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2월 3일 연중 제4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20. 2. 2. 19:47

2020 2월 3일 연중 제4주간 월요일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마르5,1-20)

  

"What do you want with me, Jesus,

son of the Most High God?

For God's sake I beg you, do not torment me."

He said this because Jesus had commanded,

"Come out of the man, evil spiri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다윗 임금이 압살롬의 반란으로 쫓기게 되자, 그는 주님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기기로 결심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에게 명령하신다.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과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마주칩니다. 

이 사람은 한마디로 죽음의 세력입니다.
이는 그가 무덤에서 살았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본디 무덤은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죽은 이들이 머무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이 사람은 사람들의 삶을 자꾸 죽음의 공포로 몰고 갔습니다.
그를 여러 번 족쇄와 쇠사슬로 묶어 두었지만, 이마저도 부수어 버리고,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며 돌로 제 몸을 쳤습니다.이렇게 게라사 지방은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진 곳이 되었고, 하느님의 영을 받아야 할 사람은 족쇄와 쇠사슬로도 다스리지 못하는 괴물이 되어 버렸습니다.
생명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죽음의 세력인 더러운 영에게 이르십니다.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이어서 부정한 짐승으로 여기던 돼지에게 도망치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그제야 게라사 지방은 죽음의 그늘에서 벗어나 생명의 빛을 향한 첫걸음을 떼었습니다.그런데 놀랍게도 게라사 주민들은 예수님께 자기들에게서 떠나 달라고 간청합니다.
아무리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셨다고 하여도, 이 일 때문에 생계에 가장 필요한 돼지 이천 마리가량이 죽어 속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죽음의 그늘에서 해방된 사실보다도 당장 먹고살 문제에 마음이 쓰일 뿐이었습니다.생계와 생명은 비슷하면서도 큰 차이가 있는 낱말입니다.
생계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을 지나치게 염려하고 걱정한다면 참생명을 알아보지 못하고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생계와 생명을 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한재호 루카 신부)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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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물음을 던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힘든데…. 주님께서는 저를 정말로 사랑하시나요?”

“이렇게 죄 많은 저를 주님께서 사랑하실까요?”

우리의 사랑은 조건을 찾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을 알고 확신하는 것이 바로 희망입니다. 그래서 희망을 품고 있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감사의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작년 말, 성지에 뜻밖의 일이 발생했습니다. 정전되었다가 잠시 뒤 다시 전기가 들어왔는데, 오류가 생겼는지 화재경보와 함께 스프링클러가 작동한 것입니다. 순간 동안 엄청난 물의 양이 쏟아졌습니다. 난리도 보통 난리가 아니었습니다.

정리하고 나니 오히려 감사의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미사가 없는 지하 성당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다는 것, 이를 통해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추운 12월이지만 그날은 너무나도 포근한 날이어서 물이 얼지 않았다는 것 등등 감사할 것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리고 갖게 된 생각은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게르사인들의 지방’은 ‘게르게사’로, 오늘날 티베리아스라고 불리는 호수 가까이 자리 잡은 오래된 도시입니다. ‘게르게사’는 쫓아낸 자들이 사는 곳이라는 뜻으로, 주님께 떠나 달라는 청을 했던 것이 이해됩니다.

바로 이 지방에 가셨다가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만납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챕니다. 그래서 엎드려 절하며 부탁하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호하십니다.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5,8)

군대라는 이름의 더러운 영은 예수님의 허락으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비탈을 내리달아 호수에 빠져 죽고 말지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될 것을 몰랐을까요? 이천 마리쯤 되는 돼지 떼의 죽음을 그냥 내버려 두신 것은 아닐까요?

주님의 소유인 사람을 마귀가 사로잡는 것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돼지 떼의 죽음보다 한 사람을 더 중요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네 사랑이 무사하기를, 내 사랑도 무사하니까(이도우).



참삶을 살기 위해…….

성경을 보면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루카 9,60)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 성경 말씀에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어떻게 죽은 이들이 다른 죽은 이들의 장사를 지낼 수가 있습니까?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우리 안에 죽어 있는 모든 것들과 마주하게 됩니다. 우리 안에 죽어 있고 경직된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반복된 일상, 내적인 공허, 경직된 마음 등이 바로 죽어 있는 것들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내버려 두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일에 집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어떻게 우리 안에서 다스리고 계신지를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보다 세상 것에 매여 있습니다. 그 안에서 힘들어하며 점점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이는 가혹하게도 점점 더 심해지면서 스스로를 어려움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힘든 상태로 만듭니다.

