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16일 사순 제3주간 월요일
2020년 3월 16일 사순 제3주간 월요일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루가 4,24ㄴ-30)
No prophet is accepted
in his own native plac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루카 복음에서 예수님의 공생활을 본격적으로 알리는 사건은 나자렛 회당에서의 설교입니다. 이 설교에서 예수님께서는 구약 성경의 두 예언자 이야기를 통하여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이 선포된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엘리야 예언자 시대에 비가 내리지 않아 가뭄과 기근이 들자 하느님께서는 엘리야를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 보내십니다. 사렙타는 이방인의 지역입니다. 과부와 아들은 한 줌의 밀가루와 그것을 간신히 구울 수 있을 정도의 기름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언자에게 마지막 남은 밀가루와 기름으로 빵을 대접하고, 그 이후에 그 집에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습니다(1열왕 17장 참조).
엘리사 시대에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하여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 주십니다. 용맹한 장수였지만 나병 환자였던 나아만은 사마리아 예언자의 소문을 듣고 이스라엘의 임금에게 병을 낫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이때에 엘리사 예언자가 나아만의 나병을 낫게 하자, 그는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시리아 사람 나아만도 이방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구약 성경에 나오는 이방인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이를 통하여 루카는 하느님의 구원이 유다인만을 향하지 않고 이방인도 포함한다고 강조합니다. 예수님 이전에 구약 시대에도 이미 하느님께서 엘리야와 엘리사를 사렙타의 과부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에게 보내시어 이방인을 구원하셨다는 것을 되새겨 줍니다. 이것은 유다 민족에게만 구원이 주어진다고 믿었던 당시의 유다인에게는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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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미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백인 사복경찰 4명이 잠복을 하던 중에 ‘기니’에서 이주해 온 22세 흑인을 총으로 쏘아 죽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청년은 전혀 죄가 없었고 어떤 혐의도 없었습니다. 단지 백인 사복경찰 4명을 보고 겁을 먹은 표정을 지었다는 것, 또 그 4명을 강도로 생각해서 자신의 지갑을 꺼내주려다가 총에 맞은 것입니다.
백인 사복경찰은 자신들을 보고 겁을 먹었다는 사실에 용의자로 생각했던 것이고, 지갑 꺼내는 것을 총 꺼내는 것으로 오인해서 총을 쏜 것이었습니다.
판단의 오류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겉모습을 보고서 그 사람의 의중을 알 수 있다는 것 역시 틀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판단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블링크’의 저자이자 사회 심리학자인 글래드 웰은 말합니다.
“우리가 순간적으로 결정을 내릴 때는 고정관념과 편견에 정말 취약해진다.”
예수님에 대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고정관념과 편견도 지금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들이 거룩한 예언자나 아주 비범한 인물에게서 이루어지리라고 믿고 있었지요. 따라서 예수님의 그 모든 말씀과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그릇된 확신을 깨뜨리십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사렙타 과부에게만 갔고, 엘리사가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고쳐주었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완고한 이스라엘 대신 장차 당신을 맞아들여 치유 받을 다른 민족들의 교회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사람들은 처음에는 놀랐다가 나중에는 격렬한 분노를 느낍니다. 자신들의 고정관념과 편견을 깨뜨리는 이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은 질투 때문이었습니다. 별로 특별하지도 비범하지 못하다고 생각한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이들을 보면서 질투를 갖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일을 함부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자그마한 우리 머리를 뛰어넘는 주님의 일에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모습.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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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편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세상에 알려진 것으로, 시청자들에게 자극을 주기 위해 문맥을 빼버리고 때로는 표정만을 삽입하는 편집을 해서 방송에 내보내는 것입니다. 분명히 본인이 했던 말과 행동이지만 편집을 통해 전혀 다른 의도로 비칩니다.
