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12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
2020년 3월 12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루가16,19-31)
If they will not listen to Moses and the prophets,
neither will they be persuaded
if someone should rise from the dea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는 두 인물을 대조적으로 보여 줍니다. 부유하고 호화롭게 살았던 “어떤 부자”와 가난하고 비참하게 살았던 “라자로”입니다. 이 세상의 삶이 끝나고 죽음 이후의 모습도 대조적입니다.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평안을 누리지만 부자는 불 속에서 고통을 받습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죽음 이후의 세상이 현세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현세에서 고통을 받던 사람은 위로를 받고, 편하고 즐거운 생활을 하였던 사람은 고통을 받습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고 있는 비유는 우리에게 두 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첫째는 재화의 문제입니다. 루카 복음은 부와 가난의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집니다. 잔치를 벌이며 호화롭게 살았던 부자와 그 집에서 구걸하지만 먹을 것을 얻지 못하는 라자로의 대조는,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가난의 문제에 대한 지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루카 복음은 또한 재화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숙고하게 합니다.
둘째는 가르침의 실천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가난한 이들을 배려하는 내용은 이미 구약 성경에도 나와 있었습니다. 예언자들도 하느님의 길로, 정의의 길로 돌아오도록 호소합니다. 새로운 가르침이 필요하다기보다는 이미 주어진 가르침을 실천할 필요가 있습니다. 흔히 말하듯이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지만 실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기 힘든 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공동체 안에 소외되고 어려운 이들을 돌보며 그들과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재능과 재화는 공동체와 공동선을 위한 것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강의가 끝난 뒤, 많은 분으로부터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었다며 감사 인사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제게 말씀하시고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서 나가신 분은 어떨까요? 아마 처음에 가졌던 부정적인 생각을 계속해서 간직하고 계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감사의 이유를 많이 말씀하시는 분도 있고, 또 불평불만의 말씀을 많이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부정적인 불평불만의 말을 많이 하다 보면 상대방 역시 그런 말을 많이 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긍정적인 감사의 말을 많이 하시면 상대방 역시 그런 말을 할 수밖에 없지요. 그렇다면 긍정적인 감사의 말을 많이 듣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나 자신의 입에서 그런 말을 먼저 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유명한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에서 부자는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지만, 라자로는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죽음 뒤에는 그 입장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부자는 저승에서 고통 속에서 고초를 겪게 되었지만, 라자로는 아브라함 곁에서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부자가 왜 저승에서 고초를 겪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는 자신이 누리고 있는 풍요로움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부자의 식탁 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역시 당연한 것으로 여겼는지 아무런 자비로운 행동을 취하지 않습니다.
감사함이 없는 그의 이 세상 안에서의 모습이 죽음 뒤에 처지가 180도 바뀔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부자의 이름은 나오지 않고 가난했던 라자로의 이름만 나오고 있다는 것 역시 하느님께서 기억하는 이름은 세상에서 잘 나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사람임을 보여줍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로버트 에몬스 박사는 삶에서 좋은 일이 일어나야만 감사를 느끼는 것이 아님을 발견합니다. 감사할 줄 아는 이들은 어떤 일이든 시각을 재구성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감사의 마음을 가지면서 자신에게 좋은 일이 있음에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으며, 그들을 통해 우리의 위치도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재능이 중요할까요? 아니면 선택이 중요할까요? 사실 우리는 재능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학창 시절에 열심히 공부하고 또 자신의 스팩을 쌓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마존 최고 경영자 제프 베조스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생은 결국 재능보다 선택으로 좌우됩니다. 잘 생각해보세요. ‘내가 이렇게 똑똑하다.’가 자랑이 될까요? ‘내가 이렇게 좋은 선택을 했다.’가 자랑이 될까요?”
사람들에게 자랑할 수 있었던 것은 늘 나의 선택이었습니다. 재능이 있고 없고는 선택을 위해 필요한 것일 뿐이었습니다. 따라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에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후회하지 않을 선택, 남에게 자랑할 수 있는 선택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선과 악에서, 하느님의 뜻과 내 뜻 사이에서, 보이지는 않아도 하늘에 쌓는 보화인 사랑의 실천과 눈에는 보이지만 하늘에 아무것도 쌓지 못하는 물질적인 것들 사이에서의 선택 등등 우리가 해야 할 선택은 참으로 많습니다.