이제는 하느님께 집중해야 할 때입니다. 그래야 세상 것에서 벗어나 참으로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돼지들에게는 마귀가 들어가도록 허락하신다

-전삼용신부-


 영화 ‘거짓말’(2015)은 허언증 환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은 가난하고 알코올 중독자가 있는 불행한 가정의 모습을 받아들일 수 없어 밖에서는 거짓말만 하고 다닙니다. 자신은 그런 가정에 어울리지는 않는다고 믿습니다. 피부관리사로 직장에서 일을 하고는 있지만 일을 마치면 고급 집을 살 것처럼 둘러보기도 하고 비싼 차와 전자제품을 산다고 했다가 마지막에 핑계를 대며 다음에 오겠다고 합니다. 직장에서도 매우 부잣집 딸이라는 이미지를 주기 위해 일부러 없는 돈으로 비싼 차를 타며 거짓말에 거짓말을 덧붙입니다.

      결말은 어떻게 될까요? 정신없는 사이에 냉장고가 배달되어 돈을 날리기도 합니다. 자신의 이미지를 깎아내리는 가족들과 함께 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자연적으로 가족들과 사이가 멀어지게 됩니다. 직장에서는 그녀의 거짓말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한바탕 싸움을 하고는 쫓겨납니다. 홧김에 남자친구의 어머니에게 자신은 간호사가 아니라 여드름 짜는 일이나 한다며 솔직하게 말했다가 모든 게 끝장나고 맙니다. 모든 것과 단절된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런 지옥으로 이끌었던 것은 바로 그녀의 허영심 하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욕심’이 어떻게 본성을 타락시키고 어둠으로 끌어내리는지 보여주십니다. 이미 마귀들에 사로잡힌 사람은 ‘무덤’에서 살았고 누구도 그를 통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귀가 사람을 끌고 들어가는 ‘무덤’은 우리로서는 ‘지옥’의 상징으로 보면 됩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해서 그런 처지가 되었는지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원인을 알려주시기 위해 그 마귀들을 돼지 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돼지는 성경에서 부정한 짐승의 대명사입니다. 어떤 이들은 돼지고기를 먹느니 죽음을 택하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욕심’과 여러 다른 욕망들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돼지는 욕심에 찌든 인간의 상징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고 결국엔 지옥까지 끌고 가는 마귀를 불러들입니다.

      돼지가 모두 바다에 빠져 죽었을 때 그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몰아냈습니다. 떠나 주십사고 정중히 말한 것 같지만 그것은 그러한 이적을 일으키는 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재산인 이천 마리의 돼지를 몰살해버린 그분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 ‘욕심’을 죽이러 오시는 분이십니다. 욕심이 좋고 허영심이 좋으면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 욕심이 죽기를 싫어하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오늘 마귀가 하는 말과 같이 그분께 말할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이는 “예수님, 돈의 욕심을 버리라, 원수까지 용서하고 사랑하라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그냥 저를 편안하게 살게 해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의지가 없는 사람은 그래서 예수님을 받아들일 의지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돼지와 같은 인간이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오늘 복음에서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돼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이제 허영심 대신 당신을 받아들였다는 뜻으로 봉헌부터 하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 봉헌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위해 내 자신의 욕심과 싸우겠다는 의지표명입니다. 신앙생활이란 것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위해 마귀가 좋아하는 돼지가 되지 않게 욕심에서 벗어나는 연습을 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성지순례 중에 아인카렘을 방문했습니다. 그곳에는 성모님의 엘리사벳 방문을 기념하는 성당이 있습니다. 성당에는 성모님과 관련된 성화가 있었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가 있었습니다. 성모님께서 구원의 중재자임을 이야기합니다. 십자가 위에 예수님이 계시고, 성모님과 요한 사도가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교회의 어머니임을 이야기합니다. 교회의 학자들과 성모님이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셨음을 이야기합니다. 성모님께서 화관을 쓰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인성과 신성이 하나이신 예수님의 어머니임을 이야기합니다. 배와 성모님과 군인이 있습니다. 묵주기도를 하였던 군인들이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합니다. 묵주기도의 성모님을 이야기합니다. 교회에서 선포한 성모님께 대한 호칭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제게 더 큰 감동을 준 건 성당 마당에 있던 성모님과 엘리사벳이 만나는 조각상입니다.

