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3월 10일 사순 제2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20. 3. 9. 19:21

2020년 3월 10 사순 제2주간 화요일 


율법학자들과 바리아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마태오 23,1-12)

 

“The scribes and the Pharisees
have taken their seat on the chair of Moses.
Therefore, do and observe all things whatsoever they tell you,
but do not follow their example.
For they preach but they do not practic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모세의 자리”는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마치 모세처럼 율법의 의미를 해설하고 조상들의 관습을 지키던 사람들입니다. 또한 백성들이 하느님의 뜻을 따라 올바로 살아가도록 길을 제시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말은 따르되 행실은 따르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들의 말은 옳지만 그들의 행실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의로운 길을 제시하지만 스스로 그 길을 걷지 않았습니다.


말과 행실. 오직 예수님 시대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알고 있는 것과 말하는 것을 모두 실천하기는 쉽지 않지만, 적어도 그러한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예수님의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많이 알고, 잘 알고 있는 사람은 그만큼 더 큰 책임을 져야 합니다. 가르치는 사람은 말만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서도 가르쳐야 합니다. 이것은 좋든지 싫든지, 지도자들과 길을 제시하는 이들에게 맡겨진 책무입니다. 너무 당연한 것이지만 현실에서는 여전히 멀게만 느껴집니다.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와 함께 강조하는 것은 그것에 합당한 실천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는 표현은 예수님 당신에 대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가르치시는 것만이 아니라 당신의 삶을 통하여 우리를 섬기셨던,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내어 주신 분이십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사과해!”

언젠가 어느 매장에 들어갔다가 듣게 된 소리였습니다. 손님이 직원에게 불쾌감을 느꼈는지 사과하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지요. 그 직원은 “마음을 아프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라고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습니다. 그런데 이 손님이 갑자기 “무릎 꿇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종종 인터넷상에서 유포되는 예의 없는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설마’ 했는데, 직접 보게 되니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나오는 모습인 줄 알았는데 실제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이때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잠시 뒤에 매장 책임자가 나와 손님과 직원을 데리고 나가서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유쾌한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상대방을 무릎 꿇리게 하면 기분이 좋아질까요? 자신의 자존심 상한 것은 그렇게 큰일이라면서 소리 지르던 분이 남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자신의 모습은 왜 보지 못할까 싶었습니다. 물론 직원이 손님에게 아주 큰 잘못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이러한 대처는 분명히 잘못이지요.

아마 처지를 바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기 자신만이 중요하고 남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에게는 ‘나’만 중요하고, ‘남’은 나를 위한 도구 정도로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말하는 것을 다 실행하고 지킬 것을 명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말라고 하시지요. 율법은 당연히 지켜야 하지만,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을 따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보이기 위한 것이고, 윗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닮아야 할 분은 누구일까요? 만물을 생겨나게 하고, 하느님과의 화해를 이룰 수 있도록 해주시는 유일한 스승이신 주님밖에 없습니다.

이 주님께서는 윗자리에 마음을 두는 것을 금하실 뿐 아니라 끝자리에 앉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당신 친히 겸손의 본보기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토록 위대하신 분이시건만 주님은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낮추셨으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분 위에 올라타야 할까요?

‘나’를 드러내는 데 더는 집중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낮은 자의 모습, 겸손한 모습이 이 세상의 눈으로는 약해 보이는 모습이 될 수도 있겠지만, 주님 스스로 모범을 보여 주셨기에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꼭 필요한 모습이 됩니다.
가치 있는 목표를 향한 움직임을 개시하는 순간, 당신의 성공은 시작된다(찰스 칼슨).



퀴리부인과 라듐.

