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2월 21일 연중 제6주간 금요일

Margaret K 2020. 2. 20. 19:48

2020년 2월 21일 연중 제6주간 금요일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릴 것이다.”
(마르 8,34─9,1)


“Whoever wishes to come after me must deny himself,
take up his cross, and follow me.
For whoever wishes to save his life will lose it,
but whoever loses his life for my sake
and that of the Gospel will save i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믿음은 실천으로 완전해진다(제1독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라야 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한 나그네가 눈보라를 헤치며 산을 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산길에 쓰러져 동사 직전에 있는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나그네는 쓰러진 사람을 도와주기에는 자신의 처지조차 감당할 수 없다 여기고서는 그냥 지나쳤습니다.
잠시 뒤 다른 나그네가 그 길을 걷다가 쓰러진 그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나그네는 ‘내가 이 사람을 구하지 않으면 죽겠구나.’ 하는 생각에 그를 업었습니다.
매서운 추위에도 나그네는 그를 업고 땀을 뻘뻘 흘리며 힘겹게 산을 넘어갔습니다.그런데 가던 중에 그는 길가에 한 사람이 얼어 죽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자기보다 앞서간 그 나그네였습니다.
자기 처지만 생각하며 먼저 간 나그네는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죽었지만,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리려고 그를 업고 간 사람은 죽지 않은 것입니다.
그는 쓰러진 사람을 업고 걸었기에 추운 날씨 속에서도 땀을 흘렸고, 이 때문에 두 사람이 체온을 주고받아 둘 다 살아남았습니다.‘혼자서는 따뜻할 수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자기도 따뜻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 의미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흔히 십자가라는 단어가 나오면 ‘고통’이라는 말을 먼저 떠올립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는 단순히 ‘고통’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기 잘못으로 말미암은 고통, 자신을 위하여 겪게 되는 고통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사랑을 나누고, 그 안에서 겪게 되는 고통이 십자가입니다.
그러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때, 다른 이도 살리고 우리 자신도 살 수 있습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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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맛집을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크지 않은 가게인데도 줄이 길게 늘어서 있습니다. 음식 하나 먹겠다고 줄까지 서야 하나 싶었지만, 함께 간 사람이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기다려서 먹고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이 가게는 소위 목이 좋은 곳이 아니었습니다. 또 가게의 실내장식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정신없어 보이는 옛날 중국집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립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맛’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먹을 수 있는 ‘맛’은 장소의 불편함, 실내장식의 촌스러움을 모두 극복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맛’ 하나만으로도 사람들이 몰리는 맛집을 기억하면서, 주님의 품 안으로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모일 수 있도록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봅니다. 그리스도인의 고유한 ‘맛’을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원칙만으로는 주님의 ‘맛’을 세상에 낼 수가 없을 것입니다. 빛과 소금이 되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세상 안에서 고유한 ‘맛’을 내는 특별한 삶을 살아야만 가능합니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의 삶을 포기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의 십자가보다 더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맛’을 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사랑을 받는 사람은 행복을 느낍니다. 그래서 사랑을 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그와 함께하려는 것이지요. 그 사랑의 ‘맛’이 너무나도 특별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을 받는 것에 익숙한 모습이 아니라, 사랑을 주는 것에 익숙한 모습을 갖추는 것이 바로 사랑의 ‘맛’을 간직하고 세상에 펼치는 이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뜻을 따라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사랑을 아무런 사심 없이 실천하는 사람, 이웃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 칭찬, 인정, 지지를 잘해주는 사람. 이러한 사람의 ‘맛’은 특별하고 훌륭하므로 사람들이 모여들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밑으로 모여서 모두가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무너져 버릴 것 같은 순간마다 주위 사람이나 사물로부터 용기를 얻으면 된다. 모두 그렇게 힘을 내고 살아간다(오쿠다 히데오).



사랑은 가장 좋은 치료제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갑자기 발바닥에 큰 통증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깜짝 놀라서 발을 떼니 글쎄 바닥에 버려진 못을 밟은 것입니다. 신발에 못이 박혀 있습니다. 이때 이 사람은 제일 먼저 무엇을 해야 할까요?