 

성모님에 대한 교회의 호칭은 처음부터 있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먼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고백했던 마리아의 순명이 있었습니다. 친척 엘리사벳을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떠났던 마리아의 용기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실 길을 준비했던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은 이렇게 찬미합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십시오. 주님께서 함께 하시니 여인 중에 복되십니다.’ 요한이 하느님의 어린양을 알아보고 사랑을 드렸듯이, 엘리사벳은 구세주의 어머니를 알아보고 사랑을 드렸습니다. 엘리사벳의 환영을 받았던 마리아는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나이다. 과연 만세가 나를 복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이 나에게 큰일을 하셨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굶주리는 이를 배불리시고, 미천한 이를 높이시는 분이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찬미했던 하느님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시작은 아주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삼라만상 온 우주가 하느님 나라에 담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신학과 교리의 예수님을 신앙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았던 사람을 보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의 위선과 가식을 보고 화를 내셨습니다. 백인대장, 소경, 나병환자의 믿음을 보고 기뻐하셨습니다. 나자로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고 슬퍼하셨습니다. ‘주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한 베드로 사도의 말을 듣고 칭찬하셨습니다. 성지순례는 우리와 함께 사셨던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겁니다. 연민과 사랑으로 모든 이를 품어주셨던 예수님과 동행하는 겁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베로니카 성녀처럼 주님께서 지고가시는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가는 겁니다. 주님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드리는 겁니다. 우물가의 여인에게 물을 청하셨던 주님께서는 다시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셨듯이, 세상이라는 우물에 머물고 있는 우리에게 구원의 샘물을 주시기 위해서 손을 내밀고 계십니다. 여행객으로 왔다면 순례자가 되는 겁니다. 순례자로 왔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아끼는 돼지들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악령을 쫓아내는 것보다, 병든 사람을 치유하는 것보다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사제들이 독신의 의미를 온전히 깨닫고,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사제들이 교회의 가르침보다 자신의 신념과 세상의 것들을 전하려고 한다면, 사제들이 교회의 권위를 따르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보다는 자신의 뜻을 먼저 이루려고 한다면 이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던 마을 사람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귀에 걸린 사람은 치유를 받았습니다. 고마운 마음에 건강을 회복한 사람은 예수님 곁에서 시중을 들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유의 대가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이제 건강을 회복하였으니, 가족들에게 돌아가서 예전처럼 지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과 비움은 우리를 건강하게 해 주는 선물입니다. 내 마음에 원망과 미움이 있다면, 근심과 걱정이 있다면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셨던 나눔과 비움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은 곧 따뜻해지고, 행복해 질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고, 봉사활동을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삶의 한 부분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 안에 있는 더러운 영들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며칠 지나면 방 안에 먼지가 쌓이듯이 우리가 성령과 함께 하지 않으면 우리 마음에도 더러운 영들이 들어옵니다. ‘시기, 질투, 분노, 미움, 교만, 게으름, 욕망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에 사로잡히면 우리의 몸은 살아 있어도 무덤과 같은 것입니다. 월요일 아침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새 삶의 시작

 -반영억신부-   

 

그 날의 기분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습니다. 마음에 둔 사람을 만나면 기쁨이 크고, 보기 싫은 사람을 만나면 가슴이 아픕니다. 좋은 스승을 만나 훌륭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못된 사람 만나서 잘못된 길을 걷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을 만나면 운명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이런 저런 만남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만남은 예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이 변합니다. 그분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시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예수님께 마주 나왔습니다. 그것은 큰 은총입니다.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무덤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무덤이란 곧 죽음을 의미하는데 사랑이 없는 미움과 시기, 질투, 분노, 적개심, 무관심 등으로 지옥같이 사는 상태를 말합니다.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이 족쇄와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는 것은 무질서와 혼란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소리를 지르며 돌로 제 몸을 치곤하였다는 것은 분노와 자학으로 괴로워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그 어둠에서 나왔으니 복이 있습니다. 그는 결국 제정신으로 돌아왔습니다(마르5,15). 제정신으로 돌아왔다는 것은 새 삶을 시작하였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그는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로마12,2)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 새 삶을 시작하게 되었고 예수님 곁에 같이 있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기 고향에서 떠나주기를 바랬습니다. 심지어 벼랑까지 끌고 가 떨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루카4,28). 더러운 영이 들렸던 사람도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저를 괴롭히지 말아주십시오”(마르5,6).하고 외쳤습니다. 여기서 악령의 속성을 볼 수 있습니다. 악령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정확히 알고 인정하였지만 그분과 소통하고 친교를 나누는 일은 거부합니다. 이렇게 악의 세력은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잘 알면서도 그릇된 삶에 고집스레 집착하고 거기에서 벗어나기를 극도로 싫어합니다(손희송). 그런데 제정신이 들자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5,18). 하고 청하였습니다. 이 청은 제정신이 들기 전과는 전혀 다른 청원입니다. “이제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난 것”(2코린 5,17).입니다.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시오하는 청은 곧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제정신이 들어 청원한 기도이니 만큼 우리도 기도를 할 때 제 정신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무턱대고 청하지 않고 효과적인 기도, 꼭 이루어지는 기도를 할 수 있으며 주님의 뜻에 의합한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는 기도가 아니라 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때로는 기도가 들어지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적 유익을 위해서 거절하신 것으로 믿고 때를 기다리며 주님께 대한 신뢰를 잃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렸던 사람이 주님을 만나 새 생활을 시작하였듯이 우리도 주님을 만나 새로 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지상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 것에 마음을 두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누군가 나를 만나서 기쁨을 간직할 수 있는 날이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너에게 해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마르 5,19)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게라사인 지역에서 더러운 영을 쫒아내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의 첫 이방인지역 나들입니다.