나의 기준이 바르게 서야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가난해지려는 의도 없이 성경을 읽는 사람은 목적지 없이 표를 끊는 사람과 같다
-전삼용신부-
한 추장이 나이가 들었습니다. 그는 세 아들 중 하나에게 추장직을 물려주기로 했습니다. 추장은 아들들을 데리고 사냥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추장 일행의 눈앞에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나타났습니다. 그 나뭇가지에는 커다란 독수리 한 마리가 앉아 있었습니다. 추장은 세 아들에게 각각 물었습니다.
“저 앞에 무엇이 보이는가?”
장남이 먼저 대답했습니다. “파란 하늘과 나무가 보입니다.”
이번에는 차남이 대답했습니다.
“거대한 나무와 나뭇가지에 앉은 독수리가 보입니다.”
추장은 매우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너는 뭐가 보이느냐?” 그러자 막내가 대답했습니다.
“독수리의 두 날개와 그 사이의 가슴이 보입니다.”
“그러면 그곳을 향해 화살을 쏘아라.”
막내의 화살은 독수리의 가슴에 명중했다. 그리고 추장직은 막내에게 돌아갔습니다.
하늘 나라를 얻는 방법도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부자는 지옥으로 가고 거지는 천국으로 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부자와 거지의 개념은 지금 가진 재산의 양에 따른 것이 아니라 ‘내어주려는 마음이 있는가, 없는가?’에 의해 결정됩니다. 지옥으로 가는 부자는 자신의 집 문 앞에 항상 거지 라자로가 있었는데도 배를 채울 음식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라자로는 가진 것이 없었음에도 개들을 불쌍히 여겨 자신의 종기를 핥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이란 이웃을 사랑하여 가난해지려는 의도가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부자가 되려 하건, 가난하게 되려 하건 두 의도 중 하나를 선택하여 살아갑니다.
이 세상에서 부자가 되려는 사람은 마치 모기처럼 남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 됩니다. 자신이 살려면 남은 죽여야 하는 것이 생존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예수님처럼 되려는 사람은 이웃을 살리기 위해 피 한 방울까지 내어주려는 마음으로 삽니다.
오늘 복음은 사실 부자가 지옥 가고, 가난하면 천국 간다는 것이 주제가 아닙니다. 바로 ‘성경’을 어떠한 의도로 읽어야 하는지에 관한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옥에 간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라자로를 부활시켜 자신의 형제들에게 나타나게 하여 형제들이 회개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이는 형제들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 때문에 형제들까지 지옥에 오면 그들의 괴롭힘에 의해 고통이 가중될 것을 걱정해서라고 보아야 합니다. 형제를 위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지옥에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해줍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모세와 예언서는 ‘성경’입니다.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은 성경의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을 읽고 연구하면서도 지옥에 떨어지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해주십니다.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요한 5,39)
성경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어린양으로서의 피까지 내어주는 삶을 가르치십니다. 결국, 거지 라자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는 당신 자신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이끌어 이웃을 위해 가난한 삶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표지판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목적지를 원하지 않는다면 성경을 읽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성경을 읽는 목적이 명확해야 하늘나라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만약 거지 라자로처럼 되기를 원치 않는 사람이 성경을 읽는다면 이는 목적지 없이 버스표를 끊겠다고 하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목적지를 알고 표를 끊어야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건강을 해치려는 마음으로 운동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전쟁에서 지려는 마음으로 훈련받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닮으려는 의도로 성경을 공부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경은 그 목적지에 다다르게 하는 표지판이 되어줄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지금은 텔레비전이 없는 집은 거의 없습니다. 텔레비전에 대한 저의 기억은 3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동네 만화가게에서의 기억입니다. 대한민국 축구경기, 프로레슬링, 권투 경기를 보았습니다. 