당연히 신발에 박힌 못을 뽑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 못을 뽑지 않고, ‘누가 여기에 못을 놓은 거야?’ 하면서 범인 찾는 데에만 신경을 쓴다면 발바닥의 고통을 계속해서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이들로부터 상처를 받았을 때의 내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자신의 상처를 바라보고 치유하려는 것을 먼저 하지 않고, 복수하려는 마음, 미움의 마음만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계속해서 아프고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상대방을 미움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자기 상처의 치유를 위해서 필요하므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 상처를 고치기 위해서는 사랑의 방법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나 자신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치료제입니다. 이 치료제를 버리고 칼을 드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 가장 행복할 때는 자신을 죽일 무언가를 만났을 때다

-전삼용신부-


인도의 썬다 싱(1889-1929)은 부유한 시크교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외적으로는 부족한 것이 전혀 없었으나, 항상 내적인 진리에 대한 목마름을 느꼈습니다. 결국엔 참 진리를 찾지 못하면 죽고 말겠다는 결심까지 하게 됩니다. 그는 3일 동안 단식하며 골방에서 결사적으로 부르짖었습니다.

“신이여! 만일 당신께서 살아 계신다면 저를 만나 주소서.”

      그때 라호라로 가는 밤 열차가 기적을 울리며 지나갔습니다. 다음 열차는 다음날 아침 5시 급행 열차였습니다.

“신이여! 만일 다음날 아침 5시 급행열차가 지나가기 전까지 나타나 주시지 않으시면 달리는 열차에 몸을 던져 죽겠습니다.”

      썬다 싱은 목욕을 하고는 다시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새벽 4시 30분이 되었습니다. 그 때 방문 쪽에서 환한 빛이 비치며 흰 옷 입은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의 머리에는 가시관이 씌워져 있고 양손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썬다야! 너는 왜 나를 박해하느냐? 나는 네가 찾는 길이니라.”

“신이여! 누구십니까?”

“나는 너와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목숨을 바친 예수 그리스도니라.”

      썬다 싱은 그 순간 예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 이후부터 썬다 싱을 기다리는 것은 보통 사람이라면 견디어내기 어려운 박해와 고난이었습니다. 집안의 모든 위협과 회유를 물리쳐 더 이상 집안에 발을 들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인도는 물론이고 아프가니스탄을 넘어 중국,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지역, 영국, 스위스, 스웨덴, 독일 등의 유럽과 미국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돌에 맞고, 감옥이나 우물에 갇혀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깁니다. 맨발로 히말라야 산맥을 넘고 에베레스트를 넘어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극심한 박해와 고난 속에서 그는 한 번도 절망해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몸이 아파 말을 할 수 없을 때는 글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히말라야의 산길에서 피를 토하며 의식을 잃고 쓰러져있는 걸 목격한 사람들이 있지만 그 이후로는 어떠한 소식도 없고 어떻게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합니다. 그는 동방의 프란체스코라 불리고 20세기의 바오로라 불립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자기 부정적인 종교성을 지켜나갈 것이다. 그리고 이 자기부정 위에다가 성 프란체스코의 탁발전도를 나의 이상으로 삼고 살리라. 죽을 때까지 인도적인 터번에 홍포를 입고 복음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리라.”

      썬다 싱이 진리를 만나지 못하고 편한 부유층 아들로 살아갈 때가 행복했을까요, 아니면 온 삶이 고통뿐인 복음을 전할 때의 삶이 더 행복했을까요? 우리 각자는 무엇이 더 행복한지 느끼는 대로 살아가고 있을 것이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 안에 ‘그리스도와 복음’이 들어왔는데도 목숨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요? 저절로 잃게 됩니다. ‘그리스도와 복음’, 즉 ‘진리’는 우리 안에서 우리 목숨을 먹으며 자랍니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그래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진리 자체가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의 안락함을 유지하려는 마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이고 싶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배가 고픈 것은 싫지만 단식은 하고 싶다는 말과 같습니다. 진리를 품고 목숨을 잃으며 사는 것이 행복하게 보인다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자신을 죽이던 그 진리가 곧 영원한 생명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국내 최고 재벌 자리에 올랐던 정주영 회장은 성공비결에 대해 “모든 일을 할 때 목숨을 걸고 했다.”고 말했습니다. 또 80년대 일본 바둑계에서 ‘대삼관’을 차지한 조치훈 기사 역시 늘 바둑의 한수 한수를 목숨을 걸고 두었다고 말합니다.

