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11일 연중 제5주간 화요일
2020년 2월 11일 연중 제5주간 화요일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고집하고 있다.
(마르코 7,1-13)
You disregard God's commandment
but cling to human traditio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솔로몬은 자신이 지은 성전이 보잘것없음을 고백하고 용서해 주십사고 하느님께 간청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이 전통을 어기고 있다고 따지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에게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켜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을 두고 흔히 ‘정결법 논쟁’이라고 부르지만 이는 정확한 표현이 아닙니다.
음식을 먹기 전에 한 움큼의 물로 손을 씻어야 한다는 규정은 율법이 담긴 모세 오경 그 어느 곳에도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규정은 전통에 따라 이어진 관례일 뿐이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쟁점은 왜 ‘율법’을 지키지 않는지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말마따나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만든 전통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는 이들의 태도를 지적하십니다.오늘날 우리는 어떤가요? 전통을 고수한다는 이유로 하느님의 뜻을 애써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이 점에 있어 프란치스코 교종(교황)께서 보여 주신 모습은 우리에게 일러 주는 바가 큽니다.
머무르셨던 숙소 비용을 직접 계산하시고, 바티칸의 관저가 너무 크다며 그 대신에 사제들이 묵는 게스트 하우스에서 지내십니다.
또 고급 방탄차가 아닌 일반 차량을 타시고 사람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시기도 합니다.생각해 보면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예전 교종들께서 하신 방식 그대로 하신다고 하여도 그 누구도 비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늘 당연시하던 관례를 다시 복음의 빛에 비추어 과감하게 포기하시는 모습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시려고 교종께서 얼마나 노력하고 계신지 느낄 수 있습니다.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빌려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관습과 규정을 하느님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위선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뭐 하는 거야? 네 엄마 어딨어?”
아이는 울먹이다가 울음을 터뜨립니다. 바로 그때 이 형제님의 아내로 보이는 분이 형제님을 나무라며 말합니다.
“왜 애를 혼내요? 아이는 버튼 누르는 것을 좋아하는 것 몰라요?”
그리고 아이에게 “버튼 누르는 것은 괜찮은데 이렇게 모두 눌러 놓으면 바쁜 사람들이 화난단다. 다음에는 이렇게 하면 안 돼요. 알았지?”라며 아이를 다독이고 이렇게 해서는 안 되는 이유까지 말씀해주십니다.
아이는 보통의 아이들처럼 좋아하는 것을 했을 뿐입니다.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이유조차 모릅니다. 그래서 억울해서 울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을까요? 자신의 잘못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하는 말과 행동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는 착각까지 겹쳐서 더욱더 인간관계를 힘들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들은 자신들이 완전하다고 여기는 생활 방식을 따랐고, 자기네 방식이 다른 어떤 것보다 낫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손을 닦지 않는 예수님 제자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를 따끔하게 혼내십니다. 남의 잘못만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잘못은 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만 그럴듯한 모습이 아닌 우리의 내적 지향을 보시는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들은 하느님의 법에 어긋나는 가짜 규정을 덧붙이면서도 자신들이 생각이 옳다면서 그 생각이 율법에 근거한다는 논리를 세웁니다. 대표적인 예가 부모 공양에 대해 ‘코르반’이라고 말하면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부모가 굶주리는데도 자녀는 제물 봉헌만으로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보시는 우리의 내적 지향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에 기초하지 않는 어떤 판단도 주님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살아가는 것이 곧 죽어가는 것이고, 죽어가는 것이 곧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살았다는 것은 오늘 하루 죽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렇게 삶과 죽음은 서로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죽음을 기억하면서 지금을 살아야 합니다. 이제 더는 되돌릴 수 없는 오늘이라는 삶을 죽음 앞에 후회하지 않도록 보내야 합니다.
예전에 읽은 책에서, 말기 암 환자로 살아가는 저자는 이 세상 안에서 많이 너그러워질 수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게 되고 화를 내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이게 죽음 앞에서 해야 할 일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저절로 용서와 사랑을 품게 된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기억하며 사는 삶은 더 이상 후회를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합니다. 지금 삶의 의미를 계속 되뇌며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더 높은 가치의 중요성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안고 사는 삶이 필요합니다.

