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14일 연중 제5주간 금요일
2020년 2월 14일 연중 제5주간 금요일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치릴로 성인과 메토디오 성인은 형제로, 그리스의 테살로니카에서 태어나 터키의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교육을 받았다. 두 형제는 전례서들을 자신들이 창안한 알파벳의 슬라브 말로 번역하였다. 둘은 체코 모라비아의 슬라브족에게 파견되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헌신적으로 일하였다. 로마로 돌아간 두 형제 가운데 치릴로 성인은 수도 서원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869년 무렵에 선종하였다. 메토디오 성인은 교황 특사로 모라비아에서 활동하다가 885년 무렵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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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쉰 다음
“에파타”하고 말씀하셨다.
“열려라.”라는 뜻이었다.
그러자 그는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
(마르 7,31-37)
He put his finger into the man’s ears
and, spitting, touched his tongue;
then he looked up to heaven and groaned,
and said to him,
“Ephphatha!” (that is, “Be opened!”)
And immediately the man’s ears were opened,
his speech impediment was removed,
and he spoke plainly.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아히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솔로몬의 손에서 나라를 찢어 그중에 한 지파만을 솔로문의 아들에게 남겨 둘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어루만져 주시자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렸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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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예수님께서는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단 한 번이 아니라 여섯 가지 행위를 통하여 고쳐 주십니다.
이를 살펴볼 때 우리도 영적으로 더욱 잘 듣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소음이 가득한 공간이 아니라 침묵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신 이유는, 침묵이 더 잘 들을 수 있는 능력을 주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십니다.
이는 귀를 열려는 행위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나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을 귀를 열고 들어야 합니다.
기도는 그저 기도서에 나온 기도문을 줄줄 읽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기도란 ‘말함’보다도 ‘들음’이 핵심입니다
.셋째, 침을 발라서 혀에 손을 넣으십니다.
이 행위는 마치 어린아이를 위하여 엄마가 먹을 것을 잘게 씹어서 먹여 주는 행위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잘 알아듣고, 이를 마음에 새기도록 영적인 힘 곧 성령을 집어 넣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의 마음은 정화되고 우리는 새 힘을 가질 자세를 갖춥니다.
넷째, 하늘을 우러러보십니다.
아버지 하느님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단둘이 만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다섯째, 한숨을 내쉬십니다.
우리의 처지를 깊이 공감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린 다음, 우리의 처지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에파타!”라는 말씀을 통하여 비로소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리게 됩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그가 말을 제대로 하도록 치유하시고서는 말을 하지 말라고 이르십니다.
쓸데없는 이야기, 예수님께서 원하지 않으시는 말은 아무리 중요한 이야기처럼 여겨지더라도 소리 내지 말고 침묵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말을 잘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어떤 말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것이 귀와 입과 마음이 열린 사람이 지녀야 할 자세입니다.
그러한 자세를 갖추기 위하여 위의 여섯 단계를 다시금 되새깁시다.
(한재호 루카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이런 자신의 모습이 너무 괴로워서 정신과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이 의사는 그러면 집에서 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고, 그녀는 제비꽃을 키우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시시한 취미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의사의 처방은 조금 이상했습니다. 교회에서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사람들에게 자신이 키운 제비꽃을 선물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방법을 따르면서, 실제로 자존감을 회복할 수가 있었답니다. 제비꽃을 선물 받은 사람의 기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시시한 취미라는 본인의 생각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존감은 의미를 찾아 나감에 따라 회복될 수 있습니다. 의미를 찾아 나가면서 ‘나’라는 굴레를 열고 세상으로 힘차게 나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쳐 주십니다. 그런데 그 방식이 이제까지 보던 것과 다릅니다.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고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댑니다. 이런 행동을 왜 하셨을까요?
당시에 귀먹은 사람은 절대로 고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교부는 ‘귀머거리 마귀는 절대로 쫓아낼 수 없다. 이는 주님만이 가능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이 사람은 누구도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려서 모든 자존감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다른 이처럼 말씀으로, 또 손을 얹어서 고쳐 주신 것이 아니라 친밀한 행동을 취하시지요. ‘너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다.’를 몸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에파타!” 곧 “열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열려야 합니다. 하지 못한다면서 스스로 빠져 있는 절망의 문을 과감히 열고 나가야 합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입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찾는 것이 우리 삶에 하나의 의미를 찾는 긴 여행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특별히 사랑하는 ‘나’라는 사실을 찾았을 때, 닫혀 있는 절망과 좌절의 문을 활짝 열 수 있습니다.


어느 배가 바다를 항해하다가 폭풍우에 길을 잃고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배의 모든 것이 파괴되고 고장 나서 그냥 정처 없이 바다 위를 떠돌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나가는 배만 있기를 간절히 기도할 뿐이었지요. 그런데 커다란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식량은 어느 정도 있었지만, 먹을 식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바닷물을 마실 수는 없으니까요. 여기에 폭풍우 후에 쨍쨍 내리쬐는 햇빛은 그들의 갈증을 더욱더 심하게 느끼게 했습니다.
