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12일 연중 제5주간 수요일
2020년 2월 12일 연중 제5주간 수요일
예수께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시고 이렇게 가르치셨다.
“너희는 내 말을 새겨들어라.
무엇이든지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더럽히는 것은 도리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마르7,14-23)
Jesus summoned the crowd again and said to them,
“Hear me, all of you, and understand.
Nothing that enters one from outside can defile that person;
but the things that come out from within are what defil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 솔로몬을 사랑하시어 이스라엘의 왕좌에 앉히시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게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나쁜 생각이 그 사람을 더럽히고 망치는 것임을 깨우쳐 주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곱씹어 보면 우리의 내면이 얼마나 죄로 얼룩져 있는지, 우리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날마다 우리 내면을 정화한다고 하여도 더러움에서 벗어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안의 것들 외에, 세상 그 어떤 것도 영적인 면에서 우리를 더럽히지 않는다고 하시니 말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가 더럽고, 정결하지 못한 것을 이토록 잘 알고 계심에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깨끗하여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더러움에 찌들어 있어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율법을 잘 지킴으로써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고, 그래야만 자기들이 하느님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하느님께서는 그 반대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리 노력하여도 깨끗해질 수 없는 우리를 더러운 모습 그대로 사랑하시는 하느님, 먼지로 뒤범벅이 되고 찌들어 있는 우리를 역겨워하지 않으시고 그냥 안아 주시는 하느님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손수 정화수를 끼얹어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시리라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그러니 영적 결벽증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다소 죄를 짓고 깨끗하지 못하더라도 우리의 죄보다 더 크신 하느님의 사랑을 신뢰할 필요가 있습니다.
죄를 지은 아담에게 가죽옷을 입혀 주시는 그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어 주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더러운 모습 그대로 그분께 한 걸음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우리 스스로 깨끗함을 지키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깨끗한 마음을 먼저 맛보도록 합시다.
(한재호 루카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저 역시 이제까지 많은 약속을 했었고 또 깨뜨렸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많은 약속 중에서 20년째 지켜나가고 있는 것이 바로 ‘새벽 묵상 글’입니다. 주님에게서 멀어지는 저 자신을 반성하면서 매일 새벽에 일어나 묵상해서 글을 쓰겠다는 20년 전의 다짐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저의 굳은 의지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이 부족한 묵상 글을 읽어주는 많은 분이 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사람이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나’라는 존재를 있게끔 하는 것은 다른 누군가가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사랑’을 제일 강조하셨던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우리는 내 욕심과 이기심을 채워주는 것만을 더욱더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사랑을 외면합니다. 주님에게서 멀어집니다. 깨끗한 영혼이 아닌, 더러운 영혼을 간직하게 됩니다.
레위기 11장과 신명기 14장에는 정결하고 부정한 음식에 관한 규정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규정에 따라서 부정한 음식을 절대로 먹지 않았지요. 그래서 부정한 음식을 먹은 사람은 더럽혀졌다면서 단죄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가르침을 그들을 향해 전해줍니다. 즉,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아직도 율법의 문자에 얽매여 있으려는 자들이 부정하다고 선언한 것들을 먹는다고 해서 더러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신 정작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나쁜 생각을 비롯한 악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뜻을 철저하게 따르는 삶이 그 사람을 진정으로 깨끗하게 만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마음을 간직해야지만 주님께서 원하는 깨끗한 몸과 마음을 만들 수 있습니다.
어떤 원리 원칙보다도 더 중요한 사랑의 실천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는 단 일회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어차피 더러워질 것이라고 씻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늘 씻어야 하는 것처럼, 늘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늘 깨끗해집니다.


방이 완전히 엉망진창으로 어질러져 있을 때 쓰는 말은 무엇일까요? 이런 말을 하지 않습니까?
“개판 오 분 전이구먼.”
왜 이런 말을 쓰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찾아보았습니다.
6.25 피난 시절 때, 부산에서 피난민들을 위해 거대한 솥에다 밥을 지어 제공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밥이 거의 다 되었을 때, 솥뚜껑을 5분 후에 열겠다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개판 오 분 전!!”(開 열 개, 鈑 금박 판)
배가 고프니 서로들 먼저 배급을 받겠다고 나오니 질서가 지켜질 리가 없었겠지요. 완전히 난장판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개판 오 분 전’이라고 말하면 난장판이 된 상태를 말하게 된 것입니다.