인정받으려는 마음이 있다면 인전받지 못한다
-전삼용신부-
어느 대학에 시험은 많이 보았으나 성적을 매기지 않던 한 영어 교수님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교수님은 첫 시험을 치룬 후에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시험을 볼 때 저에게 좋은 성적을 기대하며 보지 마십시오. 시험은 제가 여러분에게 평가를 받는 시간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여러분의 실력에 점수를 매기십시오.”
그러고는 시험지를 각자에게 나누어주고 각자가 점수를 매겼습니다. 학생들은 그 시험지를 다시 회수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교수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점수가 여러분이 저를 평가한 점수입니다. 다음번엔 저를 좀 더 잘 평가해 주시고 시험지는 여러분이 가져가시기 바랍니다.”
어쩌면 시험은 좋은 점수를 받아 선생님께 인정받기 위함이 아니라 내가 선생님을 평가하고 내가 나를 평가하는 도구인 것입니다. 선생님은 학생들의 시험성적으로 변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반 아이들의 성적이 더 뛰어나다는 것은 그만큼 아이들이 선생님을 믿고 인정하고 사랑했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치르라고 주신 시험지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우리가 율법을 얼마나 잘 지키는지 관심이 없으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잘 지킨다고 그분이 변하실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가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주님을 더 믿고 감사하여 좋은 변화를 이끌어냈다는 증거가 됩니다. 따라서 율법을 얼마나 잘 지키고 못 지키는가는 내 스스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체크하는 도구이지 하느님이나 이웃에게 인정받으려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꾸중을 듣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의 관습법으로 하느님의 율법을 교묘하게 어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율법이 있지만 그들은 부모에게 드릴 것이라도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 더 잘하는 일이라고 말하며 행동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당장 돈이 필요한 분은 하느님이 아니라 부모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부모를 봉양하지 않고 드리는 예물은 기쁘게 받으시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부모는 세상에서 창조자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참여한 작은 하느님들이시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창조자를 공경하지 못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공경한다고 말하기에 그것은 위선이 되는 것입니다.
왜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이 하느님께 사랑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을까요? 율법으로 자기가 자기 자신을 평가했어야 하는데 그것으로 하느님께 평가받으려 했고 이웃에게 평가받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 저 잘했죠? 이 정도면 인정받을만하죠?”라고 말하는 것이고, 이웃들에겐 “내가 너보다 하느님 마음에 더 드는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것이 됩니다. 풀어서 말하면 “하느님은 제가 이 점수를 받아야만 저를 인정해주시는 군요.”라고 하느님을 판단하는 것이고, “하느님은 점수에 따라 우리를 차별하시는 분이야!”라고 말하는 것이 됩니다.
이렇듯 자신이 하는 행위로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으려하면 그 누군가가 그 평가로 자신을 인정해주는 인정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이미 인정받으려고 하는 마음 안에 상대를 인정 없는 분으로 여긴다는 마음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인정받으려면 결국 인정받지 못하게 됩니다. 율법은 내가 나 자신을 판단하는 도구인데, 율법주의는 그것으로 내가 하느님과 이웃에게 평가받으려는 행위입니다.
퇴계 선생은 젊은이들을 모아 가르치면서 열심히 공부하여 큰 그릇이 되라고 건물구조 자체를 공(工)자로 설계해서 지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강의실 전관에 ‘박약제’란 현판을 걸어 두었습니다. ‘박약제’란 말의 뜻은 ‘박’자는 박사할 때의 박(博)자이고 ‘약’자는 절약할 때의 약(約)자입니다. 학문은 넓히고 예절은 줄이라는 뜻입니다. 이조 5백 년 동안 유교의 예절이 너무 번거로워 백성들의 삶을 위축시켰기에, 퇴계 선생은 지나친 예절의 폐해를 살피고 후학들에게 학문에 더 에너지를 쏟으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율법은 좀 줄이고 복음에 집중합시다. 행위로 인정받으려하지 말고 이미 인정받았다는 복음을 믿읍시다. 인정받았음을 믿을수록 스스로 메기는 율법점수는 저절로 더 높아질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사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로마 3,28)

-조재형신부-
오늘은 압구정((狎鷗亭)과 반구정(伴鷗亭)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압구정은 조선시대 최고 권력을 지녔던 한명회((韓明澮)가 지은 정자입니다. 지금 그 정자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작은 표시석만 있다고 합니다. 압구정의 의미는 갈매기와 친하게 지낸다는 뜻입니다. 한명회의 삶은 친하게 지내기는 하지만 자신의 권력과 부를 과시하였습니다. 자신의 뜻에 어긋나는 사람은 제거하였습니다. 그의 화려함의 뒤에는 살생부(殺生簿)가 있었습니다. 권력의 정점에 있었지만 흔적도 없이 사라진 압구정처럼 그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냉정합니다. 생육신의 한명인 김시습은 한명회에 대해서 ‘젊어서는 나라를 망치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힌다.’라고 혹평했습니다.