사흘쯤 지났을 때 드디어 지나가는 배를 발견하게 됩니다. 구조요청을 했고, 지나가는 배는 멈춰서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을 구출했습니다. 표류자들은 너무 목이 말라서 “물 좀 주세요. 사흘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어요.”라고 부탁합니다. 이에 선원들은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말합니다.
“여기는 강이에요. 이 강물을 마시면 되었잖아요.”
바다에 표류하다가 자기들도 모르게 강으로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몰랐기에 계속해서 물을 마시지 못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도 이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구원의 길이 바로 주님 곁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주님을 보지 못하고 또 찾으려고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

주님께 받은 은총이 자기자랑이 되지 않게 하라
-전삼용신부-
인도의 시성 타고르의 시 ‘기탄잘리’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죄수여, 말해주렴, 누가 그대를 가두었는지?”
“그것은 내 주인이 옵니다.”
죄수는 말했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돈이나 권력으론 누구보다도 뛰어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 보물창고에는 왕에게나 어울릴 돈을 모아 놓았지요. 그런데 깨어보니 나는 보물창고에 갇힌 죄수가 되었더군요.”
“죄수여, 말하렴. 누가 이 끊어지지 않는 쇠사슬을 만들었는지?”
“그것은 나였어요.”
죄수는 말했습니다.
“내가 이 사슬을 정성껏 만들었습니다. 나는 내 불굴의 힘으로 온전한 자유를 누리도록 이 사슬로 세계를 사로잡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지요. 이윽고 사슬이 다 만들어져 끊을 수 없을 만큼 튼튼하게 되자 이 몸은 사슬에 꽉 잡혀 매여 있더군요.”
예나 지금이나 자만은 폐망의 지름길이라는 진리는 변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현자들은 더 많은 것을 가질수록 더 겸손해지려고 노력하기 위해 저런 글들을 남겼습니다. 이는 하느님께로부터 천상은총을 받는 우리들도 명심해야 할 사실입니다. 자칫 은총이 내가 받을만한 자격이 있어서 받았다고 자만하여 그 은총이 오히려 저주가 되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합니다. 손을 얹는 행위는 축복을 주는 예식과도 같은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손을 얹는 대신 당신 손가락을 두 귀에 넣으셨다가 손가락에 침을 발라 그의 혀에 대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한숨을 내쉬신 다음 “열려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모든 행위는 ‘성령’과 관련됩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는 성령의 상징으로, 예수님 몸에서 나오는 물, 기름부음, 불, 구름과 빛, 안수, 손가락, 비둘기, 숨 등을 들고 있습니다(694-701항 참조).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원하시는 것과 다른 모습으로 병자를 치유하셨지만 어쨌든 그 힘은 당신 몸에서 나오는 성령의 힘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당신 죽음을 통해 나오시는 힘입니다.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우리는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성령을 받아 마셨다”(1코린 12,13).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또한 샘에서 물이 솟아나듯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라는 샘에서 솟아나는 생수이시며, 이 생수는 우리 안에서 솟아올라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가톨릭교회교리서」, 694항)
다시 말해 우리가 받는 은총은 그리스도의 수난에서 오는 것이지 우리가 어떤 공로가 있어서 당연히 받는 품삯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칫 은총을 받고 그 은총이 자신의 공로에 의한 것인 양 자랑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처음엔 그런 의도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 받은 은총을 자꾸 이야기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어떤 합당한 이유가 있어서 그 은총을 받은 것처럼 은총을 자신을 높이는 도구로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미 받은 은총이야 변함이 없을 수는 있어도 영혼은 그 받은 은총 때문에 오히려 더 상태가 안 좋아질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예는 사울이나 다윗, 솔로몬 등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 복음에서 이런 이유로 예수님께서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순종하지 않고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고 합니다. 자신들의 생각이 예수님의 명령보다 더 옳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렇게 은총이 독이 되는 수가 있습니다.