자기만 먼저 먹겠다고 아우성치지 않았다면 그래서 질서를 잘 지키면서 남들에게 먼저 배려할 수 있었다면 ‘개판 오 분 전’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나의 잘못된 말과 행동이 세상 안에 부정적인 말을 생산하는 기원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나쁜 생각에 초를 치는 기도를 하라
-전삼용신부-
두 수도자가 순례길을 가다가 개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강둑에 이르렀을 때 한 젊고 예쁜 여성이 개울을 못 건너고 도움을 청하며 서 있었습니다.
나이 든 수사는 젊은 수사에게 여인을 도와주라고 하지만 젊은 수사는 질겁하며 안 된다고 합니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노 수도자가 그녀를 업고 건너편 강둑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강둑에 여성을 내려놓고 두 수도자들은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그런데 한 시간쯤 지났을 때, 젊은 수도자가 화를 참지 못하고 비난을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정결서원을 한 저희가 여자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은 분명히 옳지 않은 일입니다. 어떻게 수도자의 몸으로 그런 불경스런 행동을 할 수 있습니까?”
여성을 업어 강을 건너다 준 노 수도자는 말없이 듣고 있다가 한 마디 합니다.
“난 그 여성을 한 시간 전에 강둑에 내려놓았네. 그런데 왜 자네는 아직도 그녀를 등에 업고 있는가?”
너무도 유명한 예화이지만, 오늘 복음에 이보다 적합한 것을 찾지 못하여 또 써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더럽히는 것이 외적인 데 있지 않고 자신의 내면 안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노 수도자가 외적으로 한 행위는 수도자를 더럽히지 않았지만 젊은 수도자는 마음에서 나오는 분노와 나쁜 생각들로 계속 자신을 더럽히고 있었던 것입니다. 영성의 수준은 자신의 나쁜 생각을 어느 정도나 통제할 수 있느냐에 의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마음에서 생각이 나오고 생각에서 행동이 나옵니다. 따라서 마음만 통제할 수 있다면 생각도 통제되고 그러면 자신을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 안에서 나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 등으로 다양하게 말씀하시지만, 이 모든 것은 세속-육신-마귀의 삼구로 통합됩니다. 그리고 세속-육신-마귀의 욕구는 단 하나인 ‘자아(ego)’라는 원천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생각을 통제하려면 자아를 통제하면 됩니다.
저는 에덴동산에서 하와와 대화했던 뱀을 자아로 보고 있습니다. 세상에 죄와 고통이 들어온 것은 하와가 뱀을 뱀으로 보지 못한 데서 비롯됩니다. 우리도 어쩌면 우리 자아를 좋은 것으로 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술 중독자가 술을 좋은 것으로 여기면 절대 중독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자아를 좋은 것으로 여기면 나쁜 생각에 중독되어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뱀을 당신 발로 밟으신 성모 마리아처럼 자아를 통제할 능력을 키워야합니다.
나쁜 생각은 자신의 힘으로 통제되지 않습니다.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결심하지만 또 나쁜 생각을 하는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심지어 잠을 자면서도 생각을 할 것입니다.
자아는 오직 믿음의 발로 밟아야 통제됩니다. 저는 최대한 자주 “저는 죽었습니다. 저는 예수님입니다!”라는 기도를 반복합니다. 이 기도 안에는 믿음이 들어있습니다. 이 기도는 바오로 사도의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19-20)라는 말을 제 나름대로 짧게 만든 것입니다.
자아가 안 죽은 것 같아도 죽었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언젠가는 죽습니다. 내가 예수님처럼 전혀 살지 못해도 예수님이라고 믿어야합니다. 그래야 조금씩이라도 닮아갑니다. 이 기도를 하면 나쁜 생각이 끊깁니다.
나쁜 생각이 올라올 때, “저는 죽었습니다.”라고 하면, “나는 분명 네가 죽었다고 믿는데, 네가 왜 계속 말을 하지?”라고 꾸중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 “저는 예수님입니다!”라고 하면,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신데 네가 왜 주인행세를 하지?”라고 말하는 것이 됩니다. 자아도 맞장구를 쳐 주어야 나쁜 생각을 내보내는데 이렇게 믿음으로 끊어버리면 생각을 통해 자신의 욕구를 우리에게 전달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춘기 아이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세속-육신-마귀의 욕구들이 크게 자라고 따라서 모든 생각의 주제도 돈과 육체적인 것과 교만한 것들이 됩니다. 그런 상태의 아이들을 보며 행복해보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아와 그로 인한 나쁜 생각을 통제하지 못하면 어른이 되어도 이런 사춘기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믿음으로 우리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순결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갑시다.

