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2월 16일 연중 제6주일

Margaret K 2020. 2. 15. 20:12

2020 2 16일 연중 제6주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태 5,17-37)

 

I tell you,
unless your righteousness surpasses
that of the scribes and Pharisees,
you will not enter the kingdom of heave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죄를 지으라고 허락하신 적이 없으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지혜는 하느님의 지혜를 뜻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없애시려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라는 제5계명에 대해서는 ‘형제에게 성을 내지 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라는 제6계명은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지 마라.’라는 말씀으로 바꾸십니다.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라는 제7계명은 ‘맹세하지 마라.’라는 말씀으로, 그리고 “자기 아내를 버리는 자는 그 여자에게 이혼장을 써 주어라.”라는 제9계명과 관련된 율법 조항은 ‘아내를 버리지 마라.’라는 말씀으로 바꾸십니다.
이처럼 십계명의 내용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바꾸심으로써 완성된 율법을 제시하십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율법과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완성된 율법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구체적으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한마디로 시나이산에서 하느님께서 명령하신 모든 계명 안에 사랑을 담으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로마 13,10 참조).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완성을 당신 삶으로 몸소 보여 주십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제5계명을 완성하시어 십자가 위에서 모든 사람을 용서하시고(루카 23,34 참조), 간음하지 말라는 제6계명을 완성하시어 여인들을 당신의 제자로 받아들이십니다(루카 8,1-3 참조).
또 하느님의 뜻에 언제나 “예.”로 응답하시고, 악의 권세에는 “아니오.”로 맞서심으로써 제7계명을 완성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당신의 배필이신 교회와의 끈을 결코 놓지 않으시고 마지막 날에 그 혼인의 완성을 이루실 것이라고 약속하심으로써 제9계명을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사랑을 가르치실 뿐만 아니라 삶으로 보여 주심으로써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을 알려 주십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키엣 대주교-

선택의 자유는 책임이 따를 때 진정한 자유가 될 수 있습니다. 자유와 책임이야말로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특성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복제품과 같은 기계가 아니라 좋고 나쁜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운 인간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오늘 독서에 ‘그분께서 네 앞에 물과 불을 놓으셨으니 손을 뻗어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라.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느 것이나 바라는 대로 받으리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를 주시되 그 목적에 맞게 사용하고 책임을 지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인간들은 자신의 뜻대로 자유를 남용하였기에 예수님께서 오늘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가장 우선적인 가치인 계명을 우리는 양심에 새기고 그 법에 의해 판단하고 선택하고 행동해야 하며 책임을 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첫째 계명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실천함에 있어 그 어떤 핑계도 관습도 사랑을 거슬릴 수 없고 용납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사랑만이 부부와 가정, 이웃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을 완성하고 더 높고 고귀한 가치의 법을 세우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구약에서는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신약은 바로 인류 공동체의 보호와 사랑을 위한 것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에 맞게 행동하고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 자신의 위치와 능력을 직시하고 겸손함을 갖는 것입니다.

겸손을 거스리는 것은 오만입니다. 오만한 사람들은 자신의 기준으로 남을 판단합니다. 우주의 중심이 나이므로 타인의 권리와 품위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만함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함을 느끼지만 겸손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게 느껴지는 겸양입니다.

겸손한 삶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그 모습 그대로이며 이 땅에 사사며 구현하신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겸손함으로 살아갈 때만이 겸손한 예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행동에 책임을 지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세상의 관념을 따르는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지혜를 따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주님에 대한 감사와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은 우리를 참된 행복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말할 때에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너무나 간단하지만 간단하지만은 않습니다. 불화와 스트레스가 넘쳐 나는 세상에서 우리는 ‘예’ 보다는 ‘아니오’를 먼저 합니다. 그리고 ‘아니다’와 '예’를 의도적으로 반대로 말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나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사랑했던 부부도 사랑이 식으면 서로에게 미움과 상처만을 주는 관계가 됩니다. 사람들은 공적인 관계의 사람들보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더 쉽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습니다. 가깝기에 그가 나를 이해해 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 주위에 다른 사람에게 상처받고 고통 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말과 행동으로 상처를 준 사람이 바로 나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끼리 서로 상처를 주면서도 같이 살수 밖에 없는 것이 부부이고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서로를 보듬어 주고 화해하는 사랑입니다.

우리 인생은 망망대해에 떠 있는 외로운 섬이 아닙니다. 우리 주위에는 나를 걱정해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나의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게 나는 사랑을 받을 수도 있고 사랑을 줄 수도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주고 받을 자유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행동에는 책임이 필요합니다. 주님께 받은 사랑을 형제와 이웃에게 나누어 책임입니다.

주님, 생명의 길로 이끄는 주님의 계명을 깨닫고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나는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2. 언제 자유에 대한 책임이 필요하다고 느낍니까?

3.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았습니까? 혹시 내가 그에게 상처를 준 것은 아닙니까?

4.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을 위해 기도해 보았습니까? 

더 나은 의로움

-임성만신부-


오늘 복음은 ‘하느님께서 금하신 것을 피하는 것, 명하신 것을 따르는 것, 원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 중 무엇이 가장 가치 있는 신앙생활인가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하느님께서 금하신 것을 피하는 것에 대해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전문가로 보인다. 우선 그들은 율법을 613개의 조항으로 분류해 날마다 암기했다. 일주일에 이틀씩이나 금식하며 기도했고, 십일조도 정확하게 바쳤다. 안식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철저히 지키는 열심을 보였다. 다른 이들과는 달리 율법을 철저히 지키며 사는 자신들은 언제나 하느님께 인정을 받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성전에 나가 기도드릴 때에도 자신들의 열심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종교적 공로 리스트’를 펼쳐내는 자신감을 보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런 모습을 반어적으로 책망하셨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당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모든 율법을 문자로 해석해 이해하기에 급급했다. ‘살인하지 마라’는 계명은 단지 살인하지 않으면 그 계명을 지킨 것으로 생각했다. 왜 살인을 해서는 안 되는지, 하느님께서 생명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모든 계명 안에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포함되어 있고, 그 자체가 복음적 메시지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모든 계명과 율법은 단지 문자적인 측면으로만 해석되거나 외형적인 실천의 모습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신다.

예수께서는 율법을 지키되 먼저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을 먼저 실행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마태 23,23) 이들이 겉으로 볼 때는 세밀하게 계명을 지킨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마태 23,5)”으로 하느님께서 원하는 진정한 율법의 정신에서 벗어난 위선적인 사람들이라는 말씀이다.

사실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면 의롭게 된다고 믿었다. 율법을 통해 의로움을 드러냈고 그것을 자랑했다. 이에 바오로 사도는 “나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벤야민 지파 출신이고, 히브리 사람에게서 태어난 히브리 사람이며,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입니다. 열성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고, 율법에 따른 의로움으로 말하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습니다.”(필리 3,5-6)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을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필리 3,7-8)라고 고백하며 자신이 가진 의로움은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어진 것이며, 그 믿음으로 하느님께로부터 난 의로움이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더 나은 의로움’이란 바리사이들이 결코 깨닫지 못했던 하느님의 구원 방식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만 얻을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의 열심만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기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외아들 예수를 세상에 보내신 구원론적 사실을 믿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늘 보여주었던 ‘열심’뿐만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를 믿고 그분이 드러내신 사랑을 우리가 행하고 그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예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이 없으면 율법도, 우리의 열심도 결코 빛을 발할 수 없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참 행복을 누리는 길

-김창선 선교사-


주님의 계명은 아름답습니다. 그것은 구름 덮인 시나이산 위에서 거룩하신 하느님과 당신 백성 사이에 맺은 사랑의 약속이고, 마음을 다해 실천하면 자유와 행복을 누리는 생명의 길(신명 5장)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를 통해 완전한 사람이 되어 하느님 나라에 사는 사랑의 길을 밝히십니다. 주님의 계명이 은총의 선물임을 깨닫고 마음에 간직하며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은 존엄한 인격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자기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다스릴 수 있도록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이 자유의지로 하느님을 따름으로써 완전한 행복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사목 헌장 41)