거센 돌풍을 잠재우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호수를 건너왔지만, 또 다른 거센 돌풍을 만나게 됩니다. 마치 모세가 갈대바다를 건너왔지만 여전히 사막에서 또 다른 거센 돌풍을 마주했듯이 말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바다에 부는 돌풍이 아니라, 인간에게 부는 거센 돌풍을 잠재우십니다. 곧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이 족쇄나 쇠사슬로 묶어둘 수 없을 만큼 거센 돌풍에 휘둘려 밤낮으로 소리 지르며 무덤을 헤집고 다녔습니다.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은 무덤에서 나와 예수님께 마주 왔다.”(마르 5,2)


이제 마귀 들렸던 사람에게서 마귀들은 나가고, 그는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앉아(마르 5,15) 있었습니다. 옷을 입고 앉아 있는 것은 더러운 영에 들렸던 낡은 인간성을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바오로 사도의 표현을 빌리면,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사람으로 되었다.’(에페 4,21-24),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다(갈라 3,27)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제정신이 들었다는 것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와 같이, 제자리로 돌아왔다(루카 15,17-20)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실, 마귀를 내쫓는 이 이야기는 병을 고치는 다른 이야기들의 범위를 넘어서, 사탄의 왕국에 대한 예수님의 승리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돼지 떼들의 익사는 이 고장에 대한 마귀들의 권세가 끝났음을, 곧 그곳이 더러움에서 해방되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렇지만 이곳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 들렸던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마르 5,19)


이는 그가 첫 이방인 선교사로 파견된 것을 말해줍니다. 이렇게 그는 그리스도의 자비의 선교사로 파견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물러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해 주신 일을

데카폴리스 지방에 선포하기 시작하였다.”(마르 5,20)


오늘 우리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주신 일을 알려야 할 일입니다. 그러려면, 먼저 자비를 입었음을 깨달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풀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도 우리는 죽은 이들의 무덤 가운데가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의 사랑 가운데 앉아 있어야 할 일입니다. 곧 제 정신으로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그리스도의 말씀 앞에 앉아 있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그들은 그분을 보고 저희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사고 청하였다.”(마르 5,17)


주님!

어둠을 몰아내소서.

제 안에 돼지 떼가 판치지 않게 하소서.

본래부터 주님의 거처이니, 제 안에 빛을 밝히소서.

죽은 이들의 무덤이 아니라, 살아계신 당신의 사랑 가운데 살게 하소서. 아멘.


마귀들과 돼지 떼>♣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자마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다. 그는 무덤에서 살았는데,
어느 누구도 더 이상 그를 쇠사슬로 묶어 둘 수가 없었다.
이미 여러 번 족쇄와 쇠사슬로 묶어 두었으나, 그는 쇠사슬도 끊고
족쇄도 부수어 버려 아무도 그를 휘어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곤 하였다(마르 5,2-5).”

여기서 악령 들린 사람이 무덤에서 살았다는 말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살 수 없었음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그 사람이 죽음과 같은 고통을 겪고 있음을, 즉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닌
비참한 상황 속에 있음을 나타내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곤 하였다.” 라는 말도
그의 고통과 비참한 상태를 나타내는 말로 해석됩니다.
사람들이 쇠사슬과 족쇄로 악령 들린 사람을 묶어 두려고 한 것은,
악령을 제압하려고 시도했음을 나타냅니다.
“그는 쇠사슬도 끊고 족쇄도 부수어 버려 아무도 그를 휘어잡을 수가 없었다.”
라는 말은, 사람의 힘으로는 악령을 제압할 수 없음을 나타냅니다.
악령은(마귀는) 하느님의(예수님의) 힘으로만 제압할 수 있습니다.