-조재형신부-
문명으로 읽는 종교 이야기를 읽으면서 하나의 공통점을 보았습니다. 종교가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 상대방을 개종시키려하면 인류의 역사는 퇴보하였습니다. 분쟁, 갈등, 전쟁, 폭력이 공동체를 파괴했습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추방하였고, 살인하였고, 재산을 빼앗았습니다. 서로를 이단으로 단죄하였고, 소중한 인류의 문화유산을 파괴했습니다. 진리의 빛이 오직 자신들의 종교에만 비추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종교가 서로를 인정하고, 상대방을 받아들이면 인류의 역사는 발전하였습니다. 경제, 문화, 예술, 사상이 꽃피웠습니다. 교리와 신학은 다를지라도 그것을 드러내는 인간의 삶은 비슷합니다. 남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는 겁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는 겁니다. 하늘의 비는 가리지 않고 내리고, 하늘의 태양도 가리지 않고 비추듯이, 종교가 다르고, 민족이 다를지라도 진리의 빛은 가리지 않을 겁니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역사에 예수님은 오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회개하고 기쁜 소식을 믿으라고 하였습니다. 율법과 계명이 아닌 자비와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표징을 보여주셨고, 영혼을 일깨우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참된 행복과 평화를 얻었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지금 시작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기존의 질서를 지키려 하는 사람, 율법과 계명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표징과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진리의 빛이 오직 자신들의 율법과 계명을 통해서만 비추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원하시는 바는 아니셨지만 십자가를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말씀하신 후 돌아가셨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는데, 하느님의 뜻은 다른데 있었습니다. 그분 죽음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한 제자들은 어둠에서 빛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근심에서 담대함으로 부활하였습니다.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우리의 몸을 구성하는 원소는 우주의 시작부터 함께 있었습니다. 우리의 몸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유한하지만 우리의 몸을 이루던 원소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함께 하고 있습니다. 우주는 강력, 약력, 전자기력, 만유인력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의 정신, 에너지, 영혼도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존재하는 모든 것과 함께 해야 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해야 합니다. 불가에서는 ‘一切唯心造’라고도 합니다. 모든 것은 나의 마음에 의해서 생겨난다는 뜻입니다. 오늘 나의 마음에서 이런 것들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 아침에 일어나서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릴 수 있다면
- 하루에 30분 이상 침묵 중에 기도할 수 있다면
- 주일미사는 빠지지 않고, 평일 미사에도 참석하려고 한다면
- 신앙서적을 읽고, 교회에서 행하는 피정과 교육에 관심이 있다면
- 본당의 주보를 유심히 보고, 교회 소식에 관심을 갖는다면
- 본당의 신심단체에 가입해서 활동을 한 가지 정도 한다면
- 가족과 친구들과 대화를 할 때,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한다면
-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고,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면
- 칭찬과 감사의 말이 자주 나오고, 자주 웃는다면
우리는 어떤 악의 유혹도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을 오염시키는 것은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것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가장 사랑하셨던 인간들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 때문입니다. ‘시기, 질투, 교만, 인색, 탐욕, 욕망, 미움, 원망’과 같은 것들은 이 아름다운 세상을 무질서하게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든 악한 것들이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은 밖에서 찾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들 내면의 갈등과 우리들 내면에서 나오는 악한 것들의 뿌리를 자를 때 비로소 회복되는 것입니다.

속이 중요하다
-반영억신부-
하느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이 그 만물을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보시니 좋더라.”, “보시니 참 좋더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창조된 모든 것은 다 좋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더럽히고, 안 더럽히는 것은 사람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사실 좋고 나쁨은 사람들이 서로 비교하여 ‘어떤 것은 좋고, 어떤 것은 더 좋고, 어떤 것은 나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좋게 창조된 것이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면 사람을 더럽히지 않습니다. 좋은 것을 자기 욕심을 채우는데 쓰려고 하면 더러움을 만들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 안에 품은 육의 욕망들은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을 밖으로 표출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 안에 무엇을 담고 있는지를 자주 확인해야 하겠습니다. 정작 문제는 외적인 것에 있지 않고 내적인데, 외적인 것에 연연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그러니 내면을 깨끗이 하십시오.