반구정 역시 조선시대 최고 권력을 지녔던 황희(黃喜)정승이 지은 정자입니다. 지금도 반구정은 임진강 강가에서 찾아오는 사람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습니다. 반구정의 의미도 갈매기와 친하게 지낸다는 뜻입니다. 권력과 부를 과시하는 친함이 아니고, 동등하게 함께하는 친함입니다. 황희 정승이 반구정에서 지는 해를 바라볼 때 사람들은 그가 황희 정승인줄도 몰랐다고 합니다. 한명회의 삶은 적과 아군을 나누는 삶이었습니다. 적은 제거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황희 정승의 삶은 시비(是非)를 가리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바른 것은 이야기하지만 그른 것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아름다운 자연과 하나가 되고 있는 반구정처럼 황희 정승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따뜻합니다.
예루살렘에는 올리브 산이 있습니다. 산의 정상에는 주님의 승천을 기념하는 성당이 있고, 그 아래에는 주님의 기도를 기념하는 성당이 있습니다. 조금 아래로 내려오면 주님께서 예루살렘의 앞날을 생각하며 비탄에 잠겨 눈물을 흘리셨다는 기념 성당이 있습니다. 주님의 눈물 성당에서 정면을 바라보면 화려한 황금색의 사원이 보입니다.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승천한 걸 기념하는 사원입니다. 그 곳에는 바위가 있는데 아브라함이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했던 바위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그곳에 솔로몬의 성전이 있었다고 합니다. 2000년 전 무너져 내린 성전의 벽이 남아 있는데 유대인들은 그 벽을 ‘통곡의 벽’이라고 부릅니다. 가톨릭은 그곳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묻히신 곳이라고 합니다. 같은 장소에 유일신을 믿는 3대 종교가 함께 하고 있습니다.
같은 공간에 서로 다른 역사의 시간이 있었고, 지금은 한 지붕 세 가족이 ‘평화의 도시’에 함께 머물고 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도, 예수님의 무덤도, 무함마드의 승천도 시간이 흐르면서 또 다른 변화를 맞이할 겁니다. 그렇다면 변하지 않는 건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입니다. 그것만이 유한한 시간과 유한한 공간에 머물 수밖에 없는 우리가 영원한 삶을 향해 나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하느님, 당신 종의 기도와 간청을 돌아보시어, 오늘 당신 종이 당신 앞에서 드리는 이 부르짖음과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당신 뜨락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천 날보다 더 좋사옵니다. 하느님의 집 문간에 서 있기가, 악인의 천막 안에 살기보다 더 좋사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 자애를, 사람들에게 베푸신 그 기적을. 그분은 목마른 이에게 물을 주시고, 굶주린 이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네.”

헛되이 섬겨서는 안된다
-반영억신부-
오늘 복음은 유다인의 전통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관습이 있었는데, 왜 손을 씻게 되었는가는 관심이 없고 손을 씻지 않았다는 것에만 마음을 둔 것을 지적해 줍니다. 사실 모든 음식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육적인 생명양식으로써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합당한 마음으로 먹기 위해서는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은 기본적인 예의였습니다.
