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2월 15일 연중 5주간 토요일

Margaret K 2020. 2. 14. 19:51

2020년 2월 15일 연 5주간 토요일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마르코 8,1-10)

 

“My heart is moved with pity for the crowd,
because they have been with me 
now for three days
and have nothing to ea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우상 숭배는 주님께 죄를 짓는 것이고, 이 때문에 예로보암 집안은 멸망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를 축복하시며 모든 군중을 먹이시는 기적을 베푸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눈여겨볼 단어가 있습니다. 

“사흘”입니다.
성경에서 사흘이 가장 중요하게 쓰인 대목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뒤에 부활하시기까지의 기간일 것입니다.이 점을 염두에 둘 때, 오늘 복음에 나오는 군중은 예수님과 닮아 있습니다.
군중은 사흘 동안 먹을 것도 없이 예수님 곁에 있다가 예수님의 기적으로 배부르게 되었습니다.
길에 쓰러져 죽을 곤경에 놓였던 이들이 다시 살아나게 된 셈입니다.
곧 죽음과 부활의 도식 안에서 이 군중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닮은 군중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다음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어떤 면에서 이들은 예수님을 따르며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미리 동참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연중 제5주간 목요일 복음에서 우리는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 이야기를 통하여 ‘부스러기 은총’과 ‘빵의 은총’에 대하여 묵상하였습니다.
곧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아닌 이들에게 내리는 부스러기 은총과는 비교할 수 없이 큰 빵의 은총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되새겼습니다.
바로 이 점에 비추어 오늘 복음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빵의 은총을 얻고 참생명을 누리려면 ‘사흘’이라는 숫자로 상징되는 ‘자기 포기’가 있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정신이 없으면 생명의 빵을 받아 모신다 하여도 참생명이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해야 비로소 빵의 은총에 더하여 일곱 광주리에 가득 찬 은총 또한 누릴 수 있으며, 이 세상에 일곱 광주리의 은총을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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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르 10,2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자라는 호칭은 재물로 얻게 된 것이지요. 결국, 재물로 자신을 정의하는 한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재물이 자신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자신을 다스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사실 이 세상의 재물이 우리를 지배하는 모습을 많이 봅니다. 돈 때문에 사람의 생명까지 빼앗는 극단적인 행동도 나오지 않습니까? 이렇게 재물이 지금을 힘들게 하고 하느님을 내 안에 모시지 못하게 합니다.

작년 어느 날 있었던, 로또 복권에 당첨된 어떤 형제님에 관한 뉴스가 생각납니다. 복권 당첨 후 가족들과 당첨금을 나눠 가질 정도로 서로 우애가 깊었지만, 연이은 사업 실패로 당첨 전보다 더 힘든 상황에 놓은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돈 문제로 동생과 싸워서 칼로 찔러 살해한 것입니다. 파산도 하고, 살인자라는 이름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재물은 순간의 만족만을 가져다줍니다. 그리고 이 재물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쓰다 보면 그 과정에서 아픔과 상처를 받는 다른 이들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사천 명이나 되는 사람이 주님께로 모였습니다. 사흘 동안 함께 했으나 그들은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았지요. 주님께서는 그들이 길에서 쓰러질세라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모든 것을 창조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에게 빵 몇 개를 가지고 있느냐고 묻기보다, 하늘에서 빵을 내려올 수 있도록 하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여기에서도 커다란 가르침을 전해주십니다.

가진 것을 내어놓는 우리의 역할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하느님의 능력을 보여 주시는 것이 아니라, 먼저 우리의 역할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재물이 자신을 지배하지 않도록 내어놓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빵 일곱 개로 사천 명가량의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도 남은 조각이 일곱 바구니가 될 정도로 차고 넘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해야 할 역할에 충실하십니까?
마음은 팔 수도 살 수도 없지만 줄 수 있는 보물이다(플로베르).



나의 일이 가장 어렵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서 술 한잔을 하게 되었습니다. 술이 꽤 들어갔을 때, 좋은 직장을 다니고 있는 친구가 자신의 어려움을 이야기합니다. 새로운 프로젝트로 인해서 여유가 없고 이런 일로 스트레스가 상당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 있던 한 친구가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나 다 너처럼 살고 싶어 해.”