우리는 ‘얼짱’ ‘몸짱’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외면을 중시하는 말입니다. 어떤이는 성형수술을 하고 겉모양을 가꾸는데 온갖 노력을 다 쏟아 붓습니다. 반면, 속을 가꾸는 데에는 소홀히 해서 내면을 황폐하게 버려둡니다. 심지어 ‘감정에 충실하자.’ ‘솔직한 것이 좋지 않으냐?’하면서 자신의 악한 생각을 합리화하고 행동으로 옮기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죄에 대해서 많이 무뎌졌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겉뿐만 아니라 속까지도 보시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1사무16,7) 그러니 내면을 더 깨끗하게 가꾸어야 하겠습니다. 입술로만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섬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마음짱'이 소중합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닮아 가는데 걸림돌이 되는 내 마음 속 욕망을 살펴야 합니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 나오는 글입니다.
“당신의 행동에 있어서는 활달하며 당신의 대화에 있어서는 조리를 지키며 당신의 사상에 있어서는 방황하지 말고 당신의 영혼에 있어서는 내적인 분란과 외적인 혼란을 없애고 실생활에 있어서는 여가가 없을 정도로 분주한 생활을 하지 말라. 사람들이 당신을 죽이고 당신을 갈기갈기 찢고 당신을 저주한다고 생각해 보라. 그렇다고 이러한 것들이 순결하고 현명하고 건전하고 올바르게 머물려고 하는 당신의 영혼을 방해할 수 있겠는가?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투명하고 맑은 샘물가에서 샘물을 저주한다 하더라도 샘물은 결코 식수를 제공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 진흙이나 오물을 집어넣었다 하더라도 샘물은 이것들을 흘려보내고 씻어내어 전혀 더럽혀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당신은 평범한 우물이 아니라 영원한 마음의 샘을 어떻게 얻을 것인가? 그것은 만족과 단순과 겸손으로 결합된 자유를 스스로 끊임없이 누리면 된다”(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진정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상을 닮은 사람을 만들어 숨, 영, 얼을 불어넣어주셨으니 그 본래의 아름다움을 잘 지키고 가꾸며 하느님의 좋은 작품인 만물 안에서 기쁨과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서 시작된 ‘정결예법’에 대한 결론 장면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사람의 전통’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폐기하고 있음을 꾸짖으셨습니다.
이제 오늘 <복음>에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그를 더럽힐 수 없다는 것을
알아듣지 못하느냐?”(마르 7,14-15)
이는 유대인들이 철저히 지키던 ‘정결예식’을 모조리 부인하는 의미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부정한 음식이나 물건이나 짐승에 의해 사람이 부정해지는 것이 아니기에 그들이 지키는 정결예식은 소용없는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결국, 부정한 것이 마치 밖에 있는 양, 막상 속은 은폐하면서 겉의 정결예법에만 치중하는 위선적인 정결예법을 부정하십니다. 이는 베드로의 요빠에서 이방인 코르넬리오를 방문했을 때의 환시체험에서도 말해줍니다. 하느님께서는 환시 속에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사도 10,15)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무엇이든지 그 자체로 더러운 것은 없습니다.
다만 무엇이 더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더럽습니다.”(로마 14,14-16)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레위기 11-15장>이 명하는 부정과 정결에 대한 새로운 해석, 곧 그 영적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 참으로 부정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는 말씀입니다. 더럽히는 것들은 밖에 있는 것들이 아니라, 그것들을 사용하는 인간의 마음에 달려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존자 베다는 말합니다.
“마귀라 할지라도 우리의 나쁜 생각들에 힘을 보태어 부추길 수는 있지만,
그 생각들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이처럼, 정결이란 가시적인 겉을 깨끗이 닦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 곧 그 사람의 내면과 인격 전체에 걸려 있기에, 우리의 내면의 변혁, 곧 전 인격적인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악이 차 있으면 악취가 되어 터져 나오고, 선이 차 있으면 선의 향기가 되어 뿜어져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선하시니, 박해하는 이에게도, 상처 입히는 이에게도, 오로지 선을 베푸십니다. 곧 예수님의 마음 안에는 온전한 사랑이 가득 찼기에 항상 사랑이 흘러나오고, 우리들 마음에는 미움이나 화가 있기에 그것들이 흘러나올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타인을 탓하거나 처지나 환경을 탓하기에 앞서, 우리 안의 어둠과 악을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빛과 선이 차오르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저희 마음이 예수님 마음으로 차올랐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그토록 깨닫지 못하느냐?”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마르 7,15)
주님!
저를 부수소서. 고정관념의 틀을 깨소서.
