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0년 1월 31일 연중 제3주간 금요일

Margaret K 2020. 1. 30. 20:16

2020년 1월 31일 연중 제3주간 금요일

성 요한 보스코 사제 기념일


“청소년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야 합니다.” 요한 보스코 성인의 말이다. 그는 1815년 이탈리아의 토리노 근교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양을 치며 가난하게 살았지만, 요한 보스코는 어머니의 엄격한 신앙 교육을 받으며 자라 사제가 되었다. 특히 청소년을 사랑했던 그는 젊은이들의 교육에 심혈을 기울여 오다가 1859년 가난한 젊은이들에게 기술을 가르치고 그리스도교 생활을 익히게 하려고 살레시오 수도회를 설립하였다. 1872년에는 살레시오 수녀회도 세웠다. ‘고아들의 아버지’라고 불릴 만큼 19세기의 탁월한 교육자로 꼽히는 그는 1888년에 선종하였고, 1934년에 시성되었다.


☆☆☆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마르4,26-34)

 

"What is the kingdom of God like?

To what shall we compare it?

It is like a mustard seed which, when sown,

is the smallest of all the seeds scattered upon the soil.

But once sown, it grows up and becomes

the largest of the plants in the garden

and even grows branches so big

that the birds of the air can take shelter in its shad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다윗은 전쟁터에서 우리야를 가장 위험한 곳으로 보내어 죽게 만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아무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도 자라고 열매를 맺어 수확할 수 있게 된다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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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마르코 복음의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 그분 자체를 말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참된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라고 마르코 복음은 재촉합니다.
마르코 복음 막바지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이방인인 백인대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메시아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우며 또한 멋스러워야 하고 힘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가 당시 유다 사회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셨지요.
세상의 논리로 보자면 실패 그 자체인 십자가, 그 십자가를 지신 분을 메시아로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세상의 당위에 대한 저항에서 가능한 일입니다.대개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고 오늘을 애쓰며 살아갑니다.
신앙이 목적을 가지는 순간, 오늘, 지금의 시간에 대하여 결핍 의식을 지닐 때가 가끔 있습니다.
‘아직 멀었어.
좀 더 노력해야 돼.’라고 되뇌이며 내일의 희망찬 하느님 나라를 꿈꿉니다.그러나 바로 이 자리, 이 시간에 예수님께서 오십니다.
또한 하느님 나라는 ‘저절로’ 자라납니다.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하느님 나라의 실재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는 이미 오신 예수님을 통하여 이미 시작되었습니다.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맞갖게 사는 것은 오늘 ‘이렇게 해야 돼!’라는 당위를 다시 한번 되짚어 물어보는 일에서 시작합니다.
오늘의 ‘당위’가 어떤 이를 겁박하고 억압하는 일은 없는지, 오늘 나에게 당연한 일이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고통과 짐으로 여겨지는 일은 없는지 물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지금 우리 곁에, 이 자리에서 커져 갑니다.(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자존감이 높아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그리고 이 말에 크게 동의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존심이 너무 세면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자존심만 센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별로 내세울 것도 없으면서 자존심만 세서 실속 없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그래서 ‘근자감’이라는 말도 있나 봅니다. 즉,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는 뜻입니다.

과도한 자기중심적 태도나 이기심에서 비롯된 자존감은 진짜가 아닙니다. 그런 자존감은 당장 버려야 할 것입니다. 진짜 자존감은 그 누구의 말과 행동에 대해 전혀 흔들리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다른 이를 통한 감정 기복이 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포옹하고 받아줄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근자감’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닌, 근거 있는 자신감을 갖춘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나를 귀하게 만드신 하느님의 창조물이라는 자존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자존감, 다른 이의 영향을 받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다는 자존감, 그밖에 자존감의 근거들을 하나씩 만들어 보면 어떨까요?

오늘 복음을 통해 하느님 나라가 어떠한지를 가르쳐주십니다. 우선 씨가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고 하시지요. 하느님 나라가 다가오는 것을 그 누구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곡식이 익듯이 우리 역시 그 나라에 수확되어 들어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겨자씨와 같다고 하십니다.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작은 씨이지만,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합니다. 그 겨자씨처럼 우리 역시 처음에는 작고 볼품없지만,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하늘에 닿도록 성장해야 함을 말씀하시지요.

이렇게 우리 모두 예외 없이 성장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라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이 마음을 받아들이면 이 세상을 더욱더 충실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쓸데없는 것에 온 마음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하는 그래서 근거 있는 자신감으로 힘차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다른 이들의 말과 행동에 흔들려서 지금을 제대로 살지 못하는 우리가 아닌,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의지하면서 참 행복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완벽하게 동그란 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공 모양을 인정하는 것이다(오카다 사오리).



불안한 미래, 무엇을 해야 할까?

2017년 서울대의 유기윤 교수팀은 충격적인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2090년의 한국 사회는 인공지능 로봇이 직업 대부분을 대체한 결과 한국인의 99.997%가 ‘프레카리아트’가 된다는 발표였습니다. ‘프레카리아트’는 ‘불안정한’이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프레카리오’와 노동계급을 뜻하는 독일어 ‘프롤레타리아트’의 합성어로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게 된답니다.

