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2월 7일 연중 제4주간 금요일

Margaret K 2020. 2. 6. 19:39

2020년 2월 7일 연중 제4주간 금요일


예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마침내

그 소문이 헤로데 왕의 귀에 들어갔다.

어떤 사람들은 “그에게서 기적의 힘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죽은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 틀림없다.”하고 말하였다.

예수의 소문을 들은 헤로데 왕은 “바로 요한이다.

내가 목을 벤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마르6,14-29)

 

King Herod heard about Jesus,

for his fame had become widespread,
and people were saying,
“John the Baptist has been raised from the dead;
that is why mighty powers are at work in him.”
Others were saying, “He is Elijah”;
still others, “He is a prophet like any of the prophets.”
But when Herod learned of it, he said,
“It is John whom I beheaded. He has been raised up.”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다윗은 주님께 찬미의 노래를 불렀으며, 주님께서는 다윗의 죄악를 용서하신다(제1독서). 헤로데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자신이 죽인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났다고 여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헤로데의 폭력으로 세례자 요한이 죽게 된 이야기입니다. 

헤로데 임금이 동생의 아내 곧 제수인 헤로디아와 혼인하자, 세례자 요한이 이를 두고 여러 차례 잘못된 행실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헤로데는 그 말에 불편해하면서도 세례자 요한이 군중에게 많은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생일잔치에서 적절한 기회가 닿아 세례자 요한을 죽이고 맙니다.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항상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항변을 하기 마련입니다.
헤로데에게도 그럴 만한 나름의 타당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대중의 지지를 받는 세례자 요한이 자신을 자꾸 비방하고 나서면 국가 분열이 일어나 안정된 정치를 할 수가 없으니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고 항변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국가의 요직에 있는 사람들이 참석한 생일잔치에서 약속을 어기기라도 하면, 자신의 권위가 실추되어 국정을 운영하는 데에 차질이 생길 것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이유가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을 정당화하지는 않습니다.폭력을 당한 사람은 신음 소리를 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그들의 소리를 듣고 계십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의 목이 잘릴 때 그가 외쳤던 비명도 하느님께서는 가슴 아프게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모른 체하시지 않으십니다.
이를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의 폭력 때문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폭행을 당하는 사람들의 편에 서셨고, 그 폭력의 악을 폭로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가 폭력을 행사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명시적으로 거스르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헤로데가 되는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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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선배 신부님을 제 차에 태우고 어디를 가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가다가 기름을 넣어야 할 것 같아 근처 주유소에 들어갔지요. 주유를 끝내고 기름을 넣은 뒤에, ‘무료 세차’라는 문구를 보고서 세차를 했습니다. 그런데 앞 유리가 깨끗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세차 직원에게 앞 유리에 무엇이 묻은 것 같으니 한 번만 더 닦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직원이 한 번 더 닦았지만 깨끗하지가 않더군요. ‘차 유리에 문제가 있나?’라고 생각하면서 포기하고 시동을 걸려고 할 때, 옆에 타고 있던 신부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안경 좀 닦아야겠다. 차 유리가 아니라 네 안경이 지저분해.”

안경을 닦고 나니 세상이 밝아 보입니다. 차 유리가 지저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제게 문제가 있었던 것인데 차 유리 때문이라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사실 이런 모습을 취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나는 문제가 없고 남에게만 문제 있다고 늘 힘주어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곰곰이 따져보면 나한테 문제가 있을 때가 더 많았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가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로부터 죽임을 당한 뒤에 헤로데에게 안 좋은 일만 계속 생겼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헤로디아가 자기 형제의 아내였음에도 불구하고, 페트라의 임금 아레타스의 딸인 합법적인 처와 이혼하고, 아직 남편이 살아 있는 헤로디아를 남편과 헤어지게 해서 자기 아내로 삼습니다. 이런 행동이 옳지 않음을 세례자 요한이 여러 차례 말해왔고, 이에 대한 앙심을 품던 중에 헤로디아 딸의 춤값으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참수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딸의 모욕에 대한 복수로 페트라의 임금 아르테스가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와 헤로데의 군대가 전멸한 것입니다. 그래서 헤로데 본인은 그 원인을 세례자 요한 때문이라고 단정을 하고 예수님의 등장에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그는 죄 없는 세례자 요한뿐 아니라,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잘못된 판단 하나는 자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늘 제대로 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죽음이 아니라 생명의 길로 모든 이를 이끌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저분하고 뿌연 세상이 아니라 밝고 환한 세상을 만들 수가 있습니다.
진정한 발견은 새로운 땅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으로 보는 것이다(마르셀 프루스트).