겉만 아니라 속도 부수고, 당신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제 생각을 바로 세우시고, 당신을 모욕하지 않게 하소서.
위선 부리지 않게 하시고, 제 안을 선으로 가득 채우소서.
당신 모상을 새롭게 하시고, 사랑의 향기 뿜게 하소서. 아멘.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송영진신부-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마르 7,14-15).”
“너희도 그토록 깨닫지 못하느냐?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그를 더럽힐 수 없다는 것을 알아듣지 못하느냐?
그것이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배 속으로 들어갔다가 뒷간으로 나가기 때문이다(마르 7,18-19).”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20-23).”
예수님 말씀의 뜻은, “어떤 사람이 죄를 지었다면,
그 죄는 그 사람 자신이 지은 죄다. 그러니 죄를 짓고 나서
남에게 그 죄를 떠넘기면 안 된다. 또 어떤 음식이나 물건 탓을 하면서
그런 것들에게 죄를 떠넘겨도 안 된다.”입니다.
(‘악’은 밖에서 올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죄’는 내 안에서 옵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나 자신’이고,
그러니 ‘죄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있습니다.)
교도소 재소자들과 면담을 할 때, ‘불우한 가정환경 때문에’,
또는 ‘불공평한 사회 때문에’ 자기가 범죄자가 되었다는 말을 자주 듣게 됩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들은 “내 탓이오.” 라는 말을 하지 않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회개’를 하지 않습니다.
가정환경이나 사회 때문에 죄를 짓게 되었다는 그들의 말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같은 환경과 여건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범죄자가 되지 않고, 선하게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인간 세상의 불의와 부정부패 같은 ‘사회악’을 도외시하고
모든 죄의 책임을 개인의 탓으로만 돌리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사회악에 맞서 싸워야 하고,
악을 물리치고 선과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도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내 탓이오.’ 라고 말해야 합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시기해서 죽이려고 했던 일은,
마음에서 죄가 나온다는 예수님 말씀을 잘 나타내는 예가 됩니다.
사무엘 상권을 보면, 사울이 다윗을 시기한 일은
다윗이 골리앗을 쳐 이겼을 때부터 시작된 일입니다.
“다윗이 그 필리스티아 사람을 쳐 죽이고 군대와 함께 돌아오자,
이스라엘 모든 성읍에서 여인들이 나와 손북을 치고 환성을 올리며,
악기에 맞추어 노래하고 춤추면서 사울 임금을 맞았다.
여인들은 흥겹게 노래를 주고받았다.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네!’ 사울은 이 말에 몹시 화가 나고 속이 상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다윗에게는 수만 명을 돌리고 나에게는 수천 명을 돌리니,
이제 왕권 말고는 더 돌아갈 것이 없겠구나.’
그날부터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게 되었다(1사무 18,6-9).”
(여기서 ‘그 필리스티아 사람’은 ‘골리앗’입니다.)
자기보다 인기가 더 높은 다윗을 시기한 사울은
기회만 생기면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바로 그 시기심이 그 뒤에 사울이 짓게 된 모든 죄의 원인이 되었고,
결국 그가 몰락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일에 대해서,
사울보다 다윗을 더 높이는 노래를 부른 여인들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다윗이 사울보다 더 ‘잘난 사람’이었다는 것이 잘못일까?
(사울 앞에서 다윗이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지 않아서
일이 그렇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울의 모든 불행은 그의 마음속에 있는 시기심, 질투심, 악의, 교만,
그리고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사울은 자신의 죄와 불행에 대해서 다윗의 탓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가정에서 식구들끼리 다툴 때, 서로 상대방 탓을 하는 모습을 흔하게 봅니다.
진짜로 어느 한쪽의 큰 잘못으로 가정의 불화가 생기는 경우도 있지만,
어느 한쪽만 탓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단순히 의견이 달라서 충돌하는 경우에는
상대방 탓만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것은 모든 공동체에 다 해당되는 일입니다.
교회 공동체에서도, 직장 공동체에서도, 지역 공동체에서도
서로 상대방 탓만 하다가 점점 더 갈등과 대립이 커지고,
결국 분열되고, 더 큰 불행으로 이어지는 때가 많습니다.)
산상 설교에 있는 ‘눈 속에 있는 들보’에 관한 가르침을,
서로 상대방 탓을 하면서 다투는 상황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마태 7,3-5).”
남편 때문에 죄를 지었다고 말하는 아내들도 많고,
반대로 아내 때문에 죄를 지었다고 말하는 남편들도 많습니다.