저와 같이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이런 유혹에 쉽게 빠집니다. 어느 순간에 주님의 진리를 전파하는 것과 제 자신을 높이는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제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게 됩니다. 그러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란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 뜨끔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아니라 나의 이름이 빛나게 하며 살았구나.’를 느끼며 정신 차리려고 합니다. 역시 나를 돌아보는 데는 기도만한 것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려면 그분의 뜻이 나를 통해 이루어지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 뜻이 죽고 교만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은총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은총을 잘 유지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나를 통해 이루어지게 하고 있는지를 살피고 내 뜻이 그분의 뜻을 넘지 못하게 해야 은총이 독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한국에서는 ‘이동축일’과 ‘관면’이 있었습니다. 한국 순교자 대축일이나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축일이 평일이면 주일로 이동해서 축일을 지냈습니다. 많은 교우들이 축일을 함께 기억하고, 함께 기도하며, 함께 기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추석이나 설날이 금요일인 경우에는 금육에 대한 관면이 있었습니다. 민족의 명절에 신앙인이라는 이유로 금육하는 것이 신앙인이 아닌 가족과 이웃에게 위화감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보편 교회의 교리와 법이 있지만 개별 교회의 전통과 풍습을 함께 존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나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나와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식(移植)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복음화(福音化)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이 복음화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복음화 하기보다는 이식하려했을 때 문화적인 충돌과 마찰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의 신학과 교리는 유대교, 그리스 철학, 로마의 제도와 만나면서 더욱 풍요로워졌고, 발전하였습니다. 중국에 선교사로 갔던 예수회 회원들은 ‘색은주의(索隱主義, figurism)’를 이야기했습니다. 중국의 문화와 전통, 아시아의 철학과 사상은 서양의 문화와 전통, 철학과 사상에 견주어 결코 뒤지지 않았습니다. 서양의 학문에 함께 하셨던 하느님의 자비하심은 동양의 학문에도 함께 하셨음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이런 사상적인 토대로 아시아의 문화와 전통과 대화하였습니다.
미국에서 처음 ‘설날’을 지냈습니다. 한국에서는 민족의 명절이고, 공휴일이기에 설날을 기념하는 전례를 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미국은 설날이 명절이 아니고, 공휴일도 아닙니다. 제가 있는 한인 공동체는 설날의 의미를 충분히 살리면서 보편 교회의 규정에도 부합되는 전례를 함께 하였습니다. 저는 음력 생일, 양력 생일, 주민등록상의 생일이 있습니다. 세례명으로 주어진 축일도 있습니다. 굳이 하나로 통일하지 않았어도 생활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생일의 진정한 의미는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는 겁니다. 부모님의 사랑에 보답하면서 기쁘게 사는 겁니다. 축일의 진정한 의미는 수호성인의 전구를 청하고, 수호성인의 삶을 따라가는 겁니다. 하느님의 선물로 이 세상에 왔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겁니다. 언젠가 다시 하느님께 갈 수 있도록 하느님의 뜻에 맞게,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도록 사는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에파타!” 곧 “열려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시작하였던 성 요한 23세 교황께서도 교회의 창문을 열자고 하였습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통하는 주님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 가르침은 낯선 곳의 긴장도 쉽게 풀어주고, 새로운 만남을 곧 친숙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것만 잘 지키면 우리는 닫힌 문을 열수 있을 겁니다. “남에게 원하는 대로 남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먼저 말하기 전에 먼저 듣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충실하게 하고,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 둘을 식별하는 지혜를 청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복음을 선포하고, 주님은 그들과 함께 일하시며 표징으로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네.”

귀를 열어 주시고 혀를 풀어주십시오
-반영억신부-
귀가 있어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면 그는 귀머거리 입니다. 입이 있어도 하느님에 관해 말할 수 없다면 그는 벙어리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큰 복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생각하고 그분의 현존을 깨닫기도 전에 먼저 나를 생각하고 찾으셨습니다. 먼저 믿고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로마10.17)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에파타!” 곧 “열려라!” 하시며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쳐 주셨듯이 우리의 귀와 입을 열어주시길 기도합니다. 사회적으로는 공부도 많이 하고 지위도 있으며 세상 것에는 해박하면서도 하느님의 말씀에는 둔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는 들을 귀가 없는 그는 귀머거리요, 입이 있어도 주님을 전하는 일에 사용하지 못한다면 반벙어리입니다. 그들의 귀와 입을 활짝 열어주시길 청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엘리사벳 자매는 청각장애인입니다. 그분의 취미는 음악 감상입니다. 놀라시겠지만 ‘음악은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분은 육체적인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주님의 말씀을 듣고 느끼며 살아갑니다. 지금도 서예를 가르치고 장애인을 위한 활동을 열심히 하시며 말씀도 얼마나 예쁘게 하시는지 모릅니다. 그는 영적인 귀와 입이 열려 있어 해맑은 웃음으로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환자를 따로 데리고 나가서 손가락을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듯이 주님과 한적한 곳에서 따로 만날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말씀으로 끝날 수 있음에도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자신을 가두어 놓은 주위 환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손가락을 귀에 넣고 침을 발라 혀에 대는 행동으로 당신의 관심과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 하셨듯이 우리도 구체적인 행동을 통하여 이웃사랑을 드러내야 합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꼭 안아주는 포옹으로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을 그의 손길에 담았습니다. 눈먼 이에게 눈이 되어주고, 듣지 못하는 이에게 귀가 되어줄 수 있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침을 발라 혀에 대는 것은 비위생적이고 단정치 못한 행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하고 늘 혼자 외롭게 지냈던 그들에게는 큰 사랑의 표현입니다. 엄마가 자식에게 먹을 것을 꼭꼭 씹어서 주는 것과 같은 행위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셨다고 하였는데 하늘을 우러러 본다는 것은 곧 하느님 아버지의 능력을 바라보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길 소망하였다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물고기 2마리와 빵 5개로 5천명을 먹이시는 기적(루카9,16)을 베풀 때도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어떤 처지나 환경 안에서도 하늘을 우러러 보며 기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성경은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분을 찾으면 만나 뵐 것이다”(신명4,29)라고 적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귀를 열어 주시고 입을 열어 주시는 주님을 뵙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이 말씀에 열리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위로와 구원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너 한껏 네 입을 벌려 보라, 나는 곧 그 입을 채워 주리라”(시편80,11). 사람들이 우리의 변화된 삶을 보고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하고 놀라워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미루지 않는,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귀먹고 말더듬는 이"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지역인 티로와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지역을 지나 다시 갈릴래아로 오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습니다.”(마르 7,31)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교는 혼자 깨달음에 이르는 종교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그 말씀에 따라 사는 종교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귀’와 ‘입’은 신앙을 형성하는 조건에 해당합니다.