누군가에게 줄 수 있는 상처

이상하게도 차만 타면 졸음이 쏟아집니다. 물론 제가 직접 운전할 때에는 그렇지 않지만, 남이 운전하는 차를 타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잠에 빠집니다.

얼마 전에도 다른 신부가 운전하는 차를 탔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조수석에 앉아 있으면 운전하는 사람을 위해서 잠을 자지 않으려고 노력하겠지만, 뒷좌석에 앉아 있었기에 편안한 마음으로 잠을 잔 것 같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한 신부가 이렇게 말합니다.

“어떻게 차에서 그렇게 편하게 잘 수 있어? 코까지 골면서 신나게 자던데? 너무 잘 자서 얄밉더라.”

앉아서 자는 것이 편한 잠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불편한 상황에서도 아주 꿀잠을 잤습니다. 이 모습을 불면증을 겪는 사람이 보면 어떨까요? 부럽기도 하고 또 얄밉기도 할 것입니다.

단순히 잠만 잔 것일 뿐인데도 누군가에게 또 하나의 상처도 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자기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늘 겸손한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죄는 핑계대지 않는다

-전삼용신부-


 AP연합 통신은 40년간 죄책감으로 시달려온 어느 노인의 이야기를 보도했다고 합니다. 그 노인은 아무에게라도 자기 죄를 고백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아 이대로 지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워싱턴의 한 은행에서 수천 달러에 달하는 돈을 횡령한 지 40년이 지나서야 죄를 자백하고 자수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재판부에 회부되자 재판장 앞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제가 40년 동안 이 죄의 문제로 인해 압박을 받아왔으나 최근 들어 나를 너무나 무겁게 짓누르는 통에 도저히 견딜 수 없었습니다.”

모든 진술을 다 들은 재판장은 말했습니다.

“이 경우에는 이미 공소시효가 많이 지났기 때문에 벌금이 부과되지 않습니다.”

      죄책감은 그것을 죄로 고백하고 합당한 보속을 하여 공적인 용서를 받을 때 사라집니다. 우리에게는 죄책감을 없앨 수 있는 ‘고해성사’란 큰 선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고해성사를 보려면 자신의 죄를 인정하여 겸손하게 고백하고 보속을 당연한 마음으로 받아서 행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나를 고통스럽게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각자 다른 시선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와 같은 예언자라고도 말합니다. 오늘의 주인공 헤로데는 그 다양한 예수님을 향한 시각들 가운데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를 선택합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인정하고 그분께서 우리를 하느님 자녀로 만들기 위해 당신 살과 피를 내어주러 오셨음까지 믿지 못하면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러니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의 믿음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한 번 죽였던 요한을 두 번 못 죽일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요? ‘핑계’를 대는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고 하듯, 세상에 어떠한 죄도 핑계 없이 짓는 죄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 안에 “그것은 죄야!”라고 말해주는 양심이 있기에 우리는 죄를 짓기 전에 항상 적당한 핑계를 먼저 찾습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랬어.”, “회사에 안 좋은 일이 있어서.”, “애들이 속을 썩여서.”, “상대가 먼저 잘못한 거야.”, “너라면 이런 상황에서 안 그랬겠어?”와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이건 죄가 아닐 거야!’라는 생각이 들면 이미 죄를 지은 것입니다. 죄가 아닌 것처럼 생각하려고 핑계를 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는 그 자체로는 핑계를 대지 않습니다. 그 죄를 짓는 사람이 핑계를 댈 뿐입니다. 그리고 그 죄의 값은 반드시 치르게 되어있습니다. 핑계 대는 것을 좋아하다보면 헤로데처럼 결국 구원에서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고해성사 때도 부쩍 ‘상담’을 하러 들어오시는 분들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사제로부터 위로받고 싶은 것은 이해하겠으나, 그러다가는 고해성사까지도 죄의 합리화의 도구가 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헤로데와 같은 상황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헤로데가 구원을 받으려면 “저는 죄를 지었습니다. 주님의 자비에 의탁합니다.”라고 말했어야 합니다. 죄는 핑계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죄는 죄라고 깨끗이 인정하고 고백합시다. 그리고 고해성사로 주님의 자비에 의탁합시다. 그래야 진정으로 깨끗해지고 그 눈으로 예수님을 바로 알아볼 수 있어 구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며칠 전, 서유기(西遊記)에 대한 평론을 들었습니다. 서유기를 직접 읽지는 않았지만 어린 날 라디오에서 서유기를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지금도 생각납니다. 손오공의 주문 우랑바리 다라나 바로웅 무따라까 따라마까 쁘라냐서유기에는 삼장법사,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이 등장합니다. 손오공은 대단한 능력을 지녔지만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였습니다. 능력과 재능을 추구하는 현대인도 많은 재물을 소유하지만 분노를 조절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저팔계는 은하수의 별을 관리하는 직책을 가졌지만 식욕과 색욕을 조절하지 못하였습니다. 탐욕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채우려고 하면 더욱 갈증이 나기 마련입니다. 사오정은 옥황상제를 지키는 호위무사였지만 식별하는 능력이 부족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그 이유를 모르고 방황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은 도시라는 광야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삼장법사는 특별한 능력은 없지만 마음을 다스릴 줄 알았습니다.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한걸음씩 나갔습니다. 분노와 탐욕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길은 마음을 다스리는 겁니다. 세상에 온 목적을 알고, 목적을 알았다면 충직하게 걸어가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깨달음의 길이고, 열반의 길입니다.