위생적인 의미도 있지만 정화의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미사전례 때에 참회예절이 있듯이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과 예의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그 내용은 잊은 채 전통을 고집하면서 알맹이를 소홀히 하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기 지켜야 할 전통과 관습이 있지만 그것을 시대와 상황에 따라 재해석하고 쇄신할 수 있어야 미래에 희망이 있습니다. 더욱이 사람의 전통은 사람의 전통일 뿐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계명을 대신 하거나 거기에 맞설 수는 없는 법입니다. 아무리 좋은 전통이라 해도 그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법이 훼손된다면 그 전통은 마땅히 쇄신되거나 부정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2,2)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인용하여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마르7,6-7). 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알맹이보다도 껍데기에 마음을 빼앗긴다면 여전히 같은 꾸중을 들을 것입니다. 내용보다도 형식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강조하며 거기에 얽매이다 보면 우리의 예배는 헛되고 헛된 행위가 되고 맙니다. 따라서 우리는 전통을 중요시 하되 그 의미와 내용을 제대로 알고 합당한 예배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좋은 전통과 관습이라 하더라도 하느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좋은 것이 아니니 마땅히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간혹 “부득이 주일미사 참례를 못하여 주님의 기도 33번을 하였는데 고해성사를 봐야 되느냐?” “몸이 불편한데 미사전례 때 앉고, 일어서고, 꿇는 것을 따라 해야 하느냐?” “얼마 전에 고해 성사를 봤는데 판공성사를 또 봐야 하느냐?” 라고 묻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런 질문에 대답을 일일이 해 드려야 합니까?
중요한 것은 내가 행하는 것의 의미와 내용을 알고 거기에 얼마나 충실하였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명하신 바에 얼마나 사랑으로 응답하느냐의 문제 입니다. 법은 함부로 무시하여서도 안 되고 내 입맛에 맞게 합리화시켜서도 안 되느니 만큼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전통과 관습을 지켰으면 좋겠습니다. “말로나 혀끝으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합시다.” 우리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헛되이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 7,6-8)-
-이영근신부-
예로부터 어디서나 ‘먹는 문제’가 항상 제일 예민합니다. 싸움 중에서도 ‘밥그릇’ 싸움이 가장 치열합니다. 공동체에서도 가장 말 많고 힘든 소임지가 바로 주방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첫 번째는 3,22절에 나옴)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도 예수님께 먹는 것을 가지고 많은 시비를 겁니다. 안식일에 제자들이 벼이삭을 따먹었다고 문제 삼는가 하면,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고 문제 삼고, 또 단식하지 않는다고 문제 삼기도 하고,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손을 씻지 않고 먹는다고 시비를 겁니다. 소위 정결법에 대한 논쟁입니다.
그런데 손 씻는 정결법은 율법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시비의 준거로 내세운 것은 “조상들의 전통”(구전율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하느님 신앙의 핵심과는 상관없는 일로 당시의 사회를 이끌어가던 전통방식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이를 마치 하느님의 뜻인 양 호도하여 종교적 권위를 덧붙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히려 하느님의 계명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관습을 앞세우는 어긋난 행동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레위기> 11장의 정결법에 의거하여 음식물만 깨끗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음식을 먹는 사람이 깨끗하여야 한다는 내용을 잘못 적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음식을 먹는 사람이 깨끗해야 한다는 것은 몸의 깨끗함이 아니라 마음의 깨끗함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를 잘못 적용하여 손을 씻는 예법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시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 7,6-8)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마르 7,9-13)
오늘날 우리도 ‘사람의 규정’을 지키려다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사회적 관습이나 자기가 만들어 놓은 ‘자기의 규정’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막상 하느님 방식인 ‘복음의 정신’을 놓칠 때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남북의 갈라진 형제와 화해하고 서로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이 법으로 제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죄라고 규정하는 법을 지키며 살아갑니다. 또 갈라진 형제를 칭찬하고 고무 찬양하는 것이 금기시 되고, 심지어는 형제를 주적이니 가상적 적으로 간주하고 죽이는 연습을 하고 살아가는 황당한 사회 속에 살아가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니, 먼저 우리 몸에 배어 있는 잘못된 관습이나 전통들, 그리고 잘못 배운 교리나 가르침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할 일입니다. 또한, 자기가 만들어 놓은 자기 규범이나 자신의 방식이 옳다고 주장하기에 앞서, 먼저 복음의 정신과 하느님의 뜻에 의탁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마르 7,8)
주님!