      우리 안에 목숨을 걸 진리가 있다는 것, 그 복음이 육체적으로는 조금 나를 힘들게 할지라도 삶의 의미를 깨우쳐줄 것이고 결국 오늘 복음말씀처럼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매일 산보하면서 강의를 듣곤 합니다. 며칠 전에는 두 개의 별, 두 개의 지도란 주제로 강의를 들었습니다.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실학자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의 이야기입니다. 연암은 유력한 가문에서 태어나 과거를 보면 벼슬에 오를 수 있었지만 과거를 보지 않고 야인으로 살았습니다. 다산은 가문이 유력하지는 않았지만 계속 과거를 보았고, 정조의 총애를 받아 관직에 있었습니다.

 

야인으로 살던 연암은 북학파에 가담해서 청나라의 학문을 배웠고, 당시로는 새로운 문물과 학문을 소개한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저술했습니다. 열하일기는 직접 눈으로 보고, 몸으로 체험한 것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명분과 허세에 치우치지 않고, 낡은 관습과 잘못된 관행을 과감하게 고칠 것을 이야기합니다. 열하일기는 21세기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함께하고픈 지도와 별이 되고 있습니다.

 

다산은 정조 사후에 18년간 유배지에서 지내면서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의 대표작은 18년 유배생활을 마칠 무렵에 저술한 목민심서(牧民心書)’입니다. 유배지에 있었던 다산은 눈으로 보고, 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기회는 없었지만 냉철한 이성과 따듯한 마음으로 관리가 가져야 할 자질과 지켜야 할 덕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목민심서는 지금의 공직자에게도 따라야 할 지도와 별이 되고 있습니다. 연암(燕巖)제비바위처럼 자유롭고 매끄럽게 생을 흘러 다녔고, 다산(茶山)은 움직이지 않는 차의 산처럼 우직하게 살다 갔습니다.

 

요즘 우리는 야고보 사도의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 사도와 함께 하실 때가 있었습니다. 죽었던 소녀를 다시 일어나게 하실 때 같이 하셨습니다. 타볼 산에서 거룩하게 변모하실 때 같이 하셨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실 때 같이 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신앙인에게 세 개의 별, 세 개의 지도가 되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천국의 열쇠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라는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요한 사도에게 성모님을 부탁하였습니다. 성모님에게는 요한 사도를 부탁하였습니다. 성모님은 교회의 어머니가 되셨고, 교회는 성모님을 어머니로 공경하고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사도들 중에 가장 먼저 순교하였습니다. 동생 요한과 함께 예수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앉으면 자기는 오른쪽에 동생은 왼쪽에 앉게 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행동하는 사도였고, 실천하는 사도였습니다. 야고보 사도의 무덤은 스페인에 모셔져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야고보 사도의 무덤을 향해 순례(Santiago de Compostela)를 떠나고 있습니다. 순례의 여정을 통해서 야고보 사도가 보여주는 별을 찾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가 걸어간 길을 따라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야고보 사도는 신앙인이 가야 할 길을 분명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믿음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의롭게 됩니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 더 더하고 더 뺄 것도 없는 말입니다. 야고보 사도에게 신앙의 별과 지도가 되어주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잘되리라, 후하게 꾸어 주고, 자기 일을 바르게 처리하는 이! 그는 언제나 흔들리지 않으리니, 영원히 의인으로 기억되리라


그대가 그리스도를 따르기를 원한다면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을 거부하지 마십시오!

-양승국신부-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추종하는 데 필요한 두 가지 조건을 제시하시는데, 첫번째는 자신을 버리는 일입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자기 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 타인 중심적인 삶, 궁극적으로는 하느님 중심적인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을 버리는 이에게는 그리스도 이외에 더 이상 가치있는 대상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는 이제 그리스도로 인해 자신의 쾌락, 취미, 인간적 사랑까지 희생해야 마땅합니다. 이제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자신의 몸과 마음 모두를 바쳐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그리스도를 위해 행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것 뿐입니다.