그러니 ‘귀먹은 이’란 단지는 듣지 못하는 이가 아니라, 곧 귀가 있어도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입니다. 또한 ‘말 더듬는 이’란 입이 있어도 혀가 굳어져 말씀을 삼키지 않는 이입니다. 그러니, ‘귀먹고 말 더듬는다’는 것은 소통과 통교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곧 친교를 나누지 않음이요, 단절과 분리요, 자신을 내어주지 않고 사랑하기를 거부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친교를 나누지 않고 사랑하기를 거부하는 것일까?
그것은 닫혀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귀와 입이 닫혀있어 말씀이 드나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막혀 있어서 흘러들고 흘러나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름 아닌 완고하여 고집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사실, 우리도 귀 막고 입 막고 사는 귀머거리요, 벙어리임에 틀림없습니다. 타인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가 바로 귀머거리요, 타인을 칭찬하지 않을 때가 바로 벙어리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우리는 귀머거리요,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때 우리는 벙어리입니다.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듣기 싫은 말은 듣지 않을 때 우리는 귀머거리요, 하고 싶은 말만하고 하고 싶지 않는 말은 하지 않을 때 우리는 벙어리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따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을 따로 광야로 불러내듯, 여인을 광야로 불러내어 사랑을 속삭여주듯(호세 2,16-25 참조),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시어, 당신 손가락을 우리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우리의 혀에 손을 대십니다.”(마르 7,33) 그리고 빵 다섯 개로 5천명을 먹이셨을 때처럼,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의 뜻에 의탁하여 ‘숨을 내쉬어’ 당신의 영을 불어넣으시며 말씀하십니다. “에파타!(열려라)”(마르 7,34)
바로 그 순간, 저희는 그분 손가락을 통하여 만질 수 없는 신성을 만집니다. 곧바로 묶였던 혀가 풀리고 닫혔던 귀의 문이 열립니다. 마치, 아담이 말을 배우지 않고도 곧바로 말을 하게 해 주셨던 것처럼(창세 1,27-28;2,20), 힘들게 배워야 하는 말을 배우지도 않고도 말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당신 말씀을 듣도록 ‘듣는 귀’를 열어 당신 말씀을 심으십니다. 당신 손가락으로 혀를 도유하여 영을 불어넣으십니다. 그리고 이로써, “귀머거리는 귀가 얼리리라. ~벙어리도 혀가 풀려 노래하리라.”(이사 35,5-6)는 이사야의 예언을 저희에게서 이루시고, 메시아 시대가 왔음을 알리십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도유하십니다. 저희 귀를 열어주시어 당신 말씀을 담아주시고, 혀로 그 아름다운 향기를 맛보게 하십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당신 말씀의 향기를 뿜게 하소서!
당신 영으로 도유된 진리의 말씀을 살게 하소서!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에파타!(열려라)”(마르 7, 34)
주님!
저는 귀 막고 입 막고 사는 귀머거리요, 벙어리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귀머거리요, 감사드리지 않을 때 벙어리입니다.
타인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 귀머거리요, 타인을 칭찬하지 않을 때 벙어리입니다.
당신 손가락을 제 귀에 넣으시어 당신 말씀을 담으소서.
당신 침을 발라 제 혀를 도유하시어 당신의 영을 불어넣으소서. 아멘.

에파타!