몸에 밴 잘못된 관습과 전통에 매여, 당신의 계명을 거스르지 않게 하소서.
틀에 맞춘 잘못된 지식과 신념을 지키려다, 당신의 사랑을 거스르지 않게 하소서.
나의 옳음을 주장하기에 앞서, 나 자신을 지키기에 앞서, 당신을 사랑하는지를 묻게 하소서.
제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이,
제가 원하는 하늘나라가 아니라 당신이 원하시는 하늘나라가 되게 하소서. 아멘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송영진신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마르 7,1-2).”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 7,5-8)”
여기서 ‘조상들의 전통’이란, 옛날의 유명한 학자들이 정해 놓은,
‘할라카’ 라고 부르던 ‘신앙생활에 관한 지침들’을 가리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그 지침들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고,
그래서 그것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음식을 먹기 전에 ‘정결 예식’을 행하는 것은 그 지침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여기서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
라는 말은, “음식을 먹기 전에 반드시 행하라고 ‘할라카’에 규정되어 있는
정결 예식을 행하지 않고서 그냥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를 인용해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위선’을 꾸짖으십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관습과 전통만 중요하게 여기고 따르면서,
하느님의 계명은 제대로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인 것처럼 사람들을 가르치는 자들인데,
그것은 하느님을 헛되이 섬기는 것이고, ‘입술로만’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거짓 신앙생활, 위선’일 뿐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인간 세상의 전통이나 관습을, 또는 사람이 정한 규정을
‘하느님의 계명’보다 위에 둘 수는 없다.”
사람이 정한 규정이나 인간 세상의 전통과 관습은
‘하느님의 계명’을 잘 실천하기 위한 세부 실천 지침으로만 그쳐야 합니다.
만일에 ‘세부 실천 지침’이 ‘하느님의 계명 실천’과 반대되는 일이 생긴다면,
그 실천 지침을 없애야 합니다.
(마실 물도 부족해서 늘 갈증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손 씻는 예식부터 거행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오늘날의 상황으로 바꿔서 생각한다면,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고 있는 사람에게
‘공복재’를 지키라고 강요하는 것은 옳은 일일까?
‘사랑 없이’ 율법 준수만 강요하는 것, 그것이 바로 율법주의입니다.
그런 율법주의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입니다.)
2) “‘하느님 나라의 법’, 또는 ‘신앙생활을 위한 법’을 제정하는
‘입법자’는 하느님뿐이다.”
인간은, 인간들을 위해서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법을
충실하게 지켜야 하는 존재일 뿐입니다.
만일에 인간들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법을 마음대로 만든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월권행위가 되고,
하느님과 같아지려고 했던 아담과 하와의 죄를 다시 짓는 일이 됩니다.
(선과 악을 결정하는 것은 하느님의 권한입니다.)
3) “하느님의 계명들과 율법들을 해석하는 일과 실생활에 적용하는 일은,
그 계명들과 율법들에 들어 있는 본래의 정신과 의도대로 해야 한다.”
‘안식일 율법’이 좋은 예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안식일 율법 때문에 바리사이들과 충돌한 일이 많은데,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는 무조건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라고 주장했고,
그러면서 그들은 안식일에는 사랑 실천과 선행 실천도 안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은 사랑과 선행을 실천하는 날이다.” 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르 2,27; 마르 3,4).
(사랑과 선행 실천은 평소에도 늘 해야 하는 일이지만,
안식일에는 특히 더 잘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하느님께서 안식일을 정하신 것은, 무조건 일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하루도 쉬지 못하고 일만 하는 사람들도 쉴 수 있도록
휴식을 보장해 주라는 뜻이었습니다(신명 5,12-15).
(이것은 사랑 실천이 안식일의 근본정신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위선을 꾸짖으시는 말씀 다음에 나오는,
‘코르반 관행을 꾸짖으시는 말씀’은,
율법을 잘못 해석하고, 잘못 적용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
모세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누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제가 드릴 공양은 코르반, 곧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입니다.’ 하고 말하면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마르 7,9-13).”
예수님 말씀을 단순하게, “너희는 하느님을 핑계 대면서
불효를 저지르는 큰 죄인들이다.”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효도를 하기 싫어서 하느님을 핑계 대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큰 죄입니다.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도 큰 죄이고, 불효죄도 큰 죄입니다.)