1) 꿈과 열정이 없다.
2) 내가 하는 일의 가치를 깨닫지 못한다.
3) 먹고 사는 문제로 평생 고통받는다.

지금 현재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노숙인, 난민, 불법 외국인 노동자입니다. 그렇다면 2090년 우리나라 국민의 99.997%가 난민 수준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은 큰 충격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2090년이면 아직 많이 남았으니, 나와는 상관없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이렇게 되지는 않겠지요. 이 모습이 언제부터 진행되냐면 2030년부터 피부로 느낄 정도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불안한 미래를 바라보며 사는 우리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요?                   

땅을 살피지 않는 농부는 없다

-전삼용신부-


나쁜 짓을 한 아들이 아버지 앞에 불려왔습니다. 아버지는 아이를 데리고 아무 말 없이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조상의 산소 앞에 선 아버지는 자식을 잘못 가르친 것을 조상께 백배사죄하고는 회초리로 자신의 종아리를 사정없이 치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는 눈물을 흘리며 참회했습니다.

      30년 후 그 아들이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의 아들도 말썽꾸러기였습니다. 밤낮 사고를 저질러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아무리 타일러도 듣지를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아버지는 매섭게 생긴 회초리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불러놓고는 그가 보는 앞에서 자신의 바지를 걷어 올렸습니다. 그러고는 눈물을 흘리며 회초리로 자신의 다리를 사정없이 내려치기 시작했습니다. 갑작스런 광경에 놀란 아들이 마루로 뛰어 나가면서 외쳤습니다.

“엄마! 아빠가 미쳤나봐. 빨리 와 봐.”

      같은 씨라도 밭이 다르면 다른 열매를 맺습니다. 밭을 살피지 않는 농부는 없습니다. 좋을 열매를 맺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끔 좋은 열매를 맺다보면 자신의 밭을 방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 독서의 다윗 왕이 그런 사람입니다.

      다윗 왕은 밧세바와 부정한 관계를 맺어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야까지 죽입니다. 다윗 왕은 어린 나이에 거인 장수 골리앗까지 믿음으로 이긴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이번 사건 하나로 와르르 무너집니다. 그는 더 이상 왕의 자리에 머물지 못하고 자식에게 쫓겨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됩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그가 열매는 보고 있었지만 땅은 살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 안엔 땅도 있고 열매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열매 맺는 나무는 많은 이들에게 휴식과 힘을 줍니다. 하늘 나라의 열매가 맺혀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하늘에 오르고는 싶지만 쉴 곳이 없어 힘들어하는 새들에게 안식처가 될 수 있는 복음의 열매를 맺는 사람은 땅에 집중하는 사람입니다. 그 땅이란 예수님께서 계속 설명하듯이, 길과 같아서도 안 되고, 돌밭과 같아서도 안 되며, 가시밭과 같아서도 안 됩니다.

      길은 교만을 상징하며 하느님 말씀을 전혀 받아들일 마음이 없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저는 하느님은 믿지만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은 못 믿겠어요.”, 혹은 “예수님이 내 안에 살게 하시기 위해 내가 왜 십자가에 죽어야 해요?”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입니다.

      돌밭은 육체의 욕망으로 사는 사람을 상징합니다. 오늘 독서의 다윗과 같은 사람입니다. 다윗은 처음엔 좋은 땅이었으나 자신의 땅을 잘 살피지 않았기에 다시 돌밭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면 이웃에게 어떠한 도움도 주지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있던 열매도 사라집니다.

      가시밭은 재물의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소득의 십분의 일조차도 주님의 몫으로 바치기 싫어하면서도 신앙생활 하면 부자가 될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부자로 살 게 하시기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서 가난해도 아무 걱정 없이 사셨던 그리스도처럼 살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땅에 집중하면 열매는 저절로 맺습니다. 씨는 항상 뿌려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길에도 뿌려지고 돌밭에도 뿌려지고 가시밭에도 뿌려집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나의 땅을 망치는 ‘삼구(마귀-육신-세속)’와 싸우는 일입니다.

      그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믿어야합니다. 내 안에 하느님이 계시고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음을 믿어야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살과 피를 내어주시며 “내가 네 안에 있잖아!”라고 하십니다.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의 피로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어야 그리스도께서 사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하셨다면 우리도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느님 나라의 열매가 맺힐 때 내가 선포할 기쁜 소식이 생깁니다. 좋은 땅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조재형신부-