너의 삶을 다른 사람들은 부러워하고 따라 하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말에 다른 친구들도 모두 동의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가진 것 많은 사람이 더 많은 욕심을 부리는 것 같고, 그냥 투정 정도로만 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에서 당사자는 억울해합니다.

기본적으로 나의 일이 가장 힘든 법입니다. 객관적으로 나를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늘 우리는 자기 자신을 낮추면서 더 나은 삶을 바라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위로받기보다 위로하는 데 더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을 본받는 것이고,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생계 걱정만 하기에는 인생이 너무 아깝대

-전삼용신부-


부활절을 앞두고 한 사람이 걱정 많은 표정으로 신부님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신부님, 저는 너무 근심 걱정이 많습니다. 없는 것이 많아 골머리가 아픕니다. 못 살겠습니다.”

신부님은 무슨 근심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부활절이 다가오는데 헌금 낼 돈도 없고 당장 생계를 위해 먹을 것을 살 돈도, 자신의 것은 물론 아내 옷, 자녀 옷을 살 돈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신부님은 물었습니다.

“헌금은 얼마를 내고 싶어요?” “5천원입니다.” “오늘 식재료비는 얼마쯤 들어요?” “1만원이요.” “형제님 옷은?” “5만원이요.” “아내 옷은?” “10만원이요.” “자녀 옷은?” “3만원이요.”

이 말을 듣고 신부님은 조용히 말했습니다.

“이제 형제님은 하느님께 195,000원을 달라고만 청하세요. 부활의 가장 큰 의미는 나의 아버지가 하느님인 사람으로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아버지인데 뭐가 걱정이세요.”

      오늘 복음은 빵 7개로 광야에 나온 백성 4천 명을 먹이고도 7광주리나 남은 기적을 보여줍니다. 누가 봐도 마르코 복음사가는 탈출기에서 40년 동안 광야를 지나며 가나안 땅에 들어갈 백성으로 새로 창조되는 과정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7은 창조의 시간입니다. 하느님은 광야로 나온 당신 백성을 새롭게 창조하여 가나안이라는 안식으로 이끄십니다.

      이 과정에서 광야에 나온 백성의 자격은 ‘생계를 걱정하지 않는 사람들’이란 보이지 않는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들은 대책 없이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생계를 걱정하는 사람들이었다면 사흘 동안이나 광야로 예수님을 따라다닐 수 없었다는 것이고 새로운 당신 백성으로 창조되지도 않았을 것이란 말도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둔 사람들입니다. 생계걱정을 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입니다. 이 생계걱정이 우리가 참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데 얼마나 큰 장애가 되는지 모릅니다.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연합군은 전쟁고아들을 위해 막사를 제공하여 그들을 적당히 정착시킬만한 장소를 물색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자라고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막사의 장교들은 아이들이 밤에 거의 잠을 자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당황했습니다. 장교들은 왜 고아들이 밤에 잠을 자지 못하는지 심리학자들에게 그 문제를 의뢰했습니다. 마침내 그 심리학자들은 매일 밤,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었을 때 늘어선 침대 사이로 한 사람이 다니면서 아이들의 손에 작은 빵조각 하나씩 쥐어주게 했습니다. 매일 밤 빵조각을 쥐는 일로써 하루를 마감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며칠 안 되서 그들은 밤새도록 깊은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낮 동안에 충분히 음식을 먹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내일은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한 염려 때문에 오늘 가진 것을 즐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자기 손에 빵조각을 챙겨 쥐고서야 그들은 적어도 그 다음날 아침 식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됨을 알고 잠을 잘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빵 한 덩이씩을 쥐어주십니다. 당신께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은 생계걱정에서는 자유로워야 합니다. 엘론 머스크는 돈을 잃는 것이 두려워 투자를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이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한 달을 30달러로 살아보는 실험을 했습니다. 한 달을 3만원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고는 모든 재산을 투자할 수 있었고 지금의 테슬라를 만든 것입니다.