축구경기에서 아나운서가 ‘고국에 계신 동포여러분!’이라고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텔레비전이 제법 보급되었지만 아직 집에는 없던 때의 기억입니다. 주인집 할머니 방에는 텔레비전이 있었습니다. 형들이 아직 어린 저를 특사로 파견했습니다. 할머니께서 허락하시면 우리 형제들은 웃으면 복이 와요와 수사반장을 보았습니다. 드디어 아버님의 결단으로 집에 텔레비전이 들어왔던 기억입니다. 만화영화를 보았고, 가수들의 공연을 보았고, 드라마를 보았고, 대학가요제를 보았습니다. 친숙하던 텔레비전은 신학교에 들어가면서 잠시 멀어지기도 했습니다. 예전에는 집에 텔레비전이 있었지만 지금은 손에 텔레비전이 있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손가락으로 세상의 정보를 검색하고, 손가락으로 예약하고, 손가락으로 은행 업무를 보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텔레비전이 좋기는 했지만 텔레비전과 친해지면서 멀어진 것들이 있었습니다. 같이 놀던 동네 친구들이 멀어졌습니다. 함께 하던 놀이도 멀어졌습니다. ‘딱지치기, 자치기, 비석치기, 술래잡기, 다방구, 구슬치기, 땅따먹기, 재기차기’가 우리들의 놀이였고, 일상이었는데 이제는 추억 속에만 남아있습니다. 넓던 동네 놀이터는 점차 사라지고, 술래잡기하던 뒷골목도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사라졌습니다. 함께 어울려서 공도차고, 계곡에 가서 수영도하고, 산에 가서 밤을 주었는데 그런 어울림도 추억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래도 유년시절의 추억이 남고, 친구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었던 곳이 있었습니다. 성당 주일학교였습니다. 거기서는 공부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여학생도 같은 신앙이기에 거리감 없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성당에서 여름 신앙학교를 갔었고, 성당에서 연극도 했습니다. 40년이 넘었지만 그때 친구들과 아직도 만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셨을 때입니다.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예수님 황제에게 세금을 내야합니까? 내지 말아야 합니까?’ 세금을 내야한다고 하시면 혁명당원들의 반대를 받을 위험이 있습니다. 세금을 내지 말아야 한다고 하시면 반역죄로 몰릴 위험이 있습니다.’ 바둑에서는 꽃놀이패에 걸린 상황이고, 장기에서는 양수겸장을 받은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동전을 하나 가져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동전에 무엇이 새겨져 있습니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동전에는 황제의 얼굴과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침묵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주시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드리십시오.’ 황제에게 속한 것은 땅, 건물, 재물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얻으려고 하는 성공, 명예, 권력은 어쩌면 황제의 것인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인간입니다. 인간의 행위, 인간의 마음, 인간의 생각은 온전히 하느님께 드려야 합니다.
텔레비전, 스마트폰, 인공지능, 로봇은 우리의 삶에 가까이 있을 겁니다. 우리가 그것들에 몰입하고, 그것들에 마음을 빼앗긴다면 우리는 황제의 것에 우리를 드리는 것은 아닐까요? 집 앞에 있던 라자로를 외면했던 부자는 어쩌면 하느님의 것을 찾지 않고, 황제의 것을 찾았던 것은 아닐까요? 2000년이 지났지만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 같습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드리십시오.’ 지금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가족을 넘어, 이웃과 연대하며, 공동의 선을 향해 나가는 것이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이 혹독한 시련의 시간들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양승국신부-
예수님 시대 당시 겉으로는 그럴듯해 보였으니 실상은 사이비였던 사람들이 있었으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고통 당하는 백성들의 안위는 뒷전이었습니다. 그저 자신들의 위신과 체면, 호주머니 채우기가 더 중요했습니다. 입으로는 주님, 주님 크게 외쳤지만, 정작 주님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갑자기 몇몇 얼굴들이 떠오르는군요. 코로나19 바이러스로 나라 전체가 대혼란에 빠지게 되니, 여기 저기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던 사이비 교주들, 거짓 목자들과 그 추종자들이 본색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바이러스로부터의 예방을 위해 타인과의 거리 두기라든지, 대규모 집회나 예배, 다수가 운집하는 행사의 취소가 최선의 수단이라는 것은 유치원생들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집회나 예배를 버젓이 강행하고, 사방팔방으로 돌아다니는 사람들, 제 정신이 아니고서야 그게 과연 용납 가능한 일인지 묻고 싶습니다. 세세대대로 후손들에게 손가락질 받을 것이 분명합니다.
대재난이 장기화되는 상황속에서 답답함과 힘겨움에도 불구하고 정부나 지자체, 교구나 본당의 지침에 따라, 각 가정 교회에서, 평소보다 더 열심하고 간절하게 기도하고 계시는 우리 가톨릭 신자들, 생각만해도 존경스럽고 자랑스럽습니다.