-송영진신부-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해서 하느님 나라로 데리고 가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가르치신 일들과 병자들을 고쳐 주신 일들은,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을 알려 주신 일이고,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은,
당신이 앞장서서 그 길을 가시면서 사람들을 인도해 주신 일입니다.
인류는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하느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고,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을 알지 못했고, 그래서 어둠 속에서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앞을 못 보는 이들을 고쳐 주신 이야기들은,
사람들이 그 길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도록 도와주셨음을 상징하는 이야기로,
또 듣지 못하는 사람들을 고쳐 주신 이야기들은,
하느님의 말씀을(구원의 진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도록 도와주셨음을
상징하는 이야기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는 신앙인들의 경우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알고 있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더라도,
어떤 심각한 고난과 불행을 겪게 되면,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글자 그대로 ‘눈앞이 캄캄해지는’ 상황을 만날 때,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믿음을 더욱 새롭게 가져야 하고,
예수님 안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더욱 간절하게 기도해야 하고, 예수님 말씀을 들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믿는 이들의 눈과 귀를 열어 주셔서
‘올바른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이고,
그 길을 함께 걸으시면서, 믿는 이들이 그 길을 끝까지 잘 걸어갈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주시는 분입니다.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 더 널리 알렸다.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마르 7,32-37)”
예수님께서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쳐 주신 다음에
그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신 것은,
사람들이 당신에 대한 믿음 없이 그저 “예수님은 장애자를 잘 고치시는 분”이라고
소문을 퍼뜨리는 것을 경계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소문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에는 헛소문이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기만 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도 조금은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라는 말에는,
“저분이 하신 일은 이 세상을 하느님께서 처음 만드셨던 그 세상으로
회복시키신 일이다.”, 즉 “예수님의 기적은 새로운 창조와 같다.”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라는 말은,
이사야서 35장 5절을 가리키는 말인데,
“예수님은 메시아다.” 라는 믿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야기 속에서 “에파타!(열려라!)” 라는 말씀은
장애 상태를 고쳐 주시는 말씀이지만,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는 “열어라!” 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습니다.
즉 하느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고, 실천하면서,
그 말씀을 다시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세상을 보면, 들을 필요가 없는 ‘쓸데없는 뉴스’와
들으면 안 되는 ‘가짜 뉴스’가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들어야 할 ‘진짜 뉴스’는 복음(기쁜 소식)입니다.
‘쓸데없는 뉴스들’과 ‘가짜 뉴스들’은,
우리가 ‘진짜 뉴스’, 즉 복음(기쁜 소식)을 듣는 것을 심각하게 방해합니다.
신앙생활을 방해하고, 믿음을 흔들어 대고,
구원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가라고 유혹합니다.
실제로, 쓸데없는 뉴스들과 가짜 뉴스들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복음을 듣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면 신앙인으로서 걸어가야 할 올바른 길을 잃어버리게 되고,
길이 아닌 곳에서 방황하게 됩니다.
(세속의 가짜 뉴스들은 국가 질서를 어지럽히는 범죄입니다.
종교 영역에서의 가짜 뉴스들, 즉 거짓 복음, 가짜 메시아, 잘못된 성경 해석,
잘못된 교리 해석, 이단 교리들, 사적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일들,
그런 것들은 모두 하느님과 예수님의 일을 방해하는 범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신자들이 ‘가짜 뉴스’, 즉 ‘거짓 복음’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이렇게 꾸짖고 있습니다.
“하와가 뱀의 간계에 속아 넘어간 것처럼, 여러분도 생각이 미혹되어 그리스도를
향한 성실하고 순수한 마음을 저버리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사실 어떤 사람이
와서 우리가 선포한 예수님과 다른 예수님을 선포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은 적이
없는 다른 영을 받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아들인 적이 없는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잘도 참아 주니 말입니다(2코린 11,3-4).”
“그러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사도로 위장한 거짓 사도이며 사람을 속이려고 일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놀랄 일이 아닙니다. 사탄도 빛의 천사로 위장합니다. 그러니
사탄의 일꾼들이 의로움의 일꾼처럼 위장한다 하여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의 종말은 그들의 행실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2코린 11,13-15).”
가짜 뉴스를 만들어서 사람들을 속이는 자들은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것에 귀를 기울여서 속아 넘어간 사람들에게는 책임이 없을까?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소리가 들려와서 듣게 된 것 자체는 죄가 아니지만,
적극적으로 귀를 기울여서 듣는 것은 죄가 됩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쓸데없는 소리들과 가짜 뉴스들에 대해서는 귀를 막고,
‘말씀’에만 집중해야 하고, ‘말씀’ 안에서 살아야 하고,
그리고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해 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신앙인이면서도 ‘말씀’을 듣지 않고 세속의 소리만 듣는 것은
귀먹은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또 들은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않는 것은
‘말 못하는’ 장애 상태와 다르지 않습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르 7,31-37: 열려라-에파타
예수님은 다시 갈릴래아로 가시자마자 귀먹은 반벙어리를 만나신다. 여기서 예수님은 아주 친절하시고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신다. 즉 그 귀먹은 반벙어리를 따로 불러 친절하게 손가락을 귀에 넣으시고 그의 혀를 만지셨다. 그리고 그 불구를 완치시켜주는 은혜가 어디서 오는지를 알려주시기 위하여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에파타!” 곧 “열려라!”(34절) 하신 것이다. 그는 혀가 풀리고 귀의 닫힌 문이 열렸다.