 

 첫번째 조건에 대해서 바오로 사도는 명확하게 이해한 듯 합니다. 그의 고백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살려고, 율법과 관련해서는 이미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티아 2장 20절)

 

 두번째는 제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기 앞으로 다가오는 모든 짐을 거부하지 않고 기꺼이 수용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로마군대가 팔레스타인을 점령한 후 점령군들은 토착민들을 집단적으로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십자가를 지고 사형장으로 걸어가는 사형수들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상징이 아니라 가혹하고 냉정한 현실이었습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씀은 예수님과 함께 그분의 정신, 그분의 운명에 참여하는 것을 넘어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세상 가장 두렵고 불명예스러운 십자가 죽음의 길에 이르러야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예수님께서 몸소 걸어가셔야만 하는 길인 동시에 명백한 죽음이 예고된 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길에서 ‘누구든지’라는 표현을 사용하심으로써 당신을 추종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외없이 지녀야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임을 밝히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초대 교회 제자들은 스승님의 유언과도 같은 말씀,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씀을 있는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순교자들은 두려움이 하늘을 찔렀지만, 다른 한편으로 찬미의 영가를 부르면서 기쁘게 십자가 위로 올라갔습니다.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상상을 초월하는 위로 부터의 상급이 주어질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그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닐 것입니다.

 

 십자가를 기꺼이 질때, 세상 모든 사람들이 떠나간다 할지라도 주님만은 늘 그의 산성 그의 방패가 되어주실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 문턱으로 들어서는 순간까지 안전하게 그를 동반해주실 것입니다.

 

 “그대가 그리스도를 따르기를 원한다면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을 거부하지 마십시오. 악한 자들을 참아내되, 그들에게 굴복하지 마십시오.”(아를의 카이사리우스 교부)

 

 “십자가를 지지 않고서는 결코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그대가 그분에게 속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분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는 사람은 자기 육신을 욕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아우구스티누스 서간집)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요?

-반영억신부-    

 

우리는 살아가면서 흔하게 십자가를 봅니다. 성당이나 교회의 수많은 십자가를 볼 수 있고,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다니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의미를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혹 십자가를 생각한다 하더라도 사랑보다는 고통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렇지만 우리 믿는 이들은 십자가에 담긴 사랑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멸망할 자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1코린 1,18).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사실 바오로는 십자가에 담긴 구원의 능력을 알았기에 자발적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고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었습니다. 바오로는 말합니다. 나에게 이로웠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3,7-9).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갈라2,20).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갈라6,14). 이제부터 인생의 주인은 가 아니라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8,34).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십자가는 선물이요, 은총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억지로 질질 끌고 갈 것이 아니라 차라리 짊어지는 것이 가볍습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자기 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버린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담을 그릇을 준비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빈자리가 없으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받아들일 수 없는 법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받아들이려면 먼저 빈자리를 마련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성직자 수도자들은 결혼을 하지 않습니다. 온전한 봉헌을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존경도 받습니다. 그들은 부모, 형제 친척은 물론 부와 명예를 버리고 주님을 따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외적인 것 못지않게 자기 자신을 얼마나 버리고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혼자 산다는 핑계로 자기중심적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예수님중심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철저히 자기울타리를 만드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하겠습니다. 섬김보다는 대접을 받고 사는 것이 현실입니다.

 

익숙해져 있는 나의 낡은 삶의 양식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믿음이 약한 탓입니다. 나를 비우지 않고는 결코 주님께서 거처하실 곳이 없다는 것을 안다면 십자가를 기꺼이 져야 합니다. 때로는 하고 싶어도 하지 말아야 하고, 때로는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내 안에 건설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이영근신부-


<마르코복음>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면, 어제 복음까지는 주로 예수님의 정체성을,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부터는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주로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길, 곧 제자 되는 길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이 말씀은 먼저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는 지를 확인하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진정으로 그분을 따르기를 원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는 깨달음을 바탕으로 합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그것이 참된 것이고, 자신이 원해야 할 것을 원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은 진정으로 원하고 있는지를 깨닫는 일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제시되고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먼저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진정으로 예수님 따르기를 원하고 있는가?”