누구나 원하기만 하면 마음을 다해 주님의 법을 충실히 지키고 참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주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을 굽어보십니다. 사람들은 자신 앞에 놓여있는 물과 불, 생명과 죽음, 선과 악을 바라는 대로 선택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잘못을 주님과 남의 탓으로 돌리는 위선자들도 있습니다.(제1독서; 시편 119,1-2)

아담의 첫 범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죄의 보편성을 드러내 왔습니다. 인류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위한 하느님의 신비로운 계획은 누구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를 성경에 기록(이사 64,3)된 대로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마련해두신 그분의 지혜라고 합니다. 때가 되어 성자와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이 신비가 우리에게 드러났습니다. 이것을 일찍이 깨달았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희생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제2독서)

갈릴래아를 처음 방문하신 예수님의 활동을 마태오 복음은 가르침, 치유, 복음 선포로 요약(마태 4,23)합니다. 오늘의 가르침은 율법(계명)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시고, 제자들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의 의로움을 능가해야 하늘나라에 살 수 있다고 가르치십니다.(마태 5,17.20)

당시 율법과 성경을 가르치고 해석하는 율법 학자의 명성과 권위는 바빌론 유배 이후 더욱 높아졌습니다. 바리사이는 대부분 율법 학자로 법은 물론 정결례를 포함한 종교관습까지도 철저히 준수했기에 권위를 인정받았습니다.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윤리적 토대로 삼는 십계명이 골자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주제로 자주 등장하는 ‘의로움’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기중심이 아닌 명예로운 형제애입니다. 율법의 완성은 하늘나라를 완성할 때까지 계명에 충실하여 작은 규정(‘한 자 한 획’)도 엄밀히 지키는 사랑의 소명입니다.(마태 5,18-19; 가톨릭 교리 2196)

브뤼헬의 ‘산상 설교(1598년)’.

오늘 말씀은 화해, 극기, 이혼 금지, 정직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고 하시며 옛 법을 받아들이시면서도, 대조적으로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하시며 법을 지키는 제자들의 명예로운 행동기준을 제시하십니다.

성(화)을 내는 것은 보복과 살인의 계기가 되고, ‘바보!’ ‘멍청이!’라는 모욕은 화로 치닫게 됨을 우리는 삶에서 자주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금하라고 하십니다. 성전에 예물을 바치기에 앞서 원망을 품고 있는 형제와는 화해하고, 고소와 같은 불화 사건은 얼른 타협하라고 하십니다.

지중해 문화에서 간음은 죽음(신명 22,22-24)을 불러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것은 이미 간음이라 하십니다. 죄를 지어 온몸이 불타는 지옥으로 던져지기보다는 신체 일부를 잃는 희생이 낫다고 하십니다.

이혼은 가정을 파괴하는 일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이혼장이 주어지면 이혼이 성립(신명 24,1-5)했습니다. 예수님은 이혼을 금하십니다. “둘이 한 몸”(창세 2,24)이기에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입니다. 마태오 복음 사가는 불륜을 이혼의 유일한 사유로 듭니다. 우리 사회에서 주된 이혼 사유는 성격 차이라고 합니다. 성격은 사람마다 다른데도 말입니다,

맹세한다는 것은 죄에 약한 인간을 전제로 하는 일입니다. 곧 사람은 거짓말을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짓 맹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아예 맹세하지 마라.”고 가르치십니다. 하느님 앞에 떳떳한 진실을 밝히는데 맹세할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깨지기 쉬운 질그릇과 같은 존재임을 봅니다. 마음의 뿌리에서 나오는 살인, 간음, 이혼, 위선, 분노, 모독, 탐욕과 같은 악한 생각이 사랑의 마음을 해치고 사라지게 함을 깨닫습니다. 사랑은 자유의지로 결심하는 데서 꽃이 핍니다.

참 행복을 누리는 사랑의 계명을 선물로 주신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기에,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 사랑의 실천으로 보람을 느끼는 마음의 평화가 하느님 나라에 행복입니다. 


더 의롭게 살기

-유환민 신부-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행복하기를 바라시지요. 그런데 우리 인간은 하느님 을 떠나서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행복의 원천인 당신 곁에 머물도록 계명을 주셨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율법, 바로 계명에 대해 말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 다.”(마태 5,20)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는 일주일에 두 번씩 단식하고 하 루에도 몇 번씩 때를 지켜 기도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율법이 정한 613가지의 세세한 규정들을 하나도 어기지 않으려 애쓰며 성실히 지켰습니다. 어떻게 해야 그들보다 ‘더 의롭게’ 살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겉으로 드러나는 율법 준수뿐만 아니라 하느 님의 사랑에 일치하는 마음가짐까지 바라십니다.(보다 근본적 인 것은 마음가짐이라 생각하셨지요.)

 우리가 분노에 굴복해 폭력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려면, 겉으로 행사되는 폭력뿐 아니라 마음속 폭력까지 거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예 마음 안에 적개심이 자리 잡지 못하게 말입니다. 칼로 찌르는 것만 살 인이 아닙니다. 중상과 비방으로 타인의 인격을 훼손하고, 괴롭힘과 악플로 생기를 잃게 해서도 안 됩니다. 다른 사람 의 인격과 생명을 존중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 모든 게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살인도 마다 않는 광기와 폭력, 드러나면 죄가 되고 드 러나지 않으면 능력이 되는 부조리한 현상에 개탄하긴 어 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작 우리의 삶은 그런 불합리한 모 습에서 얼마나 자유로울까요? 

끓어오르는 분노와 적개심을 법이라는 제도 뒤에 감추어 두는 것은 하늘나라에 초대된 제자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좀 억울해도 먼저 나서 용서하고 화 해할 숙제를 안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 우리에게 내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핵심인 참사랑입니다. 율법의 핵심 은 사랑이기에 사랑을 외면한 계명, 사랑 없이 지키는 계명 은 의미가 없습니다. 사랑 없는 계명으로는 아무도 구원으 로 이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에서 우러나 자발적으로 화해하고 절제하고 정직하 기란 그저 규칙을 따르는 것보다 대개 더 어렵습니다. 바보 취급받지 않으려면 일단 목소리를 높이고 봐야 하는 요즘 엔 더 그렇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를 자유롭게 창조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를 살 아낼 수 있습니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집회 15,15)



십계명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이현선신부-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우리가 잘 알고 있 는 십계명의 내용이지만 막상 선포되는 내용을 들을 때면 마음이 가볍지 않습니다. ‘계명’ 이라는 단어가 지닌 무게감 때문일까요?

여행을 간다면 ‘재미있는 사람’과 ‘진지한 사람’중 어떤 사람과 함께하고 싶으신가요? 식사를 한다면 ‘재미있는 사람’과 ‘진지한 사람’중 어떤 사람과 함께하고 싶으신가요? 따로 물어보지 않 아도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실 것이라 생각해봅니다.

이야기가 재미가 없고 딱딱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졸음이 몰려옵니다. ‘어떤 것을 해야만 한 다.’라는 계명을 듣는 순간 뒤에 나오는 예수님의 설명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마저 무겁고 딱딱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닐까요?

여러 방송 매체들은 기쁜 소식이라 불리는 복음 말씀을 어렵고, 무겁고, 딱딱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을 통해서 우리는 복음이 기쁜 소식이라 불리는 이 유를 찾게 됩니다.

“너희는 말할 때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7)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모세에게 전달된 10가지 하느님의 계명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늘어나서 613개의 율법이 됩 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근본적인 가르침에 인간적인 해석이 더해지고 불필요한 허례허식이 덧붙여지면서 점점 더 무겁고 딱딱한 것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고 불필요한 말을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계명 속에 담긴 ‘사랑’을 실천하고 그 ‘사랑’을 살아갑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의 가르침에 ‘예’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할 것은 ‘아니요’라고 답하는 우리라면, 십계명은 더는 무겁게 느껴지지 않을 것입 니다.



