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27일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2020년 2월 27일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루가 9,22-25)
Whoever loses his life
for my sake will save i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간다면 번성할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이는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져야 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세상에 참으로 많은 종교가 있지만, 믿음의 대상이 비참한 몰골을 하고 있고, 또 그런 모습을 경배하는 경우는 그리스도교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가령 불교는 부처상을 앞에 두고 예배하는데, 그 모습은 매우 평화롭고 세상 고통을 초탈한 것처럼 보입니다.
원불교는 동그란 원을 그려 우주의 궁극적 진리를 표현합니다.
이슬람교는 쿠란의 여러 문구를 예술적으로 그려 내는데, 이 역시 알라의 초월성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유독 그리스도교만이 예수님께서 못 박혀 돌아가신 모습의 십자가를 걸어 놓습니다.
절대자의 고통, 그 절대자의 죽음을 앞에 두고 경배하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시지만 동시에 무능하시고, 초월적이시나 가장 버림받은 곳에 머물러 계시는 분을 경배합니다.십자가는 죄인이 지고 가는 형벌 도구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그 위에서 죽었다는 것은 극악무도한 죄를 지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죄도 없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십니다.
세상의 불의와 부조리로 억울하게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무겁습니다.
예수님께서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신 이유는 가족이라는 무게, 경제적 어려움이라는 무게, 사회적 책임이라는 무게 등 온갖 무게에 짓눌려 고생하는 이들과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십자가는 외로운 자리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것은 갖은 비난을 받아들인다는 것이고, 십자가를 지고 죽음을 향하여 걸어가는 것은 철저하게 고독할 따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외로움에 떨고 있는 이들과 함께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십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억울하게 고통받고 있는 이들, 삶의 무게에 짓눌려 살아가는 이들, 외로움에 떨고 있는 이들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늘 저 높은 곳에서 이들을 내려다보시며 혀를 차시는 분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고통받으시고, 그들의 노고를 함께 짊어지시며, 그들의 외로움을 사랑으로 채워 주시려고 몸소 그들의 자리인 십자가를 지고 가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을 모시고 경배합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단점이 바로 셔츠의 구겨진 주름과 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우리는 단점이라는 주름이 있었습니다. 걷지 못하고 누워 있는 주름,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주름,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주름, 말을 하지 못해서 의사소통하지 못하는 주름…. 그러나 이 주름들이 영원했습니까?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주름은 스스로 또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 활짝 펼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더 나은 나, 새로운 나가 세상 속에 탄생했습니다.
분명히 주름을 펼 수 있고, 또 실제로 펴졌습니다. 그런데 성인이 되어 자신의 주름을 펼 수 없다면서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자신의 단점을 극복할 수 없다고, 자신에게 주어진 짐이 너무 무겁다며 주름 펴는 것을 아예 포기하기도 합니다.
주름이 있다고 옷을 버리지 않듯이, 우리도 나 자신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완벽하지 않은 나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름을 없애려고 더욱더 노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 예고하십니다. 그 수난과 죽음이 얼마나 끔찍하고 고통스러웠는지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주님 스스로 이 모든 사실을 미리 알고 있으면서, 자신의 몸으로 이 수난과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사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하지만 이 고통이 영원하지 않음을 부활을 통해서 분명히 보여 주십니다. 주름처럼 보이는 수난과 죽음이 분명히 부활을 통해 쫙 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야말로 주름처럼 보이는 고통과 시련을 쫙 펴서 희망을 품고 기쁘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실제로 주님께서는 이런 이들에게 구원을 약속하십니다.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시면서 가장 큰 기쁨이 어디에 있는가를 분명히 하셨습니다.
나의 주름을 떠올려 보십시오. 이제는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나의 주름들을 쫙 펼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미국의 정신의학자 칼 메닝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정신병 환자들에게 그들의 죄가 용서받았음을 확신시킬 수 있다면 그들 중 절반 이상은 다음 날 퇴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죄의식 없이 살아간다면 이 세상은 큰일이 날 것입니다. 자신의 본능에 충실한 것이 정의라고 한다며 마음대로 살아간다면 이 세상은 큰 혼란에 빠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나친 죄의식은 자신을 자신으로 살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주 “네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하셨던 것이 아닐까요? 이 세상 안에서 온전히 그리고 충실하게 살 수 있도록 하신 말씀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용서할 수 없다’라고 자주 말하지만, 하느님은 ‘무조건 용서한다’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나 같은 걸 하느님이 사랑하실 리 없어.’, ‘나 같은 것은 죽어야 해.’라는 생각은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고 자신의 잘못된 생각의 틀에 갇혀 사는 것일 뿐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하느님의 용서를 받았다고 느끼는 사람만이 자존감을 세워서 이 세상을 힘차게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과의 관계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이웃을 살리기 위한 목적이 아니면 착각의 십자가다
-전삼용신부-
‘news1’의 정민재 기자가 “곳곳서 드러나는 ‘신천지 거짓말’. 코로나 조기 종결에 치명타”란 제목으로 글을 올렸습니다. 신천지 신도들이 자신의 신분을 감추거나 거짓말 등으로 코로나19를 잡는데 어려움을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사 본문의 일부를 그대로 인용합니다.