황금 알을 낳는 거위라는 우화가 있습니다. 매일 황금 알을 낳는 거위가 있었습니다. 부부는 알을 팔아서 부자가 되었고, 걱정 없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더 큰 욕심이 생겼습니다. 거위의 배에는 황금 알이 많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더 큰 부자가 되고 싶은 욕심에 거위의 배를 갈랐지만 거위의 배에는 황금 알이 없었습니다. 부부의 욕심 때문에 거위도 죽고, 부부는 예전처럼 가난해 졌습니다. 거위가 황금 알을 낳기 위해서는 하루라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부부가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면 풍족하고, 행복한 생활을 했을 겁니다. 노력하지 않고, 열매만 얻으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샘을 파지 않고 물만 얻으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남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지순례 중에 모압 왕 메사의 석비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성서고고학적으로 귀중한 유물인 모압 왕 메사의 석비를 발견한 선교사가 마을의 부족장에게 큰돈을 주고 석비를 사겠다고 하였습니다. 프랑스의 영사는 더 큰돈을 주고 석비를 사겠다고 하였습니다. 석비를 옮기면서 군인까지 동원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부족장은 석비 안에 금이 들어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석비를 불에 태우고, 찬물을 부어서 깨부수었습니다. 석비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석비가 귀중한 유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겉에 쓰인 모압 왕 메사의 비문이었습니다. 비문이 적힌 석비가 깨졌고, 더 이상 유물로 가치가 없어졌습니다. 메사의 석비는 미리 탁본을 만들었기에 다시 인류의 귀중한 문화유산이 될 수 있었지만 부족장은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2020년 새해를 시작하면서 미국의 대통령은 이란의 군 사령관의 암살을 지시했습니다. 한국가의 군 사령관을 전쟁상태가 아닌데 암살 한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입장을 바꾸어서 이란이 미국의 군 사령관을 암살했다면 미국도 용납할 수 없었을 겁니다. 당연히 이란은 한 국가로서 받은 치욕을 되갚을 겁니다. 보복은 더 큰 보복으로 악순환 되고, 2020년 지구촌은 걱정과 우려의 눈으로 상황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계획된 순서로 돌아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연과 필연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려왔습니다. 인간의 욕망으로 잉태된 도발이 커다란 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황금 알을 가르는 어리석음을 보이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황금 알을 가지려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충실한 부하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인간의 비참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느님께로부터 기름부음 받았던 다윗이었습니다. 거인 골리앗과 싸워서 승리했던 다윗이었습니다. 자신을 죽이려했던 사울 왕을 용서했던 다윗이었습니다. 그런 다윗도 욕망이라는 덫에 걸린 나약한 운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구약의 다윗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를 보면 교회도 그런 욕망과 욕심에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다윗이 하느님께 용서를 구했던 것처럼,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도 인류와 역사 앞에 교회의 잘못에 대해서 용서를 청했습니다. 차마 말 할 수 없는 잘못이 있었고, 많은 이들이 상처를 받았습니다. 다만 오늘 화답송에서 고백한 것처럼 하느님의 자비와 하느님의 용서를 청할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이야기하십니다. 욕망과 욕심으로는 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작은 겨자씨에서도 희망을 보는 사람, 봄에 씨를 뿌리면서도 가을에 결실을 맺으리라는 희망을 가진 사람, 시련과 고난의 바람이 불어도 다시 태양이 뜰 거라는 희망을 가진 사람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하십니다. 한걸음 한걸음 더딜지라도 인내하며 기다리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하십니다.

 

20201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겨자씨에 숨겨진 하느님 나라를 보셨다면 인내로 기다리며 기쁨으로 열매 맺는 2020년이 되면 좋겠습니다. 황금 알을 낳는 거위를 보셨다면 거위의 배를 가르기보다는 거위에게 먹이를 주고 잘 키우는 2020년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제 겨우 한 달이 지났을 뿐입니다


휴식은 천국에서! 제게는 쉴 시간이 없습니다. 시간이 있다면 아이들을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양승국신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면 생기기 시작하는 것이 ‘자기 증여성’입니다. 선물뿐만이 아닙니다. 마음, 시간, 더 나아가서 삶 전체, 목숨까지도 증여하는 현상이 사랑에서 시작됩니다.

 

 이런 자기 증여의 사랑은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기증여성의 강도가 얼마나 강했으면 ‘헤프신’하느님이라는 표현까지 사용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흘러넘치도록 아무리 주고 또 주어도 당신 성에 차지 않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주신 다음, 마지막에는 당신 생명까지도 우리에게 증여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자기증여성은 성인성녀(聖人聖女)들의 생애 안에 잘 드러나고 있는데, 돈보스코(1815~1888)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가난한 청소년들을 향한 그의 자기 증여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돈보스코는 한 청소년의 영혼을 구하는 일이라면 악마에게도 절할 용의가 있다고까지 말했습니다. 또 다른 청소년에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느날 내게 단 한조각 빵만이 남게 된다 할지라도, 나는 그것을 너와 나눌것이란다.”

 

 어느날 청소년들을 향한 자기증여성으로 활활 불타오르던 날, 그는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나는 청소년들을 위해 공부하고, 청소년들을 위해 일하며, 청소년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사랑은 어떠한가요? 돈보스코의 후예로서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남긴 그 위대한 자기증여적 사랑, 다시 말해서 댓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 조건없는 사랑, 차별없는 공평한 사랑, 목숨까지 바치는 사랑을 또 다시 선택해야겠습니다.

 

 1850년 돈보스코가 서른다섯 살이 되던 해, 위대한 오라토리오를 시작하던 무렵의 작은 에피소드는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비바람이 치던 어느날 밤, 돈보스코와 어머니 맘마 마르가리타가 일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어머니께서 문을 열었더니 온 몸이 비에 흠뻑 젖은 작은 꼬마 하나가 겁에 질려 서 있었습니다. 아이는 이렇게 애원했습니다.

