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25일 연중 제7주간 화요일
2020년 2월 25일 연중 제7주간 화요일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고 말씀하셨다.
(마르 9,30-37)
“If anyone wishes to be first,
he shall be the last of all and the servant of all.”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야고보는 세상과 친해지면 하느님과 멀어진다고 신앙인들에게 경고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논쟁한 것을 아시고,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깨우쳐 주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신학생 때, 한 학기에 한 번씩 교구장 주교님과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그 많은 편지들 가운데에서 문득 오늘 복음을 듣고 생각나는 글이 있습니다.
편지에서 교구장 주교님께서는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살아가면서 몇 가지 유념하는 공리(公理)가 있단다.
그 가운데 하나는 사람은 농담으로든 진담으로든, 어떤 형태로든지 자신의 단점을 드러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이 사람들이 그를 편하게 생각한단다.”그때 왜 하필 저에게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살면서 단순하고도 연륜이 느껴지는 이 말씀을 자주 떠올립니다.
자기 자랑하는 사람치고 주위에서 반기는 사람 없고, 자신의 단점을 드러낼 줄 아는 사람치고 주위에 사람 없는 경우는 드물다는 것을 살아가면서 깨닫기 때문입니다.사실 세상에 그 누구도 털어서 먼지 나지 않을 수는 없으며, 단점 없이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스스로가 자신의 단점을 농담으로든 진담으로든 털어놓는다면 사람들은 그 사람을 보고 비웃거나 얕보지 않고, 편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동질감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여느 사람들과 같이 되시어 십자가에서 꼴찌의 자리를 차지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만물 위의 주님으로 드높이셨습니다.이러한 주님을 따릅시다.
우리도 그분처럼 무시와 비웃음을 당하는 꼴찌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한재호 루카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비폭력 저항운동이 폭력적인 저항운동에 비해 무려 2배 이상의 성공률을 보였습니다. 구정권의 폭압적인 방식으로 억압하는 사례들로 좁히면, 비폭력 저항운동의 성공률은 무려 6배 이상이었습니다.
이와 연결된 다른 결과도 아주 흥미로웠습니다. 저항운동에 지속해서 참여한 사람들이 인구의 3.5%가 넘는 모든 저항운동은 100% 성공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3.5%가 넘는 저항운동은 모두 비폭력 저항운동이었습니다.
평화를 지향하는 3.5%만으로도 충분히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역사는 증명합니다. 이를 보면서,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이 세상 안에서 실천되면서 변화를 이루고 있는지를 떠올려 봅니다. 혹시 3.5%도 넘지 못해서 점점 더 어렵고 힘든 세상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나부터의 변화가 이루어져서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을 벌입니다. 높고 낮음을 따지는 것은 이 세상 안에서는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입장에서는 세상의 관점보다 하느님의 관점을 우리가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어린이를 껴안으시면서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겸손한 마음, 사랑의 마음이 있어야 자기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하십니다. 이러한 겸손과 사랑의 마음을 통해 분명히 주님의 뜻이 펼쳐지는 세상을 만드는데 한몫을 담당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높고 낮음을 따져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주님의 기준으로 올바른 모습, 즉 종이 되어 섬기는 겸손과 사랑으로 가득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하셨던 말씀, “보시니 좋았다.”라는 말씀을 다시 들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자기를 살리려는 사람 안에서 말씀은 죽는다
-전삼용신부-
알베르 카뮈의 희곡 중 「오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중부 유럽의 외딴 들판에 한 모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조그만 여인숙을 경영하면서 가난하고 고독하게 살아갑니다. 그 집에는 원래 ‘쟌’이란 아들이 있었지만 어렸을 때 가출하여 지금은 두 모녀만 살고 있습니다.