"예" 할 것은 '몌'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박철신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 가운데에 요나 예언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아니 요.’라고 거절한 후 도망을 갔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요나가 ‘아니요.’라고 응답했다면, 하느님의 부르심에 ‘예.’하고 대답함으로써 세상에 구원의 희망을 가져온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처녀의 몸인데도 하느님의 아 들을 잉태 하라는 천사의 말에 ‘예.’라는 대답으로 응답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에 ‘아니요.’라며 거절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해서 우리는 요나처럼 어디로 도망가든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느님께 날아오르는 유일한 길은     ‘예.’와 ‘아니요.’의 대답 속에 들어 있다. … ‘예.’라는 대답을 통해 하느님은 충만한 은총을 내려주신다.”라 고 했습니다. 오늘 독서 집회서 15장 15절에는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 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라고 전합니다. 바로 앞에 인간에게 자유를 주고 존중하는 하느님의 말씀이 계시기에 가능합니다. “한처음에 인간을 만드신 분은 그분이시다. 그분께서는 인간을 제 의지의 손에 내 맡기셨다.”(집회 15,14)

  지금 이 순간에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하지만 또 다른 편에서는 우리를 부르는 세상 의 소리가 있습니다. 세상의 소리에는 ‘예.’하면서도 하느님의 부르심에는 ‘아니요.’라고 답하거나 못 들은 체 할 수는 없습니다.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마르 4,23)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처럼 들을 귀를 열어 주님의 부 르심에 ‘예.’라고 적극적으로 응답하고, 이를 반대하거나 부인하게 하는 것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아니요.’라 고 대답하는 신앙인이 될 수 있도록 도움의 은총을 청하는 한 주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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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들의 이목에 특별히 신경을 많이 쓰는 우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남들에게 멋지고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그렇게 많은 다이어트에 관한 책, 약, 운동법 등이 나오나 봅니다. 그런데 저 역시 남의 이목에 자유롭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얼마 전에 우연히 체중계에 올라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50년 이상을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보게 되는 체중 숫자였습니다. ‘살찌는 병에 걸렸나?’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긴 어떤 선배 신부님께서 저를 보고는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조신부도 배가 많이 나왔네. 살 좀 빼야겠다.”

이 말이 생각나면서 제 몸에 신경이 쓰이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 있으면 배에 힘을 주게 되고, 몸을 드러내는 옷이 아닌 편안한 펑퍼짐한 옷을 입게 됩니다. 그래서 여름보다 겨울이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어떤 자매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요. 꾸미지 않으면서 맘 편안히 살 수 있었어요.”

꾸미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남의 이목에 신경을 쓰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살겠다는 것이지요. 어느 작가의 글이 생각납니다.

“나는 꾸밈에 대한 임시파업을 선언했다.”

세상의 이목보다 주님의 이목에 신경을 써야 하지 않을까요? 주님의 이목을 끌려면 주님의 계명을 얼마나 성실하게 실천했는가에 결정됩니다. 겉모습을 그럴싸하게 꾸미는 삶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돈과 지위를 갖추는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것이 전부라고 하면서 이를 따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율법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제쳐 놓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또 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주님 계명의 실천에 따라 결정됩니다.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이냐는 말씀에 주님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랑보다 큰 계명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간격을 오늘 복음을 통해 더욱더 넓혀주셨습니다.

옛 계명은 살인해서는 안 된다고 말해주고 또 간음하지 말라고 말하지만, 새 계명은 마음에서 죄의 뿌리마저 뽑아 버리도록 해야 한다고 하시지요.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의 마음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이목보다 주님의 이목에 신경 쓰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죄의 뿌리를 마음에서 벗어내고, 사랑을 실천하는 데 온 힘을 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현재의 인생에 불만을 품을 어떠한 권리도 없다. 자신의 인생에 도저히 만족할 수 없다면, 자기 자신에게 불만을 품고 있다는 증거이다(레프 톨스토이). 



차별

인터넷 유튜브에서 ‘여성복의 진실’이라는 영상을 우연히 보면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성복에 주머니가 없는 이유, 마감이 엉성한 이유, 재질이 안 좋은 이유 등에 대해 의류 사업가와 인터뷰한 내용이었습니다.

솔직히 여성복을 1년 이상 입는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말에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여성들이 옷을 자주 사는 이유가 다양하게 입기 위해 또 과도한 옷 소비 때문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제가 가지고 있는 옷은 10년이 지나도 모두 멀쩡합니다. 내 몸이 불어서 맞지 않을 뿐 살만 빼면 지금 입어도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여성의 옷은 우선 튼튼하지 않다고 합니다. 세탁기 안에 들어가면 쓰레기가 되어 나온다는 표현까지 하더군요.

이렇게 남성복과 질적인 차이를 보이는 이유가 여성복은 어차피 많이 팔리고 빨리 소진되기 때문이랍니다. 단순히 예뻐 보이는 것이 중요하지 튼튼하고 착용감 좋은 것은 의미가 없답니다. 옷에 남녀차별이 있었다니 놀라웠습니다.

사회 곳곳에 차별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 차별을 힘차게 말하는 대신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더 큰 문제가 아닐까요? 또 남의 시선에 신경 쓰는 마음들이 이런 차별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차별을 없애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를 위해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남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마음, 그래야 나를 바라보는 사랑의 마음으로 남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나'라는 시스템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큰 죄다

-전삼용신부-


아돌프 아이히만은 효율적인 시스템을 구축해 유럽의 600만이나 되는 유태인들을 색출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수용소로 보내는데 나름대로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입니다. 패전 후 그는 아르헨티나에서 숨어 살다가 1960년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에 체포되어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고 처형됩니다.

      유태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이 재판과정을 정리하여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란 제목으로 책을 출판하였습니다. 아렌트는 처음에 아이히만이 냉철한 게르만 전사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라 상상했지만 실제로는 무척 왜소하고 기가 약해보이는 그냥 평범한 인물인 것에 놀랐습니다.

      재판 때 15개의 죄목으로 기소되었지만 그는 단 하나의 죄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책임을 지는 위치가 아니었고 따라서 자신에게 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저 하급 공무원으로서 출세를 위해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한 것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유태인을 증오해서가 아니라 공무원으로서 나라에서 시키는 일은 최대한 열심히 수행한 죄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책의 부제를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라 붙였습니다. ‘어쩌면 누구도 그 시스템 안에서는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부제에 들어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유죄를 선고받고 사형 판결을 받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한나 아렌트가 본 그의 가장 큰 죄는 바로 ‘악한 시스템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평범하게 열심히 살아도 사람은 항상 어떤 시스템 안에 속해 그것의 지배를 받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스템이 악한 시스템인지 선한 시스템인지를 구별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가장 큰 죄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선원이 한 배에서 평생을 열심히 일했습니다. 남이 꺼리는 일까지 도맡아 하는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엔 경찰에 잡혀 사형선고가 내려졌습니다. 왜 평생 열심히 일했는데 사형을 받아야 했을까요? 그 배가 해적선이었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해’ 열심히 사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어떤 시스템에서 살아가는 것일까요? 내가 살아가는 이 시스템은 과연 좋은 것일까요, 나쁜 것일까요? 이것에 대한 진지한 물음 없이 산다면 그 사람의 미래는 자칫 아돌피 아이히만처럼 심판받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파라오의 종살이를 할 때 그들은 파라오에게 노예생활을 하면서도 자신들은 열심히 산다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 시스템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파라오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온 인물이 있었는데 모세였습니다. 모세는 파라오가 악이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 악한 시스템에서 종살이하고 있다고 외쳤습니다.

      이와 같은 모습으로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어떠한 시스템에서 해방시켜주러 오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지배당하는 어떠한 시스템이 악한 것임을 알려주러 오신 것이고 그것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러 오신 것입니다. 우리를 지배하는 그 시스템은 다름 아닌 바로 ‘나 자신’입니다. 모든 사람은 나 자신에게 봉사하는 것이 좋은 일이라 여기며 열심히 그 시스템을 따라 살아갑니다.