 

 “배가 고파요. 좀 들어가게 해 주세요. 네?”

 

 모락모락 김이 나는 뜨거운 스프를 게걸스럽게 흡입하면서 아이가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최근에 엄마가 세상을 떠났고, 땅은 빚쟁이들에게 넘어갔고, 지금 자신은 빗방울처럼 혼자라고 했습니다. 돈보스코가 어머니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데리고 있지요.”

 

 “어디다 재우지?”

 

 돈보스코는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 자리가 없으면, 천장에 바구니라도 하나 매달아 자게 해야죠.”

 

 어머니는 살짝 당황해하셨지만 아이도 따라 웃었습니다. 그 아이가 돈보스코 오라토리오 첫번째 기숙생이었습니다.

 

 청소년들을 위한 돈보스코의 헌신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하루 온종일 얼마나 열심히 사목에 헌신했던지, 저녁이 되면 옷을 그대로 입은 채 침대 곁에 쭈그리고 앉아 잠이 든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평생에 걸쳐 돈보스코는 하루 다섯시간만 잠을 잤으며 매주 한번을 밤을 꼬박 지새웠습니다. 심야 축구 중계나 드라마 때문에 잠을 못잔 것이 아니라, 사목적 열정 때문이었습니다.

 

 온 종일 아이들 사이에 뛰어다니던 돈보스코는 조용한 밤이 되면 은인들에게 경제적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셀수도 없이 썼습니다. 기도를 청하는 이들에게는 위로와 격려의 편지를 썼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수학, 문학, 성경, 교회사 책을 집필했습니다.

 

 돈보스코는 지칠 줄 모르는 고해신부였습니다. 인기 있는 설교자였습니다. 피정 강론 초대를 거절한 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연세 드셔서는 과로 탓인지 거의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 되었습니다. 보다 못한 비오 9세 교황님으로부터 쉬라는 권고를 받았지만, 돈보스코는 늘 이렇게 말했습니다.

 

 “휴식은 천국에서! 제게는 쉴 시간이 없습니다. 시간이 있다면 아이들을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폴 애로니카 신부 SDB, ‘하느님이 보내신 사람 성 요한 보스코, 돈보스코미디어 참조)


결코 작지 않다

-반영억신부-

 

한 유치원 원장님이 아이들에게 꽃씨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제일 예쁜 꽃을 피워온 아이에게는 멋진 선물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아이들은 서로 내가 제일 예쁜 꽃을 피워야지!’하며 신이 났습니다. 그리고 몇 달 후 아이들은 꽃이 활짝 핀 화분을 들고 왔습니다. 그러나 원장님의 표정은 이상하게도 밝지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아이가 빈 화분을 들고 울먹이며 말했습니다.“저는 게을러서 꽃을 못 피웠어요!”원장님은 그제서 환하게 웃으시며 그 아이에게 멋진 선물을 주었습니다. 나누어준 씨앗은 싹이 나지 않는 가짜였던 것입니다.

    

 정말 싹을 틔워야 할 것은 우리의 진실한 마음 입니다. 사실, 씨앗이 생명력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면 아무리 기다려도 싹은 트지 않습니다. 또한 씨앗 자체의 신비로운 힘을 믿지 않는다면 씨앗에서 싹이 트고 새싹이 돋아나도록 땅을 가꿀 이유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를 희망하면서도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씨앗이 땅에 묻혀 모든 것이 끝나고 정지된 것처럼 보일 때 땅 속에 있는 씨앗은 은밀하게 싹을 틔우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내가 행하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지금 당장 밝히 드러나지 않는다 해도 그것은 싹을 틔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좋든 나쁘든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를 가꾸어야 하겠습니다. 나의 수고와 땀, 희생 봉헌이 미약해 보일지라도 결코 작지 않음을 기뻐해야 합니다.


 겨자씨가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씨의 크기는 0.95-1.6밀리미터=보니까 아주 먼지 같아요!)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되듯이(마르 4,32) 우리의 정성도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저절로 자라나는 씨앗의 비유겨자씨의 비유하느님 나라의 시작은 비록 작고 보잘 것 없을지라도, 그 끝은 장대하리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실제로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무리는 작고 초라하게 시작되었지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을 포함하는 교회공동체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선을 행하고 진리 안에 자유로워야 하겠습니다. 겨자씨 한 알이 눈에 잘 띄지 않지만 무한한 가능성이 들어있듯이 우리의 사랑과 희생도 무한한 가능성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참으로사람은 하늘이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습니다”(요한3,27). “누가 먼저 무엇을 드렸기에 주님의 답례를 바라겠습니까? 모든 것은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말미암고 그분을 위하여 있습니다”(로마11,35-36).

 

불신이 가득한 이 세상에 빈 화분을 들고 눈물을 지을 수 있는 진실됨으로 하늘나라를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진실 됨이 있으면 바로 그 자리가 하느님의 나라요, 불신과 거짓으로 서로를 경계하면 그 곳이 지옥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쑥쑥 자라길 기도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마르 4,27) 

-이영근신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지만,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를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시적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는 결코 외부에서부터 이루어지는 변화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듣고 받아들여 안으로부터 오는 나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느님 나라가 우리 안에서 어떻게 건설되는 걸까?