2012년 미국 플로리다 주의 조지 짐머먼 사건이 크게 주목된 적이 있습니다. 동네 자경단 소속인 짐머먼은 마을을 수상하게 걸어 다니는 흑인 트레이먼 마틴을 보고는 911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 후 짐머먼은 총으로 마틴을 쏘아 사망하게 합니다. 이를 정당방위인지 인종차별인지에 대한 것을 봐야 할지 관심이 집중되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한 방송사에서 911의 통화 내용이 공개된 것입니다. 그 내용은 짐머먼이 911 응답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저 친구가 나쁜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아요. 흑인처럼 보여요.”
사람들은 짐머먼이 인종차별주의자로 처벌되어야 한다고 시위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이 짐머먼의 말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911 응답원의 질문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 친구 백인이에요? 흑인이에요? 아니면 히스패닉이에요?”
이렇게 질문을 받았기에 “흑인처럼 보여요.”라고 답변했을 뿐이었습니다.
우리의 판단은 옳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올바른 판단은 주님만 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도 함부로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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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고를 들을 때 화가 난다면 나의 확신에 교만이 붙어있기 때문이다.
-전삼용신부-
히틀러가 제2차 세계 대전 때 망한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는 그의 불같은 성격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히틀러는 머리가 명석하고, 관찰력이 깊고, 예리한 판단력과 비상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지만, 어찌나 화를 잘 내는지 자기의 비위를 조금만 거슬려도 미움과 분노가 충천하므로, 그의 부하들은 사실을 제대로 보고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의 가장 큰 실수 중 하나는 영국과 프랑스 등 자유 진영과 힘겨운 전쟁을 하면서도 참모들의 말을 무시하고 주력부대를 빼돌려 러시아를 침공하였는데, 바로 이것이 그의 일생에서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상과는 다르게 러시아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고 러시아의 크기와 날씨 탓에 히틀러의 군대는 전멸하다시피 하였습니다.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개시했을 긴박한 상황에서도 히틀러는 참모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합니다.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을 감행한다는 정보를 들었을 때, 러시아로 향하는 기갑 사단을 만 쪽으로 돌렸다면 상륙을 저지할 수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나에게 충고를 할 때 화를 낸다면 그 사람의 미래는 암울할 뿐입니다.
오늘 독서에 나아만이 엘리사를 통해 나병이 치유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나아만은 시리아 사람이었는데 거의 자신들의 속국이나 다름없는 이스라엘로 나병의 치유를 위해 내려옵니다. 이때 엘리사는 나아만 장군이 도착했을 때 밖을 내다보지도 않고 심부름꾼을 시켜 요르단 강에서 몸을 씻으라는 말을 전합니다. 미국 국방성 장관이 한 시골 본당 신부를 찾아왔는데 내다보지도 않고 냇가에 가서 목욕이나 하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아만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무시당한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화는 일반적으로 자신을 스스로 들어 높인 사람들의 전유물입니다. 이때 부하들이 “아버님, 만일 이 예언자가 어려운 일을 시켰다면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아버님께 몸을 씻기만 하면 깨끗이 낫는다고 하지 않습니까?”라고 설득합니다. 그러자 마음이 누그러져 엘리사가 시키는 대로 하였고 그 덕분으로 나병이 치유됩니다. 나아만은 화를 이기고 자신의 의견을 바꿀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나자렛 사람들에게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라고 하시며, 나아만과 사렙타 과부의 사례를 그 예로 들었을 때 나자렛 사람들은 화를 내며 예수님을 절벽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들이 만약 화가 난다는 것을 통해 자신들의 믿음이 교만과 하나가 되어있음을 깨달았더라면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간을 이식해주려면 간과 붙어있는 쓸개도 함께 잘라내야 합니다. 간만 따로 잘라서 이식해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지금 기술상으로는 간에 붙어있는 쓸개를 분리하고 자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나 확신을 바꾸기가 어려운 것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 믿음 안에는 믿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얽힌 것들이 함께 있기 때문에 그 믿음을 바꾸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럴 때 자주 쓰는 방법이 ‘화’라는 감정입니다. 