몸을 설계하시고 육신을 지으신 분께서 몸소 그에게 다가가시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의 닫힌 귀를 아무런 고통 없이 열어 주셨다. 한마디 말도 내뱉을 수 없이 굳게 닫혀 있던 입이 말을 하게 해 주신 분을 찬양하기 시작한다. 아담이 배우지 않고도 곧바로 말을 하게 해 주셨던 그분은(참조: 창세 1,27-28; 2,20), 힘들게 배워야만 하는 말을 귀먹은 이가 쉽게 할 수 있게 해 주셨다.
성령은 “하느님의 손가락”(루카 11,20)이라고 하셨다. 주님께서는 당신 손가락을 귀먹고 말 더듬는 이의 귀에 넣으시어,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그 사람의 마음을 믿음을 향해 열어주셨다. 그분이 귀를 만지신 것은 그의 귀가 막혔기 때문이고, 입을 만지신 것은 그가 말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파타!”, 즉 “열려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의 마음의 입과 귀도 열어주시기를 청하자.
주님께서는 귀먹은 이들을 듣게 해주셨다. 이런 일은 그 누구도 일찍이 본 적이 없었으나, 주님께서는 이 일을 통하여 진리를 알지 못하던 사람들이 하느님의 거룩한 말씀을 듣고 이해하게 되리라고 선포하신 것이다. 거룩한 복음을 듣지 않고 행할 바를 실천하지 않는 자들이 바로 말 못 하는 귀머거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의 능력은 말 못 하는 사람을 제 혀로 다시 말할 수 있게 해 주셨다는 것이다.
비록 한 가지 단순한 사건이기는 하지만 이 능력 안에는 미래의 일을 드러내는 또 다른 의미가 담겨 있다. 예전에는 천상의 것에 대해 무지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지식과 지혜의 진리를 깨달아 하느님에 관하여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37절) 하고 감탄하였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인간의 질병을 치유해 주시고 사람들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게 해 주셨다. 예수님의 행적을 보고 백성들이 감탄했듯이 오늘의 우리도 다른 이들이 우리의 믿음의 행실을 보고 “참으로 놀랍기만 하구나!” 하며 우리와 같이 신앙을 갖기를 원하게끔 우리의 행위를 예수님의 모습을 닮을 수 있도록 고쳐가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가야할 길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단번에 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조금씩 하느님의 말씀에 응답할 때 그분의 속삭임을 듣고, 묶여있던 혀 풀려 올바로 말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조그마한 일에서부터 꾸준한 노력의 결실로 나에게 돌아오는 결과일 수 있다. 이러한 삶으로 우리 자신의 변화와 더불어 세상의 변화를 이룰 수 있도록 도우심을 구하자.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마르 7, 37)
-한상우신부-
주님을 향해
열려야 할 우리의
귀(耳)와
입(口)입니다.
열려야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먼저 닫힌
귀와 입을
주님께
내어드립니다.
사람을 구하시는
주님께서는
닫힌 귀와 입을
열어주십니다.
열린다는 것은
주님안에서
소통과 교감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모든 소통의
중심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과의 소통은
먼저 인격적인
만남에서
시작됩니다.
인격적인 만남은
소중한 것들을
건너뛰지 않습니다.
인격의 존재방식은
활짝 열린 소통에
있습니다.
제대로 듣고
제대로 말하는
것에서 사랑은
자라납니다.
치유는 사랑의
치유이며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맡겨드리는
모든 삶의
여정입니다.
주님의 치유는
그 누구도 아닌
우리자신이
되게하십니다.
닫힌 귀와 입을
사랑으로
열어주십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 독서들을 읽노라면 신명기의 중요한 말씀이 떠오릅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 두어라"(신명 6,4-6).
오늘 복음 대목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시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데려오면서 시작됩니다. 지금 예수님 앞에 선 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는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어제 솔로몬이 주님께로부터 들었던 질책의 결과가 펼쳐집니다. 성경 저자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명시했지요.
"다른 신들을 따르는 일을 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는데도 임금은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1열왕 11,10).
결국 다윗이 이룬 통일 왕국은 불과 한 세대를 건너 솔로몬의 아들 대에서 갈라지고 맙니다. 아히야 예언자는 예로보암을 만나자, 솔로몬 아들 르하브암에게 대적하는 북쪽 열 지파의 임금으로 세웁니다. 통일 이스라엘의 분열은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은 죄로 인해 시작됩니다.