오늘 <복음>은 이에 대한 해답을 가르쳐줍니다. 그것이 바로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겨자씨의 비유입니다. 하느님나라는 씨앗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땅에 씨를 뿌려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마르 4,27)


그렇습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 안에 뿌려진 씨앗(말씀)의 권능을 믿어야 합니다. 씨앗은 자신 안에 싹을 틔우고 잎으로 자라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열매를 잘 맺기 위해서는 우리의 도움과 보살핌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우리 안에 뿌려진 씨앗을 잘 가꾸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는 우리 안에 뿌려진 말씀의 씨앗이 잘 자라도록 응답하고 협조할 때라야 비로소 건설되는 나라인 까닭입니다. 곧 씨앗은 받아들이는 사람에게서만 성장하고 자라나고 꽃피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래서 교부들은 말합니다.

성경(말씀, 하늘나라)은 읽는 이(응답하는 이) 안에서 자란다(성장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놀랍고 신비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씨가 우리 안에 뿌려지면, 그것이 어떻게 우리를 변화시키고 또 어떻게 성장시키는지를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매 순간 하느님의 힘이 작용하여 구원이 이루어지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우리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이루시는 분은 말씀이신 것입니다. 곧 우리 안에 뿌려진 말씀의 씨앗에서 줄기가 나오고, 이삭이 나오고, 낟알이 맺히고, 하는 것은 말씀의 권능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르 4,31)


겨자씨는 비록 작은 씨앗이지만, 자라나서 큰 나무가 됩니다.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이게 됩니다. 마치 십자나무처럼, 모든 인류를 끌어안은 큰 나무가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십자나무에 인간이 거처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셨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비록 작은 겨자씨지만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썩기만 하면, 바로 이곳에서 모든 사람들이 와서 깃들일 수 있는 큰 나무로 자랄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이 씨앗을 정성껏 가꿀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저의 힘이 아니라 당신의 권능으로 싹을 틔우고 자라게 하소서.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싹이 트고 자라나는

이 놀라운 신비에 순응하게 하소서.

가난하고 소외받고 외로운 이들이 찾아와 쉴 수 있는

큰 나무로 저희를 축복하소서.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르 4,31)


주님!

당신은 겨자씨처럼 작은 자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사랑하는 이 위에 군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낮추어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방법이고 사랑의 길인 까닭입니다.

형제들 앞에 작아지게 하소서!

십자나무에 인류의 거처를 마련하듯, 형제들의 거처가 되게 하소서! 아멘.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송영진신부-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마르 4,26-29).”

여기서 ‘어떤 사람’은 글자 그대로 어떤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라는 말씀은,
식물의 성장 과정을 인간들은 모른다는 뜻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인간의 힘이 아닌, 다른 힘이 작용한다는 뜻입니다.
그 ‘다른 힘’은 ‘하느님의 힘’입니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라는 말씀은,
“인간들이 보기에는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하느님께서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광합성 작용이니 뭐니 하면서,
또는 과학 이론을 끄집어내서 반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는 식물학 이론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건설 과정을 설명하기 위한 비유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건설과 완성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인간은 그 일의 보조자, 또는 협력자입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사도 2,47).” 라는 말이 나옵니다.
사도들과 신자들도 선교활동을 열심히 했지만, 신앙인의 수가 늘어난 것은
인간의 업적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신 일’, 즉 주님의 업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선교활동의 성과에 대해서 인간들은 ‘내가 한 일이다.’ 라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
(그 착각에서 교만죄가 생깁니다.)

하느님 나라의 성장 과정에는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는,
또는 인간이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운 어떤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섭리’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한 일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예가 ‘파스카의 신비’입니다.
파스카의 신비, 즉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 사건은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연속으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특히 예수님의 수난 때에 일어난 일들은 대부분 인간의 눈으로 볼 때에는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을 방해하거나 막는 일들로만 보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그 사건이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으로 마무리되었고,
성령 강림으로 이어졌음을 알고 있지만,
당시의 사도들과 신자들에게는 믿음 없이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들이었습니다.)

파스카의 신비는 각 개인의 신앙생활에도 있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여러 가지 고난과 시련을 겪을 때가 있고,
많은 경우에 그 고난과 시련들은 신앙생활을 방해하거나 막는 일들입니다.
(그래서 그 일들을 극복하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중단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잘 인내하여 그 고난과 시련들을 극복하면,
우리도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왜 꼭 그런 고난과 시련을 겪어야만 하는가? 고통 없이 바로 부활의 영광으로
직행할 수는 없는가?” 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정답은 “모른다.”입니다.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예수님께 직접 물어보면
그때에는 대답해 주실 것입니다.)
아직은 모르기 때문에
각 개인의 고난과 시련들도 ‘파스카의 신비’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은 분명히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께서 도와주시는 여정입니다.
그 도움의 힘을 의식할 때도 있고, 의식하지 못하고 지나칠 때도 있지만,
의식을 하든지 안 하든지 간에, 깨닫든지 깨닫지 못하든지 간에
우리는 언제나 항상 주님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는 바로 그것을 깨우쳐 주시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신앙인이라면 그것을 믿어야 하고, 그래서 힘들어도 포기하지 말아야 하고,
끝까지 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마르 4,30-32).”