화를 내어서 분명 자신에게 화가 나니 자기 생각이 옳다고 스스로 속이는 것입니다. 화를 자신의 확신을 바꿀 수 없는 자기 합리화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신천지에 빠진 이들이 왜 신천지에서 빠져나오기 힘든 것일까요? 사실 교리는 허접하기 짝이 없다고 합니다. 거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몇 달 동안 친구들과는 다 끊어지고 남은 사람들이 자신들 주위에서 자신을 따듯하게 맞아준 신천지 신도들뿐이기 때문입니다. 교리만이 아니라 소속감이 주는 안정감 때문에 그것을 잃기 싫은 것입니다. 또 하나는 자신들이 몇 달, 몇 년 동안 확신을 두고 믿었던 것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기 어렵기 때문에도 그렇습니다. 그 믿음을 버린다는 것은 자신이 바보였음을 인정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창피해서 믿음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믿음을 바꾸라고 충고하면 성을 내며 그 핑계로 절대 믿음을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을 바꾸는 것은 곧 자신을 버리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만약 나에게 무언가를 충고할 때 화가 올라온다면 이는 분명 암세포가 섞인 오염된 확신입니다. 분명 그 확신과 나의 교만이 함께 붙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확신은 바꾸는 것이 좋습니다. 교만에 의해 생긴 믿음이기 때문에 그것이 진리일 확률이 매우 희박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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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신부-
‘나비효과’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작은 것이 큰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나비가 날개 짓을 하면 그것이 태평양 넘어 아시아에 태풍이 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인류의 문화와 역사는 예상하지 못했던 작은 일들로 커다란 변화를 겪기도 했습니다. 보건과 위생에 대한 관념이 지금과는 달랐던 중세시대에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에 의한 전염병은 커다란 재앙이었습니다. 전염병은 부자와 가난한 자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전염병은 남자와 여자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전염병은 종교인과 비종교인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전염병은 선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교회의 권위에 의존했던 사람들은 새로운 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았던 작은 세균이 인류의 사상과 문화를 바꾸는데 커다란 영향을 주었습니다.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의학이 발달하면서 전염병의 원인이 세균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전염병을 치료하고, 예방하면서 하느님의 자비와 교회의 권위에 의존하던 사람들은 인간의 노력과 의지를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인간 중심의 새로운 사상이 등장하였고, 인간 중심의 사회가 형성되었습니다. 신분과 계층으로 이루어지던 사회는 모두가 동등한 권리와 자유를 누리는 사회로 변하였습니다. 산업이 발전하면서 농촌 중심의 사회는 도시 중심의 사회로 변하였습니다. 세균보다 훨씬 작은 바이러스가 과학이 발전한 21세기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교통수단의 발달, 대도시에서의 생활은 바이러스에 의한 전염병이 빠르게 확산되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인간 중심의 사고와 사상이 만들어 놓은 성벽도 안전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생태계와 인류의 역사에만 나비효과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에도 나비효과가 있습니다.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은 전쟁터에서 많은 공로를 세웠습니다. 부러울 것이 없는 삶이었지만 나병환자였습니다. 전쟁에서의 승리도, 많은 사람의 칭송도 나병환자인 나아만에게는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하루하루 몸은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나아만 앞에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잡혀온 작은 소녀가 나타났습니다. 소녀는 나아만을 엘리사에게 소개해 주었습니다. 엘리사는 요르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의심하였지만 부하들의 말을 듣고 몸을 씻었습니다. 나아만의 몸은 깨끗해졌습니다. 나병이 치유되었습니다. 나아만이 소녀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아만이 소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전쟁에서는 승리자였을지 모르지만 고통과 좌절 속에서 인생을 보냈을 것입니다.