      빵의 기적은 지금도 일어납니다. 우리 손에도 내일 먹을 빵이 주어져있습니다. 생계에 대한 걱정은 마치 가시나무처럼 우리 숨통을 조여 말씀이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둔 이들은 생계걱정에서 자유로워야합니다. 생계걱정만 하다 죽기에는 인생이 너무 아깝습니다.


-조재형신부-


지난 설날입니다. 강론 중에 1982125일에 대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그날도 설날이었습니다. 그날 신학교에서 합격자 발표를 했습니다. 요즘은 인터넷으로 확인하지만 당시에는 학교로 가서 벽보에 적힌 합격자 명단으로 확인했습니다. 저는 저의 이름이 적혀있는 걸 보았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했고,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29년째 사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아는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고, 야고보와 요한은 배와 아버지를 두고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가진 것이 아직 많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미사를 마치고 교우들과 인사를 하는데, 한 분이 제게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신부님 강론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1982년에 신학교에 입학했으면 소띠인가요? 그럼 나이가 어떻게 되시나요?’ 제가 말하고 싶었던 건,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했지만 제자들처럼 온전한 몸과 마음으로 응답하지 못했음을 반성하고 있다는 거였습니다. 그럼에도 사제직에 불러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는 거였습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예로보암은 하느님께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았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서 예배하는 대신에 베텔과 단으로 가서 금송아지에 예배드리도록 했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어 베텔과 단으로 가서 예배드리는 것은 문제의 해결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예로보암은 자신의 기준과 잣대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찾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은 예배의 장소와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조상들처럼 죄를 지었고, 불의를 저지른 것에 대해서 회개하는 거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끌어 주신 약속의 땅에 대해서 감사하는 거였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거였습니다. 온 마음과 온 정성과 온 생각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거였습니다. 같은 마음과 정성과 생각을 다해서 이웃을 사랑하는 거였습니다. 생각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고, 삶을 바꾼다면 예배의 장소와 형식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사다리를 오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다리의 방향이 어디를 향하느냐가 중요했습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를 보면 교리와 신학의 문제로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삼위일체, 성모님의 호칭, 성화상, 교황의 지위, 전례에 대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교회는 공의회를 통해서 교리와 신학을 정립했습니다. 때로 아픔과 결별이 있었지만 교회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 하느님의 뜻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간절하게 기도하셨던 것처럼 교회는 하나 될 수 있는 길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분열과 갈등의 뿌리는 교리와 신학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교회의 부패와 독선이었습니다.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세상의 방법을 이용했습니다. 대화와 타협이 아니라 단죄와 파문으로 새로운 기운과 쇄신의 의지를 꺾으려 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은 소수의 전유물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의 직책과 직분으로 은총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하느님을 사랑했는지, 얼마나 이웃을 사랑했는지, 얼마나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는지, 얼마나 자주 자신의 잘못을 성찰하고 뉘우쳤는지에 따라서 하느님의 은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두 시선을 보았습니다. 하나는 사람들을 측은히 여기는 예수님의 시선입니다. 다른 하나는 사람들을 일로 대하는 제자들의 시선입니다. 사람들을 일로 여기는 제자들은 먼저 걱정이 앞섭니다. 사람들을 돌려보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돈이 많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일로 여기는 마음과 걱정하는 마음이 만나면 놀라운 표징은 나타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을 측은하게 여기시는 예수님께서는 먹을 것을 나누어 주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니다. 측은히 여기는 마음과 감사의 마음이 만나니 놀라운 표징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아낌없이 모든 것을 내어주는 비움의 삶, 나눔의 삶이셨습니다.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처럼 천국에서 빛을 내는 모든 성인 성녀들은 바로 비움의 삶, 나눔의 삶을 사셨습니다


차별 없이 배불리 먹었다

  -반영억신부-  

 