앞에서 말한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 비유이고,
‘겨자씨의 비유’는 결과에 초점을 맞춘 비유입니다.
그런데 겨자씨를 뿌리면 겨자 나무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겨자씨가 아무리 작다고 해도 결과가 바뀌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아주 작은 씨가 큰 나무로 자라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겨자씨의 비유’는 먼지처럼 아주 작은 씨앗 안에
큰 나무로 자랄 수 있는 생명력이 들어 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춰서 생각해야 할 비유입니다.
그 생명력은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성능 좋은 현미경을 사용하면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도 다 볼 수 있지만,
‘생명력’ 자체를 볼 수 있는 현미경은 없습니다.)

우리는 창조주이시며 만물의 주님이신 하느님 앞에서 겨자씨보다 작은 존재이고,
하느님의 은총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보잘것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우리 자신도 모르는, 놀라운 생명력이 숨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오로 사도입니다(1코린 15,8-9).
바오로 사도는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1코린 15,10).” 라고 말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남긴 놀라운 업적들은, “바오로 사도 안에 들어 있는
생명력을 사용해서 주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점은,
바오로 사도가 ‘회심’한 후에 정말로 열정적으로 일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열정을 본받아야 합니다.
누구나 다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력을 똑같이 가지고 있는데,
바오로 사도처럼 열정적으로 일하는 사람만
주님의 은총으로, 주님과 함께 놀라운 성과를 만들어 낼 수 있고,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합니다.  


-조욱현신부-


복음: 마르 4,26-34: 씨앗은 싹이 트고 자라나지만 사람은 모른다.

우리가 우리 마음에 좋은 뜻을 품는다면, 그것은 땅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 씨가 어떻게 싹이 터서 자라는지 자신은 알지 못한다. 즉 자기 안에 심어져 자라나고 있는 덕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아직 헤아릴 길이 없다. 땅이 은총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열매를 맺듯이, 인간도 그렇게 스스로 선행의 열매를 맺는다.

 

땅이 처음에는 싹을 트게 하고 줄기를 내고 그 다음에는 이삭을, 또 그 다음에는 이삭에 가득 달린 낟알을 낸다. 아직 약한 싹이지만 좋은 시작이다. 우리 마음에 심겨진 덕이 선행으로 발전할 때, 줄기에서 이삭이 패는 것이다. 덕에서 훌륭하고 완전한 행동이 나올 정도로 진보하면 마침내 이삭에 낟알이 가득 달리는 것이다. 그 낟알들이 영글면 곧 낫을 댄다. 추수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31) 겨자씨는 아주 평범하고 하찮은 씨앗이다. 빻으면 그 힘을 드러낸다. 믿음도 처음에는 단순하지만, 역경으로 으깨어지면 그 힘을 발휘하여, 믿음에 관해 읽거나 듣는 사람들을 달콤한 향기로 가득 채운다. 하느님의 말씀은 분노의 쓸개즙을 가라앉히고, 교만의 불꽃을 억누른다. 말씀의 씨앗에서는 커다란 나무와 같이 자라났다. 이 나무는 바로 세상 곳곳에 세워진 교회이다. 이 교회에 하늘이 새들, 곧 하느님의 천사들과 사람들이 그 가지에 깃든다.

 

주님은 겨자씨였다. 그분께서 상처 입지 않은 겨자씨였을 때, 백성들은 그분을 겨자씨로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들이 그분을 아직 눈여겨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분은 당신이 누구신지를 보여주시려고 잘게 부서지기를 원하셨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나라이다. 겨자씨처럼 동정녀의 태라는 정원에 뿌려지신 그분은 십자가 나무로 자라셨고, 그 가지들은 온 세상으로 뻗어 나갔다.

 

수난의 절구에 빻아진 그분의 열매는 그분과 관계를 맺는 살아있는 모든 피조물이 맛을 지니고 보존될 수 있도록 넉넉한 양념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당신이 빻아짐으로써 당신 안에서 우리 모두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모든 것이 되셨다. 그분은 당신 정원 즉 교회에 씨를 뿌리셨다. 교회는 온 세상으로 퍼져가는 정원이다. 복음의 쟁기로 갈고, 가르침과 규율의 말뚝으로 울타리를 치고, 사도들의 노고로 온갖 해로운 잡초를 제거한 정원이다.

 

이 정원에 향기롭고 사랑스러운 영원한 꽃들인 동정녀들의 백합과 순교자들의 장미꽃이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모든 이의 푸른 풀밭과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의 부드러운 초목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아름다운 정원이다.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당신 정원에 뿌리신 겨자씨이다. 그분은 성조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씨를 뿌리셨고, 예언자들은 싹을 틔웠고, 사도들은 크게 자라게 하였다. 그 씨앗은 교회 안에서는 큰 나무가 되어, 선물 즉 은총을 실은 수많은 가지를 뻗었다. 우리에게 있는 씨는?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한다.(마르 4, 28)

-한상우신부-

심오한 자연의
이치입니다.