2000년 전 갈릴래아의 호숫가에서도 작은 바람이 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기 잡던 어부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와 복음 선포는 찻잔 속의 태풍인줄 알았습니다. 로마의 권위와 힘이 태풍이 되어서 이스라엘을 지배하였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기득권과 권위는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보였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바람은 멈춘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고, 예수님의 바람은 이스라엘을 넘어 온 세상으로 전해졌습니다. 희생의 바람, 겸손의 바람, 사랑의 바람, 희망의 바람은 이기심과 욕망, 교만과 시기심으로 이루어진 바벨탑을 무너트렸습니다.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강물이 나아만을 치유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불가능이 없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치유된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사랑의 눈으로, 희망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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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발이 중요하다
-반영억신부-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선입견과 고정관념에 가득 차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전해 주시는 복음을 귀담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어떤 말씀도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듣고 싶은 만큼 듣고, 보고 싶은 만큼만 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은 나자렛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도 그러한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나를 비추어보기보다는 나의 잣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내 입맛에 맞게 선택하고 맞지 않으면 흘려버립니다.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진리이고 능력이 넘치지만 그 능력을 간과하고 사는 것이 현실입니다. 사실 하느님에 대한 알량한 지식과 편견이 그분과의 만남을 가로막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안다는 것이 장애가 되지 않을 수 있는 겸손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수 있도록 부드러운 마음을 달라고 청하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돌같이 강한 마음을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시켜 주시길 기원합니다.
회당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무지를 일깨워 주실 때 오히려 화를 내고 들고 일어나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 자기들의 기득권과 자존심을 지키려 취한 방법이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기득권을 포기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면 더 큰 존경과 권위가 살아날 것인데 눈앞의 이익을 위해 악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니 첫발이 중요합니다. 선을 택할 수 있는 첫 발이 그의 미래를 열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어떤 태도를 취하든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습니다”(루카4,30). 그야말로 정면 돌파를 하신 것입니다. 결코 어둠이 빛을 이길 수는 없는 법입니다(요한1,5-9). 그런 확신으로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현실과 타협하고 싶은 충동을 받습니다. 그리하면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 나만 바보처럼 손해를 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적당히 눈 감으면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의심과 배척,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당신의 가실 길을 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넘어지시고 또 일어서시는 십자가 길의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 대한 사랑을 일깨웁니다. 진정 “사랑은 크면 클수록 행동치 않을 수 없고, 진실 될수록 님의 사랑을 드러냅니다”(박병해 신부).
예언자도 예수님께서도 미움과 배척을 받으셨으나 그분의 말씀은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말씀에 순명할 수 있는 은혜를 청합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55,10-11).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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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 4,24)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 4,24)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예언자’로 자처하시면서, 예언자가 자기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배척하고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그들은 들고 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습니다.”(루카 4,29)
이는 예수님의 전 생애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받으실 배척을 예고해줍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또 다시 성문 밖으로 내몰리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동시에, 이 사실은 이스라엘 밖으로 당신 구원이 퍼져나가게 될 것을 예시해줍니다.
곧 완고한 이스라엘 대신 장차 당신을 맞아들이게 될 다른 민족들의 교회를 미리 가리켜줍니다.
그러나 그분을 죽이려는 그들의 음모는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습니다.”(루카 4,30)
이는 당신이 수난을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당신이 고난을 받으실 때가 아직 오지 않은 까닭입니다.
때가 되면, 당신께서는 수난을 스스로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강제로 끌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몸소 당신을 내어주실 것입니다.
실로 당신은 원하시면 붙잡히시고, 나무에 달리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덕 위 벼랑에까지 그분을 떨어뜨리려 내몰아갔지만, 그들 한가운데를 유유히 가로질러 가시는 그분을 그 누구도 어찌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직 수난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완고하여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거역하였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고집부리는 사울을 꾸짖을 때, 사무엘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1사무 15,23)
그러기에, 우리는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을 고집할 때, 자신이 만들어 놓은 자신의 피조물인 자신의 생각을 섬기고 따르는 우상숭배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 우상을 벗어나야,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됩니다.
믿음은 자기에게서 빠져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지, 하느님을 자기의 좁은 지식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완고함이야말로 불신의 씨요, 믿음이야말로 하느님을 끌어당기는 자석입니다.