      저는 이 ‘나 자신’을 ‘자아(ego)’라 부르고 싶습니다. 자아는 육체의 본성으로 사람을 자신 시스템 안에 복종시킵니다. 육체의 본성은 ‘세속-육신-마귀’, 즉 ‘돈에 대한 욕구-쾌락에 대한 욕구-교만에 대한 욕구’입니다. 이 욕구들을 따르면 사람은 나 자신만을 위하는 나뿐인 사람, 즉 나쁜 놈이 됩니다.

      이것이 나쁘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구약에 주신 것이 ‘율법’입니다. 율법은 모두 이 세 욕구와 반대됩니다. 재물을 나누어야하고, 육체를 절제해야 하며, 겸손해지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이것을 철저하게 따랐던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문제는 여전히 자아라는 시스템에 복종하면서도 행위로만 하느님 법에 순종하려 했던 것에 있습니다. 분명 이런 율법들은 자신의 본성인 욕구를 없애기 위함이었는데 그 욕구에는 순종하면서 겉으로만 하느님 법을 따른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은 행위로 의로워지려 했지만, 여전히 자아의 욕망에 지배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의로움을 넘으려면 죄를 우리의 행위보다는 우리 안에서 솟아나는 욕구에 두어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율법을 행위가 아니라 욕구에 정조준 하도록 하십니다. 다시 말해,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는 율법을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라고 바꾸시고, “간음해서는 안 된다.”는 율법을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로 바꾸십니다. 행위가 아니라 욕구가 죄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자아의 욕구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나의 자아의 정체가 뱀과 같음을 깨달아야합니다. 하와가 뱀에게 넘어간 이유는 그 미소 뒤에 독을 감춘 뱀이 곧 자아임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아돌프 아이히만이 나치독일의 정체를 몰라서 그 지경이 되었듯이 우리도 우리 자아의 정체를 모르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 안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악한 것입니다. 그것을 알게 되면 이제 주님의 목소리만을 따르게 됩니다. 우리 시스템을 나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께 순종하는 시스템으로 바꾸게 되는 것입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가 있습니다. 그는 늑대라는 본성과 욕구에 지배당합니다. 어두운 곳을 좋아하고, 익히지 않은 살코기를 좋아하며, 네 발로 걷고, 옷은 찢어버립니다. 이 욕구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연습하면 될까요? 안 됩니다. 자신이 인간임을 믿어야합니다. 자신의 본성이 무엇이라고 믿는 그 믿음이 자신을 지배하는 시스템이 되는 것입니다.

      나를 나라고 믿으면 자아의 본성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느님도 “나는 나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을 나라고 믿어야 하느님의 본성에 사로잡힙니다. 하느님의 본성이란 사랑입니다. 아기가 부모를 알아 자신도 인간임을 믿게 되었을 때 네 발로 걷고 싶은 본성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 아버지가 하느님임을 먼저 믿지 않으면 자아의 욕구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습니다.

      아버지를 하느님이라 믿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라 믿어야 하느님의 본성이 나와 지금의 본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죄는 ‘나’라는 시스템을 분별없이 받아들여 그 욕구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정말 나를 나로 여기며 사는 것이 결국엔 가장 큰 죄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나’라는 나를 버리고, “나는 나다!”라는 ‘나’를 나의 나로 받아들여야합니다. 나는 어떤 ‘나’라는 시스템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조재형신부-


중국에서 시작된 신종코로나 바이러스 중국은 물론 세계적인 문제가 되었습니다. 교통수단이 발달해서 지구촌이 일일 생활권이 되었습니다. 이번 바이러스는 호흡기를 통해 전파된다고 합니다. 손을 자주 씻고, 마스크를 착용하면 바이러스에 감염될 위험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바이러스에 대한 치료제가 만들어지고, 국제적인 공조가 이루어지면서 신종코로나 바이러스는 점차 수그러들고 있습니다. 열악한 위생환경, 야생동물과의 접촉이 신종코로나 바이러스의 발생 원인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발생 초기에 신속한 조치가 이루어지지 못한 점이 바이러스가 급속하게 퍼지는 원인이 되었다고도 합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질병에는 국경이 없음을 인식하면 좋겠습니다. 질병이 발생하면 즉각 공개하고, 국제적인 협조를 구해야 합니다. 과도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지만, 과도할 만큼의 예방과 검역은 필요합니다.

 

우리 속담에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작은 법규를 무시하기 때문에,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법과 규정을 위반하기 때문에 인재(人災)가 발생합니다. 교통법규만 잘 지키면 대부분의 교통사고를 예방할 수 있습니다. 장거리 운전을 하면 중간에 쉬는 것이 좋습니다. 전날은 일찍 자는 것이 좋습니다. 커다란 트럭이나 화물차는 가급적이면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추월하려는 차는 보내 주는 것이 좋습니다. 앞에 가는 차와 뒤에 오는 차의 상태를 살피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안전운전을 하면 운전이 즐거움이 됩니다. 운전하기 전에 기도를 하면 좋습니다. 봉성체 봉사를 하는 것도 좋습니다. 고장 난 차가 있으면 내려서 도와주는 것도 좋습니다. 이웃을 도와주는 운전을 하면 운전이 복음 선포가 됩니다. 어떤 운전을 하는지는 운전하는 사람의 선택입니다.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할 계명을 받았습니다. 이 계명을 잘 지키면 어둠 속에서도 빛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계명을 잘 지키면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 나라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 계명을 잘 지키면 악의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이 계명을 잘 지키면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신앙의 공동체를 만들 수 있습니다. 계명은 이스라엘 백성을 억압하고, 구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계명은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께로 인도하고, 영적인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없애거나 폐지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오히려 율법을 완성하겠다고 하십니다. 구약의 계명이 교통법규를 지키는 준법운전과 같다면 예수님께서 새롭게 주시는 계명은 운전이 기쁨이 되는 안전운전이며, 운전이 복음 선포가 되는 양보운전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새로운 계명은 구약의 계명보다 더 지키기 어렵습니다. 행위 이전에 행위를 드러내려는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위는 결과가 있고, 행위는 눈에 보이기에 조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결과가 없습니다.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조심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악에 기울면 우리의 행위 또한 악으로 기울기 마련입니다. 오늘 제 1독서는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지 말해 주고 있습니다. 선을 하거나, 악을 하거나 그 행동은 바로 우리들의 의지와 우리들의 판단에 따른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제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는 지혜를 추구하되 세상의 지혜보다는 하느님의 지혜를 추구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지혜는 우리를 성숙하게 만들어 줍니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지혜가 무엇인지를 제시해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심으로 평등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모든 권한과 능력을 내려놓는 겸손함이 평등의 시작임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권한을 주심으로 자유로움을 보여 주셨습니다. 참된 자유는 장벽을 허물면서 시작되고, 조건 없는 나눔으로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기존의 질서를 존중함을 넘어서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새로운 질서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의 화답송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 당신은 규정을 내리시어 어김없이 지키라 하셨나이다. 당신 법령을 지키도록 저의 길을 굳건하게 하소서. 제가 살아 당신 말씀 지키오리다. 저는 끝까지 그 길을 따르오리다. 당신 가르침을 따르고 마음을 다하여 지키오리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주님의 사랑을 온 몸으로 받아들여, 오늘 하루도 충실하게 살아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마음의 생각이

-반영억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당신의 목숨을 내 놓으셨습니다. 이시간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행동은 마음에 쌓아 놓은 것을 밖으로 드러내놓은 것입니다. 따라서 드러난 행동을 통해서 그 사람의 마음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선한 일을 하였다면 그는 선한 마음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악한 일을 하였다면 선하지 못한 생각을 품은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음에 가득찬 것을 입으로 말하는 것이다. 선한 사람은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꺼내고, 악한 사람은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꺼낸다.”(마태12,35) “사실 너의 보물이 잇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6,21).


 어떤 사람이 살인을 하였다면 이미 미워하는 마음, 성내는 마음이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창세4,1-8)가 나옵니다. 카인은 땅의 소출을 주님께 바치고 아벨은 양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지만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카인은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렸습니다. 그리고 아벨에게 들에 나가자하고 데려나가 그를 죽였습니다.


