곳이 있어서 든든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늘 함께 계시고 복음을 통해서 말씀을 주시니
어디 가서 물어봐야 하나 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된 거지요.

이런 하느님과 하느님의 말씀을 가진 저는 오늘 모세가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또한 내가 오늘 너희 앞에 내놓는 이 모든 율법처럼 올바른 규정과
법규들을 가진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고 한 것처럼
하느님과 하느님 말씀 때문에 참으로 복되고 위대합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말씀과 계명을 원치도 않은 것을 지키라고 주신,
부담스러운 것으로 생각지 말고,
가야 할 나의 길을 안전하게 갈 수 있도록 길잡이로 주신 것으로
생각하고 고맙게 여겨야 합니다.

그런데 법에 이런 고마운 면도 있지만 법이 지나친 경우도 있습니다.
지나치게 법에 매달려 사랑으로 해결할 수 있고,
사랑으로 해결해야 할 것을 법으로 다 해결하려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이 없을 경우 고소고발이 난무하고,
사랑이 없을 경우 법은 힘없는 사람이 아니라 힘있는 사람 편이며,
사랑이 없을 경우 법을 자기에게 적용하기보다는 남에게 적용하며,
법으로 사람을 살리려 하기보다는 단죄하고 심지어 사법 살인까지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없으면 법은 해롭고
사랑이 있으면 법은 무용한 것임을 다시 한번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3월 7일 사순 제3주간 수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