오늘 <복음>은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표시 두 가지를 말해줍니다. 곧 예수님을 따르려고 하는 이들에게서 드러나는 두 가지의 표시입니다. 그것은 자신을 버리는 일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 입니다. 우선 예수님을 따르려는 이는 집과 가족 곧 소유와 사람들로부터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떠나는 일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지금 자신으로부터 이미 떠났는지, 적어도 지금 자신을 버리고 있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버린다는 것,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단순히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릇을 비웠느냐? 보다, 무엇을 채웠느냐? 에 달려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릇의 정체성을 의미합니다. 곧 보석을 채우고 있으면 보석그릇이 되는 것이요, 쓰레기를 채우고 있으면 쓰레기통이 되듯이, 자신을 버리고 빛이신 그리스도를 채우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기에,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받아들여 예수님의 그릇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나는 진정 예수님을 받아들여 따르고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비워질 것입니다. 사실, 자신을 비우는 일은 결코 스스로가 비우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여진 분에 의해 비워지기 때문입니다. 곧 받아들여 진 분이 중심을 세우기 때문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우리의 중심이 되시어, 우리를 짊어지시는 일이 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곧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신의 십자가로 지는 일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과 함께 짊어질 때, 비로소 구원의 십자가가 됩니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마르 8,34)


주님!

제 자신을 따르지 않고,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제 자신을 붙잡고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붙잡고 가게 하소서!

가고 싶은 데로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제시한 길을 가게 하소서!

무엇을 하든, 그것을 통해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아멘.


신앙생활 

-송영진신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마르 8,34-38).”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관한 가르침인데, 과정에 초점을 맞추면,
“내 뒤를 따르려면 각자 자기 몫의 십자가를 감수해야 하고,
고난과 시련을 만나더라도 인내해야 한다.” 라는 가르침이 되고,
결과에 초점을 맞추면, “내 뒤를 따르는 과정에서 십자가를 만나더라도
끝까지 잘 따르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라는 가르침이 됩니다.
(과정의 어려움만 생각하고,
나중에 얻게 될 영광스러운 결과를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지금은 힘들어도 나중에 영광스러운 결과를 얻게 된다는 것을 믿고,
또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면서 과정의 어려움을 잘 참고 견디는 것,
그것이 ‘신앙인의 지혜’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마지막 때에 나타날 준비가 되어 있는 구원을 얻도록,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힘으로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즐거워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1베드 1,5-7).”
이 말은, 중간 과정의 어려움만 생각하지 말고,
나중에 얻게 될 결과를 생각하라는 권고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라는 말씀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만나게 되는
십자가들을 거부하거나 회피하지 말고 기꺼이 받아들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사람마다 십자가의 내용과 크기와 무게가 다르긴 하지만,
아무도 십자가 없이 영광으로 직행할 수는 없습니다.
“왜 꼭 그래야 하는가?” 라고 물을 수 있는데, “신앙을 더욱 순수하게
만들기 위한 단련이다.” 라는 베드로 사도의 말을 대답으로 제시할 수도 있고,
“우리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서 당신 자신을 바치신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뒤따라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라고 대답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어떻든 인간의 머리로는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고,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죽음, 부활을 표현하는 ‘파스카의 신비’ 라는 말을
신앙인의 신앙 여정에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겪는 십자가들도 ‘파스카의 신비’입니다.
중요한 점은 ‘파스카의 신비’는 십자가로 끝나는 신비가 아니라,
십자가를 지나가면 부활, 생명, 영광을 얻는 신비라는 점입니다.

(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되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시련과 고난을 만나게 되면, 누구라도 믿음이 흔들리게 되고, “왜 내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가? 나에게 무슨 죄가 있어서 그런가?” 라고 묻게 됩니다.
그래도 잘 인내하고 극복하는 사람도 있고,
믿음이 흔들리다가 결국 믿음을 잃어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믿음이 흔들리는 사람에게 이런 예를 이야기 해 줄 수 있습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싶지만, 훈련 과정이 너무 힘들다. 훈련을 생략하고
금메달을 따는 방법은 없는가?” -- “없다. 금메달을 따기를 바란다면,
남들보다 더 열심히 훈련해야 한다. 힘들어도 참아야 한다.”
“시험에 합격하고 싶은데 시험공부가 너무 힘들다. 공부하지 않고서
바로 합격할 수는 없는가?” -- “없다. 시험에 합격하고 싶다면,
자고 싶은 것도 참고, 놀고 싶은 것도 참고 열심히 공부해라.”
이런 예가 시련과 고난 자체를 설명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인내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말이 될 수는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현세의 허무한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는 훈계 말씀이기도 하고,
허무한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이들에게는
그 생명을 주겠다는 약속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람들 가운데에는 나중에 얻게 될
‘영원하고 참된 기쁨과 행복’은 생각하지 않고서,
지금 즐기고 있는 ‘재미’와 ‘즐거움’만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 ‘재미’와 ‘즐거움’을 ‘행복’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물론 그게 ‘선한 노동’의 결과로 얻는 보람, 자부심, 성취감이라면,
영원하지 않은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 대로 ‘선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고, 육적이고 악한 욕망을 채움으로써 얻게 되는
속된 쾌락이라면, 지금 아무리 기분이 좋아도,
그것은 행복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고, 죄만 커지는 일입니다.
그 쾌락의 순간이 지나가면 무엇이 남을까?
더 허무해지고, 더 비참해지지 않겠는가?)