 미워하고 성내는 마음이 뿌리라면 살인행위는 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다스리고자 한다면 뿌리를, 다시 말하면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고 하지 않으시고 미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손발이 아니라 마음을 단속하라는 말씀입니다. 마음을 단속하되 단호하게 다스리라고 하십니다.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마태5,29) 참으로 마음이 똑바로 향해 있으면 행동 또한 바릅니다. 마음과 행동이 일치할 때 구원의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오늘 1독서 집회서를 보면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 그분께서 네 앞에 물과 불을 놓으셨으니 손을 뻗어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라.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느 것이나 바라는 대로 받으리라.”(집회15,17) “그분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을 굽어보시고, 사람의 행위를 낱낱이 아신다.”(15,19)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보나 안 보나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 사람이 되십시오. 이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간하도록 하십시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 하십시오”(필리4,8).

    

 하늘에는 하늘의 질서가 있고, 땅에는 땅의 질서가 있습니다. 바다에는 바다의 질서가 있습니다. 산에는 산의 질서가 있습니다. 그런데 마구 파헤치고, 규정을 지키지 않고 항해하면 충돌이 일어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내 생각과 행동에도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질서를 지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 질서가 어디 있습니까? 성경 안에 있습니다.

    

 요한 213절에 보면 그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밤새 고기를 잡으려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한 말씀에 순명함으로써 많은 고기를 잡은 제자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참된 신앙은 주님의 지시를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삶의 의미와 성공여부는 주님께 얼마만큼 의존해 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풍요로운 축복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보시며 우리의 의향에 따라 열매를 맺게 해 주십니다. 겉으로는 한 번도 죄를 범한 일이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이 철저한 위선일 수도 있습니다. 선량하고 깨끗해 보이는 겉모습 뒤에는 더럽고 추악한 것이 숨겨져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내면과 외면, 생각과 행동이 일치해야 합니다. 이라한 일치 속에 사는 사람은 그의 눈빛과 거짓 없는 말, 가식 없는 행동으로 알아볼 수 있습니다. 매일 매 순간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삶을 가꿀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성직자로 살면서 힘든 것 중의 하나가 사람의 속을 본다는 것입니다. 속을 빤히 들여다보면서도 내색을 하지 않고, 때를 기다려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인 사제가 이렇게 안타까워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더 큰 안쓰러움으로 바라보고 계실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퀴즈를 내겠습니다. 맞춰보세요?

거꾸로 놓아도 바로 서는 것은? 오뚝이

거꾸로 보나 바로 보나 항상 바로 보이는 것은? 거울

거꾸로 서서 다니는 것은?

거꾸로 서도 바로 가져야 되는 것은? 마음

    

우리의 마음은 항상 바로 가져야 합니다. 세상의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항상 “‘할 것은 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하면서 지킬 것을 지켜야 하겠습니다.

    

활을 가지고 과녁을 겨냥할 때 조준을 잘해야 합니다. 과녁에 정확하게 맞추지 못한 것은 잘 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조준을 잘못한 탓입니다. 조준을 잘못하면 설사 화살이 시위를 떠나지 않았어도 이미 과녁을 벗어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시선이 주님을 올바로 바라보지 못한다면 이미 죄를 범한 것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죄의 결과물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기 전부터 이미 탐스러운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먹기로 결심을 했으니 그것이 죄입니다. 지향이 얼마나 중요한지 잊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진리를 향해 조준되었을 때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귀는 귀인데 못 듣는 귀는? 뼈다귀

귀와 입이 한 곳에 붙어 있는 것은? 수화기

귀에 딱지가 앉는 것은? 잔소리

귀로 듣더라도 입으로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은 ? 남의 흉, 허물.

 

하나 더합시다.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는 것? 나이

속이고 싶어도 속일 수 없는 것? 나이

나이가 약인 것은? 철드는 것. 포항제철에서 전화 왔대요. ? 철들으라고!

먹으면 그 값을 해야되는 것은? 나잇값. 세례 받았으면 그 값을 해야죠. 견진...성체 모시면 그 값을 해야죠.

 

마음에 품은 생각이 넉넉하고 사랑으로 가득 차 언제나 그것이 쏟아져 나오기를 기도합니다. 음성 감곡성당 초대주임 임 가롤로 신부님께서는 나는 여러분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 하시며 복음전파를 시작하셨습니다. 나를 먼저 사랑하신 주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차별없이 사랑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으로 불릴 것이다.” 

-이영근신부-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주님의 지혜입니다.

<1독서>에서, 주님의 지혜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참으로 주님의 지혜는 위대하니 그분께서는 능력이 넘치시고 모든 것을 보신다.”(집회15,18)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주님의 지혜세상이 시작되기 전,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미리 정하신 지혜(1코린 2,7)로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다.”(1코린 2,9)고 말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지혜<복음>에서 율법의 완성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으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사실, 히브리인들은 시나이 율법을 통하여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하느님의 백성, 거룩한(의로운) 백성이 됩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느님과 맺었던 십계명은 차차 613항으로 늘어났고, 그들의 삶을 율법으로 옭아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초기부터 안식일법, 정결법, 단식법 등을 통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과 논쟁을 하며 대립되었고, 마치 율법의 거부자 혹은 파괴자로 여겨졌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도록,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감시자 노릇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온 뒤로 우리는 더 이상 감시자 아래에 있지 않습니다.”(갈라 3,34-35)


그렇다면, 대체 율법의 완성은 어디에서 이루어지는 것일까?

<1독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집회 15,15)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으로 불릴 것이다.”(마태 5,19)


이는 율법은 지켜질 때라야, 비로소 그 행위 안에서 성취된다는 말씀입니다. 곧 알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말로만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에게서 율법이 완성된다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계명을 주신 분을 사랑하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내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라고 하고 또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됩니다.”(1요한 2,5)


그렇습니다. 결국, 사랑이 율법을 완성합니다. 사랑이야말로, 옛 율법을 완성하는 새로운 의로움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새로운 의로움을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여섯 가지로 제시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그 중 첫 번째에서 네 번째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곧 살인, 간음, 이혼, 맹세에 대한 옛 율법을 넘어서는 새로운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첫째> 의로움에서 실인에 대한 것으로 외적 행동의 의로움을 넘어서, 죄의 뿌리인 내적 지향의 의로움을 말씀하십니다. 동시에 율법의 본질이 화해에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23-24)


<둘째와 셋째> 의로움에서도 간음의 내적 뿌리가 마음에 있음과 이혼이 불륜을 불러오는 뿌리라고 말하면서, 죄를 뿌리에서부터 잘라내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곧 죄를 불러오는 마음의 눈과 손을 잘라버리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다.”(마태 6,22) 라고 하십니다.

<넷째> 의로움은 맹세에 대한 것으로, 예수님께서는 거짓 맹세뿐만 아니라, 아예 맹세하지 마라(마태 5,34)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만이 자신을 보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진리인 것이 아니라, 단지 진리에 응답하는 사람들이기에 할 것은 (ναι ναι)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οû οû)라고 응답하라고 하십니다. 곧 응답하되 맹세가 아니라 행동으로 응답하고, 행동하되 진리 안에서 행동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권고합니다.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하십시다.”(1요한 3,18)


다시 한 번, <1독서>의 말씀을 되새겨 봅니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집회 15,15).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솟은기도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 17)


주님!

말씀을 이루소서.

제 안에 뿌리신 말씀을 지키게 하소서.

제 삶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복된 땅이 되게 하시고, 크신 사랑을 이루소서.

이루어지지 못한 채 폐지되지 않게 하시고, 완성을 이루소서. 아멘.