또는 시어머니 때문에 죄를 지었다고 말하는 며느리들도 많고,
며느리 때문에 죄를 지었다고 말하는 시어머니들도 많습니다.
그렇게 ‘남 탓’을 하면서,
자기가 죄를 짓게 된 것이 억울할 뿐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누구 때문에 내가 죄를 지었다.” 라는 말에는
“잘못은 그 사람에게 있고,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죄를 지었다.’ 라는 말 자체가 모순된 말입니다.
그래서 “누구 때문에 내가 죄를 지었다.” 라는 말은,
사실은 “죄는 그 사람이 지었다. 나는 죄를 짓지 않았다.” 라는 뜻이 됩니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고해성사를 볼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고해성사를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고해성사를 보면서, 자기 죄는 고백하지 않고 남을 비난하는 말만 한다면,
그것은 고해성사로 성립되지 않습니다.
성사모독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르 7,14-23: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예수님은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15절)고 하시며 금기 식품은 없다고 하신다.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란 음식을 말하는데, 어떠한 음식을 어떻게 먹든 음식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이 그 사람을 죄로 더럽힌다는 것이다. 즉 자연의 음식물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결단이 사람됨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하시면서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배 속으로 들어가서 뒷간으로 나가기 때문이라고 하셨다(마태 15,11.17 참조) 그리고 주님께서는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19절)고 밝히셨다. 율법에 얽매인 자들이 부정하다고 선언한 것들을 먹는다고 해서 더러워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 입술이 앞뒤 가리지 않고 지껄이고 끼어들면서 우리가 더러워질 수 있다.
그런데 레위 11장에 보면 부정한 음식물의 종류가 나오고 있다. 그것은 유다인들의 전통에서 신앙처럼 지켜오는 먹지 말아야 할 음식 중에 대표적인 것이 돼지고기가 있다. 2마카 6장에서는 안티오쿠스 에페파네스는 유대교를 근절시키려고 유다인들로 하여금 돼지고기를 먹게 하였고, 그것을 안 먹는 유다인들은 왕명을 거스른 죄로 수백 명이 죽임을 당했다는 역사적인 사건까지 기록되어 있다.
이런 유다인들에게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은 그들에게는 깜짝 놀랄 말이었다. 즉 그들은 부정한 음식을 먹음으로써 사람이 부정하게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지내왔고 죽어가면서도 지켜온 그들의 율법을 무시하는 듯한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본뜻은 무엇이었는가? 물건, 음식이란 그 어떤 것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의 입장에서 볼 때 “부정한 것이다” “깨끗한 것이다”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는데 믿음의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마음이라는 창고 안에 무엇을 쌓아 놓고 있으며, 그 안에서 무엇을 내어놓으며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악한 생각들이란 마귀가 나에게 불어넣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마귀는 우리의 나쁜 생각에 힘을 보태고 부추길 수는 있지만 그러한 생각들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내 마음 안에서 일어나며 이러한 생각이 일어날 때, 마귀가 그것을 정당화시키고 그렇게 행하도록 부추기는 거시다.
즉 어떠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느냐에 믿음의 근본 의미가 있는 것이며,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물건이나 음식이 아니라 사람 자신에서 나오는 생각과 행위라는 것이다. 바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기울이고 살아가라는 주님의 말씀이다. 이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과 이웃을 향하여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 이러한 은총을 주님께 구하면서 기도하고 은총을 구하도록 하자.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 20)
-한상우신부-
마음을 살리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깨끗한 마음이 구원의 보편된 마음입니다.
깨끗한 마음에서 보게되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마음이 깨끗해져야 갇혀있는 곳에서 우리가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주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길입니다.
마음을 보는 것이 복음의 시작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삶은 모두를 소중한 형제 자매로 받아들입니다.
모든 존재의 소중함이며
모든 존재의 고귀함입니다.
모든 나쁜 것들을 주님께 봉헌합니다.
마음이 살아야 행복할 수 있는 우리의 삶입니다.
사람과 마음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마음을 더럽힌 사람을 더럽힌 모든 것들을 예수님께서는 깨끗이 씻어주십니다.
깨끗해져야 할 우리의 마음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 안에서 우리는 마음속에 무엇을 간직해야 하는지 배웁니다.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마르 7,15).