“26일 서울 서대문구에 따르면 대구에서 거주 중인 신천지 신도이자 코로나19 111번 확진자 A씨가 서울에서 코로나19 감염 확진을 받은 뒤 역학조사팀에 거짓 진술을 했다.
A씨는 서울시 역학조사에서 신용카드 영업을 위해 서울 서대문구 가좌보건지소와 북가좌1동 주민센터만을 방문, 이곳 직원들과 접촉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폐쇄회로(CC)TV 분석 결과 A씨는 진술 외 추가 동선이 있었음이 드러났다. A씨는 자신의 진술 외 북가좌2동, 남가좌2동, 홍은2동주민센터 등 3곳을 추가로 방문한 것으로 밝혀졌다.
전날에는 경기 용인시의 첫 확진자이자 신천지 신자인 B씨가 ‘대구에 간 적이 없다’고 진술했던 것이 B씨의 휴대전화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조회 결과 거짓인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24일 대구 서구보건소의 감염 예방 업무를 총괄하는 감염예방의약팀장 C씨가 자신이 신천지 대구교회 교인임을 숨긴 채 근무하다 확진자로 판명되기도 했다. C씨는 격리 통보 전까지 자신이 신천지 교인이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그리스도교의 핵심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복음의 핵심은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것’입니다. 십자가로 참 그리스도교와 그렇지 못한 가짜 그리스도교를 분간할 수 있습니다.
분명 신천지 교인들도 지금 십자가의 길을 가고 있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을 참아낸다고 다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정수는 내가 죽는 것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사는 것에 있습니다. 이웃을 위해 내 피를 내어주는 목적이 빠지면 그 십자가는 착각에 불과합니다.
만약 병을 앓고 있는 어떤 사람이 “다 십자가로 생각하고 참고 살아야지요. 이런 병도 십자가로 생각하고 견뎌야죠.”라고 한다면 정말 십자가를 진 것일까요? 아닐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 사람이 평소 너무 많이 먹고 불규칙한 식사 생활로 인해 위장병이 생긴 것이라면 말입니다. 자신이 몸 관리를 잘 못하고 음식에 지나친 탐욕을 부리다가 얻은 병을 십자가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이웃을 위한 희생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죽이지 못하여 이웃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인 것입니다.
혹은 어떤 사람이 “저는 이 가난을 십자가로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면 그 십자가가 옳은 십자가일까요? 만약 그 사람이 방탕하고 사치하고 게을러서 가난한 것이라면 그것은 십자가라 착각하는 것이지 참 십자가가 아닙니다. 십자가의 목적은 항상 이웃을 살리기 위한 목적이 있어야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탓으로 가난한 것은 오히려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만듭니다. 고통을 참아낸다고 다 십자가가 아니라, 그 고통이 이웃을 위한 것일 때 참 십자가가 됩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무엇이 우리 생명인지 명확히 알려주십니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
하느님께서 생명이십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모셨으면 영원한 생명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문제는 하느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채로 우리에게 오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이 예수님만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가 너희를 위해 피를 흘린 것처럼, 너희도 이웃을 위해 피를 흘려라!”는 뜻과 같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고통을 견뎌낸다고 다 십자가가 아니라 이웃을 위해 굳이 당하지 않아도 되는 고통을 견뎌낼 수 있을 때 그것이 참으로 생명의 십자가가 됩니다. 우리 등엔 생명의 십자가가 지워져있어야 합니다.