< 우리는 ‘마귀’와 ‘마귀 들린 사람’을 구분해야 합니다.
마귀 들린 상태는 몸과 정신을 모두 마귀에게 빼앗긴 상태입니다.
(그것은 자기의 자유의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중병에 걸린 것과 같은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귀 들린 사람이 하는 말은 사실은 마귀가 하는 말입니다.
또 우리는 ‘마귀 들린 상태’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간 상태’를
(또는 ‘마귀의 영향력에 물들어 있는 상태’를) 구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마귀 들리는 것은 자기가 원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것은 죄 속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마귀의 유혹에 넘어간 상태나 마귀의 영향력에 물들어 있는 상태는
자기의 자유의지로 그렇게 된 것이고, 따라서 그것은 죄 속에 있는 것입니다.
요즘에 의견, 사상, 신념, 소속 등이 자기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증오심을
마음속에 가득 품고서 날마다 ‘혐오 발언’을 하거나 시위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모습은 마귀의 영향력에 물들어 있는 모습입니다.
겉으로만 보면 멀쩡하게 보이지만, 그렇게 마귀의 영향력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이
마귀 들린 사람보다 더 비참하고, 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v 그들은 자기가 스스로 원해서 그렇게 죄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고,
그것은 그대로 하느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만 하면서 인생을 낭비하는 그 삶에
무슨 행복과 기쁨이 있을까?
‘혐오 발언’을 하거나 시위를 하는 동안에는
잠깐 동안 기분이 좋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악마적인 쾌감일 뿐이고,
그 쾌감에 빠질수록 점점 더 큰 죄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마귀 들린 사람은 ‘예수님의 권능’으로 치료를 받으면 됩니다.
그러나 마귀의 영향력에 물들어 있는 사람은 회개부터 해야 합니다.>

“...... 예수님께 자기들을 그 지방 밖으로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청하였다.
마침 그곳 산 쪽에는 놓아기르는 많은 돼지 떼가 있었다. 그래서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께, ‘저희를 돼지들에게 보내시어 그 속으로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허락하시니 더러운 영들이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천 마리쯤 되는 돼지 떼가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마르 5,10-13).”

예수님께서 악령들에게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라고
명령하시자(마르 5,8), 악령들은 타협안을 제시하면서 사정합니다.
더 이상 사람들 속에 있을 수 없다면,
근처에 있는 돼지들 속으로나 들어가게 해 달라고 애원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기 때문에,
마귀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합니다.
만일에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바로 지옥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왜 마귀들의 간청을 들어 주셨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 마귀들을 쫓아내려고 돼지들을 이용하신 것은 아닙니다.
돼지들은 억울한 피해자입니다.)
그리고 돼지들이 왜 집단 자살을 했는지, 우리는 그 이유도 잘 모릅니다.
어쩌면 마귀들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자마자 사람들을 괴롭힌 것처럼
돼지들도 괴롭혔을 것이고, 돼지들은 사람들보다 훨씬 더 저항력이 약해서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바로 죽음을 선택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이 아니라 마귀들이 돼지 떼를 죽게 했다는 것입니다.
(마귀들이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고 돼지들이 집단 자살을 하는 바람에
갈 곳이 없어진 마귀들은 곧바로 지옥으로 떨어졌을 것입니다.)

< 마귀의 영향력에 물든 채로 죄를 지으면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고 ‘남을 미워하는 일’로 인생을 낭비하는 사람들은,
이 이야기에 나오는 돼지들보다 못한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옛날부터 “인간은 천사와 짐승의 중간 단계에 있는 존재” 라고 흔히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선과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면 천사와 같은 위치로 올라가게 되지만,
‘선과 사랑’을 실천하기는커녕 ‘악과 미움’만 행하면서 산다면
짐승보다 못한 위치로 떨어지게 됩니다.>

“......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려고 왔다.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마귀 들렸던 사람, 곧 군대라는 마귀가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겁이 났다(마르 5,14-15).”
“그들은 예수님께 저희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하기 시작하였다(마르 5,17).”