예수님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말씀도 듣고 치유의 은혜도 입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거기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기위해 모인 군중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려고 하였습니다.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저들 가운데에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 ”하시며 걱정을 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겠습니까?(마르8,4)하고 말하였습니다. 지극히 인간적인 계산을 하였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 놓을 생각은 않고 머리로 계산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빵이 몇 개인지 물고기가 몇 마리인지 물으시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감사를 드리고 축복하신 다음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나누어 주라고 이르셨습니다. 사천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나 되었습니다. 아무리 적은 것이라도 주님의 손을 거치면 풍요로워집니다. 그리고 그 기적은 먼 옛날이 아니라 오늘도 지속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말씀과 성체성사를 통하여 우리를 배 불리시고 영적으로 풍요케 하십니다. 그러므로 자주 성경을 읽고 영성체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배를 채우는 빵도 중요하지만 영혼을 채우는 빵이 얼마나 소중한지요.

    

 가난한 이들의 성자로 불리셨던 마더 데레사 수녀님에게 어떤 기자가 질문을 했습니다. “지구상에 가난한 사람은 왜 있습니까?” 수녀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누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가난을 해결할 수 있습니까?” 수녀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우리가 서로 나누면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항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자비라도 베풀면 세상은 덜 냉랭해지고, 한결 따뜻하고 올바르게 될 것입니다.” 많고 적고를 떠나서 물질이든 영적인 것이든지 서로 나누어서 풍요로워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언제나 풍성하게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재료를 사용하였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함으로써 인간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또한 하늘을 우러러 감사를 드리신 행위를 통해 능력은 아버지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과 당신이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물러 있음을 말해 주셨습니다. 더군다나 먼데서 온 사람들의 걱정을 통해, 이방인들도 예수님의 배려에 배제되지 않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구분과 차별이 없이 풍요롭게 하시고 넉넉하게 채워주셨습니다.

    

 유다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하지 않으시고 모두를 풍요롭게 해 주시는 능력의 주님을 모시고 있음을 기뻐하고 언제나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너희에게는 빵이 몇 개 있느냐?’ 

-이영근신부-


군중이 모여 있었는데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저 군중이 가엽구나.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마르 8,2-3)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소중히 여기시고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이 청하지도 않는데도 이미 먹이셨고, 미처 바라지도 않는데도 이미 용서하셨고, 가엷게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에게는 빵이 몇 개 있느냐?’

그러자 그들이 일곱 개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마르 7,5)


그렇습니다. 빵은 이미 우리에게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일깨워주시고 확인시켜 주십니다. 사실, 그들에게는 빵이 이미 일곱 개나 있었습니다. 일곱은 완전함의 숫자입니다. 곧 이미 차고 넘치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이 없거나 부족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것을 모르고 있거나 인정하지 않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있는 것을 없다고 여기는 것은 무지요, ‘있는 것의 가치를 모르는 것은 어리석음일 것입니다. 만약, 오늘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하느님의 말씀과 사랑을 보지 못하고 또한 찾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지요 어리석음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그 이 있습니다. 말씀의 빵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은총입니다. 있는 것을 보는 눈이 곧 감사의 눈이요, 관상의 눈입니다. 우리가 이 빵의 가치를 진정으로 안다면, 벅찬 감격에 까무러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을 찾아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름 아닌 우리에게 있는 바로 그 빵으로 감사드리셨고, 제자들은 그 빵을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이 을 먹었습니다. 성찬의 전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을 먹을 뿐만 아니라, 말씀의 전례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먹었습니다. 그래서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는 말씀을 듣는 것을 일컬어 파스카의 어린 양을 먹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또 오리게네스는 말합니다.

성경 독서 중에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람 에제키엘처럼 말씀의 두루마리를 먹었습니다(에제 3,3).

그런데 만약 우리가 먹고도 먹은 줄을 모른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먹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살아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말씀을 나누는 일, 곧 복음 선포가 될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성경을 풀이해 주는 것은 빵을 떼어 주는 것과 같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로 -

저 군중이 가엽구나.”(마르 8,2)


주님!

속 깊은 곳을 환히 보시고, 깊이 숨겨진 말도 다 들으소서.