예수님 말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이라는 말씀은,
“나를 믿지 않고, 나의 가르침을 배척하면”이라는 뜻입니다.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는, “그는 구원받지 못한다.”입니다.
신앙생활이 어렵고, 재미없고, 힘들게 보여서,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메시아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기 때문입니다(요한 14,6).
그런데 이 말씀은, 지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이들에게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신앙고백을 하고 세례를 받았더라도,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들 가운데 어렵고 힘든 일들은 안 하고,
쉽고 편한 일들만 골라서 하면,
그것도 역시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부끄럽게 여기는 일이 됩니다.
신앙생활은 내 마음대로, 내 입맛대로 하는 생활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올림픽 금메달을 따려고 훈련을 하면서 힘든 훈련은 피하고 편한 훈련만 한다면
그것은 금메달을 포기하는 것과 같고, ‘훈련하는 척’만 하는 것입니다.
또 시험공부를 하면서 어려운 부분은 건너뛰고 쉬운 부분만 골라서 공부하는 것은
합격을 포기하는 것이고, ‘공부하는 척’만 하는 것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르 8,34-9,1: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어제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길이 베드로 사도의 생각과 같이 현세적이고 기복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호된 꾸중을 들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셔서 많은 사람의 배척을 받고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은 그들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충격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내가 주님으로 모시고 내 입으로 부르는 주님이 진정 나에게는 누구이며, 내가 그분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은 중요하다. 무엇을 기대하며 그분을 대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생활태도가 바뀔 것이다. 베드로 사도나 당시의 유다인들이 바라는 것과 같이 나도 그러한 현세적인 것을 바라며 그분을 따른다면, 어느 사인가 그분과는 관계가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며 자연적으로 멀어지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많은 기적과 가르침을 베푸셨지만, 당신이 진정으로 가야하고, 또 그 제자들이 가야할 길은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것도 항상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34) 따라야 한다고 하신다. 자기를 버린다는 말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 뜻을 버린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악으로 갈 수 있는 자기 자아이다.

 

이 악한 자아를 버리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자신의 좋은 것까지 모두 버리라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제일 힘든 것이 그러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제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임을 알 수 있다. 이 십자가를 잘 지고 갈 수 있을 때 우리는 그분을 올바로 따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어려운 것은 나 자신이지 다른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 십자가의 길은 이제 우리로 하여금 더욱 당신을 닮게 해 줄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35)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38)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가장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닮는 길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입으셨듯이 우리도 이제는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내가 창조될 때 입은 하느님의 모상을, 즉 그리스도 아드님의 모습을 닮아야 하는 것이다.

 

이 십자가를 통하여 자기 자신이 죽었을 때 우리는 부활의 기쁨을 안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이 우리의 구원의 삶이 될 것이다. 아마 주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을 닮은 우리를 아버지 앞에 영광스럽게 여기실 것이다. 당신과 같은 사람이 되어있으니까 말이다. 이제 진정으로 우리 자신을 버릴 수 있고 그분의 뜻을 행하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 34)

-한상우신부-

십자가는
하느님을 향합니다.

십자가는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입니다.

십자가 없이
열매를 맺을 수는
없습니다.

제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이
사람의 참된
길입니다.

십자가와 생명
십자가와 삶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사랑의 본질은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는
사랑의 헌신에
있습니다.

자신을 버리지
않고서는 소금처럼
녹지 않고서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자아가 죽는
죽음의 길입니다.

복음이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밀알 하나의
삶입니다.

버리지 않고서는
살 수 없고
죽지 않고서는
부활 할 수
없습니다.

삶의 의미는
가장 강력한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릅시다.