두 모녀는 가난과 고독에 지친 나머지 이상한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자기 집 여인숙에 투숙하는 손님 중에서 특별히 돈 있어 보이고 혼자 투숙하는 남자 손님에게만 마취약을 먹인 후 목 졸라 죽이고 소지품을 뒤져서 돈과 보석을 빼낸 다음에는 강물에 빠뜨려 버리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호기심과 고독과 가난을 이겨내기 위해서했지만 점점 이것이 상습화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건장한 젊은이가 투숙했습니다. 돈도 있어 보이고 성공한 남자처럼 보였습니다. 두 모녀는 그 젊은이를 그 날 밤 마취약을 먹인 후 죽이고, 그의 주머니를 뒤지다가 다 떨어진 신분증과 사진을 보니, 바로 28년 전에 가출했던 바로 ‘쟌’이었습니다. ‘쟌’인 것을 확인한 순간 모녀는 부들부들 떨면서 실신해 버렸습니다. 결국 그 고통을 감당할 길이 없어서, 모녀는 ‘쟌’을 죽여 갖다 버린 그 강물에 뛰어 들어 자살을 합니다.
이웃을 죽여 자신의 배를 채우다가는 결국 자신이 그렇게 기다리던 구원자도 죽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또한 말씀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살리려는 사람은 이웃을 죽여야만 하기 때문에 말씀을 죽이는 사람이 됩니다. 어떤 생명체든 남을 죽이지 않고 자기 생명을 연명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살자고 이웃을 죽이다보면 결국 예수님도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6,25)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자기를 죽인다는 것은 자신의 온 전체를 죽인다는 말이 아닙니다. 영혼과 육체 중, 특별히 육체에 해당하는 욕구, 혹은 육체의 주인인 ‘자아’를 죽인다는 말입니다. 또 자아나 육체의 욕구가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이것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욕구가 생존 이상의 것을 요구할 때 하느님의 뜻과 맞서게 됩니다. 그러면 말씀이 죽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러한 모습을 보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으로 십자가에 당신 자신을 봉헌하러 가시는 중인데 그분의 제자들은 누가 높은지 서로 논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서로 자기가 살려고 하는 모습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하시는 말씀을 곧이듣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라고 말합니다. 괜히 물어보았다가 정말 자신이 십자가에 죽어야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알게 되는 것이 겁이 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이 작은이들을 잘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말씀’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은 우리 자신을 죽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살려면 반드시 누군가를 죽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웃을 살리기 위해 내가 죽으려하지 않는 사람은 말씀이 이해 될 리가 없습니다. 그저 그러려니 하고 넘겨버릴 것이고 심지어 자기 생각에 맞추어 가르침을 왜곡합니다.
성경을 잘 이해하고 말씀을 주님으로 모시고 싶다면 먼저 자신을 죽이십시오. 자신을 죽여야 이웃을 살릴 수 있습니다. 이웃을 받아들이는 만큼 말씀도 잘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성서학자들보다 마더 데레사가 성경말씀을 더 잘 이해하신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임과 이웃사랑은 하나입니다.

-조재형신부-
뉴욕에 온지 6개월이 되었습니다. 충전의 시간을 갖고 싶어서 뉴멕시코에 있는 피정의 집에 며칠 머물렀습니다. 피정의 집에는 3대륙에서 오신 수녀님이 계셨습니다.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입니다. 수녀님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식사하면서 대화하면서 놀라운 체험을 하였습니다. 유럽에서 오신 수녀님은 아시시에 있었고, 제가 아는 수녀님과 함께 있었다고 합니다. 아프리카에서 오신 수녀님은 제가 아는 신부님을 아신다고 하였습니다. 아시아에서 오신 수녀님은 제가 존경하는 신부님과 함께 피정을 하였다고 합니다. 모두 처음 보는 분들인데 모두 제가 아는 분들과 인연이 있었습니다. 세상은 넓은 것 같지만 그렇게 넓은 것만도 아닌 것 같습니다. ‘선한 일은 아주 작은 것이라도 행하고, 악한 일은 아주 작은 것이라도 하지 말라’는 말이 새삼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우리의 몸을 구성하는 원자는 우주가 시작되면서 생겨났다고 합니다. 물질은 생성하고 소멸하지만 원자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공존하고 있습니다. 70억 인류의 몸을 이루는 원자는 어쩌면 모두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겁니다. 아니 우주의 모든 존재는 ‘인드라망’이 되어서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주를 구성하는 모든 것은 보석같이 참으로 귀한 존재이며 그 각각은 서로가 서로에게 빛과 생명을 주며 더불어 존재하는 겁니다. 오늘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 참된 지혜는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방에게 해 주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시기와 분노, 원망과 욕망의 구름은 걷히고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의 별이 떠오를 겁니다.