제 마음 안에, 당신의 빛을 비추소서.

약한 이들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게 하소서.

제 가슴 속에, 가엾이 보는 눈과 마음을 주소서. 아멘.


빵 일곱 개의 기적: 나눔

-조욱현신부-

 

복음: 마르 8,1-10: 사천 명을 먹이시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2) 광야에서 허기지셨던 적이 있는 주님께서 지금은 생명의 빵으로 인간을 먹이시고 계시다. 군중들은 사흘째 주님을 따라 다니고 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길에서 쓰러질까 염려하셔서 굶겨 보내시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제자들도 난감하였다. 그리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많은 군중을 먹이려 하니 빵을 한 덩어리씩 나누어준다고 하더라도 돈이나 그 부피가 만만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4).

 

더구나 저들 가운데에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3)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난감해하는 것이다. 아직은 주님을 잘 몰랐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지만 어떤 면에서는 우리도 인간의 상식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때에 그 문제를 빨리 잊어버리고 외면하고 싶은 그 마음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상의를 하고 계시며 희생을 요구하신다.

 

그 요구는 다른 것이 아니라, 지금 자기가 가지고 있는 빵이 얼마나 되는지 내어놓는 것이었다. 제자들은 일곱 개 있습니다.”(5)하고 대답하면서 그것을 예수님 앞에 내어놓았다. 빵 일곱 개는 그 많은 군중 앞에 아무것도 아닌 양이었다. 그러나 기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 빵을 주님 앞에 내어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 빵을 다른 사람과 나누려는 마음이 없어서 내어놓지 못했다면 기적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빵 일곱 개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으며 제자들로 하여금 군중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셨다. 제자들의 나눔과 주님의 축복이 그 큰 기적을 이룰 수 있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바로 내가 가진 것을 나눌 수 있을 때, 주님의 축복도 함께 따라올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내가 나누지 못할 때 절대로 기적은 일어날 수 없다.

 

본당에 있을 때, 나는 초등학교 어린이들을 통하여 이러한 기적이 이루어지는 것을 본다. 매월 자신의 용돈을 아껴 1000원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희생하는 것을 통해, 그리고 설날 받은 세뱃돈의 많은 양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희생하는 것을 통해, 그리고 우리 모든 신자가 어려운 가운데서도 기쁘게 하느님께 바쳐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어려운 본당이나 단체를 도와주는 거기에서 빵의 기적을 보며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우리 라자로 마을에서 하는 사업이 바로 이 빵의 기적을 체험하는 사업이다. 후원회원들의 일곱 개의 빵이 우리 마을을 위해 기적을 일으키고, “그대 있음에음악회의 빵 일곱 개가 해외의 한센인들에게 기적을 보여주고 있음을 우리는 체험하고 있다.

 

많이 가졌기 때문에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빵 일곱 개밖에 되지 않는 적은 것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나누려고 내어놓을 수 있어서 이러한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지금도 하느님께서는 당신 혼자 일하시기보다 우리의 협조를 원하신다. 우리가 가진 것을 가지고 하느님의 뜻에 어떻게 협조하는가에 따라 하느님께서는 보다 큰일을 우리에게 이루어주신다는 사실을 믿음 안에서 체험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마르 8, 8)

-한상우신부-

나누어야 할 것을
나누지 않아
배고픈 우리의
삶입니다.

나누어야 할 것은
우리의 것이 아닌
서로를 배부르게 할
주님의 것입니다.

나누는 관계안에
하느님 나라가
있습니다.

배고픈 우리를
주님께서
배부르게하십니다.

성체성사는
우리모두를
배부르게하는
생명의 성사입니다.

생명은 생명의
빵이 되는 것이며
나눔의 빵이 되는
것입니다.

생명을
구원하는 것은
언제나 생명의
빵입니다.

생명의 빵은
사랑입니다.

공동체를
살리는 길은
빵이 되는
용서와 사랑입니다.

성체성사는
사람을 배부르게
하는 것이 생명의
사랑임을
가르쳐주십니다.

생명과 사랑
그리고 사람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들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예배를 만납니다.