라듐을 아십니까? 현재 암 연구와 치료 등에 사용되는 라듐은 노벨 물리학상과 노벨 화학상을 받은 프랑스의 물리학자 퀴리가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함께 발견한 광물입니다. 전 세계는 이 라듐의 발견에 찬탄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부부가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천연 라듐의 가치는 1g에 15만 달러로 예측되었는데, 이 천연 라듐의 생산을 무제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퀴리 부부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들만 알고 있는 천연 라듐 생산 방법을 특허 내면 엄청난 부를 챙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라듐 생산 방법을 공개해서 수많은 사람이 혜택을 받도록 결정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라듐은 하느님의 것인데 우리가 먼저 발견한 것뿐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이것을 모든 인류의 소유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 뜻보다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 이 마음이 겸손의 마음이 아닐까요?                   

사람은 아버지를 넘어서면서부터 교만해진다

-전삼용신부-


스탠포드 대학 심리학자 젠센은 유대 민족의 지적 능력이 다른 민족에 비해 우수한 것은 아니라고 밝혔습니다. 유대인의 성공 비결은 다름 아닌 숱한 고난 속에서도 그들이 지켜온 신앙 교육에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신앙 교육의 장(場)은 가정이며, 교사는 부모입니다.

      그렇다면 교사인 부모는 자녀에게 무엇을 가르칠까요? 유대인에게 있어서 가정 교육은 신앙을 위한 것이지 지식이나 직업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부모는 자녀 스스로 하느님을 알기 위해 기도하고 성경을 공부하고 싶도록 환경을 만들어 줍니다. 부모가 먼저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것,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하면 자녀들은 무의식중에 부모 위에 하느님이 계신다는 믿음을 배우게 됩니다. 또 글을 배우기 전에 성경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하느님을 믿는 이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선생으로서의 부모의 이 신앙 교육이 2천 년 동안 나라가 없으면서도 유대인들을 가장 강력한 민족으로 만들었던 이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가르침은 다 실행하고 지키되 그 행실만을 따라 하지 말라고 이르십니다. 여기서 ‘행실’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본래 ‘인간이 노력하는 모든 일’을 가리키는 단어 ‘에르곤’을 번역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들의 외적인 행위를 말씀하시기보다는 그들이 에너지를 쏟는 방식은 본받지 말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어떤 일에 자신들의 에너지를 쏟을까요? 바로 ‘자신들을 들어 높이는 일’에 에너지를 쏟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 불리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승이라 불리지 않도록 주의하고 선생이라 불리지 않도록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스승은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교만해지기 위해 에너지를 쓰는 반면 그리스도인들은 겸손해지기 위해 힘을 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겸손해지기 위해 힘을 써야 한다는 말씀 안에 이러한 말씀도 있습니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하느님만을 아버지라 여기도록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왜 하느님을 아버지로 여기는 것이 겸손일까요? 오히려 교만이 아닐까요?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했다고 바리사이-율법학자들에게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겸손해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왜 하느님을 아버지라 여기는 것이 겸손일까요?

      아버지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이들은 겸손합니다. 아버지만큼 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처럼 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사춘기가 되면 육체적으로도, 지식적으로도 아버지를 넘어서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천상천하유아독존이 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람을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완전하게 되라고 하십니다. 이제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버지로 여기고 아버지처럼 완전하기 위해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 하느님 아버지를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이 가운데에서 아버지처럼 하지 못하는 것에 겸손하게 됩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이 세상의 아버지도 공경하고 사랑하도록 가르치십니다. 그러니 천상의 아버지 안에서 지상의 아버지도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어릴 때 귀엽고 사랑스럽던 자녀가 성장해서 부모의 걱정거리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스코틀랜드 속담에 “자식이 어릴 때는 그 재롱으로 부모의 두통을 없애주고, 자라서 성인이 되면 부모에게 근심 걱정을 끼쳐 오히려 두통거리를 만들어 준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부모의 두통거리가 되지 않게 만들려면 겸손한 자녀들로 키워야 합니다. 그렇다고 부모가 언제까지나 아이들의 겸손을 책임질 수는 없습니다. 진정 아이들을 겸손하게 키우고 싶다면 사춘기 전에 아이들의 참 아버지는 하느님임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처럼 완전하게 되기 위해 세상에 태어났음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교만해지지 않고 하느님의 계명 안에서 오히려 더 부모를 공경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사람은 아버지를 넘어서면서부터 교만해집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자녀에게 하느님 아버지를 바라보게 만드는 표지판이 되어야만 합니다.