‘도토리 키재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150억년 우주의 역사에서 고작 100년을 살면 잘 사는 우리가 ‘성공, 권력, 명예, 재물, 능력, 업적’으로 경쟁한다면 참 우스운 일입니다. 영원히 가지고 가지 못할 걸 얻기 위해서 우리는 ‘악연’을 맺기도 합니다. 속이고, 미워하고, 원망하고,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서열을 정하고 무시하기도 합니다. 조금 아는 걸 가지고 잘난 척하기도 합니다. 하느님나라를 선포하고, 복음을 전하고, 병자를 고쳐주던 제자들도 ‘도토리 키재기’를 하였습니다. 길가다가 서로 다투었습니다. 누가 더 높은 자리를 얻을 것인지 논쟁하였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도, 나병환자를 치유하신 기적도, 눈먼 이의 눈을 뜨게 한 기적도, 풍랑을 잠재우신 기적도 그저 권력을 얻기 위한 능력으로 보였나 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표징은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일은 재의 수요일입니다. 교회는 내일부터 사순시기를 시작합니다. 부활은 십자가와 죽음을 거쳐야 합니다.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사랑하면서 부활의 꽃은 피는 겁니다. 신앙의 신비여! 우리는 주님의 죽으심을 전하며 주님의 부활을 선포하나이다.

혹시 우리도 말로만 제자, 무늬만 제자는 아닌가요?
-양승국신부-
오늘 예수님께서는 두번째 수난 예고를 하십니다. 두 번째 수난 예고는 첫 번째 수난 예고와 비슷하지만, 사람의 아들은 유다 지도자들로부터 배척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마르코 복음 9장 31절)이라는 것이 두드러진 차이점입니다.
두 번째 수난 예고에서 특징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제자단의 반응입니다. 그들은 스승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에 대해 질문하는 것조차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가 그간 자신들이 꿈꿔왔고 상상해왔던 길이 아니었기에 때문에 일부러 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추구하고 있는 왕국과 제자들이 기대하고 있는 왕국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하나 자리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보이고 있는 극단적 미성숙과 스승님의 정체와 사명에 대한 몰이해는 점점 커져만 갑니다. 카파르나움에 위치한 베드로와 안드레아의 집에 도착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을 하였느냐?” 앞서 걸으시던 예수님께서 뒤따라오던 제자단 분위기를 눈치 채셨던 것입니다. 계속 티격태격하며 뒤따라오던 제자들의 대화를 가만히 들어보니, 예수님 당신 얼굴이 다 화끈 거릴 정도였습니다.
제자들은 부끄럽게도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인가 하는 문제로 길에서 한바탕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노상에서 서열다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제자들은 주님과 동고동락하고 있었지만 아직도 주님과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부지런히 스승님을 따라가고 있었지만, 허깨비같은 몸만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정신과 영혼을 전혀 따라가고 있지 않았습니다. 말로만 제자, 무늬만 제자였던 것입니다.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 마음이 심란해지신 예수님이신데, 그래서 이미 두 번씩이나 제자들에게 수난 예고를 하셨는데, 그렇다면 스승님이 걸어가실 그 길이 어떤 길인지에 대해 함께 진지하고 숙고하고 고민할 법도 한데, 제자들은 스승님의 수난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일말의 양심이 있는 제자라면 스승님이 겪고 계신 고뇌에 조금이라도 참여하기 위해 노력할텐데, 그래서 스승님을 따뜻한 말로라도 위로해드리고자 노력할텐데, 제자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저 누가 큰 사람인가? 스승님의 나라가 서면 누가 오른쪽 왼쪽에 앉을 것인가에만 관심이 가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갈길이 까마득한 제자들에게 다시 한번 절대로 굽힐 수 없으며, 어쩔 수 없는 당신의 운명과 사명, 핵심 사상에 대해서 가르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코 복음 9장 35절)
이스라엘 구원사 안에서 가장 탁월한 지도자로 손꼽히는 인물은 모세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지니고 있던 가장 두드러진 덕행은 겸손이었습니다. 지도자들이 가장 먼저 갖춰야할 기본적인 덕행은 바로 겸손입니다. 겸손의 덕을 상실한 지도자는 이미 모든 것을 잃은 사람입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권고 말씀에 귀를 바짝 기울였으면 좋겠습니다. 선거 전에는 겸손도 그런 겸손이 없습니다. 국민의 충복이 되겠다고 90도로 고개 숙이고, 큰절 까지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선거만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듯이 국민들을 깔보고 우습게 여깁니다.