"그 무렵 많은 군중이 모여 있었는데"(마르 8,1).

이 이야기는 어제와 같이 이방지역을 배경으로 합니다. 예수님 곁에 모여든 군중은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에 대한 가르침을 얻으며 "사흘 동안이나"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광야에 머물렀지요.

사천 명가량이나 되는 무리가 모인 광야를 떠올려 봅니다. 인가도 시장도 없는 곳에서 사흘이나 머물렀으니 이제는 스스로를 지탱할 자원이 남아있을 리 없습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마르 8,2).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 마음을 열어보이십니다. 마음에 흐르는 연민의 사랑에 제자들도 동참하기를 바라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겠습니까?"(마르 8,4) 하고 반문합니다. 제자들의 답변은 냉정히 들리긴 해도 틀린 말은 아니지요.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마르 8,5)
"또 제자들이 작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마르 8,7).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이 소유한 바에 관심을 가지십니다. 자의건 타의건 먼저 자기 것을 내놓은 이들은 제자들입니다.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나 되었다"(마르 8,8).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올리신 "감사"(마르 8,6)와 미소한 양식에 베푸신 "축복"(마르 8,7), 그리고 제자들을 통한 "나눔"이 큰 기적을 이룹니다. 보잘것없는 소량의 빵과 물고기가 예수님의 연민과 기도를 통해 사천 명을 먹이고도 남는 잔치상으로 변하게 된 것이지요.

굶주린 큰 무리의 사람들이 어디서 나온 줄도 모르는 양식을 받아들고 서로 나누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받는 이들이나 나누는 이들 모두 영혼과 육신의 허기를 채우며 흥겨워하고 흡족해합니다. 이렇게 이방인 지역 광야에서 펼쳐진 기적의 현장이 흡사 말씀을 듣고 빵을 나누는 우리의 미사를 떠올리게 합니다.

제1독서에서 우리는 예로보암의 근심을 읽습니다. 왕위 정통성에 자신이 없는 그는 솔로몬의 아들 르하브암에게서 갈라진 북쪽 지파들을 다스리면서 백성의 마음이 다시 예루살렘을 향할까 걱정하지요.

"여러분의 하느님이 여기에 계십니다"(1열왕 12,28).

그는 금송아지 둘을 만들어 베텔과 단에 두고 여기서 예배하라고 백성에게 이릅니다. 사실 여기까지는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보통 고대 종교에서 신상을 만들 때에는 주조된 짐승 위에 놓습니다. 사실 이 송아지도 그 자체가 신이라기보다 그 위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떠받치는 밑받침 정도에 불과했지요.

그런데 단지 예루살렘과 구분된 장소를 제공하려는 예로보암의 의도는, 그곳에 온 이스라엘 백성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아니라 밑받침인 송아지 상을 신으로 여겨 경배하는 바람에 죄로 굳어지고 맙니다.

게다가 그는 "레위 자손들이 아닌 일반 백성 가운데에서 사제들을 임명"(1열왕 12,31)합니다. 얼핏 보면 기회의 균등화나 공정화인 듯 보이나, 어쩌면 유다 자손이 아니면서 임금이 된 그가 레위 자손의 사제직 세습이라는 정통성 역시도 부인하고 파괴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리시고, 말씀으로 사람들을 위로하시며, 빵을 축복해 사람들을 배불리십니다. 사제직의 원형이 오늘 우리가 만나는 그분에게서 드러나지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면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에게서 왕직과 사제직, 예언직이 하나의 본류로 합쳐지고 있습니다.

또 예루살렘이 아닌 이방 지역 광야에서 이 축제가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합니다. 이는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요한 4,21)는 예수님의 말씀을 반영합니다. 이제는 장소가 아니라, 신분이 아니라, 지파나 가문이 아니라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요한 4,24) 하는 때가 도래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이 정한 사제 지파와 가문의 규정을 뛰어넘는 사제이십니다. 그분 사제직의 완전성은 당신 자신을 친히 제물로 바치는 희생 제사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사랑하는 벗님, 예수님은 많건 적건 제자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가진 바를 내어놓게 하심으로써 이 제사의 완전성으로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얼마 안 되는 자기 소유가 내어놓는 과정을 통해 엄청난 기적이 되는 것을 확인한 제자들은 아마도 결코 이 맛을 잊지 못하고 결국 그 길을 갈 겁니다.