-오상선신부-


어제 예수님의 수난 예고 내용에 이어 오늘 복음의 분위기는 자못 심각해집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예수님께서 선택을 요구하십니다. 자신과 십자가, 둘 중 하나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자아는 십자가를 거부하기 마련입니다. 더 편하고 강하고 즐거운 것을 좇기에 불편하고 약하고 고통스러운 것과는 거리를 두고 싶어합니다. 자아로 가득찬 이에게는 십자가의 자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아름다운 이상과 훌륭한 생각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구체적인 행동과 직접 뒤따르는 발걸음이 반드시 이어져야 합니다. 십자가는 생각으로 지는 것이 아니니까요.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마르 8,35).

급기야 목숨 이야기까지 나옵니다. 똑같이 "목숨"으로 표현했지만, 실은 육적인 생명과 영원한 생명이라는 극과 극의 의미를 각각 담고 있지요. 육의 목숨을 잃지만 영의 목숨을 얻는 길은 그 투신이 예수님의 이름과 복음 때문이어야 합니다. 자기 명예나 재물, 권력, 쾌락을 추구하다가 목숨을 잃는다 해도 달라질 건 없습니다. 그러한 것을 추구하는 자체가 이미 죽은 목숨을 산 셈이니까요.

제1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믿음"과 "실천"의 상관 관계를 설명합니다.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7).

믿음은 우리를 의롭게 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덕입니다. 사실 믿음의 정도를 가늠하기는 어렵습니다. 믿음이 감추어져 있어서 보이지 않으니까요. 믿음이 깊은 이는 제 자랑을 않으니 드러나지 않고, 믿음이 없는 이는 믿음이 귀한 줄도 모르니 무관심할 따름입니다.

믿음 또한 십자가처럼 생각으로만 간직하는 이상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실제적으로 드러나는 덕이지요. 그 상관 관계는 예수님을 따르는 원리와 같습니다. 머릿속에 예수님에 대한 생각이 가득하고 그분을 아무리 사랑한다고 한들, 자아를 비우는 고통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뒤따르는 결단이 없다면 그건 그냥 머리속 이야기일 뿐입니다.

창조주 하느님과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역시, 주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과 형제자매인 이웃에 대한 사랑과 연민으로 승화될 때 온전한 믿음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각자 자기 실존에 맞게 제 십자가를 어떻게든 지고 예수님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 어떻게 아느냐고요? 매일 이처럼 말씀을 뒤적이고 묵상글을 읽고 머물러 기도하는 자체가 그 증거입니다. 십자가의 무게가 말씀에 대한 갈망을 일으키고, 십자가의 어둠은 말씀의 빛을 향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고통은 그 희망과 해답을 구하고자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 뒤를 따르는 우리는 외롭지 않습니다. 저마다 십자가는 다르지만 말씀의 빛이 우리를 인도하고, 말씀의 감촉이 우리를 위로하며, 말씀의 힘이 넘어진 우리를 다시 일으키니까요. 십자가를 지고 가는 구체적 현실은 말씀과 함께여서 가능한 길입니다.

오늘도 변함없이 꿋꿋이 충실히 묵묵히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과 함께 걷는 우리 모두를 응원하고 축복합니다.

소용이 없는 믿음? 
-김찬선신부-


오늘 독서와 복음에는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말씀이 공통으로 나옵니다.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먼저 야고보서는 실천이 없는 믿음이 무슨 소용이 있냐고 하는데
이것이 사실 개신교와 천주교가 치열하게 다투는 쟁점입니다.

개신교가 야고보서보다는 바오로 서간, 특히 로마서의 말씀에 근거하여
믿음으로만 의롭다고 인정받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데 비해
우리 가톨릭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과 믿음에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그 믿음은
거짓 믿음이라는 오늘 야고보서의 가르침을 둘 다 받아들여
실천으로 완성되는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는다고 얘기하지요.

오늘 야고보서에는 이런 교리적인 요소가 들어있지만
저는 오늘 야고보서를 교리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실제 우리의 신앙생활의 차원에서 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과 연결시켜서 보고자 합니다.

믿는다면 실천이 반드시 따릅니다.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니거나 적어도 불완전합니다.
아주 쉬운 예로 누구를 믿으면 그를 따라가고 믿지 못하면 따라가지 않지요.