어떤 사람이 진정 겸손한 지도자며 국민을 섬기는 종인지? 어떤 사람이 틈만 나면 양들을 잡아 양꼬치 파티를 벌이는 삯꾼이요 사기꾼인지 유심히 바라봐야겠습니다.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
-반영억신부-
서로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준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동고동락하면서도 서로의 마음을 읽지 못할 때는 답답함을 갖게 됩니다. 같은 잠자리에서 서로 다른 꿈을 꾼다는 말대로 예수님과 제자들은 그야 말로 동상이몽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수난과 죽음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제자들은 마땅히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아니라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기 전에 높은 자리를 차지하여 인정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입니다”(마르9,34). 이 물음은 창세기3장9절의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하는 물음이나 카인에게 “네 동생 아벨은 어디 있느냐?” 하는 물음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몰라서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네 속을 보아라’ 하시는 말씀입니다. 네 마음의 중심이 어디 있는가를 살피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큰 사람은 단순히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품이 큰 사람을 말합니다. 아니 가장 크신 분을 내면에 품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높은 자리를 희망하고 있었으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스승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들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복음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논쟁을 하였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이러한 상태에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9,35).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랑으로 섬기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섬긴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듭니까? 대접 받기는 쉬워도 상대방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기는 너무 어렵습니다. 내 중심이 아니라 상대방을 중심으로 나의 것을 양보한다는 것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2,6-7).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 이십니다. 자신을 낮추어 상대방에게 맞추는 겸손, 이것이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입니다. 사랑은 가장 좋은 것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눈높이 사랑이 필요합니다. 미숙하고 모자란 상대를 받아들이는 섬김이 필요한 때 입니다. 내 마음 안에 하느님이 커지셔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이 세상에서 마음의 평화와 위안을 누리려 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바람과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의 보이는 평화를 갈망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의 궁극적인 구원을 바라십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의 일시적인 수고와 땀, 희생의 봉헌을 새롭게 하십니다. 주님을 차지한다면야 종이면 어떻고 꼴찌면 어떻습니까? 결국 모든 것을 얻은 것인데 말입니다. 주님을 알고 그분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사랑은 한이 없으십니다. 그분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의 앞부분은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예고에 대한 말씀이고, 뒷부분은 수난과 죽음을 향하여 가는 예수님과는 반대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는 제자들에게 “가장 큰 사람”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에 대해 논쟁을 벌인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
이는 ‘첫째’가 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한 첫째’가 누구인가를 가르쳐줍니다. 나아가, ‘진정한 첫째’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곧, 먼저 ‘꼴찌’가 되고 ‘종’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진정한 첫째’가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꼴찌’는 자신을 타인보다 ‘뒤에’ 두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중심’이 아니라, ‘주변’에 두는 사람입니다. ‘으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미천한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지 자신을 앞세우지 말라고만 하지 않으십니다. 나아가서, 남 ‘밑에’ 두라고 하십니다. ‘모든 이의 종이 되라’ 하십니다. ‘종’이 되되 지체 높은 이들의 종이 아니라, ‘모든 이의 종’이 되라 하십니다. 곧 미천한 이들의 종도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종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종’은 자신을 타인보다 아래에 두는 사람으로서, 첫째는 자신을 채우려 하지 않는 자입니다. 곧 자기실현을 내려놓은 자요, 오히려 타인의 실현 곧 주인의 뜻을 실현하는 자입니다. 둘째는 자신이 아니라 주인을 섬기는 자요, 주인을 위하여 자신을 바치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 9,37)
‘어린이’는 성경에서 무능하고 힘없는 이, 그래서 돌보아주지 않으면 곧 죽게 되는 약한 이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어린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회에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미천하고 버려진 이, 천대받고 소외된 이를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종이 된다는 것’은 어린이처럼 무능하고 허약한 작은이를 받아들여 자신이 더 작아진 이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일’, 곧 무력하고 미천한 이를 받아들이는 일, 바로 그것이 ‘당신을 받아들이는 일’이라고 하십니다. 결국, 어린이처럼 ‘무력한 당신’을 받아들이는 일이 ‘첫째’가 되는 일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나 높아지고 ‘갑’이 되어 지배 하고자 하는 이 시대에 ‘을’이 되어 섬기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진정한 첫째’가 되는 길이라 하십니다. 그것은 ‘섬김’이 다스리는 나라가 되기 위한 일종의 반역이요 혁명입니다. 곧 ‘섬기는 이’가 첫째가 되고, ‘사랑’이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
주님!