그렇습니다! 직무 사제직이건 보편 사제직이건 자신을 내어놓고 바치는 희생 제사와 하느님께 올리는 감사 기도, 백성을 향한 끊임없는 축복으로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이 세상이라는 광야에서 우리는 감사와 축복과 나눔으로써 세상을 위한 사제직에 참여합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 주님께 진실한 예배를 바치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하느님 사랑에 물줄기를 대고   
-김찬선신부-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지난번 오천 명 먹이신 기적 때도 저의 관심은 주님의 가엾어하심이었는데
오늘 사천 명 먹이신 기적 얘기도 주님의 가엾어하심에 관심이 갑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오천 명과 사천 명을 먹이셨는지 그 비결이나
그 능력의 대단하심에 더 관심이 갔던 과거보다는
나이를 먹을수록 주님의 연민과 사랑에 더 관심이 가는 겁니다.

제가 무척 좋아하는 지혜서 11장 23-4절을 보면
하느님께서 자애로우신 것은 전능하시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에 모든 사람에게 자비하십니다.
당신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시며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하나도 혐오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다하실 수 있을 정도로
능력이 있으시기에 모든 것을 사랑하실 수 있다는 것은 맞는 말이고,
그래서 능력이 사랑보다 앞서고 또 중요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래도 제게는 능력의 하느님보다 사랑의 하느님이 더 좋습니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악령은 그 능력을 사랑하는 데 쓰지 않고
존재를 파괴하는 것에 쓰는 것을 생각하면
능력의 하느님보다 사랑의 하느님이 당연히 더 좋고,
능력의 하느님이 사랑의 하느님이시라는 것은 너무도 다행입니다.

그런데 가엾은 마음에 더 관심이 가는 것과는 다르게
저의 가엾은 마음의 폭은 점점 좁아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50대 중반까지만 해도 저는 정말 겁이 없었습니다.
바자회나 음악회 한번 하는 것은 별로 겁나지 않았고,
평양에 하루에 1,500명을 먹이는 노동자 식당과
종합 복지관을 세우는 것도 별 걱정하지 않고 해냈습니다.

그러니까 과거의 저는 거의 메시아 콤플렉스 수준이라고 할 정도로
세상의 모든 십자가를 내가 다 져야 한다는 듯이 연민의 마음도 컸지만
그에 못지않게 사업 배포도 컸고 추진력도 컸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능력도 떨어지고 겁도 많이 생겨서
이제는 많은 사람에게가 아니라 몇몇 사람에게,
'대담하게'가 하니라 '섬세하게'로 관심이 바뀌는 것 같습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힘도 떨어지고 호르몬도 여성 호르몬이
점점 많아져서 그런다고 하는데 저도 그런 것에서 예외는 아닌가 봅니다.
그러니 이 나이 현상을 비관적으로 생각거나 억지로 반대로 행동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순리적으로, 아니 그보다는 섭리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겁니다.

그리고 주님은 신적인 사랑을 지니셨기에 5천 명과 4천 명을 먹이면서도
한 마리 양도 소홀히 하지 않고 찾아가는 착하시고 좋으신 목자이시지만
저는 그 정도의 사랑을 가지고 있지 못하니 이제는
사랑이 작을지라도 섬세하게 사랑하는 것이 저의 사랑이어야 하겠습니다.

여기까지 묵상을 하다가 문득 '이게 무슨 빌어먹을 얘기냐?'하는
나무람이 속에서부터 올라와 저를 후려쳤습니다.
인간적으로는 그렇고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연결되어 있지 않은 인간적인 사랑은 나이 먹을수록
방전된 건전지처럼 고갈될 수밖에 없고,
잘려나간 가지처럼 말라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그렇다면 더더욱 인간적인 사랑에 의지하지 않고,
더욱더 하느님 사랑에 물줄기를 대겠다고 해야지
나이 타령이나 하고 있으니 저주받아 마땅합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2월 10일 토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마르코 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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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복음에서 눈여겨볼 단어가 있습니다. 