-조재형신부-


몇 년 전에 선물로 받은 만년필을 잘 쓰고 있습니다. 디자인도 좋고, 손에 잘 잡히는 만년필입니다. 만년필이 좋지만 가끔 잉크를 채워주어야 합니다. 만년필은 잉크가 채워져야만 비로소 글을 쓰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만년필에 채워진 잉크는 촉을 통해서 종이로 나가야만 의미를 가진 글이 될 수 있습니다. 만년필 안에만 머무는 잉크는 시간이 지나면 말라버리고, 만년필도 청소를 해야만 다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누에는 뽕잎을 먹어야 합니다. 뽕잎을 먹은 누에는 죽을 때까지 실을 뽑아야 합니다. 실을 뽑지 않는 누에는 더 이상 뽕잎을 먹을 수 없습니다. 뽕잎을 먹지 않는 누에도 결국 죽습니다. 그러나 실을 뽑는 누에는 죽은 것 같지만 한 마리의 나비가 되어 하늘을 날게 됩니다. 만년필에서 나와 종이로 옮겨진 잉크는 의미가 되어 사랑을 전하기도 하고, 기쁨을 전하기도 하고, 계약을 성사시키기도 합니다. 누에가 뽑아낸 실은 이불이 되기도 하고, 베개가 되기도 하고, 식탁보가 되기도 하고, 두루마기가 되기도 합니다. 죽을 때까지 실을 뽑았을 때 비로소 하늘을 나는 나비가 되는 겁니다.

 

만년필과 잉크처럼, 누에와 뽕잎처럼 사람은 관계(關係)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사람의 관계는 관심(關心)을 통해서 자라납니다. 관심은 나만을 위한 정원(庭園)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관심은 정원의 울타리를 허물어 모두가 머물 수 있는 공원(公園)을 만드는 겁니다. 사람을 뜻하는 ‘Homo’라는 라틴말은 흙(Humus)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겸손을 뜻하는 ‘Humilitas’라는 라틴말도 흙(Humus)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관심은 흙과 같은 낮은 자세로, 겸손하게 상대방을 위한 자리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사람을 뜻하는 한자는 인()입니다. 두 개의 막대기가 서로 기대고 있는 형상입니다. 관심은 나를 내세우기 전에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아픔과 슬픔을 이해하고, 경청하는 것입니다. 모든 갈등과 분쟁은 관심이 사라지고 욕심이 자라기 때문입니다. 욕심과 욕망으로 만들어진 관계는 모래 위에 세워진 집과 같아서 시련과 고통이 오면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욕망과 욕심의 관계를 맺으려는 사람들의 이기심에 대해서 이야기하십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 관심은 무엇입니까? 가장 높은 사람일지라도 오히려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나의 능력과 재능으로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라고 하십니다. 자신을 높이기보다는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누추한 마구간으로 오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누추한 마구간은 우리 구원을 위한 성전이 되었습니다. 고난의 십자가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부활의 다리가 되었습니다.

찬양 제물을 바치는 이는 나를 공경하리라.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데 있어 위선은 가장 암(癌)적인 존재입니다!