십계명 제1계명인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 라는 계명과
제4계명인 “부모에게 효도하여라.” 라는 계명은
모순 관계도 아니고, 대립 관계도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은 가정생활도(효도도) 잘하는 법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가정생활을(효도를)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혹시라도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 라고 말씀하셨다.” 라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 말씀은, 가족에 대한 인간적인 애착과 집착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힘으로 작용할 때의 경우에 관한 말씀이지,
가족을 버리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르 7,1-13: 조상들의 전통
바리사이는 ‘분리된 자’라는 뜻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완전하다고 여기는 생활 방식을 따랐고, 자기들이 다른 사람들과는 구별된다고 즉 낫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켰는데,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루카 18,12 참조), 의례적으로 놋그릇과 접시와 잔을 닦고(참조: 마태 23,25; 마르 7,4), 십일조를 바치고 맏물을 봉헌했으며(참조: 마태 23,23; 루카 11,42), 많은 기도문을 바쳤다(루카 5,33 참조). 그래서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6절; 이사 29,13)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보신다. 롯의 아내는 어땠는가? 그 여자가 한 것이라고는 세상 부패를 향하여 의지적으로 머리를 돌린 것이 전부인데, 감각 없는 소금기둥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창세 19,26 참조) 그 마음이 하느님과 거리가 먼 죄악의 생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까닭이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질책하신다. 즉 하느님을 공경한다고 하면서 관습에 얽매어 있기 때문에 하느님과는 멀다는 의미이다. 식사 전에 손을 씻는다는 것이 관습을 따르는 것이라고는 할 수 있으나 하느님을 섬기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리고 인간의 전통이나 관습을 하느님의 계명인양 가르치지 말라고 하신다.
그러시면서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계명을 들어 그것을 이행하지 않는 행위를 질책하고 계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제4계명, 신명 5,16).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탈출 21,17; 레위 20,9)고 하면서 가난한 부모는 자녀에게서 부양받아야 하고, 자녀들은 연로한 부모에게 받은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하셨는데, “코르반”이라고 하면서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아무 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고 하신다.
코르반 서약문은 물건을 하느님께 바쳐 다른 사람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서약문이다. 그 의미는 “제가 제대에서 약속하고 성전에 봉헌하기로 서약한 선물이 당신 영혼에 힘을 불어넣어 줄 터이니 제가 당신을 공양할 필요는 없습니다.”(11절 참조)라는 뜻이다. 이렇게 인간의 전통을 핑계 삼아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그래서 부모와의 사이가 좋지 않으면 코르반 서약문을 이용해서 부모의 봉양을 저버리기도 하였다. 이렇게 부모가 굶주리는 데도 그 자녀는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이 게걸스레 먹어 치울 제물을 봉헌하는 일이 생기기도 하였다. 하느님께 바쳤다는 핑계로 부모께 대한 의무를 쉽게 저버리는 썩은 서약이 되어 버렸다.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버렸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형식적인 것을 지적하시면서, 진정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은 이런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데 있다는 점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우리의 삶이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되겠다. 외적인 형식이 중요하지 않다. 외적인 형식도 중요하지만 그 안에 담긴 본래의 뜻을 알고 실천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우리에게서 율법주의적인 모습을 떨어내고 참된 하느님의 자녀인 신앙인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 7, 8)
-한상우신부-
계명과 전통은
공동체를
아름답게 하는
가장 중요한
질서의 본질입니다.
모든 삶의
참된 바탕과
질서는 언제나
사랑의 하느님께
있습니다.
하느님이
중심이 되십니다.
계명은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신앙인들의 참된
질서입니다.
이 원칙이
허물어지면
공동체또한
망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안에서
인간의 참모습을
만나게됩니다.
하느님의 계명과
결합해야 할
우리의 여정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전통이 가장 중요한
마음을 잃어버리면
기계적인 소음과
독소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식과 허위의
전통을 벗어나게
하십니다.
우리 삶에
빠져있는 것이
다름아닌
하느님을 향한
사랑임을 절실히
깨닫는 시간입니다.