 

진복팔단(眞福八端)에 대한 해석을 읽었습니다. 성지순례에서 진복팔단 성당을 다녀왔기에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야곱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사다리를 보았듯이, 진복팔단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주는 사다리와 같다고 합니다. 사다리는 아래부터 밟고 올라가야합니다. 첫 번째 칸은 비움입니다. 욕심이 가득한 사람은 결코 사다리를 오를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칸은 회개입니다.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지 못하는 사람은 사다리를 오르지 못합니다. 세 번째 칸은 온유함입니다. 열등감이 있는 사람, 원망하는 사람은 사다리를 더 이상 오르지 못합니다. 가난한 사람, 우는 사람, 온유한 사람은 이제 더 높은 칸으로 오르게 됩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고, 기꺼운 마음으로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게 됩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옳은 일을 하고, 정의를 위해 헌신합니다. 햇빛이 공평하게 비추듯이, 비가 공정하게 내리듯이 하느님은 모든 이를 사랑하십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화를 얻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평화입니다. 참된 평화를 얻은 사람은 박해와 시련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진복팔단의 사다리입니다. 사도들은 이 사다리를 타고 하느님께로 나아갔습니다. 순교자들은 이 사다리를 타고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셨습니다.

 

헤로데는 권력, 재물, 명예를 가졌지만 탐욕, 분노,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생로병사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참된 행복의 사다리를 보지 못했고, 오를 생각도 없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권력, 재물, 명예는 없었지만 탐욕, 분노, 어리석음에서 자유로웠습니다. 참된 행복의 사다리를 보았고, 기쁜 마음으로 올라갔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순교하였고, 천국에서 빛나는 신앙의 별이 되었습니다.

그는 모든 일을 하면서 거룩하고 지극히 높으신 분께 영광의 말씀으로 찬미를 드렸다. 그는 온 마음을 다해 찬미의 노래를 불렀으며 자신을 지으신 분을 사랑하였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하리라.”


헛된 맹세를 하지마라

-반영억신부-

 

여자는 기념일을 먹고 살고, 남자는 체면을 먹고 산답니다. 여자는 쉽게 감동하기에 그렇고 남자는 자존심을 세워주면 어깨가 으쓱해집니다. 그렇다고 자존심을 건 맹세를 함부로 할 것은 아닙니다.

 

헤로데 왕은 요한이라는 인물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습니다(마르6,20). 그런데 그에게 곤란한 일이 생겼습니다.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는데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게 되었습니다. 왕은 헤로디아의 딸이 손님들을 즐겁게 해 주었기에 그에게 원하는 선물은 무엇이든 주겠다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헤로디아의 딸은 어머니의 바람대로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마르6,25).하고 요구하였습니다. 너무도 당혹스런 일입니다. 헤로디아는 요한이 자기의 결혼에 대하여 잘못되었다고 얘기했기 때문에 앙심을 품고 있었던 터였습니다. 앙심을 품는 사람은 남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욕심의 노예가 되어 그 앙갚음의 기회를 딸을 통해서 하게 된 것입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더니……,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이미 약속한 것이고 또 손님들이 보는 앞이라 그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습니다(마르6,26). 그래서 결국은 요한의 목을 베게 되었습니다.

    

 의인의 목숨과 자존심을 건 헛된 맹세에서 하나를 선택했거늘 그 놈의 자존심이 뭔지? 체면이 뭔지? 악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 다만 할 것은 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 라고 만(야고5,12)해야 합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에, 의로운 일에 자존심이 좀 상하면 어떻고 체면이 좀 손상되면 어떻습니까? 요한과 헤로데, 홀로 정의를 외치다가 죽어가는 한 예언자의 모습과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의롭고 정의롭게 사는 사람의 목숨까지 빼앗아가는 나약하기 짝이 없는 왕의 모습이 극적으로 대조되고 있습니다. “도둑이 제발 저린다.”라는 말이 있듯이 헤로데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불안감을 마음에 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내가 목을 벤 요한이 되살아났구나.”하고 말하였습니다. 혹 내 무의식 속에 감추어둔 무엇인가가 있어 불안하다면 고해성사를 통해 그 불안을 해소하기 바랍니다. 매듭은 풀어야 합니다. 풀지 않고 놔두면 세월이 흘러도 풀리지 않은 채 그대로 있는 법입니다.