이 혹독한 시련의 시간들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크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인내하다보면 언제 그랬냐는듯이 은혜와 축복으로 가득찬 일상이 다시금 우리에게 선물로 다가올 것입니다.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를 새삼 실감하게 되는 이 시간, 그간 놓치고 살아왔던 작은 것들에 대한 소중함을 찾고, 감사하는 시간이 되면 정말 좋겠습니다.
오늘 크게 대조되는 두 인물,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는 다시 한번 바리사이들을 큰 충격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바리사이들은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상에서의 복이 곧 하느님의 축복이고, 가난은 하느님의 벌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들은 현세의 복에만 몰두한 나머지, 또 다른 세상, 영원한 세상을 망각하고 말았습니다.
또한 바리사이들은 선한 사람들에게는 만사형통이 선물로 주어지고, 악한 사람들에게는 사면초가의 고통이 따른다고 여겼습니다. 참으로 위험한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이비 냄새가 풍기는 목자들의 가르침을 들어보면 대체로 비슷합니다. 치유를 강조하며 막대한 금전을 요구합니다. 기적을 내세우며 맹종을 강요합니다. 영광과 승리만 강조하지 고통과 십자가는 외면합니다. 틈만 나면“하는 일 마다 잘 되리라!”를 외치며 만사형통, 승승장구를 보장합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그릇된 신념과 확신을 일거에 깨트리십니다. 바리사이들을 상징하는 부자를 향해 아브라함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애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루카 복음 16장 25절)
보십시오.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여겼던 라자로는 천국에서 하느님 품에 안겨 호강을 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축복받았다고 확신했던 부자는 지옥불의 고통 속에서 울부짖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은 다릅니다. 하느님의 방식과 인간의 방식은 다릅니다. 하느님의 관점과 인간의 관점은 다릅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말씀을 듣고 걱정하실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어느 정도 선이라야 부자라고 할 수 있을 지 모르겠지만, 나름의 부를 축척하고 계신 분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지탄받고 저승에서 영원한 고통을 겪을 부자는 조금도 나눌줄 모르는 인색한 부자였습니다. 지척에서 고통받고 있는 동료 인간을 향한 자비심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한동안 메스컴을 장식했던 분들, 가까운 사람들을 향한 갑질과 횡포, 고성과 폭력이 일상인 분들이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지난 부끄러운 삶을 성찰하고 회심하며, 새 삶을 시작할 때, 늦었지만 주님께서는 그들도 축복하실 것입니다.

천국을 생각하면
-반영억신부-
천국에 대한 희망은 어떠한 시련의 십자가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줍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냐시오 성인도 “천국을 생각하면 이 지상의 집착과 애정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루에 한 번만이라도 천국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고 권고합니다. 우리는 이 땅 위에 살지만 천국을 그리워해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의 부와 가난을 견주어 ‘복이 있는 사람’, 복이 없는 사람, 혹은 ‘팔자가 좋은 사람, 팔자가 사나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복음은 그 생각을 바꾸도록 안내합니다. 부자는 잠시 동안 호화로운 삶을 즐기다가 영원한 고통을 안게 되었고 반면 라자로는 잠시 동안 고통스런 삶을 살다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은 특별히 어떤 잘못을 범했다거나 선행을 하여서 그런 결과를 가져온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이 그렇게 살다 보니까 한 사람은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게 되었고, 한 사람은 인간의 한계를 느끼며 하느님께 의탁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인간의 생각과 하느님의 생각은 이렇게 다릅니다. 부라는 것이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하느님을 멀리하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르10,25).
잠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잠언30,8-9). 분명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혹 지금 누리고 있는 행복에 겨워 이웃에게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지금 너무 힘들어 절망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나만 생각하고 살면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무관심이 죄입니다. 무관심한 사람에게는 누구의 가르침도 들리지 않습니다. 결국 그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져야 합니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25,46).
지금 힘든 이들도 절망하지 마십시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야고1,12). 그리고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요한12,24).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마태10,22). 그러므로 시련을 만나게 될 때 하늘을 바라보며 신뢰를 다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시련에 대해 우리를 준비시키시고, 시련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절대로!”(프란치스코 교황).