자신을 앞세우지도, 위에 두지도 않게 하소서.
이기기보다 질 줄을 알며,
억누르기보다 뒤집어쓸 줄을 알고, 업신여기기보다 존경하게 하소서.
자신을 낮추되 작은이나 무능한 이에게도 낮추고,
타인을 섬기되 낮은 이나 힘없는 이도 섬기게 하소서.
자신을 실현하기보다 자신을 내려놓고,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게 하소서. 아멘.

<‘낮춤’과 ‘섬김’>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 9,35-37)”
예수님 말씀에서 “첫째가 되려면”이라는 말은, “가장 높은 사람이 되려면”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인정을 받으려면”, 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이라는 뜻입니다(마태 18,3; 마르 10,15).
따라서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는 것”은,
“가장 높은 사람이 되는 방법”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입니다.
여기서 ‘누구든지’ 라는 말은, 이 가르침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 가르침은 지금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실천해야 하는 가르침입니다.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특히 더 실천해야 하고...)
‘모든 이의 꼴찌가 되어야 한다.’ 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 앞에서 자기를 낮추라는
가르침이고, 그리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입니다.
‘낮춤’과 ‘섬김’은 항상 동시에 실천해야 하는 일입니다.
만일에 ‘낮춤’을 실천하지 않으면서 ‘섬김’만 실천한다면,
그것은 ‘거짓 섬김’이고, ‘위선’입니다.
(자기는 상대방보다 높은 자리에 앉아 있고, 상대방은 자기보다 낮은 자리에
앉혀 놓은 채로 그 상대방을 섬긴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또 ‘섬김’을 실천하지 않으면서 ‘낮춤’만 실천한다면, 그것은 ‘비굴함’입니다.
< 여기서 ‘모든 사람’은 글자 그대로 ‘모든 사람’입니다.
나의 가족, 친구, 동료, 나보다 어린 사람, 나보다 못난 사람, 나의 후배,
제자, 부하, 아랫사람... 등을 전부 다 포함하는 ‘모든 사람’입니다.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 선배, 윗사람 앞에서 나를 낮추고 그들을 섬기는 일은,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각자 알아서 실천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신앙인으로서 실천하는 ‘낮춤’도 아니고 ‘섬김’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나보다 아래쪽에 있는 사람’을 섬기라는 가르침인데,
실제로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일종의 ‘시청각 교육’을 하시는데,
이것은 당신의 가르침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반드시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의식중에 “찬 물도 위아래가 있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고,
또 그 사람이 ‘나보다’ 어리고 경험도 부족한 사람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를 섬기기는커녕 무시하는 것과 같은 태도로 그 사람을 가르치려고만
할 때도 많은데, 그런 사고방식과 그런 태도를 버려야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어린이’는 ‘나보다’ 작고, 약하고, 힘없고, 보잘것없는 사람을 상징합니다.
(‘사회적으로 약한 위치에 있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그보다는 ‘나보다 약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 더 강합니다.)
‘하나를’이라는 말에는, ‘하나도 빼놓지 말고’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낮춤과 섬김을 실천하면서 차별 대우를 하면 안 됩니다.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으로서 ‘섬김’을 실천하면”이라는 뜻입니다.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다.”,
즉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섬기는 것은 곧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낮춤’과 ‘섬김’을 실천하라는 당신의 말씀은 권고가 아니라
명령이라는 것을, 즉 ‘계명’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낮춤’과 ‘섬김’은 당연히 실천해야 할 신앙인의 본분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낮춤과 섬김을 실천하지 않는 것은 주님이신 예수님을 배척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것이다.” 라는 말씀이 되기도 합니다.