버려야 할 것이
아닌 다시 살려야 할
생명의 질서들입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들 안에서는 하느님의 것과 인간의 것이 조화를 이루기도 하고, 대립하기도 합니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마르 7,9).
예수님의 몇몇 제자가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다고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이의를 제기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하느님의 것(계명)과 사람의 것(전통) 사이의 질서를 바로 세워 주시지요.
"성경"(마르 7,6)
"하느님의 계명"(마르 7,8)
"하느님의 말씀"(마르 7,13)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중요하며, 삶과 예배의 근간이 되는 본질을 일러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친히 내리신 "계명"을 받은 민족으로서, 예언자를 통해 들려주시는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는 이들이며, 그 기록인 "성경"을 소유한 특별한 백성입니다.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마르 7,13).
그런데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이 잣대 삼아 사람을 판단하는 근거는 "조상들의 전통"(마르 7,3)과 "관습"(마르 7,4)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만들어낸 전통과 관습이 하느님의 말씀과 계명을 밀어내고, 심지어 우위를 차지하는 듯 보이는 현실을 지적하십니다.
인간은 무지몽매한 시야와 편협한 자기중심성으로 하느님의 것과 인간의 것을 전복시켜 질서를 교란해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에게서 본래 받은 선물이 무엇이었는지 잊어버리고 열심히 포장지만 덧씌우거나 장식하며 무게와 부피만 키워가고 있는 중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성전을 봉헌하는 솔로몬의 아름다운 기도가 울려퍼집니다.
"기도"(1열왕 8,23.28.29.)
"간청"(1열왕 8,28.30)
"부르짖음"(1열왕 8,28)
솔로몬의 기도에 반복해 등장하는 이 말씀들은 인간의 위치와 처지, 실존을 드러냅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기도하고 간청하고 부르짖는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 앞의 인간은 그가 의식하건 의식하지 못하건 '기도하는 존재'입니다.
"들어 주십시오"(1열왕 8,28.29.30)
"살피시어"(1열왕 8,29)
"용서해 주십시오"(1열왕 8,30)
솔로몬은 하느님께서 듣고 살피고 용서하는 분이심을 고백합니다. 하느님의 지혜를 받은 그는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인식하는 현자입니다. 그는 인간의 얕은 꾀로 하느님의 자리를 넘보거나 사람의 것과 뒤바꾸지 않습니다. 아무리 호화롭게 임금의 영화를 누리고 있어도 자신이 들으시고 살피시고 용서하시는 하느님 앞의 작은 자임을 잊지 않습니다.
오늘 솔로몬이 하느님께 지어 바친 성전은 그런 하느님과 그런 인간이 만나는 장소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그런 하느님과 그런 인간이 하나 되는 순간이지요.
복음 안에 등장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진정 진리와 영 안에서 기도하고 예배하는 사람들이었다면, 하느님의 자리와 인간의 자리를, 하느님의 것과 인간의 것을 뒤바꾸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기도 안에서 하느님과 하나가 된 이는 오히려 그분과 자신 사이의 관계성과 질서를 더 명확히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당신 앞에서 걷는 종들에게 당신은 계약을 지키시고 자애를 베푸시는 분"(1열왕 8,23).
그분과 우리의 접점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관습이나 전통 너머에 자리하는 그분의 마음과 생각, 뜻을 헤아리며 마음을 다해 그분 앞을 걸어갑니다. 그분은 부족한 채로 더 사랑해 보려고 까치발로 종종걸음을 치는 우리의 진심을 보시고 당신 약속을 기억해 자애를 베푸십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 나의 삶 안에는 하느님의 것과 사람의 것이 제자리에 놓여 있는지, 나의 기도 안에서 하느님은 하느님이시고 나는 나인지 돌아보는 하루 되셨으면 합니다. 하느님과 하나 됨은 두서없는 뒤섞임이나 뒤엉킴이 아니라 각자의 자기다움이 근간을 이룰 때 일어나는 신비입니다.

사람보다 일이 잘못되는 것이 낫다
-김찬선신부-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
오늘 주님께서는 정결례를 어긴 제자들을 비판하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을 오히려 나무라시는데
그런데 제자들은 어찌하여 정결례를 지키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예수님은 정결례를 아예 무시하시는 건가요?