그러니, 오늘 <말씀>은 완고함과 고집으로 형제를 불신하고,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를 믿음에로의 초대입니다.
주님! 오늘 제가 결코 당신을 배척하지 않게 하소서!
저에게서 결코 당신을 배척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소서!
제 형제를 배척하는 바람에 당신을 배척해버리는 일이 없게 하소서!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루카 4,30)
주님!
원하시어 붙잡히시고 원하시어 빠져나가신 당신께서는
원하시어 고난을 받으시고 원하시어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벼랑에 내몰려도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가셔야 할 길을 유유히 가시는
당신을 따라 유유히 걷게 하소서.
당신이 원하시는 바를 저도 원하게 하시고,
당신이 원하시면 저도 따라 걷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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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송영진신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루카 4,24ㄴ-27).”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섬기려고 오신 분입니다(루카 22,27).
따라서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고향 사람들이 당신을 환영하지도 않고 존경하지도 않는 것이 서운해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을 안 믿던 이방인들도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하느님을
믿는다는 너희는 왜 복음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느냐?” 라고
유대인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을 언급하신 것은,
“하느님의 은총은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만 받는다.” 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이고, 동시에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이라는 특권의식과 자만심에
빠져 있는 유대인들을 꾸짖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즉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똑같은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마태 5,45).
그러나 그 은총은 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 받게 되고,
안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못 받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안 주셔서 못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안 받아서 못 받게 됩니다.)
‘은총을 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사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느님의 선택이 유대인들에서 이방인들로 넘어간 이유를
설명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나중에 취소하실 일은 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이라는 지위를 잃은 일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선택을 취소하신 일이 아니라,
유대인들 자신들이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살지 않아서 잃어버린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들은 복음의 관점에서 보면 여러분이 잘되라고 하느님의 원수가 되었지만,
선택의 관점에서 보면 조상들 덕분에 여전히 하느님께 사랑을 받는 이들입니다.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은 철회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로마 11,28-29).”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구원 문제를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
또 하느님과 예수님의 구원사업은, 또는 우리가 구원받는 일은,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닌”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유대인들이 모든 기회를 다 잃어버린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들도 불신을 고집하지 않으면 다시 접붙여질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접붙이실 능력이 있으십니다. 그대가 본래의 야생 올리브 나무에서 잘려
나와, 본래와 달리 참 올리브 나무에 접붙여졌다면, 본래의 그 가지들이 제 올리브
나무에 접붙여지는 것이야 얼마나 더 쉬운 일이겠습니까?(로마 11,17-24)”
누구든지 진심으로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하느님께서 본래의 가지들을 아까워하지 않으셨으면, 아마 그대도 아까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인자하심과 함께 준엄하심도 생각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떨어져 나간 자들에게는 준엄하시지만 그대에게는 인자하십니다.
오직 그분의 인자하심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도 잘릴 것입니다(로마 11,21-22).”
이 말은, 그리스도교 전체 교회를 향한 경고이기도 하고,
각 개인을 향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유대교의 자리를 그리스도교가 차지하긴 했지만,
제대로 살지 않으면 유대교처럼 잘려 나갈 수 있습니다.
개인의 경우에도 끝까지 충실한 사람들만 살아남을 것입니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요한 15,2).”
예수님에게 붙어 있는 가지라면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즉 신앙인이라면 신앙인답게 살면서 구원과 생명이라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렇게 노력하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질” 것입니다(요한 15,6).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는 말은 아예 혼잣말로라도 꺼내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루카 3,8).”
신앙인답게 살지 않는다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은(세례대장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돌들만큼의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만으로는,
구원과 생명을 자동적으로 보장받지 못합니다.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루카 4,28-30).”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화를 내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나자렛 사람들의
모습은, 그들이 특권의식과 자만심에 사로잡혀 있음을 잘 드러내는 모습입니다.