 -양승국신부-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고 못배운 백성들을 향해 7가지 행복을 선언하신 바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대 부유하고 가방끈이 길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해 7가지 불행을 선포하십니다. 마태오 복음 23장 전체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날선 발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시퍼렇게 날이 서 있습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날카롭고 예리하며 강력합니다. 말씀을 듣고 있노라면 비슷한 처지에 있는 동업자 입장에서 섬뜩섬뜩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공격적이고 자극적인 말씀 선포의 대상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지만 그 말씀들이 온통 저만을 위한 맞춤형 가르침 같기도 합니다. 공격의 이유는 그들의 위선적인 삶과 가식적인 신앙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데 있어 위선은 가장 암(癌)적인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도 가장 역겨워하시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지니고 있었던 가장 큰 문제는 가르침과 삶 사이의 엄청난 괴리감이었습니다. 그들은 신앙 따로 삶 따로의 이중성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일전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적인 삶의 세 가지 측면에 대해 날카롭게 지적하신 바가 있습니다. 1. 조용한 익명의 자선과는 반대되는 자랑하고 과시하는 자선. 2. 골방에서의 겸손한 기도가 아닌 길모퉁이에서의 가식적인 기도. 3. 산발(散髮)에다 침통한 얼굴로 하는 보여주기식 단식.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스꽝스러운 그들의 모습 한 가지를 더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마태오 복음 23장 5절)

 

 ‘성구갑’이란 성경 구절이 들어있는 작은 통입니다. 유다인들은 작은 성구갑을 이마나 팔에 달고 다녔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며, 구체적인 삶 속에서 실천하겠다는 의미로 성구갑을 몸에 지니고 다녔겠지요.

 

 그런데 정말 웃기는 것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성구갑은 유난히 크고 화려했습니다. 자연스레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었습니다. 크고 화려한 성구갑!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 받고 싶은 과시욕이 지나쳤습니다. 자신들의 신앙이 얼마나 깊은지를 자랑하고 싶은 허영심의 극치에 달했습니다. “이것 한번 봐주세요! 이 멋진 성구갑을! 내가 얼마나 하느님 말씀을 애지중지하는지? 내가 얼마나 성경 말씀을 극진히 여기는지를 말입니다.”

 

 안타깝게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자칭 가장 하느님 가까이 있는 사람들, 가장 하느님 말씀을 자주 접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실상 그들은 가장 하느님과 멀리 있는 사람들, 가장 하느님 말씀에 반하며 사는 사람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유는 그들이 지니고 있었던 철저한 이중성, 과시욕과 허영심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공허한 의(義)를 가차없이 폭로하십니다. 그들의 공허한 의는 예수님께서 온 몸으로 보여주신 참된 의와 극명하게 비교·대조되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적인 신앙과 이중적인 삶, 그로 인한 철저한 몰락과 멸망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강력한 경고요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실행함으로써 행복하라

    -반영억신부-

 

살아가면서 더 나은 것을 추구하고 더 높아지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런 인간의 욕구입니다. 그런데 높아지려고 하다가 하루아침에 낭패를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욕심은 끝이 없어서 만족시켜 주면 줄수록 그 요구가 더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높아지려다가 오히려 푹 떨어지게 됩니다. 그들이 자를 거꾸로 하면 자가 된다는 것을 생각했었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공자께서도 남의 선생 되기를 좋아하는 것이 탈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을 망친다고 합니다. 그러니 높아지려고 애쓰며 남을 가르치려 하기 보다는 삶으로 말해야 하겠습니다. 요즘 정치치인들이 하는 행태를 보면 자기만 잘났다고 하며 상대의 소리는 도무지 들으려하지 않습니다.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은 당시사회에서 스승이요, 지도자로 행세하고 남들이 그렇게 인정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사실 권위는 자기가 내세우기보다 남들이 인정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 대한 존경과 사랑은 억지로 강요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삶이 뒷받침될 때 자연히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23,2-3).고 하셨습니다.

 

높이 오르면 더 멀리, 더 많이 볼 수 있고 그렇다면 더 많은 사람들의 요구를 채워줄 수 있으련만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연륜이 쌓이면 쌓일수록 넉넉해지고 자상한 어른이 되어야 하거늘 몸이 말을 듣지 않으니 부끄러움만 더해갑니다. 마음은 열고 입은 닫아야 하는데 그 반대가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지만 나와는 무관한 말씀으로 듣고 살아갑니다. 대접 받고 싶은 마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왜 그 길을 서슴없이 가는지 안타깝습니다.