"나는 주님 너의 하느님이니 너는 내 말을 들어라"(화답송).
이후에도 주님은 당신께 귀를 막고 돌아선 백성에게 줄곧 호소하시지만 이스라엘은 긴 세월 동안 점점 더 완고해지고 무디어져 갑니다. 하느님의 목소리인 예언자들을 박해하며 귀를 닫고 살던 그들은 유배와 패망의 치욕을 겪으며 어느덧 예언자마저 부재하는 암흑의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이민족의 압제 아래 이제 구원은 손에 잡히지 않는 먼 미래일 뿐입니다.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마르 7,33).
세상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성자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현실을 마주하신 순간, 그분은 매우 구체적으로 움직이십니다. 마치 태초에, 다른 피조물과는 별개로 공들여 인간을 창조하셨던 하느님의 손길을 보는 듯합니다. 지금은 재창조의 시간, 귀먹고 말도 제대로 못 하던 이스라엘이 치유받고 위로받고 용서받는 시간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마르 7,34).
하늘은 성부 하느님, 한숨은 성령의 현존입니다. 지금 성 삼위께서 함께 온 힘을 모아 이스라엘을 회복을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열려라!"
이 말씀은 귀먹은 이가 처음으로 들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는 이 말씀을 귀라는 감각 기관으로 듣지 못하는 대신 온 존재로 들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의 존재는 순종합니다. 이 순종이 예수님의 힘과 맞닿아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리게 된 것입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 분부하셨다. 그러나 ...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마르 7,36).
이 환희와 영광의 순간,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은 다시 죄의 쳇바퀴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들은 침묵을 명하신 예수님의 의중을 헤아리고 따르기보다 소문내기에 열중합니다. 고통스런 역사 안에서 귀먹고 말 못하던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예수님의 상징적이고 의미 있는 기적은 값싸고 흥미진진한 가십거리 정도로 회자되고, 여전히 백성은 "듣지 않는" 자세를 견지해 나갈 것입니다. 이제는 못 들어서 따르지 못했던 과거에 한술 더 떠서, 귀가 열렸으나 듣지 않는, 그래서 더 하느님을 안타깝게 해드릴 역사로 진입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사실 말씀에 둘러싸여 살아갑니다. 매일 미사마다 교회가 준비한 말씀의 잔치가 벌어지고, 손 닿는 곳에 성경이 있습니다. 교구와 수도회마다 성경공부 프로그램을 마련해 우리를 부르고, 이런 묵상글도 수없이 공유되고 있습니다. 말씀과 관련된 서적과 강의도 봇물처럼 쏟아져 나옵니다. 이 모든 자원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의 막히고 닫히고 망가진 부분을 어루만지시며 "열려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하느님 말씀을 경전으로 소유한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겉으로는 말씀을 따라다니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듣지 않는데" 익숙해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말씀과의 관계에서는, 그저 조금 지치고 느슨해지고 게을러지는 매너리즘이란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말씀을 경청하여 듣고 믿어서 따르는 길, 아니면 듣지 않고 제 식대로 가는 길, 이 둘 뿐입니다.
"주님 저희 마음을 열어 주시어 당신 아드님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하소서"(복음 환호송).
사랑하는 벗님, 그러니 우리는 늘 이렇게 간청해야 합니다. 절벽이던 우리 귀가 열릴 때까지 외치고 호소하시는 하느님의 애타는 사랑 고백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주의를 떼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은 우리 삶의 근원과 이유를 들려 주고 또 우리가 가야할 방향과 목적을 제시하십니다. 말씀은 한처음에 계신 하느님이시고(요한 1,1 참조) 말씀이신 주님께서 길이고 진리이며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먼저 내 안이 차고 넘쳐야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에서 벙어리가 말을 하게 된 것을 본 사람들은
주님께서 이 일을 퍼트리지 말라고 하셨지만 오히려 더 퍼트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
그런데 저나 여러분이나 오늘 복음의 사람들처럼
주님의 복음을 전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왜일까요?
입이 없어서 그럽니까?
입은 있지만 말할 복음이 내 안에 없는 것이 아닌가요?
흔히 할 말이 없다고 하는데 복음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는 건가요?
할 말이 없다면 아는 것이 없어서인가요 할 마음이 없어서인가요?
아는 것은 좀 없어도 복음 선포는 할 수 있고,
하려는 마음만 있으면 배우면서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문제는 할 마음이 없기 때문이고,
할 마음이 없는 것은 구원 체험이 없기 때문인데
그러므로 어떻게 하면 할 마음과 구원 체험이 생기는지
오늘 복음의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통해서 보면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그렇고 우리의 실제 경우에서도 그러한데
말하지 못하는 것은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도 치유를 해주시는데
먼저 귀를 열어주시고 다음에 입을 열어주십니다.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참으로 재미있는 것은 이것이 창세기 창조의 재현이라는 점입니다.