주님이신 예수님을 배척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는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다.”인데,
이 말씀은, ‘낮춤’과 ‘섬김’은 하느님의 명령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바로 앞에 있는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라는 말씀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될 뿐만 아니라”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낮춤’과 ‘섬김’을 실천할 때,
속마음과 다르게 겉으로만 실천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마음속으로는 자기를 낮추는 것을 싫어하고, 남을 섬기는 것도 싫어하면서도,
겸손한 사람이라는 칭찬과 존경을 받고 싶어서
겉으로만 겸손한 척 하는 것은 분명히 ‘위선’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존경을 받는 일 자체는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칭찬과 존경을 받고 싶은 욕심 때문에 속마음을 감추고
겉으로만 행동하는 위선은 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의 ‘거짓 겸손’과 ‘위선’을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속을 알고 계시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의 속마음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결국 각자 스스로 자기 자신을 반성해야 할 일입니다.)
‘낮춤’과 ‘섬김’을 실천해야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예수님 말씀에 대해서, “그게 왜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
또는 “‘낮춤’과 ‘섬김’을 실천하지 않는 것이 왜 그렇게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갈 정도로 큰 죄가 되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낮춤’과 ‘섬김’을 실천하기를 거부하고 남들보다 더 높아지려고
욕심을 부리는 것은, 사람들 앞에서 군림하기를 바라는 것이고,
사람들을 억압하는 지위를 누리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군림과 억압은 사랑을 거스르는(사랑의 반대쪽에 있는) 큰 죄입니다.
사랑을 거스르는 일은 어떤 경우에도 죄가 됩니다.
(“사람들을 억압하지는 않지만, 섬기는 것도 싫고, 그냥 사람들과 적당히
거리를 두고 살면 안 되나?” 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사실 ‘낮춤’과 ‘섬김’ 실천은, ‘사랑 실천’의 다른 표현입니다.
그리고 ‘사랑 실천’은 신앙인의 기본 의무입니다.
이웃 사랑 없는 개인주의와 무관심은 신앙인에게는 죄가 됩니다.)

봉사하는 지위
-조욱현신부-
복음: 마르 9,30-37: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시리라는 말씀을 하신다(31절).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예고를 두 번째 들었으나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스승님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그분의 죽음으로부터 크나큰 은총이 오리라는 것도 알지를 못했다. 그들은 부활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다. 그러니 슬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수난을 앞둔 스승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알지도 못하고 길에서 그들 가운데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인가 하고 서로 다투었다(34절). 우리는 허영심을 버려야 한다. 오히려 단순함과 정직함으로 공동체를 이끌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자신과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사람보다 더 낮은 존재로 봉사해야 함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참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것이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삶이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삶이었고 당신의 죽음이 인류의 죄를 대신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신 분으로 아직도 당신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제자들에게 참된 봉사의 자세를 가르치신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35절) 예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름을 받아 신앙인이 된 이유를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가? 우리는 많은 사람 가운데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이란 바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기 위해 초대된 사람들이다. 이 길이 바로 십자가의 길이며, 이 길을 위해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바로 그리스도를 닮아야 하는 사람들이며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들이어야 하는데, 제자들처럼 부르심의 의미를 망각하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모든 사람을 섬기기 위한 봉사직무에 초대받은 사람들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교회에서도 지위가 올라갈수록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봉사자와 지도자들은 이 사랑의 봉사를 통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여야 한다는 것을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지금 내가 하는 일들 모두가 바로 더욱 많은 사람을 위하여 섬기고 봉사하도록 초대하는 부르심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가 많은 사람 가운데 선택된 것은 많은 사람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십자가의 길에로의 초대이며 부활의 영광에로의 초대이다.
우리가 갖는 지위는 우위 다툼이나 다른 사람을 지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봉사하기 위한 것이며 이웃을 받아들이기 위한 것이다. 이런 봉사의 삶을 통하여 우리는 많은 사람 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사랑해 드릴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이의 꼴찌가
되어야 한다.(마르 9, 35)
-한상우신부-
종교의 역할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다시금
아프게
고민하게 하는
요즈음입니다.