    

 우리의 스승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20,28). 고 말씀하신대로 사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삶으로 사랑을 증거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누가 먼저 인사하기를 바라지 말고 먼저 인사할 수 있는 날, 누구에게 무엇을 시키기 보다는 솔선수범하는 날, 무엇을 기대하기보다 먼저 베푸는 은총의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바보들은 항상 결심만 한다는데 오늘 만큼은 실행함으로써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3,11)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자리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 당시에 스승으로 대우받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모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죄상을 세 가지를 고발하십니다.

<첫째>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

곧 언행의 불일치와 남에게 짐 지움을 질타하십니다.

<둘째> 그들이 하는 일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곧 표리부동과 위선을 질타하십니다.

<셋째> 그들은 잔치에 가면 맨 윗자리에 앉으려 하고 ... 사람들이 스승이라 불러주기를 바란다.” 곧 자만과 허영을 질타하십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이가 참된 스승인가?


<첫째> 그는 가르치되, 언행불일치하는 이가 아니며, 남에게 짐 지우지 않는 이입니다.

곧 언행일치, 실천궁행하는 이, 곧 말씀을 성취하는 이요,

 타인에게 짐을 지우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신이 타인의 짐마저 짊어지는 이입니다.

<둘째> 그는 일하되, 표리부동과 위선이 없는 이입니다.

 곧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아닌 자신을 보낸 분을 드러내는 일을 하시는 이입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늘의 아버지께 일을 바치는 이입니다.

<셋째> 그는 사람들 가운데 있으되 자만과 허영이 없는 이입니다.

곧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이요, 섬김을 받으려하기보다 섬기는 이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참된 스승이 없다고 한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진정으로 스승을 찾고 있는 것일까를 물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자기의 무지를 깨우쳐주는 위대한 스승을 찾지만, 스승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사방천지에서 만나는 우리 인생의 동반자들을 스승으로 모시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스승을 만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니 그들에게 머리 굽히지를 못하기 때문에, 오늘도 제자가 되지 못하고 있을 뿐일 것입니다.

 혹은 나의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바라기보다 나의 유식을 인정해주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무지가 들추어지면 감사하기보다 상처를 받으니 말입니다.


참으로, 길이요 진리이신 참된 스승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오히려 고개를 쳐들어 먼 데서 스승을 찾고 있다면, 진정 우리가 눈멀어 있는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참된 스승이 있는가?” 하고 묻기에 앞서, 진정, 나는 참된 제자인가? 하고 물어야 할 일입니다.

이제 다시 자리의 문제로 돌아와 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를 차지하고 스승으로 대우받고자 하였는데, 나는 지금 누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섬김의 종이신 예수님의 자리인가?

그리고 섬김을 배우는 제자의 자리인가?

아니면 섬김을 받고자 하며, 가르치며 스승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는가?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겸손 섬김이야말로 참된 스승이 되는 길이요, 동시에 참된 스승이신 당신의 참 제자가 되는 길이라 하십니다.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3,11)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1)


주님!

머리를 숙이고 겸손할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고개가 뻣뻣이 세우고 먼 데서 당신을 찾지 않게 하소서.

나의 유식을 인정해주기보다 나의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바라게 하소서.

무지가 드러나면 상처받기보다 감사하게 하소서.