바리사이, 율법 학자들과 전통 논쟁이 끝난 뒤 예수님께서 군중을 가까이 불러 말씀하십니다. 음식이나 사물, 심지어 사람에게까지 부정과 금기의 프레임을 씌워 구분하는 못된 행위를 지적하시는 겁니다.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고 밝히신 것이다"(마르 7,19).
이 말씀을 바꾸어 표현하면, 모든 피조물은 깨끗하고, 모든 인간은 깨끗하며, 하느님의 말씀에서 나온 모든 존재는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불결함과 부정함의 요인은 외부에 있지 않고 각자의 내면에 있습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20).
사실 우리 안에 온갖 악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부정하게 만드는 가능성이 외부에 있지 않고 내면에 존재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우리 자신의 관심을 받아 활성화되면 외부로 표출되어 자신과 타인을 공격하는 악의 꼴을 갖추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이면서 동시에 세상과 육신의 영향 아래 있기 때문에, 내면에 선과 악이 공존하며 긴장 상태를 유지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받은 은총과 모상성보다, 부정하고 더럽고 어두운 악을 더 주목하고 건드리고 허용할수록, 악은 힘을 받아 더 커지고 드세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 영혼은 불쌍하게도 그 악에 휘둘려 더 피폐해질 뿐이지요. 그러니 영성 생활에서는, 우선 자신 안에 있는 악한 것들을 인정하되, 거기에 함몰되지 않고 오히려 시선을 들어 하느님을 향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참으로 신비스럽고 매력적인 여인이 등장합니다. 바로 스바 여왕입니다.
"여왕은 솔로몬에게 와서 마음속에 품고 있던 것을 모두 물어보았다"(1열왕 10,2).
요즘같이 교통이 발달한 시대도 아닌데 한 여왕이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사막을 지나고 국경을 건너는 험한 여행길에 오릅니다. 지혜를 찾는 그녀의 여정은 그녀가 마음 저 깊이에서부터 지혜를 갈망하는 여인임을 증명합니다.
"지혜를 듣는 이 신하들이야말로 행복합니다"(1열왕 10,8).
이방인 여왕의 입을 통해 솔로몬의 지혜와 하느님의 영광이 고백됩니다. 게다가 현자 가까이에서 지혜를 듣는 이들의 행복 또한 일깨우지요. 이렇게 지혜를 알아보는 이 역시 지혜의 사람일 공산이 매우 큽니다.
분명 복음에서는 사람의 마음이 온갖 악의 온상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스바 여왕은 마음속에 이토록 강렬히 지혜에 대한 갈망과 사랑을 간직할 수 있었을까요? 이 질문을 우리에게로 돌리면, 그토록 죄 많고 부족하고 악한 우리가 어떻게 죄악에 주저앉지 않고 은총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묻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사실 예수님 말씀처럼 우리 안에 온갖 악이 들어있는 것 맞지요.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마르 7,21-22)들 입니다 조금만 멈추어 성찰해 보아도 "저는 아니겠지요?" 하며 짐짓 모른 체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답을 오늘의 복음 환호송에서 찾습니다.
"주님, 당신 말씀은 진리이시니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소서"(복음 환호송).
진리가 우리를 거룩하게 해 주십니다. 우리가 자신 안에 온갖 더럽고 추하고 악한 죄를 안고 살면서도 지혜이신 말씀, 진리이신 말씀에 지치지 않고 머무르면, 그 말씀이 우리를 깨끗이 정화하고 거룩히 성화하여 주십니다. 말씀은 듣는 우리를 흡수하여 당신과 닮은 존재로 형성하고 창조하는, 살아있는 힘이십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가 더 낮추어질 수 없을 만큼 비천하고 초라한 죄인일망정 말씀께서는 우리게 다가오셔서 머무르시기를 마다하지 않으십니다. 그 말씀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실 것이니, 온 힘을 다해 지혜를 구합시다. 온 마음으로 진리를 찾고, 온 존재로 예수님께 달려갑시다.

내 마음보 안에는?
-김찬선신부-
종교 중에는 금기 음식이 있는 종교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슬람교는 먹어도 되는 할랄과 안 되는 하람 음식이란 것이 있고,
유대교도 코셔라는 먹어도 되는 것과 먹으면 안 되는 것이 있으며
불가의 스님들에게도 금하는 음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신채五辛菜 곧 파, 마늘, 달래, 부추, 흥거를
스님들에게 금하는 이유는 그것이 수행을 방해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듯
이슬람이나 유대교에서 금하는 음식도 원래는 건강상의 이유나
영적인 이유로 부정한 음식이라 하고 먹지 못하게 했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개신교인들이 종종 시비하는 술도 예수님께서 그 자체로 부정하다 하지
않으시고 불충한 종의 비유에서 다만 만취를 조심하라 하셨을 뿐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먹보요 술꾼이라는 비난을 받으실 정도로
먹고 마시는 것에 구분을 두거나 구애받거나 하지 않고 드셨습니다.