우리 삶의 여정 안에서 시련도 유혹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끝까지 인내하는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유익한 것입니다. “금은 불로 단련되고 주님께 맞갖은 이들은 비천의 도가니에서 단련됩니다”(집회2,5). 예기치 않은 어려움 속에서도 항상 깨어서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늘 우리를 기다리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한 순간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오늘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고 천국을 장담할 수 없는 만큼 지금 여기서 주님마음에 들게 충실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름이 없는 사람으로 살지 말라.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은 이름을 잊어버리는 사람이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앵무새를 키우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날마다 “아이고 힘들다, 아이고 죽겠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습니다. 앵무새도 날마다 “아이고 힘들다. 아이고 죽겠다.”고 따라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루카 16,29)-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극단적인 두 인물의 대조된 모습을 통해, 불신과 재물의 올가미에 사로잡힌 우리를 하느님의 말씀에로 초대합니다.
이 비유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루카 16,20)
부자는 가련한 라자로를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자신과 라자로 사이에 골짜기를 파놓고 분리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가 이승에서 파놓고 건너가지 않은 그 분리의 골짜기는 저승에서도 그가 건너갈 수 없는 분리의 골짜기가 되고 맙니다.
사실, 이 부자는 특별한 악행을 저지르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자신의 재물을 자신의 호화로운 생활과 즐거움을 위해 사용하고, 타인에게는 무관심하고 인색했습니다.
곧 자기 자신에 빠져 타인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대문 앞에 누워있는 가난한 라자로를 무시하고 무관심했습니다.
요즈음 우리는 '코로나19'로 많은 어려움과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마음이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아마도 마음 한켠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타인에 대한 진정한 사랑보다 자신에 대한 보호와 안전에 대한 관심이 더 커 보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참으로 많은 사람이 고통당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코로나19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있는 문제들, 예를 들면 한 해에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은 이들이 2천명이 넘고, 교통사고로 죽은 이들은 3천명이 넘고, 독감으로 죽는 이들이 약 5천명이 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이 1만 3천명이 넘어도 타인의 고통에 무디어져 있으면서도 코로나가 자신의 안전에 문제가 되기 때문에 더 관심이 큰 것은 아닐런지요,
물론 코로나19의 문제가 중하지 않다거나 약화시킬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만, 이러한 우리의 속내가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안타까움입니다.
사실, 진정 무서운 것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과 타인에 대한 사랑의 부재라는 점일 것입니다.
한편, 오늘 <복음>은 이는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해서 할 바를 다한 것이 아니라, 선행과 자비를 베풀지 않음이 곧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곧 죄라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부유함(부자)=멸망, 가난함(빈자)=구원이라는 등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심판받은 것은 그가 단순히 부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이웃사랑을 하지 않은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음식을 먹되 나누어 먹어야 하고, 마시되 자신의 혀만 적시는 것이 아니라 남의 혀도 적셔주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재물을 소유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소유하되 소유당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나아가서, 자비를 입어 부자가 되었으니, 가난한 이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에서 부자가 죽어서 아브라함에게 한 말, 곧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6,24)라는 간청은 ‘제가 자비를 베풀게 해주십시오.’ 라는 간청으로 바뀌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부자가 대문 앞에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로 누워있어도 못 본 것은 자신의 호사스러움과 즐거움, 탐욕과 인색에 눈이 가려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무시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형제들 사이에, 또 가난한 이들과의 사이에, 냉대와 무시와 무관심의 골짜기를 파놓아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것은 곧 저승에서의 골짜기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저승에서 처지가 뒤바뀐 부자는 자기 형제들에게 라자로를 보내달라고 청하지만,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루카 16,29)
부자는 이승에 살고 있는 자신의 형제들의 회개를 위해서 라자로를 보내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보다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말하지만, 아브라함은 이승에서는 이미 하느님의 말씀이 있으니, 그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부자에게 덧붙여 말합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카 16,31)
사실, 기적이 사람들을 회개시키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당신을 믿지 못함은 기적을 보지 못해서 혹은 듣지 못해서나 체험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듣고 보고 체험하고도 받아들이지를 않는 완고함 때문일 것입니다.