건강한 종교는
언제나
투명성과 진정성에
있습니다.
길을 잃어버린
우리들에게
모든 이들의
종이 되시는
예수님을 통해
길을 찾습니다.
복음을 통해
모든 이의
종이 되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꼴찌가 되심으로
어떻게 우리가
사랑해야 할지를
보여주십니다.
꼴찌의
감사하는 삶이
우리의 관계를
다시 보게합니다.
모든 이의 종처럼
섬기는 관계가
우리를 다시
살립니다.
섬기는 삶은
이웃의 아픔에
눈감지 않습니다.
복음의 기쁨은
섬기는 기쁨입니다.
생명을 섬기는
삶이 우리 모두를
살리는 예수님의
삶이 종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섬기는 삶이
주님을 따르는
가장 구체적인
삶임을 다시
마음에 새깁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 안에서는 인간의 욕망과 하느님의 바람이 상충되고 있습니다.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마르 9,33)
예수님의 수난 예고가 두 번째로 이어지는데 제자들은 여전히 자리 싸움입니다. 스승의 안위에 무관심해서가 아니라,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기"(마르 9,32) 때문입니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마르 9,34)
제자들이 예수님의 사명에 무지한데다 진실을 직면하기 두려워하다 보니 그들의 관심사는 지극히 세속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다가오는 주님 영광의 날을 위해 자기들 안에 어서 순위를 정하고 싶어합니다. 권력과 명예가 보장된 자리를 탐하면서요.
제1독서에서는 마치 그들 면전에 대고 묻듯이 공동체 내부의 싸움과 다툼의 원인이 무엇인지 질문을 던집니다.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야고 4,1)
하지만 욕정을 채우기 위해 탐욕을 부리는 것은 세상의 친구가 되려 하느님의 적이 되는 꼴입니다. 그리고 그런 청은 결코 답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야고 4,10).
세상과 우애 쌓기를 포기하고 하느님과 더 가까워지는 길을 택하고 싶다면 답은 하나입니다. 낮추고 작아지고 비우고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이 길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실제로 보여주십니다.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 그를 껴안으시며"(마르 9,36)
더 커지려는 욕망으로 이글대는 장정들 가운데 서 있는 작은 아이를 떠올려 봅니다. 얼마나 작고 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인지요. 그런데 영문도 모르고 그 자리에 세워진 그를 예수님께서 껴안으십니다. 아주 조심스럽게, 아주 소중하고 귀하게, 아주 사랑스럽게...
'더 높아지고 더 커지고 더 몸을 불려 위대해져야 하느님께서도 나를 알아주시겠지' 하고 생각한다면 착각 속에 바벨탑을 쌓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가 작아져야 주님께서 우리를 안으실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
이것이 하느님 나라의 통치 원리입니다. 이 세상 질서 안에서 가난해지고 꼴찌 되고 종이 되는 건 사실 그닥 유쾌한 일은 못 됩니다. 무시당하고 제외되어 끝을 모른 채 밀려나다 보면 존재감마저 희미해집니다. 분노와 울분, 체념과 자포자기 외에 다른 선택지가 별로 없게 되지요. 그러니 누구도 본능적으로는 이 길을 좋아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길을 가게 만드는 힘은 우리에 앞서 이 길을 걸으신 주님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의 창조를 통해 당신을 비우시고, 사랑 때문에 자신을 낮추어 세상에 오신 분이시니까요. 어쩌면 그분은 스스로 자청해 꼴찌의 자리를 꿰어차고 종의 자리까지 탈환한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주님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지 않으리라"(복음 환호송).
엘리트 바리사이 유다인으로서 인간적으로 자랑할 게 참 많았던 바오로 사도의 고백입니다. 말만 아니라 그는 실제로 그렇게 예수님 뒤를 따랐지요. 그러니 십자가는 세상 끝자락, 꼴찌 자리의 쓴맛을 달콤하게 만들고 종의 비참함을 영광의 희열로 바꾸는 신비한 묘약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길에 마냥 내려가는 방향만 있을까요? 아닙니다. 하강의 절정 뒤에는 반드시 극적인 반전의 상승이 뒤따릅니다.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마르 9,31).