-조재형신부-
피정 중에 나바호 원주민을 만났습니다. 그는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혼자이지만 외롭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함께 하지만 외로움을 느낍니다. 하느님이 함께 하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심을 믿는다고 하는데 많은 사람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믿지 않는 것 같습니다. 나는 매일 새벽에 땅과 생명에게 기도합니다. 나는 매일 저녁에 하늘에 기도합니다. 그분께서 다시 오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작은 집을 하나 만들려고 합니다. 길가는 나그네에게 쉴 곳을 마련해 주고 싶습니다. 누구든지 찾아오는 사람이 있다면 머물 곳을 마련해 주고 싶습니다.” 혼자이지만 외롭지 않은 형제에게, 주님의 다시 오심을 삶으로 믿는 형제에게, 이웃에게 사랑을 나누려는 형제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했습니다. 형제님의 할아버지는 언제나 사랑하는 손자에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땅의 기운과 바람의 기운과 구름의 기운을 느껴야 한다.’
오늘 제1 독서는 선택을 이야기합니다. 축복과 심판의 선택을 이야기합니다. 생명과 죽음의 선택을 이야기합니다. 법을 지키는지, 법을 어기는지의 선택을 이야기합니다. 인공지능은 분명히 입력된 방식으로 선택을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류를 범할 확률이 낮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감성을 가졌습니다. 나약한 면이 있습니다. 항상 빛을 선택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때로 어둠을 선택하고 후회를 합니다. 때로 이해할 수 없는 선택도 합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믿으며, 우리의 허물까지도 받아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명확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주님의 뜻을 따라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가서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것인지, 남을 탓하고,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원망하고 하느님과 멀어지는 신앙생활을 할 것인지는 우리들의 몫입니다. 우리는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의 길을 따라갈 수 있도록 우리들의 마음을 주님께로 돌려야 하겠습니다. 人生은 마라톤이라고 말들을 합니다. 지금 당장은 꽃이 아닐지라도 그것이 내 삶의 거름이 되어 알찬 열매를 맺을 수 있다면 그 길이 가시밭 길 일지라도 주어진 길을 충실하게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십자가는 천국의 열쇠
-반영억신부-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기도입니다. “나의 빈약하고 연약함을 생각하면 두렵습니다만 주님께 바라는 굳센 믿음으로 실망하지 않겠습니다. 원컨대 저 십자가의 능력이 내게 힘을 주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외에는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주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믿음이 십자가를 감당하게 합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십자가는 당신의 사랑스런 자녀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십자가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이며, 천당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성 요한 비안네).
예수님께서는“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9,24).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이 곧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사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자신을 버리면 모두를 잃어버리는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바라보면 답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 앞에서 당신의 뜻을 버렸기 때문에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었습니다. 아니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결국 십자가는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데서 오는 희생입니다. 알퐁소 성인은 “당신이 제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를 맞추겠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주님의 뜻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를 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은 힘들게 고생하면서 따라오라는 말씀이 아니라 매 순간마다 자신의 뜻을 비우면서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하라는 요구입니다. 그러나 막상 일상 안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선택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주장, 뜻을 양보한다는 것이 정말 마음 같지 않습니다. ‘날마다’는 아니라면 오늘 하루만이라도 내 공로를 내세우지 말고 또 내 생각에 고집을 부리지도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십자가는 희생을 요구합니다.
신명기의 말씀은 우리가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를 알려줍니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 놓는다.”“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또한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신명11,26;30,19-21).
마땅히 생명과 행복을 선택해야 하지만 그것이 아주 사소한 일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양보하는 것 하나가 뭐 그리 대단하냐고 하겠지만 그 시작이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요까짓 것’ 하는 것이 정말 대단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고까짓 것’일 수 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매사에 신중한 선택을 하시기 바랍니다. 어렵고 힘든 것을 선택한다는 것이 지금은 십자가이지만 그 십자가가 더없이 큰 축복임을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십자가는 언제나 하느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당신에게 증거 할 방법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고 순종하며 십자가를 지십시오! 그러면 마지막에는 그 십자가가 여러분을 져줄 것입니다”(성 토마스 아 켐퍼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이영근신부-
오늘, ‘재의 수요일’을 지내고 맞이하는 첫 날의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첫 번째 수난을 예고하시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곧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 9,20)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이어,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신 사명, 곧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실 분임을 밝혀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었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루카 9,22)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일어날 일 네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수난을 당하신다는 것이요,
<둘째>는 버림을 받으신다는 것이요,
<셋째>는 죽임을 당하신다는 것이요,
<넷째>는 죽은 후에 살아나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네 가지는 모두 수동형으로 표현되어 하느님의 권능이 개입할 것임을 시사해줍니다.