곧 믿음을 일으키는 것은 기적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받아들임에서 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이 복되다.”(루카 11,28)
한편, ‘라자로’라는 이름은 ‘하느님이 도와주시는 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라자로가 구원을 입은 것이 그가 남에게 특별한 선을 베풀었거나 해를 입히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혹은 그의 가난하고 고통 받은 삶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도움과 자비를 입은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의 호의와 사랑을 입고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드러내줍니다.
그렇습니다. 라자로가 은총을 입은 것은 바로 하느님의 자비인 것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루카 16,20)
주님!
마음의 눈을 열어 타인의 처지를 볼 줄 알게 하소서
음식을 먹되 나누어 먹고, 자신의 혀만 아니라 남의 혀도 적셔주게 하소서
재물을 소유하되 소유당하지 않고, 탐욕에 빠지지 않고 인색하지 않게 하소서.
악을 저지르지 않을 뿐 아니라, 선을 베풀게 하소서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아멘.

복음: 루카 16,19-31: 아브라함이 라자로를 품에 안고 있었다
-조욱현신부-
자주색 옷을 입은 부자는 탐욕을 부렸다거나 남의 재물을 빼앗았다거나 간음을 했다거나 다른 무슨 잘못을 저질러서 비난받는 것이 아니다. 그가 잘못한 것은 교만이었다. 그는 라자로라는 거지가 종기투성이로 대문 앞에 누워 있어서 그를 보았지만 가엾은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기 재산을 모두 버리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식상에서 내버리는 것 빵부스러기라도 그 거지에게 주었어야 했다.
아무 동정도 받지 못한 라자로는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먹으려 했다. 게다가 불치의 병이 그를 괴롭혔다. 개들조차 그의 종기를 핥으며, 그를 해치지 않고 돌보고 있다. 짐승들은 아픈 데를 혀로 핥아 고통을 가라앉히고 상처를 낫게 한다. 그런데 부자는 개들보다 잔인했다. 라자로를 가엾이 여겨주지도 않았고 무자비하게 굴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늘에서의 삶과 영원한 형벌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내가 선택한 삶에 대한 귀결이라고 하신다.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25절)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26절)라고 하신다. 이 구렁은 서로 반대되는 삶을 선택한 데 대한 심판이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에 역행하는 삶을 선택하면 깊고 가늠할 수 없는 구렁 같은 것을 파고 마는 것이다.
그분은 부요함을 고통으로, 가난은 원기 회복으로, 자주색 옷은 불길로, 헐벗음은 기쁨으로 돌려주셨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마태 7,2)라는 말씀은 원칙이다. 주님께서 고통을 겪고 있는 부자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으신 것은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 자비를 베풀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자의 탄원을 무시하신 것도 그가 땅에서 가난한 이의 탄원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루카 16,9) 부자는 살아있을 때에 라자로와 그 같은 사람들을 돌봄으로써 그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 두었어야 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고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태 10,42) 이런 사람은 가난한 이웃과 함께 하는 이며, 그는 상을 받을 것이다.
부자는 고통을 겪으며 마지막으로 라자로를 자기 집으로 보내어 다섯 형제가 또 이 고통스러운 곳으로 오지 않게 해 달라고 청한다. “아브라함이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29절)고 대답했을 때, 죽었던 사람이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이라고 하자,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31절)
이 말씀은 유대인들에게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들은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고,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예수님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요한 5,46) 모세와 예언자들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실 분이 바로 그분이라고 예언 하였다. 아브라함의 말뜻은 바로 이것이다. 부자의 죄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웃의 필요를 보고도 외면한 데 있었다면 오늘의 나 자신은 어떤지 반성하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물을 잘 사용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하겠다.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루카 16, 25)
-한상우신부-
고초가 있기에
위로가 있고
그림자가 있기에
빛이 있습니다.
우리를 성숙하게
만드는 것은 단연코
고통입니다.
그만한 댓가를
치루어야만
깨닫게되는 모질고
사악한 우리마음의
여정입니다.
모두가 아픈
시간입니다.
더더욱 생명의
지혜가 간절히
필요한 요즈음의
시간입니다.
가장 기본이 되는
것들을 너무 쉽게
건너 뛰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우리는 현실의
문제에서 해답을
찾아야합니다.
병든 우리
마음입니다.
병든 우리 마음은
돌아보는 성찰과
낮추는 실천에서
조금씩 치유되어
나갈 것입니다.