    

 가정에서도 직장 안에서도 그리고 어떤 공동체 안에서든 더 큰 것을 위해서 자존심이 상하고, 체면에 손상을 입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안에 그리스도의 기쁨과 평화가 함께 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자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비천하게 살줄도 알며 풍족하게 살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을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필리4,12-13).

    

 능력을 주시는 분을 힘입어 어떤 처지나 여건 안에서도 꿋꿋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는 것이요, 그것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위신, 체면을 지켜야 할 때 지키십시오! 자존심을 내세워야 할 때 내세우십시오! 그리고 헛것인줄 알았으면 곧 버리십시오! 서둘러 버리십시오! 정말로 승리한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고 패배한 사람은 헤로데임을 잊지 마십시오.

    

 헤로데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과 권한을 남을 위해 사용하기보다 자신의 안일과 욕망을 위해 권력을 남용함으로써 세례자 요한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 왔고 스스로 죄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요한은 항상 예수님의 삶을 미리 닦는 선구자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남을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으셨습니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예수님을 닮기를 갈망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동생의 아내를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전해줍니다. 엘리야의 영과 권능을 지닌 세레자 요한은 엘리야가 아합 임금과 이제벨 여왕을 꾸짖었던 것처럼, 헤로데와 헤로디아를 무섭게 꾸짖었습니다. 그들의 결혼이 합법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어둠이 빛을 싫어하는 까닭입니다. 사실, 더러운 이들에게 정결함은 오히려 적수가 되고, 타락한 이들에게는 고결함이 오히려 괴로움이 됩니다. 잔인한 이들은 자비를 보면 참지 못하고, 인정 없는 이들은 사랑과 진실을 참지 못하고, 불의한 이들은 정의를 참지 못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곤경에 빠집니다.

오늘 <복음>에는 의인과 악인의 극한 대조를 보여줍니다. 한편에는 음모를 꾸미며 속임수를 쓰며 악의에 찬 헤로디아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진실하고 강직하며, 그 어떤 거짓에도 굴하지 않는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한편에는 폭군이지만 무능력한 헤로데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참수당하지만 힘 있는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한편에는 혀를 다스리지 못한 헤로데가 있고, 그의 혀는 잔치에서 맹세하지만 결국 타인의 죽음을 부르고 불의를 가져옵니다. 다른 한편에는 혀가 곧은 요한이 있고, 그의 혀는 감옥에 갇히지만 자신의 죽음을 허용하되 의로움을 이룹니다. 그리하여 헤로데가 받은 것은 요한의 머리지만 두려움이 되고, 세례자 요한이 받은 것은 쟁반이지만 월계관이 됩니다.

한편,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죽음을 예표해 줍니다. 한 푼 춤 값으로 팔려버린 세례자 요한의 목숨은 어찌 보면, 참으로 억울한 죽음처럼 보입니다. 마치, 은전 30냥에 팔려버린 예수님의 목숨처럼 말입니다. 헤로디아의 조정을 받은 소녀가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주기를 요청하듯, 사제들과 유대 원로들의 조정을 받은 군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외치게 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머리가 쟁반에 올려 지듯, 예수님의 온몸이 십자가 위에 올려 질 것입니다. 이처럼, 의인 요한의 죽음은 야훼의 종인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보여줍니다.

그러나 올가미에 걸려 넘어진 이는 의인이 아니라, 폭군이었습니다. 거짓을 꾸미는 악인의 혀는 결국 자신이 쳐놓은 덫에 걸려 넘어지고, 진실된 의인의 혀는 영광의 관이 씌워졌습니다.

그렇습니다. 헤로데가 요한의 머리는 베었어도, 그의 소리는 벨 수가 없었습니다. 혀는 잠잠하게 만들었지만, 그 소리는 가라앉힐 수가 없었습니다. 감옥에 묶어 두어도 외치고, 죽어서 쟁반 위에서도 살아 외칩니다. 세월이 흐를지라도 폭군의 죄악을 고발하는 의인의 외치는 소리는 계속될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박혀서도 있어도 침묵으로 외칩니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우스는 말합니다.