자연스레
자라고
자연스레
열매 맺는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하느님과
분리될 수 없는
모든 생명의
질서입니다.

하느님의
섭리안에서
겸손을 배웁니다.

겸손은 땀흘림의
결실로 이어집니다.

추수가 끝난
들판에서 우리의
본모습을 보게됩니다.

살아가는 법이
하느님의 손길에
맡겨드리는
기쁜 기도와
보람찬 노동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힘겨움을
위로하여 주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루만져주십니다.

저절로 자라게
하시는 그 사랑에
참여하는
하느님 자녀들이
우리의 본모습입니다.

역행하고 거부하는
우리들이 아닌
하느님의 순리에
자연스레 응답하는
겸손의 자녀들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노력하는 사람이며
노력하는 사람은
자연스레 이 모든 걸
하느님께 맡기는
사람입니다.

저절로 열매 맺게
하시는 하느님께
맡겨드립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두 독서 말씀은 그 분위기가 상당히 대조적입니다. 복음은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희망적으로 드러내는 반면, 제1독서는 하느님이 아끼시는 이의 엄청난 죄악을 여과 없이 밝히고 있습니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마르 4,28).
예수님은 먼저 하느님 나라를 저절로 자라는 씨앗에 비유하십니다. 사람이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김을 매어 주기는 하지만 그건 씨앗이 자랄 환경을 조성하는 것일 뿐, 사람은 씨앗이 열매가 되는 본질적 힘이 아닙니다.

"사람은 어떻게 그리 되는지 모른다"(마르 4,27).
그래서 예수님은 모른다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인간의 사고와 경험을 뛰어넘습니다. 인간은 하느님 나라가 형성되는 원동력에 대해 무지하지만 그것이 하느님 나라가 열매 맺는데 장애가 되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르 4,31).
예수님은 두 번째 비유로 겨자씨를 드시면서, 씨앗의 미소한 크기와 성장한 후의 풍성함을 대비하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이 지상에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는 세상 변두리에서 초라하고 보잘것없이 시작되었지만, 온 세상을 품게 되리라는 전망이 담겨 있습니다.

제1독서는 다윗 임금의 치명적인 죄악을 다룹니다.

"해가 바뀌어 임금들이 출전하는 때가 되자, 다윗은 요압과 자기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을 내보냈다 ... 그때 다윗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다"(2사무 11,1).
이 배경 설명은 다윗의 일탈을 복선처럼 준비합니다. 임금들이 전쟁에 출전하는 때에 굳이 다른 이들을 내보내고 임금이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다는 자체가 납득하기 어려운 불안감을 일으킵니다.

"집으로 내려가지 않았다"(2사무 11,9.13).
밧 세바의 남편인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잘 드러나는 말씀입니다. 그는 충직하고 절제력 있고 전우들에 대한 의리도 출중한 의인이었기에 다윗의 잔꾀가 통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우리야가 이런 훌륭한 성정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되니 이 얼마나 불합리한 비극인지요!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도 죽었다"(2사무 11,17).
결국 다윗이 뜻을 이룬 것처럼 보입니다. 이대로라면 세간의 눈에 다윗은 남편 있는 여인을 유린한 간통 범죄자가 아니라, 유복자를 임신한 과부를 맞아들인 성군이 될 테니까요.

성경 저자가 각색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폭로하는 역사를 읽다 보면 인생사 참 모를 일이다 싶습니다. 하느님의 총애를 받은 다윗이 간음에 살인교사까지 저지르면서 제 욕망을 채우는 모습이 낯설기도 합니다. 이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 통합되지 못하고 오히려 극악무도한 폭력으로 변질된 전형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이런 인간의 악행에도 하느님 나라의 형성이 중단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다윗이 악행으로 취한 밧 세바를 통해 이스라엘 왕조가 그 전성기를 맞게 될 것을 압니다. 마태 복음서 저자도 예수님의 족보에서 솔로몬의 어머니를 굳이 "우리야의 아내"(마태 1,6)라 밝히는 걸 보면, 인간의 역사가 죄악과 은총의 공존 속에 흘러가고 있음이 보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솔직히 "모른다"고 해야 옳습니다. 씨앗이 열매가 되고, 미소한 것이 거대하게 되는 자연의 이치를 모르는 것 이상으로, 하느님 나라의 형성에 대해서도 우리는 모릅니다. 우리의 이기적이고 편협한 이해 범주 안에서 논리와 계산대로 되어간다면 그건 하느님 나라가 아닙니다.

이천 년 전 십자가에 달려 죽어간, 실패한 가난뱅이 몽상가에게서 오늘날 세상을 품는 자비와 사랑의 연대를 관상할 수 있었던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었을까요!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무지를 틈타 그렇게 자라서 열매 맺고 확장되어 온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의 약함과 죄악에 질식되지 않고 지금도 자라고 있습니다. 바벨탑처럼 쌓여가는 인간의 오만하고 불의한 폭력도 하느님 나라를 좌절시키지 못합니다. 세상 곳곳에서 진실한 믿음과 소박한 사랑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가 그 증거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비록 하느님의 나라가 어떻게 되어가는지 무지하더라도, 이미 하느님 나라의 일부입니다. 우리가 모여 하느님 나라입니다.