우리는 수난 예고의 무게에 짓눌려 부활의 희망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이는 "그분께서 높여 주실 것입니다"(야고 4,10). 그러니 주님과 함께 내려가고 주님과 함께 죽고, 그래서 주님과 함께 부활합시다. 사순절이 지척입니다.

배고픈 사람만이 갈망을 한다.
-김찬선신부-
“하느님, 내 하느님
내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 하나이다.
물기 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
이 몸은 당신이 그립나이다.”
“암 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내 영혼 당신을 그리워하나이다.”
위의 시편은 하느님을 목말라함,
하느님을 그리워함을 노래합니다.
어떻게 하면 저도 하느님을 목말라하고
그리워하게 될 수 있을지 생각해봅니다.
시편은 얘기합니다.
사슴처럼 목이 말라야하고
메마른 땅처럼 아무런 물기가 없어야 한다고.
제가 미국에 처음 갈 때 많은 사람들이 저를 걱정해주었습니다.
토종 한국 사람이 어떻게 양식으로 살 수 있는지 걱정이 된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어떻게 양식을 먹고 살지 걱정이 되어
걱정도 같이 해 주고 충고도 해 주었는데,
그 중 하나가 늘 배고프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처럼
배고프면 모든 것이 맛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미국이 아니어도 그것은 제가 평소 즐기는 방법이기에
미국 사는 동안 내내 저는 아침 굶고, 점심 간단히 때우고,
저녁 한 끼 제대로 맛있게 먹는 식으로 2년 반을 살았습니다.
그 때문에 건강이 좀 상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해서 저와 같은 토종이 외국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오늘 야고보서는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절개 없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이 사실은 간음한 여자들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정배이어야 할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들과 놀아났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살게 하신 영을 열렬히 갈망하시는데
우리는 욕정을 채우는 삶이나 살고 있다고 먼저 비판을 하고
나중에 가서는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이여,
마음을 정결하게 하십시오.”하고 권고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빚으시고 우리 안에 넣어주신 우리 영을 열렬히 갈망하시는데
우리의 영은
욕정에 눌려 아무런 갈망도 일으키지 않음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실상 욕정을 채우면 아무런 갈망이 일지 않습니다.
배를 채우면 정신이 혼미해지고 그저 배 깔고 쉬고 싶듯
세상 것들로 나를 대신 채우고 그래서 대리만족을 하면
우리의 영은 배부른 돼지들처럼 아무런 갈망이 일지 않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를 만족시키는 것들이 사라지고,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것들이 사라질 때,
우리는 그것을 하느님을 갈망케 하는
더 할 수 없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단식하고,
기도와 신심의 정신을 일깨워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여 펑퍼짐하게 퍼져있는 영을
하느님께서는 안타까워하시고
모든 만족과 위안을 끊으심으로 칼날처럼 벼리시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우리도 욕정을 채우려는 안이한 정신을 끊고,
세상 것들을 단식하고,
기도와 신심의 정신을 일깨움으로써
이 기도와 신심의 정신으로 우리의 영을
칼날처럼 벼리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고 말씀하셨다.(마르 9,3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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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입니다”(마르9,34). 이 물음은 창세기3장9절의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하는 물음이나 카인에게 “네 동생 아벨은 어디 있느냐?” 하는 물음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몰라서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네 속을 보아라’ 하시는 말씀입니다. 네 마음의 중심이 어디 있는가를 살피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2,6-7).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 이십니다. 자신을 낮추어 상대방에게 맞추는 겸손, 이것이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입니다. 사랑은 가장 좋은 것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눈높이 사랑이 필요합니다. 미숙하고 모자란 상대를 받아들이는 섬김이 필요한 때 입니다. 내 마음 안에 하느님이 커지셔야 합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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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말씀에서 “첫째가 되려면”이라는 말은, “가장 높은 사람이 되려면”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인정을 받으려면”, 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이라는 뜻입니다(마태 18,3; 마르 10,15).
따라서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는 것”은,
“가장 높은 사람이 되는 방법”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입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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