여기서 “떠나 주십사고 청하기 시작하였다.” 라는 말은,
뜻으로는 “떠나라고 요구했다.”(쫓아냈다.)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떠나라고 요구한 것은 ‘겁이 났기 때문’인데,
이 말은, 그들이 마귀들의 힘보다 더 센 예수님의 힘을 무서워했음을,
또 마귀들을 무서워한 것보다 더 예수님을 무서워했음을 나타냅니다.
< 그들은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신 사랑과 자비는 보지 않고 예수님의 힘만 보았고,
그 힘을 무서워했고, 그 힘을 가지고 계신 예수님을 무서워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속에, 또 삶 속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1요한 4,18).
(돼지 떼의 주인들은 아마도 자기가 입은 재산 피해만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기 안에 사랑이 없으면, 사랑을 보아도 그것이 사랑인 줄 모르고,
큰 사랑을 받고 있어도 자기가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사랑 없이 살고 있는 것, 그것도 마귀의 영향력에 물들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르 5,1-20: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예수님께서는 게라사로 가셨다. 그런데 이 지방의 본 이름은 게르게사인데 성경을 필사하면서 잘못 옮긴 이름이다. 게르게사는 쫓아낸 자들이 사는 곳이라는 뜻이다. 구세주이신 주님을 대하는 주민들의 처신에 대한 예언적 암시를 담고 있는 듯하다. 그 지역 주민들은 예수님께 자기들 고장에서 떠나 달라고 요청하였기 때문이다.(참조: 마태 8,34; 마르 5,17; 루카 8,37)

 

예수님은 마귀 들린 사람을 만나신다. 그 사람은 어디에서 살고 있는가? 썩은 시체로 악취를 풍기는 무덤에서 산다. 이 세상의 영광을 약속받았던 자가 그곳에 살고 있다. 이러한 곳에서 또한 악령 들린 사람은 무덤에 거처하면서 쇠고랑과 쇠사슬로 묶여 있으면서 밤이나 낮이나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짓찧곤 했다는 것은 그가 더 이상 비참해질 수 없는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을 보여주고 있다.

 

마귀들은 그분이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본다.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7) 여기서 예수께서는 그 악령 들린 사람에게 구원의 손길을 펴주신다.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8) 하시자 마귀들은 그에게서 나와 돼지 떼들에게 들어갔고 돼지들은 물에 빠져 몰사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마귀들이 사람들에게 똑같은 짓을 해서 바다에 빠져 죽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마귀들을 막으셨고,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마귀들이 인간들에게도 저지를 수 있었던 일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마귀들이 돼지들을 소유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면 인간을 소유할 수도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마귀에게 사로잡혔던 사람은 성한 몸으로 예수님을 따르려고 한다. 마귀들의 군대가 자기에게서 쫓겨난 것을 알았다. 이제는 모든 것을 잊고 오로지 주님의 발치에서 마냥 쉬고 싶다고 한다. 그러나 주님은 그 사람의 뜻과는 달리 이렇게 말씀하셨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19)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는 지금까지의 나의 생활에서 어떠한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변화는 나의 희생과 노력의 결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못 알아들을 때, 우리도 그 주민들처럼 예수님께 떠나달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도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나 자신의 희생이 따를 때, 그 희생을 꺼려하여 예수님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하는 마음의 자세가 아니고 그것을 기쁜 마음으로 수용하고 주님께 감사드릴 수 있는 자세를 갖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5, 8)

-한상우신부-

내보내야 할 것을
내보내지 못하고
사는 우리들
삶입니다.

내보내야 할 것을
내보내야 우리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더러운 영을
추방하시고
건강한 삶의
자리로 되돌려
놓으시는 우리의
주님을 믿습니다.

내면의 치유와
정화는 우리내면이
죽어있다는 사실을
먼저 깨닫는데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억압과 공포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해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고유성을
되찾아주십니다.

두렵고 더러운
영을 추방하여
주십니다.

모든 힘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십니다.

주님의 힘을 통해
우리의 억압과 두려움
집착과 거짓이
치유됨을 믿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주님께서
해 주신 일과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자비를
우리 삶의 자리에서
선포합시다.

우리의 삶을
건강한 삶으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독서와 복음에서는 각각 두 영이 충돌합니다. 복음에서는 군대라는 이름의 더러운 영과 예수님이 맞대면하고, 제1독서에서는 시므이와 다윗이 만나지요. 꼭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예수님과 다윗이, 더러운 영과 시므이가 겹쳐서 보입니다.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르 5,7)
무덤에 사는 영이 예수님께 외칩니다.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는"(마르 5,5) 그는, 스스로를 해치는 악령에 단단히 붙잡혀 있습니다. 그러니 그 더러운 영에 들린 그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을까요!