신앙생활 

-송영진신부-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하는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0-22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속마음과는 상관없이 겉으로 보기에 율법을
잘 지키는 것으로 보이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생각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겉으로만 잘하는 것은 잘하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치십니다.v 속과 겉이 같아야 하고, 보이지 않는 속마음과 눈에 보이는 행동이
같아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속과 겉이 다른 것은 ‘위선’입니다.
위선은 하느님과 사람을 속이려고 하는 ‘죄’입니다.
운전을 할 때 지켜야 하는 교통법규는, 속마음은 그렇지 않더라도
겉으로 보기에 잘 지키면 모범 운전을 하는 것으로 인정됩니다.
교통법규는 지키는 일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법은(계명과 율법은)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온 마음과 온 삶으로) 지켜야 잘 지키는 것입니다.

계명과 율법의 근본정신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온 마음과 온 삶으로 실천해야 하는 덕입니다.
만일에 마음으로는 사랑하지 않으면서 겉으로만 사랑한다면,
그것은 ‘사랑하는 척’ 연기(演技)를 하는 것입니다.
연기(演技)가 사랑일 수는 없습니다.
또 어떤 특정한 시간에만, 또는 어떤 특정한 장소에서만 사랑하고,
그 나머지 시간에는, 또는 다른 장소에서는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의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언제나 어디에서나 항상 똑같아야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면서, 주일에 성당에서만 사랑하고,
평일에는, 또 성당이 아닌 곳에서는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인데,
식구들을 사랑하는 일은 집에서 함께 있을 때에만 하면 되는 일이 아니라,
언제나 어디에서나 똑같아야 사랑입니다.
만일에 떨어져 있을 때에는 사랑을 안 하면서,
함께 있을 때에만 뜨겁게 사랑한다면, 그것은 ‘거짓 사랑’이고 ‘위선’입니다.
지금 이 말에서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 라는 말이 연상되는데,
눈에서 멀어져 있어도 마음은 멀어지지 않아야 진정한 사랑입니다.
‘신앙생활’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배반자 유다의 행동을 ‘거짓 사랑’과 ‘위선’의 대표적인 예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바로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유다가 왔다. 그와 함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보낸 큰 무리도
칼과 몽둥이를 들고 왔다. 그분을 팔아넘길 자는, ‘내가 입 맞추는 이가
바로 그 사람이니 그를 붙잡으시오.’ 하고 그들에게 미리 신호를 일러두었다.
그는 곧바로 예수님께 다가가, ‘스승님, 안녕하십니까?’ 하고 나서
그분께 입을 맞추었다(마태 26,47-49).”
원래 제자가 스승에게 입을 맞추는 일은, 존경과 사랑의 표시였습니다.
그러나 겟세마니에서 유다가 예수님께 입을 맞춘 일은,
박해자들에게 예수님을 넘기기 위해서 한 일입니다.
존경과 사랑의 표시를 배신의 표시로 삼은 것입니다.
겉으로만 보면 똑같은 입맞춤이지만, 그 뜻은 완전히 반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의 상황에서는 유다의 입맞춤의 의도를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지만, 일상생활에서는 누구나 쉽게 속을 수 있는 일입니다.
바로 그것이, 즉 ‘악’이 ‘선’의 탈을 쓰고 있다는 점이
‘거짓 사랑’과 ‘위선’의 무서운 점입니다.
사랑의 표시와 배신의 표시가 겉으로는 똑같기 때문에
배신당한 사람의 상처는 그만큼 더 크게 됩니다.)

< 만일에 유다가 “나는 예수님께서 사형선고를 받게 될 줄은 정말로 몰랐다.” 라고
주장한다면, 또는 “나는 예수님을 배반했지만 예수님의 죽음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은 내 책임이 아니다.” 라고 주장한다면,
그의 죄가 작아지거나 없어질까?
당시 상황에서 “그렇게 될 줄 몰랐다.” 라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도 않지만,
정말로 몰랐다고 해도 유다의 책임이 없어지거나 죄가 작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박해자들에게 속아서 한 일도 아니고, 박해자들의 압력을 받아서 한 일도 아니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자들에게 그 자신이 먼저 스스로 찾아갔고,
그의 배신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으로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사실 ‘배신’은 ‘살인’과 맞먹는 범죄입니다.
(죄를 짓고 나서 ‘몰라서 그랬다.’ 라고 변명하는 경우가 흔히 있는데,
정말로 알아야 할 일들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는 것 자체가 죄가 됩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기준으로 삼아서 그들보다 더 의롭게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처럼 살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위선자들의 삶’이 신앙생활의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실제로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면,
“살인하지 마라.” 라는 계명을 지킨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사람을 죽이지 않았더라도,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미워하고, 화를 내는 것도 살인이다.” 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래서 “살인하지 마라.” 라는 계명을 제대로 지키려면,
마음속의 증오심과 분노부터 없애야 합니다.
(지금 이 말에 대해서, “정말로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당해서
마음속의 원한과 분노를 없앨 수 없다.
그런데도 죄가 되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엄청나게 노력하고 있다.
노력하고 있지만 증오심과 원한과 분노가 없어지지 않는다.
이런 경우도 살인죄가 되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죄를 안 지으려고 노력하는 것’과 그런 노력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을
구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정말로 억울한 일을 당해서,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하는 마음이 생긴 것은
내 의지로 한 일이 아니니, 그것을 죄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을 없애려고 노력하기는커녕, 그 증오심과 분노를 더욱 키우면서
복수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죄입니다.)  




율법의 근본정신

 -조욱현신부-


오늘 독서는 율법과 그 율법을 표현하고 있는 계명들에 관한 주제가 나타나고 있다. 예수께서는 율법을 폐지하러 오시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복음과 율법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본래 율법은 복음과 같은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 율법이 본래의 근본정신은 잃어버리고 형식적인 것만 남아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 형식주의를 책망하시는 것이다.

 

1독서: 집회 15,15-20: 불경하게 되라고 하신 적이 없다.

법은 인간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 있으면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인간은 잘못할 때도 그의 행동은 자율적이고 인격적이기 때문에 위대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선택하느냐이다.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느 것이나 바라는 대로 받으리라.”(17) 여기서 말하는 생명과 죽음은 생물학적 개념이 아니라, 윤리적 개념이다.

 

생명은 자신을 실현할 수 있는 하느님의 법을 받아들여 그분과 하나 되는 것을 의미하며, 죽음은 그 하느님의 뜻을 거절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무의미하게 하는 좌절의 한 형태를 말한다. 여기서 인간이 위대하다는 것은 생명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항상 하느님의 뜻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삶에 있어 주체가 되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아무에게도 불경하게 되라고 명령하신 적이 없고, 누구에게도 죄를 지으라고 허락하신 적이 없다.”(20)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복음: 마태 5,17-37: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과 달리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복음에서 법이라는 것은 그 법이 인간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변화시키는 그 본질적 의미를 알아듣고 살 때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계명이 사랑하라.”는 적극적인 계명으로 바뀌지 않는 한, 우리는 마음속으로 형제를 계속 죽일 수 있다.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는 계명이 나 자신이 충실하고 진실하라는 계명으로 바뀌지 않는 한, 우리는 여전히 거짓 맹세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법이 변화되면 그 법은 이미 복음이며 은총이 된다. 그것은 바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안에서부터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은 구약의 모든 것이 예수님으로 인해 충만한 의미를 가지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됨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은 율법이나 예언서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17-18) 여기에는 하느님의 뜻이 담겨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어기지 말고 실천하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가르치라고 권고하신다.(19)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시나이산에서의 모세보다 훨씬 위대한 분이심을 입증하려 한다. 모세는 하느님의 대변자였지만, 예수님은 그 법 가운데 어떤 것을 수정하고, 당신의 이름으로 말씀하신다.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21.27.33.38.42)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분은 바로 그 계명을 주신 분이시며, 사람들에게 결정적 구원의 기쁜 소식을 가져다주는 계시자이며 하느님이신 분이시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율법의 근본적인 의미를 해석해 주심으로써 인간의 삶을 통해 하느님의 뜻이 완전히 드러나게 해 주셨다. 이제 율법은 인간을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더 자유롭게 해주는 은총의 복음으로 예수님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하는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21-22) 여기서 선과 악은 마음속에 있으며, 형제를 무시하거나 그의 명예를 훼손한다면 이미 그를 죽이는 것이다. 즉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 않는 것은 사랑으로부터 그를 떼어냄으로써 그를 이미 죽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과 같다. 그러기에 예물을 바치려 할 때에 원한을 맺고 있는 형제와 화해하라고 하신다(23-24절 참조). 주님 앞에 참된 제물은 마음으로부터 생겨날 수 있는 사랑과 용서로써 마련되는 것이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27-28) 여기서도 악한 욕망, 욕정과 호기심에 찬 시선으로 생겨나는 악을 비난하신다. 우리의 눈이나 다른 지체가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하라고 하시면서, 이혼도 허락하지 않으셨다. 모세의 이혼장은 간음을 허락하는 것일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 법을 폐기하신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는 자는 누구나 그 여자가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다.”(32) 그러니 악의 공범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러한 법은 폐지되어야 한다.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드려라.”(33-37) 맹세는 이웃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이름을 개입시키는 것이다. 하느님의 이름은 우리 모두를 하나로 일치시키는 것인데, 그렇게 쓰이지 않고 이웃을 불신하는 데에서 쓰이게 되면 형제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하느님도 믿지 못하는 이중적인 거짓 맹세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기를 요구하신다. “!”가 됐든 아니오.”든 입술로 말하는 그것이 마음속에 똑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37)