만일에 그들이 충실하게 하느님 뜻에 합당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면,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반성하고, 회개하면서,
더욱더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회개해서 구원받기를 바라셨기 때문에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인도하시는 쪽으로 가지 않고 반대쪽으로 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라는 말은,
그들을 ‘버려두고’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셨다는 뜻인데,
겉으로 보기에는 예수님께서 그들을 버리신 것이지만,
실제로는 그들 자신들이 하느님과 구세주에게서 떨어져 나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잃은 양’을 찾으려고 애쓰시는 착한 목자이신 분이지만, 양 자신이
스스로 목자를 등지고 떠나버리면, 목자도 그 양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 오늘날에도 여러 가지 방식과 여러 가지 통로를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내리고 있습니다.
만일에 우리가 그 말씀들을 듣지 않고 세속의 헛된 소음들에 귀를 기울인다면,
우리도 나자렛 사람들과 다를 것 없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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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욱현신부-
복음: 루카 4,24-30: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예수님은 당신이 자라나신 고향과도 같은 나자렛을 당신의 공생활 초기에 방문하신다. 나자렛을 위하여 방문하셨지만 나자렛 사람들의 태도는 달랐다. 그들을 회당에서 가르치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24절)고 하시면서 하느님 앞에 회개하라고 하신다. 나자렛 사람들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믿음으로 대하지도 않았다.
예수께서는 구약의 엘리야가 찾아간 사렙타 마을의 과부 이야기와 엘리사 시대에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을 고쳐주신 이야기(24-27절)를 하시면서, 기적을 팔레스티나 밖에서 행하신 것은 바로 당신의 백성들이 믿음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사실 사렙타 마을의 그 과부(1열왕 17-18장)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 장군(2열왕 5장)이 얼마나 큰 신앙을 입증해 보여주었나를 알 수 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의 영역을 넓혀주고 확장시킨다. 예수님을 자신의 편의와 이익을 위해서만 잡아두려고 하는 것은, 즉 하느님을 나의 편의와 이익만을 위해서 이용하려고만 한다면, 그것 자체가 이미 하느님의 보편적인 구원계획과는 거리가 먼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더 이상 새로운 길로 나아가지 못하고 하느님께서 제시하시는 새로운 일들도 받아들일 마음의 문을 열 능력도 없게 된다.
바로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께서 선포하신 새로운 것들에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에게 적개심을 갖게 되었고 그분을 배척하고 마침내 그를 죽이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분이 불편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선 영원한 예언자이신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는 어떤가? 그분은 어떤 면에서 ‘불편한’ 분이시다. 이 불편한 분의 말씀에 부응하여 우리 자신을 변모시켜 나가고자 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자렛 사람들과 같이 폭력은 행사하지 않았더라도 그분에게 어떤 제약을 가하려 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결국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산벼랑으로 예수를 끌고 가 그 곳에서 떨어뜨려 죽이려고 한다. 사람이 악하다는 것이 여기서도 드러나고 있다. 거부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곧 박해로, 죽음에로까지 가게 하는 인간의 잔인성이 보이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 안에도 어떤 면에서 이러한 나자렛 사람들의 모습이 나타날 수도 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면서도,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선지식으로, 혹은 선입견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못한고 만다면, 그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 주님을 산벼랑으로 밀어내어 죽이려고 하지나 않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항상 주님의 자녀로서 어떠한 판단을 갖지 않고, 이웃에게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고 실천하는 삶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우리가 되도록 은총을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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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 4, 24)
-한상우신부-
들여다보면
우리모두
사랑과 인정이
필요한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서로를
존중하는 것은
인간관계 안에서
가장 기본적인
법칙입니다.
참된 만남을
방해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의
선입견입니다.
선입견의 칼날은
언제나 서로를
향합니다.
다양한 길을
인정하지
않는 우리들의
선입견입니다.
차갑고 차가운
시선이 우리를
더더욱 아프게
찌릅니다.
선입견과 믿음은
신앙안에서
함께 걸어갈 수
없습니다.
아픔을
치유하는 것이
믿음이라면
선입견을
깨뜨리는 것또한
믿음입니다.