세상의 모든 존재는 하느님께로부터 왔기에 모두 상관이 있습니다. 유기체 안에서 관계를 거부하는 언사는 단절과 분열을 야기하는 악입니다.

그런데 제1독서에서는 이와 표현은 비슷하나 그 의미는 완전히 다른 말씀이 나옵니다.
"츠루야의 아들들이여, 그대들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소?"(2사무 16,10)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쫒겨가는 다윗에게 사울 집안의 시므이가 악담을 퍼부으며 저주를 하자 다윗의 충신들이 발끈하여 시므이를 치려 합니다. 그때 다윗이 말리며 한 말이지요.

여기서 다윗은 연대성을 끊기 위해서가 아니라 악의 순환을 끊기 위해 이렇게 말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으면 더 처참한 복수가 이어지기 마련이니까요. 당장 다윗 자신만 이 모욕을 감수하면 악은 제 힘을 잃고 스러져 버릴 것이니 다윗은 낮추어진 자신을 더 한껏 낮춥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마르 5,7).
놀랍게도 더러운 영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고 정확히 이름을 부를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이름으로 예수님께 요구합니다. 그러나 경외심이 결여된 앎은 사랑을 지향하지 않기에, 누구의 이름을 들먹여도 그의 외침은 공허한 파열음으로 허공에 퍼지다 사라질 뿐입니다.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5,8).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그를 제압하십니다. 악령으로 고생하는 이에게는 염려와 연민이 가득하시고, 악에게는 냉정하고 단호하며 매서우십니다. 과연 이 말씀으로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서 나가고, 돼지 이천 마리를 한 번에 몰살시킬 만큼 무시무시한 악령은 떠나갑니다.

"예수님께 저희 고장을 떠나 주십사고 청하기 시작하였다"(마르 5,17).
악령에게서 구출된 이를 축하하고 환대하기보다, 구원의 기적을 베푸신 예수님께 감사하기보다, 고장 사람들은 재산의 손실이 불편하여 예수님을 밀어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선선히 배에 오르시지요. 서운함이나 불쾌함, 괘씸함 같은 감정의 자락은 조금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저주하게 내버려 두시오"(2사무 16,11).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를 하느님의 목소리로 받아들입니다. 어쩌면 시므이가 두 차례나 반복해 외친 "살인자"라는 말이 그의 숨은 죄를 들추었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누군데 감히...' 따위의 오만함은 눈꼽만큼도 비치지 않습니다. 그가 스스로를 사람의 손가락질 아래 놓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로운 판결에 맡겼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내적으로 외적으로 영의 충돌을 경험합니다. 더러운 영은 설익은 앎으로 자기를 높이고 선한 영은 하느님 말씀 뒤로 자기를 감춥니다. 더러운 영은 저주의 기회를 즐겨 탐하고 선한 영은 위로와 치유의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더러운 영은 스스로를 해치면서 결국 남도 해칩니다. 선한 영은 자신을 죽여 악의 순환 고리를 끊고 남을 살립니다.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혹 우리 안에 악이 있다면, 그 악이 제 길을 찾아 나가도록 명하시는 예수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합시다.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마르 5,19).
혹 우리 안에 선이 있다면, 그 선이 퍼져나가도록 당부하시는 예수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합시다.

행복 용광로  
-김찬선신부-


다윗에 대해 생각할 때 드는 느낌 중 하나는 극과 극을 오가는 사람입니다.
이탈리아 사람들에 대해 얘기할 때
이탈리아에는 성인도 많고 마피아도 많다고 하는데 마치 그런 것입니다.
다윗은 임금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아무튼
보통 사람보다 죄가 많기도 하고 크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는 누구보다 세속적이고 악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신기하게도 하느님께 언제나 닿아있고 그래서 받는 은총이 큽니다.
그래서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로마서 말씀이 바로 이 다윗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

행복과 불행 면에서도 다윗은 극과 극을 오갑니다.
다윗처럼 불행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인간에게 제일 큰 불행은 자식과 관련이 있잖습니까?

부모에게 제일 큰 고통이고 불행인 것은 자식 문제잖아요?
자주 얘기했듯이 부모자식 간에 또 형제간에 재산 때문에
싸움이 일면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 부모는 불행하겠지요.