 

이러한 법은 명령이라기보다 복음의 새로운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베풀어 주시는 사랑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완성하러 오신 율법은 율법주의나 전통적인 관습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은총의 선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복음이 복음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엄격한 것 같지만,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주는 은총에 의해 그를 실현할 수 있는 힘도 주기 때문이다.

 

2독서: 1코린 2,6-10: 감추어져 있던 지혜

그러기에 사도 바오로는 복음을 세상이 시작되기 전,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미리 정하신 지혜”(7)라고 말하고 있다. 오직 성령에 의탁하는 사람만이 그 지혜를 체험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세상 우두머리들은 아무도 그 지혜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깨달았더라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되었습니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두셨다.’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그덧들을 바로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그리고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하십니다.”(8-10)

 

우리는 성령의 선물을 받고 있기 때문에(로마 8,2-4 참조)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율법을 실현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율법을 가르치실 때 글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은총으로 가르치시며, 기꺼이 배우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완전히 깨닫게 해줄 뿐만 아니라, 배운 것을 성실하게 실행할 마음을 주시고 또한 실제로 실행하도록 하신다. 즉 그분의 가르침은 하고자 하는 본성적 능력만이 아니라 원의 그 자체와 원의의 활동까지도 도와준다.”(성 아우구스티누스, De gratia Christi et de peccato originali, in PL 44,359)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깨우쳐주신 율법의 근본정신을 삶으로써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들,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 5,8)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마태 5,9)이 되어 행복을 누리는 신앙인이 될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을 구하여야 하겠다.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여라.(마태 5, 37) 

-한상우신부-

예!와
아니오!는
마음을 다스리는
가장 중요한
기본입니다.

지켜야 할 것은
지키고
피할 것은
피하는 지혜입니다.

올바른 삶은
우리 일상생활과
동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합니다.

계명은 묶인
우리 자아를
비추어줍니다.

단순함의 진리는
우리자신을
먼저 살피는

겸손과 정직에서
출발합니다.

계명을 통해
우리는 주님께서
선물로 주신
일상의 관계를 다시
성찰하게 됩니다.

진리 속에
살고자 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진리는 기본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기본을 벗어나면
지극한 마음또한
잃어버립니다.

계명은 우리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줍니다.

거짓과 가식에
묶여있는 우리를
자유롭게합니다.

우리가 가야할
올바른 길을
걸어갑시다.

그 길은
가장 단순한 진리인
예!와 아니오!에서
만나게 됩니다.


-오상선신부-


오늘의 말씀은 계명 이야기입니다.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이 기존 종교 질서와 마찰을 빚자,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마치 체제 파괴자처럼 불편하게 여깁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시각의 전환을 유도합니다. 얼핏 율법을 어기는 것으로 보여도 실상 본질을 찾아 완성하는 이는 "오히려" 예수님이고, 겉으로는 율법을 수호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 본질에서 퇴행하는 이들은 "오히려" 너희라는 뜻입니다.

"완성"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율법 조항의 정점이고 포괄이며 요약인 "사랑"을 죽음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지키고 그렇게 가르치심으로써 율법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계명 가운데 첫째 가는 계명이며(마태 22,37-39 참조), 또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 참조).

이어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계명들 가운데 몇 가지를 들어, 그 정신과 본질을 사는 길을 일러주십니다. 그런데 더 어려운 길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살인까지는 안 해도 종종 미움에 빠지고 성도 내며 비난을 하기도 합니다. 행동까지 옮기지 않지만 못된 생각을 하기도 하고 자기 정당성을 위해 하느님 이름을 들먹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예수님은 지금 또다른 계명의 세부 조항을 만들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모두를 아우르는 하나의 길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 대목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지만, 결국은 "더 사랑하면 된다"고 이르시는 겁니다.

제1독서에서는 계명을 지키는 주체를 명확히 합니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 네 뜻에 달려 있다"(집회 15,15).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라"(집회 15,16).
"바라는 대로 받으리라"(집회 15,17).

계명을 따름은 억지로 끌려가는 길도 아니고, 그냥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원하고 바라고 뜻해야 합니다. 그래서 화답송은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의 행복을 노래하면서, "저는 끝까지 그 길을 따르오리다"(화답송)라고 계명의 길을 걷은 이의 의지를 강하게 표명합니다.

제2독서에서는 지혜를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신비롭고 감추어져 있던 지혜"(1코린 2,7).

이 지혜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야말로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1코린 2,9) 두신 지혜이시며 성령께서 통찰하시는 "하느님의 깊은 비밀"(1코린 2,10)이십니다.

아버지의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느님이 모세를 통해 주셨던 계명을 그 지혜로써 완성하십니다. 그 지혜가 곧 사랑입니다. 계명은 사랑으로 완성되어 구원으로 연결됩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마태 5,20).

예수님 덕분에 "사랑"이 모든 계명의 뿌리이고 지향점이며 핵심이라는 걸 알아버린 우리에게 이제 옛 율법으로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퇴로가 차단되었다고 보아도 좋습니다. 주님의 제자라면, 미처 거기까지 깨닫지 못한 이들의 오류는 그렇다 치고, 그들이 못 얻은 깨달음을 사는 길로 박차고 나아가야 합니다. 의무를 능가하는 사랑만이 길잡이가 되어 줄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가 지켜야 할 계명들 하나 하나에 점수를 매겨가며 살아가야 한다면 참 숨막히겠지요? 그런데 반대로, 생각과 행동을 "사랑"에 고정하고 살아간다면 우리 존재 안에서 계명들이 질서와 조화를 잡아나간다는 걸 체험하게 될 겁니다.

계명이 따분하고 억압적인 굴레가 아니라, 우리와 더 깊이 관계 맺고 싶어하시는 하느님의 선물인 동시에, 그 관계 안에 뜨겁게 머물기를 원하는 우리의 바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족하지만 우리의 사랑이 완성을 향해 나아갈수록 계명 또한 사랑이 되어갑니다. "사랑"이라는 해류를 따라 함께 흐르니까요. 오늘 사랑의 파도에 우리 존재를 맡기고 함께 출렁이며 하느님의 바다에 몸을 맡겨 봅시다. 내가 계명이 되고, 계명이 사랑이 되고, 사랑이 내가 되는 기막힌 신비 안에 머무르시길 축원합니다.

생명 내비게이션 
-김찬선신부-


오늘의 집회서는 우리 앞에 생명과 죽음이 놓여있는데
우리는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있고,
바라는 대로 받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
그분께서 네 앞에 물과 불을 놓으셨으니 손을 뻗어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라.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느 것이나 바라는 대로 받으리라."


그런데 죽음을 바라고 죽음을 선택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문제는 생명을 바라고 생명을 선택해 놓고는
생명의 길을 가지 않는 것이지요.