“반드시”(이백주년 성서; “마땅히”)라는 단어는 이 모든 것이 필연성이나 당위성에 의해 다가오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이어서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당신을 따르는 길은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지만, 세 가지를 요구하십니다.
<첫째>는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요,
<둘째>는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이요
, <셋째>는 이를 지속적으로 날마다 이를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버려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주권이 오직 하느님께만 있음을 믿고 오로지 하느님께만 신뢰를 둔다는 것이요,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서 지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애기를 가슴에 품듯 끌어안는다는 원어의 뜻대로 자발적으로 기꺼이 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버린다거나 자기 십자가를 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왜 하는가?’ 가 중요하다 합니다.
곧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이것들을 행해야 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인생의 길에서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인 자기 부정과 자기 십자가를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기 위해서’ 행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 24)
바로 여기에 우리의 결단이 요청됩니다. 곧 생명과 죽음의 결단이 요청됩니다.
<제1독서>에서도 바로 이 생명과 죽음의 길에서 결단을 촉구합니다.
그리고 생명의 길을 이렇게 말해줍니다.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신명 30,20)
오늘, 우리가 자신을 버리더라도 예수님을 위하여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더라도 예수님을 사랑하여 사랑으로 짊어진다면, 생명의 길을 선택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루카 9,23)
주님!
자신을 버리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길을 갑니다.
제 능력이 아니라, 당신의 권능을 믿는 일
제 자신이 아니라, 당신께 신뢰를 두는 일
이토록 자신을 바치는 일, 그것은 당신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아멘

자신을 버리고
-송영진신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사순절은 ‘나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생활을(신앙생활을)
더욱 잘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시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대림절은 ‘나에게 오시는’ 예수님을 잘 맞이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시기,
‘내가’ 예수님에게 더욱 가까이 가기 위해 노력하는 시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라는 말은, 지금 하시는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즉 아무도 이 말씀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신앙인이 신앙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일들에는
어떤 특혜나 특권 같은 것은 없습니다.
아무도 예수님의 가르침들과 계명들을 실천하는 일을 면제받지 못합니다.)
“내 뒤를 따라오려면”이라는 말씀은, 신앙생활이란, 앞장서 가시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생활이라는 것을 나타내는데,
실제로는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내 뒤를 따라오려면”을
“나와 함께 살기를 바라면”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을 버리고” 라는 말씀은,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모두 다 버려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버려야 할 나’는 무엇이고, ‘구원받아야 할 나’는 무엇인가?
내가 나를 버린다면 구원은 누가 받게 되는가?
무엇을 버려야 하고 무엇을 남겨야 하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나’ 라는 존재 자체를 버리라는 뜻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에서 나의 영혼이 구원을 받는 것을 방해하는
‘육적인 것들, 물질적인 것들, 세속적인 것들’을 모두 버리라는 뜻입니다.
내 안에 있는 육적인 욕망과 욕심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이나
애착심, 이기심, 쓸데없는 자존심이나 고집 등...
신앙생활에 아무 도움이 안 되는 것들은 모두 버려야 합니다.
그런 것들도 ‘나의 일부’이고, ‘나’이지만, 버려야 합니다.
버려야 할 것들을 버린 다음에 남겨 두어야 할 것들은(끝까지 지켜야 할 것들은)
‘믿음, 희망,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뒤를 잘 따라가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믿음, 구원받기를 바라는 희망,
구원받기 위해서 실천하는 사랑은 끝까지 잘 지켜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궁극 목표는 ‘내가(나의 영혼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그 일에 방해가 되는 것들은(걸림돌이 되는 것들은)
모두 버려야 합니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라는 말씀은, 원래는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겪는
십자가들을 감수하라는 가르침인데, ‘자신을 버리는’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들을
감수하라는 가르침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을 버리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닌데,
어렵지만 주님의 뒤를 잘 따라가려면,
그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생명을 얻으려면 반드시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은, 지금 말하고 있는 주제에 직접 연결됩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루카 18,25).”
이 말씀에서 ‘부자’는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하고 집착하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 라는 말씀은,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라는 뜻입니다(루카 18,27).
이 말씀에 대해서 제자들은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라는 반응을 보였습니다(마르 10,26).
제자들은, ‘큰 부자’가 되지는 않더라도 물질적으로 궁핍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
또 지상에서 복을 누리면서 사는 것 등은 거의 모든 사람들의
일반적인 소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 소망을 죄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예수님께서 그런 소망 자체를 부정하시는 말씀을 하시기 때문에 놀랐고,
또 “그러면 구원받을 사람이 하나도 없겠다.” 라고 말한 것입니다.