“사흘”입니다.

진정으로 빵의 은총을 얻고 참생명을 누리려면 ‘사흘’이라는 숫자로 상징되는 ‘자기 포기’가 있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정신이 없으면 생명의 빵을 받아 모신다 하여도 참생명이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해야 비로소 빵의 은총에 더하여 일곱 광주리에 가득 찬 은총 또한 누릴 수 있으며, 이 세상에 일곱 광주리의 은총을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한재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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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빵 7개로 광야에 나온 백성 4천 명을 먹이고도 7광주리나 남은 기적을 보여줍니다. 

누가 봐도 마르코 복음사가는 탈출기에서 40년 동안 광야를 지나며 가나안 땅에 들어갈 백성으로 새로 창조되는 과정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7은 창조의 시간입니다. 

하느님은 광야로 나온 당신 백성을 새롭게 창조하여 가나안이라는 안식으로 이끄십니다.


 이 과정에서 광야에 나온 백성의 자격은 ‘생계를 걱정하지 않는 사람들’이란 보이지 않는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들은 대책 없이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생계를 걱정하는 사람들이었다면 사흘 동안이나 광야로 예수님을 따라다닐 수 없었다는 것이고 새로운 당신 백성으로 창조되지도 않았을 것이란 말도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둔 사람들입니다. 생계걱정을 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입니다. 이 생계걱정이 우리가 참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데 얼마나 큰 장애가 되는지 모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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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두 시선을 보았습니다하나는 사람들을 측은히 여기는 예수님의 시선입니다다른 하나는 사람들을 일로 대하는 제자들의 시선입니다사람들을 일로 여기는 제자들은 먼저 걱정이 앞섭니다사람들을 돌려보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돈이 많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일로 여기는 마음과 걱정하는 마음이 만나면 놀라운 표징은 나타날 수 없습니다사람들을 측은하게 여기시는 예수님께서는 먹을 것을 나누어 주라고 하십니다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니다측은히 여기는 마음과 감사의 마음이 만나니 놀라운 표징으로 나타났습니다예수님의 삶은 아낌없이 모든 것을 내어주는 비움의 삶나눔의 삶이셨습니다밤하늘의 반짝이는 별처럼 천국에서 빛을 내는 모든 성인 성녀들은 바로 비움의 삶나눔의 삶을 사셨습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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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한 이들의 성자로 불리셨던 마더 데레사 수녀님에게 어떤 기자가 질문을 했습니다. “지구상에 가난한 사람은 왜 있습니까?” 수녀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누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가난을 해결할 수 있습니까?” 수녀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우리가 서로 나누면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항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자비라도 베풀면 세상은 덜 냉랭해지고한결 따뜻하고 올바르게 될 것입니다.” 많고 적고를 떠나서 물질이든 영적인 것이든지 서로 나누어서 풍요로워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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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는 빵이 이미 일곱 개나 있었습니다일곱은 완전함의 숫자입니다곧 이미 차고 넘치게 있는 것입니다그러니 그들은 이 없거나 부족해서가 아니라단지 그것을 모르고 있거나 인정하지 않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우리에게는 이미 그 이 있습니다곧 말씀의 빵이 있습니다그것은 이미 은총입니다이 있는 것을 보는 눈이 곧 감사의 눈이요관상의 눈입니다우리가 이 빵의 가치를 진정으로 안다면벅찬 감격에 까무러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우리는 하느님의 사람 에제키엘처럼 말씀의 두루마리를 먹었습니다(에제 3,3).

그런데 만약 우리가 먹고도 먹은 줄을 모른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이제 우리가 먹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살아야 할 일입니다그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말씀을 나누는 일곧 복음 선포가 될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성경을 풀이해 주는 것은 빵을 떼어 주는 것과 같다.” 아멘.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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