당시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키는 정결례를 어긴 것은
정결례를 무시하신 예수님과 함께 다니다 보니 제자들의
간댕이가 부어서 한 짓이 아닐까 생각이 되는데 그런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정결례를 아예 무시하신 것은 아닐 겁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손은 더러운 것이 좋다고 하셨겠습니까?
이왕이면 손이 깨끗한 것이 좋고 요즘같이 전염병이 있을 때는 더더욱
손을 깨끗이 하는 것이 좋은데 그런 정결 강조를 나쁘다 하시겠습니까?
손이 깨끗한 것이 나쁘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속이 더럽고 겉만 깨끗한 것이 나쁘다 하시고,
뇌물을 받는 손이 더럽고 나쁘다고 하신 거지요.
마찬가지로 정결례가 나쁜 것이 아니라 정결례라는 인간 전통 때문에
더 중요한 것 곧 하느님의 계명을 아주 간단하게
어기거나 소홀히 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하시며,
그 한 예로 코르반 곧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을 핑계로
부모에 대한 효도와 사랑을 소홀히 함을 나무라십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에게는 그 어떤 것도 사랑보다 중요할 수 없고
중요해서는 안 되는데 아주 하찮은 것 때문에 사랑을 거스르고,
그런 것 중 가장 흔한 것이 옳고 그름 때문에 사랑을 거스르는 겁니다.
제일 옳은 것이 사랑하는 것이고.
제일 그른 것이 사랑하지 않는 것인데
일을 그릇되게 하거나 잘못한다고 미워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지요.
일이 좀 잘못되면 어떻습니까?
일이 잘못되는 것은 사람이 잘못되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일을 잘하라고 닦달을 하고 일이 잘못되면 가혹하게 야단을 쳐서
사람이 비뚤어지거나 감정이 상해서 관계가 틀어지거나 하잖습니까?
그리고 많은 경우 더 큰 잘못은
옳고 그름이나 잘잘못의 기준이 자기라는 점입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그것이 꼭 보편적으로 옳은 것이거나
하느님 보시기에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자기 기준에 맞지 않는 것을 틀렸다고 하고,
더 나아가서 자기에 맞추라고 요구까지 하는데 이것은 폭력이지요.
사실 물리적인 폭력만 우리는 폭력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물리적인 폭력만 폭력이 아니고 감정적인 폭력 그중에서 미움이나
분노의 표출이 어찌 보면 물리적인 폭력보다 더 나쁠 수도 있지요.
여기까지 묵상하는 오늘 저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고집하고 있다.(마르코 7,1-13)
예루살렘에는 올리브 산이 있습니다. 산의 정상에는 주님의 승천을 기념하는 성당이 있고, 그 아래에는 주님의 기도를 기념하는 성당이 있습니다. 조금 아래로 내려오면 주님께서 예루살렘의 앞날을 생각하며 비탄에 잠겨 눈물을 흘리셨다는 기념 성당이 있습니다. 주님의 눈물 성당에서 정면을 바라보면 화려한 황금색의 사원이 보입니다.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승천한 걸 기념하는 사원입니다. 그 곳에는 바위가 있는데 아브라함이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했던 바위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그곳에 솔로몬의 성전이 있었다고 합니다. 2000년 전 무너져 내린 성전의 벽이 남아 있는데 유대인들은 그 벽을 ‘통곡의 벽’이라고 부릅니다. 가톨릭은 그곳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묻히신 곳이라고 합니다. 같은 장소에 유일신을 믿는 3대 종교가 함께 하고 있습니다.
같은 공간에 서로 다른 역사의 시간이 있었고, 지금은 한 지붕 세 가족이 ‘평화의 도시’에 함께 머물고 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도, 예수님의 무덤도, 무함마드의 승천도 시간이 흐르면서 또 다른 변화를 맞이할 겁니다. 그렇다면 변하지 않는 건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입니다. 그것만이 유한한 시간과 유한한 공간에 머물 수밖에 없는 우리가 영원한 삶을 향해 나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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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내가 행하는 것의 의미와 내용을 알고 거기에 얼마나 충실하였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명하신 바에 얼마나 사랑으로 응답하느냐의 문제 입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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