귀에 손가락을 대신 것은 자연스럽지만 혀에 침을 발라주신 것은 더럽다는
느낌이 들어 꼭 그렇게 하셔야지만 치유가 이루어지냐고 할 수도 되는데
굳이 이렇게 하신 것은 창세기 2장의 창조를 재현하시는 거지요.
창세기 2장은 1장과 달리 하느님께서 땅 위로 내려오시어 흙을 빚어
인간을 창조하시고 코에 당신 숨, 곧 성령을 직접 불어넣어 주시어
목에 숨이 통하게 하심으로 목숨이 붙게 하십니다.
우리가 목숨이 끊어졌다고 하는 것은 목에 숨이 들락날락해야 하는데
그 숨이 끊어지면 목숨이 끊어진다고 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땅에까지 내려오시어 당신 손으로 인간을 만드시고
당신 숨까지 불어 넣어주심으로 친밀한 사랑을 보이시는 것인데
하늘에서 이 땅에 육화되어 오신 주님도 오늘 같은 방식으로
벙어리를 재창조하심을 복음은 얘기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주님께서 말씀으로 치유를 완성하십니다.
곧 "열려라"라는 말씀으로 닫혀있던 귀와 입을 열어주시는 것인데
이것은 1장의 "생겨라"는 말씀 한마디로 창조하신 것을 재현하시는 거지요.
종합을 하면 이렇습니다.
말씀의 치유는 주님께 초월적 권위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접촉의 치유는 주님의 따듯하고 친밀한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에 덧불여야 할 것은 주님께서 이 벙어리를 따로 데리고 나가
치유해주신다는 점인데 복음의 거의 모든 치유가 공개적으로 이루어진 것에
비하면 마르코 복음에만 있는 오늘의 치유는 매우 사적이고 비밀스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의 선포자가 되려면 오늘 복음의 벙어리처럼
우리의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하느님 구원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모두에게 사랑을 주시는 하느님이시지만 나에게 주실 때는 나만
따로 데리고 나가 너를 특별히 사랑한다고 하시는 그 체험 말입니다.
그래야 내 잔에 가득 찬 포도주처럼 먼저 내 안이 하느님 사랑으로
가득 차고 넘쳐야 복음이 우리 입에서 터져 나오지 않을까요?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예수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쉰 다음 “에파타”하고 말씀하셨다. “열려라.”라는 뜻이었다. 그러자 그는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마르 7,31-37)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합니다. 손을 얹는 행위는 축복을 주는 예식과도 같은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손을 얹는 대신 당신 손가락을 두 귀에 넣으셨다가 손가락에 침을 발라 그의 혀에 대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한숨을 내쉬신 다음 “열려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모든 행위는 ‘성령’과 관련됩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는 성령의 상징으로, 예수님 몸에서 나오는 물, 기름부음, 불, 구름과 빛, 안수, 손가락, 비둘기, 숨 등을 들고 있습니다(694-701항 참조).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원하시는 것과 다른 모습으로 병자를 치유하셨지만 어쨌든 그 힘은 당신 몸에서 나오는 성령의 힘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당신 죽음을 통해 나오시는 힘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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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가 바로 귀머거리요, 타인을 칭찬하지 않을 때가 바로 벙어리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우리는 귀머거리요,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때 우리는 벙어리입니다.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듣기 싫은 말은 듣지 않을 때 우리는 귀머거리요, 하고 싶은 말만하고 하고 싶지 않는 말은 하지 않을 때 우리는 벙어리입니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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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먹은 반벙어리를 따로 불러 친절하게 손가락을 귀에 넣으시고 그의 혀를 만지셨다. 그리고 그 불구를 완치시켜주는 은혜가 어디서 오는지를 알려주시기 위하여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에파타!” 곧 “열려라!”(34절) 하신 것이다. 그는 혀가 풀리고 귀의 닫힌 문이 열렸다.
아담이 배우지 않고도 곧바로 말을 하게 해 주셨던 그분은(참조: 창세 1,27-28; 2,20), 힘들게 배워야만 하는 말을 귀먹은 이가 쉽게 할 수 있게 해 주셨다.
성령은 “하느님의 손가락”(루카 11,20)이라고 하셨다. 주님께서는 당신 손가락을 귀먹고 말 더듬는 이의 귀에 넣으시어,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그 사람의 마음을 믿음을 향해 열어주셨다. 그분이 귀를 만지신 것은 그의 귀가 막혔기 때문이고, 입을 만지신 것은 그가 말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파타!”, 즉 “열려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조욱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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