이 사순시기가
우리 마음을
정화하는 시간이길
기도드립니다.
우리 마음에
우리 삶에
다시금 소중하고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이순간이길 간절히
바랍니다.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겨울을 뚫고
찾아온 봄꽃처럼
소중하고 다시
고마운 관계이길
기도드립니다.
고통이 있는 곳에는
위로와 치유도
있음을 믿습니다.
이 시간을 주시고
이끌어가시는
하느님을 진실로
믿습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 말씀에는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루카 16,19).
부자가 어떻게 살았는지 한눈에 알 수 있게 묘사한 대목입니다. 당시 자주색 염료의 제품이나 고운 아마포 의류는 상당히 고가라서 어중간한 중산층은 엄두를 내기 어려운 사치품이었는데 복음 속 부자에게는 일상복 정도였으니 그의 재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가지요.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루카 16,20).
대문을 사이에 두고 안팎으로 극명한 대비가 이루어집니다. 부자가 편히 드나들던 제집 대문 앞에, 결코 그 집으로 들어갈 수 없는 한 가련한 이가 굶주린 채 병든 몸으로 누워 있습니다.
그러다 두 사람 모두 생을 마감하지요. 라자로가 지상에 살 때 극심한 고통에 시달려도 목소리조차 내지 못했던 것에 비해 부자는 "소리를 질러" 자신의 처지를 토로하고 라자로를 활용하려는 해결책까지 제시합니다. 그는 여전히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며 오만합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루카 16,25)
아브라함의 응답입니다. 라자로가 받는 위로는 지상 삶에서 겪었던 "나쁜 것들"에 대한 보상이라고 합니다. 거기서도 라자로는 목소리를 내지 않지만 아브라함이 그를 위한 목소리가 되어 주고 있지요.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루카 16,26)
부자는 라자로의 심부름으로 혀를 식히길 바라지만 불가능합니다. 아브라함이 무자비해서가 아니고 라자로가 냉정해서가 아니라 "구렁" 때문입니다.
지상에서 라자로의 통과를 허용하지 않았던 부자네 대문이 이처럼 아득한 심연의 "구렁"이 되어 버렸습니다. 초대하고 보살피러 쉽게 여닫고 드나들 수 있을 때 활용하지 않았던 대문이 이제는 오히려 부자를 옴쭉달싹 못 하게 만드는 "구렁"으로 변한 것입니다.
부자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겠습니다. 자신은 고의적으로 라자로를 해치거나 박해한 적이 없고 그저 무관심했을 뿐이었다고 항변하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부자가 받는 사후 고통의 원인에 대해 힌트를 제시합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예레 17,5).
부자는 철저히 자신의 힘과 재산에 의지해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가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었다면"(예레 17,7), 모세와 예언자들이 전하는 약자에 대한 율법의 가르침을 경외하고 지켰을 것입니다. 그의 무관심은 약자에게만이 아니라 율법에 대한 무관심이었고 더 나아가 생사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대한 무관심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이 무관심은 경시, 무시의 다른 단어지요.
"내가 바로 마음을 살피고 속을 떠보는 주님이다"(예레 17,9).
부자가 라자로에게 적극적으로 해악을 저지르진 않았더라도, 그를 방치한 채 그 옆에서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산 것만으로 라자로와 율법과 주님을 무시한 것입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주님께서 이를 모르실 리 없지요. 사실 주님은 라자로 안에서 줄곧 외면당하고 거절당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사랑하지 않은 탓을 물으십니다. 실제적으로 저지르는 악행이 아니더라도 선을 외면하며 살지는 않았는지 묻고 계십니다. 선하신 하느님의 모상인 우리는 선을 행하며 살게 창조되었지요. 선행은 우리 본성의 발휘일 뿐, 사후 세계를 담보로 지불하는 계산적 투자가 아닙니다. 그러니 제 안에서 자연히 흘러나오려는 선을 외면하거나 동기를 오염시키는 것은 자기 부정이고 자기 근원에 대한 부정과 다르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이제 눈을 들어 각자 자기의 대문 앞을 살펴봅시다. 지금 누가 어떤 모습으로 누워 있는지요? 아직 여닫을 수 있다면 희망이 있습니다. 닫힌 대문이 구렁이 되기 전에, 대문이 사랑을 단절시키기 전에 얼른 나서서 대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길을 터 놓읍시다.