“자신을 버리고” 라는 말씀을 제자들 경우에 적용하면, 그런 사고방식과
소망을 버리는 것이 자신을 버리는 일이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오늘날에도 당시의 제자들과 같은 생각을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 이들은, “재물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다. 착한 부자도 많다.” 라는 말을
하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약화시켜서 자기 생각에 맞추려고 하는데,
재물에는 사람이 하느님을 온전히 섬기는 것을 방해하는
마성(魔性)이 들어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 라는
말씀이 바로 그 가르침입니다.
(재물을 신처럼 섬기는 것이 아니고, 그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일 뿐이라 하더라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물 때문에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지장이 생긴다면,
그것은 재물을 섬기는 것입니다.)
“착한 부자도 많다.” 라는 말에 대해서는,
‘낙타와 바늘귀 이야기’에 나오는 부자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선함과 경건함을 인정해 주셨습니다(마르 10,21).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착한 부자’로 사는 것만으로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재물을 버려야 하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혹시라도, “재물에 대한 애착심과 집착만 버리면 되는 것이 아닌가?”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지금 가지고 있는 재물을 계속 가지고 있기를
바라면서 애착심과 집착을 버렸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계속 가지고 있기를 바라는’ 그 마음이 바로 애착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하고 있는 말이
“신앙인은 모두 가난뱅이로 살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사도 4,34).
잠언에 있는,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 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이다(잠언 30,8-9).” 라는 기도가
하나의 모범이 될 수 있습니다.
신앙인은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일용할 양식’을(일용할 양식만)
청하는 사람이고, 그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름
-조욱현신부-
복음: 루가 9,22-25: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시면서 당신을 따르는 길이 어떤 길인지, 그리고 우리가 세상에서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가르쳐 주신다. 인간은 세상에서 더 많이 가지고 싶어 하고 무언가 더 누리려는 욕심이 있다. 그러나 온 천하를 얻을 수 있더라도 자기 목숨과 바꾸려고 하는 사람은 없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우선 내가 살아있고 나서야 가치가 있는 것이지, 내가 없으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라고 하신다. 당신을 닮는 것만이 우리에게 참된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 인간은 하느님 안에 있을 때만이 진정으로 행복과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즉 한 마디로 한다면 우리 인간은 하느님을 떠난 삶으로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고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하느님 안에서만 자유로운 것이다.
이 행복과 자유를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느님의 모습이 된다. 하느님의 모상을 완성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하느님의 모상은 매일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잘 짐으로써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즉 주님의 말씀대로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면서, 주님을 닮아가면서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과거를 모두 잊고, 자신의 의지를 완전히 내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지고 가는 십자가는 다름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이기기 힘든 상대는 다른 사람이나, 환경이 아니고 바로 나 자신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나 자신이 가장 큰 십자가이며, 이 십자가는 다른 누구도 대신 져줄 수가 없는 나만이 지고 갈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인생을 누가 대신 살아줄 수 없는 것처럼, 나의 십자가도 꼭 나만이 질 수 있는 것이고, 그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을 완성시켜야 한다.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이다. 우리의 생명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다. 이 생명을 우리가 마음대로 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생명이 살아 있는 한 자신의 안일만을 위해 이기적인 삶을 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시간과 능력을 그리고 가진 것을 나누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생명을 영원히 살릴 수 있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입으로만 주님을 부르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마음이 주님께로부터 멀리 있다면 주님께로부터 우리도 외면을 당할 것이다. 주님께서 외면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마 우리가 그분을 외면하여 바라볼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 사순시기가 이제 진정으로 우리에게 은총의 때가 될 수 있도록, 즉 우리 자신이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시기가 될 수 있도록, 그래서 영광의 부활에 우리도 기쁘게 참여할 수 있도록 우리의 십자가를 잘 지고 갈 수 있는 은혜를 청하면서 기도하자.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 24)
-한상우신부-
생명이
목숨입니다.
목숨을 살리고
목숨을 구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우리의 목숨은
누군가의 십자가에
빚을 지고 있는
사랑과 희생의
목숨입니다.
목숨은 십자가 없이
유지될 수 없습니다.
목숨은 사랑이며
목숨은 감사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소중한 목숨입니다.
목숨의 본질은
사랑의 실천에
있습니다.