일은 커도 작게, 죄는 작아도 크게  
-김찬선신부-


"우리야를 전투가 가장 심한 곳 정면에 배치했다가,
그만 남겨 두고 후퇴하여 그가 칼에 맞아 죽게 하여라."

며칠 전에 말씀드렸듯이 우리 인간은 어려울 때보다는
일이 잘 풀릴 때나 편안할 때 죄를 짓거나 실수를 크게 합니다.
그것은 어려울 때는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거기에 온 힘을 쏟거나
신앙인의 경우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기에 다른 데 눈이 가지 않는데
성공을 하거나 편안할 때는 다른 욕심을 부리거나
눌려있던 욕망이 일어나 다른 것에 눈이 가기 마련이지요.

오늘 다윗도 모든 것이 편안해지니 다른 데 눈이 갔고 죄를 짓습니다.
문제는 그 죄로 인해 다른 죄가 불거지고,
작은 죄가 더 큰 죄로 커진다는 것입니다.
죄는 이렇게 많아지고 커지는 법입니다.
애초에 싹을 자르지 않으면 말입니다.

어제는 하느님께서 해주신 것, 곧 은총을 깨달아야 함에 대해서 봤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우리의 죄에 대해 깨달아야 함을 보려고 하는데
죄를 깨닫는 것이 바로 싹을 자르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의 차이를 봐야겠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는 죄를 지으면서 모르고 죄를 짓기도 하지만
죄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죄가 얼마나 큰 죄인지 또는 그 죄의
결과가 뭔지 모르고 죄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의 많은 죄들은 그래서 짓게 되는 것들이고
큰 죄보다는 작은 죄들이 그래서 저질러집니다.
큰 죄를 지을 때는 함부로 짓지 못하고 주저하잖아요?

지을 것인가 말 것인가 한 번 생각해보는 거지요.
그런데 작은 죄는 '이까짓 것 한번 쯤 어때?'하지요.
그러나 그 한번이 반복이 되면 큰 죄도 작은 죄가 되고 가책은
무뎌지면서 짓는 죄는 점점 커지고 바늘도둑이 소도둑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을 아는 어른들은 애들이 작은 죄를 범했을 때 크게 혼내지요.
지난 명절에 인사 온 젊은 부부가 아이들이 문방구에서 흔히 하는 잘못을
자기 아이가 저질렀을 때 아이가 부들부들 떨 정도로 혼냈다고
아이들 키우는 얘기를 해주었는데 바로 그런 거지요.

그런데 성왕이라고 하는 다윗이 이런 경우에 해당됩니다.
간음을 큰 죄라고 생각지 못했고 살인죄까지 저지릅니다.
가책은 없고 다른 사람만 모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죄를 아는 것이고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죄라는 것도 알고 죄가 나쁘다는 것도 알지만
문제의식이 없고 고치려는 결심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반면에 깨달음은 그저 죄를 인지하는 정도가 아니라
깨달음이 클수록 문제의식을 크게 가지고 반드시 고칩니다.

저의 경우 제가 알콜 중독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것을 숨기지 않고 얘기하고
이 말씀 나누기에서도 수차례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알콜 중독이라고 얘기하면 사람들은 제 말을 믿지 않거나
그런 정도의 알콜 중독은 문제없다고 저를 용서해주십니다.
양이 그리 많지도 않고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저도 그래서 끊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알콜 중독의 문제는 양이나 폐해의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의존성의 문제이고, 그것을 끊지 못하는 것 자체가 문제잖아요?

그러므로 일은 골리앗처럼 커도 작은 일로 만들어 해결해야 하지만
죄는 작아도 크게 생각하고 애초에 끊어야 함을 우리는 
계속해서 읽고 있는 사무엘기의 다윗에게서 배워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6년 1월 29일 연중 제3주간 금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마르4,2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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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나라는 우리 안에 뿌려진 말씀의 씨앗이 잘 자라도록 응답하고 협조할 때라야 비로소 건설되는 나라인 까닭입니다곧 씨앗은 받아들이는 사람에게서만 성장하고 자라나고 꽃피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그래서 교부들은 말합니다.

성경(말씀하늘나라)은 읽는 이(응답하는 이) 안에서 자란다(성장한다).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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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라는 말씀은,
식물의 성장 과정을 인간들은 모른다는 뜻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인간의 힘이 아닌, 다른 힘이 작용한다는 뜻입니다.
그 ‘다른 힘’은 ‘하느님의 힘’입니다.


‘겨자씨의 비유’는 먼지처럼 아주 작은 씨앗 안에
큰 나무로 자랄 수 있는 생명력이 들어 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춰서 생각해야 할 비유입니다.
그 생명력은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창조주이시며 만물의 주님이신 하느님 앞에서 겨자씨보다 작은 존재이고,
하느님의 은총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보잘것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우리 자신도 모르는, 놀라운 생명력이 숨어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오로 사도입니다(1코린 15,8-9).
바오로 사도는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1코린 15,10).” 라고 말합니다.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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