침묵 안에 완성되어 있는 하느님 사랑의 외침을 들으십시오.”


이제 우리도 진리와 정의를 위해 외치는 법을 배워야 할 일입니다. 또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무관심의 세계화가 남을 위해 우는 법을 빼앗아 가버린 이 시대에, 남을 위해 우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할 일입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마르 6,25)


주님!

제 혀가 거짓을 꾸미지 않고, 진실 되게 하소서.

타인을 뭉개지 않고, 자신을 뭉개어 내어주게 하소서.

헛된 맹세로 덫에 걸려들지 않고, 침묵에 묶어 두어도 의로움을 외치게 하소서.

어둠을 가르는 불혀가 되고, 진리를 밝히는 말씀의 쌍날칼이 되게 하소서! 아멘.


세례자 요한과 헤로데

-송영진신부-


구세주를 잘 맞이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것이
세례자 요한의 임무였습니다.
복음서에는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와 헤로디아의 결혼을 비판했다가,
그것 때문에 살해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왕의 사생활을 비판한 일도 세례자 요한의 임무 수행의 일부입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을 싫어했거나 그를 죽이고 싶어 했던 사람들은
헤로데와 헤로디아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당시의 기득권층 사람들은 대부분,
또 자기는 회개해야 할 죄가 없다고 생각했던 위선자들은 대부분,
세례자 요한을 싫어했고, 죽이고 싶어 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죽였을 때,
당시 사람들은 그 일에 대해서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데,
왕의 권력의 힘이 무서워서 침묵을 지킨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세례자 요한을 죽이는 것에 찬성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일에 아무 관심도 없었던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결과만 놓고 보면, 세례자 요한의 임무 수행은 실패입니다.
그러나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충실하게 임무를 수행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의 임무 수행은 성공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어떤 임무를 맡기시면서
결과물을 내놓으라고 명령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 임무를 얼마나 충실하게 수행하는지를 보시는 분입니다.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은 것은 세례자 요한의 잘못이 아니고,
또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아서 구원받지 못한 것은 그의 책임이 아닙니다.
회개하기를 거부한 사람들 자신들의 책임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대해서 말할 때,
“그것이 바로 예언자들의 숙명이다.” 같은 말을 할 때가 많은데,
하느님의 예언자들이 거의 대부분 박해를 받았고,
목숨을 잃은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그렇게 죽는 것이 예언자들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은 아닙니다.
(‘원래’ 그렇게 되도록 정해져 있는 운명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예언자들이 박해받고 죽는 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사람들을 모두 회개시켜서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마태 18,14).
만일에 헤로데와 헤로디아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이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를 받아들여서 회개했다면,
요한이 박해받고 죽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과는 반대로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능력이 부족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회개와 구원을 거부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또 하느님께서 그렇게 될 것을 아시면서도 내버려 두신 것은 아닙니다.
인간들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기 때문에
회개도 각자 스스로 하기를 바라시면서 기다려 주신 것입니다.
어떻든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인간들의 범죄입니다.

‘헤로데’ 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서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라고
헤로데가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마르 6,16),
이 말을 ‘양심의 가책’에서 나온 말이라고 해석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양심의 가책’이나 ‘죄책감’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자기가 요한을 죽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말입니다.

< ‘양심의 가책’이나 ‘죄책감’으로 해석하면,
“죄 짓고는 못 산다.” 라는 주제로 강론을 할 수 있으니까 편리하긴 한데,
복음서 전체 내용을 종합해서 볼 때,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죽인 다음에 양심의 가책이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고,
오히려 더 자신감을 얻어서 예수님까지 죽이려고 했습니다(루카 13,31).>

또 복음서에는 세례자 요한을 미워하고 죽이려고 한 것은 헤로디아였고,
헤로데는 요한을 보호하려고 노력한 것처럼 보이는 구절이 있는데(마르 6,19-20),
이것은 조심해서 번역하고 해석해야 할 구절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죽이려고 붙잡아서 감옥에 가둔 사람은
헤로디아가 아니라 헤로데였습니다(마르 6,17).
그리고 헤로디아가 세례자 요한을 죽이려고 하는 것을 헤로데가 막은 것은,
적당한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선 먼저 여론의 동향을 살펴 본 다음에 요한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마르코복음 6장 20절의,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라는 말의 뜻은,
“요한을 참 예언자로 생각하고 있는 백성의 여론이 어떻게 움직일지 몰라서,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설득하면서,
헤로디아가 요한을 죽이려고 하는 것을 말렸을 뿐만 아니라”입니다.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라는 말의 뜻은, “헤로디아와 결혼한 일을 비판하는 말은 듣기 싫어하면서도,
혹시라도 자신의 여러 가지 불순한 호기심들을
요한이 충족시켜 주지나 않을까 기대하면서, 요한을 자주 감옥에서 불러내서
쓸데없는 질문들을 하는 것을 즐겼기 때문이다.”입니다.
그리고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이라는 26절의 말은,
세례자 요한을 죽이는 것이 괴로웠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의 경솔함을 손님들이 비웃을까봐 괴로워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헤로데는 원래부터 회개할 가능성이 전혀 없었던,
또는 원래부터 구원받을 가능성이 전혀 없었던 악인이었나?
아닙니다. 태어날 때부터 악인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태어날 때부터 성인으로 태어나는 사람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백지 상태로 태어나서, 성인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성인이 되고,
자기 욕망대로 막 살면 악인이 됩니다.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를 꾸짖고 비판한 것은 그를 회개시키기 위해서였고,
헤로데 같은 사람도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준으로 삼아서 생각하면, 헤로데도 ‘잃은 양’입니다.