선입견을
내려놓는
가르침이
참된 믿음의
길입니다.
믿음으로
돌아가는 길은
선입견을 내려놓는
길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은 믿음이지
선입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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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독서들에는 '나아만'이라는 장수가 동시에 등장합니다. 이방인이고 나병환자였던 그는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순종하여 치유를 받았습니다.
"나는 당연히 그가 나에게 나와 서서 ... 고쳐 주려니 생각하였다"(2열왕 5,11).
물론 그의 치유가 순조로웠던 건 아닙니다. 나아만 자신이 나름의 선입견과 기대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영접까지 바란 것은 아니었겠지만 적어도 뭔가 눈에 보이는 주술적 치료 행위를 기대했을 겁니다. 그러니 엘리사의 비대면 말씀 전달 방식이 못내 서운했을 터이고, 게다가 그저 강물에 일곱 번 씻으라는 지극히 평범한 처방전도 못마땅했겠지요.
"하느님의 사람이 일러 준 대로"(2열왕 5,14)
다행히 나아만은 인복이 많은 사람이었지요. 감히 부하들이 나서서 예언자의 말을 따르도록 그를 설득했으니 말입니다. 그는 따랐고 깨끗해집니다!
사실 기적의 효험은 요르단 강물보다는 말씀에 있습니다. 심부름꾼을 시켜 전한 예언자의 "말"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알아듣고 순종한 덕입니다.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2열왕 5,15).
하느님의 은혜를 입은 이방인 장수 나아만이 고백합니다. 이 선언이 국경 안의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피 한 방울 안 섞인 국경 밖의 사람에게서 나왔다는 것이 더욱 의미 있습니다. 하느님은 한 민족이 독점할 수 없는 온 인류의 아버지요 주인이십니다.
복음의 분위기는 자못 험악합니다. 방금 전까지 예수님께서 전하신 은혜로운 말씀에 감탄하던 나자렛 주민들이, 자기들이 익히 아는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 왈가불가하면서 돌변하는 통에 불안한 냉기류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루카 4,27).
제1독서에서 보았듯이 누구나 선입견에 걸려 넘어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상태에 주저 앉아서 어긋난 기대치와 과거 타령만 하고 있다면 구원은 요원하지요. 몸을 돌려 하느님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치유가 일어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루카 4,24).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루카 4,25).
나자렛 주민들은 자기들이 방금 듣고 놀라워했던 말씀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제 선입견에 넘어지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거듭거듭 말씀하시지만 냉담하게 식어버린 그들 마음에는 말씀이 들어갈 자리가 없고 되려 그 말씀을 죽이려 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기적이 필요한 세상입니다. 단번에 코로나 바이러스를 날려버릴 약이 어서 등장했으면 좋겠고 아픈 사람은 얼른 나았으면 좋겠지요. 큰 피해를 입은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구제책도 하루빨리 시행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 모두가 함께 더불어 잘 살지 않으면 누가 아무리 많은 재화를 가졌다 해도 혼자만 안전할 수 없다는 걸 실감하고 사회적 연대성과 책임의식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면 구석구석 도처에서 작고 여린 하느님의 자취들이 보이고 또 들립니다. 가난한 이들의 나눔, 불편을 고수하는 양보, 이익을 포기하는 배려, 고된 희생, 용서... 사랑을 일으키는 그 마음마다에 하느님께서 속삭이고 계십니다. 그 선한 목소리에 순종하는 이들이 세상을 지탱하고 있지요. 바이러스의 독한 기운을 사랑으로 희석시키고 정화하는 중입니다.
"나 주님께 바라며 그분 말씀에 희망을 두네"(복음 환호송).
이 어려운 시국에 우리가 무엇을 희망해야 하는지 들려 줍니다. 말씀을 바라고 듣고 순종하는 이는 자기도 깨끗해질 뿐만 아니라 그 마음들이 모여 온 세상을 정화하는 강물이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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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것이 열리는 것이 회개다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27022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