그런데 다윗은 자신의 간음과 살인 때문에 아들을 잃었고,
오늘 다시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제 생각에 자기 나라를 잃게 되는 고통보다
자기 아들을 잃는 고통이 틀림없이 더 컸을 것이고 실제로
압살롬이 싸움에 패해 죽었을 때 잘 죽었다고 하지 않고
그 아들의 죽음 때문에 다윗이 통곡을 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고통과 불행이 남들보다 컸지만 또한 행복도 컸으니
그것은 그가 세상의 부귀영화를 다 누렸기 때문이 아니라
언제나 하느님 안에서 불행을 행복으로 바꿨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가 '늘' 행복했다고 얘기하지 않았고
'언제나' 불행을 하느님 안에서 행복으로 바꿨기 때문이라고 얘기했습니다.

'늘'이 시간의 연속성 또는 계속성을 얘기하고 그래서 평생토록
행복하지 않은 적이 없고 불행한 적이 없는 것이라면
'언제나'는 한 번도 불행한 적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경우에도 행복한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행복선언에서 '가난해도', '슬퍼도', '박해를 받아도'
행복한 것이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행복 비결인데 하느님 나라를
소유했기에 그 어떤 경우에도 행복할 수 있는 것이 언제나 행복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행복 용광로입니다.
하느님 안에 있으면 모든 것이 녹아 행복이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는 것을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오늘 다윗은 바로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일이 자기에게 생겨도 그것이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거라면 화는 복이 되고, 불행은 행복이 될 거라고 믿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저주하게 내버려 두시오.
행여 주님께서 나의 불행을 보시고,
오늘 내리시는 저주를 선으로 갚아 주실지 누가 알겠소?"


그래서 시므이가 퍼부은 저주가, 저주가 아니게 되었고
시므이가 저주를 퍼부었지만 다윗은 받지 않았습니다.
제가 자주 하는 얘기가 '준다고 다 받느냐'입니다.

받기 싫고, 받아 좋을 것이 없는 것은 받지 않으면 됩니다.
그런데 싫은데도 받는다는 것은 내가 거부할 수 없기 때문이겠지요?
저주받기 싫지요? 그런데도 받는 것은 거부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인간적으로는 저주를 저주로 받지 않을 수 있는 힘이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행복 용광로임을 믿는 우리는
하느님 안에 머무름으로써 저주를 축복으로 바꿔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1월 29일 연중 제4주간 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르5,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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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과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마주칩니다. 

이 사람은 한마디로 죽음의 세력입니다. 
이는 그가 무덤에서 살았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본디 무덤은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죽은 이들이 머무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한재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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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는 욕심에 찌든 인간의 상징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고 결국엔 지옥까지 끌고 가는 마귀를 불러들입니다.

   돼지가 모두 바다에 빠져 죽었을 때 그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몰아냈습니다. 떠나 주십사고 정중히 말한 것 같지만 그것은 그러한 이적을 일으키는 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재산인 이천 마리의 돼지를 몰살해버린 그분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 ‘욕심’을 죽이러 오시는 분이십니다. 욕심이 좋고 허영심이 좋으면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 욕심이 죽기를 싫어하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오늘 마귀가 하는 말과 같이 그분께 말할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신앙생활이란 것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위해 마귀가 좋아하는 돼지가 되지 않게 욕심에서 벗어나는 연습을 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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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예수님께 마주 나왔습니다그것은 큰 은총입니다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그는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무덤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무덤이란 곧 죽음을 의미하는데 사랑이 없는 미움과 시기질투분노적개심무관심 등으로 지옥같이 사는 상태를 말합니다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이 족쇄와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는 것은 무질서와 혼란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소리를 지르며 돌로 제 몸을 치곤하였다는 것은 분노와 자학으로 괴로워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그런데 그 어둠에서 나왔으니 복이 있습니다그는 결국 제정신으로 돌아왔습니다(마르5,15). 제정신으로 돌아왔다는 것은 새 삶을 시작하였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그는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로마12,2)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저를 괴롭히지 말아주십시오”(마르5,6).하고 외쳤습니다여기서 악령의 속성을 볼 수 있습니다악령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정확히 알고 인정하였지만 그분과 소통하고 친교를 나누는 일은 거부합니다이렇게 악의 세력은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잘 알면서도 그릇된 삶에 고집스레 집착하고 거기에서 벗어나기를 극도로 싫어합니다(손희송). 그런데 제정신이 들자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5,18). 하고 청하였습니다이 청은 제정신이 들기 전과는 전혀 다른 청원입니다. “이제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난 것”(2코린 5,17).입니다.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시오” 하는 청은 곧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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