그렇지만 헤로데 자신이 스스로 ‘목자를 거부한 양’이 되기를 선택했습니다.
(헤로데의 영혼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는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서 귀양살이를 하다가 죽었는데,
죽기 전에라도 회개했을지... 아니면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했을지...)  


-조욱현신부-


복음: 마르 6,14-29: 세례자 요한의 죽음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16) 예수님의 명성과 업적의 소문이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지고 이제는 헤로데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그는 그 소문을 듣고 당황한다. 자신이 지은 죄 때문이다. 그는 부정한 죄를 지었고 그것을 계속 지적한 요한을 죽인 것까지 항상 마음에 부담을 갖고 있는데 예수님의 소문은 그를 더욱 당황하게 만들었다. 세례자 요한을 죽인 죄책감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요한은 헤로데가 혼인의 계명을 파기하는 것을 보고, 광장에서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18) 하고 외쳤다. 우리는 동료들도 똑같이 꾸짖어야 한다는 것을 요한에게서 배운다. 충고는 우리의 의무이다. ‘나와 무슨 상관인가? 나는 그 사람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마귀하고만 상관없지, 모두 같은 축복을 받도록 초대받은 사람들이다. 헤로데는 꾸짖음을 들으면서도 그의 말을 기꺼이 들었다고 한다.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주겠다.”(23) 호사스러운 왕실에서 죽음의 잔치가 열리고, 평소보다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을 때, 왕비의 딸을 불러와 춤을 추게 한다. 그 딸이 간통한 어머니에게서 무엇을 배웠겠는가? 헤로데는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한다. 얼마나 어리석은 맹세인가? 헤로데는 소녀의 춤 한 판에 왕국을 넘겨줄 만큼 욕정에 사로잡힌 포로였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이 어린 소녀의 춤 한 판에 자기 영혼을 넘겨주고 있지 않은가?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25) 여인에 대한 사랑이 이겼다. 여인은 헤로데가 거룩하고 의롭다고 여기던 사람에게 손을 대게 만들었다. 자신의 음행을 다스리려 하지 않은 탓에 그는 살인죄를 저지르고 말았다. 진절머리를 치며 내쳤어야 할 간통한 여인을 갈망한 까닭에,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인물로 알고 있던 세례자 요한의 피를 보고 말았다. 헤로데가 괴로워 한 것은 참회를 한 것이 아니라, 자기 죄에 대한 고백을 한 것뿐이다. ‘손님들때문이다.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28) 헤로데는 자기 혀 하나도 다스리지 못하고 살인을 저지르고 만다. 그 머리를 헤로디아에게 주자, 그 여자는 심판관을 살해함으로써 모든 것을 해결했다고 기뻐했을 것이다. 자녀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말려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여기서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왕의 잘못에 대해 자신의 위험을 생각지 않고 끝까지 지적할 수 있었던 그분의 예언자적 정신과 자세이다. 예언자는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항상 하느님의 뜻을 전한 사람들이다. 여기에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예언자들은 항상 진리 편에서 그것을 증거했기 때문에 항상 박해를 받았고 죽임을 당해 왔다. 우리 자신이 이 시대의 예언자가 되어야 한다.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마르 6, 16)

-한상우신부-

한 사람이 죽으면
하나의 세상또한
죽습니다.

사람이
있고나서야
헤로데 임금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세상은
그냥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모든 삶의
기본이 되는 것은
생명존중입니다.

이 기본이
허물어지면

모든 것은
아주 순식간에
허물어져버립니다.

우리가 우리를
찾는 유일한 길은
생명에 대한
사랑입니다.

가장 마지막까지도
사랑입니다.