당신을 스승으로 모시고 제 머리 위에 두게 하소서! 아멘.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23,1-12: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2) 칭호 만으로가 아니라 행동으로 구체적으로 사제여야 한다. 자리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리를 거룩하게 만든다. 사제는 거룩하여야 한다. 자리에 앉아 훌륭히 처신하는 이는 누구든지 그로 말미암아 영예를 받을 것이다. 자리에서 나쁘게 처신하는 이는 누구나 그 자리에 해를 입히는 사제가 되고 만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3) 나쁘게 처신하는 사제들 때문에 훌륭한 사제들까지 매도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선을 이루려다 의로운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기보다는 의인들을 지켜주는 편이 더 낫기 때문이다. 버려진 땅에서도 귀한 금이 나올 수 있다. 그 금이 버려진 땅에서 나왔다고 금을 버리느냐? 금만을 취한다. 우리도 그들의 가르침은 취하고 그들의 행실은 버릴 수 있으면 될 것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사람들에게 율법이라는 무거운 짐을 얹어 놓고는 그들을 도와주기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중에는 말하기 전에 행하고 현명하게 이야기 하며 혼란에 빠진 자들을 인도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의 어깨에 자애로운 짐을 얹는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스스로 먼저 가장 무거운 짐을 진다. 주님은 이들을 두고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9)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파멸을 불러 올 허영을 꾸짖으신다. 이 허영은 그들을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였고 오로지 다른 사람의 이목을 끄는 일을 하게 하였고 그들을 타락하게 만들었다. 결국 그들은 아무 가치도 없는 것들에 목을 맨다. 성구갑과 옷자락 술이 그들이 변변치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5) 예수님의 제자들은 오직 하느님께만 보이기 위해 행하였고, 그들의 손에 묶은 유일한 장식은 선행이었다.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8)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9) 아버지 하느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말고는 누구도 스승님이나 아버지로 불려서는 안 된다.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그분만이 아버지이시다. 또한 그리스도만이 스승님이시다.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만들어지고,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과 화해를 이루기 때문이다. 이 말씀이 본성상 사용하는 아버지와 스승이라는 말을 하지 말라는 말씀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11) 먼저 우리 신앙인들이 진정으로 자기를 낮추고 세상을 위하여 섬기는 사람들이 될 때에,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낮은 자리는 바로 봉사하기 위한 자리이다.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순절이 되도록 은총을 청하자.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 3)

-한상우신부-

신앙또한
유사품에
주의 하십시오.

너무도 빨리
너무나 쉽게

썩어가고
썩을 수 있는
우리들 삶입니다.

무너뜨리고
허물어버려야 할
이중적인 신앙의
모습입니다.

부패와 타락은
하느님을 잃어버린
우리들 마음에서
먼저 시작합니다.

하느님보다
욕심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부패의 끝은
우리모두의
죽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썩어 문드러진
우리 양심을 당신의
섬기는 사랑으로
모순덩어리인 우리를
정화시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내면을
먼저 들여다보게
하십니다.

이 사순시기가
우리 영혼을 되찾는
은총의 시간이길
기도드립니다.

무엇을
잘라내야 할지를
고민하고 실행하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시대의
모순과 거짓
부정직을 이제는
잘라냅시다.

그것이 낮아지고
작아지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간절한 뜻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주님은 공동체적 모범 답안에 수정을 가하십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마태 23,3).

지도자는 공동체가 지향하는 바를 구성원들에게 모범적으로 제시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군중은 지도자에게서 삶의 모범 답안을 찾고 싶어하지요. 예수님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는 당시 종교 권력자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권한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그들의 지식과 가르침을 행동과 구분하시지요.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3).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들은 나름 철저히 율법을 준수하는 열심한 이들입니다. 문제는 그들의 가르침과 실제 행동 사이에 괴리가 크다는 것이지요.

"너희는 모두 형제다"(마태 23,8).

이것이 바로 그들이 간과한 진리입니다. 모든 이가 형제라고 인식하는 이들은 타인 위에 군림하거나 그들을 억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필요에 민감히 감응하고 손을 내밀지요.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3,11).

형제 간에도 선후가 있듯이 형제적 공동체 안에도 기본 질서를 위한 위계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위계는 세속적 권력 구조와는 정반대의 질서를 추구하지요. 높은 자리의 형제일수록 더 낮아져야 하고 모든 이를 섬기는 종의 소명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무겁고 힘겨운 짐을 형제의 어깨에 올려놓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이는 이기적인 야심가에 불과할 뿐, 엄밀히 말해 공동체의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근거를 제1독서에서 듣습니다.