사랑과 생명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목숨또한
한 분이신
하느님의 것입니다.
이 사순시기가
진정으로 생명을
위하고 생명을
사랑하는 은총의
사순시기이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목숨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이 시간을
봉헌합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사순 시기를 막 시작한 우리에게 선택을 촉구하십니다.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루카 9,23)
예수님은 당신을 따라오려는 사람에게 "자신"과 "십자가" 사이에서 선택을 하라고 하십니다. 버려야 할 것은 "자신"이고 지녀야 할 것은 "십자가"임이 명백합니다.
사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것이 "자신"입니다. 자아가 좋아하는 것, 원하는 것은 쉽게 감지할 수 있지요. 원초적이고 본능적이며 현실적인 목소리인 자아는, 그 결과까지는 모르더라도 당장 가려운 데를 긁어 주고 욕구를 읽어 주며 스스로를 보호해 주는 듯 느껴지지요.
어쩌면 예수님은 바로 그런 이유로 "자신"을 버리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육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가치를 아주 무시할 수는 없지만, 마냥 그것만 추구해서는 곤란하니까요. 하느님 마음을 나누어 받은 인간은 태생적으로 영적 세계에도 동시에 발을 담그고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영의 현실은 우리가 안주하고픈 자아를 초월하라고 재촉합니다. 그저 편하고 쉽고 풍요롭고 안전해 보이는 땅에 주저앉아 있지만 말고, 일어나 금 밖으로 나오라고 손짓합니다. 마냥 "자신" 안에 눌러 앉은 채로는 우리 각자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소명을 제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소명은 안전지대 밖에서 불편하고 거북해 보이는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립니다. 그래서 소명을 완수하려면 믿음과 용기가 필요한 것이지요.
제1독서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두 선택지를 제시합니다.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신명 30,15).
그리고 19절에 이를 반복하면서 "행복" 자리에 "축복"을, "불행" 자리에 "저주"를 놓습니다.
죽음과 불행, 저주가 눈에 뻔히 보인다면 누구도 그것들을 선택하지 않지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것들은 자아를 매혹시키는 달콤하고 수려한 포장지로 잘 싸여 있습니다. 쓴 약을 먹기 쉽도록 외피를 묻힌 당의정처럼 말이지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특별히 선택받은 계약의 백성이면서도 우상숭배와 형식주의에 걸려 넘어진 것 아닐까 싶습니다. 그 길의 끝에 죽음과 불행, 저주가 도사리고 있는 줄 모르고, 당장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쉽고 풍요로운 길을 선택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으니까요.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신명 30,20).
날마다 우리에게 던져진 선택지 중에서 어떤 것이 생명, 행복, 축복이고 어떤 것이 죽음, 불행, 저주인지 모호할 때가 있지요. 그럴 때는 주님을 선택하면 됩니다. 주님이 우리의 생명이시니까요.
우리 주님이 누구와 있는지, 무엇을 지고 계시는지, 어떤 평판을 듣는지, 적들은 어떤 부류이고 벗들은 어떤 부류인지, 어디 사시고 얼마나 가지셨는지 그분을 눈여겨 보면 답이 나올 겁니다.
사랑하는 벗님! 이제 더 이상 굳이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압니다. 주님을 따르는 삶에서 무엇이 생명이고 행복이며 축복인지... 한 해를 돌아 다시 맞이한 이 사순 시기는 부족한 우리에게 또 다시 새로운 기회를 주시려는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그 축복을 살아갈 때 '은혜의 때'가 되고 '구원의 날'이 될 겁니다. 그러니 날마다 조금씩 더, 생명, 행복, 축복의 길로 무게중심을 기울이며 사순 시기를 채워가도록 오늘도 새롭게 분발합시다.

재의 수요일 다음 목요일-2013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22258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가 9,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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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 내가 지고 가는 십자가는 다름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이기기 힘든 상대는 다른 사람이나, 환경이 아니고 바로 나 자신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나 자신이 가장 큰 십자가이며, 이 십자가는 다른 누구도 대신 져줄 수가 없는 나만이 지고 갈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인생을 누가 대신 살아줄 수 없는 것처럼, 나의 십자가도 꼭 나만이 질 수 있는 것이고, 그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을 완성시켜야 한다.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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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당신을 따라오려는 사람에게 "자신"과 "십자가" 사이에서 선택을 하라고 하십니다. 버려야 할 것은 "자신"이고 지녀야 할 것은 "십자가"임이 명백합니다.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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