사랑에 가장
위험한 존재는
언제나
우리자신입니다.

서로에 대한
존중이 깨어지면
그 어떤 것도
안전한 곳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서로를 살리는
생명의 참된
여정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우리는 두 명의 하느님 사람을 만납니다. 다윗과 세례자 요한입니다.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마르 6,18).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등장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준비시키는 소명을 이어갔습니다. 평범한 백성에서 임금에게까지 정의와 진실을 촉구하는 그의 목소리는 거침이 없었지요.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은 그의 가르침과 경고를 받아들였지만 이미 견고한 기득권을 획득한 종교 지도자들과, 스스로 보편 윤리 위에 있다고 여기는 권력자들은 그를 불편해합니다. 그 대표적 인물이 바로 당대 최고의 권력이라 할 수 있는 헤로데, 헤로디아였습니다.

"의롭고 거룩한 사람"(마르 6,14).
전혀 다른 가치관을 사는 사람에게까지 인정받기란 쉽지 않은 일임에도, 권력과 욕정에 눈이 먼 헤로데에게조차 세례자 요한은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헤로데의 진심은 딱 여기까지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진리에 대해서는 관대할 수 있습니다. 굳이 핏대를 세워가며 두둔하거나 반대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 사람의 진실은, 그 진리가 자신을 직접적으로 압박하고 도전해 올 때 드러납니다.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마르 6,26).
결국 경솔하고 허세 가득한 맹세와 체면이 그의 발목을 잡습니다. 세례자 요한에게 가졌던 헤로데 나름의 호의에 대해 마르코 복음사가가 여러 차례 언급을 해준다 한들 결과는 이렇습니다. 세기의 의인 세례자 요한은 한 소녀의 춤값, 권력자의 체면치레, 불륜의 입막음용으로 죽음을 당하게 되지요.

제1독서는 우리에게 이스라엘의 대표적 성군 다윗을 보여 줍니다.

"다윗은 염소 새끼들과 놀듯 사자들과 놀고 양들 가운데 어린양과 놀듯 곰과 놀았다"(집회 47,3).
이 말씀은 우리를 이사야서의 한 대목(이사 11,1-9)으로 초대합니다. 메시아의 도래, 경쾌하고 따사로운 평화의 왕국을 노래한 부분이지요. 기름부음받은이 다윗은 이스라엘을 이방인 억압에서 구원하여 평화를 이루고 왕국의 기틀을 세운 메시아의 전형입니다.

"그는 온 마음을 다해 찬미의 노래를 불렀으며"(집회 47,8).
집회서 저자는 전쟁에서 보여준 다윗의 용맹함 못지않게 그의 기도를 높이 평가합니다. 다윗은 하느님과 관계성 안에서 살았습니다. 우리는 이를 거룩하다고 표현하지요. 게다가 그는 스스로도 늘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면서, 온 백성이 공식적으로 하느님과 관계를 유지하도록 성전에서 울릴 찬미와 찬양의 노래, 시, 제도까지 마련하였지요.

"다윗은 ... 자신을 지으신 분을 사랑하였다"(집회 47,8).
이 말씀 안에 다윗의 정체성과 복의 근원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다윗의 무수한 허물에도 불구하고 그가 역사 안에 성군으로 남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사랑"입니다. 부족한 이의 이 "사랑"을 귀하고 애틋이 보아 주신 하느님 덕분이지요.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 백성으로 살아가는 의롭고 거룩한 길을 외치다가 목숨을 잃습니다. 세상 눈으로 보면 억울하고 불운한 죽음이지만, 영의 눈으로 보면 그의 탄생에서부터 죽음까지는 하느님께 올리는 오롯한 찬미였지요. 의무만으로 해치울 수 없는 이 소명의 원동력이야말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삶의 과정 안에서 벌어지는 어떠한 일도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서 출발해 그 사랑을 향해 가고 있다면, "실패"란 우리와 관계 없는 이방 언어입니다. 그분께 올리는 우리의 찬미가 이 세상에서 설령 죽음으로 표현된다 하여도 그렇습니다. 나는 지금 무엇으로 어떻게 주님을 찬미하고 있습니까? 주님께 대한 뜨거운 사랑이 어떤 경로로 표현되어 올려지고 있나요? 적어도 헤로데가 택한 욕망과 허세와 체면치레의 길이 아니라면 피흘리는 순교에까지 이르지는 못했어도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현재 벗님의 삶이 가난하고 부끄럽고 내세울 것 없는 그런 삶이어도 좋습니다. 온 존재를 다해 주님을 사랑하며 찬미 드리는 오늘 되시기 기도합니다. 그러고 있다면 벗님도 이미 의롭고 거룩한 사랑의 사람,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다윗과 헤로데