"소돔의 지도자들아 ... 고모라의 백성들아"(이사 1,10).

소돔과 고모라는 죄악이 너무 무겁고 그 원성이 너무 커서 유황과 불로 아브라함 때 진즉에멸망한 도시들입니다(창세 18,16-29 참조). 그런데 기원전 740년대쯤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 이사야 예언자의 입을 통해 주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소환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 독서 대목에서 중략된 부분에는, 주님께 제사를 드릴 때 겉으로는 예를 갖추면서 그 속은 위선과 허세, 착취와 폭력으로 가득한 이스라엘 지도자와 백성들을 꾸중하시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소돔의 지도자, 고모라의 백성이라 부르신 것을 보면 그 죄의 악취가 얼마나 역겹고 혐오스러웠는지 짐작할 수 있을 듯합니다.

그들이 무엇을 놓쳤을까요? 주님께서는 그들이 무엇을 돌이키길 바라시는 걸까요?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이사 1,16).

사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혀 생소하고 낯선 이야기가 아닙니다. 일찌기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 안에 다 들어 있는 말씀들이니까요. 듣기는 하되 다만 실행하지 않은 일들이고, 가르치기는 하되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기대하지 않을 만큼 무의미하고 하찮은 덕목이 되어버린 말씀일 뿐입니다.

그러니 이사야 시대의 하느님의 탄식과 신약의 예수님 탄식이 한 목소리로 울립니다. 신구약 시대를 막론하여, 율법의 내용을 자기 이익과 권력 유지를 위해 취사 선택하고, 그런 자신을 모범 답안처럼 내세우는 소위 종교 지도자들이라 불리는 이들에 대한 주님의 안타까움이 강하게 묻어납니다.

실제로 말한 바와 실행이 온전히 일치하는 이는 오직 주님뿐이십니다. 그분의 말씀이 곧 '완성'이니까요. 그러니 사실 사람에게 언행일치라는 덕목은 아무리 애를 써도 늘 부끄러운 미완의 과제일 겁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은 우리에게 언행이 완벽히 일치하시는 하느님처럼 되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계시지요. 가령 말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떠버리 위선자가 되지 않기, 실행하지 않는 바에 대해서 침묵을 택하기, 비난과 불평 멈추기, 타인의 짐을 덜어 주고 숨어서 선행하기,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앞다투어 섬기기, 가난한 이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 편에 서기, 약자의 목소리가 되어 주기...

이는 어떤 제사보다, 어떤 예물보다 주님을 흡족하게 해드릴 값진 선물입니다. 벗님이 그동안 잘 해온 실천들이 있으실 테니 너무 욕심 내지 마시고, 거기에 더하여 하나만 더 실천해 보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마침 지역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세계적으로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연민과 참여의 장이 펼쳐져 있습니다. 말로만 이렇니 저렇니 하지말고 우리 각자의 "지금 여기"에서 구체적으로 동참하는 기도와 희생, 나눔을 통해 이 사순절이 주님의 형제로서 보폭을 맞추는 행복한 여정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니 우리, 작은 것 딱 하나씩만 더 해봅시다. 주님께서 기뻐하실 겁니다.

사람위에 있지 않고 하느님 앞에 있는 겸손과 회개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25359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2월 27일 사순 제2주간 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사람들로부터 천하고 무식하며 멸시받을 자로 취급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칭찬과 높임을 받을 때도

자기 자신을 더 나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종은 복됩니다. 

사실 인간은 하는님 앞에서 있는 그대로이지 그 이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과의 간게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지 않고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는 것,

이것이 내가 참으로 인간다운 인간이 되는 것이며

참으로 나다운 내가 되는 것이 아닐까

-김찬선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