우리 모두가 성인이 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열린 문으로 터놓은 길이 구렁을 넘는 다리가 되어 줄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가 보듬었던 라자로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사후의 삶에서 침묵의 증인이 되어 줄 것입니다. 아멘.

우리가 회개해야 할 죄
-김찬선신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오늘 복음의 얘기를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이 세상에서 행복하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건가?
이 세상에서 행복한 사람이 천국에서도 행복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행복한 사람이 천국에 무조건 갈 수 없는 것 아니고
이 세상에서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천국에서도 참으로 행복할 겁니다.
오늘 비유의 끝부분을 보면 부자가 천국에 가지 못한 것은
이 세상에서 행복했기 때문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자가 말하지요. 자기처럼 자기의 형제들이 지옥에 오지 않으려면
회개를 해야 하는데 죽은 라자로가 가야 회개할 거라고 말입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서 행복한 것이 회개할 이유는 아니지요.
회개는 죄에서 회개하는 것이지 행복에서 회개하는 것이 아니고,
행복한 것이 죄도 아니지요.
그렇다면 부자가 회개해야 할 죄는 무엇이었나요?
첫째는 하느님을 믿지 않고 하느님을 갈망하지 않은 죄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믿지 않고 하느님을 갈망하지 않은 이유는
오늘 독서 예레미야서에 의하면 사람에게 의지하고
하느님보다 제 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부자가 지옥에 있을 때처럼 이 세상에서
천국의 물 한 방울을 갈망했다면 지옥에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 세상사는 동안은 천국의 물을 갈망하지 않았고
천국의 물을 갈망하지 않은 이유는 이 세상사는 동안
온갖 좋은 것을 다 누렸기 때문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 점이 회개해야 할 행복이고 죄스런 행복입니다.
이것이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회개해야 할 그의 죄라면
다음으로 부자가 회개해야 할 죄는 라자로와의 관계입니다.
오늘 복음의 부자는 부자 이기주의의 전형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기주의자라고 할 수 있지만
부자들의 이기주의는 남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그래서 자기만 아는 뻔뻔스러운 이기주의입니다.
그는 지상에서 살 때는 라자로를 전혀 아는체 하지 않았고
라자로하고는 완전한 단절의 삶을 내내 살았습니다.
문을 드나들 때마다 봤지만 보고도 못 본체 했을 것입니다.
보면 마음이 불편하기 때문에 못 본체 하였을 것이고,
그래서 아예 마음으로부터 무시하기로 작정했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지옥에 있을 때는 너무도 뻔뻔하게 아브라함에게
라자로를 시켜 물 한방울이라도 입을 축이게 해달라고 합니다.
자신이 평안할 때는 다른 사람 특히 라자로와 같이 가난한 사람이
자기 집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그 평안을 깨는 것이기에
가차없이 문밖으로 밀어내고는 드나들며 문간에 있는 그를
볼 때마다 봐도 못본체 하거나 봐도 없는 사람 취급을 했지요.
그러다가 이제 자기가 불행하고 아쉬운 처지가 되면
도와달라는 얘기를 아주 천연덕스럽게 잘하는데,
이렇게 자기 이익을 위해서는 염치도 없는 사람들이 보통 부자들이지요.
염치도 없고
연민도 없고
사랑도 없어 불행한 이기주의에서 회개하라는 가르침을 받는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가16,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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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닮으려는 의도로 성경을 공부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경은 그 목적지에 다다르게 하는 표지판이 되어줄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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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 무서운 것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과 타인에 대한 사랑의 부재라는 점일 것입니다.
그가 심판받은 것은 그가 단순히 부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이웃사랑을 하지 않은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음식을 먹되 나누어 먹어야 하고, 마시되 자신의 혀만 적시는 것이 아니라 남의 혀도 적셔주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재물을 소유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소유하되 소유당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기적이 사람들을 회개시키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당신을 믿지 못함은 기적을 보지 못해서 혹은 듣지 못해서나 체험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듣고 보고 체험하고도 받아들이지를 않는 완고함 때문일 것입니다.
곧 믿음을 일으키는 것은 기적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받아들임에서 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이 복되다.”(루카 11,28)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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