-김찬선신부-

http://www.ofmkorea.org/ofmhomily/316086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6년 2월 5일 연중 제4주간 금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예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마침내 그 소문이 헤로데 왕의 귀에 들어갔다. 어떤 사람들은 “그에게서 기적의 힘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죽은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 틀림없다.”하고 말하였다. 예수의 소문을 들은 헤로데 왕은 “바로 요한이다. 내가 목을 벤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마르6,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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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인정하고 그분께서 우리를 하느님 자녀로 만들기 위해 당신 살과 피를 내어주러 오셨음까지 믿지 못하면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러니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의 믿음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되지 못합니다.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이건 죄가 아닐 거야!’라는 생각이 들면 이미 죄를 지은 것입니다. 죄가 아닌 것처럼 생각하려고 핑계를 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는 그 자체로는 핑계를 대지 않습니다. 그 죄를 짓는 사람이 핑계를 댈 뿐입니다. 그리고 그 죄의 값은 반드시 치르게 되어있습니다. 핑계 대는 것을 좋아하다보면 헤로데처럼 결국 구원에서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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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노와 탐욕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길은 마음을 다스리는 겁니다세상에 온 목적을 알고목적을 알았다면 충직하게 걸어가는 겁니다그것이 바로 깨달음의 길이고열반의 길입니다.

진복팔단(眞福八端)에 대한 해석을 읽었습니다성지순례에서 진복팔단 성당을 다녀왔기에 새롭게 다가왔습니다야곱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사다리를 보았듯이진복팔단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주는 사다리와 같다고 합니다사다리는 아래부터 밟고 올라가야합니다첫 번째 칸은 비움입니다욕심이 가득한 사람은 결코 사다리를 오를 수 없습니다두 번째 칸은 회개입니다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지 못하는 사람은 사다리를 오르지 못합니다세 번째 칸은 온유함입니다열등감이 있는 사람원망하는 사람은 사다리를 더 이상 오르지 못합니다가난한 사람우는 사람온유한 사람은 이제 더 높은 칸으로 오르게 됩니다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고기꺼운 마음으로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게 됩니다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옳은 일을 하고정의를 위해 헌신합니다햇빛이 공평하게 비추듯이비가 공정하게 내리듯이 하느님은 모든 이를 사랑하십니다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화를 얻습니다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평화입니다참된 평화를 얻은 사람은 박해와 시련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받아들입니다이것이 진복팔단의 사다리입니다사도들은 이 사다리를 타고 하느님께로 나아갔습니다순교자들은 이 사다리를 타고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셨습니다.

-조재형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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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정에서도 직장 안에서도 그리고 어떤 공동체 안에서든 더 큰 것을 위해서 자존심이 상하고체면에 손상을 입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안에 그리스도의 기쁨과 평화가 함께 할 것입니다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자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비천하게 살줄도 알며 풍족하게 살줄도 압니다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을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필리4,12-13).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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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 자신을 지으신 분을 사랑하였다"(집회 47,8).
이 말씀 안에 다윗의 정체성과 복의 근원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다윗의 무수한 허물에도 불구하고 그가 역사 안에 성군으로 남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사랑"입니다. 부족한 이의 이 "사랑"을 귀하고 애틋이 보아 주신 하느님 덕분이지요.

-오상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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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은 간음죄를 덮으려고 살인죄를 지었고

헤로데는 잘못을 들춰내는 요한을 죽였지요

사실 죄를 덮으려는 것은 이 둘만이 아니라 우리 인간에게 공통적인 거지요

죄는 씽어서 버리든 치워서 버리든 버려야 하는 것인데

덮어버니는 것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 계속 남는 거지요


그래서 다윗과 에로데는 덮으려고 했덕 것까지는 같지만

다윗의 끝는 회개이고 그 헤로데의 끝은 여전히 죄인 것이 차이입니다.


시작은 같은데 결말이 다른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윗은 하느님 앞에 서 있고, 헤로데는 인간 앞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선 다윗은 죄를 뉘우치고 씨서주십사고

청원기도를 할 뿐 아니라 씻어주신 하느님께 찬미의 기도를 바침니다


"그는 모든 일을 하면서 거룩하고 지극히 높으신 분께 영광의 말씀으로 찬미를 드렸다.

그는 온 마음을 다해 찬미의 노래를 불렀으며

자신을 지으신 분을 사랑하였다."


재물이 없는 가난과 욕심이 없는 것도 가난이지만 실은

죄와 근심 걱정을 다 취워버리고 없는 것이 가난입니다.

순결과 가난은 이렇게 통하고 일치합니다.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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