이것은 마치 목적지를 <생명>으로 정해 놓고 길을 떠났는데
생명 내비게이션을 따르지 않고 죽음의 길을 가는 것과 같습니다.

노무현 정부 때 진보쪽 인사들이 '좌측 깜빡이를 켜고
오른 쪽으로 간다'고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곤 하였지요.
그렇다면 생명의 길과 생명 내비게시이션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오늘 집회서나 복음 모두 하느님의 계명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다고 집회서는 얘기하고,
복음의 주님은 그 계명을 완성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합니다.

먼저 생명의 길을 선택한 사람은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남을 죽이면서 자기는 살려고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계명으로
금하셨기에 살인을 하고는 선택한 생명을 누릴 수 없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계명이 아닌 세속의 법에서도 마찬가지지요.
부러 남을 죽이면 그도 사형에 처할 수 있지요.

그런데 복음의 주님은 이웃에게 성을 내거나 이웃을
바보 멍청이하고 하는 것도 생명의 길을 가는 게 아니라고 합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바 있듯이 우리는 이웃을 미워하고 이웃에게 성내면서
'저런 인간은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심리적인 살인이요 인격 살인인 것이지요.

다음으로 우리는 남을 죽이지 않지만
스스로 죽음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자살을 하는 것인데 예를 들어
저를 비롯하여 사람들이 요즘 건강을 중요시하고
그래서 건강에 좋은 음식을 무척 신경 쓰며 챙겨 먹으면서도
술 담배와 같이 안 좋은 것을 먹음으로써 몸과 마음을 파괴하고,
마약 같은 것을 먹음으로써 정신과 영혼을 파괴하곤 하지요.

죽음의 길을 가는 것과 관련하여 다음으로 우리가 볼 것은
안 좋은 것을 섭취하지는 않지만
좋은 것을 섭취하지 않아서 죽음의 길을 가는 경우입니다.

앞에 얘기한 것이 안 좋은 것을 먹어 자기를 죽게 하는 것이라면
지금 얘기하는 것은 음식, 영양분을 섭취하지 않아 죽게 하는 거지요.

다름아닌 하느님의 사랑을 먹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이 우리가 죽는 길인 거지요.

먹지 않고 길을 걸으면 지쳐서 죽는 것처럼
생명의 길을 간다면서 생명을 주는 하느님의 사랑과 말씀을
우리가 섭취하지 않으면 그 길을 끝까지 갈 수 없는 거지요.

그러므로 생명을 목적지로 정하고, 생명 내비게이션을 따라
생명의 길을 가려고 하는 사람은 주님과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합니다.

우선 주님이 바로 생명 내비게이션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주님이 바로 우리의 생명의 길이요 내비게이션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가르침이 생명 내비게이션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가르침/ 계명대로 사랑을 양식 삼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사랑과 말씀을 양식 삼고 살아가면
자신도 살고,다른 사람도 살리는 생명의 길을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이 귀중한 가르침 받는 오늘 연중 제6주일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4년 2월 16일 연중 제6주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17-37)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
그분께서 네 앞에 물과 불을 놓으셨으니 손을 뻗어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라.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느 것이나 바라는 대로 받으리라."
(집회서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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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의 자유는 책임이 따를 때 진정한 자유가 될 수 있습니다. 자유와 책임이야말로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특성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복제품과 같은 기계가 아니라 좋고 나쁜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운 인간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오늘 독서에 ‘그분께서 네 앞에 물과 불을 놓으셨으니 손을 뻗어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라.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느 것이나 바라는 대로 받으리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를 주시되 그 목적에 맞게 사용하고 책임을 지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인간들은 자신의 뜻대로 자유를 남용하였기에 예수님께서 오늘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가장 우선적인 가치인 계명을 우리는 양심에 새기고 그 법에 의해 판단하고 선택하고 행동해야 하며 책임을 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첫째 계명은 ‘사랑’입니다. 

-키엣 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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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아이히만은 효율적인 시스템을 구축해 유럽의 600만이나 되는 유태인들을 색출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수용소로 보내는데 나름대로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입니다. 패전 후 그는 아르헨티나에서 숨어 살다가 1960년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에 체포되어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고 처형됩니다.

      유태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이 재판과정을 정리하여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란 제목으로 책을 출판하였습니다. 아렌트는 처음에 아이히만이 냉철한 게르만 전사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라 상상했지만 실제로는 무척 왜소하고 기가 약해보이는 그냥 평범한 인물인 것에 놀랐습니다.

      재판 때 15개의 죄목으로 기소되었지만 그는 단 하나의 죄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책임을 지는 위치가 아니었고 따라서 자신에게 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저 하급 공무원으로서 출세를 위해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한 것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유태인을 증오해서가 아니라 공무원으로서 나라에서 시키는 일은 최대한 열심히 수행한 죄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책의 부제를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라 붙였습니다. ‘어쩌면 누구도 그 시스템 안에서는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부제에 들어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유죄를 선고받고 사형 판결을 받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한나 아렌트가 본 그의 가장 큰 죄는 바로 ‘악한 시스템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평범하게 열심히 살아도 사람은 항상 어떤 시스템 안에 속해 그것의 지배를 받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스템이 악한 시스템인지 선한 시스템인지를 구별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가장 큰 죄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선원이 한 배에서 평생을 열심히 일했습니다. 남이 꺼리는 일까지 도맡아 하는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엔 경찰에 잡혀 사형선고가 내려졌습니다. 왜 평생 열심히 일했는데 사형을 받아야 했을까요? 그 배가 해적선이었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해’ 열심히 사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어떤 시스템에서 살아가는 것일까요? 내가 살아가는 이 시스템은 과연 좋은 것일까요, 나쁜 것일까요? 이것에 대한 진지한 물음 없이 산다면 그 사람의 미래는 자칫 아돌피 아이히만처럼 심판받게 될 수도 있습니다.


      아돌프 아이히만이 나치독일의 정체를 몰라서 그 지경이 되었듯이 우리도 우리 자아의 정체를 모르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사실 우리 안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악한 것입니다그것을 알게 되면 이제 주님의 목소리만을 따르게 됩니다우리 시스템을 나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께 순종하는 시스템으로 바꾸게 되는 것입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가 있습니다. 그는 늑대라는 본성과 욕구에 지배당합니다. 어두운 곳을 좋아하고, 익히지 않은 살코기를 좋아하며, 네 발로 걷고, 옷은 찢어버립니다. 이 욕구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연습하면 될까요? 안 됩니다. 자신이 인간임을 믿어야합니다. 자신의 본성이 무엇이라고 믿는 그 믿음이 자신을 지배하는 시스템이 되는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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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활을 가지고 과녁을 겨냥할 때 조준을 잘해야 합니다과녁에 정확하게 맞추지 못한 것은 잘 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조준을 잘못한 탓입니다조준을 잘못하면 설사 화살이 시위를 떠나지 않았어도 이미 과녁을 벗어난 것입니다마찬가지로 우리의 시선이 주님을 올바로 바라보지 못한다면 이미 죄를 범한 것입니다많은 경우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죄의 결과물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기 전부터 이미 탐스러운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먹기로 결심을 했으니 그것이 죄입니다지향이 얼마나 중요한지 잊지 않아야 합니다우리 마음이 진리를 향해 조준되었을 때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입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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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완성하러 오신 율법은 율법주의나 전통적인 관습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은총의 선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복음이 복음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엄격한 것 같지만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주는 은총에 의해 그를 실현할 수 있는 힘도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령의 선물을 받고 있기 때문에(로마 8,2-4 참조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율법을 실현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율법을 가르치실 때 글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은총으로 가르치시며기꺼이 배우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완전히 깨닫게 해줄 뿐만 아니라배운 것을 성실하게 실행할 마음을 주시고 또한 실제로 실행하도록 하신다즉 그분의 가르침은 하고자 하는 본성적 능력만이 아니라 원의 그 자체와 원의의 활동까지도 도와준다.”(성 아우구스티누스De gratia Christi et de peccato originali, in PL 44,359)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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