사실 술이 나쁜 것이 아니라 술을 먹는 사람이 나쁘고,
모든 사람이 나쁜 것이 아니라 술을 나쁘게 먹는 사람이 나쁜 거지요.
제가 나쁘게 먹는다는 표현을 한번 써봤습니다.
보통 잘못 먹는다는 표현을 쓰는데
잘못 먹는 것은 먹고 난 뒤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을 말하지요.
술을 먹고 좋은 대화를 깊이 나누고 화해를 하면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에
그렇게 마시는 것은 좋게 잘 마시는 것이며 술도 좋은 것이 되게 하고,
반대로 분노와 불만 상태에서 술을 마시면 자학적으로 술을 마시고
그래서 실수를 하거나 남에게 피해를 주게 되는데
이것이 술을 나쁘게 잘못 먹는 것이요 술이 나쁜 것이 되게 하는 거지요.
흔히 '우리 좋게 잘해보자!'라고 말한곤 하지 않습니까?
모든 것이 좋도록 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지요.
반대로 나쁘게 되도록 하는 것이 잘못하는 것이고요.
그런데 좋게 되게 하거나 나쁘게 되게 하는 것이 다 마음의 작용입니다.
마음이 고우면 마음보를 곱게 쓰고 놀부처럼 마음이 악하면 마음보를
나쁘게 쓰고 자기 욕심만 차리고 나쁜 짓을 골라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마음보/심보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 생각에 마음보나 심보는 하나의 보자기 같은 것이어서 예를 들어 도둑놈
심보라면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는
주님 말씀대로 그 안에는 온갖 나쁜 것만 들어차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보를 근원적으로 곱게 또는 나쁘게 쓰게 하는 것이 정신입니다.
정신이 옳게 박히면 마음보를 옳고 좋은 일에 곱게 쓰고,
썩어빠진 정신을 가지고 있으면 하는 짓이 마음보를 나쁜 짓에 쓰게 됩니다.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냐 하면 오늘 주님께서 마음 안에 있는 나쁜 것
열세 가지에 대해 말씀하셨고 그래서 그중에 저는 몇 가지를 가지고 있나
헤아려보니 안 가지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살인이나 간음을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안 할 거지만
마음 안에 살의는 있고 음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미워할 때마다 우리는 마음 살인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너무도 미워서 '저런 인간 없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마다 마음 살인을 한 거라는 얘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육의 정신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의 생각이나 지향을
하느님이 아니라 나 자신과 세상으로 향하게 하고,
마음보를 온통 자기 욕심을 챙기고 나쁜 짓을 하는데 쓰게 할 것이고,
프란치스코의 말대로 기도와 헌신의 정신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의 모든 생각과 지향이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데
쏠리고 그래서 하는 짓이 다 착한 행위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는 어떤 정신이
내 마음보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너희는 내 말을 새겨들어라. 무엇이든지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더럽히는 것은 도리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마르7,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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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수준은 자신의 나쁜 생각을 어느 정도나 통제할 수 있느냐에 의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마음에서 생각이 나오고 생각에서 행동이 나옵니다. 따라서 마음만 통제할 수 있다면 생각도 통제되고 그러면 자신을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 안에서 나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 등으로 다양하게 말씀하시지만, 이 모든 것은 세속-육신-마귀의 삼구로 통합됩니다. 그리고 세속-육신-마귀의 욕구는 단 하나인 ‘자아(ego)’라는 원천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생각을 통제하려면 자아를 통제하면 됩니다.
저는 에덴동산에서 하와와 대화했던 뱀을 자아로 보고 있습니다. 세상에 죄와 고통이 들어온 것은 하와가 뱀을 뱀으로 보지 못한 데서 비롯됩니다. 우리도 어쩌면 우리 자아를 좋은 것으로 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자아는 오직 믿음의 발로 밟아야 통제됩니다. 저는 최대한 자주 “저는 죽었습니다. 저는 예수님입니다!”라는 기도를 반복합니다. 이 기도 안에는 믿음이 들어있습니다.
이 기도는 바오로 사도의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19-20)라는 말을 제 나름대로 짧게 만든 것입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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