전에 아이를 납치하여 돈을 요구하는 사고가 많자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아무나 믿지 말고 꾀어도 따라가지 말라고 하지만 아이들은 어른들처럼
의심을 잘 하지 않기에 믿고 따라갑니다.

이처럼 주님을 진정 믿으면 주님을 따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따르지 않는 믿음을 어찌 믿는 거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믿고 따르지만, 실천은 따르지 않는 거라고 변명하겠습니까?

이런 말은 변명도 안 되는 괴변일뿐이고 그래서
주님을 믿는 우리는 주님의 말씀도 믿을 것이고,
주님의 말씀을 진정 믿는다면 말씀을 실천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믿고 또 주님의 말씀들, 곧
버리는 것이 얻는 것이라는 말을 믿는다면,
죽는 것이 사는 것이라는 말을 믿는다면,
그것도 주님을 믿기에 그 말도 믿는다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자신을 버릴 것이고,
자기 십자가를 질 것이며 그래서 행복해질 것이고 구원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을 믿지 않습니까?

믿지 않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믿기는 하는데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죽지 못합니다.
이것을 불완전한 믿음이라고 해야 하나요? 아니면 뭐라고 해야 하나요?

믿음이 부족하니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라고 한
사도들처럼 믿음을 더해 달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믿음이 없으니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마르 9,24)라고
한 복음의 남자처럼 아예 믿음을 주십사고 해야 할까요?

어쨌거나 실천되지 않는 믿음은 며칠 전에 한번 얘기했듯이 삼키지 않은
음식이나 약처럼 나에게 구원과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하니 나의 구원과
행복을 위해 실천하는 믿음을 주십사 하고 청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4년 2월 21일 연중 제6주간 금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릴 것이다.”(마르 8,3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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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추종하는 데 필요한 두 가지 조건을 제시하시는데, 첫번째는 자신을 버리는 일입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자기 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 타인 중심적인 삶, 궁극적으로는 하느님 중심적인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첫번째 조건에 대해서 바오로 사도는 명확하게 이해한 듯 합니다. 그의 고백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살려고, 율법과 관련해서는 이미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티아 2장 20절)

 십자가의 길은 예수님께서 몸소 걸어가셔야만 하는 길인 동시에 명백한 죽음이 예고된 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길에서 ‘누구든지’라는 표현을 사용하심으로써 당신을 추종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외없이 지녀야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임을 밝히고 계십니다.


 “그대가 그리스도를 따르기를 원한다면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을 거부하지 마십시오. 악한 자들을 참아내되, 그들에게 굴복하지 마십시오.”(아를의 카이사리우스 교부)

 

 “십자가를 지지 않고서는 결코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그대가 그분에게 속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분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는 사람은 자기 육신을 욕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아우구스티누스 서간집)

-양승국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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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복음>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면어제 복음까지는 주로 예수님의 정체성을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부터는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주로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길곧 제자 되는 길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이 말씀은 먼저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는 지를 확인하게 합니다그렇습니다무엇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진정으로 그분을 따르기를 원하는 일입니다그런데 이는 깨달음을 바탕으로 합니다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그것이 참된 것이고자신이 원해야 할 것을 원하고 있는지그리고 그것은 진정으로 원하고 있는지를 깨닫는 일입니다결국이 말씀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제시되고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기에우리는 먼저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진정으로 예수님 따르기를 원하고 있는가?”

중요한 것은 그릇을 비웠느냐보다무엇을 채웠느냐에 달려기 때문입니다그것은 그릇의 정체성을 의미합니다곧 보석을 채우고 있으면 보석그릇이 되는 것이요쓰레기를 채우고 있으면 쓰레기통이 되듯이자신을 버리고 빛이신 그리스도를 채우는 것을 뜻합니다그러기에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받아들여 예수님의 그릇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나는 진정 예수님을 받아들여 따르고 있는가?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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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버린다는 말은 다른 것이 아니라자신의 의지와 뜻을 버린다는 것이다이것은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악으로 갈 수 있는 자기 자아이다.

이 악한 자아를 버리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자신의 좋은 것까지 모두 버리라는 것은 아니다여기서 제일 힘든 것이 그러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제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임을 알 수 있다이 십자가를 잘 지고 갈 수 있을 때 우리는 그분을 올바로 따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우리에게 어려운 것은 나 자신이지 다른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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